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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택목사 (이문동교회)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사십일을 땅에 계시다가 승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믿으면서 잘 따랐지 만은 그러나 그 중에는 예수님의 부활의 모습을 보고도 잘 믿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의심을 했습니다. 그러니깐 예수님이 승천하신 다음에도 제자들 가운데는 혹시 이런 의구심에 빠져 있을 수 있었겠다! 생각을 해봅니다. 그것은 무엇이 냐 하면 “그때 주님을 좀더 가까이 뵈올걸~ , 한번 더 만져볼걸~ , 좀더 확신을 해 두었으면 좋았을 걸” 아니면 “어떤 표라도 남겨놓았으면 어땠을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얘기가 전해집니다. 지난 주관에도 도마에 대한 말씀을 여러분에게 드렸는데 도마 역시 “나의 주 나의 하나님” 이라고 고백했지마는 막상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보이지 않게 되자 지금 말씀드린 것처럼 “야~ 이거 그때 확실하게 만져 두는 건데.. 내가 그때 혹시 잘못 본 게 아닌가~” 이런 의심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나아가서 열심히 주의말씀을 증거 하는데도 도마는 전도도 하지 못하고 그냥 주삣주삣, 말하자면 아웃사이더 비슷하게 지냈다고 합니다. 한번은 베드로가 설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베드로의 설교에 많은 사람들이 은혜를 받습니다. 그런데 도마가 생각을 해보니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던 사람인데 나는 직접 만져본 사람인데 만져보지도 못한 사람이 얼마나 열심히 설교하고 열심히 증거 하는지 도마가 걱정이 되었습니다. “야~ 베드로가 저래두 되는 건가! 나는 만져보고도 지금 가만히 있는데~” 그리고 베드로에 대해 조금 못마땅한 생각을 하고있는데 마침 베드로가 설교를 하다가 말고 이렇게 말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주님을 직접 만져본 분이 여기 있습니다. 그 손가락에 자기의 손을 내보고 넣고 자기 손가락을 그 손에 넣어보고 그 주님의 옆구리에 손을 넣어본 분이 있습니다. 도마입니다.” 도마의 얼굴이 뻐얼게 졌습니다. 요즘으로 표현하자면 “ 나까지 끌어드려~” 그래서 상당히 못마땅해 하고 있는데 베드로가 도마씨 이리로 나오라고 말이지~ 얼떨결에 나갔습니다. 얼굴이 뻐얼게 져가지고 당신이 주님을 만난 그대로 이 사람들에게 증거해 보라고 그러니 그냥 들어 갈 수도 없고 속으로는 못마땅했지만 더듬거리면서 말했다고 합니다. “ 제..제가 주..주님을 만나봤지요.. 뭐… 또 만져보았습니다. 손..손도 넣어봤지요” 더듬거리면서 말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난 것은 만져보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했던 그 많은 사람들이 더듬거리면서 증거 하는 이 도마에 증언을 듣고 눈물 흘리고 감격하고 주님을 부르고 믿고 이런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도마가 회개했다고 합니다. “야~ 주님 말씀대로 구나~ 보지 못하고도 이렇게 잘 믿는데 나는 보고도 만지고도 이렇게 잘 못 믿었으니 참 안됐다.” 그리고는 회개하고 자기가 제비 뽑은 대로 인도에 가서 복음을 증거 하다가 순교했다. 그런 얘기가 있습니다. 혹시 도마의 의심에 대해서 이렇게 희화적으로 표현하느라고 이런 얘기가 나왔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어째든 주님께서 사십일 동안 계시고 승천하신 다음에 제자들의 마음이 얼마나 허탈했겠습니까? 얼마나 두려웠겠습니까? 그들은 우왕좌왕 했을 것입니다. “야~ 이거 정말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정말 우리는 주님의 좌편과 우편에 앉을 기회를 다 놓쳐버리고 만 것인가~” 그러면 주님께서는 그 사십일 동안에 무엇을 하셨는가? 오늘 성경은 이렇게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셨다.” 사십일 이라고 하는 시간이 얼마나 금싸라기 같은 귀한 시간이었겠습니까? 그 사십일을 지나면서 주님께서는 하나님 나라 일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 나라가 무엇입니까? 하나님 나라의 일이 어떻게 되는 겁니까?” 이렇게 물어본 얘기가 없습니다. 왜 제자들이 물어 봄 직 했음에도 불구하고 왜 물어보지 않았을까? 그들은 이미 하나님 나라에 관한 말씀을 들었기 때문에 묻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의 일에 대해서 그들은 어느 정도 이해되었기 때문에 받아 들었기 때문에 묻지 않았다고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님께서 말씀하시니 하나님 나라의 일에 대해서 제자들이 다시 어떻게 하게 됩니까? 그들도 하나님 나라를 말하게 됩니다. 하나님 나라를 증거 하게 됩니다.
