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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낙중목사 (관악교회)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을 인하여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도를 유대인에게만 전하는데,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다한 사람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예루살렘 교회가 이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니 저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은 마음으로 주께 붙어 있으라 권하니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행 11:19∼26>
오늘도 주의 은혜가 우리 성도들 마음속에 임하기를 바랍니다. 저는 오늘 부흥성장하는 안디옥교회처럼 이런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1986년 8월 초에 스위스에 있는 알프스 산에 가본 일이 있습니다. 그 산야는 그때 8월달 여름이었기 때문에 무척 더웠고 또 많은 장미들이 예쁘게 피어있는 것을 보았는데 케이블카를 타고 계속해서 알프스 산으로 올라가서 한 역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거기는 눈이 덮인 산이고 거기에서는 그때 여름이었지만 산상에서는 눈이 내리고 바람이 무척 세게 불고 있는 추운 날씨였기 때문에 미리 준비해간 외투, 겨울 잠바를 입고 올라갔습니다. 거기 산상에 있는 한 매점에서 저는 건조되어 있는 에델바이스라고 하는 꽃을 하나 선물로 샀습니다.
이 에델바이스라고 하는 꽃은 국화과에 속한 다년생 고산식물입니다. 여름에 눈 속에서 피어난 에델바이스, 그것은 장미처럼 새빨간 색깔도 아니고 백합처럼 향기가 짙은 꽃도 아니었습니다. 다만 15센티미터 정도 크기의 줄기와 잎에 솜털같은 털이 많았고 하얀색의 꽃이 피어있었습니다.
외모로 볼 때는 그렇게 대단한 꽃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에델바이스를 좋아하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이유는 혹독한 추위 속에 눈 속에서 피어난 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늘의 교회, 관악교회가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사년동안의 진통을 통해서 태어났습니다.
우리 교회 설립년월이 1976년 5월 21일이지만 그 설립되기까지 4년 동안에 진통이 있었습니다. 때는 제 나이 26살, 신학교 졸업반 때였습니다. 72년도 6월 22일 하짓날 가장 해 길이가 긴 날입니다. 그때 신학교 학장으로부터 저 봉천동 158번지 무허가촌에 어느 목사님께서 천막을 치고 개척교회를 하다가 너무 힘들고 어려워서 그만둔 교회가 있는데 한번 가보라는 권유를 듣고 그때 왔는데 천막 속에 주일날 10시반쯤 들여다보니 남자청년 한 분과 여자 청년 둘이서 초등학교 학생들 성경공부하고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들을 바라보는 순간에 왈칵 내 눈에서 눈물이 쏟아진 것은 목자없는 양이라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세 청년을 붙들고 내가 한번 일으켜 세워보려고 몸부림을 쳤습니다. 그래서 한달 후에 땅주인이 와서 이 천막을 철거하라 했고 그래서 다른 데로 옮겨갔다가 또 한 3개월만에 쫓겨나고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가 또 그 지역 철거가 되어서 철거당하고 이렇게 하면서 74년도에는 무허가 판자촌에 갔다가 오른쪽은 이쁜이네고 왼편에는 김포집이고 이 왕대포 술집사이에서 교회를 하다가 뒷집에서 불이 나서 또 천막이 태워지고 이러면서 4년의 세월이 흐릅니다.
드디어 76년에 가서야 제대로 교회 간판을 붙이고 교회가 탄생되었으니 한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기까지는 어머니 뱃속에서 10달 동안 있다가 태어나는데 관악교회는 4년 동안 진통을 통해서 태어났습니다.
그러면서 오늘날 25주년 기념주일을 맞게 되었는데 제가 25년 동안 교회를 섬기면서 우리 교인들을 이렇게 바라보면 네부류의 교인들이 마음에 정리가 되었습니다.
어떤 교회는 그저 관망만 하는 교인이 있습니다. 그저 적을 두고 가끔씩 교회에 와서 구경만 하다가 가는 그런 교인이 있고 어떤 교인은 지원을 하는 교인이 있습니다. 자주는 못 나오지만 교회에 어려움을 당할 때 배후에서 기도도 하고 물질도 지원하는 그런 교인들도 있고 또 어떤 교인은 헌신하는 교인이 있는데 그 헌신하는 교인들은 교회가 어떤 목표를 정하고 나아가면 몸을 드리고 시간을 드리고 연보도 바치고 그러면서 교회를 위해서 열심히 일합니다. 이런 교인들로 인해서 제가 힘을 얻기도 하고 여러 교인들이 도움을 받기도 합니다.
네번째 교인은 핵심교인이 있는데 이 핵심교인은 아주 소수입니다. 그러나 교회 일을 위해서, 주와 복음을 위해서 목숨이라도 내놓고 그렇게 헌신하려고 하는 사명에 불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는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 창조적 소수, 혹은 핵심교인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 안디옥이라고 하는 교회는 소수의 평신도들이 환난과 핍박 가운데서도 믿음을 지키고 또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여 세운 교회입니다. 이 안디옥 교회가 박해 중에서도 부흥될 수 있었던 것은 그 흩어진 사람들이 전도했기 때문입니다.
그 흩어졌던 이유는 예루살렘에 큰 박해가 있었고 그 때 예루살렘 일곱명의 안수집사 중 하나였던 스데반 집사님이 전도하다가 반대자들이 던진 돌에 맞아서 죽게 됩니다. 이 끔찍한 일이 있게 되자 여러 성도들 중에서 많은 사람들이 다 사방으로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사도들을 제외한 일반성도들이 흩어졌는데 그 흩어진 사람들 가운데 몇명이 수리아 안디옥이라고 하는 쪽으로 피난을 가게 됩니다. 그곳에 피신했던 기독교인들 중에서 유태인이 유태인에게만 전도하는 일도 있었고 저 아프리카에서 왔던 디아스포라의 유태인, 혹은 사이프러스 섬에서 왔던 유태인, 그들은 헬라말을 구사할 수 있었기 때문에 안디옥이라고 하는 도시에 헬라인도 있었음으로 그들에게도 전도를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안디옥교회는 유태인들로만 구성된 교회가 아니고 거기에 있는 헬라사람들도 복음을 전해서 구원받은 사람들로 구성된 교회였으니 소위 이 안디옥교회는 연합을 하는 교회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 안디옥교회의 특징중 하나는 어떤 사도, 교역자, 목회자가 주선하여 세워진 교회가 아니고 일반 평신도들이 전도를 하여 세워진 교회인 것입니다.
우리 예수를 믿고 거듭나고 영에 속한 사람은 어떤 환경적 요인, 물질적 요인에 뿌리를 내리고 살지를 않고 영적 자유, 신앙의 자유가 있는 것을 우선에 둡니다. 이는 마치 1660년경 영국의 메리 여왕이 기독교신자를 박해하자 우리는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 가겠다 하고 메이 플라워라는 배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 저 미국의 도착해서 하나님을 마음껏 찬양하고 감사하고 예배드리며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 이것을 그들의 삶의 제일로 정하고 핍박 중에서 신앙을 지킨 것과 같습니다.
