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성수목사 (대한예수교장로회 원당교회 청년부)

세배대와 살로메의 아들이며 야고보의 남동생이었던 요한은 그 이름의 뜻대로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콤플렉스에 시달리며 제 잘난 맛에 살던 그를 부르시고 그를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로 사랑의 사도로 멋지게 세워 주셨습니다.

일등 콤플렉스
야고보와 요한은 마치 쌍둥이처럼 비슷한 점이 많았습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다 버리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화끈한 결단력이 있는 사람들이었으며 둘 다 성격도 급했습니다.(막 3:17) 그의 집안 분위기는 모 아니면 도의 집안이었고. 그래서 매우 열정적이고 의욕적이었습니다.

그의 어머니 성격 또한 대단했습니다. 자식들을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나서는 엄마였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부터 사역에 동참한 여제자 중 한 사람으로서(막 15:40,41) 예수님께서 끌려가실 때 가슴을 치며 통곡한 여인들 중 한 사람입니다.(눅 23:28) 그는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시는 예수를 눈물로서 지켜본 여인이었고(막 15:40) 향유를 가지고 무덤에 갔다가 천사로부터 예수님의 부활의 소식을 첫 번째로 듣는 영광을 얻기도 했던 여인이었습니다.(눅 24:1-8) 그리고 그 소식을 사도들에게 증거한 사람(눅 24:9-10)이기도 했습니다.
이런 집안 분위기이다 보니 요한 또한 늘 최선과 최고를 추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늘 최고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그를 짓눌렀을 것입니다.

요한은 이같이 1등이 되고자 하는 경쟁심이 강하였으며, 그만큼 앞만 보고 달렸으므로 편협하고 지는 것을 싫어했습니다.

한번은 어떤 자가 예수님 이름으로 귀신을 붸아냈습니다. 그러자 요한이 펄펄 뜁니다. 선생님 우리를 따르지도 않는 어떤 자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붸아 내더이다. 아 이럴 수가 있습니까? 멤버도 아닌 것이..

그는 그러한 이적을 남이 행하는 것을 보고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못하게 해야지 사람들이 그 사람 따라하면 어떻합니까? 우리 패도 아닌데 예수 이름 팔고 다니면 안되지요...

딱 야고보와 판박이입니다 요한 또한 엘리트 의식을 벗지 못하고 있습니다. 자신들의 기득권을 침해받지 않기 위해 세워 놓은 자신들만의 룰을 가지고 복음을 독점하려 하고 있었습니다. 아량과 사랑은 간곳없고 사람들로부터 자신들을 격리시키고 사람들을 떼어 내려하고 있습니다. 묘한 특권의식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요한도 야고보처럼 그리스도의 왕국 건설을 위해 자신은 택함을 받았으며 그중에서도 자기는 우편 혹은 좌편에 앉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 또한 귀족문화에 젖어 있었습니다. 우리는 다르다는 것이지요. 노는 물 자체가 다르고 쓰는 말도 다르고 자신들은 한 차원 높은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너! 나 좀 보자^^*
하나님께서는 야고보와 비슷한 요한을 다른 방법으로 다루십니다

1. 이 병에는 사랑이 약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을 특별히 사랑으로 보살펴 주셨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제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최후의 만찬 때에는 예수님의 품에 안겨 음식을 먹었습니다(요 13:25) 이러한 주님의 사랑이 요한을 변화시키기 시작합니다. 그는 주님의 사랑을 깊이 체험한 이후 요한 서신을 쓰게 됩니다. 요한 1서 4장 16절에서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고 고백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2. 최후의 한사람으로
예수님의 12 제자 중 십자가 처형의 현장을 유일하게 목격한 사람이 있다면 그는 사도 요한입니다. 그래서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 나오지 않은 말이 요한복음에는 나옵니다. 대표적으로 십자가상 7언 중 “내가 목마르도다”, 와 “다 이루었도다”라는 말은 요한복음에만 나옵니다. 창에 찔린 옆구리에서 물이 나오는 것도 요한복음에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그는 주님의 마지막을 끝까지 지킨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마지막 부탁을 들을 수 있었으며, 그러한 그에게 예수님은 어머니를 그에게 부탁하였습니다. 그는 빈 무덤을 확인하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그 후 사도 요한은 산헤드린에서 심문을 받기도 하고 갖은 핍박을 당하지만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그곳에 머무릅니다. 그리고 결국 도미티안 황제의 교회 박해 시절에 지중해의 밧모섬에 유배를 당하여 순교하는 최후의 순교자가 됩니다.