그 일 때문에 매를 맞습니다. 감옥에 갇힙니다. 그리고 쫓겨납니다. 심지어 죽임을 당했습니다. 나중에 사도들이 스스로 고백합니다. 뭐라고 고백합니까?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고난을 받아야 될 것이다.” 이제는 사도들도 그렇게 증언하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사역은 하나님 나라로 시작합니다. 주님의 첫 말씀이 회개하라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너희가 먼저 구해야 할 것이 무엇이냐? 하나님의 나라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천국은 마치 “이런 것이다 이런 것이다.” 예수님의 비유를 통해서 수없이 하나님의 나라가 증거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얼마나 귀한지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불구자가 되어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낫다. 내 눈이 범죄하면 빼어 버리라 내 손이 범죄하면 찍어 버리라.” 사람이 불구자가 되더라도 한 다리가 없고 한 손이 없더라도 한 눈이 없을지라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더 좋은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와 상명적 관계를 이룹니다. 복음적 관계를 이루고 증인적 관계를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하나님 나라에 기초가 무엇으로 이루어질까요? 이것은 주님의 교훈을 통해서 말씀하면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가장 기본적인 것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 것입니다.” 다 잘 아는 말씀이죠?
“회개하라! 그리고 복음을 믿으라!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우리의 신앙과 신앙의 중심에 그 특징은 한마디로 말하면 회개라고 하는 것입니다. 회개를 다 잘 아시는 말씀으로 이해하시기 때문에 다시 설명할 필요는 없겠죠. 회개하고 하는 말은 제자리로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우리들이 회개하고 하는 얘기 속에는 하나님 앞에서의 죄의 깨 닿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 주여 나는 죄인 이로 소이다.” 자기의 죄를 깨 닿았을 때 심각하게 내적인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그리고 거기 자연스럽게 믿음이 따라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깐 회개하는 자는 믿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믿고 회개하는 것, 회개하고 믿는 것입니다. 이 회개를 때때로 개인적으로 합니다. 이 회개를 어떤 때는 집단적으로 합니다. 온 교회가 모여 회개합니다. 온 나라가 모여 회개합니다. 집단적으로도 회개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회개에는 두 가지 회개가 있습니다. 하나는 즉각적이고 급진적인 회개가 있습니다. 이것을 친의를 위한 회개라 거듭나는 회개라 말하는 것입니다. 참된 회개는 그 속에 친의와 성화를 갖는데 바로 친의를 얻는 회개가 일생에 단 한번 일어나는 회개입니다. 내가 죄를 회개하고 주님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 한번으로 족한 것입니다. 그 다음에 우리는 두 번째 회개를 하게 됩니다. 이 회개는 반복됩니다. 자꾸만 반복됩니다. 주일날 우리가 와서 참회의 기도를 드리죠 또 반복되죠 또 반복되죠 이것은 우리들이 같은 죄를 또 범하고 같은 죄를 또 범하는 그런 것이 아니라 바로 회개의 신앙에 그 역동성이 그 힘이 우리에게 생겨서 우리의 일생에 걸쳐서 생애에 걸쳐서 지속적으로 나타내는 갱신을 회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통해서 우리는 성화에 이른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회개를 통해서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가능한 두 가지 순간이 주어지는데 하나는 친의요, 하나는 성화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 “구원이라는 한가지 행위에 두 순간을 갖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어쨌든 하나님의 나라에 관계되어 생각할 때 지금 말씀드린 것처럼 가장 기본적으로 개인적이든지 집단적이든지 하나님의 친의를 위해서든지 성화를 위해서든지 우리에게는 회개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회개합니다. 말씀 앞에서 회개합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 속에 또 교회 속에 우리의 공동체 속에 우리의 가정에 하나님의 나라를 가져오게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은 믿음과 직결되는 것입니다.
독일에서 경건주의 운동을 했던 헤르만 프랑케 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분은 요한복음 20장 31절 말씀을 가지고 설교준비를 하게 되었습니다. 요한복음 20장 31절에는 “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하는 말씀입니다. 그는 여러 번 설교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 과연 그리스도임에 믿게 하려함이라.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라. 믿고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라.” 이분은 설교를 준비하다가 멈추었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에게 묻게 되었습니다. “ 나는 정말 믿는가? 나는 과연 믿는가?”
여러분 정말 믿습니까? “ 나는 과연 믿는가?” 그리고 그분은 자기 속에 믿음이 없음을 깨닫고 회개하고 다시 믿음을 가지고 다시 경건운동에 힘썼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일은 정말 회개했는가? 정말 믿는가? 정말 회개한 체험, 내적 변화가 내게 있는가? 우리는 깊이 성찰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역사는 자기 성찰을 요구하고 하나님은 회개를 요구하신다.” 역사와 사건을 통해서 자기를 돌아보게 합니다. 그래서 역사는 자기 성찰을 요구하지만 하나님은 회개를 요구하신다는 것입니다. 회개는 하나님 나라의 시작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열려지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우리에게 오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에 가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소유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회개한 우리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나라의 일이라고 하는 것이 어떤 의미를 주는 것인가? 그것은 내가 하나님 나라의 확신을 가지고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존재한다라는 의미를 주는 것입니다. 이제는 세상나라 백성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존재한다라는 것은 하나님의 다스림 하나님의 섭리를 받아드리고 그 다스림 속에서 내가 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다스릴까요?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으로 다스려주십니다. 생명을 구원하셔서 다스려 주신다는 것입니다. 공로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자격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돈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종 되었던 애굽땅에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심으로 다스립니다. 그러니깐 구원의 은총으로 다스리고 그리고 그 다음에 우리에게 의로운 은총으로 다스리십니다. 건져낸 애굽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에 와서 십계명이라고 하는 의로운 은총을 주심으로 저들을 다스리십니다.