우리 관악교회 역사도 보면 목회자도 없고 많은 사람이 흩어졌지만 아직 어린양들을 버릴 수가 없어 그들에 대한 애착을 가지고 주일날 모여서 성경을 가르쳤던 교사 세 분이 찢어졌던 천막교회에 남아있어서 그들과 더불어 오늘날 이 교회가 발전해 온 것입니다.
안디옥 교회는 전도하는 사람들로 인하여 부흥이 되었다면 오늘날 교회 부흥발전의 요인은 전도에서 찾아야 합니다. 전도하는 사람만이 참된 그리스도인입니다. 전도하는 사람을 우리는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합니다.
전도하는 사람은 천국과 지옥을 확신하는 사람입니다. 전도하는 사람은 인생의 근본 문제는 복음화에 있다고 아는 사람입니다. 전도하는 사람은 주님의 마지막 유언의 말씀을 준행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열심히 전도하는 사람, 주님이 함께 하십니다.
21절에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다한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그들과 함께, 그들은 누구입니까? 그들은 바로 오늘 여기 19절, 20절에 나오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이 누구입니까? 19-20절에 보면,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을 인하여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도를 유대인에게만 전하는데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주의 손이 주예수를 전파하는 그들과 함께 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의 손이 여러분과 함께 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주의 손은 어떤 손입니까?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손입니다. 주의 손은 죽은 자를 살리는 손이요, 주의 손은 병든 자를 고치는 손입니다. 주님의 손은 축복의 손입니다. 죽었던 사람, 주님이 만지면서 달리다굼 하니 살아났습니다.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으로 쓰러져 있는데 주님이 그 손을 어루만지며 일어나라 하니 열병이 떠났습니다.
물고기 두 마리, 떡덩이 다섯개를 손에 들고 축사하고 난 이후에 그 손에는 신기하게도 계속해서 떡과 물고기가 나와 오천명이 배부르게 먹고 열두바구니를 거두는 기적의 손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의 손은 악한 자를 심판하는 손이기도 합니다. 이 주의 손은 하나님의 택함받은 백성을 지키는 손입니다.
사도행전 13장에 보면, 바울과 바나바가 선교사가 되어서 사이프러스라고 하는 섬에서 전도하는데 그 섬에서 가장 높은 사람, 서기오 바울 총독에게 전도하려고 하는데 유대인 박수 남자 무당 엘루마가 방해를 합니다. 훼방을 합니다. 예수를 못 믿도록 자꾸 옆에서 충동질하고 바울의 비위를 자꾸 거슬립니다. 그때 바울이 성령이 충만한 상태에서 그 엘루마를 향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궤계와 악행이 가득한 자요 마귀의 자식이요 모든 의의 원수요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겠느냐? 보라, 주의 손이 네 위에 있으니 네가 소경이 되어 얼마동안 해를 보지 못하리라. 하니 그 즉시 어두움이 안개같은 것이 그 사람에게 덮이게 되니 앞을 보지 못하고 더듬거리게 됩니다. 그렇게 된 것을 서기오 바울 총독이 보고 예수를 믿었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우리에게 교훈한 것입니까? 하나님의 사람을 괴롭히면 그 괴롭히는 사람을 하나님이 심판한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방해하는 훼방하는 사람을 주님이 심판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여러분, 전도할 때 하나님은 전도자를 지키는 주의 손으로 나타나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 기뻐하는 일을 열심히 하려고 하는데 그것을 방해하는 자를 주님은 심판하는 손으로 나타났던 것입니다. 이와같은 주님의 손은 오늘날도 우리 가운데 나타납니다.
사도행전 4장에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전도하다가 관원들에게 붙들려서 매를 맞고 풀려났습니다. 그때에 온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이 한 장소에 모여서 일심으로 부르짖어 기도합니다. 주여, 이제도 우리가 손을 내밀어 병든 자를 고치게 하옵시고 담대히 하나님 말씀을 전하게 하옵소서. 이렇게 부르짖어 기도하니 모인 무리가 다 진동하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게 되고 담대히 복음을 전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가복음 16:20절 말씀보면 제자들이 바깥에 나가서 복음을 전파할 때 주께서 함께 하심으로 따르는 표적이 있었고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 부흥을 시킨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말 잘하는 사람들입니까? 지식인들입니까? 학박사입니까? 누가 교회를 부흥시킵니까? 전도하는 사람들이 교회 부흥시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가장 존귀한 사람들이 누구냐? 전도하는 사람인줄로 믿습니다.
전도하지 아니한 사람은 거듭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전도하지 않는 사람, 지옥과 천국이 있음을 확신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전도하는 사람들로 인해서 안디옥 교회가 부흥된 것처럼 오늘날 우리 관악교회의 부흥도 전도하는 사람들이 있기에 부흥되는 것입니다.
두번째, 부흥하는 안디옥교회는 어떻게 부흥할 수 있었느냐?
그 교회를 담임하는 바나바 목사님이 갖출 바를 다 갖추었기 때문에 더욱 부흥할 수 있었습니다.
그 바나바에 대해서 24절에 이렇게 소개합니다.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고 그랬습니다. 그렇습니다. 교회에서 지도급에 있는 사람들은 우선 마음이 착해야 합니다. 마음이 선해야 합니다. 온유하고 겸손해야 합니다. 도덕과 윤리적으로 깨끗해야 합니다.
거기에다가 성령과 믿음이 충만해야 합니다. 성령과 믿음이 충만함은 곧 그리스도의 영성을 소유한 사람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은 사람입니다.
착한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성품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한 자다. 예수님의 삶의 철학, 나는 섬기기 위해서 왔다. 예수님의 사명의식, 나는 너희를 구원하기 위해서 죽으러 왔다.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선한 목자다. 이렇게 사명감에 붙들리고 영혼구원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그런 교역자들이 있는 교회는 반드시 부흥되는 줄로 믿습니다.
