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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희근목사 (승리교회)
우리는 지난 7월6일에 외박 나왔던 의경이 부대 복귀 전에 목메어 자살한 사건을 듣고 참 가슴아파했습니다. 이제 군대갈 연령에 있는 사람들 상당히 불안하죠? 또 군대갈 자식을 둔 부모들도 상당히 불안해 할 것입니다.
여러분 무엇이 문제라고 생각하십니까? 괴롭히는 못된 고참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 고참이 문제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또 본인이 적응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볼 수도 있겠죠. 그러나 군대생활 하는데 못된 고참 한 두 명 없는 부대가 어디 있겠습니까? 못된 고참이 하나도 없어서 해결되기를 바라는 것은 비현실적인 희망이죠. 또 개인의 적응력이라는 것은 얼굴이 다르고 키가 다르듯이 다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좀 약한 사람이 있을 수도 있지요.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고 해결책은 어떻게 세울 수 있겠습니까?
비상상황에서 전혀 다른 결과를 맞은 한 사건을 소개하겠습니다. 군 생활할 때 큰 위기를 맞이했던 사람이 한 사람의 사랑을 통해서 그 위기를 잘 극복하고 ‘낮은 울타리’에 자신의 글을 기고한 글이 있어서 소개해 드립니다. 제목은 ‘작은 사랑 큰 위로’입니다.
“한 고참과의 관계는 나를 완전히 탈진시킬 만큼 힘들게 했습니다. 물론 나의 작은 실수 때문이기도 했지만 같은 크리스천임에도 불구하고 주일날 교회 가는 것을 막는 그의 모습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탈영을 생각했습니다. 계속되는 고참의 눈치 속에서 한번 두 번 교회를 빠지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늦은 밤 혼자 쓰레기통을 비우러 부대와 멀리 떨어진 소각장에 갔을 때 주위에 둘러쳐진 낡은 철조망을 보았습니다. ‘마약 내가 탈영한다면....’ 부모님은! 내 인생은! 복잡한 생각으로 철조망을 붙잡고 생각에 빠져있는데 정신을 확 깨게 하는 소리
“야, 거기서 무엇 하는 거야! 빨리 뛰어 오지 못해!” 일석 점호를 끝내고 잠자리에 들 때 침낭 속에서 고참 모르게 펑펑 울었습니다. 서럽고 억울해서 하나님이 원망스럽기까지 했습니다. 새벽 두시에 근무를 나가려고 옷을 갈아입는데 사물함이 약간 열려 있었습니다. 이상하다 싶어 열어보았더니 그 안에는 쵸코파이 하나와 작은 편지가 놓여 있었습니다. ‘힘내 임마 넌 잘할 수 있을 거야! 지금 이 순간에도 그분은 널 지켜보고 계셔.’ 눈물이 왈콱 솟구쳤습니다. 그 후로 난 변했습니다.
만약 자살한 그 의경의 부대 안에 똑같은 지친 그를 격려해주고 위로해주는 좋은 선배나 고참이 있었다면 상황은 달라질 수도 있겠지요. 문제는 못된 고참 때문도 아니고 본인의 적응력 때문도 아니고 적절한 지도자가 없었다는데 있는 것입니다.
요즘 많은 사람이 자살하고 죽고싶다는 말을 내뱉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자살사이트가 굉장히 성행하고 있습니다. 장기적인 경기침체로 많은 사람이 우울해져 있습니다. 특별히 개인 사업하시는 분은 굉장히 어려워하십니다. 제가 얼마 전에 개인 사업하시는 한 집사님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요즘 어떻습니까?” 하니까 “목사님 말도 마십시오. 맨 땅에 헤딩하고 있습니다.” 맨 땅에 헤딩하면 좀 아플텐데요. 또 다른 분에게 전화했더니만 “목사님 말도 마십시오. 죽을 맛입니다.”그런 말하신 분이 많이 있었습니다. 월급 받아 직장생활 하시는 분이라도 경제가 침체되면 결국 실직을 하게 될 것입니다. 실업에 대한 불안이 누구나 다 있을 수가 있는 것이죠. 요즘 유행하는 말이 있죠 ‘사오정 오륙도’ 그런 말이 있죠? 45세가 정년이랍니다. 56세가 되어도 아직 붙어있으면 도둑놈이랍니다. 아무리 봐도 더 나아질 기미가 보이질 않습니다.
정치는 어떻습니까 아무리 봐도 정치판에서 희망을 발견하기 힘들 것 같습니다. 군사적으로는 어떻습니까? 긴장은 자꾸 높아져만 갑니다. 그러니 어디를 봐도 살맛 나는게 별로 없습니다.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고 방황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신문에 나지 않아 그렇지 많은 사람이 죽어가고 자살하고 있답니다. 이민족은 지금 힘들어하고 있습니다. 위로자를 찾고 있습니다. 지도자를 찾고 있습니다. 부드러운 지도자 위로하고 격려해줄 지도자를 찾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우리그리스도인은 어떻게 해야하겠습니까? 하나님 이민족에게 좋은 지도자가 필요합니다. 훌륭한 지도자를 보내 주십시오. 그렇게 기도하시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전도하실 때 배고픈 무리를 보고 제자들이 예수님께 나아와서 말합니다. “선생님 이 사람들이 여러 시간 동안 음식을 먹지 못했습니다. 동네에 가서 먹을 것을 사먹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뭐라고 대답하셨습니까? “갈 것 없다 너희들이 먹을 것을 주어라.” 이때 제자들이 속으로 ‘아니 예수님 우리 먹을 것도 없는데 오천 명이 넘는 수를 우리가 무슨 수로 먹입니까? 말도 안됩니다.’ 그리고 순종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물론 오천 명이 넘는 군중도 굶었겠지만 열 두 명의 제자들도 굶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열두 제자들은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하기 위해서 애를 썼습니다. 음식을 여기저기서 찾아봤습니다. 그래서 작은 아이가 가지고 있는 보리떡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가져갔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오병이어에 축사하시고 떼어서 나누어주었습니다. 그래서 오천 명이 넘는 사람이 배불리 먹었습니다.
