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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호목사 (토랜스한인연합감리교회)
하나님께서 한 아기를 처녀의 몸을 통해 이 땅에 보내시고자 하는 꿈을 가지셨는데, 보내심을 받을 아기의 이름은 “예수”이고, 그는 장성해서 “큰 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 “다윗의 왕위를 받을 자,” “야곱의 집에 왕노릇 할 자,” “영원한 왕국을 세울 자”가 되실 분이었습니다 (31-33).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가슴에 품고 있는 꿈을 이루기에 헌신해 줄 자를 찾으셨는데, 하나님께 발견하신 자가 갈릴리 나사렛이라는 동네에서 살고 있는 마리아라는 처녀였습니다. 하나님은 가브리엘 천사장을 마리아에게 보내어 하나님 자신의 꿈을 마리아에게 전달하셨고, 마리아는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리이다”라는 고백으로 하나님의 꿈에 동참할 결단을 했다는 것이 오늘 본문의 요약입니다.
우리는 흔히들 본문과 같은 말씀을 읽으면, “예수를 낳은 마리아는 참으로 좋겠다. 참으로 행복한 여인이다. 참으로 축복 받은 여인이다”고 생각하고 “어떻게 하면 나도 마리아처럼 행복한 사람, 축복된 사람이 될 수 없을까?” 생각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마리아에게 계시된 하나님의 위대한 꿈은 단지 마리아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 모두에게도 주어집니다. 물론 주어진 꿈이 동일하지는 않다는 차이는 있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위대한 꿈은 예수의 제자가 되는 것, 복음의 증인이 되는 것, 초대교회와 같은 사랑과 나눔이 있는 공동체를 이루는 것 등등 수 없이 많습니다. 이렇게 보면, “나는 나를 위해 계시된 하나님의 꿈을 받지 못했다”는 말은 옳지 않습니다. 우리 신앙인 모두에게는 하나님의 위대한 꿈이 계시 되었습니다. 문제는 계시된 꿈에 동참할 결단과 헌신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오늘 강림절 설교를 통하여,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꿈에 동참하기 위해 우리가 넘어서야 할 내적 갈등 문제에 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첫째, 하나님의 꿈에 동참하려면, 자기 비하 의식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의 꿈-처녀가 아기를 잉태하게 될 것-이라는 계시를 받은 자는 마리아입니다. 우리는 흔히 마리아를 생각할 때 “성모 마리아”라는 신격화된 존재를 생각하게 됩니다. 하지만 마리아는 신격화 할 위대한 존재는 아닙니다. 그녀는 신격화 될 정도로 위대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비천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녀가 살고 있는 동네는 갈릴리의 나사렛이라는 곳이었는데, 그 당시 갈릴리는 지극히 천한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던 곳이었고, 나사렛은 갈릴리 지역 중에서도 극히 평판이 좋지 못한 동네였습니다.
그 당시 갈릴리 나사렛에 대한 좋지 않는 평판을 잘 알려주는 예화가 요한복음 1:43-51에 소개 되고 있습니다. “나를 좇으라”는 예수님의 초청을 받고 예수님의 제자가 된 갈릴리 사람 빌립이 며칠 후 평소에 성경에 약속된 메시야를 기다리고 살아가고 있던 나다나엘이라는 친구를 찾아가서 말합니다.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 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45절). 그러자 나다나엘이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고 반문하지요. 바로 여기에서 그 당시 일반인들(갈릴리 사람들까지 포함)이 나사렛이라는 동네에 관해 어떠한 시각을 가지고 있는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나사렛이라는 동네에서는 도저히 인재가 나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걸출한 인재가 절대로 나올 수 없다는 두메산골 나사렛. 마리아는 바로 그러한 곳에서 살던 처녀였습니다. 그녀의 부모가 언제 돌아가셨는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가브리엘 천사장을 통하여 하나님의 꿈을 계시 받았을 때는 마리아는 이미 고아의 처지였고, 그녀의 나이는 13-15세 정도 되었습니다. 어려서 부모를 잃었던 마리아는 타인의 마구간이나 집안 청소하며 살아가던 불쌍한 소녀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바로 그러한 보잘 것 없는 곳에서 비천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마리아에게 천사장 가브리엘을 보내셨습니다.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28절) 인사하며 가브리엘 천사가 나타나자 마리아는 너무 당혹해졌습니다. “처녀가 그 말을 듣고 놀라 이런 인사가 어찌 함인고 생각하매” (29절). 이 구절은 “마리아가 가브리엘 천사의 인사를 들어보니 도무지 자신에게 합당한 인사가 아니기에 그저 어안이 벙벙했을 뿐이었다”는 의미입니다.
