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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규목사 (순복음인천교회)
오늘 이 시간에는 "너도 봉사하라.", 이 같은 말씀으로 은혜를 받습니다. 한번 따라하시겠습니다. "너도 봉사하라." 우리 예수님이 각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지금 말씀하신 음성으로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다시 한번 따라하겠습니다. "너도 봉사하라."
성도들에게 봉사가 뭐냐고 물으면, 하나님과 교회를 위해서 시간과 물질을 들여서 "내가" 하는 일이다.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이것은 50점짜리 해답입니다.
자 그럼 봉사가 뭘까? 봉사란, 예수님께 오병이어를 드린 어린아이처럼, 또 이웃을 위해서 옷을 만든 도르가처럼 나의 모든 것을 바쳐서, 나의 모든 것을 들여서 "주님"이 역사하시는 것, 이것이 진정한 봉사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봉사가 있는 곳에는, 인간의 자랑은 사라지고 주님의 영광이 드러납니다. 또 나뿐만 아니라 이웃까지 유익을 얻는 것입니다. 진정한 봉사, 나만 좋은 것이 아니라, 남에게 유익을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시간 성경적인 봉사에 대해서 알아봄으로, 하나님께 봉사할 뿐만 아니라, 사람에게도 봉사하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하나님을 잘 섬길 뿐만 아니라, 사람을 위해서도 봉사하는 성도가 되십시다.
첫째, 봉사는 인격
첫째로 봉사는 인격입니다. 한 번 따라하시겠습니다. 봉사는 인격이다. 그렇습니다. 봉사를 통해서 그 사람의 인격을 알 수 있습니다. 학벌 좋습니다. 지식도 좋습니다. 건강도 좋습니다. 또 아름다움도 좋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뭐냐? 그의 인격입니다. 그러면 그의 인격은 무엇을 통해서 알 수 있느냐? 그 사람의 봉사하는 삶을 통해서 그 사람의 인격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보혈로 변화된 인격으로 봉사해야 됩니다. 예수를 믿고 구원의 확신을 얻고, 또 예수님의 영 하나님의 영 성령으로 세례를 받고 성령 충만함 받아서 은사를 체험하고, 또 성령 충만함 받아서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삶을 통해서 우리가 인격의 변화로 봉사할 때, 그 봉사야말로 정말로 주님이 기뻐하시는 봉사다. 상 받는 봉사이다.
그럼 인격이란 뭘까?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을 때 자기가 하는 행동입니다. 빌 하이벨스 목사가 그렇게 말했습니다. 인격이 뭐냐고요?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을 때 자기가 하는 행동, 이것이 인격이다. 누가 볼 때 하는 것, 그것이 인격이 아니다. 아무도 안보는 데 자기가 하는 행동, 이것이 인격입니다.
아무도 보는 이가 없을 때, 나의 생각, 나의 말, 나의 행동은 어떤가?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을 때, 내 생각, 나의 말, 나의 행동은 어떤가? 한번 생각해 봐야 할 것입니다. 특히 나보다 부족한 면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나는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나보다 학식이 부족하고, 나보다 돈이 없고, 나보다 가진 게 없고, 세상 사람들이 멸시하고 천대하는 사람에게 나는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이것을 점검해 봐야 할 것입니다.
인간은 서로 서로 자기 자랑 맛에 살려고 합니다. 그러나 인격은 나만이 아는 내 속 사람이다. 이렇게 말합니다. 나만이 아는 내 속의 사람, 나만이 알 수 있는 내 속의 사람, 이것이 인격이다. 그 안에 성령이 계시면 우리의 봉사는 영혼을 살립니다. 그 안에 성령이 계시면,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주고, 다른 사람들에게 평안함을 줍니다. 그러나 그 안에 죄가 가득하면 사망을 가져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아픔을 주고, 상처를 줍니다.
예수님의 마음 곧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하는 봉사, 그것이 진정한 산 봉사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을 통해서 주님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빌립보서 2장 3절 말씀이십니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고 구원받은 우리가, 성령의 은사를 받은 우리가 변화된 인격으로 봉사할 때, 그것이 참 봉사다.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주는 봉사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봉사요, 상 받는 봉사인 것입니다.
또 예수님의 마음을 품은 자는 주님만 바라보고 봉사합니다. 구원의 확신이 있는 사람, 성령세례 받은 사람,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 성령에 사로잡힌 사람,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 그 사람 봉사하되, 주님만 바라보고 봉사합니다. "누가 나를 칭찬해 줄 꺼야. 나는 상 받을 꺼야." 그것 때문에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위에서 아무 죄도 없이 그렇게 매 맞으시고, 그렇게 가시관 쓰시고, 그렇게 양손과 양발에 못 박히시고 달리셔서 얼마나 고통스러우셨든지 "엘리 엘리 라마 사막다니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신 예수님. 십가가에서 죽으신 그 예수님을 바라본다 그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봉사를 하다보면 문제가 일어날 때가 있습니다. 또 불평 불만이 나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것은 주님만 바라보아야 할 것인데, 주님만 바라보지 않고 다른 사람과 비교하기 때문에. 그 마음에 예수님을 모시기보다는 많은 일과 염려와 근심이 가득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마리아와 마르다를 비교합니다. 마리아는 동생이고 마르다는 언니인 것입니다. 그 언니 마르다가 동생 마리아를 원망합니다. 또 예수님께 불평합니다. 불만을 토로합니다. 마르다는 그 뜻이 "여주인"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 봉사의 주인이 ''내''가 되어서, 봉사라는 명목 하에 마음대로 행동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게 봉사를 하다가 상처받는 사람도 있고, 봉사하는 사람 때문에 상처받는 사람 있습니다. 주님이 기뻐하시지를 않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또 사람에게 봉사하기 위해서 아무 죄도 없으시면서, 아무 흠도 없으시면서, 아무 잘못도 없으시면서 우리 예수님 이 땅에 오셔서 그렇게 매맞으셨습니다. 그렇게 가시관 쓰셨습니다. 그렇게 양손과 양발에 못 박히시고 죽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아무 불평도 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잠잠하셨습니다. 입도 열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오시기 6백여년 전에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예수님이 하실 일에 대하여 이렇게 예언해 놓았습니다. 이사야서 53장 7절 말씀이십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봉사는 인격입니다. 누가 봉사할 수 있냐고요? 구원의 확신이 있는 사람, 성령 받은 사람, 성령의 은사를 받은 사람.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한 봉사, 이 봉사가 참 봉사요, 그런 봉사를 통해서 그 사람이 인격이 나타난다. 그 말인 것입니다.