지금 지도자를 필요로 하고있습니다. 위로자가 필요합니다. 하고 우리가 기도한다 할지라도 주님이 이렇게 대답하실 것입니다. “너희들이 이 백성을 위로하라.”
하나님 어둡습니다. 빛을 보내주십시오. 하나님 춥습니다. 따스함을 보내주십시오 할찌라도 주님은 너희들이 세상의 빛이다. 너희들이 세상의 어둠을 밝혀라 너희들이 세상의 차가움을 따스하게 만들어라. 주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실 것입니다.
내가 어떻게 지도자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주님께서 지도자가 되어 남을 위로하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실 때 그 명령에 순종하기 위해서 애쓰다 보면 주님께서 새 힘을 주십니다.
군대생활 할 때 소대 단위로 장거리를 구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철모를 쓰고 총을 들고 뛰다보면 굉장히 힘들지요. 그런데 1명이라도 낙오되게 되면 경쟁에서 지게됩니다. 그래서 좀 힘들어한 동료가 있으면 좀 기운이 남는 사람이 총을 받아줍니다. 그러면 한결 낫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지금 다 힘들지 않겠습니까? 그런 상황에서 힘들어하는 동료의 총을 받아준 사람은 절대로 낙오하는 법이 없습니다. 그것을 받아드는 순간 새로운 힘이 솟구치기 때문입니다.
지금 살기 힘듭니다. 딱 죽고싶다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나 자신의 고통에만 집중해서 자기 연민에 빠져 있으면 나도 내 이웃도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고통 당한 이웃에게 눈을 돌려서 저들을 도와야 되겠다 내가 저들의 지도자가 되겠다. 우리가 이민족의 지도자가 되어야 되겠다 그렇게 생각하고 주님의 도움을 구하면 주님께서 힘을 주시고 지혜를 주셔서 나도 내 이웃도 다 함께 행복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좋습니다. 그럼 지도자가 되고 싶은데 힘도 없고 지위도 없고 전문 지식도 없는데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이와 같이 반문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도력이라는 것은 힘이 아닙니다. 만약 힘이 지도력이라면 권총강도가 “엎드려” 할 때 전부 엎드릴 수 밖에 없지요. 그렇다고 권총강도가 지도자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 총이 지도력이 될 수 있겠습니까? 힘이 곧 지도력은 아닙니다. 물론 지위나 전문성이 있으면 좋겠습니다만 그것이 곧 지도력은 아닙니다. 지도력은 힘도 아니요. 지위도 아니요 전문성도 아닙니다. 지도력은 곧 영향력입니다. 지도력은 “Leadership"이라고 합니다. ‘지도’를 뜻하는 “Leader”라는 단어와 “Ship” 곧 ‘배’라는 단어가 합성된 단어가 지도력인 것입니다. 지도력이라는 것은 배를 목적지까지 가게 하는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언제 지도력이 필요합니까? 풍랑일 때 지도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평소에 모든 것이 잘 풀릴 때는 지도력의 필요성을 그렇게 느끼지 못합니다. 배가 좌초할 것 같은 큰 풍랑을 만났을 때 지도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지금이야말로 이민족은 지도력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지도력은 영향력이고 영향력이라는 것은 개인의 능력과 무관하지 않습니다만 개인의 능력과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닙니다. 개인적으로 굉장한 능력을 가졌으나 지도력은 없는 사람이 있고 능력이 그리 크지 못하지만 지도력이 있는 사람이 있어요. 펠레가 굉장히 축구를 잘합니다만 그러나 훌륭한 감독이라는 소리는 못 들어 봤죠? 그러나 히딩크는 개인적으로 그렇게 축구를 썩 잘하는 편이 못됩니다. 국가대표한번 못해본 사람이에요. 그렇지만 국가대표 감독은 하잖아요. 그것은 바로 영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내 능력이 100인데 내가 10사람에게 영향력을 끼친다면 내 지도력은 1000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내 능력이 50밖에 안됩니다. 그렇지만 100사람에게 영향력을 끼칠 수 있으면 내 지도력은 5000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우리자 영향력 있는 지도자가 되기를 원한다면 지도력을 길러야 하겠습니다. 그래야 지도자가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지도력을 기를 수 있겠습니까? 가장 좋은 방법은 훌륭한 지도자의 본을 세워놓고 그 사람을 그대로 본받으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가장 좋은 본은 예수님이 되겠습니다만 그러나 또한 비상 상황이 있는 예수님을 잘 따라가는 지도자를 우리가 따라감으로 결과적으로 예수님을 잘 따를 수 있게 됩니다. 특별히 요즘시대는 부드러운 지도자를 필요로 하는 때입니다. 사람들이 워낙 상처를 많이 입고 있기 때문에 지금 다 죽고 싶은 심정으로 있기 때문에 조금 엄하게 지도하면 다들 낙담해버립니다. 그러므로 부드러운 지도자가 필요한데 성경 속에서 예수님을 잘 따라가는 부드러운 지도자의 본으로 우리는 바나바를 말할 수 있겠습니다. 바나바는 본명이 아닙니다. 별명입니다. 본명은 요셉인데 바나바라는 별명을 사도들로부터 받았습니다. 바나바의 뜻은 무엇이냐 하면 ‘위로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위로자라는 뜻이죠. 자기의 전재산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내어놓은 사람입니다. 사도바울을 추천해서 교회에서 일꾼 되게 한 사람입니다. 사도바울과 함께 안디옥 교회를 창립했고 최초의 선교사가 되어서 복음을 전도한 선교사입니다. 그리고 자기 조카 마가를 훌륭하게 세워서 마가복음의 저자가 되게 한 위대한 사람입니다. 그 자신의 역량은 그렇게 뛰어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을 세웠고 마가를 세움으로 말미암아 교회사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미친 사람입니다. 바나바가 없었다면 사도바울도 없었겠죠. 마가도 없었을 것입니다. 바울이 없고 마가가 없었다면 바울서신도 없었을 것이고 마가복음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신약성경의 절반은 없었을 것입니다. 만약 사도바울이 없었다면 우리도 예수 못 믿었을지 모르죠. 바나바가 아니었다면 우리가 예수를 못 믿었을지도 모릅니다.
