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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원목사 (지구촌교회) 217
최근에 미국에 한 그 기독교 가정 잡지에 실린 글을 읽었습니다. 아버지와 딸이 서로 주고받은 편지가 기록되어 있더라구요. 에~아버지는 아마 알코올 중독자 였든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딸에게 자기의 그 라이프스타일(Life style)을, 삶을 변명하는 편지를 썼고, 딸은 그기에 대해서 자기가 느낀 반응을 쓴 그런 편지였습니다.
간단히 내용이 이런 내용이에요. 아버지가 아~ 쓴 편지에는 ‘나는 내가 당연히 이렇게 살아서는 안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어쩌란 말이냐’ 영어로 아이 켄 헬핀(I can’t helping),이라는 단어를 썼는데 나도 어쩔 수가 없습니다. ‘나도 어쩔 수가 없단 말이다. 마약은 나에게 기쁨을, 즐거움을 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이란다 이 마약 마저 없다면 내 인생에는 아무런 위로가 없구나’ 이것이 아버지가 쓴 편지구요. 이런 아버지에게 딸은 이런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 아빠는 무책임하십니다. 아빠는 자신을 포기하고 살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나 아빠는 자신만이 아니라 그렇게 해서 딸인 저의 인생도 간접적으로 파괴하고 계십니다. 아빠는 아빠의 눈앞에서 나타나고 있는 이 파괴를 보지 못하고 계실 따름입니다.
저는 이 기사를, 아버지와 딸의 편지를 읽으면서 이것이 비단, 이런 어떤 나라에 살고있는 특이한 아버지만의 문제는 아닐 거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누군가 오늘 우리가 살고있는 이 시대 이 현대를 가리켜서 3 무(無)의 시대다 그랬어요. 3가지가 없는 시대다.
첫째로 무책임한 세대, 둘째로는 무관심한 세대, 무관심한 세대. 세번째는 무감각한 세대. 세 가지 무(無)에요. 무책임, 무관심, 무감각한 세대다, 이렇게 표현하신 분이 있습니다. 비단 현대인들이 뭐 마약에 중독된 사람은 소수라고 할찌라도 마약 중독 뿐만 아니라 인간의 어떤 포커스를 초점을, 아~인생의 진정한 목적과 의미를 빼앗아 가는 그 중독들에 의해서 붙잡혀있는 현대인들의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욕망에 중독되고 어떤 사람은 허영에 중독되고 어떤 사람은 쾌락에 중독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일에 중독됩니다. 그래 사람들은 일의 중독에만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아요. 그러나 워크 홀딩(work holding)’이란 일 중독도 매우 심각한 것입니다. 아~조금 아까 예배시간에 9시 반 예배에 게리 콜린스 박사께서 오셔서 이 비지니스, 바쁘다는 것이 얼마나 우리의 삶에 초점과 목적을 깨뜨릴 수가 있는 것인가에 관해서 아주 명 설교를 하셨습니다. 한 번 들어보시면 좋을 것입니다. 저는 제일 불쌍한 사람이 이런 사람이라고 생각을 해요. 죽어라고 일하다가 죽는 사람. 하하~ 일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일에 빠져버리다 보면 인생에 어떤 포커스와 목적을, 의미를 상실하는 경우들이 종종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 사람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진지하게 인생의 목적이나 의미를 탐구하는 일을 거추장스럽게 생각하는 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찰라의 만족, 순간의 쾌락, 그 환락에 매달리면서 하루 하루를 때우는 그런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벌써 가을입니다. 가을 바람이 벌써 차가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한해를 마무리 짖는 시점 앞에 서 있습니다. 저는 가을이 오면은 늘 제 마음속에 되뇌어지는 제가 좋아하는 고(姑) 시인 김현성 선생의 시가 생각이 납니다.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은 열매를 거두는 결실의 계절입니다. 그런데 이 비옥한 시간을 가꿀 수 있는, 내가 거두어 드릴 열매가 없다면, 그건 왜 그럴까요? 무엇이 내 인생을 이렇게 황폐하게 만들었을까요?
오늘 질문을 묻고 있을 어떤 사람들을 위해서 저는 오늘의 본문 누가복음 13장의 본문을 같이 생각하자고, 하려고 합니다. 이 누가복음 13장을 흔히 우리는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의 비유, 이렇게 일컬어 말합니다.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의 비유. 이렇게 시작되죠? 오늘 6절에 보면 “이에 비유로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이 있더니 와서 그 열매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한지라” 열매를 얻지 못한 무화과나무의 비유입니다. 그러나 이 비유를 통해서 역설적으로 우리가 물어야 할 가장 중요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열매를 맺을 수가 있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어떻게 열매를 맺을 수가 있는가 하는 질문을 하기 전에 앞서서 다루어야 할 문제가 바로 이것입니다. 왜 내 인생에는 열매가 없는가? 내 인생에는 왜 열매가 없을까? 우리가 먼저 이 대답을 찾기 위해서 다시 본문으로 돌아오겠습니다. 이 열매 없었든 무화과나무,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그 첫째 이유는 자신의 책임을 망각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자신의 책임을 망각하고 살고있었다. 여러분, 무화과나무의 책임이 뭡니까? 무화과나무의 책임은 열매 맺는 게 책임입니다. 그것이 무화과나무의 존재 이유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이 무화과나무라는 것은 장식용으로 쓰여지지 않았습니다. 적어도 예수님 당시에는 그랬습니다. 요즘은 뭐 꽃꽂이가 발달해 가지고 별거 가지고 다 그것을 어떤 데코레이션에, 아름다움을 위해서 사용하고 있지마는 적어도 성경이 쓰여진 예수님 당시만 해도 무화과나무는 절대로 장식용은 아니였습니다. 전시회 목적으로 Show up을 목적으로 해서 이것은 전혀 쓰여질 수 없는 나무였습니다. 재목용도 아니에요 땔감용으로도 쓰여질 수가 없습니다. 무화과나무의 유일한 존재 이유, 목적 그것은 열매를 위해서 존재한다
인생은 왜 존재할까요? 저는 무화과나무의 존재이유와 인생의 존재이유가 같다고 생각합니다. 열매를 위해서 존재합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선택하신 이유, 그들로 하여금 자신을 따라오게 하신 이유, 그들을 품으시고 가르치시고 3년 동안 삶을 같이하신 이유,
요한복음 15장을 가리켜서 우리는 13장부터 사실은 18장까지를 예수님이 십자가로 가시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교훈을 가르치신 소위 다락방 강화라고 불리워지는 한 토막입니다. 그 중에 요한복음 15장이 끼여있어요. 십자가로 가시기 직전의 교훈이에요. 우리가 흔히 포도나무 비유의 장, 이렇게 부르죠? ‘나는 포도나무요’ 뭐예요? ‘너희는 가지니’ 이 가지가 포도나무에서 떨어지면 열매맺을 수 없다 내가 너희를 택한 것은,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야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려함이라’ 예수님은 인생의 목적을 열매라고 말씀하십니다. 열매, 특별히 그리스도인들이 존재하는 목적, 예수그리스도의 제자로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가 십자가의 복음을 깨닫고 이 땅에서 살고있는 우리의 존재의 이유, 생존의 가장 중요한 목적이 어디에 있느냐? 그것은 열매를 위해서다. 무슨 열매일까요?
성경에 열매라는 이 단어를 아~가르칠 때는 항상 두 가지 측면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하나는 뭐냐하면 생명의 열매, 재생산의 열매입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드리고 하나님의 생명을 예수 안에 있었든 영원한 생명을 가졌다면 나를 통해서 또 다른 어떤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 있는가? 쉽게 말하면 전도의 열매, 전도열매, 우리가 예수님의 마지막 교훈, 그것을 가리켜서 지상명령이라고 부르죠? 소위 Great Commission 마지막 명령 가운데 보시면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내 제자를 삼으라 제자들에게 무얼 부탁했어요? 제자들에게 ‘제자 삼으라’ 내가 예수 믿고 구원받았다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었다면, 예수 믿는 것이 이렇게 좋고 아름답고 풍성하고 내 삶의 목적과 의미와 초점을 줄 수가 있었다면, 그러면 이 생명을 어떻게 나 혼자 간직할 수가 있어요? 사람들에게 전도할 수밖에 없죠. 우리가 신앙생활의 열매, 인생의 열매인데 내가 교회당 드나든 회수가 얼마가 되었느냐 이것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네, 당신을 통해서 예수 믿게 된 사람들이 몇 사람이나 될까요? 이게 전도의 열매요. 생명의 열매예요.
자, 한해가 저물어 가는데 금년 한해동안에 여러분을 통해서 예수 믿게 된 사람이 어디 있어요? 이름을 델 수가 있습니까? 누구입니까? 그러고도 우리가 예수를 생명이라고 예수를 구원이라고 정말 예수가 소망이라고 증거 할 수가 있을까요? 예수가 구원이시고 생명이시고 소망이시고, 내 삶을 바꾸었고 나에게 저 영원한 삶을 보증하신 주님이라면, 이렇게 좋은 주님이라면 어떻게 그 주님을 침묵할 수가 있느냐 말이에요. 전도 열매가 있느냐? 실제로 전도의 열매가 있느냐 말이죠.
