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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한규목사 (광주중앙교회)
여호수아 6장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큰 성 여리고를 하나님의 은혜로 함락시켰습니다. 그때 그들은 개선가를 불렀고 하나님 앞엔 감사찬송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 7장을 보면 작은 아이성 싸움에서 크게 실패를 한 사건이 나오는데 그때 백성의 마음이 녹아 물같이 되었다고 하였으며, 또한 지도자 여호수아는 슬픈 목소리로 하나님께 기도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7절에 ''여호수아가 가로되 슬프도소이다 여호와여 어찌하여 우리를 아모리 사람의 손에 붙여 멸망시키려 하나이까'' 슬픔을 토로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이성은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대입니다. 때문에 이 성을 함락시켜야 가나안땅에 무사히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실패를 했으니 그들의 행군은 중단될 수밖에 없었고 가나안 진군이 멈출 수밖에 없었습니다. 인생의 산도 이와 같이 성공할 수도 있지만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사실 실패한 인생들이 태반입니다. 따라서 나의 실패한 삶을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시간 우리 모두가 가나안을 향해 기도하며 찬송하며 진군하는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우리 모두가 여호수아 본받아 앞으로 가세와 같은 찬송을 하며 천국을 향해 믿음의 전진이 있어 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저는 본문 말씀을 중심해서 죄 문제를 언급할까 합니다. 그래서 이 시간 세 가지 내용을 살피면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 실패의 원인
본문 15절 말씀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실패한 원인이 죄 때문이라고 밝혀져 있습니다. 따라서 예배드리는 우리 모두가 내 삶 속에 아간은 없나 찾을 수 있어야겠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죄가 무엇일까요? 죄는 만사를 실패케 하는 괴물과 같습니다. 우리의 전쟁을 실패케 하고 우리의 사업을 실패케 하고 때로는 우리의 정치를 실패케 합니다. 그래서 죄가 인생을 곤두박질치게 하고 죄가 사람 사람을 거꾸러뜨립니다. 죄 앞에서 신사도 넘어지고 숙녀도 넘어집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죄 속에 무서운 독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선 심령을 피곤하게 합니다. 고달프게 하지요. 쿨쿨하고 맹맹하게 합니다. 무슨 독일까요? 미움의 독이요, 저주의 독이요, 죽음의 독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말썽거리가 무엇이냐 물으며 죄라고 답해야 할 것입니다.
죄에는 연대성이 있습니다. 내가 저지른 죄 내게만 미치지 아니합니다. 아간 한 사람이 범죄했는데 여호수아 7장1절에 보면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범죄하였다고 했고 11절에도 보면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가정에서 호주가 범죄하면은 온 가족이 고통을 당합니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지요, 한 성도가 범죄를 하면은 온 성도들이 욕을 먹고 또 그것이 예수님에게까지 영광을 가리우게 한다는 것입니다. 죄는 인생을 괴롭히는 괴물이기도 합니다, 여호수아는 본문 25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네가 어찌하여 우리를 괴롭게 하였느뇨?'' 사실 ''아간''이란 말은 괴롭다는 의미를 지니기도 합니다. 아간은 범죄를 인해 자기가 몹시 괴로웠을 겁니다. 뿐만 아니라 그 괴로움이 온 백성에게 미치지 않았습니까? 자식이 범죄한 것, 그대로 끝나지 아니하고 부모에게 고통이 되는 것 마찬가지입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이런 경험을 종종 하지요, ''아 내 인생이 괴롭도다'' 할 때가 많이 있지요. 그 원인을 물어야 합니다. 성경은 답하기를 죄 때문이라고 답합니다. 여호수아는 아간을 향해서 말했어요. 본문 19절인데 ''네 행한 일을 내게 고하라'' 예배드리는 시간에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이기도 하지요. ''네 행한 일을 내게 고하라'' 왜 그럴까요? 모든 실패의 원인이 하나님께 있지 아니하고 내게 있기 때문입니다. 내 실수요, 내 범죄 때문이란 말입니다. 어찌 가인의 죄를 하나님이 모르시겠습니까? 그럼에도 하나님이 물으셨어요. ''가인아 네 아웃 아벨이 어디 있느냐'' 어찌 아간의 죄를 하나님이 모르시겠습니까? 근데 하나님은 말씀하셨어요 ''네 행한 일을 내게 고하라'' 하나님은 범죄한 인생을 사랑하사 죄를 회개키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벌써 나의 허물을 몽땅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서서 내가 여차여차 하였나이다 하고 고하기를 원하신단 말입니다.