이처럼 훌륭한 지도력을 발휘한 바나바의 삶을 살펴보면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바나바 같은 지도자가 될 수 있을가 한번 살펴보십시다.
먼저 좋은 지도자가 되려면 자신을 다스릴 줄 알아야 합니다. 자신을 다스릴 줄 아는 사람이 남을 잘 다스릴 수 있습니다. 최근에 나오는 책 가운데 사무엘 리마에 “셀프 리더십”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번역하면 “자기지도력”입니다. ‘세계를 이끌기를 원하는 사람은 자기를 다스릴 줄 알아야 한다.’ 이것이 부제입니다. 수많은 지도자들이 나타났습니다만 그중에 상당수는 짧은 기간동안만 지도자로 일하고 지도력을 상실하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왜 그렇습니까? ‘셀프 리더십’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리마는 ‘셀프 리더십’을 확립하는 방법으로 4가지를 말하는데 그 중에 제일 중요한 두 가지는 먼저 삶의 가치를 정립하고 소명의식을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무엇이 참으로 중요한 것이냐 영원 하는 것 불변하는 것을 잡으라는 것입니다. 우리그리스도인이 볼 때는 천국이 가장 확실한 것이죠. 무엇이 천국에 의미 있는 것이냐. 그것을 확실하게 붙잡아야 합니다. 또 소명의식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으로부터 부름 받은것 내가 무엇을 위해서 이 땅에 태어났는가? 하나님이 내가 이 땅에서 무엇을 하라고 명령하시는가? 그것을 분명히 깨달아 알아야됩니다. 그것을 깨달아 안다면 남하고 비교할 이유가 없는 거죠. 하나님과 나와의 직선적인 관계에서 내 삶의 해야할 바가 무엇인가를 찾으면 되는 것입니다. 바나바는 전재산을 하나님께 다 드려서 교회를 크게 부흥케 하고 많은 사람들을 도와주었는데 자기 밭을 다 팔고도 실패한사람이 있습니다. 누구입니까? 바로 아나니아와 삽비라입니다. 팔기는 다 팔았습니다. 그런데 막상 돈을 딱 쥐고 보니까 아까워요. 그래서 절반만 갔다내면서 이게 다입니다. 하였다가 같은 날 아내와 남편이 죽임을 당하는 그런 불행한 부부입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셀프 리더쉽’이 부족했던 것입니다. 영원한 가치를 보지 못했어요. 그 돈의 많음만 보고 영원한 천국을 바라보지 못해서 실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이스라엘 초대왕이 누구죠? 사울입니다. 그는 참 겸손한 왕이고 좋은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 망가지기 시작 했느냐면 바로 다윗의 출현 때부터입니다. 블레셋하고 전쟁을 하고 돌아오는데 여인들이 노래합니다.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오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로다. 그 노래를 듣는 순간 사울의 마음속에 불같은 질투의 마음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그 이후로 어떻게 하면 다윗을 죽일까? 숨어있는 다윗을 추격하느라고 많은 시간을 허비합니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불행한 왕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바나바도 똑같이 질투에 빠질 수 있는 그런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처음에 바나바에 의해서 사울이 교회에 등단하게 됩니다. 사도바울의 원래 이름이 사울이죠. 다메섹도상에서 예수를 만났습니다.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다메섹에서부터 전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사울이 새사람이 되어서 예루살렘을 방문했습니다. 가서 사도들도 만나고 지도도 받고 내 삶 전체를 예수 위해 살리라. 그렇게 생각하고 갔는데 아무도 사울을 만나주려 하지 않습니다. 사도바울의 회심을 믿어주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답답했겠습니까 답답해하고 있을 때 그때 바나바가 일어나서 이 사람은 제가 보증합니다 이 사람은 변했습니다.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그의 추천으로 이제 바울이 교단에 등단하게 됩니다. 그런데 함께 선교 여행을 하는데 갈수록 바울은 점점 높아지고 바라바는 점점 줄어듭니다. 아무래도 선교하는 영향이 바울이 좀 더 뛰어났던 모양이죠. 바울은 정말 전세계적인 천재 아닙니까? 종교적인 천재입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렇게 계속 기록되다가 사도행전 13장 43절부터는 바울과 바나바가 그렇게 기록됩니다. 이제는 바나바가 제2인자가 되고 바울이 1인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때 자칫하면 사울이 빠진 함정에 바나바도 빠질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그랬더라면 바울도 바나바도 큰 불행에 빠졌겠죠. 그러나 바나바는 ‘셀프 리더십’을 잘 발휘했습니다. 스스로를 다스릴 줄 알았습니다.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를 정립하고 그 질투의 감정을 이기고 함께 협력해서 선교 사역을 잘 감당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좋은 지도자가 되는데 가장 어려운 것은 무엇인가? 이제 목회를 사십 년 이상하고 은퇴를 앞둔 선배목사님께 물어봤더니 한평생 목사 하시면서 제일 힘들었던 게 뭡니까? 그 선배님이 대답하시기를 나 스스로를 다스리는 것이 제일 힘들었다. 그렇게 고백하는 소리를 들어봤습니다. 저는 진솔한 고백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무엇이 제일 힘들었습니까? 아무리 전도해도 말 안 듣는 사람들이 힘듭니까? 말썽꾸러기 구역 식구가 힘듭니까? 가장 힘든 것은 나 자신 아닙니까? 내 맘을 내 맘대로 하지 못해요. 이 속에서 질투의 감정이 일어나고 세상을 추구하는 마음이 일어나면 걷잡을 수가 없습니다. 이때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하나님을 바라보는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 앞에 서기전에 먼저 하나님 앞에 서야합니다. 