저는 이런 바나바와 같은 목회자가 되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합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에게 기도를 부탁합니다. 착한 사람, 그리고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 다른 것으로 기뻐하지 아니하고 은혜받음을 기뻐하고 거듭난 것을 보아 기뻐하고 하나님 말씀을 지키는 일로 기뻐하는 그런 교역자가 되기를 정말 저는 소망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평생 소원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예수 닮기를 원하는 마음입니다. 인격은 온유하고 겸손하고 영성은 성령과 믿음과 지혜가 충만하고 그리고 예수님처럼 하나님 말씀에는 예만 하고 아니오가 없으며 죽기까지 복종하신 그 예수, 하나님의 뜻이면 나는 죽으리라. 이렇게 목숨을 내놓고 헌신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로 인해서 교회가 부흥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가까이 하면 주님이 그 사람을 붙잡아 주십니다. 시편 73:23절 말씀 보면, 내가 항상 주와 함께 하니 주께서 오른손으로 나를 붙드시나이다. 우리가 주님을 가까이 하려고 애를 쓰면 주님은 그런 사람을 붙잡아 주시고 주님의 손에 붙잡힌 자가 되면 어린 목동 다윗이라도 주님의 손에 붙들리니 골리앗과 싸워서 이길 수 있게 되고 모세는 나이가 많은 80세의 노인이었지만 주님의 손에 붙들린바 되니 육십만의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해방시키고 끌어가는 지도력을 발휘할 수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손에 붙잡힌바 되어야 합니다. 성령님께 사로잡힌바 되어야 되고 말씀에 붙잡힌바 되고 사명에 붙잡혀 끌려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붙들고 사는 삶이 아니라 붙잡힌바되서 끌려사는 이것을 우리는 성령충만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바나바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교역자만 성령 충만할 것이 아닙니다. 사도행전 6장에 보면 예루살렘 교회의 7명의 안수집사들도 성령과 믿음이 지혜가 충만한 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성령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가까이하는 방법이 세 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의 보혈로 주님 앞에 하나님 앞에 가까이 갈 수 있습니다. 멀리 있던 너희는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이제 가까와졌느니라 했으니 십자가를 의지하고 보혈을 의지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고 두번째, 지난 날 바로 살지 못한 죄를 철저하게 회개하면 회개한 만큼 우리가 하나님 앞에 더 가까이 다가설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빛을 가까이 할수록 어두움은 물러갑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할수록 우리가 성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세번째, 하나님 앞에 가까이 가는 방법은 기도입니다. 시편 145:18절에 여호와는 자기에게 간구하는 자에게 가까이하신다 그랬습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무릎꿇고 기도하는 사람을 하나님은 가까이 하시고 붙잡아 주십니다.
새벽기도는 새벽잠 없는 할아버지, 할머니들만 하는 기도가 아닙니다. 새벽기도는 초저녁잠 없는 사람이 하는 기도가 아닙니다. 새벽기도는 할 일 없는 사람이 하는 기도가 아닙니다. 새벽기도는 예수님을 본받아 예수님이 새벽에 기도하셨으니 나도 기도하리라. 새벽에 기도하지 아니하면 너무 세상 살기 바빠서 기도할 시간 없으니 하루에 일과 첫시간을 나는 하나님께 드리리라. 하나님 제일주의로 사는 사람들만이 십일조를 바치는 신앙으로 하루에 일과를 시작하기전 첫시간을 잘라서 바치는 이 하나님 제일주의의 삶이 새벽기도 신앙입니다.
새벽기도를 비록 못한다 할지라도 때마다 일마다 하나님 앞에 묻고 기도하는 사람을 하나님은 들어 쓰실 줄로 믿습니다. 마귀의 시험을 이기는 길을 기도밖에 없습니다.
사울이라고 하는 왕이 다윗을 시기하여 죽이려고 쫓아다니기를 13년 동안 합니다. 또한 다윗은 13년 동안 망명생활을 합니다. 수없이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던 것은 그는 기도했고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이 방법을 일러주었습니다.
예를 들어 말하면 삼하 2:1절 이하 말씀에 사울왕이 다윗을 죽이려고 수색작전을 하고 있을 때 그때 다윗이 하나님께 묻습니다. 여호와께 물어 가로되 내가 유다 한 성으로 올라가리이까?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올라가라. 다윗이 다시 기도하여 가로되 어디로 가리이까? 하나님이 가라사대 헤브론으로 가라. 꼭 이런 식으로 다윗은 때마다 일마다 하나님께 묻고 기도했고 그때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지시하시고 지시한대로 순종했기 때문에 환난에서도 건짐을 받았고 결국은 하나님마음에 합당했던 다윗을 괴롭혔던 사울을 하나님은 죽게 했고 훈련이 끝나고 난 이후에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으로 하나님이 세워주셨으니 환난 날에 여러분, 기도하십시오. 고난의 때에 하나님 앞에 간구하십시오. 훈련이 끝나면 주님이 들어서 쓰실 줄로 믿습니다.
바나바가 안디옥교회 목회자가 되서 가서 보니 사람들이 기도에 열심이고 성경공부에 열심이고 전도에 열심이고 그래서 항상 마음에 영적인 기쁨이 있고 얼굴 표정이 화평하고 은혜가 넘치는 것을 보고 기뻐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목회자의 기쁨, 목회의 보람은 성도들이 주님 만나고 거듭나고 회개하고 성령받고 주안에 기뻐하고 즐겁게 살아가는 것, 그것이 목회자의 보람입니다. 은혜 위에 은혜를 받도록 그들이 받은 은혜를 지속하기 위해서 바나바가 그곳에 가서 첫번째 부탁한 말은 주께 붙어있으라. 굳은 마음으로 주께 붙어있으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가지는 저절로 열매를 맺음과 같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주님께 굳게 붙어 있어야 합니다. 말씀 붙잡는게 주님 붙잡는 것이고 기도하는 것이 주님 붙잡는 것이고 순종하는 것이 주님 붙잡는 것인데 그렇게 주께 붙어 있기만 하면 주님이 또한 그를 붙들어 주실 것이고 승리자가 되게 하실 것입니다.
이제 이 안디옥 교회가 더 부흥되고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바나바가 협력자를 구했는데 당시에 소외감에 빠져있던 사울을 다소에서 불러 왔습니다. 원래 사울이라고 하는 사람은 사도행전 9장을 보면,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났고 아나니아라는 사람에게 안수 기도를 받을 때 성령 충만 받았고 앞을 볼 수 없었던 사람이 눈이 떠져서 밝아지고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경험했고 성령받은 사람입니다. 그는 곧바로 전도를 하려고 했지만은 과거에 너무 교회에 적지않는 피해를 준 것에 대하여 사도들 마음속에 사울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가 있었기 때문에 사울을 멀리 했습니다. 한편 유대교 지도자들은 사울이라고 하는 청년이 유대교를 배신하고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고 하여 또 그를 죽이려고 하니 그는 사도들로부터도 하나가 될 수 없었고 유대교도들로부터도 따돌림을 받으니 그는 다소라고 하는 자기 고향으로 간지 10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때에 마음 착한 바나바가 안디옥교회에 와서 보니 혼자 힘으로 감당하기 어려움을 깨닫고 다소에서 사울을 불러 올려 일년동안 함께 성경공부를 하니 믿는 숫자가 많아졌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담임목사 혼자 할 수 없습니다. 전도로 돕는 자가 필요합니다. 교육으로 돕는 자가 필요합니다. 찬양으로 돕는 자가 필요합니다. 보이는데서 혹은 보이지 않는데서 기도로 돕는 자가 필요합니다. 재물로 연보로 돕는 자가 필요합니다.