여리고성을 함락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의 힘으로 함락했습니까? 아니지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좋은 무기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저 성 주위를 빙글빙글 돌았을 뿐인데 승리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또 감사했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승리 후, 성공 후에 잘 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잘난 체 했고 교만했고 자만했어요. 우리가 엄청난 일을 해냈다 하고 뽐냈어요. 그리고는 아이성 쯤이야 문제없다 방심한 것입니다. 오만에 빠진 것입니다. 이것이 실패한 원인이 될 주를 몰랐던 것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하지 아니 했습니다. 아예 하나님을 제외시켰습니다. 아이성 전투는 우리의 힘으로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결국 실패했습니다. 죄가 무엇입니까? 만사를 실패케 하는 괴물이란 것입니다. 왜 우리가 실패한 삶을 때때로 살아야 합니까? 우리는 겸손하게 고백해야 합니다. 하나님 내가 이러이러한 죄를 범하였나이다. 그렇습니다 예배드리는 시간에 이 참회가 하나님 앞에 상달될 수 있는 제사가 됩니다. 이러한 기도가 능력있는 기도가 되고 은혜 받는 기도가 됩니다. 따라서 이 시간 고린도전서 10장 12절이 교훈합니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지 말라 넘어질까 조심하라'' 삼손을 보십시오 블레셋 군사 일천 여 명을 타작마당에서 곡식 털듯 하지 않았습니까? 이때입니다. 삼손은 조심하고 조심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가 어땠습니까? 드릴라의 부드러운 무릎에 누워서 이제는 편안히 즐기자 했어요. 결국 그는 눈이 뽑혔으며, 맷돌을 돌리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래요 사람이 자칫 잘못하면 거꾸러진 삼손이 될 수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 실패 한 경험이 있는지요? 그렇다면 그 실패에 대한 원인이 무엇일까 한 번 물을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물음이 도대체 어디 있나? 이렇게 물으면서 전진하는 삶을 살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 아간의 범죄
본문18절을 읽읍시다. 여기서 아간을 뽑은 것 뿐 아니라 구체적으로 아간을 소개하고 있는 점에 대해 유의해야 합니다. 제비는 사람이 뽑습니다. 여호수아가 뽑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비는 하나님이 죄인을 색출해내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잠언 16장 33절 사람이 제비는 뽑으나 이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 결국 아간이 토설했어요. 본문21절을 보면은 내가 노략한 물건의 시날산의 아름다운 외투 한 벌과 은 200세겔과 50세겔 중의 금덩이 하나를 보고 탐내어 취했나이다. 그러나 아간의 토설은 심령에서 복받치는 참회의 토설이 아닙니다. 제비에 뽑힌지라 부득불 토설한 무의미한 내용인 것입니다. 결국 아간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훔친 물건 자기 것 삼을 수 없었어요. 그 모든 물건과 함께 자녀들과 가축과 모두가 몰수당했고 이것들을 아골 골짜기로 끌고 가 백성들의 돌 물매를 맞아 죽어 가는 형편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불사르고 이 모든 것을 돌무덤에 묻어 버리고 만 것입니다. 한 사람의 범죄 때문에 모든 가족이 이러한 수난을 당했어요. 왜 이처럼 가혹한 처벌을 한 것일까요? 답은 우리 모두에게 있습니다. 