하나님 앞에 벌거벗은 모습으로 서고 하나님 내가 이처럼 초라합니다. 나는 무능합니다. 나는 약합니다. 약함투성이입니다. 하나님 나를 변화시켜 주십시오. 그래야 하나님께로 치료함을 받을 때 하나님으로부터 힘을 받을 때 우리가 남을 도울 수 있는 자가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첫번째 조건은 자신을 다스릴 줄 아는 지도자가 되는 것입니다. 두번째로는 남을 세울 줄 아는 지도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바나바의 특기인 것입니다. 바나바가 바울을 세웠습니다. 바나바가 마가를 세웠습니다. 지도력이라는 것은 리더십이라고 했죠. 배가 목적지까지 잘 도착하려면 선장 혼자 잘해서는 안됩니다. 선장의 판단이 예리하고 바른 명령을 내렸다 할지라도 선원들이 제일을 감당하지 못하면 배는 목적지까지 갈 수 가 없는 것이죠. 선장의 사명은 선원들이 다 자기 일을 잘 할 수 있도록 위로하고 격려하고 세워주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나 혼자 잘하는 것 중요합니다만 더 중요한 것은 남이 잘 할 수 있도록 도와 주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진짜 예수 잘 믿는 사람은 자기혼자 신앙생활 잘하는 사람이 아니고 딴 사람이 예수 잘 믿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남을 잘 돕는 자가 되기 위해서는 딴 사람의 장점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사람을 격려하고 세워주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특별히 마가는 부자집 아들이죠. 처음에는 바울과 마가 바나바 이렇게 전도여행을 같이 떠났습니다. 가다가 너무 험하고 고생스러우니까 포기하고 돌아왔어요. 그 다음에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바울과 바나바가 선교보고를 하는데 굉장한 역사가 일어납니다. 바울을 칭찬합니다. 그때 마가는 후회가 막급입니다. 그래서 다시 선교여행을 떠난다고 하니 삼촌 나도 데려가 주세요. 해서 바나바가 데려가자고 하자 바울은 안됩니다. 여기서 지도력의 차이가 난 것이죠. 결국 이일로 둘은 다투고 바울은 실라를 데리고 따로 떠납니다.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따로 떠났습니다. 어떤 것이 옳으냐!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고 강하고 직선적인 지도력도 필요하고 부드럽고 따스한 지도력도 필요합니다. 그런데 만약 그때 바나바가 마가를 떨쳐버렸다면 마가는 영영 이름 없는 기독교인으로 끝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가는 바나바에 의해서 격려 받고 다시 일어섭니다. 그는 나중에는 바울에게 까지 인정받습니다. 바울이 감옥에 갇혔을 때 ‘네가 올 때 마가를 데려 오라’ 그것이 나에게 유익하다 그렇게 고백을 합니다. 여러분 남의 약점이 보입니까? 약점보다 장점을 볼 수 있어야 지도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좋은 지도자의 여건은 남의 장점과 가능성을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주위에는 따스한 격려와 위로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녀교육을 잘하기로 유명하죠. 사실 인구는 많지 않은데 노벨상을 받은 사람은 세계에서 제일 많죠. 유대인의 자녀교육방법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어떤 아이가 1부터 100까지 세어야 하는 그런 연령이 되었는데 1부터 100까지를 세지 못해요. 그러면 성적표가 어떻게 나오겠습니까? 유대인들은 이렇게 성적표를 냅니다. 이 아이는 1부터 10까지는 잘 셀 수 있습니다. 조금 더 지도하면 100까지도 셀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나옵니다. 이 성적표를 받아보고 이 아이가 용기를 가지는 것이죠. 이 아이가 나중에 늦머리가 터지면 노벨상수상자도 될 수가 있는 겁니다.
이 힘든 세상에서 기독교인으로 산다는 것은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닙니다. 양심을 가지고 성도로서의 자부심을 가지고 산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쓰러지고 실패할 때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때 누군가가 잡아줄 사람이 필요합니다. 위로하고 결려 해줄 지도자가 필요합니다. 바나바 같은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에서는 멘토링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새가족에게만 적용하고 있는데 나중에 좀더 확산 시켰으면 좋겠습니다. 개인적으로 1:1로 도와줄 사람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교회는 더 많은 바나바를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사회도 바나바 같은 따스한 지도자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민족이 지금 총체적 위기를 당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위기는 위험과 기회가 합쳐진 말입니다. 이 말은 위험은 곧 기회가 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일제시대에 우리민족이 큰 어려움에 빠졌을 때 교회가 이민족의 지도자가 되었고 위로자가 되었습니다. 삼일운동을 주도했습니다. 그 결과 교회가 삼일운동이후에 크게 부흥할 수 있었습니다. 육이오 사변 직후 전쟁의 폐허 속에서 어찌할 바를 좋을지 몰라 방황하고 있는 이민족을 교회가 위로하고 격려하고 지도해 주었습니다. 그 결과 육이오 전쟁 후에 교회가 크게 성장했습니다.
지금 장기적인 경기침체로 많은 사람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이것이 아름다운 전도의 기회가 될 수가 있습니다. 전화위복의 기회가 될 수가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이민족의 바나바가 될 수 있다면 말입니다.