모세는 혼자서 육십만명의 이스라엘민족을 지도하다가 지쳤을때 그의 장인 이드로가 와서 방침을 일어줍니다. 그대의 하는 일이 선치 못하도다. 이 백성 가운데 진실무망하며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불의한 일을 멀리하는 사람을 백성 가운데 선택하여 열명을 돌볼 수 있는 사람에게는 십부장의 이름을 주고, 오십명을 끌어갈 수 있는 지도력 있는 사람은 오십부장의 이름을 주고, 백명을 잘 돌볼수 있는 사람은 백부장의 이름을 주고, 천명을 끌어갈 만한 힘있는 사람은 천부장의 이름을 주어서 이 피라미드 형식의 조직을 통해서 쉬운 일을 과감하게 그들에게 떼어 맡기고 힘들고 어려운 일은 그대가 감당하라 하여 일을 분업화하니 일이 쉬웠고 모든 사람들은 자기 존재가치 인정받아 자부심과 긍지를 갖게 되고 서로 협력하니 육십만 대군은 질서정연하게 가나안을 향하여 전진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 이 교회에 성도들의 수가 아무리 많다 할지라도 이렇게 조직을 통하고 돕는 자가 있으면 질서정연하게 발전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기독교 역사에 보면 돕는 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모세를 도왔던 아론과 훌, 기도로 도왔습니다. 열두 명의 정탐꾼 가운데 백성들이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을 때 갈렙과 여호수아가 나타나서 긍정적인 사고를 가지고 가십시다 하고 모세에게 용기를 실어주었던 협력자도 있었습니다.
바울이 선교사역을 할 때 실라도 누가라는 의사도 있었습니다. 때로는 브리스길라, 아굴라 부부도 있었습니다. 때로는 디모데와 데마와 같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협력자 없이 어찌 교회가 부흥될 수 있겠습니까? 이 안디옥교회는 받은바 은사 따라 사람들을 활용하고 서로 협력하다 보니 그래서 교회가 부흥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관악교회 더욱 부흥되도록 하기 위해서 여러분이 받은바 은사를 개발하고 받은 바 은사를 가지고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충성하고 봉사하시기 바랍니다.
협력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교회를 함께 섬겨갈때 교회가 크게 발전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인생 한평생 살면서 하나님 기뻐하는 일 열심히 하면 복을 받는데 마음에 평안이 있고 육신에 건강이 있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일학년 들어갔을 때 부르던 동요가 생각납니다. 학교종이 땡땡땡 어서 모이자, 선생님이 우리를 기다리신다. 이런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 노래를 누가 만들었는지 궁금했는데 이년전 어느 국민일보 기사를 보니 당시에 92세난 김메리라고 하는 장로님을 소개하면서 그 분이 학교종이 땡땡땡 동요를 작사 작곡자라고 하였습니다. 그 분은 한국인인데 미국에 가서 산지 오래되었습니다.
미국 브루클린이라고 하는 지역에 포도원교회에서 지금도 교회학교 교사일을 하고 있다. 교사 70년째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92세 할머니 명예장로님이 교회학교 교사를 70년째 하고 있답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그리고 토요일마다 한인교회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해서 영어로 된 주일학교 교재를 한국어로 번역을 하고 주일날마다 아이들에게 나누어줄 선물, 과자보따리를 꾸미면서 그 아이들 이름을 하나 하나 불러가며 기도하는 즐거움을 이야기했습니다.
어떤 신문기자가 찾아가서 장로님, 건강의 비결이 무엇입니까? 그랬더니 그 분이 세 가지를 말했습니다.
첫째는 규칙적인 생활이요, 두 번째는 쉬지 않는 기도요, 세 번째는 교회에 열심히 봉사하는 것입니다. 이 김메리 장로님처럼 당시 92세, 지금은 94세가 되었을 것인데 그처럼 무병장수하고 사는 비결이 있습니다. 여러분, 규칙적인 생활, 쉬지 않는 기도, 즐거운 마음으로 교회에 봉사하면 그런 복을 받게 될 줄로 믿습니다.
아무튼 이렇게 예수 믿는 사람들은 즐거움이 있어야 됩니다. 항상 축제 분위기 속에 살아야 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의 얼굴이 어둡고 인상이 고약하고 그러면 누가 예수 믿겠습니까? 예수 믿는 사람들 집에서 날마다 싸움이나 하고 고함소리 들리면 누가 예수 믿겠습니까? 항상 기쁘고 즐겁고 그냥 싱글벙글하고 착하고 남 돕고 노래 부르고 살아야 매력을 느끼지 않겠습니까?
이 은혜라는 말은 원래 기쁘다, 즐겁다, 호감을 갖는다, 매력을 느낀다, 좋아 보인다 그래서 사귀고 싶다, 그게 바로 그레이스(Grace), 카리스란 말의 의미가 원래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 받은 사람은 참 매력이 있습니다.
제가 오늘 3부예배를 마치고 잠깐 지하실에 갔었습니다. 그랬더니 거기에 중등부 성가대가 연습을 하는지 앉아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잠깐 들렀더니 어떤 여학생이 저를 바라보고 막 좋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도 웃어주었더니 난 목사님이 좋아요 해서 난 네가 좋다 그랬습니다.
여러분, 이 안디옥 교회의 특징 중에 하나는 불신자들이 예수 믿는 사람들을 가리켜서 크리스티아노스, 그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그리스도인, 원문을 보면 크리스티아노스, 이 말은 불신자들이 예수 믿는 사람들을 가리켜 비웃는 말로 하는 말입니다. 크리스티아노스, 그리스도 일당, 그리스도의 패거리, 그런 뜻입니다.
좋은 말로 표현하면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들,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들, 그들은 비방하는 뜻으로 외쳤지만 그 말을 듣는 교인들의 입장에서는 더없이 기뻤습니다.
야! 우리보고 예수 닮았대. 얼마나 좋아? 그렇습니다. 자식이 부모님 닮아야 좋지, 자식이 이웃집 아저씨 닮으면 좋겠습니까? 예수 믿는 사람이 예수 닮았다고 해야 좋지 않습니까? 유능한 선생님, 제자가 선생님 닮았다고 해야 좋습니다. 불신자들이 우리를 바라볼 때 예수 닮았다, 그리스도를 닮았다 그렇게 평을 받아야 교회가 부흥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을 누가 바라볼 때 꼭 예수님처럼 보인다고 그렇게 말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정말 멋있는 사람입니다.
교회를 나가고 싶어도 너처럼 될까 무서워서 안나가겠다. 그러면 끝장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최초로 예수 믿는 사람들을 가리켜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호칭이 이 안디옥교회에서 붙여졌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세속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거룩을 지키고 성화되어가는 모습으로 안 믿는 사람이 볼 때도 야, 확실히 예수 믿는 사람은 달라, 매력을 느껴, 그렇게 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혹시 누가 비방을 할지라도 예수의 패거리, 예수 닮은 사람들, 그렇게 혹시 비방의 말을 할지라도 우리가 예수 닮았다는 말에 대해서는 기뻐해야 하고 영광스럽게 생각해야될줄로 믿습니다.
그런 안디옥 교회, 피난민으로 시작된 교회였지만 나중에 예루살렘 교회가 어려움을 당할 때 구제헌금을 보내고 최초의 선교사를 파송하는 교회로 발전했으니 교회는 돈 많은 부자들이 많아서 부흥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부자들이 모였을 때 부흥되는 것을 믿습니다.
