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407
분류 |
---|
김은호목사 (오륜교회)
복과 화
우리는 지난 시간 평지수훈의 서론에 해당되는 "당신은 제자입니까?"라는 말씀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오늘부터는 평지수훈을 함께 묵상하면서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산상수훈에는 우리가 잘 아는 8가지의 복이 나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팔복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누가가 기록한 평지수훈에는 4개의 복과 4개의 화가 나옵니다. 20절부터 23절까지의 말씀을을 보면 "복이 있나니" "복이 있도다"라는 말이 4번 나오고 24절부터 26절까지의 말씀을 보면 "화 있을진저" "화 있도다"라는 4번 나옵니다.
왜 예수님은 4개의 복만을 말씀하시지 않으시고 4개의 복과 더불어 4번의 화(저주)를 말씀하셨을까요? 그것은 우리의 인생이 우리의 인생이 축복과 재앙, 복과 저주라는 두 상황 아래 놓여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삶의 형태는 복잡하고 다른 것 같아도 성경이 말하는 우리 인생 길에는 오직 두 개의 길만이 있습니다. 좁은 길과 넓은 길, 좁은 문과 넓은 문, 의인의 길과 악인의 길, 형통과 파멸, 복과 저주... 다른 제3의 길은 없습니다. 신 11:26절을 보면 "내가 오늘날 복과 저주를 내 앞에 두나니"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앞에 복과 저주를 두셨습니다. 그러므로 복과 저주의 선택은 나에게 달려 있습니다. 복된 길을 걷느냐? 아니면 저주의 길을 걷느냐? 그것은 내가 선택해야 할 문제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복을 받기를 원하면서 저주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생명을 원하면서도 악인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의 인생 길에는 복과 저주가 있습니다. 의인의 길과 악인의 길이 있습니다. 당신은 지금 어느 길을 걷고 있습니까? 다른 길은 없습니다. 당신은 지금 생명과 평안의 복을 원하면서도 악인의 길을 걷고 있지는 않습니까? 형통의 축복을 원하면서도 넓은 길을 향하여 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앞으로 주님이 말씀하시는 4개의 복과 4개의 재앙을 함께 묵상할 때에 잘못된 길을 걷고 있다면 그 길에서 돌이키시고 아직도 걸어야 할 인생의 길을 찾지 못하였다면 이번 기회에 그 길을 찾을 수 있기를 원합니다.
가난한 자의 복
아마 현대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가난일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유명한 사상가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가난해지지 않도록 결심하십시오. 가난은 행복의 적입니다." 어떻게 보면 가난은 악인 것 같습니다. 가난 때문에 몸을 팔고, 가난 때문에 낳은 자식을 버리고, 가난 때문에 학업을 포기하고, 가난 때문에 도적이 되고, 가난 때문에 하나밖에 없는 생명을 끊는 사람들을 보면 가난이 모든 비참의 원인이 되고 사회악을 키우는 온상이 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가난이라는 용어를 서슴치 않고 사용하십니다. 도리어 가난 한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20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가라사대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20절)
예수님은 지금 누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까? 가난한 자입니다. 마태는 가난한 자의 복을 말할 때 그 앞에 "심령"이라는 말을 덧붙여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마 5:3) 고 말합니다. 그런데 누가는 가난한 자 앞에 아무런 수식어도 없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마태가 기록한 산상 수훈에서 말하는 가난은 영적인 가난을 말하고 누가가 기록한 평지 수훈에서 가난은 영적인, 심령의 가난이 아니라 육체적이고 실제적인 가난을 의미한다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이 말씀을 "가난한 사람은 영적으로 복이 있나니..."라고 읽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가난을 권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 어느 곳을 보아도 가난 그 자체를 미화하거나 권장하는 곳은 한 군데도 없습니다. 성경은 가난을 미화하지도 않지만 부자를 정죄하지도 않습니다. 성경은 돈 그 자체를 부정하거나 죄악시하거나 정죄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가난이 좋은 것이다 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는 것은 경제적으로 빈궁하고 궁핍하게 사는 자가 복이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물질이 있고 없고를 문제삼으신 것이 아니라 물질에 대한 태도를 문제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하기를 원하는 자는 가난에 시달리며 살아야 된다는 그런 말씀이 아닙니다. 성경은 도리어 우리가 깨끗한 부자가 되어 선한 일에 귀하게 쓰임받는 청지기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딤전 6:17절을 보면 "하나님은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그 모든 것 속에는 물질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신 8:18절에는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을 주셨음이라" 재물이 악하고 더러운 것이라면 하나님께서 왜 인간에게 재물 얻을 능을 주시겠습니까? 시 112:2-3절을 보면 "그 후손이 땅에서 강성함이여 정직자의 후대가 복이 있으리로다 부요와 재물이 그 집에 있음이여..."