우리는 지난 7월6일에 외박 나왔던 의경이 부대 복귀 전에 목메어 자살한 사건을 듣고 참 가슴아파했습니다. 이제 군대갈 연령에 있는 사람들 상당히 불안하죠? 또 군대갈 자식을 둔 부모들도 상당히 불안해 할 것입니다.
여러분 무엇이 문제라고 생각하십니까? 괴롭히는 못된 고참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 고참이 문제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또 본인이 적응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볼 수도 있겠죠. 그러나 군대생활 하는데 못된 고참 한 두 명 없는 부대가 어디 있겠습니까? 못된 고참이 하나도 없어서 해결되기를 바라는 것은 비현실적인 희망이죠. 또 개인의 적응력이라는 것은 얼굴이 다르고 키가 다르듯이 다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좀 약한 사람이 있을 수도 있지요.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고 해결책은 어떻게 세울 수 있겠습니까?
비상상황에서 전혀 다른 결과를 맞은 한 사건을 소개하겠습니다. 군 생활할 때 큰 위기를 맞이했던 사람이 한 사람의 사랑을 통해서 그 위기를 잘 극복하고 ‘낮은 울타리’에 자신의 글을 기고한 글이 있어서 소개해 드립니다. 제목은 ‘작은 사랑 큰 위로’입니다.
“한 고참과의 관계는 나를 완전히 탈진시킬 만큼 힘들게 했습니다. 물론 나의 작은 실수 때문이기도 했지만 같은 크리스천임에도 불구하고 주일날 교회 가는 것을 막는 그의 모습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탈영을 생각했습니다. 계속되는 고참의 눈치 속에서 한번 두 번 교회를 빠지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늦은 밤 혼자 쓰레기통을 비우러 부대와 멀리 떨어진 소각장에 갔을 때 주위에 둘러쳐진 낡은 철조망을 보았습니다. ‘마약 내가 탈영한다면....’ 부모님은! 내 인생은! 복잡한 생각으로 철조망을 붙잡고 생각에 빠져있는데 정신을 확 깨게 하는 소리
“야, 거기서 무엇 하는 거야! 빨리 뛰어 오지 못해!” 일석 점호를 끝내고 잠자리에 들 때 침낭 속에서 고참 모르게 펑펑 울었습니다. 서럽고 억울해서 하나님이 원망스럽기까지 했습니다. 새벽 두시에 근무를 나가려고 옷을 갈아입는데 사물함이 약간 열려 있었습니다. 이상하다 싶어 열어보았더니 그 안에는 쵸코파이 하나와 작은 편지가 놓여 있었습니다. ‘힘내 임마 넌 잘할 수 있을 거야! 지금 이 순간에도 그분은 널 지켜보고 계셔.’ 눈물이 왈콱 솟구쳤습니다. 그 후로 난 변했습니다.
만약 자살한 그 의경의 부대 안에 똑같은 지친 그를 격려해주고 위로해주는 좋은 선배나 고참이 있었다면 상황은 달라질 수도 있겠지요. 문제는 못된 고참 때문도 아니고 본인의 적응력 때문도 아니고 적절한 지도자가 없었다는데 있는 것입니다.
요즘 많은 사람이 자살하고 죽고싶다는 말을 내뱉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자살사이트가 굉장히 성행하고 있습니다. 장기적인 경기침체로 많은 사람이 우울해져 있습니다. 특별히 개인 사업하시는 분은 굉장히 어려워하십니다. 제가 얼마 전에 개인 사업하시는 한 집사님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요즘 어떻습니까?” 하니까 “목사님 말도 마십시오. 맨 땅에 헤딩하고 있습니다.” 맨 땅에 헤딩하면 좀 아플텐데요. 또 다른 분에게 전화했더니만 “목사님 말도 마십시오. 죽을 맛입니다.”그런 말하신 분이 많이 있었습니다. 월급 받아 직장생활 하시는 분이라도 경제가 침체되면 결국 실직을 하게 될 것입니다. 실업에 대한 불안이 누구나 다 있을 수가 있는 것이죠. 요즘 유행하는 말이 있죠 ‘사오정 오륙도’ 그런 말이 있죠? 45세가 정년이랍니다. 56세가 되어도 아직 붙어있으면 도둑놈이랍니다. 아무리 봐도 더 나아질 기미가 보이질 않습니다.
정치는 어떻습니까 아무리 봐도 정치판에서 희망을 발견하기 힘들 것 같습니다. 군사적으로는 어떻습니까? 긴장은 자꾸 높아져만 갑니다. 그러니 어디를 봐도 살맛 나는게 별로 없습니다.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고 방황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신문에 나지 않아 그렇지 많은 사람이 죽어가고 자살하고 있답니다. 이민족은 지금 힘들어하고 있습니다. 위로자를 찾고 있습니다. 지도자를 찾고 있습니다. 부드러운 지도자 위로하고 격려해줄 지도자를 찾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우리그리스도인은 어떻게 해야하겠습니까? 하나님 이민족에게 좋은 지도자가 필요합니다. 훌륭한 지도자를 보내 주십시오. 그렇게 기도하시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전도하실 때 배고픈 무리를 보고 제자들이 예수님께 나아와서 말합니다. “선생님 이 사람들이 여러 시간 동안 음식을 먹지 못했습니다. 동네에 가서 먹을 것을 사먹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뭐라고 대답하셨습니까? “갈 것 없다 너희들이 먹을 것을 주어라.” 이때 제자들이 속으로 ‘아니 예수님 우리 먹을 것도 없는데 오천 명이 넘는 수를 우리가 무슨 수로 먹입니까? 말도 안됩니다.’ 그리고 순종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물론 오천 명이 넘는 군중도 굶었겠지만 열 두 명의 제자들도 굶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열두 제자들은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하기 위해서 애를 썼습니다. 음식을 여기저기서 찾아봤습니다. 그래서 작은 아이가 가지고 있는 보리떡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가져갔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오병이어에 축사하시고 떼어서 나누어주었습니다. 그래서 오천 명이 넘는 사람이 배불리 먹었습니다.