뭐 교회에 얼마나 많이 나왔느냐? 성경공부를 얼마나 많이 했느냐? 우리교회가 성경공부를 강조합니다마는 성경공부 자체도 목적이 아닙니다. 네, 제가 늘 아~여러분에게 드리는 그 비유중의 이야기 가운데 하나가 이런 것이죠? 여러분 가운데 어떤 친구를 만나서 자랑을 하면서 이런 자랑을 한다고 가정을 해 보십시다. ‘나는 오늘 여덟 끼나 식사를 했습니다.’ 그게 자랑이에요? 왜 여덟 끼를 먹어요?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여덟 끼를 먹는 거예요? 먹는 것을 위해서 먹는 겁니까? 먹는 것은 내가 에너지를 취하고 그거 가지고 제대로 삶을 살기 위해서, 제대로 삶을 살기 위해서, 성경 공부한다,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에요. 어떤 사람은 더 고난도의 성경공부가 있느냐? 뭐 이런 것만 또 찾는 사람도 있단 말이죠. 뭐 그래서 어쩌자는 거예요? 말씀을 받아 가지고 어떻게 사느냐? 그런데 그 삶 속에서 가장 중요하게 요구하는 것이 뭔지 아세요? 전도의 열매예요. 당신 통해서 예수 믿고 구원받고 새로워진 인생이 어디에 있느냐 말이에요. 얼마나 있느냐 말이에요. 전도의 열매예요.
또 하나, 성경에 열매라는 단어를 다룰 때 늘 일상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뭐냐하면 인격의 열매입니다. 인격의 열매, 자, 우리가 잘 아는 성령의 열매는, 뭡니까?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참음과 자비와 양성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 네, 우리가 흔히 9가지열매다 이렇게 말하죠. 9가지 열매. 그런데 성령의 열매는, 하고 말할 때 갈라디아서 5장 22절에 그 열매란 단어는 복수가 아닙니다. 단수예요. 성령의 한 열매는, 하고 9가지가 나와요. 그런데 한 열매 속에 있는 9가지의 특성 이렇게 보는 것이 좋아요. 그러니까 그 한 열매는 한 인격을 지향하는 것입니다. 그 한 인격 속에 9가지의 특성이 들어있어야 한다. 성령의 열매는 한 인격을 지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한 인격은 누구의 인격일까요? 예수님의 인격이에요. 사랑으로 가득 찼든 분,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든 분, 화평, 진정한 평안으로 그의 내면의 인격이 견고했든 그분,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그리고 정말 오래 참을 줄 알았든 그분, 이러한 것들을 완벽하게 갖춘 대표적인 모델이 될 수 있는 인격이 바로 예수님이죠. 그러니까 열매를 맺느냐는 것은 내가 그것도 신앙생활의 연륜이 얼마나 되느냐 이것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얼마나 그 예수님을 닮아올 수가 있었느냐?
금년한해를 결산해 가야할 이런 시점 앞에 서서 우리는 이 질문을 물어야 합니다. 내가 금년한해 동안 예수님을 얼마나 더 닮았을까? 작년하고 비교해서,
바울사도의 권면처럼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내가 얼만큼 영적으로 성숙했느냐 하는 것은 내 인격에 얼마나 변화가 있었느냐 이 말 입니다. 그게 열매예요, 열매.
자, 금년 한해를 또 마무리 해야할 이 중요한 어떤 계절의 에~시간 앞에 서서, 여러분과 제가 자기 자신에게 진지하게 물어야할 질문이 바로 이 열매입니다. 이 본문에 나타난 이 무화과나무를 보면 무화과나무는 어디에 심겨 졌습니까? 포도원에, “이에 비유로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었더니” 이스라엘 땅, 이 팔레스타인 땅은 사막의 한 부분이죠. 그렇게 좋은 땅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 가보면 포도 재배를 참 많이 합니다. 무화과나무도 많이 나구요 무화과열매 포도열매 이런 것들이 많이 생산되죠. 그런데 이 포도원은 사막지대이긴 하지마는 그래도 팔레스타인 땅 안에서 가장 비옥한 땅을 선택하여 포도원을 일구게 됩니다. 거기에 포도나무도 심고 또 무화과나무를 심습니다. 그러니까 이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는 좋은 포도원, 좋은 땅에 심겨진 것이에요. 이건 뭘 얘기하느냐 하면 그것은 특권입니다. 그래도 좋은 땅을 선택하여 거기에 심겨졌다. 그러면 좋은 땅에 심어졌으면 좋은 열매를 맺어야죠.
제가 왜 이 얘기를 하시는지 아십니까?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의 누리고 있었든 가장 놀라운 특권 중의 하나가 뭡니까? 그것은 선민이라는 특권이에요 나는 선택을 받았다. 우리는 선민이다. 나는 선택받은 백성이다 이스라엘 백성들뿐만이 아니죠. 신약적으로 말하면 그리스도인들을 향해서 우리가 베드로전서에 보시면, 너희는 왕 같은 뭐예요? 제사장이다! 그가 택하신 족속이다. 그의 소유된 백성이다. 놀라운 특권이에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함을 입고 살아간다. 중요한 것은 그러나 이 선택은 분명히 특권인 것은 사실이지만 이 특권에는 항상 책임이 따른다는 사실이에요. 자, 좋은 땅을 선택하여 거기에 포도나무를 심고 또 거기에 무화과나무를 심었다면 거기서 제대로 된 열매를 좀 맺어야죠. 제대로 된 열매를, 그 열매가 뭐냐 말이예요 그 열매가, 자, 하나님이 나를 선택해 주셨다면 나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아주셨다, 이건 어마 어마한 특권인데, 놀라운 특권인데 그렇다면 이 특권에 합당하는 책임, 책임. 책임을 다하고 있느냐 말이에요. 열매를 맺는 이 책임을 다하고 있느냐? 때로 우리는 하루 하루를 때우면서 존재만 하고 있는 인생들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바빠서 그렇다구요?
우리 한국 사람들은 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명절을 지키는 방법을 배워야 되겠다는 생각을 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우리는 명절, 국경일, 공휴일 그러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생각이 어떤 생각입니까? 응? 논다! 우리는 그걸 먼저 생각하죠.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명절을 지키는 방법은 상당히 교육적입니다. 에듀케셔널해요. 아주 교육적이에요, 뭐 유월절이 되면은 뭐 쓴 나물도 먹구요. 나물 쓴 거 아이들이 안 좋아하거든요. 왜 이런 쓴 나물을 먹어요? 그러면, 우리 조상이 옛날유월절에 애굽 땅을 떠날 때 이런 쓴 나물을 먹었단다. 자식들에게 어떤 교훈을 가르치는 그 교육의 기회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또 명절을 지키는 특이한 방법 중에 하나가 대부분의 명절에, 뭐 일주일 내내 그런 것은 아니지만 명절의 어느 하루를 선택해서 금식을 합니다. 특별히 용 키퍼 같은 속죄 죄를 지킬 때 금식을 해요. 금식, 왜 금식을 할까요? 이것은 생활의 리듬을 깨트리면서 우리에게 좀 생각할 수 있는 찬스와 기도할 수 있는 기회를 갖기 위해서예요. 1년 365날 하루세끼씩 어김없이 찾아 잡수시는 신사 숙녀 여러분, 식사를 안 하면 갑자기 우리가 늘 먹든 식사를 안 하면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우리 가정 주부들은 우선 시간이 남아요. 오, 할 일이 없어요. 가끔 금식집회, 이런 것을 이따금씩 해본 경험이 있는데 이 금식집회를 하다보면 정말 할 일이 없어요. 식당 갈 일도 없죠, 화장실 갈 일도 없죠 하하~ 할 일이 없어요. 그런데 그 시간, 짤막한 시간이지만 그 시간에 우리가 좀 앉아서 생각을 할 수가 있는 여유가 있어요. 생각 좀 해보란 말이죠. 그래 바쁘게 달리지만 말고 내 인생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앞으로 내가 얼마나 살아야 하는지 좀 생각 좀 해 보잔 말입니다.
자, 왜 이 무화과나무가 열매를 맺지 못했어요? 자신의 존재 이유를, 자신의 책임을 잃어버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나는 왜 존재하느냐? 요즘 우리세대는 책임지지 못하는 사람들로 꽉 차 있는 것 같아요. 장가는 들어놓고, 시집은 가놓고, 한 가정의 아버지가 되고 어머니가 되고 나서도 그 가정을 책임질줄 모르는 아버지들 어머니들, 얼마나 많아요? 서약하고도 하나님 앞에 서약하고도, 아내를 향한, 남편을 향한, 최소한의 윤리적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있는 이세대의 무책임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아요? 공동체 생활할 때도 교회생활 할 때도 뭐 제직이 되어 놓고도 아무런 책임도 감당하지 않아요.