부요와 재물을 하나님이 주신 축복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물질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을 종합해 볼 때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물질 그 자체는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되 물질에 대하여 어떤 자세를 가지고 있느냐? 그리고 물질을 관리하는 자가 어떻게 그것을 사용하느냐에 따라 물질이 선도 될 수 있고 악도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난이 반드시 경건하다'' 든지 ''부하고저 하는 것은 죄다''라고 생각하여 함부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물질을 말할 때 가난과 부요를 말할 때 양 극단을 조심해야 합니다. 가난이 우리의 신앙생활에 언제나 유익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궁핍이 우리에게 천국을 확실하게 보장해 주거나 영적 경건을 풍성하게 해주는 것도 아닙니다. 때로는 풍요로움이 악의 근원이 될 수 있듯이 가난도 악의 근원이 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물질에 대한 마음의 자세입니다. 물질에 대한 우리의 자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이 말하고 있는 가난 속에는 영적인 가난의 의미뿐만 아니라 실제적인 가난의 의미도 다 포함되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두부를 자르듯이 영적인 의미의 가난과 실제적인 의미의 가난을 구분해서는 곤란합니다.
누가 가난한 자인가?
그러면 오늘 본문이 말하는 가난한 자란 무엇을 말합니까? 한 마디로 말하면 범죄한 인간이 타락한 우리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가져야 할 마음의 태도를 말합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우리가 피조물로서, 범죄한 인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가져야 할 마음의 태도는 무엇입니까?
어떤 사람들은 여기서 가난하다는 것이 마음의 태도와 관련된 것이라고 하니까 수줍어하며 소심하거나 자신이 없거나 용기가 부족한 것으로 생각하는데 전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 예수님이 말씀하는 가난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가져야 될 마음의 태도를 가리킵니다. 하나님 앞에 철저하게 낮아지는 마음의 태도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가난한 자는 누구를 말합니까?
철저하게 자신의 죄인 됨을 인정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자신의 유일한 구세주로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무능과 약함을 철저하게 깨닫는 사람입니다.
주님! 나에게는 구원을 얻을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나는 지옥의 불못에 떨어져도 왜 내가 지옥의 불못에 떨어져야 되느냐?고 항변할 수도 없는 죄인입니다. 나는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 내게는 구원을 얻을 만한 어떤 선과 공로도 없습니다. 내게는 구원을 얻을 만한 어떤 의로움도 없습니다. 오직 주님의 은혜로만 구원을 받을 있습니다. 예수님만이 나를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주님! 나는 주님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주님이 나를 붙들어 주지 않으면 주님이 공급해 주지 않으면 나는 살 수 없습니다." 이렇게 고백하는 자가 바로 가난한 자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의 은혜가 아니면 구원받을 수도 없고 주님의 은혜가 아니면 살 수도 없음을 깨닫는 사람이 바로 가난한 자입니다. 바로 이 사람이 마음이 겸손한 자입니다.