둘째, 봉사는 상급
두 번째, 봉사는 상급이다. 한 번 따라하시겠습니다. 봉사는 상급이다.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상 받기를 좋아합니다. 이 땅에서도 상 받기를 좋아하고, 하나님 나라 가서 면류관 받기를 좋아합니다. 물론 하나님은 상 주기를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히브리서 11장 6절에 히브리서 기자가 이렇게 말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열심히 봉사하면, 이 땅에서 "신앙성장"의 축복을 받습니다.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에 우리가 제일 큰복이 뭐냐고요? 건강한 것 물론 복입니다. 자손 잘 되는 것 복입니다. 부유한 것도 복입니다. 가정이 행복한 것도 복입니다. 사업이 형통한 것도 복입니다. 지위와 권세가 올라가는 것도 복입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 제일 큰복이 뭐냐? "신앙성장"이 복인 것 믿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요한 3서 2절에서 주님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말씀했습니다. 그러므로 영혼이 잘되면 신앙이 성장하면 범사도 잘 되고, 신앙이 성장하면 영혼이 잘 되면 건강하게 살 수 있다. 그러므로 가정행복, 자녀가 형통하는 것, 건강 하는 것, 부유한 것, 범사에 형통하고 강건한 축복을 누가 받을 수 있습니까? 신앙이 성장한 사람이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 살아가면서 제일 복이 뭐냐? 신앙 성장하는 거요, 믿음이 올라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들이여, 여러분의 신앙이 성장되고, 여러분의 믿음이 올라가는 복을 받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신앙성장의 복을 받기를 정말 원하시면 "아멘" 하겠습니다.
에베소서 4장 11절로 13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의 신앙이 성장하고,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성장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날 비만과 성인병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도 신앙의 비만과 성인병 환자들이 증가하고 있다. 이것도 우리가 알아야 될 것입니다. 은혜도 많이 받았는데, 성경공부도 많이 했는데, 은사도 많이 체험했는데, 그런데 봉사하지 아니해서, 베풀지 않아서, 헌신하지 아니해서, 희생하지 않아서, 신앙의 비만과 어려움을 당하는 성도가 교회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사람을 위한 봉사에 인색하거나, 또 자신의 봉사를 자랑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기를 즐겨합니다. 은혜는 많이 받았는데, 봉사하지 않거나, 또 봉사를 하면서도 사람들을 비판하거나 정죄한다면, 둘 다 잘못된 것입니다. 은사를 많이 받고 봉사 안하는 것도 잘못 됐지만, 봉사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비판하고 정죄하는 것도 다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봉사는 성도의 의무이므로, 하나님이 상을 주시지 않아도 한다. 그런 자세가 되야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 말씀하십니다. "거저 받은 것 거저 주어라."
아담의 혈통으로 태어난 우리들, 나도 너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모두가 죄인입니다. 죄 값으로 말미암아 멸망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죄 값으로 말미암아 지옥에 가야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예수님 대신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시고, 성령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예수를 주라고 시인했습니다. 그러므로 아무 공로 없이 우리는 구원받았습니다. 아무 공로 없이 하나님 아들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게 보통 은혜가 아닙니다. 보통 축복이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봉사의 훈련을 통해서 우리들의 신앙을 성장시키기를 원하시고, 또 삶의 기쁨을 주셔서, 또 그 뿐이 아닙니다. 자손이 잘 되는 축복을 주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시편 37편 26절에서 말씀하십니다. "저는 종일토록 은혜를 베풀고 꾸어 주니 그 자손이 복을 받는도다"
또 그 뿐이 아닙니다. 열심히 봉사하는 자에게는 땅에서만 신앙성장고과 땅에서만 영혼 모두가 잘 되는 것이 아니라, 열심히 봉사하는 자에게는 하늘의 면류관이 예비되어 있습니다. 하늘의 면류관.
그렇습니다. 이 시대의 인간관계는 자신의 유익을 따라서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사람에게 봉사할 때, 대가를 바라지말고 가난한 자, 고아, 과부, 그리고 장애인들을 섬기라고 명령하십니다. 누가복음 14장 13절로 14절 말씀이십니다. "잔치를 배설하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저는 자들과 소경들을 청하라 그리하면 저희가 갚을 것이 없는 고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 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니라" 말씀했습니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 주님이 상을 주신다. 주님이 면류관 주신다. 그 말씀이신 것입니다. 잔치를 배설하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 또 장애자들, 소경들, 멸시 받고 천대 받는 자들, 그들을 초청해서 잔치를 베풀라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하나님이 주님이 부활하시고, 주님이 상주실 때, 상으로 갚아 주신다는 것입니다.