여러분들, 영적인 부요가 여러분에게 있어서 안디옥교회를 부흥시켰던 사람들처럼 여러분을 통해서 교회가 부흥되고 발전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을 인하여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도를 유대인에게만 전하는데,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다한 사람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예루살렘 교회가 이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니 저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은 마음으로 주께 붙어 있으라 권하니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행 11:19∼26>
오늘도 주의 은혜가 우리 성도들 마음속에 임하기를 바랍니다. 저는 오늘 부흥성장하는 안디옥교회처럼 이런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1986년 8월 초에 스위스에 있는 알프스 산에 가본 일이 있습니다. 그 산야는 그때 8월달 여름이었기 때문에 무척 더웠고 또 많은 장미들이 예쁘게 피어있는 것을 보았는데 케이블카를 타고 계속해서 알프스 산으로 올라가서 한 역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거기는 눈이 덮인 산이고 거기에서는 그때 여름이었지만 산상에서는 눈이 내리고 바람이 무척 세게 불고 있는 추운 날씨였기 때문에 미리 준비해간 외투, 겨울 잠바를 입고 올라갔습니다. 거기 산상에 있는 한 매점에서 저는 건조되어 있는 에델바이스라고 하는 꽃을 하나 선물로 샀습니다.
이 에델바이스라고 하는 꽃은 국화과에 속한 다년생 고산식물입니다. 여름에 눈 속에서 피어난 에델바이스, 그것은 장미처럼 새빨간 색깔도 아니고 백합처럼 향기가 짙은 꽃도 아니었습니다. 다만 15센티미터 정도 크기의 줄기와 잎에 솜털같은 털이 많았고 하얀색의 꽃이 피어있었습니다.
외모로 볼 때는 그렇게 대단한 꽃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에델바이스를 좋아하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이유는 혹독한 추위 속에 눈 속에서 피어난 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늘의 교회, 관악교회가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사년동안의 진통을 통해서 태어났습니다.
우리 교회 설립년월이 1976년 5월 21일이지만 그 설립되기까지 4년 동안에 진통이 있었습니다. 때는 제 나이 26살, 신학교 졸업반 때였습니다. 72년도 6월 22일 하짓날 가장 해 길이가 긴 날입니다. 그때 신학교 학장으로부터 저 봉천동 158번지 무허가촌에 어느 목사님께서 천막을 치고 개척교회를 하다가 너무 힘들고 어려워서 그만둔 교회가 있는데 한번 가보라는 권유를 듣고 그때 왔는데 천막 속에 주일날 10시반쯤 들여다보니 남자청년 한 분과 여자 청년 둘이서 초등학교 학생들 성경공부하고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들을 바라보는 순간에 왈칵 내 눈에서 눈물이 쏟아진 것은 목자없는 양이라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세 청년을 붙들고 내가 한번 일으켜 세워보려고 몸부림을 쳤습니다. 그래서 한달 후에 땅주인이 와서 이 천막을 철거하라 했고 그래서 다른 데로 옮겨갔다가 또 한 3개월만에 쫓겨나고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가 또 그 지역 철거가 되어서 철거당하고 이렇게 하면서 74년도에는 무허가 판자촌에 갔다가 오른쪽은 이쁜이네고 왼편에는 김포집이고 이 왕대포 술집사이에서 교회를 하다가 뒷집에서 불이 나서 또 천막이 태워지고 이러면서 4년의 세월이 흐릅니다.
드디어 76년에 가서야 제대로 교회 간판을 붙이고 교회가 탄생되었으니 한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기까지는 어머니 뱃속에서 10달 동안 있다가 태어나는데 관악교회는 4년 동안 진통을 통해서 태어났습니다.
그러면서 오늘날 25주년 기념주일을 맞게 되었는데 제가 25년 동안 교회를 섬기면서 우리 교인들을 이렇게 바라보면 네부류의 교인들이 마음에 정리가 되었습니다.
어떤 교회는 그저 관망만 하는 교인이 있습니다. 그저 적을 두고 가끔씩 교회에 와서 구경만 하다가 가는 그런 교인이 있고 어떤 교인은 지원을 하는 교인이 있습니다. 자주는 못 나오지만 교회에 어려움을 당할 때 배후에서 기도도 하고 물질도 지원하는 그런 교인들도 있고 또 어떤 교인은 헌신하는 교인이 있는데 그 헌신하는 교인들은 교회가 어떤 목표를 정하고 나아가면 몸을 드리고 시간을 드리고 연보도 바치고 그러면서 교회를 위해서 열심히 일합니다. 이런 교인들로 인해서 제가 힘을 얻기도 하고 여러 교인들이 도움을 받기도 합니다.
네번째 교인은 핵심교인이 있는데 이 핵심교인은 아주 소수입니다. 그러나 교회 일을 위해서, 주와 복음을 위해서 목숨이라도 내놓고 그렇게 헌신하려고 하는 사명에 불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는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 창조적 소수, 혹은 핵심교인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 안디옥이라고 하는 교회는 소수의 평신도들이 환난과 핍박 가운데서도 믿음을 지키고 또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여 세운 교회입니다. 이 안디옥 교회가 박해 중에서도 부흥될 수 있었던 것은 그 흩어진 사람들이 전도했기 때문입니다.
그 흩어졌던 이유는 예루살렘에 큰 박해가 있었고 그 때 예루살렘 일곱명의 안수집사 중 하나였던 스데반 집사님이 전도하다가 반대자들이 던진 돌에 맞아서 죽게 됩니다. 이 끔찍한 일이 있게 되자 여러 성도들 중에서 많은 사람들이 다 사방으로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사도들을 제외한 일반성도들이 흩어졌는데 그 흩어진 사람들 가운데 몇명이 수리아 안디옥이라고 하는 쪽으로 피난을 가게 됩니다. 그곳에 피신했던 기독교인들 중에서 유태인이 유태인에게만 전도하는 일도 있었고 저 아프리카에서 왔던 디아스포라의 유태인, 혹은 사이프러스 섬에서 왔던 유태인, 그들은 헬라말을 구사할 수 있었기 때문에 안디옥이라고 하는 도시에 헬라인도 있었음으로 그들에게도 전도를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안디옥교회는 유태인들로만 구성된 교회가 아니고 거기에 있는 헬라사람들도 복음을 전해서 구원받은 사람들로 구성된 교회였으니 소위 이 안디옥교회는 연합을 하는 교회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 안디옥교회의 특징중 하나는 어떤 사도, 교역자, 목회자가 주선하여 세워진 교회가 아니고 일반 평신도들이 전도를 하여 세워진 교회인 것입니다.
우리 예수를 믿고 거듭나고 영에 속한 사람은 어떤 환경적 요인, 물질적 요인에 뿌리를 내리고 살지를 않고 영적 자유, 신앙의 자유가 있는 것을 우선에 둡니다. 이는 마치 1660년경 영국의 메리 여왕이 기독교신자를 박해하자 우리는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 가겠다 하고 메이 플라워라는 배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 저 미국의 도착해서 하나님을 마음껏 찬양하고 감사하고 예배드리며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 이것을 그들의 삶의 제일로 정하고 핍박 중에서 신앙을 지킨 것과 같습니다.