성경에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도 있고 마음이 부요한 사람들이 많이 나옵니다. 눅 18장에 나오는 바리새인과 세리가 대표적인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과 세리가 함께 성전에 기도하러 갔습니다. 누가 봐도 바리새인은 의로운 사람이고 세리는 죄인 중에 죄인입니다. 바리새인은 당당하게 성전 앞자리로 나아가서 두 손을 번쩍 쳐들고 눈을 뜨고 기도를 시작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나는 이 세상의 사람들과는 구별된 사람입니다. 저는 토색하는 사람, 간음을 행하는 사람, 또 악한 일을 저지르는 사람과는 다릅니다. 저는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기도를 드립니다. 저는 소득의 십일조를 한번도 떼어먹지 않고 철저하게 드렸습니다.
그런데 세리는 성전의 뒷구석에서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면서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기도합니다.
그런데 누구의 기도를 들으셨습니까? 주님은 누가 의롭다하심을 얻고 집으로 내려갔다고 말씀하셨습니까? 세리입니다.
왜 세리가 의롭다함을 얻었습니까? 마음이 가난했기 때문입니다. 세리는 철저하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인 됨을 인정했습니다. 자기에게는 구원을 얻을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의 마음은 자기의 자랑과 공로와 자신의 의로움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는 마음이 부자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마음이 가난한 자가 되어야합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가 되어야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가 되어야 주님을 사모합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가 되어야 간절하게 기도합니다.
"저가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시고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 주심이로다"(시 107:9) 하나님은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십니다. 주린 영혼을 채우십니다. 그런데 사모하는 영혼, 주린 영혼이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우리교회 어떤 청년이 또 다른 한 청년에게 그렇게 말하더랍니다. 나는 건강하고 부모님이 용돈도 넉넉하게 주시고 가정에 어려움도 없고 원하는 여자 친구도 있고 원하는 대학에 다니고... 그래서인지 나는 간절하게 기도가 되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그렇게 울면서 간절하게 기도하는 사람을 보면 부러운 생각도 들지만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오늘 우리 중에 누가 간절하게 기도합니까? 누가 가슴을 치며 밤을 새워가며 기도합니까? 마음이 가난한 자입니다. 부요한 자는 절대로 간절하게 기도하지 않습니다. 부요한 자는 사모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오늘 물질의 부요함 때문에 오늘 내 안에 사모함이 사라지고 간절함이 사라진다면 그 물질은 축복이 아닙니다.
도리어 그것은 본인에게 화가 되는 것입니다. 24절의 말씀을 보세요
"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24절)
그래서 성경은 부자들에 대하여 이렇게 경고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마 19:23-24)
이 말은 부자는 무조건 지옥에 들어가고 가난한 자는 무조건 천국에 들어간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 말은 부자는 그 만큼 마음이 가난해지기가 어렵다는 말입니다. 사모하는 마음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열심히 땀 흘려 일하셔서 깨끗한 부자가 되세요. 하지만 늘 마음은 가난한 자가 되십시오. 물질의 노예가 되지 마시고 물질 때문에 안일한 가운데 빠지지 마시고 늘 가난한 마음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아와 부르짖으세요. 주님 내게는 구원을 받을 만한 어떤 것도 없습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주님 없이는 살수 없습니다. 나를 도와 주십시오. 나를 인도해 주십시오.