지금 너무나 많은 사람들은 많고, 못사는 사람들은 너무 너무 못 삽니다. 잘 사는 사람들은 그저 술 먹고, 잔치하는데, 수 백 만원, 수 천 만원씩 막 물쓰듯 쓴다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한 번 냈으니까, 네가 한 번 내야지. 내가 대접받으니까, 내가 대접 또 해주어야지. 그래서 호텔로 가고, 자기 집으로 가고, 그저 만찬에, 오찬에, 많은 잔치를 베풉니다. 그것은 교제는 될지언정, 그건 봉사는 아닙니다.
봉사는 뭡니까? 나보다 더 약한 사람, 나보다 더 없는 사람, 나보다 더 가난한 사람, 그 사람들에게 베풀어주는 것, 이것이 봉사인 것입니다. 이와 같이 작고 약한 자에게는 하나님의 관심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작고 약한 자에게 한 봉사는 곧 주님께 다 받으시고 보고 계십니다. 그래서 주님 뭐라 말씀하십니까? 내게 한 것과 꼭 같다고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사회의 약자를 섬길 때, 최선을 다해서 봉사할 때, 그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하나님 나라 천국에서 면류관으로 갚아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7장 12절에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말씀했어요.
셋째, 봉사는 평화
그 다음에 세 번째 봉사는 평화이다. 한 번 따라하시겠습니다. "봉사는 평화다." 그렇습니다. 봉사가 있는 곳에 평화가 있습니다.
인류를 위해 희생하신 예수님의 섬김은 샬롬을 이루셨다. 이 땅에 예수님 평화를 주러 오셨는데, 평화를 주러 오신 예수님이 말만 가지고 하셨나요? 아닙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죄인의 몸으로, 죄값을 치르시고,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의 그 희생이 죽기까지 당하는 그 희생이 이 땅에 평화를 오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첫 아담이 범죄함으로, 인류 역사는 형제간에 다툼과 분쟁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나라와 나라끼리 싸웁니다. 민족과 민족끼리 싸웁니다. 형제와 형제끼리 싸웁니다. 그러므로 전쟁이 계속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아담 되시는 예수님께서는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섬기는 자로 오셨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왜 오셨냐구요?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군림하려 오신 것이 아니라, 초림의 예수님은 섬기러 왔다고 주님 말씀했습니다. 그래서 마가복음 10장 45절에 예수님 친히 말씀하십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말씀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섬김은 죄로 인해 생긴 막힌 담을 헐고 화평케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자 지성소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쫙 찢어졌습니다. 하나님과 인간이 죄로 말미암아 원수졌던 관계, 큰 담이 있었는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피 흘려 죽어주심으로, 대신 죽어주심으로 이제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인간의 관계가 화평의 관계로, 화목의 관계로, 평화의 관계로 주께로 이루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2장 14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그 다음에 우리는 정말로 오는 평화가 오는 봉사는 어떤 봉사냐? 우리의 허리에, 우리 허리에 예수님이 두르신 수건을 두를 때, 평화가 온다. 우리 허리에 예수님이 두르신 수건을 두를 때, 평화가 온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봉사하시고, 헌신하시고, 대신 희생당하시고, 죽으셨다면, 그것만 가지고 안된다. 우리의 허리에 예수님이 두르신 수건을 두를 때, 평화가 온다. 그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시대는 어디를 가나 서로 잘 났다고 싸웁니다.
서로 높아지려고 동료를 속입니다. 모함하는 일을 서슴지 않고 있습니다. 시기 질투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종이 되어서 허리에 수건을 두르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수건은 종의 필수품으로 인식되었습니다. 수건은 지체 높은 분은 안들고 다녀요. 종들이 수건을 들고 다녔어요. 이마에 두르지 않으면, 허리춤에 끼고 다녔어요. 수건을 두른 사람은 가장 하류층의 사람들을 의미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복종하셨습니다. 또 뿐 아닙니다. 수건을 가지고 제자들의 발을 씻김으로 말미암아 섬김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가 복종의 징표라면, 수건은 섬김의 징표입니다. 예수님 십자가 위에서 죽기만 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에 복종만 하신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섬기기 위해서 수건을 드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영혼을 섬기는 본을 보이셨고, 그 뿐이 아닙니다. 사람을 섬기는 종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을 섬기는 종이 되라. 요한복음 13장 15절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말씀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정말로 이 땅에 평화가 오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모두가 다 봉사자가 되야 하는데, 예수님께서 봉사하신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처럼 허리에 예수님 두르신 수건을 두르고 우리가 봉사하고 섬길 때, 가정의 평화, 교회의 평화, 직장의 평화, 사회의 평화, 나라의 평화, 남북의 평화가 오게 될 줄 믿습니다.
넷째, 봉사는 신앙의 열매
네 번째 마지막입니다. 봉사는 신앙의 열매. 한 번 따라하시겠습니다. 봉사는 신앙의 열매. 그렇습니다. 믿음 자체는 누구도 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 최성규 목사도 믿음 못 봐요. 믿음은 눈에 보이지 않아요. 그러나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 확실하게 알 수 있습니다. 뭘 가지고 알 수 있습니까? 하나님 앞에 얼마나 예배를 잘 드렸는가 보면 알아요. 또 예배드리는 것만 가지고 몰라요. 사람을 위해서 봉사하느냐, 안 하느냐, 그 봉사를 보고, 그 사람의 믿음이 살았느냐, 죽었느냐, 있느냐, 없느냐, 믿음이 작으냐, 믿음이 크냐, 알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작은 봉사가 천하보다 귀한 "영혼 구원의 열매"를 맺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봉사가 없이 복음을 누가 들을 수 있습니까? 복음을 듣지 아니하고, 누가 구원받을 수 있습니까? 그러므로 우리 예수님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온 천하에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그랬습니다. 우리가 나가서 복음을 전파하는 봉사가 있어야, 이 말씀을 듣게 되고, 듣는 자가 있어야 예수를 주로 영접하게 되고, 구원받은 수가 늘어가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이 교회 가기 싫어하는 이유가 뭡니까? 예수님이 싫어서입니까? 성경 말씀이 싫어서입니까? 그게 아니지요. 먼저 구원받은 성도가, 교회 다닌다고 하면서도 말씀대로 살지 않는 사람들 때문에, 성경대로 살지 않는 사람들 때문에, 믿음의 행동을 보여주지 않는 사람들 때문에, 교회를 나오려 하지 아니하고, 교회 나왔던 사람들도 실망하고, 낙심하고, 떠나고 떠나고 떠난다. 우리 말 한마디, 작은 친절 하나, 상냥한 얼굴 표정 얼마나 중요한지 몰라요. 한 영혼을 교회로 인도하기도 하고, 구원받게 하기도 하고, 교회를 떠나게 하기도 합니다. 우리의 말 한마디가 교회로 오게도 하고, 교회를 떠나기도 하고, 얼마나 중요한지 몰라요.