지금 지도자를 필요로 하고있습니다. 위로자가 필요합니다. 하고 우리가 기도한다 할지라도 주님이 이렇게 대답하실 것입니다. “너희들이 이 백성을 위로하라.”
하나님 어둡습니다. 빛을 보내주십시오. 하나님 춥습니다. 따스함을 보내주십시오 할찌라도 주님은 너희들이 세상의 빛이다. 너희들이 세상의 어둠을 밝혀라 너희들이 세상의 차가움을 따스하게 만들어라. 주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실 것입니다.
내가 어떻게 지도자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주님께서 지도자가 되어 남을 위로하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실 때 그 명령에 순종하기 위해서 애쓰다 보면 주님께서 새 힘을 주십니다.
군대생활 할 때 소대 단위로 장거리를 구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철모를 쓰고 총을 들고 뛰다보면 굉장히 힘들지요. 그런데 1명이라도 낙오되게 되면 경쟁에서 지게됩니다. 그래서 좀 힘들어한 동료가 있으면 좀 기운이 남는 사람이 총을 받아줍니다. 그러면 한결 낫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지금 다 힘들지 않겠습니까? 그런 상황에서 힘들어하는 동료의 총을 받아준 사람은 절대로 낙오하는 법이 없습니다. 그것을 받아드는 순간 새로운 힘이 솟구치기 때문입니다.
지금 살기 힘듭니다. 딱 죽고싶다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나 자신의 고통에만 집중해서 자기 연민에 빠져 있으면 나도 내 이웃도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고통 당한 이웃에게 눈을 돌려서 저들을 도와야 되겠다 내가 저들의 지도자가 되겠다. 우리가 이민족의 지도자가 되어야 되겠다 그렇게 생각하고 주님의 도움을 구하면 주님께서 힘을 주시고 지혜를 주셔서 나도 내 이웃도 다 함께 행복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좋습니다. 그럼 지도자가 되고 싶은데 힘도 없고 지위도 없고 전문 지식도 없는데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이와 같이 반문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도력이라는 것은 힘이 아닙니다. 만약 힘이 지도력이라면 권총강도가 “엎드려” 할 때 전부 엎드릴 수 밖에 없지요. 그렇다고 권총강도가 지도자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 총이 지도력이 될 수 있겠습니까? 힘이 곧 지도력은 아닙니다. 물론 지위나 전문성이 있으면 좋겠습니다만 그것이 곧 지도력은 아닙니다. 지도력은 힘도 아니요. 지위도 아니요 전문성도 아닙니다. 지도력은 곧 영향력입니다. 지도력은 “Leadership"이라고 합니다. ‘지도’를 뜻하는 “Leader”라는 단어와 “Ship” 곧 ‘배’라는 단어가 합성된 단어가 지도력인 것입니다. 지도력이라는 것은 배를 목적지까지 가게 하는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언제 지도력이 필요합니까? 풍랑일 때 지도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평소에 모든 것이 잘 풀릴 때는 지도력의 필요성을 그렇게 느끼지 못합니다. 배가 좌초할 것 같은 큰 풍랑을 만났을 때 지도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지금이야말로 이민족은 지도력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지도력은 영향력이고 영향력이라는 것은 개인의 능력과 무관하지 않습니다만 개인의 능력과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닙니다. 개인적으로 굉장한 능력을 가졌으나 지도력은 없는 사람이 있고 능력이 그리 크지 못하지만 지도력이 있는 사람이 있어요. 펠레가 굉장히 축구를 잘합니다만 그러나 훌륭한 감독이라는 소리는 못 들어 봤죠? 그러나 히딩크는 개인적으로 그렇게 축구를 썩 잘하는 편이 못됩니다. 국가대표한번 못해본 사람이에요. 그렇지만 국가대표 감독은 하잖아요. 그것은 바로 영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내 능력이 100인데 내가 10사람에게 영향력을 끼친다면 내 지도력은 1000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내 능력이 50밖에 안됩니다. 그렇지만 100사람에게 영향력을 끼칠 수 있으면 내 지도력은 5000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우리자 영향력 있는 지도자가 되기를 원한다면 지도력을 길러야 하겠습니다. 그래야 지도자가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지도력을 기를 수 있겠습니까? 가장 좋은 방법은 훌륭한 지도자의 본을 세워놓고 그 사람을 그대로 본받으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가장 좋은 본은 예수님이 되겠습니다만 그러나 또한 비상 상황이 있는 예수님을 잘 따라가는 지도자를 우리가 따라감으로 결과적으로 예수님을 잘 따를 수 있게 됩니다. 특별히 요즘시대는 부드러운 지도자를 필요로 하는 때입니다. 사람들이 워낙 상처를 많이 입고 있기 때문에 지금 다 죽고 싶은 심정으로 있기 때문에 조금 엄하게 지도하면 다들 낙담해버립니다. 그러므로 부드러운 지도자가 필요한데 성경 속에서 예수님을 잘 따라가는 부드러운 지도자의 본으로 우리는 바나바를 말할 수 있겠습니다. 바나바는 본명이 아닙니다. 별명입니다. 본명은 요셉인데 바나바라는 별명을 사도들로부터 받았습니다. 바나바의 뜻은 무엇이냐 하면 ‘위로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위로자라는 뜻이죠. 자기의 전재산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내어놓은 사람입니다. 사도바울을 추천해서 교회에서 일꾼 되게 한 사람입니다. 사도바울과 함께 안디옥 교회를 창립했고 최초의 선교사가 되어서 복음을 전도한 선교사입니다. 그리고 자기 조카 마가를 훌륭하게 세워서 마가복음의 저자가 되게 한 위대한 사람입니다. 그 자신의 역량은 그렇게 뛰어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을 세웠고 마가를 세움으로 말미암아 교회사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미친 사람입니다. 바나바가 없었다면 사도바울도 없었겠죠. 마가도 없었을 것입니다. 바울이 없고 마가가 없었다면 바울서신도 없었을 것이고 마가복음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신약성경의 절반은 없었을 것입니다. 만약 사도바울이 없었다면 우리도 예수 못 믿었을지 모르죠. 바나바가 아니었다면 우리가 예수를 못 믿었을지도 모릅니다.