주님은 부르짖는 가난한 자의 기도를 들으시지 부요한 자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20절)
가난한 자가 받을 복이 무엇입니까? 가난한 자가 받아 누리게 될 복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저희 것임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누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천국을 말하는데 천국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천국은 주님의 다스림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곳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러니까 넓은 의미로서의 천국은 우리의 구원을 포함해서 구원받은 백성들이 예수 안에서 누리게 되는 모든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 천국은 바로 마음이 가난함으로 출발됩니다. 마음이 가난하지 않고서는 누구도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심령이 가난하지 않고는 누구도 천국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천국은 어떤 곳입니까? 주님의 다스림이 있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이 충만한 곳입니다. 슬픔과 고통과 죽음과 이별이 없는 곳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나라는 미래에 우리가 장차 죽어서만이 누릴 수 있는 축복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 가운데 임하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눅 11:20)
또 어느 날 바리새인들이 나아와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물을 때에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 17:20-22)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는 아직 우리 가운데 임하지 않았지만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서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우리 가운데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면서 이 축복을 미래의 것으로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리라" 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너희 것임이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 것임이다"라고 할 때 ''이다''라는 동사가 에스틴이라는 현재형이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나라의 축복은 지금 저와 여러분이 누릴 수 있는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이 세상에서 지금 하나님나라의 축복을 누리며 살아야 합니다. 지금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경험하며 살아야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축복은 지금 우리가 누려야할 축복입니다.
그러면 저와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 누리며 살아야 하나님 나라의 축복은 무엇입니까? 롬 14:17절에 보면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의롭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가운데 임하면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이 밀물처럼 밀려옵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을 누립니다. 경제적인 어려움이 계속되고 있음에도 마음에 평안이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 안에 있는 기쁨을 누립니다.
의로움과 평안과 기쁨이 하나님나라의 요소입니다. 의로움이 없는 축복은 축복이 아닙니다. 평안이 없는 축복은 축복이 아닙니다. 기쁨이 없는 축복은 축복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삶 속에서 이 의로움과 평안과 기쁨의 축복을 누리며 살고 싶지 않으세요. 돈이 있다고 기쁘고 평안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해야 평안과 기쁨의 축복이 임합니다.
또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고전 4:20)
하나님의 나라는 말이 아닙니다. 실제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면 주님의 통치가 시작되면 반드시 그곳에는 귀신이 떠나가고 병든 자가 고침을 받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나아갈 때 더러운 귀신들이 소리를 지르며 나아갑니다. 병든 자가 고침을 받습니다.
복과 화
우리는 지난 시간 평지수훈의 서론에 해당되는 "당신은 제자입니까?"라는 말씀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오늘부터는 평지수훈을 함께 묵상하면서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산상수훈에는 우리가 잘 아는 8가지의 복이 나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팔복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누가가 기록한 평지수훈에는 4개의 복과 4개의 화가 나옵니다. 20절부터 23절까지의 말씀을을 보면 "복이 있나니" "복이 있도다"라는 말이 4번 나오고 24절부터 26절까지의 말씀을 보면 "화 있을진저" "화 있도다"라는 4번 나옵니다.
왜 예수님은 4개의 복만을 말씀하시지 않으시고 4개의 복과 더불어 4번의 화(저주)를 말씀하셨을까요? 그것은 우리의 인생이 우리의 인생이 축복과 재앙, 복과 저주라는 두 상황 아래 놓여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삶의 형태는 복잡하고 다른 것 같아도 성경이 말하는 우리 인생 길에는 오직 두 개의 길만이 있습니다. 좁은 길과 넓은 길, 좁은 문과 넓은 문, 의인의 길과 악인의 길, 형통과 파멸, 복과 저주... 다른 제3의 길은 없습니다. 신 11:26절을 보면 "내가 오늘날 복과 저주를 내 앞에 두나니"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앞에 복과 저주를 두셨습니다. 그러므로 복과 저주의 선택은 나에게 달려 있습니다. 복된 길을 걷느냐? 아니면 저주의 길을 걷느냐? 그것은 내가 선택해야 할 문제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복을 받기를 원하면서 저주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생명을 원하면서도 악인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의 인생 길에는 복과 저주가 있습니다. 의인의 길과 악인의 길이 있습니다. 당신은 지금 어느 길을 걷고 있습니까? 다른 길은 없습니다. 당신은 지금 생명과 평안의 복을 원하면서도 악인의 길을 걷고 있지는 않습니까? 형통의 축복을 원하면서도 넓은 길을 향하여 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앞으로 주님이 말씀하시는 4개의 복과 4개의 재앙을 함께 묵상할 때에 잘못된 길을 걷고 있다면 그 길에서 돌이키시고 아직도 걸어야 할 인생의 길을 찾지 못하였다면 이번 기회에 그 길을 찾을 수 있기를 원합니다.