아마 우리교회 같은 사이즈는 교회를 분류할 때 아마 mega church에 해당하는, 대교회에 해당하는, 한국교회 아주 적은 퍼센티 안에, 통계 안에 들어갈 것입니다. 저는 종종 이런 생각을 합니다. 적지 않은 사이즈의 교회를 목양하는 목사로서 내가 어떤 느낌을 갖는가? 뭐 솔직히 말씀드리면 두 가지 필링이에요. 영어로 믹스드 필링이라는 단어가 있는데, 아주 복합적인 느낌이라고 그럴까요? 한편으로는 굉장히 좋고, 그래 제가 좋아하는 느낌은 특별히 이런 것입니다. 뭐 전도할 수 있는 찬스가 많으니까, 많은 사람 대상으로 말씀을 전할 수가 있고, 설교할 수가 있고, 또 그 가운데 정말 구원받고 변화되는 사람들을 보았을 때, 또 지난번 전도집회처럼 믿지 않는 사람들이 정말 복음을 받아드리고 구원받는 사람들이 더해간다 그런 면에서 큰 교회를 목양하는 것은 특권이고 기쁨이죠. 계속 예수 믿는 사람들이 늘어간다. 또 어제 그제 이틀동안 우리 사랑의 순례 세미나가 있었는데 모임이 있었는데 가정들이 변해요. 정말 눈물을 흘리면서 깨어졌든 가정들이 봉합되는 그 기쁨을 간증하는 사람들을 보았을 때, 피곤했지만 야, 참 보람이 있다, 굉장히 보람이 있다. 이런 목양의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또 한편 저 자신이 메가쳐치의 사이즈의 교회를 목양하면서 어떤 좌절감이 있습니다. 좌절감, 혹시 오늘 현대인들이 대 교회를 선호하는 중요한 이유중의 하나가 아~책임지지 않아도 좋으니까 대 교회에 참석하는 것은 아닐까? 많은 사람들 속에 썩여 있단 말이죠. 군중 속에 썩여 있어요. 누가 나를 의식할 필요가 없으니까 그냥 왔다가 조용히 사라져도 좋아요. 또 우리 교회는 뭐 헌금도 자유롭게 하니까 매미채도 안 돌아다니고, 중간에 저기 헌금함에 돈 넣느냐 안 넣느냐 눈을 부릅뜨고 쳐다보는 감시원도 없고, 뭐 헌금 안하고 그냥 가셔도 되고, 얼마나 자유로워요? 그러나 이것이 혹시 전혀 책임지지 못하는 교인들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 아니냐? 이러한 좌절감을 가질 때가 솔직히 있습니다. 자신의 책임을 망각하는 인생들, 그래서 내 인생 속에 아무런 열매를 거두지 못한 체 빈손으로 내 삶을 결산해야 하는 어느 날이 올 것은 혹시 아닌지요,
왜 이 무화과나무가 열매를 맺지 못했어요? 또 한가지 원인이 있습니다.
그것은 둘째로 자신의 상태를 망각하며 살고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상태를 망각하고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무관심입니다. 때로 저는 열매가 없다는 것에 관해서 이 시대를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고민이나 하는지, 아니 고민조차도 안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저는 이런 고민을 합니다. 하하~
이 본문에 보시면 아주 흥미 있는 말씀을 예수께서 하셨습니다. 7절, 한번 다같이 읽어보겠습니다. 7절 다같이 시작, “과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실과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 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느냐” 어찌해서 땅만 버리느냐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땅을 버린다, 이 무화과나무가 땅만 버리고있다 열매를 맺지 못하니까, 저는 의도적으로 무화과나무가 내가 디디고 서있는 이 땅을, 또 이 주변 땅을 버리겠다, 이런 의도적으로 버렸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의도적은 아니고 의식적도 아니였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저는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 특별히 저는 항상 교회 내에서 가장 커다란 문제가 뭐냐하면,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교인들이라고 생각을 해요. 오랜 세월이 지났는데 열매를 맺지 못한 교인들, 교회의 연륜은 굉장히 길었는데 내 삶 속에 뚜렷한 변화의 어떤 열매가 없어요. 열매가 없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은, 뭐 그렇다고 해서 이런 변명을 할지 모르죠. 그렇다고 내가 뭐 교회서 내가 말썽부린 것도 없고, 내가 뭐 다른 사람을 해 끼친 것이 있느냐? 그러나 전혀 책임 없는 신앙생활을 하는 어떤 제직의 모습을 보았을 때 우리주변의 사람들이, 아, 예수는 저렇게 믿는 모양이다 라는 생각을 했을 때, 영향을 끼치고 있어요. 영향을.
여러분 우리의 존재는 나라는 사람의 존재는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우리는 끊임없이 영향을 끼치며 살고있습니다. 초대 그리스도인의 영향력, 대단했죠. 일세기에 그리스도인들이 끼쳤든 놀라운 영향력, 숫자는 현대보다는 훨씬 크리스천의 숫자는 적었어요 그러나 영향력은 무서웠습니다. 이 무서운 영향력을 나타내는 단어 중에 우리가 사도행전을 읽어보면은, 일세기의 그리스도인들을 가리켜서 부쳐진 여러 가지 별명이 있었는데 그 별명 중에 하나가 뭐였느냐 하면은 염병이 였어요. 염병, 생각나십니까 염병? 우리 어렸을 때는 옘병이라고 그랬습니다. 옘병, 전염병이란 말이죠. 전염병, 왜 그리스도인들에게 전염병이라는 별명이 붙었을까요? 그 영향력 때문에, 확산되는 영향력, 녜, 한 사람이 예수 믿으면 그 사람에게서 끝나지 않아요. 그 사람을 통해서 또 다른 사람이 예수 믿고 또 다른 사람이 변하고 이 무서운 영향력의 확산, 저들은 염병이다! 저들은 염병이다!
또 사도행전에 보면, 일세기 그리스도인들에게 부쳐진 또 하나의 별명가운데 이런 별명이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하면 천하를 어지럽히는 사람들, 천하를 어지럽히는 사람들이 여기에도 왔다! 데살로니가에 바울사도 일행이 들어갔을 때 그런 말을 했어요. 그렇죠? 천하를 어지럽히는 사람들이 왔다. 그런 거 보셨어요? 성경에서 보셨어요? 녜? 그런데 천하를 어지럽힌다는 이 말이 본래 원문 그대로 읽어보면, ‘데이 해브 턴 더 월드(They have turn the world)’ 세상을 이렇게 턴했다, 틀었다. 그 다음에 업사이드 시켜서 다운 시켰다 이런 뜻입니다. 세상을 완전히 뒤집어 놓았다. 이것은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끼쳤든 놀라운 영향력을 상징하는 그런 표현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영향력을 끼치고 있습니까? 그것이 긍정적이든 그것이 부정적이든, 내가 주변의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력을 끼치고 있을까요? 나는 땅만 버리는 사람들이 아닐까요? 네, 왜냐하면 이 무화과나무가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다른 나무에게 필요한 수분마저 내가 빼앗고 있으니까, 그 광물질의 자양분은 내가 다 빨아드리면서도 열매는 맺지 못하고, 차라리 다른 사람에게 가면 좋을 텐데, 이런 종류의 종교인들을 향해서 예수님이 정확하게 표현하신 이런 아주 경고의 메시지가 있습니다. 바리세인들을 향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마는, 자기도 천국에 못 들어가면서 다른 사람도 들어가지 못하게 한다. 생각나세요? 자기도 못 들어가면서 남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사람들, 그러니 의도적으로는 아니죠.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그렇단 말입니다. 결과적으로 그런 영향을 끼친다.
요즘 어떤 경제적인 그 중요한 원리로, 사회학적인 원리일지도 모르겠어요. 한 공동체에 20프로의 사람만 건강하면은80프로는 그 혜택을 나누어 가질 수가 있다는 거예요. 저는 이 교회도 사실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우리교회에 출석하는 사람들의 20퍼센트만 헌신한다면 우리교회는 굉장한 사건을 만들어 낼 것입니다. 20퍼센터, 20프로 될까요? 20프로?
한 크리스천 사회학자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아~저는 그것이 한국교회에도 적용이 될 수가 있다고 생각해요. 오늘날 세계교회에,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의 95프로는 벤치워머에 불과하다고 그랬어요. 벤치워머. 벤치워머가 뭡니까? 의자를 따뜻하게 한다. 교회에 기여하는 것은 와서 한시간 예배드리면서 여러분이 앉아있든 의자, 히프로 딱딱하게 만들었다가 나가는 것, 그게 유일한 기여예요. 당신이 교회에 기여하고있는, 역사에 기여하고있는 유일한 기여, 앉아있든 자리 떳떳하게 만들고 나가는 것 그것 밖에 없어요. 아무 것도 없어요. 그 게 신앙생활 아니에요. 우리 교회 안에 얼마나 많은, 정말 한20프로만이라도 복음 앞에 헌신하고 이 세상에 관심을 갖고, 역사에 관심을 갖고 우리가 기도하고 복음에 대한 관심을 갖고 잃어버린 영혼에 대한 관심을 갖고 기도하고 말씀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만약 20프로만 될 수가 있다면 세상은 바뀌리라 믿습니다. 그런데 몰라요. 내 상태를 몰라요. 자신의 상태를 몰라요. 땅만 버리고있는, 땅만 버리고 있는 사람들 어찌하여 땅만 버리느냐? 이 얼마나 무서운 얘기입니까 어찌하여 땅만 버리느냐? 이 무화과나무가 왜 열매를 맺지 못했을까요?
세번째는 자신의 위기를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위기를, 자신의 책임을 망각했고 자신의 상태를 망각하고 땅만 버리고있는 자신의 상태도 보지 못했고, 세번째는 자신 앞에 다가오고 있는 위기, 그 위기를 깨닫지 못한 거예요. 위기를 깨닫지 못했다.
여러분 본문을 가리켜서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의 비유, 이렇게 일컬어지는데 저는 이 본문이 누가복음 13장에 그 앞서 기록하고있는 어떤 사건과 연관이 있지 않나 이런 생각을 합니다. 그 사건 때문에 예수님이 이 비유를 말씀하신 직접적 배경이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한번 읽어보세요. 누가복음 13장1절부터 보시면 “그때 마침 두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저희의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께 고하니” 사고가 일어난 거예요. 갈릴리 사람들이 죽는 사고가 일어난 거란 말이죠?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음으로써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그 다음에 읽어보시면요. 4절 한 번 읽어보세요 다같이, 4절 다같이 시작,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5절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갈릴리에서도 사고가 났고 또 실로암 망대가 무너졌어요.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그래 단순한, 그 당시 있었든 어떤 사고에 관한 얘기를 예수님이 하신 거예요. 그런데 우리가 사고가 일어나면은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주변에서 내 이웃사람이 뭐 교통사고가 났다, 뭐 좀 안됐구나 이렇게 생각을 하겠죠. 그러나 혹시 어떤 사람은 ‘글쎄 그 사람 죄 때문에, 뭐 업보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냐?’ 죄 때문에 그런 사고를 만난 것이 아니냐?