아간의 범죄는 사람의 물건을 도적질한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물건을 도적질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주는 교훈은 인생들은 탐심을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우리들은 탐심을 버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약 1:15절에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여 사망을 낳느니라...'' 다른 사람에 관한 예기가 아니라 나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의 말인 것입니다. 본문 상세히 읽다보면 시선을 끄는 대목이 있는데 그것은 아간이 범죄한대목인데 그가 범죄 하였다고 하면서 그의 죄목을 조사하는 데 아간의 조상부터 추적하여 그럴 수밖에 없는 범죄인 것을 밝혀내고 있습니다. 유다 지파 셀라의 증손이요 삽디의 손자요 갈미의 아들인 아간이 범죄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의 범죄를 4대로 거슬러 올라가 이력서를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다에게 세 아들이 있었습니다. 엘과 오난과 셀라, 그런데 첫아들을 위해서 장가를 보냈는데 다말을 자부로 맞이하였어요. 아들이 죽었고 풍습대로 둘째 아들에게 물려주고 싶었는데 그 아들도 죽어버려서 셋째 아들 세라에게 다말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유다가 다말을 범하고 말지 않습니까? 아간의 죄를 지적할 때에 족보를 따져 올라간다는 것에는 의미가 있습니다. 출 20:5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찾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대 까지 이르게 하리라'' 다시 말하자면 부전자전이라는 말입니다. 악한 아버지가 악한 아들을 낳고 악한 아버지가 악한 딸을 낳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깐 성경은 자주 말합니다. ''저가 그 아버지의 길을 따라 저가 그 아비의 길을 행하였더라''고 반복하고 있습니다. 아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할아버지 손자며 그 아버지의 아들인 아간이 그 조상처럼 범죄하였다는 것입니다. 아간의 범죄 내용은 21절에 탐욕이 범죄의 뿌리였다고 성경이 밝혀 내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태반의 범죄가 이 탐욕 때문에, 탐심 때문에, 욕심 때문에 벌어진 일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 예배드리면서 마음을 비우는 경건을 지니십시다. 탐욕의 뿌리를 뽑는 예배가 되게 하십시다. 행여라도 과욕하지 말고 혹시라도 내가 아간이 아닌가? 하고 물어야 할 것입니다.
셋째, 재기의 발판
본문 26절에 ''그 위에 돌무더기를 크게 쌓았더니 오늘날까지 있더라 여호와께서 그 극렬한 분노를 그치시니 그러므로 그곳 이름을 아골 골짝이라 부르더라'' 실패가 무엇인가요? 그것은 쓴 뿌리와 같습니다. 그러나 실패의 쓴 뿌리가 달콤한 열매를 맺습니다. 실패는 세상에서 말하는 것처럼 성공의 디딤돌이요 승리의 발판이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탐심을 무덤에 묻어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모두에게 주는 본문의 교훈인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6:10에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하였고 골로새서 3장 5절에는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고 하였습니다. 탐심은 인생을 거꾸러뜨리는 골리앗과 같기도 합니다. 아담을 보면 탐심 때문에 선악과를 따먹고 모든 인류에게 사망을 가져오게 하였습니다. 다윗을 보면 탐심 때문에 밧세바를 범했고, 그리고는 이스라엘 왕가의 중흠을 남겼습니다. 아합 또한 탐심 때문에 나봇의 포도원을 훔치더니 무서운 범죄를 만들지 않았습니까? 아간도 마찬가지로 탐심 때문에 자기의 가족도 죽고 이스라엘 군사 36명이 죽고, 그리고 백성들의 마음이 녹아서 물처럼 되지 않았습니까?