그러므로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어린아이라도 주님을 대하듯 섬기면 영혼 구원의 열매를 맺을 수 있다. 그 말인 것입니다. 그래서 골로새서 3장 23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또 가장 귀한 것을 줄 때, 가장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가장 귀한 것을 줄 때, 가장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웃에게 줄 수 있는 가장 귀한 것은 무엇입니까? 복음입니다. 예수님입니다. 성전 미문의 앉은뱅이를 일으킨 베드로와 요한처럼 이웃에게 누구를 줘야 됩니까? "예수님"을 주어야 됩니다. 예수님. 복음을 주는 겁니다. 예수님을 주고, 복음을 주는 겁니다. 사도행전 3장 6절에 보니까,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그랬습니다. 제 구시 기도하는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기도하러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성전 미문에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자가 오랫동안 걸어보지 못한 자가 정말로 구걸하고 있습니다. 돈을 얻기 위해 구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돈이 없어요. 그 때 베드로와 요한이 말합니다. "우리를 보라." 그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자가 이제 뭐 돈 좀 주려는가 보고 기대하며 딱 쳐다보았습니다. 그 때 그들이 말합니다. "우리에게 은과 금은 없다. 그러나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걸어라." 그랬습니다.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가 한번도 걸어보지 못한 그가 어떻게 했습니까? 일어났습니다. 걷기도 하며,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하며 하나님의 성전으로 들어갔다 그랬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에 은과 금이 없었어요. 그러나 예수가 있었습니다. 복음이 있었습니다. 그 복음을 전해 주니까, 예수를 전해 주니까, 이제 구걸할 필요가 없습니다. 앉은뱅이가 치료받았습니다. 육신의 건강을 얻었습니다. 영혼의 구원받았습니다. 이제 구걸하지 아니하고 먼저 하나님의 성전에 하나님을 찬송하며 예배를 드리러 교회로 달려가는 것입니다.
한 영혼을 구원했습니다. 실패자 한 사람을 성공자로 만들었습니다. 절망의 사람을 소망으로 만들었습니다. 무엇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예수가, 예수의 이름이, 복음이, 그를 살린 것입니다.
예수보다 귀한 분은 없습니다. 예수보다 가치 있는 분은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불쌍한 이웃을 돕는다고 하면서 시간과 물질을 들이고, 또 정성을 쏟지만, 정작 복음을 전하지 않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특히 우리 성도들은, 특히 교회는 물질로 봉사할 때, 꼭 따라갈 것이 뭐냐? 복음이 따라가야 합니다.
북한 동포들에게도 쌀도 보냈습니다. 옥수수 보냈습니다. 비누도 보냈습니다. 밀가루도 보냈습니다. 또 소도 보냈습니다. 염소도 보냈습니다. 달걀도 보냈습니다. 옷도 보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왜 보냈는가? 복음을 보내기 위해서 먼저 보낸 것입니다. 복음이 그 물질을 타고 유유만만 하게 방해 없이 들어가기 위해서 물질을 보낸 것입니다. 그런데 물질을 다 갔는데, 복음이 안갔다. 그것은 절대로 교회가 할 일이 아닌 것입니다. 성도가 할 일이 뭐냐? 교회가 할 일이 뭐냐? 중요한 것 중에 중요한 것이 뭐냐? 우리는 줘야 할 것 중에 제일 중요한 것이 뭐냐? 복음을 주는 겁니다. 예수를 주는 겁니다. 예수의 이름을 가지고 기도해 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바울이 디모데를 믿음 안에서 낳고 길렀던 것처럼, 우리들이 이웃에게 예수님을 전할 때, 가장 좋은 열매인 영적 디모데를 많이 맺을 수 있어야 된다 그 말인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봉사의 사람이 되었을 때, 우리의 신앙은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습니다. 또 사람들에게 칭찬 받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 6주 동안 6대 실천신앙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구원의 확신을 얻은 후에, 성령세례 받고 성령충만 받고 나서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을 날마다 실천하므로 말미암아 하늘의 복과 땅의 복을 받아 누리고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말세에 성도에게 주시는 주님의 삼대 명령이 있습니다. 첫째가 뭡니까?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둘째 명령이 뭡니까? 열심히 서로 사랑하라. 세 번째 목록이 뭡니까? 서로 봉사하라. 우리 모두가 다 은혜 받고, 구원의 확신 얻고, 성령 충만함 받아서 하나님 말씀을 실천하고, 그 중에 하나 봉사하는, 하나님을 잘 섬길 뿐만 아니라, 부모공경 잘하고, 가족·이웃사랑하고, 또 나라 사랑하고, 자연 보호할 뿐만 아니라, 사람을 위해서 봉사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됩시다.