예수님이 이런 사고를, 생각을 하고 있을 사람들을 지적하면서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죄가 많아서 그렇게 죽은 줄 아느냐? 아니야, 너도 그렇게 될 수가 있다. 이웃 사람들의 비극에서 경고를 받아야 된다 말이죠. 그래 그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렇게 될 수가 있다. 우리는 이웃들의 어떤 아픔이나 고통이나 사고를 보았을 때, 하나님의 경고로 보면 돼요 나를 향한 경고, 그것이 바로 나를 향한 경고다. 어쩌면 내 인생도 한순간 이렇게 정리될 수가 있다. 내 주변의 사람들이 이런 어려움을 당하는 것은 나를 쪼여 들어오는, 내게 다가오고 있는, 어떤 위험을 나에게 알리기 위한 하나님의 싸인이다 말이죠. 만약 회개치 않는다면 너도 이와 같이 망할 수가 있다 그걸 아느냐 이말 이죠. 내 주변에 일어나고 있는 심상치 않는 사건들, 이것은 너희에게도 다가오고 있는 위험에 대한 싸인이고 징조일 수가 있다 정신을 좀 차려라 이 말 입니다. 정신을 차리라. 위기예요. 위기, 이것이 위기예요 신앙생활 그만큼 하면 좀 달라져야죠. 그래 주님은 우리가 신앙생활을 어느 정도 해야만 열매를 맺을 수 있다고 말씀할까요?
오늘 본문에, 본문에 메시지를 저는 문자적으로 좀 적용해서 이 교훈을 받고 싶어요. 자, 7절 한 번 읽겠습니다. 7절 다같이 시작, “과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실과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 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느냐” 여기서 몇 년 얘기하셨어요? 3년, 저는 예수님이 당신의 제자들에게, ‘내가 3년 가르쳤으면 너희도 열매 맺어야지 언제까지 이렇게 살거냐?’ 이3년이 저는 문자적으로 좀 받아드리고 싶어요. 왜냐하면 요한복음 15장에도 보시면, 아까 말씀한 요한복음15장, 예수님이 십자가 직전의 마지막 교훈이거든요? 이 포도나무 비유의장에서 나는 포도나무고 너희는 가진데 너희가 나에게 정말 붙어있고, 그리고 나와 더불어 제대로 교통하고 올바른 관계 속에서 산다면 이제는 열매를 맺어야한다, 몇 년이에요? 3년, 진지하게 신앙생활 3년 했으면 좀 바뀌어야죠. 그래 3년 진지하게 신앙생활 했는데 바뀌지 않았다, 이 사람은 희망이 없는 사람이예요. 오늘 좀 우리자신에게 경각심을 갖는 이런 깨달음이 좀 필요하지 않는가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고린도전서 11장에 보시면, 그 성찬식에 관한 교훈이 나오거든요. 이런 성찬식은 성찬식 자체보다도 그것이 하나님과의 교제의 상징이다 성찬식을 소홀히 하는 사람들에게, 다시 말하면 주님과 나사이게 그 관계를, 교제를, 소홀히 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올 수 있는 하나님의 징계, 그 징계의 스텝을 말할 때 세 가지 단계로 가르치고있어요. 징계의 세 가지 스텝, 그게 뭐냐하면 ‘너희가 이런 이유 때문에 너희들 중에 약한 자들과 병든 자들과 잠자는 자가 적지 않다’ 세 가지 단어가 나와요. 약한 자, 병든 자, 잠자는 자, 이게 하나님이 한 그리스도인들을 채찍을 때려서 그걸 깨워 일으키고 그 사람을 정신차리게 만드실 때, 하나님이 첫번째로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이 뭐냐하면 약하게 하는 거예요. 그래서 갑자기 약해지면 우리가 다른 사람보고 정죄를 해서는 안되지만, 자기 자신의 삶을 바라보고 나서는 내가 약해질 때 혹시 하나님의 어떤 징계가 아닌가? 정신차리고 살라고, 그런데 깨닫지 못해요. 그러면 두번째 단계가 뭐냐하면 너 약해져도 깨닫지 못해? 그러면 드러누워서 생각해! 눕혀놓으십니다. 병들면 누워야지, 그런데 누워서도 깨닫지 못하면 어떻게 할까요? 마지막 단계가 하나밖에 없어요. 응? 그냥 자, 그냥 자, 재워놓으셔요. 육체적 죽음이란 말이죠. 육체적 사망, 너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존재이유를 하지 못하는 무화과나무, 찍어버리겠다! 그 얘기 아니에요? 찍어버리겠다. 불신자 얘기가 아니에요. 너희가 신자라고 하면서,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 주님을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면서도 아무런 열매가 없어! 내가 찍어버리리라 이 말이에요 찍어버리리라. 언제까지 우리의 신앙생활은 그런 타성에 젖은 무책임하고 무관심하고 그리고 무감각한 그런 삶을 계속할까요? 어느 날 갑자기, 어느 날 갑자기 내 인생을 결산을 알리는 사건이 내게 찾아올 수가 있습니다. 예고 없이 찾아와요.
지나간 두 주간은 특별히 우리교회에서 장례식이 많았습니다. 그건 우리의, 우리의 모습일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인생에서 어느 날 갑자기 그 순간이 올 때 우리는 어떤 결산을 하게 될까요?
감사한 것은 우리의 손은주 집사님 같은 분, 많은 사람들을 교회 운전하셨지마는 열심히 섬기는 아름다움을 보여주시고 마지막에 자기의 시신까지 아주대학 병원에 다 기증하시는, 좋은 간증을 남기고 가신, 저는 차라리 그분의 죽음의 모습이 부러워지기조차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렇게 열심히 기도했든 최혜빈 어린아이, 하나님이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아름답게 부르셨다고 생각해요. 혜빈이는 가면서 저금통을 남겼습니다. 이 저금통은 선교를 위해서, 복음을 위해서 혜빈이가, 드리기를 원했든 그런 저금통이였습니다. 차라리 이 어린 소녀가 보여준 감동적인 삶의 모습 앞에서 우리는 인생을 단순히 길게만 산다, 만수무강하겠다. 그래도 끝나요. 그래도 끝나요. 만수무강하셔도 끝나요. 녜, 끝나는 순간 나는 어떤 열매를 가지고 주님 앞에 설 수가 있을까요? 깨닫지 못한다면 내가 찍어버리겠다. 회개하지 않으면 망하리라. 오늘 이 주님의 이 엄숙한 경고 앞에서 이 가을, 인생의 결실을 생각하는, 추수를 생각하는 거두어드림을 생각하는 계절 저와 여러분은 무엇을 결실할 수가 있을까요? 이 가을이 열매 맺는 계절이기를 위하여, 저는 이 세 가지를 생각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책임, 우리의 책임. 나는 무엇 때문에 살고있는지? 나의 상태, 현재 나의 삶의 상태가 어떤 자리에 있는지? 그리고 내 앞에 언제라도 찾아올 수 있는 마지막 기회, 그 기회 앞에 준비가 되어 계신지요?
자, 마지막 부분에 보시면 이 비유에서 과원지기는 이렇게 호소합니다. 주인 앞에, 청지기의 책임을 지고 있었든 과원지기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를 인하여 찍어버리겠다고 주인이 선언하니까 8절에서 어떻게 말합니까?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그런데 이 번역이 조금 약해요 더 달리 번역한다면, ‘금년 한번만 봐주세요 한번만 봐주세요. 한번만 더 기회를 주세요 내가 두루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 그 후에 만일 실과가 열면이어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버리셔도 저는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겠습니다.’ 무슨 얘기입니까? 한번만 봐주세요. 물론 주인이 어떻게 대답했는지는 이 비유에 나오지 않습니다. 주님은 기쁘게 기회를 허락하셨을 것이라고 저는 생각을 해요. 아직도 살아있는 이유, 아직도 삶의 기회가 계속되고있는 이유, 왜 그래요? 우리가 마음속에서 이렇게 호소하고 있는지도 모르죠. ‘주님 금년 한번만 더 기회를 주세요’ 그러나 이때쯤 한해가 저물어 가면 많은 분들이 이런 결심을 합니다. 제가 내년에는 잘 할께요. 1월1일부터요. 그런데 1월 1일부터 하겠다고 하는 사람 치고 1월1월부터 하는 사람 절대로 보지 못했어요. 1월1일부터, 그런 마음이 있다면 지금부터 시작하셔야 돼요. 지금부터, 지금부터 새로운 삶을 바꾸세요. 구체적인 열매를 향한 내 인생의 노력을 시작하겠는가? 아니라면 주님의 엄숙한 이 명령 앞에 어느 날 서야 합니다. 너는 더 이상 살아야 할 이유가 없다. 이 말씀 앞에 여러분의 대답은 오늘 무엇입니까?
기도하십시다.
아직도 살아있는 이유, 우리들의 열매를 위해서 그 열매를 들고 주님 앞에 설 수 있는 그 날을 위해서 참아주시고 기다려주시는 사랑하는 주님 앞에 서실 준비가 되어 계신지요? 우리 다 일어나서 한 번 기도하시겠습니다.
기도할 때, 하나님 아버지 오늘 과원지기처럼 우리도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 한번만 더 찬스를 주십시오. 거름을 주겠습니다. 내 땅을 파겠습니다. 그리고 좀 진지하게 이제는 신앙생활을 해보겠습니다. 어느 한순간 내 삶의 마지막이 오더라도 주 앞에 드릴 수 있는 풍성한 열매를 준비하기 위해서 그렇게 살기를 원합니다. 하나님 도와주시옵소서.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하십시다.
