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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사진의 새로운 지평을 열며 포토저널리스트 전설이 된 독일인 호스트 파스가 독일 뮌헨에서 작고했다.
AP통신의 사진기자로 활동하며 반세기 가까이 전쟁터에서 보냈다. 1956년 AP통신에 입사해 1960년부터 콩고·알제리·베트남 등 분쟁 지역을 취재해 명성을 얻었다. 특히 베트남전의 참상을 사실적으로 카메라에 담아냈다.
베트남전 사진으로 퓰리처상, 로버트 카파상 등 주요 사진상을 4차례나 수상했다. 베트남전 당시 사이공 AP통신 사진부장으로 세계에 베트남전의 참상을 전달했다.
파스는 전장의 참혹한 현실을 기록하면서, "손이 떨려서 필름을 카메라에 갈아 끼울 수 없을 정도였다"며, "이런 참상이 다시는 없도록 기도하면서 사진을 찍었다"고 말했다.
베트남 전장에서 1967년 수류탄 폭발로 다리를 다쳐 과다출혈로 생명이 위독했으나 미군 위생병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후유증으로 휠체어에 의지해 생활하면서도, 후학을 위해 저작과 심포지엄 등 활발한 활동을 했다. 산티아고 리온 AP통신 국제사진부장은 "그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훌륭하게 취재를 해낸 국제 사진기자계의 거물이었다"고 말했다.
AP통신의 사진기자로 활동하며 반세기 가까이 전쟁터에서 보냈다. 1956년 AP통신에 입사해 1960년부터 콩고·알제리·베트남 등 분쟁 지역을 취재해 명성을 얻었다. 특히 베트남전의 참상을 사실적으로 카메라에 담아냈다.
베트남전 사진으로 퓰리처상, 로버트 카파상 등 주요 사진상을 4차례나 수상했다. 베트남전 당시 사이공 AP통신 사진부장으로 세계에 베트남전의 참상을 전달했다.
파스는 전장의 참혹한 현실을 기록하면서, "손이 떨려서 필름을 카메라에 갈아 끼울 수 없을 정도였다"며, "이런 참상이 다시는 없도록 기도하면서 사진을 찍었다"고 말했다.
베트남 전장에서 1967년 수류탄 폭발로 다리를 다쳐 과다출혈로 생명이 위독했으나 미군 위생병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후유증으로 휠체어에 의지해 생활하면서도, 후학을 위해 저작과 심포지엄 등 활발한 활동을 했다. 산티아고 리온 AP통신 국제사진부장은 "그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훌륭하게 취재를 해낸 국제 사진기자계의 거물이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