우리를 죄로 다스리시지 않습니다. 불의로 다스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요구하십니다. “온전 하라. 거룩 하라. 스스로 성결케 하라.” 이것이 하나님의 의로운 은총으로 다스려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신령한 복을 주심으로 우리를 다스리십니다. 그것을 갖다가 우리는 보통 “축복해주세요. 복 주세요.” 이렇게 얘기합니다. 신령한 은혜. 하나님이 우리에게 각양 좋은 은사를 주십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주십니다.
주님은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 부모가 악해도 자식에게도 좋은 것을 주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 그 분은 그 아버지께서 자기백성에게 그 왕께서 자기백성에게 좋은 것을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다스림을 받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는 이렇게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다스림 속에 존재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희망입니다. 이것이 절망과 좌절과 허탈 속에서 희망을 갖는 것입니다. 위기 속에서 바른 기회를 갖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존재하지 못하면 거기 희망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움직여야 된다라고 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존재하기 위해서 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것을 어떤 분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명사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동사적으로 살아야 한다.” 이제는 움직여야 된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사람들 앞에서 자기를 움직여야 됩니다. 나타내야 합니다. 그래서 신앙의 백성임을 증거 해야 합니다. 여러분 오늘 내가 이 세상에서 살아갈 때 신앙인의 사람으로써 어떻게 증거 되고 있습니까? 혹은 우리의 분노와 시기와 다툼과 미움과 쾌락과 자기도취와 이런 것들입니까? 정말 우리들에게는 “나는 하나님의 사람이다.”라고 하는 확신과 그 다음에 이렇게 하는 것을 보고 “내가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하는 것을 아시오” 하는 이러한 믿음의 능력이 우리에게 있습니까?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의 백성은 그 하나님의 사람으로 움직여야 됩니다. 움직이지 못하면 죽는 것입니다. 가 쓴 삼위일체 건강비결에 보면 이렇게 얘기하고 있습니다. “100미터를 자기 힘으로 걸을 수 있는 사람은 건강이 회복될 희망이 있다.” 그러나 자기 힘으로 100미터도 움직이지 못하면 어떻하겠는가?
여러분 말씀으로 믿음으로 기도로 움직이는 사람은 봉사로 섬김으로 움직이는 사람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이 세상에서 꿈을 가질 수 있습니다. 움직이는 사람은 예루살렘에서 유대로 사마리아로 땅끝으로 갈 수 있습니다. 움직이는 사람은 역사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움직이는 사람은 로마로 갈 수 있습니다. 행동하는 꿈, 움직일 수 있는 꿈을 갖고 움직여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움직임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증거 되어야 한다는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나라의 일이 우리와 밀접한 관계를 이루는 것입니다. 지난주간에 제가 중국의 선교지를 갔다 왔습니다. 오다가 심향에서 거기에서 일하고 있는 선교사 몇 가정과 함께 같이 식사를 했습니다. 그러면서 잠깐 그들을 위로하기도 하고 격려했습니다. 그 중에 한 분이 이제 아직도 유학생 신분으로 가 있습니다. 중국은 아직도 정식으로 선교사 비자가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런 얘기를 들었어요 요즘 중국이 형편이 좋지 않는데 그 학교에 가서 늘 지내는데 그날 따라 어떤 중국 학생이 자기에게 점심을 사주겠다고 그랬다는 거예요. 그래서 같이 점심을 먹게 되었답니다. 점심을 먹고 같이 마주 앉았습니다. 이 선교사님은 기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눈을 감고 기도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앞에 있는 중국 친구가 이렇게 말을 하더랍니다. “야 왜 밥을 놓고 눈을 감냐?” 그래서 기도 한 거야 말하기도 그렇고 지금 신분을 모르니깐 그냥 와서 유학생인줄 아니까는 이렇게 얘기했다고 합니다. “어, 감사한 것이지.” “뭐가 감사하냐?” “너가 밥 사줘서 감사하고, 이렇게 좋은 친구를 만나서 감사하고, 또 농부들이 수고해서 곡식들을 만들어서 감사하고……” 그랬더니 그 사람이 먼저 이렇게 말하데요. “그럼 하나님께도 감사해야 되겠네?” 그래서 “어 하나님께도 감사해야지!” 그 친구가 물었습니다. “당신은 그리스도인이 아닌가?” “맞다. 나는 그리스도인 이다.” 그래서 그 친구가 그 이상 말하면 곤란하니까 “그냥 여기까지만 얘기하자!” 