오늘 이 시간에는 "너도 봉사하라.", 이 같은 말씀으로 은혜를 받습니다. 한번 따라하시겠습니다. "너도 봉사하라." 우리 예수님이 각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지금 말씀하신 음성으로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다시 한번 따라하겠습니다. "너도 봉사하라."
성도들에게 봉사가 뭐냐고 물으면, 하나님과 교회를 위해서 시간과 물질을 들여서 "내가" 하는 일이다.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이것은 50점짜리 해답입니다.
자 그럼 봉사가 뭘까? 봉사란, 예수님께 오병이어를 드린 어린아이처럼, 또 이웃을 위해서 옷을 만든 도르가처럼 나의 모든 것을 바쳐서, 나의 모든 것을 들여서 "주님"이 역사하시는 것, 이것이 진정한 봉사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봉사가 있는 곳에는, 인간의 자랑은 사라지고 주님의 영광이 드러납니다. 또 나뿐만 아니라 이웃까지 유익을 얻는 것입니다. 진정한 봉사, 나만 좋은 것이 아니라, 남에게 유익을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시간 성경적인 봉사에 대해서 알아봄으로, 하나님께 봉사할 뿐만 아니라, 사람에게도 봉사하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하나님을 잘 섬길 뿐만 아니라, 사람을 위해서도 봉사하는 성도가 되십시다.
첫째, 봉사는 인격
첫째로 봉사는 인격입니다. 한 번 따라하시겠습니다. 봉사는 인격이다. 그렇습니다. 봉사를 통해서 그 사람의 인격을 알 수 있습니다. 학벌 좋습니다. 지식도 좋습니다. 건강도 좋습니다. 또 아름다움도 좋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뭐냐? 그의 인격입니다. 그러면 그의 인격은 무엇을 통해서 알 수 있느냐? 그 사람의 봉사하는 삶을 통해서 그 사람의 인격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보혈로 변화된 인격으로 봉사해야 됩니다. 예수를 믿고 구원의 확신을 얻고, 또 예수님의 영 하나님의 영 성령으로 세례를 받고 성령 충만함 받아서 은사를 체험하고, 또 성령 충만함 받아서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삶을 통해서 우리가 인격의 변화로 봉사할 때, 그 봉사야말로 정말로 주님이 기뻐하시는 봉사다. 상 받는 봉사이다.
그럼 인격이란 뭘까?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을 때 자기가 하는 행동입니다. 빌 하이벨스 목사가 그렇게 말했습니다. 인격이 뭐냐고요?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을 때 자기가 하는 행동, 이것이 인격이다. 누가 볼 때 하는 것, 그것이 인격이 아니다. 아무도 안보는 데 자기가 하는 행동, 이것이 인격입니다.
아무도 보는 이가 없을 때, 나의 생각, 나의 말, 나의 행동은 어떤가?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을 때, 내 생각, 나의 말, 나의 행동은 어떤가? 한번 생각해 봐야 할 것입니다. 특히 나보다 부족한 면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나는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나보다 학식이 부족하고, 나보다 돈이 없고, 나보다 가진 게 없고, 세상 사람들이 멸시하고 천대하는 사람에게 나는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이것을 점검해 봐야 할 것입니다.
인간은 서로 서로 자기 자랑 맛에 살려고 합니다. 그러나 인격은 나만이 아는 내 속 사람이다. 이렇게 말합니다. 나만이 아는 내 속의 사람, 나만이 알 수 있는 내 속의 사람, 이것이 인격이다. 그 안에 성령이 계시면 우리의 봉사는 영혼을 살립니다. 그 안에 성령이 계시면,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주고, 다른 사람들에게 평안함을 줍니다. 그러나 그 안에 죄가 가득하면 사망을 가져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아픔을 주고, 상처를 줍니다.
예수님의 마음 곧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하는 봉사, 그것이 진정한 산 봉사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을 통해서 주님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빌립보서 2장 3절 말씀이십니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고 구원받은 우리가, 성령의 은사를 받은 우리가 변화된 인격으로 봉사할 때, 그것이 참 봉사다.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주는 봉사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봉사요, 상 받는 봉사인 것입니다.
또 예수님의 마음을 품은 자는 주님만 바라보고 봉사합니다. 구원의 확신이 있는 사람, 성령세례 받은 사람,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 성령에 사로잡힌 사람,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 그 사람 봉사하되, 주님만 바라보고 봉사합니다. "누가 나를 칭찬해 줄 꺼야. 나는 상 받을 꺼야." 그것 때문에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위에서 아무 죄도 없이 그렇게 매 맞으시고, 그렇게 가시관 쓰시고, 그렇게 양손과 양발에 못 박히시고 달리셔서 얼마나 고통스러우셨든지 "엘리 엘리 라마 사막다니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신 예수님. 십가가에서 죽으신 그 예수님을 바라본다 그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봉사를 하다보면 문제가 일어날 때가 있습니다. 또 불평 불만이 나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것은 주님만 바라보아야 할 것인데, 주님만 바라보지 않고 다른 사람과 비교하기 때문에. 그 마음에 예수님을 모시기보다는 많은 일과 염려와 근심이 가득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마리아와 마르다를 비교합니다. 마리아는 동생이고 마르다는 언니인 것입니다. 그 언니 마르다가 동생 마리아를 원망합니다. 또 예수님께 불평합니다. 불만을 토로합니다. 마르다는 그 뜻이 "여주인"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 봉사의 주인이 ''내''가 되어서, 봉사라는 명목 하에 마음대로 행동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게 봉사를 하다가 상처받는 사람도 있고, 봉사하는 사람 때문에 상처받는 사람 있습니다. 주님이 기뻐하시지를 않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또 사람에게 봉사하기 위해서 아무 죄도 없으시면서, 아무 흠도 없으시면서, 아무 잘못도 없으시면서 우리 예수님 이 땅에 오셔서 그렇게 매맞으셨습니다. 그렇게 가시관 쓰셨습니다. 그렇게 양손과 양발에 못 박히시고 죽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아무 불평도 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잠잠하셨습니다. 입도 열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오시기 6백여년 전에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예수님이 하실 일에 대하여 이렇게 예언해 놓았습니다. 이사야서 53장 7절 말씀이십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봉사는 인격입니다. 누가 봉사할 수 있냐고요? 구원의 확신이 있는 사람, 성령 받은 사람, 성령의 은사를 받은 사람.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한 봉사, 이 봉사가 참 봉사요, 그런 봉사를 통해서 그 사람이 인격이 나타난다. 그 말인 것입니다.