가난한 자의 복
아마 현대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가난일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유명한 사상가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가난해지지 않도록 결심하십시오. 가난은 행복의 적입니다." 어떻게 보면 가난은 악인 것 같습니다. 가난 때문에 몸을 팔고, 가난 때문에 낳은 자식을 버리고, 가난 때문에 학업을 포기하고, 가난 때문에 도적이 되고, 가난 때문에 하나밖에 없는 생명을 끊는 사람들을 보면 가난이 모든 비참의 원인이 되고 사회악을 키우는 온상이 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가난이라는 용어를 서슴치 않고 사용하십니다. 도리어 가난 한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20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가라사대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20절)
예수님은 지금 누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까? 가난한 자입니다. 마태는 가난한 자의 복을 말할 때 그 앞에 "심령"이라는 말을 덧붙여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마 5:3) 고 말합니다. 그런데 누가는 가난한 자 앞에 아무런 수식어도 없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마태가 기록한 산상 수훈에서 말하는 가난은 영적인 가난을 말하고 누가가 기록한 평지 수훈에서 가난은 영적인, 심령의 가난이 아니라 육체적이고 실제적인 가난을 의미한다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이 말씀을 "가난한 사람은 영적으로 복이 있나니..."라고 읽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가난을 권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 어느 곳을 보아도 가난 그 자체를 미화하거나 권장하는 곳은 한 군데도 없습니다. 성경은 가난을 미화하지도 않지만 부자를 정죄하지도 않습니다. 성경은 돈 그 자체를 부정하거나 죄악시하거나 정죄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가난이 좋은 것이다 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는 것은 경제적으로 빈궁하고 궁핍하게 사는 자가 복이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물질이 있고 없고를 문제삼으신 것이 아니라 물질에 대한 태도를 문제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하기를 원하는 자는 가난에 시달리며 살아야 된다는 그런 말씀이 아닙니다. 성경은 도리어 우리가 깨끗한 부자가 되어 선한 일에 귀하게 쓰임받는 청지기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딤전 6:17절을 보면 "하나님은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그 모든 것 속에는 물질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신 8:18절에는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을 주셨음이라" 재물이 악하고 더러운 것이라면 하나님께서 왜 인간에게 재물 얻을 능을 주시겠습니까? 시 112:2-3절을 보면 "그 후손이 땅에서 강성함이여 정직자의 후대가 복이 있으리로다 부요와 재물이 그 집에 있음이여..."
부요와 재물을 하나님이 주신 축복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물질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을 종합해 볼 때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물질 그 자체는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되 물질에 대하여 어떤 자세를 가지고 있느냐? 그리고 물질을 관리하는 자가 어떻게 그것을 사용하느냐에 따라 물질이 선도 될 수 있고 악도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난이 반드시 경건하다'' 든지 ''부하고저 하는 것은 죄다''라고 생각하여 함부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물질을 말할 때 가난과 부요를 말할 때 양 극단을 조심해야 합니다. 가난이 우리의 신앙생활에 언제나 유익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궁핍이 우리에게 천국을 확실하게 보장해 주거나 영적 경건을 풍성하게 해주는 것도 아닙니다. 때로는 풍요로움이 악의 근원이 될 수 있듯이 가난도 악의 근원이 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물질에 대한 마음의 자세입니다. 물질에 대한 우리의 자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이 말하고 있는 가난 속에는 영적인 가난의 의미뿐만 아니라 실제적인 가난의 의미도 다 포함되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두부를 자르듯이 영적인 의미의 가난과 실제적인 의미의 가난을 구분해서는 곤란합니다.