사랑하는 성도여! 어쩌다가 실패는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인생의 모습이니까요. 그러나 실패에서 다시 일어서 보고 싶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 아골 골짜기로 가서 높다랗게 쌓여있는 돌무더기를 응시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 무덤 속에 누가 누워있는지요? 물론 아간과 탐욕이겠지만 그러나 혹시 내가 그 돌무덤 속에 누워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돌무덤이 모두에게 교훈합니다. 첫째, 죄 짓고는 못산다는 것입니다. 무덤 속에는 죄인들이 들어갑니다. 다시 말하면 죄가 무덤을 만들어갑니다. 롬 6:23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망은 죄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려고 이 땅에 오셨고 십자가에 죽으셨던 것입니다. 우리의 찬송 중에 ''나의 죄를 씻기는 예수의 피밖에 없네'' 이러한 찬송도 있듯이 우리 죄인은 예수의 피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죄를 범하지 않을 수 있다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둘째는 탐심을 물리치라는 교훈입니다. 아골 골짜기의 돌무덤이 입을 열 수만 있다면 오고가는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을까요? "여보세요! 탐심을 물리치세요, 욕심을 버리세요, 인생을 승리키를 원하면은 마음을 비우세요!"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견물생심이라는 말처럼 무엇을 보면 욕심이 생겨난다는 것입니다. 아간이 그랬습니다. 전리품으로 얻은 물건 가운데 시날산의 외투가 입음직했어요. 보면 볼수록 욕심이 생겼어요 은 200세겔, 50세겔의 번쩍번쩍한 금 덩어리가 욕심이 났단 말입니다. 그 욕심이 무엇입니까?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여 사망을 낳게 한 것입니다. 토마스 풀러가 말했습니다. "악마와 거래하고 싶지 않거든 악마의 상점에 들어가지 말라" 그렇습니다. 보지도 말고 피해야 하며 뿌리쳐야 하는 것입니다. 요셉이 교훈 하듯이 보디발의 아내가 유혹하였을 때 뿌리치고 도망하지 않았습니까? 욕심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며 욕심은 하나님의 말씀을 막습니다. 욕심이 성도들을 거꾸러뜨립니다.
그리스신화에 이러한 얘기가 있습니다. 술을 담당한 주신 디오니소스가 절친한 마이다스 왕에게 말했습니다. ''마이더스 왕이여! 당신의 소원이 무엇이오? 내가 들어주겠소'' 라고 말하였습니다. 바로 이때다 싶어서 내가 만지는 것마다 금이 되게 하소서! 라고 한 뒤 아주 커다란 바위덩어리를 만지었습니다. 그랬더니 커다란 바위덩어리가 바위 덩어리가 금덩이로 변하게 되었습니다. 신바람이 난 왕은 술잔도 만지고 밥그릇도 만지고 의자도 만지었습니다. 온통 금 덩어리가 되었습니다. 마침 왕비가 달려와 "여보!" 하고 왕을 만졌는데 왕비까지도 금이 되어버렸습니다. 얼마나 슬프겠습니까? 이 소식을 듣고 공주가 달려와 아빠! 하고 불렀는데 "오 사랑하는 딸아!" 하고 만졌는데 공주까지도 금 덩어리가 되어버렸습니다. 금 덩어리 속의 왕은 행복할 것 같지요? 그러나 얼마나 불행하겠습니까?
아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재물을 욕심내다가 불행한 인생이 되고 말았습니다. 또 어떠한 교훈이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은 속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속일 수가 있어요 집사님이 장로님을 속일 수가 있고, 장로님이 또 다른 장로님을 속일 수가 있습니다. 목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속일수가 없다는 이 믿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만은 속일수가 없다고 고백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간이 범죄할 때에 깜깜한 밤이었습니다. 그러니 누구도 알 수가 없었습니다. 여리고성에는 시체만 있었습니다. 그러니 아간을 볼 수가 없었으며 또한 훔친 물건에는 주인이 없으니 더욱이 아간을 고발하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아간이 뽑혔습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범한 모든 죄를 다보고 계시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 지금 성공한 삶을 살고 있는지요? 그렇다면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또 감사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길 바랍니다. 그런데 혹시 실패한 삶을 살고 있는지요? 그렇다면 그 실패를 재기의 발판으로 삼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지금 아골 골짜기로 가서 돌무덤 앞에 서보십시다. 그 무덤이 혹시 자신의 무덤이 아닌지 물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 8:11절에서 실패한 여인에게 말씀하십니다.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그렇습니다. 이 말씀은 실패에서 성공으로 가는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우리 모두를 향하여 주시는 말씀인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여호수아 8장은 승리의 장입니다. 그런데 보니깐 "일어나라" "일어나라"라는 말씀이 계속해서 반복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마침내 일어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이성을 정복할 수가 있었습니다. 