최근에 미국에 한 그 기독교 가정 잡지에 실린 글을 읽었습니다. 아버지와 딸이 서로 주고받은 편지가 기록되어 있더라구요. 에~아버지는 아마 알코올 중독자 였든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딸에게 자기의 그 라이프스타일(Life style)을, 삶을 변명하는 편지를 썼고, 딸은 그기에 대해서 자기가 느낀 반응을 쓴 그런 편지였습니다.
간단히 내용이 이런 내용이에요. 아버지가 아~ 쓴 편지에는 ‘나는 내가 당연히 이렇게 살아서는 안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어쩌란 말이냐’ 영어로 아이 켄 헬핀(I can’t helping),이라는 단어를 썼는데 나도 어쩔 수가 없습니다. ‘나도 어쩔 수가 없단 말이다. 마약은 나에게 기쁨을, 즐거움을 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이란다 이 마약 마저 없다면 내 인생에는 아무런 위로가 없구나’ 이것이 아버지가 쓴 편지구요. 이런 아버지에게 딸은 이런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 아빠는 무책임하십니다. 아빠는 자신을 포기하고 살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나 아빠는 자신만이 아니라 그렇게 해서 딸인 저의 인생도 간접적으로 파괴하고 계십니다. 아빠는 아빠의 눈앞에서 나타나고 있는 이 파괴를 보지 못하고 계실 따름입니다.
저는 이 기사를, 아버지와 딸의 편지를 읽으면서 이것이 비단, 이런 어떤 나라에 살고있는 특이한 아버지만의 문제는 아닐 거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누군가 오늘 우리가 살고있는 이 시대 이 현대를 가리켜서 3 무(無)의 시대다 그랬어요. 3가지가 없는 시대다.
첫째로 무책임한 세대, 둘째로는 무관심한 세대, 무관심한 세대. 세번째는 무감각한 세대. 세 가지 무(無)에요. 무책임, 무관심, 무감각한 세대다, 이렇게 표현하신 분이 있습니다. 비단 현대인들이 뭐 마약에 중독된 사람은 소수라고 할찌라도 마약 중독 뿐만 아니라 인간의 어떤 포커스를 초점을, 아~인생의 진정한 목적과 의미를 빼앗아 가는 그 중독들에 의해서 붙잡혀있는 현대인들의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욕망에 중독되고 어떤 사람은 허영에 중독되고 어떤 사람은 쾌락에 중독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일에 중독됩니다. 그래 사람들은 일의 중독에만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아요. 그러나 워크 홀딩(work holding)’이란 일 중독도 매우 심각한 것입니다. 아~조금 아까 예배시간에 9시 반 예배에 게리 콜린스 박사께서 오셔서 이 비지니스, 바쁘다는 것이 얼마나 우리의 삶에 초점과 목적을 깨뜨릴 수가 있는 것인가에 관해서 아주 명 설교를 하셨습니다. 한 번 들어보시면 좋을 것입니다. 저는 제일 불쌍한 사람이 이런 사람이라고 생각을 해요. 죽어라고 일하다가 죽는 사람. 하하~ 일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일에 빠져버리다 보면 인생에 어떤 포커스와 목적을, 의미를 상실하는 경우들이 종종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 사람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진지하게 인생의 목적이나 의미를 탐구하는 일을 거추장스럽게 생각하는 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찰라의 만족, 순간의 쾌락, 그 환락에 매달리면서 하루 하루를 때우는 그런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벌써 가을입니다. 가을 바람이 벌써 차가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한해를 마무리 짖는 시점 앞에 서 있습니다. 저는 가을이 오면은 늘 제 마음속에 되뇌어지는 제가 좋아하는 고(姑) 시인 김현성 선생의 시가 생각이 납니다.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은 열매를 거두는 결실의 계절입니다. 그런데 이 비옥한 시간을 가꿀 수 있는, 내가 거두어 드릴 열매가 없다면, 그건 왜 그럴까요? 무엇이 내 인생을 이렇게 황폐하게 만들었을까요?
오늘 질문을 묻고 있을 어떤 사람들을 위해서 저는 오늘의 본문 누가복음 13장의 본문을 같이 생각하자고, 하려고 합니다. 이 누가복음 13장을 흔히 우리는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의 비유, 이렇게 일컬어 말합니다.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의 비유. 이렇게 시작되죠? 오늘 6절에 보면 “이에 비유로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이 있더니 와서 그 열매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한지라” 열매를 얻지 못한 무화과나무의 비유입니다. 그러나 이 비유를 통해서 역설적으로 우리가 물어야 할 가장 중요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열매를 맺을 수가 있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어떻게 열매를 맺을 수가 있는가 하는 질문을 하기 전에 앞서서 다루어야 할 문제가 바로 이것입니다. 왜 내 인생에는 열매가 없는가? 내 인생에는 왜 열매가 없을까? 우리가 먼저 이 대답을 찾기 위해서 다시 본문으로 돌아오겠습니다. 이 열매 없었든 무화과나무,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그 첫째 이유는 자신의 책임을 망각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자신의 책임을 망각하고 살고있었다. 여러분, 무화과나무의 책임이 뭡니까? 무화과나무의 책임은 열매 맺는 게 책임입니다. 그것이 무화과나무의 존재 이유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이 무화과나무라는 것은 장식용으로 쓰여지지 않았습니다. 적어도 예수님 당시에는 그랬습니다. 요즘은 뭐 꽃꽂이가 발달해 가지고 별거 가지고 다 그것을 어떤 데코레이션에, 아름다움을 위해서 사용하고 있지마는 적어도 성경이 쓰여진 예수님 당시만 해도 무화과나무는 절대로 장식용은 아니였습니다. 전시회 목적으로 Show up을 목적으로 해서 이것은 전혀 쓰여질 수 없는 나무였습니다. 재목용도 아니에요 땔감용으로도 쓰여질 수가 없습니다. 무화과나무의 유일한 존재 이유, 목적 그것은 열매를 위해서 존재한다
인생은 왜 존재할까요? 저는 무화과나무의 존재이유와 인생의 존재이유가 같다고 생각합니다. 열매를 위해서 존재합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선택하신 이유, 그들로 하여금 자신을 따라오게 하신 이유, 그들을 품으시고 가르치시고 3년 동안 삶을 같이하신 이유,
요한복음 15장을 가리켜서 우리는 13장부터 사실은 18장까지를 예수님이 십자가로 가시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교훈을 가르치신 소위 다락방 강화라고 불리워지는 한 토막입니다. 그 중에 요한복음 15장이 끼여있어요. 십자가로 가시기 직전의 교훈이에요. 우리가 흔히 포도나무 비유의 장, 이렇게 부르죠? ‘나는 포도나무요’ 뭐예요? ‘너희는 가지니’ 이 가지가 포도나무에서 떨어지면 열매맺을 수 없다 내가 너희를 택한 것은,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야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려함이라’ 예수님은 인생의 목적을 열매라고 말씀하십니다. 열매, 특별히 그리스도인들이 존재하는 목적, 예수그리스도의 제자로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가 십자가의 복음을 깨닫고 이 땅에서 살고있는 우리의 존재의 이유, 생존의 가장 중요한 목적이 어디에 있느냐? 그것은 열매를 위해서다. 무슨 열매일까요?
성경에 열매라는 이 단어를 아~가르칠 때는 항상 두 가지 측면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하나는 뭐냐하면 생명의 열매, 재생산의 열매입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드리고 하나님의 생명을 예수 안에 있었든 영원한 생명을 가졌다면 나를 통해서 또 다른 어떤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 있는가? 쉽게 말하면 전도의 열매, 전도열매, 우리가 예수님의 마지막 교훈, 그것을 가리켜서 지상명령이라고 부르죠? 소위 Great Commission 마지막 명령 가운데 보시면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내 제자를 삼으라 제자들에게 무얼 부탁했어요? 제자들에게 ‘제자 삼으라’ 내가 예수 믿고 구원받았다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었다면, 예수 믿는 것이 이렇게 좋고 아름답고 풍성하고 내 삶의 목적과 의미와 초점을 줄 수가 있었다면, 그러면 이 생명을 어떻게 나 혼자 간직할 수가 있어요? 사람들에게 전도할 수밖에 없죠. 우리가 신앙생활의 열매, 인생의 열매인데 내가 교회당 드나든 회수가 얼마가 되었느냐 이것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네, 당신을 통해서 예수 믿게 된 사람들이 몇 사람이나 될까요? 이게 전도의 열매요. 생명의 열매예요.
자, 한해가 저물어 가는데 금년 한해동안에 여러분을 통해서 예수 믿게 된 사람이 어디 있어요? 이름을 델 수가 있습니까? 누구입니까? 그러고도 우리가 예수를 생명이라고 예수를 구원이라고 정말 예수가 소망이라고 증거 할 수가 있을까요? 예수가 구원이시고 생명이시고 소망이시고, 내 삶을 바꾸었고 나에게 저 영원한 삶을 보증하신 주님이라면, 이렇게 좋은 주님이라면 어떻게 그 주님을 침묵할 수가 있느냐 말이에요. 전도 열매가 있느냐? 실제로 전도의 열매가 있느냐 말이죠.