이처럼 훌륭한 지도력을 발휘한 바나바의 삶을 살펴보면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바나바 같은 지도자가 될 수 있을가 한번 살펴보십시다.
먼저 좋은 지도자가 되려면 자신을 다스릴 줄 알아야 합니다. 자신을 다스릴 줄 아는 사람이 남을 잘 다스릴 수 있습니다. 최근에 나오는 책 가운데 사무엘 리마에 “셀프 리더십”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번역하면 “자기지도력”입니다. ‘세계를 이끌기를 원하는 사람은 자기를 다스릴 줄 알아야 한다.’ 이것이 부제입니다. 수많은 지도자들이 나타났습니다만 그중에 상당수는 짧은 기간동안만 지도자로 일하고 지도력을 상실하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왜 그렇습니까? ‘셀프 리더십’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리마는 ‘셀프 리더십’을 확립하는 방법으로 4가지를 말하는데 그 중에 제일 중요한 두 가지는 먼저 삶의 가치를 정립하고 소명의식을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무엇이 참으로 중요한 것이냐 영원 하는 것 불변하는 것을 잡으라는 것입니다. 우리그리스도인이 볼 때는 천국이 가장 확실한 것이죠. 무엇이 천국에 의미 있는 것이냐. 그것을 확실하게 붙잡아야 합니다. 또 소명의식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으로부터 부름 받은것 내가 무엇을 위해서 이 땅에 태어났는가? 하나님이 내가 이 땅에서 무엇을 하라고 명령하시는가? 그것을 분명히 깨달아 알아야됩니다. 그것을 깨달아 안다면 남하고 비교할 이유가 없는 거죠. 하나님과 나와의 직선적인 관계에서 내 삶의 해야할 바가 무엇인가를 찾으면 되는 것입니다. 바나바는 전재산을 하나님께 다 드려서 교회를 크게 부흥케 하고 많은 사람들을 도와주었는데 자기 밭을 다 팔고도 실패한사람이 있습니다. 누구입니까? 바로 아나니아와 삽비라입니다. 팔기는 다 팔았습니다. 그런데 막상 돈을 딱 쥐고 보니까 아까워요. 그래서 절반만 갔다내면서 이게 다입니다. 하였다가 같은 날 아내와 남편이 죽임을 당하는 그런 불행한 부부입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셀프 리더쉽’이 부족했던 것입니다. 영원한 가치를 보지 못했어요. 그 돈의 많음만 보고 영원한 천국을 바라보지 못해서 실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이스라엘 초대왕이 누구죠? 사울입니다. 그는 참 겸손한 왕이고 좋은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 망가지기 시작 했느냐면 바로 다윗의 출현 때부터입니다. 블레셋하고 전쟁을 하고 돌아오는데 여인들이 노래합니다.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오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로다. 그 노래를 듣는 순간 사울의 마음속에 불같은 질투의 마음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그 이후로 어떻게 하면 다윗을 죽일까? 숨어있는 다윗을 추격하느라고 많은 시간을 허비합니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불행한 왕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바나바도 똑같이 질투에 빠질 수 있는 그런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처음에 바나바에 의해서 사울이 교회에 등단하게 됩니다. 사도바울의 원래 이름이 사울이죠. 다메섹도상에서 예수를 만났습니다.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다메섹에서부터 전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사울이 새사람이 되어서 예루살렘을 방문했습니다. 가서 사도들도 만나고 지도도 받고 내 삶 전체를 예수 위해 살리라. 그렇게 생각하고 갔는데 아무도 사울을 만나주려 하지 않습니다. 사도바울의 회심을 믿어주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답답했겠습니까 답답해하고 있을 때 그때 바나바가 일어나서 이 사람은 제가 보증합니다 이 사람은 변했습니다.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그의 추천으로 이제 바울이 교단에 등단하게 됩니다. 그런데 함께 선교 여행을 하는데 갈수록 바울은 점점 높아지고 바라바는 점점 줄어듭니다. 아무래도 선교하는 영향이 바울이 좀 더 뛰어났던 모양이죠. 바울은 정말 전세계적인 천재 아닙니까? 종교적인 천재입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렇게 계속 기록되다가 사도행전 13장 43절부터는 바울과 바나바가 그렇게 기록됩니다. 이제는 바나바가 제2인자가 되고 바울이 1인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때 자칫하면 사울이 빠진 함정에 바나바도 빠질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그랬더라면 바울도 바나바도 큰 불행에 빠졌겠죠. 그러나 바나바는 ‘셀프 리더십’을 잘 발휘했습니다. 스스로를 다스릴 줄 알았습니다.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를 정립하고 그 질투의 감정을 이기고 함께 협력해서 선교 사역을 잘 감당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좋은 지도자가 되는데 가장 어려운 것은 무엇인가? 이제 목회를 사십 년 이상하고 은퇴를 앞둔 선배목사님께 물어봤더니 한평생 목사 하시면서 제일 힘들었던 게 뭡니까? 그 선배님이 대답하시기를 나 스스로를 다스리는 것이 제일 힘들었다. 그렇게 고백하는 소리를 들어봤습니다. 저는 진솔한 고백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무엇이 제일 힘들었습니까? 아무리 전도해도 말 안 듣는 사람들이 힘듭니까? 말썽꾸러기 구역 식구가 힘듭니까? 가장 힘든 것은 나 자신 아닙니까? 내 맘을 내 맘대로 하지 못해요. 이 속에서 질투의 감정이 일어나고 세상을 추구하는 마음이 일어나면 걷잡을 수가 없습니다. 이때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하나님을 바라보는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 앞에 서기전에 먼저 하나님 앞에 서야합니다. 