우리 관악교회 역사도 보면 목회자도 없고 많은 사람이 흩어졌지만 아직 어린양들을 버릴 수가 없어 그들에 대한 애착을 가지고 주일날 모여서 성경을 가르쳤던 교사 세 분이 찢어졌던 천막교회에 남아있어서 그들과 더불어 오늘날 이 교회가 발전해 온 것입니다.
안디옥 교회는 전도하는 사람들로 인하여 부흥이 되었다면 오늘날 교회 부흥발전의 요인은 전도에서 찾아야 합니다. 전도하는 사람만이 참된 그리스도인입니다. 전도하는 사람을 우리는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합니다.
전도하는 사람은 천국과 지옥을 확신하는 사람입니다. 전도하는 사람은 인생의 근본 문제는 복음화에 있다고 아는 사람입니다. 전도하는 사람은 주님의 마지막 유언의 말씀을 준행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열심히 전도하는 사람, 주님이 함께 하십니다.
21절에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다한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그들과 함께, 그들은 누구입니까? 그들은 바로 오늘 여기 19절, 20절에 나오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이 누구입니까? 19-20절에 보면,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을 인하여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도를 유대인에게만 전하는데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주의 손이 주예수를 전파하는 그들과 함께 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의 손이 여러분과 함께 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주의 손은 어떤 손입니까?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손입니다. 주의 손은 죽은 자를 살리는 손이요, 주의 손은 병든 자를 고치는 손입니다. 주님의 손은 축복의 손입니다. 죽었던 사람, 주님이 만지면서 달리다굼 하니 살아났습니다.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으로 쓰러져 있는데 주님이 그 손을 어루만지며 일어나라 하니 열병이 떠났습니다.
물고기 두 마리, 떡덩이 다섯개를 손에 들고 축사하고 난 이후에 그 손에는 신기하게도 계속해서 떡과 물고기가 나와 오천명이 배부르게 먹고 열두바구니를 거두는 기적의 손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의 손은 악한 자를 심판하는 손이기도 합니다. 이 주의 손은 하나님의 택함받은 백성을 지키는 손입니다.
사도행전 13장에 보면, 바울과 바나바가 선교사가 되어서 사이프러스라고 하는 섬에서 전도하는데 그 섬에서 가장 높은 사람, 서기오 바울 총독에게 전도하려고 하는데 유대인 박수 남자 무당 엘루마가 방해를 합니다. 훼방을 합니다. 예수를 못 믿도록 자꾸 옆에서 충동질하고 바울의 비위를 자꾸 거슬립니다. 그때 바울이 성령이 충만한 상태에서 그 엘루마를 향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궤계와 악행이 가득한 자요 마귀의 자식이요 모든 의의 원수요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겠느냐? 보라, 주의 손이 네 위에 있으니 네가 소경이 되어 얼마동안 해를 보지 못하리라. 하니 그 즉시 어두움이 안개같은 것이 그 사람에게 덮이게 되니 앞을 보지 못하고 더듬거리게 됩니다. 그렇게 된 것을 서기오 바울 총독이 보고 예수를 믿었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우리에게 교훈한 것입니까? 하나님의 사람을 괴롭히면 그 괴롭히는 사람을 하나님이 심판한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방해하는 훼방하는 사람을 주님이 심판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여러분, 전도할 때 하나님은 전도자를 지키는 주의 손으로 나타나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 기뻐하는 일을 열심히 하려고 하는데 그것을 방해하는 자를 주님은 심판하는 손으로 나타났던 것입니다. 이와같은 주님의 손은 오늘날도 우리 가운데 나타납니다.
사도행전 4장에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전도하다가 관원들에게 붙들려서 매를 맞고 풀려났습니다. 그때에 온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이 한 장소에 모여서 일심으로 부르짖어 기도합니다. 주여, 이제도 우리가 손을 내밀어 병든 자를 고치게 하옵시고 담대히 하나님 말씀을 전하게 하옵소서. 이렇게 부르짖어 기도하니 모인 무리가 다 진동하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게 되고 담대히 복음을 전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가복음 16:20절 말씀보면 제자들이 바깥에 나가서 복음을 전파할 때 주께서 함께 하심으로 따르는 표적이 있었고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 부흥을 시킨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말 잘하는 사람들입니까? 지식인들입니까? 학박사입니까? 누가 교회를 부흥시킵니까? 전도하는 사람들이 교회 부흥시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가장 존귀한 사람들이 누구냐? 전도하는 사람인줄로 믿습니다.
전도하지 아니한 사람은 거듭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전도하지 않는 사람, 지옥과 천국이 있음을 확신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전도하는 사람들로 인해서 안디옥 교회가 부흥된 것처럼 오늘날 우리 관악교회의 부흥도 전도하는 사람들이 있기에 부흥되는 것입니다.
두번째, 부흥하는 안디옥교회는 어떻게 부흥할 수 있었느냐?
그 교회를 담임하는 바나바 목사님이 갖출 바를 다 갖추었기 때문에 더욱 부흥할 수 있었습니다.
그 바나바에 대해서 24절에 이렇게 소개합니다.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고 그랬습니다. 그렇습니다. 교회에서 지도급에 있는 사람들은 우선 마음이 착해야 합니다. 마음이 선해야 합니다. 온유하고 겸손해야 합니다. 도덕과 윤리적으로 깨끗해야 합니다.
거기에다가 성령과 믿음이 충만해야 합니다. 성령과 믿음이 충만함은 곧 그리스도의 영성을 소유한 사람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은 사람입니다.
착한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성품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한 자다. 예수님의 삶의 철학, 나는 섬기기 위해서 왔다. 예수님의 사명의식, 나는 너희를 구원하기 위해서 죽으러 왔다.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선한 목자다. 이렇게 사명감에 붙들리고 영혼구원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그런 교역자들이 있는 교회는 반드시 부흥되는 줄로 믿습니다.