뭐 교회에 얼마나 많이 나왔느냐? 성경공부를 얼마나 많이 했느냐? 우리교회가 성경공부를 강조합니다마는 성경공부 자체도 목적이 아닙니다. 네, 제가 늘 아~여러분에게 드리는 그 비유중의 이야기 가운데 하나가 이런 것이죠? 여러분 가운데 어떤 친구를 만나서 자랑을 하면서 이런 자랑을 한다고 가정을 해 보십시다. ‘나는 오늘 여덟 끼나 식사를 했습니다.’ 그게 자랑이에요? 왜 여덟 끼를 먹어요?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여덟 끼를 먹는 거예요? 먹는 것을 위해서 먹는 겁니까? 먹는 것은 내가 에너지를 취하고 그거 가지고 제대로 삶을 살기 위해서, 제대로 삶을 살기 위해서, 성경 공부한다,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에요. 어떤 사람은 더 고난도의 성경공부가 있느냐? 뭐 이런 것만 또 찾는 사람도 있단 말이죠. 뭐 그래서 어쩌자는 거예요? 말씀을 받아 가지고 어떻게 사느냐? 그런데 그 삶 속에서 가장 중요하게 요구하는 것이 뭔지 아세요? 전도의 열매예요. 당신 통해서 예수 믿고 구원받고 새로워진 인생이 어디에 있느냐 말이에요. 얼마나 있느냐 말이에요. 전도의 열매예요.
또 하나, 성경에 열매라는 단어를 다룰 때 늘 일상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뭐냐하면 인격의 열매입니다. 인격의 열매, 자, 우리가 잘 아는 성령의 열매는, 뭡니까?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참음과 자비와 양성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 네, 우리가 흔히 9가지열매다 이렇게 말하죠. 9가지 열매. 그런데 성령의 열매는, 하고 말할 때 갈라디아서 5장 22절에 그 열매란 단어는 복수가 아닙니다. 단수예요. 성령의 한 열매는, 하고 9가지가 나와요. 그런데 한 열매 속에 있는 9가지의 특성 이렇게 보는 것이 좋아요. 그러니까 그 한 열매는 한 인격을 지향하는 것입니다. 그 한 인격 속에 9가지의 특성이 들어있어야 한다. 성령의 열매는 한 인격을 지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한 인격은 누구의 인격일까요? 예수님의 인격이에요. 사랑으로 가득 찼든 분,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든 분, 화평, 진정한 평안으로 그의 내면의 인격이 견고했든 그분,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그리고 정말 오래 참을 줄 알았든 그분, 이러한 것들을 완벽하게 갖춘 대표적인 모델이 될 수 있는 인격이 바로 예수님이죠. 그러니까 열매를 맺느냐는 것은 내가 그것도 신앙생활의 연륜이 얼마나 되느냐 이것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얼마나 그 예수님을 닮아올 수가 있었느냐?
금년한해를 결산해 가야할 이런 시점 앞에 서서 우리는 이 질문을 물어야 합니다. 내가 금년한해 동안 예수님을 얼마나 더 닮았을까? 작년하고 비교해서,
바울사도의 권면처럼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내가 얼만큼 영적으로 성숙했느냐 하는 것은 내 인격에 얼마나 변화가 있었느냐 이 말 입니다. 그게 열매예요, 열매.
자, 금년 한해를 또 마무리 해야할 이 중요한 어떤 계절의 에~시간 앞에 서서, 여러분과 제가 자기 자신에게 진지하게 물어야할 질문이 바로 이 열매입니다. 이 본문에 나타난 이 무화과나무를 보면 무화과나무는 어디에 심겨 졌습니까? 포도원에, “이에 비유로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었더니” 이스라엘 땅, 이 팔레스타인 땅은 사막의 한 부분이죠. 그렇게 좋은 땅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 가보면 포도 재배를 참 많이 합니다. 무화과나무도 많이 나구요 무화과열매 포도열매 이런 것들이 많이 생산되죠. 그런데 이 포도원은 사막지대이긴 하지마는 그래도 팔레스타인 땅 안에서 가장 비옥한 땅을 선택하여 포도원을 일구게 됩니다. 거기에 포도나무도 심고 또 무화과나무를 심습니다. 그러니까 이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는 좋은 포도원, 좋은 땅에 심겨진 것이에요. 이건 뭘 얘기하느냐 하면 그것은 특권입니다. 그래도 좋은 땅을 선택하여 거기에 심겨졌다. 그러면 좋은 땅에 심어졌으면 좋은 열매를 맺어야죠.
제가 왜 이 얘기를 하시는지 아십니까?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의 누리고 있었든 가장 놀라운 특권 중의 하나가 뭡니까? 그것은 선민이라는 특권이에요 나는 선택을 받았다. 우리는 선민이다. 나는 선택받은 백성이다 이스라엘 백성들뿐만이 아니죠. 신약적으로 말하면 그리스도인들을 향해서 우리가 베드로전서에 보시면, 너희는 왕 같은 뭐예요? 제사장이다! 그가 택하신 족속이다. 그의 소유된 백성이다. 놀라운 특권이에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함을 입고 살아간다. 중요한 것은 그러나 이 선택은 분명히 특권인 것은 사실이지만 이 특권에는 항상 책임이 따른다는 사실이에요. 자, 좋은 땅을 선택하여 거기에 포도나무를 심고 또 거기에 무화과나무를 심었다면 거기서 제대로 된 열매를 좀 맺어야죠. 제대로 된 열매를, 그 열매가 뭐냐 말이예요 그 열매가, 자, 하나님이 나를 선택해 주셨다면 나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아주셨다, 이건 어마 어마한 특권인데, 놀라운 특권인데 그렇다면 이 특권에 합당하는 책임, 책임. 책임을 다하고 있느냐 말이에요. 열매를 맺는 이 책임을 다하고 있느냐? 때로 우리는 하루 하루를 때우면서 존재만 하고 있는 인생들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바빠서 그렇다구요?
우리 한국 사람들은 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명절을 지키는 방법을 배워야 되겠다는 생각을 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우리는 명절, 국경일, 공휴일 그러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생각이 어떤 생각입니까? 응? 논다! 우리는 그걸 먼저 생각하죠.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명절을 지키는 방법은 상당히 교육적입니다. 에듀케셔널해요. 아주 교육적이에요, 뭐 유월절이 되면은 뭐 쓴 나물도 먹구요. 나물 쓴 거 아이들이 안 좋아하거든요. 왜 이런 쓴 나물을 먹어요? 그러면, 우리 조상이 옛날유월절에 애굽 땅을 떠날 때 이런 쓴 나물을 먹었단다. 자식들에게 어떤 교훈을 가르치는 그 교육의 기회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또 명절을 지키는 특이한 방법 중에 하나가 대부분의 명절에, 뭐 일주일 내내 그런 것은 아니지만 명절의 어느 하루를 선택해서 금식을 합니다. 특별히 용 키퍼 같은 속죄 죄를 지킬 때 금식을 해요. 금식, 왜 금식을 할까요? 이것은 생활의 리듬을 깨트리면서 우리에게 좀 생각할 수 있는 찬스와 기도할 수 있는 기회를 갖기 위해서예요. 1년 365날 하루세끼씩 어김없이 찾아 잡수시는 신사 숙녀 여러분, 식사를 안 하면 갑자기 우리가 늘 먹든 식사를 안 하면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우리 가정 주부들은 우선 시간이 남아요. 오, 할 일이 없어요. 가끔 금식집회, 이런 것을 이따금씩 해본 경험이 있는데 이 금식집회를 하다보면 정말 할 일이 없어요. 식당 갈 일도 없죠, 화장실 갈 일도 없죠 하하~ 할 일이 없어요. 그런데 그 시간, 짤막한 시간이지만 그 시간에 우리가 좀 앉아서 생각을 할 수가 있는 여유가 있어요. 생각 좀 해보란 말이죠. 그래 바쁘게 달리지만 말고 내 인생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앞으로 내가 얼마나 살아야 하는지 좀 생각 좀 해 보잔 말입니다.
자, 왜 이 무화과나무가 열매를 맺지 못했어요? 자신의 존재 이유를, 자신의 책임을 잃어버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나는 왜 존재하느냐? 요즘 우리세대는 책임지지 못하는 사람들로 꽉 차 있는 것 같아요. 장가는 들어놓고, 시집은 가놓고, 한 가정의 아버지가 되고 어머니가 되고 나서도 그 가정을 책임질줄 모르는 아버지들 어머니들, 얼마나 많아요? 서약하고도 하나님 앞에 서약하고도, 아내를 향한, 남편을 향한, 최소한의 윤리적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있는 이세대의 무책임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아요? 공동체 생활할 때도 교회생활 할 때도 뭐 제직이 되어 놓고도 아무런 책임도 감당하지 않아요.