자, 여러분 우리가 기도한다고 하는 것이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는 모습으로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움직이는 것이 하나님나라의 일로 나타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거기 하나님 나라의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의 일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나라에 존재하는 것과 동시에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움직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어디까지 움직이는 것입니까?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향해서 계속해서 나아가고 달려가고 전진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얘기합니다. 오직 앞을 향하여 푯대를 향하여 면류관을 향하여 내가 나아가고 있다. 달려갈 길을 달리고 있다. 여러분의 일이 여러분의 길이 어떻습니까? 우리가 일 해 야죠, 일자릴 찾아 야죠, 돈을 벌어 야죠, 출세 해 야죠. 그런데 거기에 머물러 있습니까. 그 이상과 그 목적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그냥 먹고 살고 돈 벌고 일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거기에는 그 이상이 있습니다. 그 이상의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나라의 일이니까 나라 왕국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일로 관계 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해도 우리가 노래해도 우리가 먹어도 우리가 사나 죽으나 결국은 하나님 나라의 일과 관계되는가? 끊임없이 그렇게 되는가? 거기에 삶의 의미가 있습니다. 용기가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 추진력이 있습니다. 어둠을 몰아내고 죄악을 이기는 능력이 있습니다. 죽음을 살리는 희망적 능력이 있습니다. 평화를 이루고 땅끝까지 가는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우리에게 이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내 삶의 1번이 무엇인가? 주님은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라” 우리에게 중요한 일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1번은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과연 그렇습니까? 이것이 다르면 거기 고민이 있고 갈등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르면 비전이 달라집니다. 은혜가 달라집니다. 이것이 달라지면 분위기가 달라집니다. 전혀 다른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동상이몽’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갖는 하나님 나라의 일에 1번! 하나님 나라의 일, 주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나라, 주님께서 너희가 구해야 할 하나님의 나라, 그것이 우리에게 있어서 1번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게 1번이 아니면 다른 것은 다 별 볼일 없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에게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에게 1번을 둡니다. 그리고 가족에게 2번을 둡니다. 그래서 내가 먹고 쓰고 좀 남겨서 자식에게 남겨 주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좀더 여유가 있으면 그 다음 자식에게 물려주어야 된다고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 나라 일은 언제쯤 하면 좋겠습니까? 한 10번째쯤 하면 좋겠습니까? 하나님 나라 일이 점점 멀어지게 되겠죠. 여러분 부활하신 주님을 믿습니까? 그 하나님 앞에서 회계를 체험했습니까? 이제 하나님 나라일에 관심을 갖읍시다. 과연 내 생애, 우리 가정, 우리 교회 일에 있어서 1번이 하나님의 나라인가? 그리고 그 일에 관한 것인가? 그 일에 관한 고민인가? 아니면 사람들에 관계된 어떤 시시콜콜한 일들인가? 시비인가? 우린 이런 것들을 떨쳐버려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에 관심을 갖고 그 일을 위해서 꿈을 꾸고 그 일을 위해서 기도하고, 그리고 나아갈 때 바로 거기에서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 하나님을 찬양하게 됩니다. 그 하나님을 통해서 일어나는 위대한 역사와 변화를 바라보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 사는 것이 그 삶 속에서 의미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청년이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한 어르신에게 찾아가서 인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 아 축하하네~ 그래 부인은 어떤 사람인가?” 그랬더니 이 청년이 말했습니다. “ 제 아내 될 사람은 참 미인입니다.” 그랬더니 그 어르신이 동그라미를 쳤습니다. “왜 동그라미를 치세요?” “응 그냥 내가 치는 거야~” 또 이야기를 하다가
“학벌이 좋습니다.” “어~ 학벌이 좋아.” 그러면서 또 동그라미를 쳤습니다. “요리도 잘 합니다.” 동그라미를 쳤습니다. 뭐가 어떻습니다. 뭐가 어떻습니다. 동그라미를 쳤습니다.