저는 이런 바나바와 같은 목회자가 되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합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에게 기도를 부탁합니다. 착한 사람, 그리고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 다른 것으로 기뻐하지 아니하고 은혜받음을 기뻐하고 거듭난 것을 보아 기뻐하고 하나님 말씀을 지키는 일로 기뻐하는 그런 교역자가 되기를 정말 저는 소망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평생 소원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예수 닮기를 원하는 마음입니다. 인격은 온유하고 겸손하고 영성은 성령과 믿음과 지혜가 충만하고 그리고 예수님처럼 하나님 말씀에는 예만 하고 아니오가 없으며 죽기까지 복종하신 그 예수, 하나님의 뜻이면 나는 죽으리라. 이렇게 목숨을 내놓고 헌신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로 인해서 교회가 부흥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가까이 하면 주님이 그 사람을 붙잡아 주십니다. 시편 73:23절 말씀 보면, 내가 항상 주와 함께 하니 주께서 오른손으로 나를 붙드시나이다. 우리가 주님을 가까이 하려고 애를 쓰면 주님은 그런 사람을 붙잡아 주시고 주님의 손에 붙잡힌 자가 되면 어린 목동 다윗이라도 주님의 손에 붙들리니 골리앗과 싸워서 이길 수 있게 되고 모세는 나이가 많은 80세의 노인이었지만 주님의 손에 붙들린바 되니 육십만의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해방시키고 끌어가는 지도력을 발휘할 수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손에 붙잡힌바 되어야 합니다. 성령님께 사로잡힌바 되어야 되고 말씀에 붙잡힌바 되고 사명에 붙잡혀 끌려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붙들고 사는 삶이 아니라 붙잡힌바되서 끌려사는 이것을 우리는 성령충만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바나바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교역자만 성령 충만할 것이 아닙니다. 사도행전 6장에 보면 예루살렘 교회의 7명의 안수집사들도 성령과 믿음이 지혜가 충만한 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성령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가까이하는 방법이 세 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의 보혈로 주님 앞에 하나님 앞에 가까이 갈 수 있습니다. 멀리 있던 너희는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이제 가까와졌느니라 했으니 십자가를 의지하고 보혈을 의지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고 두번째, 지난 날 바로 살지 못한 죄를 철저하게 회개하면 회개한 만큼 우리가 하나님 앞에 더 가까이 다가설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빛을 가까이 할수록 어두움은 물러갑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할수록 우리가 성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세번째, 하나님 앞에 가까이 가는 방법은 기도입니다. 시편 145:18절에 여호와는 자기에게 간구하는 자에게 가까이하신다 그랬습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무릎꿇고 기도하는 사람을 하나님은 가까이 하시고 붙잡아 주십니다.
새벽기도는 새벽잠 없는 할아버지, 할머니들만 하는 기도가 아닙니다. 새벽기도는 초저녁잠 없는 사람이 하는 기도가 아닙니다. 새벽기도는 할 일 없는 사람이 하는 기도가 아닙니다. 새벽기도는 예수님을 본받아 예수님이 새벽에 기도하셨으니 나도 기도하리라. 새벽에 기도하지 아니하면 너무 세상 살기 바빠서 기도할 시간 없으니 하루에 일과 첫시간을 나는 하나님께 드리리라. 하나님 제일주의로 사는 사람들만이 십일조를 바치는 신앙으로 하루에 일과를 시작하기전 첫시간을 잘라서 바치는 이 하나님 제일주의의 삶이 새벽기도 신앙입니다.
새벽기도를 비록 못한다 할지라도 때마다 일마다 하나님 앞에 묻고 기도하는 사람을 하나님은 들어 쓰실 줄로 믿습니다. 마귀의 시험을 이기는 길을 기도밖에 없습니다.
사울이라고 하는 왕이 다윗을 시기하여 죽이려고 쫓아다니기를 13년 동안 합니다. 또한 다윗은 13년 동안 망명생활을 합니다. 수없이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던 것은 그는 기도했고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이 방법을 일러주었습니다.
예를 들어 말하면 삼하 2:1절 이하 말씀에 사울왕이 다윗을 죽이려고 수색작전을 하고 있을 때 그때 다윗이 하나님께 묻습니다. 여호와께 물어 가로되 내가 유다 한 성으로 올라가리이까?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올라가라. 다윗이 다시 기도하여 가로되 어디로 가리이까? 하나님이 가라사대 헤브론으로 가라. 꼭 이런 식으로 다윗은 때마다 일마다 하나님께 묻고 기도했고 그때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지시하시고 지시한대로 순종했기 때문에 환난에서도 건짐을 받았고 결국은 하나님마음에 합당했던 다윗을 괴롭혔던 사울을 하나님은 죽게 했고 훈련이 끝나고 난 이후에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으로 하나님이 세워주셨으니 환난 날에 여러분, 기도하십시오. 고난의 때에 하나님 앞에 간구하십시오. 훈련이 끝나면 주님이 들어서 쓰실 줄로 믿습니다.
바나바가 안디옥교회 목회자가 되서 가서 보니 사람들이 기도에 열심이고 성경공부에 열심이고 전도에 열심이고 그래서 항상 마음에 영적인 기쁨이 있고 얼굴 표정이 화평하고 은혜가 넘치는 것을 보고 기뻐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목회자의 기쁨, 목회의 보람은 성도들이 주님 만나고 거듭나고 회개하고 성령받고 주안에 기뻐하고 즐겁게 살아가는 것, 그것이 목회자의 보람입니다. 은혜 위에 은혜를 받도록 그들이 받은 은혜를 지속하기 위해서 바나바가 그곳에 가서 첫번째 부탁한 말은 주께 붙어있으라. 굳은 마음으로 주께 붙어있으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가지는 저절로 열매를 맺음과 같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주님께 굳게 붙어 있어야 합니다. 말씀 붙잡는게 주님 붙잡는 것이고 기도하는 것이 주님 붙잡는 것이고 순종하는 것이 주님 붙잡는 것인데 그렇게 주께 붙어 있기만 하면 주님이 또한 그를 붙들어 주실 것이고 승리자가 되게 하실 것입니다.
이제 이 안디옥 교회가 더 부흥되고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바나바가 협력자를 구했는데 당시에 소외감에 빠져있던 사울을 다소에서 불러 왔습니다. 원래 사울이라고 하는 사람은 사도행전 9장을 보면,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났고 아나니아라는 사람에게 안수 기도를 받을 때 성령 충만 받았고 앞을 볼 수 없었던 사람이 눈이 떠져서 밝아지고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경험했고 성령받은 사람입니다. 그는 곧바로 전도를 하려고 했지만은 과거에 너무 교회에 적지않는 피해를 준 것에 대하여 사도들 마음속에 사울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가 있었기 때문에 사울을 멀리 했습니다. 한편 유대교 지도자들은 사울이라고 하는 청년이 유대교를 배신하고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고 하여 또 그를 죽이려고 하니 그는 사도들로부터도 하나가 될 수 없었고 유대교도들로부터도 따돌림을 받으니 그는 다소라고 하는 자기 고향으로 간지 10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때에 마음 착한 바나바가 안디옥교회에 와서 보니 혼자 힘으로 감당하기 어려움을 깨닫고 다소에서 사울을 불러 올려 일년동안 함께 성경공부를 하니 믿는 숫자가 많아졌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담임목사 혼자 할 수 없습니다. 전도로 돕는 자가 필요합니다. 교육으로 돕는 자가 필요합니다. 찬양으로 돕는 자가 필요합니다. 보이는데서 혹은 보이지 않는데서 기도로 돕는 자가 필요합니다. 재물로 연보로 돕는 자가 필요합니다.