둘째, 봉사는 상급
두 번째, 봉사는 상급이다. 한 번 따라하시겠습니다. 봉사는 상급이다.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상 받기를 좋아합니다. 이 땅에서도 상 받기를 좋아하고, 하나님 나라 가서 면류관 받기를 좋아합니다. 물론 하나님은 상 주기를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히브리서 11장 6절에 히브리서 기자가 이렇게 말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열심히 봉사하면, 이 땅에서 "신앙성장"의 축복을 받습니다.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에 우리가 제일 큰복이 뭐냐고요? 건강한 것 물론 복입니다. 자손 잘 되는 것 복입니다. 부유한 것도 복입니다. 가정이 행복한 것도 복입니다. 사업이 형통한 것도 복입니다. 지위와 권세가 올라가는 것도 복입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 제일 큰복이 뭐냐? "신앙성장"이 복인 것 믿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요한 3서 2절에서 주님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말씀했습니다. 그러므로 영혼이 잘되면 신앙이 성장하면 범사도 잘 되고, 신앙이 성장하면 영혼이 잘 되면 건강하게 살 수 있다. 그러므로 가정행복, 자녀가 형통하는 것, 건강 하는 것, 부유한 것, 범사에 형통하고 강건한 축복을 누가 받을 수 있습니까? 신앙이 성장한 사람이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 살아가면서 제일 복이 뭐냐? 신앙 성장하는 거요, 믿음이 올라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들이여, 여러분의 신앙이 성장되고, 여러분의 믿음이 올라가는 복을 받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신앙성장의 복을 받기를 정말 원하시면 "아멘" 하겠습니다.
에베소서 4장 11절로 13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의 신앙이 성장하고,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성장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날 비만과 성인병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도 신앙의 비만과 성인병 환자들이 증가하고 있다. 이것도 우리가 알아야 될 것입니다. 은혜도 많이 받았는데, 성경공부도 많이 했는데, 은사도 많이 체험했는데, 그런데 봉사하지 아니해서, 베풀지 않아서, 헌신하지 아니해서, 희생하지 않아서, 신앙의 비만과 어려움을 당하는 성도가 교회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사람을 위한 봉사에 인색하거나, 또 자신의 봉사를 자랑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기를 즐겨합니다. 은혜는 많이 받았는데, 봉사하지 않거나, 또 봉사를 하면서도 사람들을 비판하거나 정죄한다면, 둘 다 잘못된 것입니다. 은사를 많이 받고 봉사 안하는 것도 잘못 됐지만, 봉사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비판하고 정죄하는 것도 다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봉사는 성도의 의무이므로, 하나님이 상을 주시지 않아도 한다. 그런 자세가 되야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 말씀하십니다. "거저 받은 것 거저 주어라."
아담의 혈통으로 태어난 우리들, 나도 너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모두가 죄인입니다. 죄 값으로 말미암아 멸망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죄 값으로 말미암아 지옥에 가야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예수님 대신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시고, 성령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예수를 주라고 시인했습니다. 그러므로 아무 공로 없이 우리는 구원받았습니다. 아무 공로 없이 하나님 아들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게 보통 은혜가 아닙니다. 보통 축복이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봉사의 훈련을 통해서 우리들의 신앙을 성장시키기를 원하시고, 또 삶의 기쁨을 주셔서, 또 그 뿐이 아닙니다. 자손이 잘 되는 축복을 주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시편 37편 26절에서 말씀하십니다. "저는 종일토록 은혜를 베풀고 꾸어 주니 그 자손이 복을 받는도다"
또 그 뿐이 아닙니다. 열심히 봉사하는 자에게는 땅에서만 신앙성장고과 땅에서만 영혼 모두가 잘 되는 것이 아니라, 열심히 봉사하는 자에게는 하늘의 면류관이 예비되어 있습니다. 하늘의 면류관.
그렇습니다. 이 시대의 인간관계는 자신의 유익을 따라서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사람에게 봉사할 때, 대가를 바라지말고 가난한 자, 고아, 과부, 그리고 장애인들을 섬기라고 명령하십니다. 누가복음 14장 13절로 14절 말씀이십니다. "잔치를 배설하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저는 자들과 소경들을 청하라 그리하면 저희가 갚을 것이 없는 고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 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니라" 말씀했습니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 주님이 상을 주신다. 주님이 면류관 주신다. 그 말씀이신 것입니다. 잔치를 배설하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 또 장애자들, 소경들, 멸시 받고 천대 받는 자들, 그들을 초청해서 잔치를 베풀라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하나님이 주님이 부활하시고, 주님이 상주실 때, 상으로 갚아 주신다는 것입니다.