한 대여섯 개를 쳤습니다. 나중에 “뭐 이제 또 할말 없나?” “아 참 제 아내가요 예수 잘 믿어요.” 그러니 그때서야 이분이 1을 쳤습니다. 그리고 동그라미를 세워보니깐 “어이구 자네 부인이 백만 불 짜리 네~” 1번이 생기니깐 백만 불이 된 것입니다. 1번이 없으면은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동그라미가 많아도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일, 주님께서 사십일 동안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셨습니다. 다른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일. 왜? 그것이 1번 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너희들에게 1번이다. 그래서 그들이 나가서 1번으로 외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외칩니다. 그래서 순교합니다. 그래서 환난을 받습니다. 그래서 쫓겨납니다. 이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 이렇게 충고한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일. 서두르지 마십시오! 그러나 분명한 목적과 가치를 위해서 해야 할 일을 발견했을 때에는 그 기회를 놓치지 마십시오! 어물어물 하다가는 참으로 해야 할 하나님 나라의 일을 흘려 보내게 되고 단 한번의 기회를 놓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일을 위해서 서두를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어물어물 하다가는 기회를 놓칠 수 있습니다. 그 기회는 단 한번의 기회라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 나라 일을 위해서 애쓰고 기도하고 고민하고 그 나라를 구하고 1번이 정해지면 그 다음에는 주님께선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 이 모든 것을 더하시리라.” 2번이 채워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1번을 채우시므로 2번과 3번과 4번이 수두룩하게 채워지는 이런 축복 은사가 우리 가운데 충만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사십일을 땅에 계시다가 승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믿으면서 잘 따랐지 만은 그러나 그 중에는 예수님의 부활의 모습을 보고도 잘 믿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의심을 했습니다. 그러니깐 예수님이 승천하신 다음에도 제자들 가운데는 혹시 이런 의구심에 빠져 있을 수 있었겠다! 생각을 해봅니다. 그것은 무엇이 냐 하면 “그때 주님을 좀더 가까이 뵈올걸~ , 한번 더 만져볼걸~ , 좀더 확신을 해 두었으면 좋았을 걸” 아니면 “어떤 표라도 남겨놓았으면 어땠을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얘기가 전해집니다. 지난 주관에도 도마에 대한 말씀을 여러분에게 드렸는데 도마 역시 “나의 주 나의 하나님” 이라고 고백했지마는 막상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보이지 않게 되자 지금 말씀드린 것처럼 “야~ 이거 그때 확실하게 만져 두는 건데.. 내가 그때 혹시 잘못 본 게 아닌가~” 이런 의심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나아가서 열심히 주의말씀을 증거 하는데도 도마는 전도도 하지 못하고 그냥 주삣주삣, 말하자면 아웃사이더 비슷하게 지냈다고 합니다. 한번은 베드로가 설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베드로의 설교에 많은 사람들이 은혜를 받습니다. 그런데 도마가 생각을 해보니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던 사람인데 나는 직접 만져본 사람인데 만져보지도 못한 사람이 얼마나 열심히 설교하고 열심히 증거 하는지 도마가 걱정이 되었습니다. “야~ 베드로가 저래두 되는 건가! 나는 만져보고도 지금 가만히 있는데~” 그리고 베드로에 대해 조금 못마땅한 생각을 하고있는데 마침 베드로가 설교를 하다가 말고 이렇게 말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주님을 직접 만져본 분이 여기 있습니다. 그 손가락에 자기의 손을 내보고 넣고 자기 손가락을 그 손에 넣어보고 그 주님의 옆구리에 손을 넣어본 분이 있습니다. 도마입니다.” 도마의 얼굴이 뻐얼게 졌습니다. 요즘으로 표현하자면 “ 나까지 끌어드려~” 그래서 상당히 못마땅해 하고 있는데 베드로가 도마씨 이리로 나오라고 말이지~ 얼떨결에 나갔습니다. 얼굴이 뻐얼게 져가지고 당신이 주님을 만난 그대로 이 사람들에게 증거해 보라고 그러니 그냥 들어 갈 수도 없고 속으로는 못마땅했지만 더듬거리면서 말했다고 합니다. “ 제..제가 주..주님을 만나봤지요.. 뭐… 또 만져보았습니다. 손..손도 넣어봤지요” 더듬거리면서 말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난 것은 만져보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했던 그 많은 사람들이 더듬거리면서 증거 하는 이 도마에 증언을 듣고 눈물 흘리고 감격하고 주님을 부르고 믿고 이런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도마가 회개했다고 합니다. “야~ 주님 말씀대로 구나~ 보지 못하고도 이렇게 잘 믿는데 나는 보고도 만지고도 이렇게 잘 못 믿었으니 참 안됐다.” 그리고는 회개하고 자기가 제비 뽑은 대로 인도에 가서 복음을 증거 하다가 순교했다. 그런 얘기가 있습니다. 혹시 도마의 의심에 대해서 이렇게 희화적으로 표현하느라고 이런 얘기가 나왔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어째든 주님께서 사십일 동안 계시고 승천하신 다음에 제자들의 마음이 얼마나 허탈했겠습니까? 얼마나 두려웠겠습니까? 그들은 우왕좌왕 했을 것입니다. “야~ 이거 정말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정말 우리는 주님의 좌편과 우편에 앉을 기회를 다 놓쳐버리고 만 것인가~” 그러면 주님께서는 그 사십일 동안에 무엇을 하셨는가? 오늘 성경은 이렇게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셨다.” 사십일 이라고 하는 시간이 얼마나 금싸라기 같은 귀한 시간이었겠습니까? 그 사십일을 지나면서 주님께서는 하나님 나라 일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 나라가 무엇입니까? 하나님 나라의 일이 어떻게 되는 겁니까?” 이렇게 물어본 얘기가 없습니다. 왜 제자들이 물어 봄 직 했음에도 불구하고 왜 물어보지 않았을까? 그들은 이미 하나님 나라에 관한 말씀을 들었기 때문에 묻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의 일에 대해서 그들은 어느 정도 이해되었기 때문에 받아 들었기 때문에 묻지 않았다고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님께서 말씀하시니 하나님 나라의 일에 대해서 제자들이 다시 어떻게 하게 됩니까? 그들도 하나님 나라를 말하게 됩니다. 하나님 나라를 증거 하게 됩니다.