아마 우리교회 같은 사이즈는 교회를 분류할 때 아마 mega church에 해당하는, 대교회에 해당하는, 한국교회 아주 적은 퍼센티 안에, 통계 안에 들어갈 것입니다. 저는 종종 이런 생각을 합니다. 적지 않은 사이즈의 교회를 목양하는 목사로서 내가 어떤 느낌을 갖는가? 뭐 솔직히 말씀드리면 두 가지 필링이에요. 영어로 믹스드 필링이라는 단어가 있는데, 아주 복합적인 느낌이라고 그럴까요? 한편으로는 굉장히 좋고, 그래 제가 좋아하는 느낌은 특별히 이런 것입니다. 뭐 전도할 수 있는 찬스가 많으니까, 많은 사람 대상으로 말씀을 전할 수가 있고, 설교할 수가 있고, 또 그 가운데 정말 구원받고 변화되는 사람들을 보았을 때, 또 지난번 전도집회처럼 믿지 않는 사람들이 정말 복음을 받아드리고 구원받는 사람들이 더해간다 그런 면에서 큰 교회를 목양하는 것은 특권이고 기쁨이죠. 계속 예수 믿는 사람들이 늘어간다. 또 어제 그제 이틀동안 우리 사랑의 순례 세미나가 있었는데 모임이 있었는데 가정들이 변해요. 정말 눈물을 흘리면서 깨어졌든 가정들이 봉합되는 그 기쁨을 간증하는 사람들을 보았을 때, 피곤했지만 야, 참 보람이 있다, 굉장히 보람이 있다. 이런 목양의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또 한편 저 자신이 메가쳐치의 사이즈의 교회를 목양하면서 어떤 좌절감이 있습니다. 좌절감, 혹시 오늘 현대인들이 대 교회를 선호하는 중요한 이유중의 하나가 아~책임지지 않아도 좋으니까 대 교회에 참석하는 것은 아닐까? 많은 사람들 속에 썩여 있단 말이죠. 군중 속에 썩여 있어요. 누가 나를 의식할 필요가 없으니까 그냥 왔다가 조용히 사라져도 좋아요. 또 우리 교회는 뭐 헌금도 자유롭게 하니까 매미채도 안 돌아다니고, 중간에 저기 헌금함에 돈 넣느냐 안 넣느냐 눈을 부릅뜨고 쳐다보는 감시원도 없고, 뭐 헌금 안하고 그냥 가셔도 되고, 얼마나 자유로워요? 그러나 이것이 혹시 전혀 책임지지 못하는 교인들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 아니냐? 이러한 좌절감을 가질 때가 솔직히 있습니다. 자신의 책임을 망각하는 인생들, 그래서 내 인생 속에 아무런 열매를 거두지 못한 체 빈손으로 내 삶을 결산해야 하는 어느 날이 올 것은 혹시 아닌지요,
왜 이 무화과나무가 열매를 맺지 못했어요? 또 한가지 원인이 있습니다.
그것은 둘째로 자신의 상태를 망각하며 살고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상태를 망각하고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무관심입니다. 때로 저는 열매가 없다는 것에 관해서 이 시대를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고민이나 하는지, 아니 고민조차도 안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저는 이런 고민을 합니다. 하하~
이 본문에 보시면 아주 흥미 있는 말씀을 예수께서 하셨습니다. 7절, 한번 다같이 읽어보겠습니다. 7절 다같이 시작, “과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실과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 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느냐” 어찌해서 땅만 버리느냐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땅을 버린다, 이 무화과나무가 땅만 버리고있다 열매를 맺지 못하니까, 저는 의도적으로 무화과나무가 내가 디디고 서있는 이 땅을, 또 이 주변 땅을 버리겠다, 이런 의도적으로 버렸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의도적은 아니고 의식적도 아니였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저는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 특별히 저는 항상 교회 내에서 가장 커다란 문제가 뭐냐하면,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교인들이라고 생각을 해요. 오랜 세월이 지났는데 열매를 맺지 못한 교인들, 교회의 연륜은 굉장히 길었는데 내 삶 속에 뚜렷한 변화의 어떤 열매가 없어요. 열매가 없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은, 뭐 그렇다고 해서 이런 변명을 할지 모르죠. 그렇다고 내가 뭐 교회서 내가 말썽부린 것도 없고, 내가 뭐 다른 사람을 해 끼친 것이 있느냐? 그러나 전혀 책임 없는 신앙생활을 하는 어떤 제직의 모습을 보았을 때 우리주변의 사람들이, 아, 예수는 저렇게 믿는 모양이다 라는 생각을 했을 때, 영향을 끼치고 있어요. 영향을.
여러분 우리의 존재는 나라는 사람의 존재는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우리는 끊임없이 영향을 끼치며 살고있습니다. 초대 그리스도인의 영향력, 대단했죠. 일세기에 그리스도인들이 끼쳤든 놀라운 영향력, 숫자는 현대보다는 훨씬 크리스천의 숫자는 적었어요 그러나 영향력은 무서웠습니다. 이 무서운 영향력을 나타내는 단어 중에 우리가 사도행전을 읽어보면은, 일세기의 그리스도인들을 가리켜서 부쳐진 여러 가지 별명이 있었는데 그 별명 중에 하나가 뭐였느냐 하면은 염병이 였어요. 염병, 생각나십니까 염병? 우리 어렸을 때는 옘병이라고 그랬습니다. 옘병, 전염병이란 말이죠. 전염병, 왜 그리스도인들에게 전염병이라는 별명이 붙었을까요? 그 영향력 때문에, 확산되는 영향력, 녜, 한 사람이 예수 믿으면 그 사람에게서 끝나지 않아요. 그 사람을 통해서 또 다른 사람이 예수 믿고 또 다른 사람이 변하고 이 무서운 영향력의 확산, 저들은 염병이다! 저들은 염병이다!
또 사도행전에 보면, 일세기 그리스도인들에게 부쳐진 또 하나의 별명가운데 이런 별명이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하면 천하를 어지럽히는 사람들, 천하를 어지럽히는 사람들이 여기에도 왔다! 데살로니가에 바울사도 일행이 들어갔을 때 그런 말을 했어요. 그렇죠? 천하를 어지럽히는 사람들이 왔다. 그런 거 보셨어요? 성경에서 보셨어요? 녜? 그런데 천하를 어지럽힌다는 이 말이 본래 원문 그대로 읽어보면, ‘데이 해브 턴 더 월드(They have turn the world)’ 세상을 이렇게 턴했다, 틀었다. 그 다음에 업사이드 시켜서 다운 시켰다 이런 뜻입니다. 세상을 완전히 뒤집어 놓았다. 이것은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끼쳤든 놀라운 영향력을 상징하는 그런 표현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영향력을 끼치고 있습니까? 그것이 긍정적이든 그것이 부정적이든, 내가 주변의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력을 끼치고 있을까요? 나는 땅만 버리는 사람들이 아닐까요? 네, 왜냐하면 이 무화과나무가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다른 나무에게 필요한 수분마저 내가 빼앗고 있으니까, 그 광물질의 자양분은 내가 다 빨아드리면서도 열매는 맺지 못하고, 차라리 다른 사람에게 가면 좋을 텐데, 이런 종류의 종교인들을 향해서 예수님이 정확하게 표현하신 이런 아주 경고의 메시지가 있습니다. 바리세인들을 향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마는, 자기도 천국에 못 들어가면서 다른 사람도 들어가지 못하게 한다. 생각나세요? 자기도 못 들어가면서 남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사람들, 그러니 의도적으로는 아니죠.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그렇단 말입니다. 결과적으로 그런 영향을 끼친다.
요즘 어떤 경제적인 그 중요한 원리로, 사회학적인 원리일지도 모르겠어요. 한 공동체에 20프로의 사람만 건강하면은80프로는 그 혜택을 나누어 가질 수가 있다는 거예요. 저는 이 교회도 사실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우리교회에 출석하는 사람들의 20퍼센트만 헌신한다면 우리교회는 굉장한 사건을 만들어 낼 것입니다. 20퍼센터, 20프로 될까요? 20프로?
한 크리스천 사회학자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아~저는 그것이 한국교회에도 적용이 될 수가 있다고 생각해요. 오늘날 세계교회에,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의 95프로는 벤치워머에 불과하다고 그랬어요. 벤치워머. 벤치워머가 뭡니까? 의자를 따뜻하게 한다. 교회에 기여하는 것은 와서 한시간 예배드리면서 여러분이 앉아있든 의자, 히프로 딱딱하게 만들었다가 나가는 것, 그게 유일한 기여예요. 당신이 교회에 기여하고있는, 역사에 기여하고있는 유일한 기여, 앉아있든 자리 떳떳하게 만들고 나가는 것 그것 밖에 없어요. 아무 것도 없어요. 그 게 신앙생활 아니에요. 우리 교회 안에 얼마나 많은, 정말 한20프로만이라도 복음 앞에 헌신하고 이 세상에 관심을 갖고, 역사에 관심을 갖고 우리가 기도하고 복음에 대한 관심을 갖고 잃어버린 영혼에 대한 관심을 갖고 기도하고 말씀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만약 20프로만 될 수가 있다면 세상은 바뀌리라 믿습니다. 그런데 몰라요. 내 상태를 몰라요. 자신의 상태를 몰라요. 땅만 버리고있는, 땅만 버리고 있는 사람들 어찌하여 땅만 버리느냐? 이 얼마나 무서운 얘기입니까 어찌하여 땅만 버리느냐? 이 무화과나무가 왜 열매를 맺지 못했을까요?
세번째는 자신의 위기를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위기를, 자신의 책임을 망각했고 자신의 상태를 망각하고 땅만 버리고있는 자신의 상태도 보지 못했고, 세번째는 자신 앞에 다가오고 있는 위기, 그 위기를 깨닫지 못한 거예요. 위기를 깨닫지 못했다.
여러분 본문을 가리켜서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의 비유, 이렇게 일컬어지는데 저는 이 본문이 누가복음 13장에 그 앞서 기록하고있는 어떤 사건과 연관이 있지 않나 이런 생각을 합니다. 그 사건 때문에 예수님이 이 비유를 말씀하신 직접적 배경이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한번 읽어보세요. 누가복음 13장1절부터 보시면 “그때 마침 두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저희의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께 고하니” 사고가 일어난 거예요. 갈릴리 사람들이 죽는 사고가 일어난 거란 말이죠?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음으로써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그 다음에 읽어보시면요. 4절 한 번 읽어보세요 다같이, 4절 다같이 시작,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5절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갈릴리에서도 사고가 났고 또 실로암 망대가 무너졌어요.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그래 단순한, 그 당시 있었든 어떤 사고에 관한 얘기를 예수님이 하신 거예요. 그런데 우리가 사고가 일어나면은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주변에서 내 이웃사람이 뭐 교통사고가 났다, 뭐 좀 안됐구나 이렇게 생각을 하겠죠. 그러나 혹시 어떤 사람은 ‘글쎄 그 사람 죄 때문에, 뭐 업보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냐?’ 죄 때문에 그런 사고를 만난 것이 아니냐?
