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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건용 목사 (향린교회)
그 나무는 죽었을까, 살아 있을까?
며칠 전에 마당에 죽어버린 것 같은 나무가 있어 뽑았습니다. 그 나무를 뽑으면서 ‘아차!’ 하는 생각에 후회했습니다. 혹시 나무가 아직 살아 있는데 뽑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작년에 달리아 몇 뿌리를 마당에 심었습니다. 그 뿌리들은 여러 달 전에 심으려고 샀는데 게을러서 차일피일 심기를 미루다가 마침내 심었던 것입니다. 과연 몇 달 동안 봉지 속에 들어 있던 뿌리에서 싹이 날까에 대해 저는 지극히 회의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렇게 심은 달리아 뿌리에서 싹이 난 것을 봤습니다. 신기했습니다. 그 끈질긴 생명력에 경외심이 생길 정도였습니다. 죽었다고 생각하고 나무를 뽑아 버린 일에 대해 ‘아차!’ 했던 이유가 바로 끈질긴 자연의 생명력을 과소평가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부활절입니다. 예년과 마찬가지로 아침 8시에 브랜드 공원에서 미국교회가 주관하여 지역 주민들과 함께 부활절 해돋이 예배를 드렸습니다. 해마다 이 예배를 드릴 때 경험하는 것인데 오늘도 예배를 드리면서 주위를 살펴보니 나뭇가지들에서 새순이 돋아나고 있었습니다. 지난 몇 주 동안 비가 많이 와서 그런지 새순들은 더욱 산뜻한 연초록 빛깔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누렇게 말라빠져 다시는 거기서 새순이 돋을 것 같지 않던 나뭇가지들에서 빛깔도 찬란한 연한 초록색 새순들이 돋아나고 있었습니다. 이를 보면서 저는 ‘이것이 부활이 아니면 무엇이랴! 자연의 부활!’ 이라는 생각이 들어 감격했습니다.
부활신앙이라고 다 같지는 않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부활을 믿었던 최초의 사람들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 이전에도 부활을 믿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외경 마카비서를 보면 유대인들이 박해를 당해 죽어가면서 “우리는 반드시 부활할 것이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반드시 다시 살리실 것이다.” 라며 부활신앙을 고백하는 얘기가 나옵니다. 그들도 죽은 후에 다시 부활할 것을 믿었던 것입니다. 유대교 중 바리새인들도 부활을 믿었다고 했고 아마 유대교 이외에도 부활을 믿는 종교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의 부활신앙에는 여타의 종교가 믿었던 부활신앙과 몇 가지 면에서 다른 점이 있습니다. 특히 마카비서에 나오는 유대인들의 부활신앙과는 다음 두 가지 면에서 차이를 보입니다.
첫째로, 마카비서의 유대인들이 믿었던 부활신앙의 중심에는 ‘복수’라는 주제가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아시다시피 유대인들은 오랫동안 남의 나라의 식민지로 살았습니다. 주전 8세기에 북 왕국이 아시리아에게, 그리고 주전 6세기에 남 왕국이 바빌론에게 멸망을 당한 후 줄곧 이스라엘은 남의 나라 식민지 생활을 했습니다. 이 시기에 당했던 압박과 설움이 얼마나 컸는지는 우리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식민지 제국에 대한 저항운동이 없었을 리 없지만 그 저항운동은 모두 실패로 돌아갔고 대부분의 경우 더 큰 압박을 불어왔을 뿐입니다.
하느님의 선택된 민족임을 자부하며 살아온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와 같은 처참한 정치적 상황을 자기들의 신앙과 연관시킬 수가 없었습니다. 자기들의 신앙으로 보면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나 너무도 오래 지속되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억울한 사정을 들어주시지 않는가? 하느님은 우리를 버리셨을까?” 여기서 생겨난 신앙이 부활신앙이었습니다. “지금은 비록 우리가 이렇게 처절하게 고난을 당하고 죽어가지만 우리는 반드시 다시 부활할 것이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다시 살리셔서 부활하여 너희들을 지배하게 하실 것이다.” 이렇듯 유대인들의 부활신앙의 중심에는 ‘복수’라는 동기가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의 부활신앙은 이와 달랐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당신을 괴롭히고 죽음으로 몰고 간 세력은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그들을 찾아가 복수하겠다는 생각이 예수께는 추호도 없었습니다. 대신 예수님은 절망에 빠져 있던 제자들을 찾아가셨습니다. 그들에게 복수를 부탁하시지 않고 대신 그들에게 생명을 불어넣어주셔서 그 생명을 세상에 나눠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복수를 위한 부활이 아니라 생명을 위한 부활, 용서와 화해를 위한 부활이었던 것입니다. 이 점에서 그리스도교의 부활신앙은 이전에 부활신앙을 갖고 있었던 사람들의 그것과 달랐습니다.