그 일 때문에 매를 맞습니다. 감옥에 갇힙니다. 그리고 쫓겨납니다. 심지어 죽임을 당했습니다. 나중에 사도들이 스스로 고백합니다. 뭐라고 고백합니까?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고난을 받아야 될 것이다.” 이제는 사도들도 그렇게 증언하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사역은 하나님 나라로 시작합니다. 주님의 첫 말씀이 회개하라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너희가 먼저 구해야 할 것이 무엇이냐? 하나님의 나라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천국은 마치 “이런 것이다 이런 것이다.” 예수님의 비유를 통해서 수없이 하나님의 나라가 증거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얼마나 귀한지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불구자가 되어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낫다. 내 눈이 범죄하면 빼어 버리라 내 손이 범죄하면 찍어 버리라.” 사람이 불구자가 되더라도 한 다리가 없고 한 손이 없더라도 한 눈이 없을지라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더 좋은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와 상명적 관계를 이룹니다. 복음적 관계를 이루고 증인적 관계를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하나님 나라에 기초가 무엇으로 이루어질까요? 이것은 주님의 교훈을 통해서 말씀하면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가장 기본적인 것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 것입니다.” 다 잘 아는 말씀이죠?
“회개하라! 그리고 복음을 믿으라!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우리의 신앙과 신앙의 중심에 그 특징은 한마디로 말하면 회개라고 하는 것입니다. 회개를 다 잘 아시는 말씀으로 이해하시기 때문에 다시 설명할 필요는 없겠죠. 회개하고 하는 말은 제자리로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우리들이 회개하고 하는 얘기 속에는 하나님 앞에서의 죄의 깨 닿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 주여 나는 죄인 이로 소이다.” 자기의 죄를 깨 닿았을 때 심각하게 내적인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그리고 거기 자연스럽게 믿음이 따라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깐 회개하는 자는 믿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믿고 회개하는 것, 회개하고 믿는 것입니다. 이 회개를 때때로 개인적으로 합니다. 이 회개를 어떤 때는 집단적으로 합니다. 온 교회가 모여 회개합니다. 온 나라가 모여 회개합니다. 집단적으로도 회개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회개에는 두 가지 회개가 있습니다. 하나는 즉각적이고 급진적인 회개가 있습니다. 이것을 친의를 위한 회개라 거듭나는 회개라 말하는 것입니다. 참된 회개는 그 속에 친의와 성화를 갖는데 바로 친의를 얻는 회개가 일생에 단 한번 일어나는 회개입니다. 내가 죄를 회개하고 주님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 한번으로 족한 것입니다. 그 다음에 우리는 두 번째 회개를 하게 됩니다. 이 회개는 반복됩니다. 자꾸만 반복됩니다. 주일날 우리가 와서 참회의 기도를 드리죠 또 반복되죠 또 반복되죠 이것은 우리들이 같은 죄를 또 범하고 같은 죄를 또 범하는 그런 것이 아니라 바로 회개의 신앙에 그 역동성이 그 힘이 우리에게 생겨서 우리의 일생에 걸쳐서 생애에 걸쳐서 지속적으로 나타내는 갱신을 회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통해서 우리는 성화에 이른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회개를 통해서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가능한 두 가지 순간이 주어지는데 하나는 친의요, 하나는 성화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 “구원이라는 한가지 행위에 두 순간을 갖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어쨌든 하나님의 나라에 관계되어 생각할 때 지금 말씀드린 것처럼 가장 기본적으로 개인적이든지 집단적이든지 하나님의 친의를 위해서든지 성화를 위해서든지 우리에게는 회개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회개합니다. 말씀 앞에서 회개합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 속에 또 교회 속에 우리의 공동체 속에 우리의 가정에 하나님의 나라를 가져오게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은 믿음과 직결되는 것입니다.
독일에서 경건주의 운동을 했던 헤르만 프랑케 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분은 요한복음 20장 31절 말씀을 가지고 설교준비를 하게 되었습니다. 요한복음 20장 31절에는 “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하는 말씀입니다. 그는 여러 번 설교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 과연 그리스도임에 믿게 하려함이라.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라. 믿고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라.” 이분은 설교를 준비하다가 멈추었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에게 묻게 되었습니다. “ 나는 정말 믿는가? 나는 과연 믿는가?”
여러분 정말 믿습니까? “ 나는 과연 믿는가?” 그리고 그분은 자기 속에 믿음이 없음을 깨닫고 회개하고 다시 믿음을 가지고 다시 경건운동에 힘썼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일은 정말 회개했는가? 정말 믿는가? 정말 회개한 체험, 내적 변화가 내게 있는가? 우리는 깊이 성찰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역사는 자기 성찰을 요구하고 하나님은 회개를 요구하신다.” 역사와 사건을 통해서 자기를 돌아보게 합니다. 그래서 역사는 자기 성찰을 요구하지만 하나님은 회개를 요구하신다는 것입니다. 회개는 하나님 나라의 시작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열려지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우리에게 오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에 가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소유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회개한 우리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나라의 일이라고 하는 것이 어떤 의미를 주는 것인가? 그것은 내가 하나님 나라의 확신을 가지고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존재한다라는 의미를 주는 것입니다. 이제는 세상나라 백성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존재한다라는 것은 하나님의 다스림 하나님의 섭리를 받아드리고 그 다스림 속에서 내가 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다스릴까요?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으로 다스려주십니다. 생명을 구원하셔서 다스려 주신다는 것입니다. 공로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자격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돈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종 되었던 애굽땅에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심으로 다스립니다. 그러니깐 구원의 은총으로 다스리고 그리고 그 다음에 우리에게 의로운 은총으로 다스리십니다. 건져낸 애굽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에 와서 십계명이라고 하는 의로운 은총을 주심으로 저들을 다스리십니다.