실패한 성도들이 있는지요? 그렇다면 낙망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수가성에 사는 여인이 다섯 남편을 청산하였어요. 그리고 현모양처가 되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난 모든 죄를 돌무덤에 청산해 버리고 일어나 새 출발하는 성도들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여호수아 6장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큰 성 여리고를 하나님의 은혜로 함락시켰습니다. 그때 그들은 개선가를 불렀고 하나님 앞엔 감사찬송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 7장을 보면 작은 아이성 싸움에서 크게 실패를 한 사건이 나오는데 그때 백성의 마음이 녹아 물같이 되었다고 하였으며, 또한 지도자 여호수아는 슬픈 목소리로 하나님께 기도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7절에 ''여호수아가 가로되 슬프도소이다 여호와여 어찌하여 우리를 아모리 사람의 손에 붙여 멸망시키려 하나이까'' 슬픔을 토로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이성은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대입니다. 때문에 이 성을 함락시켜야 가나안땅에 무사히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실패를 했으니 그들의 행군은 중단될 수밖에 없었고 가나안 진군이 멈출 수밖에 없었습니다. 인생의 산도 이와 같이 성공할 수도 있지만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사실 실패한 인생들이 태반입니다. 따라서 나의 실패한 삶을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시간 우리 모두가 가나안을 향해 기도하며 찬송하며 진군하는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우리 모두가 여호수아 본받아 앞으로 가세와 같은 찬송을 하며 천국을 향해 믿음의 전진이 있어 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저는 본문 말씀을 중심해서 죄 문제를 언급할까 합니다. 그래서 이 시간 세 가지 내용을 살피면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 실패의 원인
본문 15절 말씀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실패한 원인이 죄 때문이라고 밝혀져 있습니다. 따라서 예배드리는 우리 모두가 내 삶 속에 아간은 없나 찾을 수 있어야겠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죄가 무엇일까요? 죄는 만사를 실패케 하는 괴물과 같습니다. 우리의 전쟁을 실패케 하고 우리의 사업을 실패케 하고 때로는 우리의 정치를 실패케 합니다. 그래서 죄가 인생을 곤두박질치게 하고 죄가 사람 사람을 거꾸러뜨립니다. 죄 앞에서 신사도 넘어지고 숙녀도 넘어집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죄 속에 무서운 독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선 심령을 피곤하게 합니다. 고달프게 하지요. 쿨쿨하고 맹맹하게 합니다. 무슨 독일까요? 미움의 독이요, 저주의 독이요, 죽음의 독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말썽거리가 무엇이냐 물으며 죄라고 답해야 할 것입니다.
죄에는 연대성이 있습니다. 내가 저지른 죄 내게만 미치지 아니합니다. 아간 한 사람이 범죄했는데 여호수아 7장1절에 보면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범죄하였다고 했고 11절에도 보면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가정에서 호주가 범죄하면은 온 가족이 고통을 당합니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지요, 한 성도가 범죄를 하면은 온 성도들이 욕을 먹고 또 그것이 예수님에게까지 영광을 가리우게 한다는 것입니다. 죄는 인생을 괴롭히는 괴물이기도 합니다, 여호수아는 본문 25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네가 어찌하여 우리를 괴롭게 하였느뇨?'' 사실 ''아간''이란 말은 괴롭다는 의미를 지니기도 합니다. 아간은 범죄를 인해 자기가 몹시 괴로웠을 겁니다. 뿐만 아니라 그 괴로움이 온 백성에게 미치지 않았습니까? 자식이 범죄한 것, 그대로 끝나지 아니하고 부모에게 고통이 되는 것 마찬가지입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이런 경험을 종종 하지요, ''아 내 인생이 괴롭도다'' 할 때가 많이 있지요. 그 원인을 물어야 합니다. 성경은 답하기를 죄 때문이라고 답합니다. 여호수아는 아간을 향해서 말했어요. 본문 19절인데 ''네 행한 일을 내게 고하라'' 예배드리는 시간에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이기도 하지요. ''네 행한 일을 내게 고하라'' 왜 그럴까요? 모든 실패의 원인이 하나님께 있지 아니하고 내게 있기 때문입니다. 내 실수요, 내 범죄 때문이란 말입니다. 어찌 가인의 죄를 하나님이 모르시겠습니까? 그럼에도 하나님이 물으셨어요. ''가인아 네 아웃 아벨이 어디 있느냐'' 어찌 아간의 죄를 하나님이 모르시겠습니까? 근데 하나님은 말씀하셨어요 ''네 행한 일을 내게 고하라'' 하나님은 범죄한 인생을 사랑하사 죄를 회개키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벌써 나의 허물을 몽땅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서서 내가 여차여차 하였나이다 하고 고하기를 원하신단 말입니다.