예수님이 이런 사고를, 생각을 하고 있을 사람들을 지적하면서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죄가 많아서 그렇게 죽은 줄 아느냐? 아니야, 너도 그렇게 될 수가 있다. 이웃 사람들의 비극에서 경고를 받아야 된다 말이죠. 그래 그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렇게 될 수가 있다. 우리는 이웃들의 어떤 아픔이나 고통이나 사고를 보았을 때, 하나님의 경고로 보면 돼요 나를 향한 경고, 그것이 바로 나를 향한 경고다. 어쩌면 내 인생도 한순간 이렇게 정리될 수가 있다. 내 주변의 사람들이 이런 어려움을 당하는 것은 나를 쪼여 들어오는, 내게 다가오고 있는, 어떤 위험을 나에게 알리기 위한 하나님의 싸인이다 말이죠. 만약 회개치 않는다면 너도 이와 같이 망할 수가 있다 그걸 아느냐 이말 이죠. 내 주변에 일어나고 있는 심상치 않는 사건들, 이것은 너희에게도 다가오고 있는 위험에 대한 싸인이고 징조일 수가 있다 정신을 좀 차려라 이 말 입니다. 정신을 차리라. 위기예요. 위기, 이것이 위기예요 신앙생활 그만큼 하면 좀 달라져야죠. 그래 주님은 우리가 신앙생활을 어느 정도 해야만 열매를 맺을 수 있다고 말씀할까요?
오늘 본문에, 본문에 메시지를 저는 문자적으로 좀 적용해서 이 교훈을 받고 싶어요. 자, 7절 한 번 읽겠습니다. 7절 다같이 시작, “과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실과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 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느냐” 여기서 몇 년 얘기하셨어요? 3년, 저는 예수님이 당신의 제자들에게, ‘내가 3년 가르쳤으면 너희도 열매 맺어야지 언제까지 이렇게 살거냐?’ 이3년이 저는 문자적으로 좀 받아드리고 싶어요. 왜냐하면 요한복음 15장에도 보시면, 아까 말씀한 요한복음15장, 예수님이 십자가 직전의 마지막 교훈이거든요? 이 포도나무 비유의장에서 나는 포도나무고 너희는 가진데 너희가 나에게 정말 붙어있고, 그리고 나와 더불어 제대로 교통하고 올바른 관계 속에서 산다면 이제는 열매를 맺어야한다, 몇 년이에요? 3년, 진지하게 신앙생활 3년 했으면 좀 바뀌어야죠. 그래 3년 진지하게 신앙생활 했는데 바뀌지 않았다, 이 사람은 희망이 없는 사람이예요. 오늘 좀 우리자신에게 경각심을 갖는 이런 깨달음이 좀 필요하지 않는가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고린도전서 11장에 보시면, 그 성찬식에 관한 교훈이 나오거든요. 이런 성찬식은 성찬식 자체보다도 그것이 하나님과의 교제의 상징이다 성찬식을 소홀히 하는 사람들에게, 다시 말하면 주님과 나사이게 그 관계를, 교제를, 소홀히 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올 수 있는 하나님의 징계, 그 징계의 스텝을 말할 때 세 가지 단계로 가르치고있어요. 징계의 세 가지 스텝, 그게 뭐냐하면 ‘너희가 이런 이유 때문에 너희들 중에 약한 자들과 병든 자들과 잠자는 자가 적지 않다’ 세 가지 단어가 나와요. 약한 자, 병든 자, 잠자는 자, 이게 하나님이 한 그리스도인들을 채찍을 때려서 그걸 깨워 일으키고 그 사람을 정신차리게 만드실 때, 하나님이 첫번째로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이 뭐냐하면 약하게 하는 거예요. 그래서 갑자기 약해지면 우리가 다른 사람보고 정죄를 해서는 안되지만, 자기 자신의 삶을 바라보고 나서는 내가 약해질 때 혹시 하나님의 어떤 징계가 아닌가? 정신차리고 살라고, 그런데 깨닫지 못해요. 그러면 두번째 단계가 뭐냐하면 너 약해져도 깨닫지 못해? 그러면 드러누워서 생각해! 눕혀놓으십니다. 병들면 누워야지, 그런데 누워서도 깨닫지 못하면 어떻게 할까요? 마지막 단계가 하나밖에 없어요. 응? 그냥 자, 그냥 자, 재워놓으셔요. 육체적 죽음이란 말이죠. 육체적 사망, 너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존재이유를 하지 못하는 무화과나무, 찍어버리겠다! 그 얘기 아니에요? 찍어버리겠다. 불신자 얘기가 아니에요. 너희가 신자라고 하면서,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 주님을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면서도 아무런 열매가 없어! 내가 찍어버리리라 이 말이에요 찍어버리리라. 언제까지 우리의 신앙생활은 그런 타성에 젖은 무책임하고 무관심하고 그리고 무감각한 그런 삶을 계속할까요? 어느 날 갑자기, 어느 날 갑자기 내 인생을 결산을 알리는 사건이 내게 찾아올 수가 있습니다. 예고 없이 찾아와요.
지나간 두 주간은 특별히 우리교회에서 장례식이 많았습니다. 그건 우리의, 우리의 모습일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인생에서 어느 날 갑자기 그 순간이 올 때 우리는 어떤 결산을 하게 될까요?
감사한 것은 우리의 손은주 집사님 같은 분, 많은 사람들을 교회 운전하셨지마는 열심히 섬기는 아름다움을 보여주시고 마지막에 자기의 시신까지 아주대학 병원에 다 기증하시는, 좋은 간증을 남기고 가신, 저는 차라리 그분의 죽음의 모습이 부러워지기조차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렇게 열심히 기도했든 최혜빈 어린아이, 하나님이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아름답게 부르셨다고 생각해요. 혜빈이는 가면서 저금통을 남겼습니다. 이 저금통은 선교를 위해서, 복음을 위해서 혜빈이가, 드리기를 원했든 그런 저금통이였습니다. 차라리 이 어린 소녀가 보여준 감동적인 삶의 모습 앞에서 우리는 인생을 단순히 길게만 산다, 만수무강하겠다. 그래도 끝나요. 그래도 끝나요. 만수무강하셔도 끝나요. 녜, 끝나는 순간 나는 어떤 열매를 가지고 주님 앞에 설 수가 있을까요? 깨닫지 못한다면 내가 찍어버리겠다. 회개하지 않으면 망하리라. 오늘 이 주님의 이 엄숙한 경고 앞에서 이 가을, 인생의 결실을 생각하는, 추수를 생각하는 거두어드림을 생각하는 계절 저와 여러분은 무엇을 결실할 수가 있을까요? 이 가을이 열매 맺는 계절이기를 위하여, 저는 이 세 가지를 생각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책임, 우리의 책임. 나는 무엇 때문에 살고있는지? 나의 상태, 현재 나의 삶의 상태가 어떤 자리에 있는지? 그리고 내 앞에 언제라도 찾아올 수 있는 마지막 기회, 그 기회 앞에 준비가 되어 계신지요?
자, 마지막 부분에 보시면 이 비유에서 과원지기는 이렇게 호소합니다. 주인 앞에, 청지기의 책임을 지고 있었든 과원지기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를 인하여 찍어버리겠다고 주인이 선언하니까 8절에서 어떻게 말합니까?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그런데 이 번역이 조금 약해요 더 달리 번역한다면, ‘금년 한번만 봐주세요 한번만 봐주세요. 한번만 더 기회를 주세요 내가 두루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 그 후에 만일 실과가 열면이어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버리셔도 저는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겠습니다.’ 무슨 얘기입니까? 한번만 봐주세요. 물론 주인이 어떻게 대답했는지는 이 비유에 나오지 않습니다. 주님은 기쁘게 기회를 허락하셨을 것이라고 저는 생각을 해요. 아직도 살아있는 이유, 아직도 삶의 기회가 계속되고있는 이유, 왜 그래요? 우리가 마음속에서 이렇게 호소하고 있는지도 모르죠. ‘주님 금년 한번만 더 기회를 주세요’ 그러나 이때쯤 한해가 저물어 가면 많은 분들이 이런 결심을 합니다. 제가 내년에는 잘 할께요. 1월1일부터요. 그런데 1월 1일부터 하겠다고 하는 사람 치고 1월1월부터 하는 사람 절대로 보지 못했어요. 1월1일부터, 그런 마음이 있다면 지금부터 시작하셔야 돼요. 지금부터, 지금부터 새로운 삶을 바꾸세요. 구체적인 열매를 향한 내 인생의 노력을 시작하겠는가? 아니라면 주님의 엄숙한 이 명령 앞에 어느 날 서야 합니다. 너는 더 이상 살아야 할 이유가 없다. 이 말씀 앞에 여러분의 대답은 오늘 무엇입니까?
기도하십시다.
아직도 살아있는 이유, 우리들의 열매를 위해서 그 열매를 들고 주님 앞에 설 수 있는 그 날을 위해서 참아주시고 기다려주시는 사랑하는 주님 앞에 서실 준비가 되어 계신지요? 우리 다 일어나서 한 번 기도하시겠습니다.
기도할 때, 하나님 아버지 오늘 과원지기처럼 우리도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 한번만 더 찬스를 주십시오. 거름을 주겠습니다. 내 땅을 파겠습니다. 그리고 좀 진지하게 이제는 신앙생활을 해보겠습니다. 어느 한순간 내 삶의 마지막이 오더라도 주 앞에 드릴 수 있는 풍성한 열매를 준비하기 위해서 그렇게 살기를 원합니다. 하나님 도와주시옵소서.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하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