모세는 혼자서 육십만명의 이스라엘민족을 지도하다가 지쳤을때 그의 장인 이드로가 와서 방침을 일어줍니다. 그대의 하는 일이 선치 못하도다. 이 백성 가운데 진실무망하며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불의한 일을 멀리하는 사람을 백성 가운데 선택하여 열명을 돌볼 수 있는 사람에게는 십부장의 이름을 주고, 오십명을 끌어갈 수 있는 지도력 있는 사람은 오십부장의 이름을 주고, 백명을 잘 돌볼수 있는 사람은 백부장의 이름을 주고, 천명을 끌어갈 만한 힘있는 사람은 천부장의 이름을 주어서 이 피라미드 형식의 조직을 통해서 쉬운 일을 과감하게 그들에게 떼어 맡기고 힘들고 어려운 일은 그대가 감당하라 하여 일을 분업화하니 일이 쉬웠고 모든 사람들은 자기 존재가치 인정받아 자부심과 긍지를 갖게 되고 서로 협력하니 육십만 대군은 질서정연하게 가나안을 향하여 전진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 이 교회에 성도들의 수가 아무리 많다 할지라도 이렇게 조직을 통하고 돕는 자가 있으면 질서정연하게 발전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기독교 역사에 보면 돕는 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모세를 도왔던 아론과 훌, 기도로 도왔습니다. 열두 명의 정탐꾼 가운데 백성들이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을 때 갈렙과 여호수아가 나타나서 긍정적인 사고를 가지고 가십시다 하고 모세에게 용기를 실어주었던 협력자도 있었습니다.
바울이 선교사역을 할 때 실라도 누가라는 의사도 있었습니다. 때로는 브리스길라, 아굴라 부부도 있었습니다. 때로는 디모데와 데마와 같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협력자 없이 어찌 교회가 부흥될 수 있겠습니까? 이 안디옥교회는 받은바 은사 따라 사람들을 활용하고 서로 협력하다 보니 그래서 교회가 부흥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관악교회 더욱 부흥되도록 하기 위해서 여러분이 받은바 은사를 개발하고 받은 바 은사를 가지고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충성하고 봉사하시기 바랍니다.
협력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교회를 함께 섬겨갈때 교회가 크게 발전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인생 한평생 살면서 하나님 기뻐하는 일 열심히 하면 복을 받는데 마음에 평안이 있고 육신에 건강이 있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일학년 들어갔을 때 부르던 동요가 생각납니다. 학교종이 땡땡땡 어서 모이자, 선생님이 우리를 기다리신다. 이런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 노래를 누가 만들었는지 궁금했는데 이년전 어느 국민일보 기사를 보니 당시에 92세난 김메리라고 하는 장로님을 소개하면서 그 분이 학교종이 땡땡땡 동요를 작사 작곡자라고 하였습니다. 그 분은 한국인인데 미국에 가서 산지 오래되었습니다.
미국 브루클린이라고 하는 지역에 포도원교회에서 지금도 교회학교 교사일을 하고 있다. 교사 70년째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92세 할머니 명예장로님이 교회학교 교사를 70년째 하고 있답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그리고 토요일마다 한인교회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해서 영어로 된 주일학교 교재를 한국어로 번역을 하고 주일날마다 아이들에게 나누어줄 선물, 과자보따리를 꾸미면서 그 아이들 이름을 하나 하나 불러가며 기도하는 즐거움을 이야기했습니다.
어떤 신문기자가 찾아가서 장로님, 건강의 비결이 무엇입니까? 그랬더니 그 분이 세 가지를 말했습니다.
첫째는 규칙적인 생활이요, 두 번째는 쉬지 않는 기도요, 세 번째는 교회에 열심히 봉사하는 것입니다. 이 김메리 장로님처럼 당시 92세, 지금은 94세가 되었을 것인데 그처럼 무병장수하고 사는 비결이 있습니다. 여러분, 규칙적인 생활, 쉬지 않는 기도, 즐거운 마음으로 교회에 봉사하면 그런 복을 받게 될 줄로 믿습니다.
아무튼 이렇게 예수 믿는 사람들은 즐거움이 있어야 됩니다. 항상 축제 분위기 속에 살아야 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의 얼굴이 어둡고 인상이 고약하고 그러면 누가 예수 믿겠습니까? 예수 믿는 사람들 집에서 날마다 싸움이나 하고 고함소리 들리면 누가 예수 믿겠습니까? 항상 기쁘고 즐겁고 그냥 싱글벙글하고 착하고 남 돕고 노래 부르고 살아야 매력을 느끼지 않겠습니까?
이 은혜라는 말은 원래 기쁘다, 즐겁다, 호감을 갖는다, 매력을 느낀다, 좋아 보인다 그래서 사귀고 싶다, 그게 바로 그레이스(Grace), 카리스란 말의 의미가 원래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 받은 사람은 참 매력이 있습니다.
제가 오늘 3부예배를 마치고 잠깐 지하실에 갔었습니다. 그랬더니 거기에 중등부 성가대가 연습을 하는지 앉아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잠깐 들렀더니 어떤 여학생이 저를 바라보고 막 좋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도 웃어주었더니 난 목사님이 좋아요 해서 난 네가 좋다 그랬습니다.
여러분, 이 안디옥 교회의 특징 중에 하나는 불신자들이 예수 믿는 사람들을 가리켜서 크리스티아노스, 그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그리스도인, 원문을 보면 크리스티아노스, 이 말은 불신자들이 예수 믿는 사람들을 가리켜 비웃는 말로 하는 말입니다. 크리스티아노스, 그리스도 일당, 그리스도의 패거리, 그런 뜻입니다.
좋은 말로 표현하면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들,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들, 그들은 비방하는 뜻으로 외쳤지만 그 말을 듣는 교인들의 입장에서는 더없이 기뻤습니다.
야! 우리보고 예수 닮았대. 얼마나 좋아? 그렇습니다. 자식이 부모님 닮아야 좋지, 자식이 이웃집 아저씨 닮으면 좋겠습니까? 예수 믿는 사람이 예수 닮았다고 해야 좋지 않습니까? 유능한 선생님, 제자가 선생님 닮았다고 해야 좋습니다. 불신자들이 우리를 바라볼 때 예수 닮았다, 그리스도를 닮았다 그렇게 평을 받아야 교회가 부흥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을 누가 바라볼 때 꼭 예수님처럼 보인다고 그렇게 말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정말 멋있는 사람입니다.
교회를 나가고 싶어도 너처럼 될까 무서워서 안나가겠다. 그러면 끝장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최초로 예수 믿는 사람들을 가리켜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호칭이 이 안디옥교회에서 붙여졌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세속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거룩을 지키고 성화되어가는 모습으로 안 믿는 사람이 볼 때도 야, 확실히 예수 믿는 사람은 달라, 매력을 느껴, 그렇게 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혹시 누가 비방을 할지라도 예수의 패거리, 예수 닮은 사람들, 그렇게 혹시 비방의 말을 할지라도 우리가 예수 닮았다는 말에 대해서는 기뻐해야 하고 영광스럽게 생각해야될줄로 믿습니다.
그런 안디옥 교회, 피난민으로 시작된 교회였지만 나중에 예루살렘 교회가 어려움을 당할 때 구제헌금을 보내고 최초의 선교사를 파송하는 교회로 발전했으니 교회는 돈 많은 부자들이 많아서 부흥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부자들이 모였을 때 부흥되는 것을 믿습니다.
여러분들, 영적인 부요가 여러분에게 있어서 안디옥교회를 부흥시켰던 사람들처럼 여러분을 통해서 교회가 부흥되고 발전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