둘째로, 그리스도교 이전에 부활신앙을 갖고 있던 사람들은 부활을 믿기는 했지만 부활한 사람을 본 적은 없었습니다. 그냥 추상적으로 부활을 믿었을 뿐이지, 그 신앙을 확고하게 만들어주고 삶으로 체화(體化)할 증거를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부활의 확신을 가져다줄 그 무엇도 갖고 있지 않았다는 얘기입니다.
그리스도교의 부활신앙은 이런 점에서 과거의 부활신앙과 달랐습니다. 그들은 부활하신 분을 눈으로 봤다고 했습니다! 첫 그리스도인들의 부활신앙은 막연한 기대가 아니었습니다. 근거 없는 희망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부활하신 분을 눈으로 봤고 손으로 만졌고 얼싸안았으며 대화를 나눴고 식탁을 같이 했습니다.
이렇듯 제자들에게 확신을 주시기 위해 부활하신 예수님은 나타나셨던 모양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여인들에게 나타나셨고 베드로를 위시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으며 생전에 한 번도 예수님을 보지 못했던 바울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한꺼번에 5백 명의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적도 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복수의 부활이 아니라 생명의 부활이었습니다. 마른 가지에 새순이 돋는 것은 억울해서 돋아나는 것도 아니고 누군가에게 복수하려고 돋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만물을 새롭게 하여 온 세상이 생명의 기운으로 차고 넘치게 하려는 조물주의 새로운 창조 행위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부활도 인류를 새롭게 하시려는 하느님의 원대한 새 창조 행위의 절정이었습니다.
부활의 초대장을 받고 응했기에
우리는 가끔 초대장을 받습니다. 결혼식 초대장일 수도 있고 그 밖의 행사나 잔치 초대장일 수 있습니다. 초대장을 받으면 우선 갈 것인지 안 갈 것인지를 결정해야 합니다. 참석하기로 했으면 미리 참석하겠다는 의사를 초청자에게 전하는 것이 예의입니다. 참석하지 않겠다고 통보하는 것은 물론 적극적인 거절의 의사표시이지만 무응답 역시 불참 의사로 간주됩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은 마음이 ‘너그러워’ 참석 의사를 밝힌 사람 숫자 이상으로 자리와 음식을 준비하지만 서양 사람들에게는 이런 ‘너그러움’이 없습니다. 그래서 참석의사를 미리 알리지 않고 행사에 갔다가 자리가 없어 낭패를 보는 수도 있습니다.
저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사건을 하느님이 인류에게 보내신 초대장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그 어떤 초대장도 그것을 거절한다고 큰 일이 일어나지는 않습니다. 다만 그 행사나 잔치가 준비한 것들을 경험하지 못할 뿐이고 좀 더 나아가면 초대자에게 좋지 않은 인상을 남길 뿐입니다. 초대받은 행사에서 갖는 경험이 인생을 살아가는 데 반드시 필요한 것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께서 인류에게 보내신 초대장도 거절하려면 거절할 수 있습니다. 사실 수많은 사람들이 지금까지 거절해왔고 지금도 거절하고 있습니다. 그랬다고 해서 당장 무슨 일이 일어나지는 않을 터입니다. 하지만 어떤 초대장이든 거절한다면 그 초대장이 초대한 자리에서 일어나는 일은 경험하지 못합니다. 잔치라면 그 잔치에 차려진 음식은 맛보지 못할 것이고 행사라면 그 행사에서 일어난 일은 경험하지 못할 것입니다.
저는 부활이라는 초대장을 받아들였으므로 거절한 쪽에서는 어떤 경험을 하면서 살아가는지 잘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이 초대장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지금 제가 누리고 있는 기쁨과 보람과 행복에 대해서는 얘기할 수 있습니다.
부활이라는 하느님의 초대를 받아들인 저는 희망을 갖고 살고 있습니다. 아무리 어려운 일을 당하더라도 그것이 끝이 아니라는 믿음이 제게는 있습니다. 억지로 그런 믿음을 가지려고 노력해서 갖게 된 것이 아니라 저절로 생겨납니다. 이 초대를 받아들였으므로 저는 저만 특권을 누리는 것보다는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며 사는 것이 얼마나 더 행복한 삶인지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이 초대를 받아들였기에 아직은 어둡고 추운 세상에서도 하느님 나라가 언젠가는 올 것을 기다리며 작은 믿음의 공동체를 만들려고 노력할 수 있습니다. 이 초대를 받아들였기에 저는 세상을 향한 하느님의 궁극적인 메시지가 사랑이요 희망임을 믿게 됐고 그 믿음 때문에 오늘의 고단한 삶도 기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 모든 일들이 부활사건이라는 하느님의 초대장을 받고 ‘참석하겠음’ 난에 표기를 해서 보냈기에 가능해진 일이라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부활절이 오면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즐거운 부활절!’을 외치는 것입니다.
Happy Easte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