여리고성을 함락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의 힘으로 함락했습니까? 아니지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좋은 무기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저 성 주위를 빙글빙글 돌았을 뿐인데 승리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또 감사했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승리 후, 성공 후에 잘 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잘난 체 했고 교만했고 자만했어요. 우리가 엄청난 일을 해냈다 하고 뽐냈어요. 그리고는 아이성 쯤이야 문제없다 방심한 것입니다. 오만에 빠진 것입니다. 이것이 실패한 원인이 될 주를 몰랐던 것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하지 아니 했습니다. 아예 하나님을 제외시켰습니다. 아이성 전투는 우리의 힘으로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결국 실패했습니다. 죄가 무엇입니까? 만사를 실패케 하는 괴물이란 것입니다. 왜 우리가 실패한 삶을 때때로 살아야 합니까? 우리는 겸손하게 고백해야 합니다. 하나님 내가 이러이러한 죄를 범하였나이다. 그렇습니다 예배드리는 시간에 이 참회가 하나님 앞에 상달될 수 있는 제사가 됩니다. 이러한 기도가 능력있는 기도가 되고 은혜 받는 기도가 됩니다. 따라서 이 시간 고린도전서 10장 12절이 교훈합니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지 말라 넘어질까 조심하라'' 삼손을 보십시오 블레셋 군사 일천 여 명을 타작마당에서 곡식 털듯 하지 않았습니까? 이때입니다. 삼손은 조심하고 조심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가 어땠습니까? 드릴라의 부드러운 무릎에 누워서 이제는 편안히 즐기자 했어요. 결국 그는 눈이 뽑혔으며, 맷돌을 돌리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래요 사람이 자칫 잘못하면 거꾸러진 삼손이 될 수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 실패 한 경험이 있는지요? 그렇다면 그 실패에 대한 원인이 무엇일까 한 번 물을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물음이 도대체 어디 있나? 이렇게 물으면서 전진하는 삶을 살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 아간의 범죄
본문18절을 읽읍시다. 여기서 아간을 뽑은 것 뿐 아니라 구체적으로 아간을 소개하고 있는 점에 대해 유의해야 합니다. 제비는 사람이 뽑습니다. 여호수아가 뽑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비는 하나님이 죄인을 색출해내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잠언 16장 33절 사람이 제비는 뽑으나 이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 결국 아간이 토설했어요. 본문21절을 보면은 내가 노략한 물건의 시날산의 아름다운 외투 한 벌과 은 200세겔과 50세겔 중의 금덩이 하나를 보고 탐내어 취했나이다. 그러나 아간의 토설은 심령에서 복받치는 참회의 토설이 아닙니다. 제비에 뽑힌지라 부득불 토설한 무의미한 내용인 것입니다. 결국 아간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훔친 물건 자기 것 삼을 수 없었어요. 그 모든 물건과 함께 자녀들과 가축과 모두가 몰수당했고 이것들을 아골 골짜기로 끌고 가 백성들의 돌 물매를 맞아 죽어 가는 형편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불사르고 이 모든 것을 돌무덤에 묻어 버리고 만 것입니다. 한 사람의 범죄 때문에 모든 가족이 이러한 수난을 당했어요. 왜 이처럼 가혹한 처벌을 한 것일까요? 답은 우리 모두에게 있습니다. 