지금 너무나 많은 사람들은 많고, 못사는 사람들은 너무 너무 못 삽니다. 잘 사는 사람들은 그저 술 먹고, 잔치하는데, 수 백 만원, 수 천 만원씩 막 물쓰듯 쓴다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한 번 냈으니까, 네가 한 번 내야지. 내가 대접받으니까, 내가 대접 또 해주어야지. 그래서 호텔로 가고, 자기 집으로 가고, 그저 만찬에, 오찬에, 많은 잔치를 베풉니다. 그것은 교제는 될지언정, 그건 봉사는 아닙니다.
봉사는 뭡니까? 나보다 더 약한 사람, 나보다 더 없는 사람, 나보다 더 가난한 사람, 그 사람들에게 베풀어주는 것, 이것이 봉사인 것입니다. 이와 같이 작고 약한 자에게는 하나님의 관심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작고 약한 자에게 한 봉사는 곧 주님께 다 받으시고 보고 계십니다. 그래서 주님 뭐라 말씀하십니까? 내게 한 것과 꼭 같다고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사회의 약자를 섬길 때, 최선을 다해서 봉사할 때, 그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하나님 나라 천국에서 면류관으로 갚아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7장 12절에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말씀했어요.
셋째, 봉사는 평화
그 다음에 세 번째 봉사는 평화이다. 한 번 따라하시겠습니다. "봉사는 평화다." 그렇습니다. 봉사가 있는 곳에 평화가 있습니다.
인류를 위해 희생하신 예수님의 섬김은 샬롬을 이루셨다. 이 땅에 예수님 평화를 주러 오셨는데, 평화를 주러 오신 예수님이 말만 가지고 하셨나요? 아닙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죄인의 몸으로, 죄값을 치르시고,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의 그 희생이 죽기까지 당하는 그 희생이 이 땅에 평화를 오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첫 아담이 범죄함으로, 인류 역사는 형제간에 다툼과 분쟁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나라와 나라끼리 싸웁니다. 민족과 민족끼리 싸웁니다. 형제와 형제끼리 싸웁니다. 그러므로 전쟁이 계속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아담 되시는 예수님께서는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섬기는 자로 오셨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왜 오셨냐구요?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군림하려 오신 것이 아니라, 초림의 예수님은 섬기러 왔다고 주님 말씀했습니다. 그래서 마가복음 10장 45절에 예수님 친히 말씀하십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말씀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섬김은 죄로 인해 생긴 막힌 담을 헐고 화평케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자 지성소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쫙 찢어졌습니다. 하나님과 인간이 죄로 말미암아 원수졌던 관계, 큰 담이 있었는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피 흘려 죽어주심으로, 대신 죽어주심으로 이제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인간의 관계가 화평의 관계로, 화목의 관계로, 평화의 관계로 주께로 이루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2장 14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그 다음에 우리는 정말로 오는 평화가 오는 봉사는 어떤 봉사냐? 우리의 허리에, 우리 허리에 예수님이 두르신 수건을 두를 때, 평화가 온다. 우리 허리에 예수님이 두르신 수건을 두를 때, 평화가 온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봉사하시고, 헌신하시고, 대신 희생당하시고, 죽으셨다면, 그것만 가지고 안된다. 우리의 허리에 예수님이 두르신 수건을 두를 때, 평화가 온다. 그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시대는 어디를 가나 서로 잘 났다고 싸웁니다.
서로 높아지려고 동료를 속입니다. 모함하는 일을 서슴지 않고 있습니다. 시기 질투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종이 되어서 허리에 수건을 두르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수건은 종의 필수품으로 인식되었습니다. 수건은 지체 높은 분은 안들고 다녀요. 종들이 수건을 들고 다녔어요. 이마에 두르지 않으면, 허리춤에 끼고 다녔어요. 수건을 두른 사람은 가장 하류층의 사람들을 의미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복종하셨습니다. 또 뿐 아닙니다. 수건을 가지고 제자들의 발을 씻김으로 말미암아 섬김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가 복종의 징표라면, 수건은 섬김의 징표입니다. 예수님 십자가 위에서 죽기만 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에 복종만 하신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섬기기 위해서 수건을 드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영혼을 섬기는 본을 보이셨고, 그 뿐이 아닙니다. 사람을 섬기는 종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을 섬기는 종이 되라. 요한복음 13장 15절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말씀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정말로 이 땅에 평화가 오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모두가 다 봉사자가 되야 하는데, 예수님께서 봉사하신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처럼 허리에 예수님 두르신 수건을 두르고 우리가 봉사하고 섬길 때, 가정의 평화, 교회의 평화, 직장의 평화, 사회의 평화, 나라의 평화, 남북의 평화가 오게 될 줄 믿습니다.
넷째, 봉사는 신앙의 열매
네 번째 마지막입니다. 봉사는 신앙의 열매. 한 번 따라하시겠습니다. 봉사는 신앙의 열매. 그렇습니다. 믿음 자체는 누구도 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 최성규 목사도 믿음 못 봐요. 믿음은 눈에 보이지 않아요. 그러나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 확실하게 알 수 있습니다. 뭘 가지고 알 수 있습니까? 하나님 앞에 얼마나 예배를 잘 드렸는가 보면 알아요. 또 예배드리는 것만 가지고 몰라요. 사람을 위해서 봉사하느냐, 안 하느냐, 그 봉사를 보고, 그 사람의 믿음이 살았느냐, 죽었느냐, 있느냐, 없느냐, 믿음이 작으냐, 믿음이 크냐, 알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작은 봉사가 천하보다 귀한 "영혼 구원의 열매"를 맺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봉사가 없이 복음을 누가 들을 수 있습니까? 복음을 듣지 아니하고, 누가 구원받을 수 있습니까? 그러므로 우리 예수님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온 천하에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그랬습니다. 우리가 나가서 복음을 전파하는 봉사가 있어야, 이 말씀을 듣게 되고, 듣는 자가 있어야 예수를 주로 영접하게 되고, 구원받은 수가 늘어가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이 교회 가기 싫어하는 이유가 뭡니까? 예수님이 싫어서입니까? 성경 말씀이 싫어서입니까? 그게 아니지요. 먼저 구원받은 성도가, 교회 다닌다고 하면서도 말씀대로 살지 않는 사람들 때문에, 성경대로 살지 않는 사람들 때문에, 믿음의 행동을 보여주지 않는 사람들 때문에, 교회를 나오려 하지 아니하고, 교회 나왔던 사람들도 실망하고, 낙심하고, 떠나고 떠나고 떠난다. 우리 말 한마디, 작은 친절 하나, 상냥한 얼굴 표정 얼마나 중요한지 몰라요. 한 영혼을 교회로 인도하기도 하고, 구원받게 하기도 하고, 교회를 떠나게 하기도 합니다. 우리의 말 한마디가 교회로 오게도 하고, 교회를 떠나기도 하고, 얼마나 중요한지 몰라요.