누가 가난한 자인가?
그러면 오늘 본문이 말하는 가난한 자란 무엇을 말합니까? 한 마디로 말하면 범죄한 인간이 타락한 우리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가져야 할 마음의 태도를 말합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우리가 피조물로서, 범죄한 인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가져야 할 마음의 태도는 무엇입니까?
어떤 사람들은 여기서 가난하다는 것이 마음의 태도와 관련된 것이라고 하니까 수줍어하며 소심하거나 자신이 없거나 용기가 부족한 것으로 생각하는데 전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 예수님이 말씀하는 가난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가져야 될 마음의 태도를 가리킵니다. 하나님 앞에 철저하게 낮아지는 마음의 태도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가난한 자는 누구를 말합니까?
철저하게 자신의 죄인 됨을 인정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자신의 유일한 구세주로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무능과 약함을 철저하게 깨닫는 사람입니다.
주님! 나에게는 구원을 얻을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나는 지옥의 불못에 떨어져도 왜 내가 지옥의 불못에 떨어져야 되느냐?고 항변할 수도 없는 죄인입니다. 나는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 내게는 구원을 얻을 만한 어떤 선과 공로도 없습니다. 내게는 구원을 얻을 만한 어떤 의로움도 없습니다. 오직 주님의 은혜로만 구원을 받을 있습니다. 예수님만이 나를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주님! 나는 주님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주님이 나를 붙들어 주지 않으면 주님이 공급해 주지 않으면 나는 살 수 없습니다." 이렇게 고백하는 자가 바로 가난한 자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의 은혜가 아니면 구원받을 수도 없고 주님의 은혜가 아니면 살 수도 없음을 깨닫는 사람이 바로 가난한 자입니다. 바로 이 사람이 마음이 겸손한 자입니다.
성경에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도 있고 마음이 부요한 사람들이 많이 나옵니다. 눅 18장에 나오는 바리새인과 세리가 대표적인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과 세리가 함께 성전에 기도하러 갔습니다. 누가 봐도 바리새인은 의로운 사람이고 세리는 죄인 중에 죄인입니다. 바리새인은 당당하게 성전 앞자리로 나아가서 두 손을 번쩍 쳐들고 눈을 뜨고 기도를 시작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나는 이 세상의 사람들과는 구별된 사람입니다. 저는 토색하는 사람, 간음을 행하는 사람, 또 악한 일을 저지르는 사람과는 다릅니다. 저는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기도를 드립니다. 저는 소득의 십일조를 한번도 떼어먹지 않고 철저하게 드렸습니다.
그런데 세리는 성전의 뒷구석에서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면서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기도합니다.
그런데 누구의 기도를 들으셨습니까? 주님은 누가 의롭다하심을 얻고 집으로 내려갔다고 말씀하셨습니까? 세리입니다.
왜 세리가 의롭다함을 얻었습니까? 마음이 가난했기 때문입니다. 세리는 철저하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인 됨을 인정했습니다. 자기에게는 구원을 얻을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의 마음은 자기의 자랑과 공로와 자신의 의로움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는 마음이 부자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마음이 가난한 자가 되어야합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가 되어야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가 되어야 주님을 사모합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가 되어야 간절하게 기도합니다.
"저가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시고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 주심이로다"(시 107:9) 하나님은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십니다. 주린 영혼을 채우십니다. 그런데 사모하는 영혼, 주린 영혼이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우리교회 어떤 청년이 또 다른 한 청년에게 그렇게 말하더랍니다. 나는 건강하고 부모님이 용돈도 넉넉하게 주시고 가정에 어려움도 없고 원하는 여자 친구도 있고 원하는 대학에 다니고... 그래서인지 나는 간절하게 기도가 되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그렇게 울면서 간절하게 기도하는 사람을 보면 부러운 생각도 들지만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오늘 우리 중에 누가 간절하게 기도합니까? 누가 가슴을 치며 밤을 새워가며 기도합니까? 마음이 가난한 자입니다. 부요한 자는 절대로 간절하게 기도하지 않습니다. 부요한 자는 사모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오늘 물질의 부요함 때문에 오늘 내 안에 사모함이 사라지고 간절함이 사라진다면 그 물질은 축복이 아닙니다.