아간의 범죄는 사람의 물건을 도적질한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물건을 도적질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주는 교훈은 인생들은 탐심을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우리들은 탐심을 버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약 1:15절에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여 사망을 낳느니라...'' 다른 사람에 관한 예기가 아니라 나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의 말인 것입니다. 본문 상세히 읽다보면 시선을 끄는 대목이 있는데 그것은 아간이 범죄한대목인데 그가 범죄 하였다고 하면서 그의 죄목을 조사하는 데 아간의 조상부터 추적하여 그럴 수밖에 없는 범죄인 것을 밝혀내고 있습니다. 유다 지파 셀라의 증손이요 삽디의 손자요 갈미의 아들인 아간이 범죄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의 범죄를 4대로 거슬러 올라가 이력서를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다에게 세 아들이 있었습니다. 엘과 오난과 셀라, 그런데 첫아들을 위해서 장가를 보냈는데 다말을 자부로 맞이하였어요. 아들이 죽었고 풍습대로 둘째 아들에게 물려주고 싶었는데 그 아들도 죽어버려서 셋째 아들 세라에게 다말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유다가 다말을 범하고 말지 않습니까? 아간의 죄를 지적할 때에 족보를 따져 올라간다는 것에는 의미가 있습니다. 출 20:5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찾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대 까지 이르게 하리라'' 다시 말하자면 부전자전이라는 말입니다. 악한 아버지가 악한 아들을 낳고 악한 아버지가 악한 딸을 낳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깐 성경은 자주 말합니다. ''저가 그 아버지의 길을 따라 저가 그 아비의 길을 행하였더라''고 반복하고 있습니다. 아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할아버지 손자며 그 아버지의 아들인 아간이 그 조상처럼 범죄하였다는 것입니다. 아간의 범죄 내용은 21절에 탐욕이 범죄의 뿌리였다고 성경이 밝혀 내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태반의 범죄가 이 탐욕 때문에, 탐심 때문에, 욕심 때문에 벌어진 일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 예배드리면서 마음을 비우는 경건을 지니십시다. 탐욕의 뿌리를 뽑는 예배가 되게 하십시다. 행여라도 과욕하지 말고 혹시라도 내가 아간이 아닌가? 하고 물어야 할 것입니다.
셋째, 재기의 발판
본문 26절에 ''그 위에 돌무더기를 크게 쌓았더니 오늘날까지 있더라 여호와께서 그 극렬한 분노를 그치시니 그러므로 그곳 이름을 아골 골짝이라 부르더라'' 실패가 무엇인가요? 그것은 쓴 뿌리와 같습니다. 그러나 실패의 쓴 뿌리가 달콤한 열매를 맺습니다. 실패는 세상에서 말하는 것처럼 성공의 디딤돌이요 승리의 발판이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탐심을 무덤에 묻어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모두에게 주는 본문의 교훈인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6:10에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하였고 골로새서 3장 5절에는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고 하였습니다. 탐심은 인생을 거꾸러뜨리는 골리앗과 같기도 합니다. 아담을 보면 탐심 때문에 선악과를 따먹고 모든 인류에게 사망을 가져오게 하였습니다. 다윗을 보면 탐심 때문에 밧세바를 범했고, 그리고는 이스라엘 왕가의 중흠을 남겼습니다. 아합 또한 탐심 때문에 나봇의 포도원을 훔치더니 무서운 범죄를 만들지 않았습니까? 아간도 마찬가지로 탐심 때문에 자기의 가족도 죽고 이스라엘 군사 36명이 죽고, 그리고 백성들의 마음이 녹아서 물처럼 되지 않았습니까?