그러므로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어린아이라도 주님을 대하듯 섬기면 영혼 구원의 열매를 맺을 수 있다. 그 말인 것입니다. 그래서 골로새서 3장 23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또 가장 귀한 것을 줄 때, 가장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가장 귀한 것을 줄 때, 가장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웃에게 줄 수 있는 가장 귀한 것은 무엇입니까? 복음입니다. 예수님입니다. 성전 미문의 앉은뱅이를 일으킨 베드로와 요한처럼 이웃에게 누구를 줘야 됩니까? "예수님"을 주어야 됩니다. 예수님. 복음을 주는 겁니다. 예수님을 주고, 복음을 주는 겁니다. 사도행전 3장 6절에 보니까,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그랬습니다. 제 구시 기도하는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기도하러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성전 미문에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자가 오랫동안 걸어보지 못한 자가 정말로 구걸하고 있습니다. 돈을 얻기 위해 구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돈이 없어요. 그 때 베드로와 요한이 말합니다. "우리를 보라." 그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자가 이제 뭐 돈 좀 주려는가 보고 기대하며 딱 쳐다보았습니다. 그 때 그들이 말합니다. "우리에게 은과 금은 없다. 그러나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걸어라." 그랬습니다.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가 한번도 걸어보지 못한 그가 어떻게 했습니까? 일어났습니다. 걷기도 하며,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하며 하나님의 성전으로 들어갔다 그랬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에 은과 금이 없었어요. 그러나 예수가 있었습니다. 복음이 있었습니다. 그 복음을 전해 주니까, 예수를 전해 주니까, 이제 구걸할 필요가 없습니다. 앉은뱅이가 치료받았습니다. 육신의 건강을 얻었습니다. 영혼의 구원받았습니다. 이제 구걸하지 아니하고 먼저 하나님의 성전에 하나님을 찬송하며 예배를 드리러 교회로 달려가는 것입니다.
한 영혼을 구원했습니다. 실패자 한 사람을 성공자로 만들었습니다. 절망의 사람을 소망으로 만들었습니다. 무엇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예수가, 예수의 이름이, 복음이, 그를 살린 것입니다.
예수보다 귀한 분은 없습니다. 예수보다 가치 있는 분은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불쌍한 이웃을 돕는다고 하면서 시간과 물질을 들이고, 또 정성을 쏟지만, 정작 복음을 전하지 않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특히 우리 성도들은, 특히 교회는 물질로 봉사할 때, 꼭 따라갈 것이 뭐냐? 복음이 따라가야 합니다.
북한 동포들에게도 쌀도 보냈습니다. 옥수수 보냈습니다. 비누도 보냈습니다. 밀가루도 보냈습니다. 또 소도 보냈습니다. 염소도 보냈습니다. 달걀도 보냈습니다. 옷도 보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왜 보냈는가? 복음을 보내기 위해서 먼저 보낸 것입니다. 복음이 그 물질을 타고 유유만만 하게 방해 없이 들어가기 위해서 물질을 보낸 것입니다. 그런데 물질을 다 갔는데, 복음이 안갔다. 그것은 절대로 교회가 할 일이 아닌 것입니다. 성도가 할 일이 뭐냐? 교회가 할 일이 뭐냐? 중요한 것 중에 중요한 것이 뭐냐? 우리는 줘야 할 것 중에 제일 중요한 것이 뭐냐? 복음을 주는 겁니다. 예수를 주는 겁니다. 예수의 이름을 가지고 기도해 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바울이 디모데를 믿음 안에서 낳고 길렀던 것처럼, 우리들이 이웃에게 예수님을 전할 때, 가장 좋은 열매인 영적 디모데를 많이 맺을 수 있어야 된다 그 말인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봉사의 사람이 되었을 때, 우리의 신앙은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습니다. 또 사람들에게 칭찬 받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 6주 동안 6대 실천신앙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구원의 확신을 얻은 후에, 성령세례 받고 성령충만 받고 나서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을 날마다 실천하므로 말미암아 하늘의 복과 땅의 복을 받아 누리고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말세에 성도에게 주시는 주님의 삼대 명령이 있습니다. 첫째가 뭡니까?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둘째 명령이 뭡니까? 열심히 서로 사랑하라. 세 번째 목록이 뭡니까? 서로 봉사하라. 우리 모두가 다 은혜 받고, 구원의 확신 얻고, 성령 충만함 받아서 하나님 말씀을 실천하고, 그 중에 하나 봉사하는, 하나님을 잘 섬길 뿐만 아니라, 부모공경 잘하고, 가족·이웃사랑하고, 또 나라 사랑하고, 자연 보호할 뿐만 아니라, 사람을 위해서 봉사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