도리어 그것은 본인에게 화가 되는 것입니다. 24절의 말씀을 보세요
"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24절)
그래서 성경은 부자들에 대하여 이렇게 경고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마 19:23-24)
이 말은 부자는 무조건 지옥에 들어가고 가난한 자는 무조건 천국에 들어간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 말은 부자는 그 만큼 마음이 가난해지기가 어렵다는 말입니다. 사모하는 마음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열심히 땀 흘려 일하셔서 깨끗한 부자가 되세요. 하지만 늘 마음은 가난한 자가 되십시오. 물질의 노예가 되지 마시고 물질 때문에 안일한 가운데 빠지지 마시고 늘 가난한 마음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아와 부르짖으세요. 주님 내게는 구원을 받을 만한 어떤 것도 없습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주님 없이는 살수 없습니다. 나를 도와 주십시오. 나를 인도해 주십시오.
주님은 부르짖는 가난한 자의 기도를 들으시지 부요한 자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20절)
가난한 자가 받을 복이 무엇입니까? 가난한 자가 받아 누리게 될 복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저희 것임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누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천국을 말하는데 천국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천국은 주님의 다스림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곳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러니까 넓은 의미로서의 천국은 우리의 구원을 포함해서 구원받은 백성들이 예수 안에서 누리게 되는 모든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 천국은 바로 마음이 가난함으로 출발됩니다. 마음이 가난하지 않고서는 누구도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심령이 가난하지 않고는 누구도 천국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천국은 어떤 곳입니까? 주님의 다스림이 있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이 충만한 곳입니다. 슬픔과 고통과 죽음과 이별이 없는 곳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나라는 미래에 우리가 장차 죽어서만이 누릴 수 있는 축복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 가운데 임하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눅 11:20)
또 어느 날 바리새인들이 나아와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물을 때에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 17:20-22)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는 아직 우리 가운데 임하지 않았지만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서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우리 가운데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면서 이 축복을 미래의 것으로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리라" 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너희 것임이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 것임이다"라고 할 때 ''이다''라는 동사가 에스틴이라는 현재형이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나라의 축복은 지금 저와 여러분이 누릴 수 있는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이 세상에서 지금 하나님나라의 축복을 누리며 살아야 합니다. 지금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경험하며 살아야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축복은 지금 우리가 누려야할 축복입니다.
그러면 저와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 누리며 살아야 하나님 나라의 축복은 무엇입니까? 롬 14:17절에 보면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의롭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가운데 임하면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이 밀물처럼 밀려옵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을 누립니다. 경제적인 어려움이 계속되고 있음에도 마음에 평안이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 안에 있는 기쁨을 누립니다.
의로움과 평안과 기쁨이 하나님나라의 요소입니다. 의로움이 없는 축복은 축복이 아닙니다. 평안이 없는 축복은 축복이 아닙니다. 기쁨이 없는 축복은 축복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삶 속에서 이 의로움과 평안과 기쁨의 축복을 누리며 살고 싶지 않으세요. 돈이 있다고 기쁘고 평안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해야 평안과 기쁨의 축복이 임합니다.
또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고전 4:20)
하나님의 나라는 말이 아닙니다. 실제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면 주님의 통치가 시작되면 반드시 그곳에는 귀신이 떠나가고 병든 자가 고침을 받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나아갈 때 더러운 귀신들이 소리를 지르며 나아갑니다. 병든 자가 고침을 받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