사랑하는 성도여! 어쩌다가 실패는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인생의 모습이니까요. 그러나 실패에서 다시 일어서 보고 싶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 아골 골짜기로 가서 높다랗게 쌓여있는 돌무더기를 응시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 무덤 속에 누가 누워있는지요? 물론 아간과 탐욕이겠지만 그러나 혹시 내가 그 돌무덤 속에 누워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돌무덤이 모두에게 교훈합니다. 첫째, 죄 짓고는 못산다는 것입니다. 무덤 속에는 죄인들이 들어갑니다. 다시 말하면 죄가 무덤을 만들어갑니다. 롬 6:23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망은 죄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려고 이 땅에 오셨고 십자가에 죽으셨던 것입니다. 우리의 찬송 중에 ''나의 죄를 씻기는 예수의 피밖에 없네'' 이러한 찬송도 있듯이 우리 죄인은 예수의 피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죄를 범하지 않을 수 있다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둘째는 탐심을 물리치라는 교훈입니다. 아골 골짜기의 돌무덤이 입을 열 수만 있다면 오고가는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을까요? "여보세요! 탐심을 물리치세요, 욕심을 버리세요, 인생을 승리키를 원하면은 마음을 비우세요!"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견물생심이라는 말처럼 무엇을 보면 욕심이 생겨난다는 것입니다. 아간이 그랬습니다. 전리품으로 얻은 물건 가운데 시날산의 외투가 입음직했어요. 보면 볼수록 욕심이 생겼어요 은 200세겔, 50세겔의 번쩍번쩍한 금 덩어리가 욕심이 났단 말입니다. 그 욕심이 무엇입니까?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여 사망을 낳게 한 것입니다. 토마스 풀러가 말했습니다. "악마와 거래하고 싶지 않거든 악마의 상점에 들어가지 말라" 그렇습니다. 보지도 말고 피해야 하며 뿌리쳐야 하는 것입니다. 요셉이 교훈 하듯이 보디발의 아내가 유혹하였을 때 뿌리치고 도망하지 않았습니까? 욕심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며 욕심은 하나님의 말씀을 막습니다. 욕심이 성도들을 거꾸러뜨립니다.
그리스신화에 이러한 얘기가 있습니다. 술을 담당한 주신 디오니소스가 절친한 마이다스 왕에게 말했습니다. ''마이더스 왕이여! 당신의 소원이 무엇이오? 내가 들어주겠소'' 라고 말하였습니다. 바로 이때다 싶어서 내가 만지는 것마다 금이 되게 하소서! 라고 한 뒤 아주 커다란 바위덩어리를 만지었습니다. 그랬더니 커다란 바위덩어리가 바위 덩어리가 금덩이로 변하게 되었습니다. 신바람이 난 왕은 술잔도 만지고 밥그릇도 만지고 의자도 만지었습니다. 온통 금 덩어리가 되었습니다. 마침 왕비가 달려와 "여보!" 하고 왕을 만졌는데 왕비까지도 금이 되어버렸습니다. 얼마나 슬프겠습니까? 이 소식을 듣고 공주가 달려와 아빠! 하고 불렀는데 "오 사랑하는 딸아!" 하고 만졌는데 공주까지도 금 덩어리가 되어버렸습니다. 금 덩어리 속의 왕은 행복할 것 같지요? 그러나 얼마나 불행하겠습니까?
아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재물을 욕심내다가 불행한 인생이 되고 말았습니다. 또 어떠한 교훈이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은 속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속일 수가 있어요 집사님이 장로님을 속일 수가 있고, 장로님이 또 다른 장로님을 속일 수가 있습니다. 목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속일수가 없다는 이 믿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만은 속일수가 없다고 고백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간이 범죄할 때에 깜깜한 밤이었습니다. 그러니 누구도 알 수가 없었습니다. 여리고성에는 시체만 있었습니다. 그러니 아간을 볼 수가 없었으며 또한 훔친 물건에는 주인이 없으니 더욱이 아간을 고발하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아간이 뽑혔습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범한 모든 죄를 다보고 계시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 지금 성공한 삶을 살고 있는지요? 그렇다면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또 감사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길 바랍니다. 그런데 혹시 실패한 삶을 살고 있는지요? 그렇다면 그 실패를 재기의 발판으로 삼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지금 아골 골짜기로 가서 돌무덤 앞에 서보십시다. 그 무덤이 혹시 자신의 무덤이 아닌지 물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 8:11절에서 실패한 여인에게 말씀하십니다.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그렇습니다. 이 말씀은 실패에서 성공으로 가는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우리 모두를 향하여 주시는 말씀인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여호수아 8장은 승리의 장입니다. 그런데 보니깐 "일어나라" "일어나라"라는 말씀이 계속해서 반복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마침내 일어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이성을 정복할 수가 있었습니다. 실패한 성도들이 있는지요? 그렇다면 낙망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수가성에 사는 여인이 다섯 남편을 청산하였어요. 그리고 현모양처가 되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난 모든 죄를 돌무덤에 청산해 버리고 일어나 새 출발하는 성도들이 되시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