우리를 죄로 다스리시지 않습니다. 불의로 다스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요구하십니다. “온전 하라. 거룩 하라. 스스로 성결케 하라.” 이것이 하나님의 의로운 은총으로 다스려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신령한 복을 주심으로 우리를 다스리십니다. 그것을 갖다가 우리는 보통 “축복해주세요. 복 주세요.” 이렇게 얘기합니다. 신령한 은혜. 하나님이 우리에게 각양 좋은 은사를 주십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주십니다.
주님은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 부모가 악해도 자식에게도 좋은 것을 주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 그 분은 그 아버지께서 자기백성에게 그 왕께서 자기백성에게 좋은 것을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다스림을 받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는 이렇게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다스림 속에 존재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희망입니다. 이것이 절망과 좌절과 허탈 속에서 희망을 갖는 것입니다. 위기 속에서 바른 기회를 갖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존재하지 못하면 거기 희망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움직여야 된다라고 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존재하기 위해서 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것을 어떤 분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명사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동사적으로 살아야 한다.” 이제는 움직여야 된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사람들 앞에서 자기를 움직여야 됩니다. 나타내야 합니다. 그래서 신앙의 백성임을 증거 해야 합니다. 여러분 오늘 내가 이 세상에서 살아갈 때 신앙인의 사람으로써 어떻게 증거 되고 있습니까? 혹은 우리의 분노와 시기와 다툼과 미움과 쾌락과 자기도취와 이런 것들입니까? 정말 우리들에게는 “나는 하나님의 사람이다.”라고 하는 확신과 그 다음에 이렇게 하는 것을 보고 “내가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하는 것을 아시오” 하는 이러한 믿음의 능력이 우리에게 있습니까?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의 백성은 그 하나님의 사람으로 움직여야 됩니다. 움직이지 못하면 죽는 것입니다. 가 쓴 삼위일체 건강비결에 보면 이렇게 얘기하고 있습니다. “100미터를 자기 힘으로 걸을 수 있는 사람은 건강이 회복될 희망이 있다.” 그러나 자기 힘으로 100미터도 움직이지 못하면 어떻하겠는가?
여러분 말씀으로 믿음으로 기도로 움직이는 사람은 봉사로 섬김으로 움직이는 사람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이 세상에서 꿈을 가질 수 있습니다. 움직이는 사람은 예루살렘에서 유대로 사마리아로 땅끝으로 갈 수 있습니다. 움직이는 사람은 역사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움직이는 사람은 로마로 갈 수 있습니다. 행동하는 꿈, 움직일 수 있는 꿈을 갖고 움직여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움직임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증거 되어야 한다는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나라의 일이 우리와 밀접한 관계를 이루는 것입니다. 지난주간에 제가 중국의 선교지를 갔다 왔습니다. 오다가 심향에서 거기에서 일하고 있는 선교사 몇 가정과 함께 같이 식사를 했습니다. 그러면서 잠깐 그들을 위로하기도 하고 격려했습니다. 그 중에 한 분이 이제 아직도 유학생 신분으로 가 있습니다. 중국은 아직도 정식으로 선교사 비자가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런 얘기를 들었어요 요즘 중국이 형편이 좋지 않는데 그 학교에 가서 늘 지내는데 그날 따라 어떤 중국 학생이 자기에게 점심을 사주겠다고 그랬다는 거예요. 그래서 같이 점심을 먹게 되었답니다. 점심을 먹고 같이 마주 앉았습니다. 이 선교사님은 기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눈을 감고 기도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앞에 있는 중국 친구가 이렇게 말을 하더랍니다. “야 왜 밥을 놓고 눈을 감냐?” 그래서 기도 한 거야 말하기도 그렇고 지금 신분을 모르니깐 그냥 와서 유학생인줄 아니까는 이렇게 얘기했다고 합니다. “어, 감사한 것이지.” “뭐가 감사하냐?” “너가 밥 사줘서 감사하고, 이렇게 좋은 친구를 만나서 감사하고, 또 농부들이 수고해서 곡식들을 만들어서 감사하고……” 그랬더니 그 사람이 먼저 이렇게 말하데요. “그럼 하나님께도 감사해야 되겠네?” 그래서 “어 하나님께도 감사해야지!” 그 친구가 물었습니다. “당신은 그리스도인이 아닌가?” “맞다. 나는 그리스도인 이다.” 그래서 그 친구가 그 이상 말하면 곤란하니까 “그냥 여기까지만 얘기하자!” 자, 여러분 우리가 기도한다고 하는 것이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는 모습으로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움직이는 것이 하나님나라의 일로 나타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거기 하나님 나라의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의 일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나라에 존재하는 것과 동시에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움직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어디까지 움직이는 것입니까?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향해서 계속해서 나아가고 달려가고 전진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얘기합니다. 오직 앞을 향하여 푯대를 향하여 면류관을 향하여 내가 나아가고 있다. 달려갈 길을 달리고 있다. 여러분의 일이 여러분의 길이 어떻습니까? 우리가 일 해 야죠, 일자릴 찾아 야죠, 돈을 벌어 야죠, 출세 해 야죠. 그런데 거기에 머물러 있습니까. 