하나님 앞에 벌거벗은 모습으로 서고 하나님 내가 이처럼 초라합니다. 나는 무능합니다. 나는 약합니다. 약함투성이입니다. 하나님 나를 변화시켜 주십시오. 그래야 하나님께로 치료함을 받을 때 하나님으로부터 힘을 받을 때 우리가 남을 도울 수 있는 자가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첫번째 조건은 자신을 다스릴 줄 아는 지도자가 되는 것입니다. 두번째로는 남을 세울 줄 아는 지도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바나바의 특기인 것입니다. 바나바가 바울을 세웠습니다. 바나바가 마가를 세웠습니다. 지도력이라는 것은 리더십이라고 했죠. 배가 목적지까지 잘 도착하려면 선장 혼자 잘해서는 안됩니다. 선장의 판단이 예리하고 바른 명령을 내렸다 할지라도 선원들이 제일을 감당하지 못하면 배는 목적지까지 갈 수 가 없는 것이죠. 선장의 사명은 선원들이 다 자기 일을 잘 할 수 있도록 위로하고 격려하고 세워주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나 혼자 잘하는 것 중요합니다만 더 중요한 것은 남이 잘 할 수 있도록 도와 주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진짜 예수 잘 믿는 사람은 자기혼자 신앙생활 잘하는 사람이 아니고 딴 사람이 예수 잘 믿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남을 잘 돕는 자가 되기 위해서는 딴 사람의 장점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사람을 격려하고 세워주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특별히 마가는 부자집 아들이죠. 처음에는 바울과 마가 바나바 이렇게 전도여행을 같이 떠났습니다. 가다가 너무 험하고 고생스러우니까 포기하고 돌아왔어요. 그 다음에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바울과 바나바가 선교보고를 하는데 굉장한 역사가 일어납니다. 바울을 칭찬합니다. 그때 마가는 후회가 막급입니다. 그래서 다시 선교여행을 떠난다고 하니 삼촌 나도 데려가 주세요. 해서 바나바가 데려가자고 하자 바울은 안됩니다. 여기서 지도력의 차이가 난 것이죠. 결국 이일로 둘은 다투고 바울은 실라를 데리고 따로 떠납니다.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따로 떠났습니다. 어떤 것이 옳으냐!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고 강하고 직선적인 지도력도 필요하고 부드럽고 따스한 지도력도 필요합니다. 그런데 만약 그때 바나바가 마가를 떨쳐버렸다면 마가는 영영 이름 없는 기독교인으로 끝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가는 바나바에 의해서 격려 받고 다시 일어섭니다. 그는 나중에는 바울에게 까지 인정받습니다. 바울이 감옥에 갇혔을 때 ‘네가 올 때 마가를 데려 오라’ 그것이 나에게 유익하다 그렇게 고백을 합니다. 여러분 남의 약점이 보입니까? 약점보다 장점을 볼 수 있어야 지도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좋은 지도자의 여건은 남의 장점과 가능성을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주위에는 따스한 격려와 위로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녀교육을 잘하기로 유명하죠. 사실 인구는 많지 않은데 노벨상을 받은 사람은 세계에서 제일 많죠. 유대인의 자녀교육방법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어떤 아이가 1부터 100까지 세어야 하는 그런 연령이 되었는데 1부터 100까지를 세지 못해요. 그러면 성적표가 어떻게 나오겠습니까? 유대인들은 이렇게 성적표를 냅니다. 이 아이는 1부터 10까지는 잘 셀 수 있습니다. 조금 더 지도하면 100까지도 셀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나옵니다. 이 성적표를 받아보고 이 아이가 용기를 가지는 것이죠. 이 아이가 나중에 늦머리가 터지면 노벨상수상자도 될 수가 있는 겁니다.
이 힘든 세상에서 기독교인으로 산다는 것은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닙니다. 양심을 가지고 성도로서의 자부심을 가지고 산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쓰러지고 실패할 때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때 누군가가 잡아줄 사람이 필요합니다. 위로하고 결려 해줄 지도자가 필요합니다. 바나바 같은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에서는 멘토링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새가족에게만 적용하고 있는데 나중에 좀더 확산 시켰으면 좋겠습니다. 개인적으로 1:1로 도와줄 사람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교회는 더 많은 바나바를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사회도 바나바 같은 따스한 지도자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민족이 지금 총체적 위기를 당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위기는 위험과 기회가 합쳐진 말입니다. 이 말은 위험은 곧 기회가 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일제시대에 우리민족이 큰 어려움에 빠졌을 때 교회가 이민족의 지도자가 되었고 위로자가 되었습니다. 삼일운동을 주도했습니다. 그 결과 교회가 삼일운동이후에 크게 부흥할 수 있었습니다. 육이오 사변 직후 전쟁의 폐허 속에서 어찌할 바를 좋을지 몰라 방황하고 있는 이민족을 교회가 위로하고 격려하고 지도해 주었습니다. 그 결과 육이오 전쟁 후에 교회가 크게 성장했습니다.
지금 장기적인 경기침체로 많은 사람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이것이 아름다운 전도의 기회가 될 수가 있습니다. 전화위복의 기회가 될 수가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이민족의 바나바가 될 수 있다면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