3. 사랑의 사도로
아무리 실력과 능력 갖췄을지라도 마지막 절정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사랑이 있어야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사랑하는 제자 요한에게 사랑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나 예수님과 함께 지내면서 차츰 변화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자신만 생각하고 앞만 보고 달려가던 그가 다른 사람을 돌아보며 다른 사람을 섬길 줄 아는 사람으로 변화되어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행전 8장 14절에 기가 막힌 사건 하나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보냈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살아계셨을 때 야고보와 요한은 그들을 거절하는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하늘에서 불을 내려 줄 것을 요구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이제 사랑의 사도가 되어 저들에게 선교사로 파송된 것입니다.

4. 두려움 없는 사람으로
사랑의 힘은 무섭습니다 사랑은 두려움을 없애줍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로마 군병들이 왔을 때 다 도망하였으나(마 26:56) 다시 돌아온 사람은 요한이었습니다. 요한은 대제사장의 뜰까지 따라왔습니다(요 18:15). 그리고 갈보리 언덕까지 따라 갔습니다. 그가 쓴 요한 1서 4장 18절을 보면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붸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5. 섬김의 지도력을 배워
예수님께서는 독불장군과 같은 그를 베드로와 붙여 주십니다. 그는 나이가 어린 사도였지만 아무나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사도행전에 들어와 보면 요한은 베드로와 함께 다닙니다. 예수님 생전에 예수님의 품에서 사랑받던 요한은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를 그림자처럼 따라 다니면서 그와 사역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하는 제자 요한에게 적극적 성격의 베드로를 보완하며 잘 조화를 이루도록 계획하셨던 것입니다. 기도하기 위해 성전으로 올라가다가 성전 미문의 앉은뱅이를 고친 사건(행 3:1-10) 이후로 요한은 계속해서 베드로와 함께 등장합니다.

6. 다 갖춘 사람으로
주님께서는 그의 요구대로 일인자를 만들어주셨습니다. 그의 어머니 살로매의 요청대로 하나는 예수님의 우편에 또 하나는 예수님의 좌편에 앉게 하셨습니다. “너희가 나의 마시려는 잔을 마실 수 있느냐”라고 물었던 주님께서는 야고보는 최초의 순교자로 요한은 최후의 순교자로 삼아 주셨습니다.
또한 성도의 3가지 덕목, 곧 믿음과 소망과 사랑 이 세 가지를 두루 갖춘 성숙한 순교자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가 쓴 요한복음과 요한 일, 이, 삼서 그리고 요한 계시록은 각각 이 세 가지를 잘 나타내 주고 있는데, 그의 믿음은 요한복음에서, 그의 소망은 계시록에서 그리고 그의 사랑은 요한 1~3서에서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는 이같이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있었기에 뿌리가 있었습니다.

결론
사도행전을 보면 베드로가 일인자 같고 요한은 이인자나 헬퍼처럼 보이지만 지금 미국에서 베드로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은 30만, 요한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은 600만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우스운 얘기지요.. 하지만 온유한 자가 땅을 다 차지한다는 성경의 원리가 아닐까요?
우리는 최고가 아니면 곧 묻혀버리고 마는 살벌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누구도 이등은 기억하지 않는다는 광고의 카피처럼 일류를 꿈꾸는 일류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섬김은 아주 거추장스럽고 한심한 소리쯤으로 들릴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양보라고는 씨가 말라 찾을래야 찾을 길이 없는 이 시대에 사랑으로 섬김으로 헬퍼쉽의 달인이 된 요한을 모델로 세우고 계시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