그 이상과 그 목적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그냥 먹고 살고 돈 벌고 일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거기에는 그 이상이 있습니다. 그 이상의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나라의 일이니까 나라 왕국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일로 관계 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해도 우리가 노래해도 우리가 먹어도 우리가 사나 죽으나 결국은 하나님 나라의 일과 관계되는가? 끊임없이 그렇게 되는가? 거기에 삶의 의미가 있습니다. 용기가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 추진력이 있습니다. 어둠을 몰아내고 죄악을 이기는 능력이 있습니다. 죽음을 살리는 희망적 능력이 있습니다. 평화를 이루고 땅끝까지 가는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우리에게 이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내 삶의 1번이 무엇인가? 주님은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라” 우리에게 중요한 일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1번은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과연 그렇습니까? 이것이 다르면 거기 고민이 있고 갈등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르면 비전이 달라집니다. 은혜가 달라집니다. 이것이 달라지면 분위기가 달라집니다. 전혀 다른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동상이몽’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갖는 하나님 나라의 일에 1번! 하나님 나라의 일, 주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나라, 주님께서 너희가 구해야 할 하나님의 나라, 그것이 우리에게 있어서 1번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게 1번이 아니면 다른 것은 다 별 볼일 없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에게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에게 1번을 둡니다. 그리고 가족에게 2번을 둡니다. 그래서 내가 먹고 쓰고 좀 남겨서 자식에게 남겨 주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좀더 여유가 있으면 그 다음 자식에게 물려주어야 된다고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 나라 일은 언제쯤 하면 좋겠습니까? 한 10번째쯤 하면 좋겠습니까? 하나님 나라 일이 점점 멀어지게 되겠죠. 여러분 부활하신 주님을 믿습니까? 그 하나님 앞에서 회계를 체험했습니까? 이제 하나님 나라일에 관심을 갖읍시다. 과연 내 생애, 우리 가정, 우리 교회 일에 있어서 1번이 하나님의 나라인가? 그리고 그 일에 관한 것인가? 그 일에 관한 고민인가? 아니면 사람들에 관계된 어떤 시시콜콜한 일들인가? 시비인가? 우린 이런 것들을 떨쳐버려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에 관심을 갖고 그 일을 위해서 꿈을 꾸고 그 일을 위해서 기도하고, 그리고 나아갈 때 바로 거기에서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 하나님을 찬양하게 됩니다. 그 하나님을 통해서 일어나는 위대한 역사와 변화를 바라보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 사는 것이 그 삶 속에서 의미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청년이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한 어르신에게 찾아가서 인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 아 축하하네~ 그래 부인은 어떤 사람인가?” 그랬더니 이 청년이 말했습니다. “ 제 아내 될 사람은 참 미인입니다.” 그랬더니 그 어르신이 동그라미를 쳤습니다. “왜 동그라미를 치세요?” “응 그냥 내가 치는 거야~” 또 이야기를 하다가
“학벌이 좋습니다.” “어~ 학벌이 좋아.” 그러면서 또 동그라미를 쳤습니다. “요리도 잘 합니다.” 동그라미를 쳤습니다. 뭐가 어떻습니다. 뭐가 어떻습니다. 동그라미를 쳤습니다.
한 대여섯 개를 쳤습니다. 나중에 “뭐 이제 또 할말 없나?” “아 참 제 아내가요 예수 잘 믿어요.” 그러니 그때서야 이분이 1을 쳤습니다. 그리고 동그라미를 세워보니깐 “어이구 자네 부인이 백만 불 짜리 네~” 1번이 생기니깐 백만 불이 된 것입니다. 1번이 없으면은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동그라미가 많아도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일, 주님께서 사십일 동안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셨습니다. 다른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일. 왜? 그것이 1번 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너희들에게 1번이다. 그래서 그들이 나가서 1번으로 외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외칩니다. 그래서 순교합니다. 그래서 환난을 받습니다. 그래서 쫓겨납니다. 이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 이렇게 충고한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일. 서두르지 마십시오! 그러나 분명한 목적과 가치를 위해서 해야 할 일을 발견했을 때에는 그 기회를 놓치지 마십시오! 어물어물 하다가는 참으로 해야 할 하나님 나라의 일을 흘려 보내게 되고 단 한번의 기회를 놓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일을 위해서 서두를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어물어물 하다가는 기회를 놓칠 수 있습니다. 그 기회는 단 한번의 기회라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 나라 일을 위해서 애쓰고 기도하고 고민하고 그 나라를 구하고 1번이 정해지면 그 다음에는 주님께선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 이 모든 것을 더하시리라.” 2번이 채워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1번을 채우시므로 2번과 3번과 4번이 수두룩하게 채워지는 이런 축복 은사가 우리 가운데 충만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