갈릴리 나사렛이라는 두메 산골에서 살고 있는 마리아에게 가브리엘 천사장을 보내셨던 하나님은 한결같이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임하십니다. 우리가 어떤 곳, 어떤 처지와 환경에서 살아가던지 간에 하나님께서는 동일하게 임하셔서 “나와 함께 꿈을 꾸며 살아가자”고 제안하십니다. 가브리엘 천사장의 입술을 통해 자신의 꿈을 마리아에게 계시하셨던 하나님은 성경을 통하여, 목회자, 혹은 신앙의 동료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꿈을 우리에게 계시해 주십니다.
혹시 우리 가운데 어떤 분은 “나에게도 가브리엘 천사장을 보내어 하나님의 꿈을 계시하여 주신다면 나 역시 마리아처럼 하나님의 꿈에 동참하겠습니다” 라고 부르짖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자신의 꿈으로 초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싶다면, 성경을 읽기 바랍니다. 성경을 깊게 묵상하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성령의 영감 가운데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꿈이 살아서 들려올 것입니다. 너무너무 분명하게. 도저히 거부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너무 강력하게.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28절)는 천사장 가브리엘의 인사는 특별한 사람에게나 들려오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성경 말씀을 깊게 묵상하노라면 그 누구나 들을 수 있는 음성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깊게 묵상하며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고자 하는 자를 찾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너무너무 열심히.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자신과 자신의 뜻을 계시해주기 위해 분주하신 하나님의 열심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둘째, 하나님의 꿈에 동참하려면, 처한 현실 속에서 생각하고 결정하려는 사고 방식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인사하며 다가온 가브리엘 천사장이 갈릴리 나사렛 두메 산골에서 조실부모하여 힘들게 살아가던 마리아에게 다음과 같은 놀라운 소식을 전해줍니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마리아야, 너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다. 보아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니, 너는 그의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는 위대하게 되고, 가장 높으신 분의 아들이라고 불릴 것이다. 주 하나님께서 그에게 그의 조상 다윗의 왕위를 주실 것이다. 그는 영원히 야곱의 집을 다스리고, 그의 나라는 무궁할 것이다” (30-33절. 표준 새번역). 갈릴리 나사렛에서 살아가고 있는 자신에게 하나님의 천사장을 통해 하나님의 인사가 전해진 것도 놀라운 일인데, 더욱 놀라운 것은 처녀인 자신의 몸이 아들을 잉태할 것이고, 그 아들이 높고 위대하신 하나님의 아들이고, 영원한 왕국을 세울 자가 될 것이라는 소식입니다. 정말로 귀가 막힐 소식입니다. 도저히 이해할 수도 없고, 상상할 수도 없는 소식입니다. “처녀인 내가 잉태를 한다고!” “그것도 높고 위대하신 하나님의 아들을 잉태한다고?” “그리고 그 아들이 영원한 왕국을 세울 것이라고?” 그래서 마리아는 양쪽 귀를 손바닥으로 막으며 “아니야! 아니야! 나 같은 비천한 자가 어떻게 그런 일을! 아니야! 아니야! 나 같은 처녀가 어떻게 그런 일이! 제발 더 이상 나에게 그런 말씀하지 마세요”라고 가브리엘 천사장에게 외치며 들려진 소식을 애써 부인하려 합니다. 왜? 갈릴리 나사렛 두메 산골에 살고 있는 마리아 자신은 그런 위대한 일을 이룰 자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마리아 자신은 지금껏 하고 있는 대로 타인의 마구간과 집안을 청소하며 살다가 좀더 나이 들면 결혼을 약속해 둔 사랑하는 사람 요셉과 결혼하여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자신이 간직할 꿈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가브리엘 천사장을 통해 전해진 하나님의 꿈엔 귀를 막고 정혼한 요셉과 결혼하여 단란한 가정을 꾸리는 꿈을 꾸며 살아가는 것이 마리아 자신에게 현실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래서 마리아는 이렇게 외치며 가브리엘 천사장에게 자신의 뜻을 분명하게 전달합니다.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34절).
깊은 말씀의 묵상 중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꿈을 알게 될 때, 혹은 설교자나 신앙의 동료를 통하여 하나님의 꿈을 전달 받을 때, 많은 신앙인들이 마리아처럼 자신이 처해 있는 현실을 보고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가능하겠습니까)?” 외치며 자신에게 들려온 하나님의 꿈이 자신에게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생각해 버립니다. 얼마나 많은 신앙의 사람들이 현실의 벽 속에 자신을 가두고 (자신의 꿈을 가두고) 살아가는지 모릅니다. 물론 우리는 현실을 부인하고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신앙인일 수록 현실을 분명하게 직시해야 합니다. 하지만 자신에게 계시된 하나님의 꿈을 현실의 벽 속에 쳐넣어 두어서는 아니 됩니다. 자신에게 계시된 하나님의 꿈을 이루기 위해 지금 처해 있는 현실을 넘어설 방도를 찾는 게 현명합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게 아닙니까? 그래서 성경이나 신앙서적을 읽으며 지혜를 찾는 게 아닙니까? 그래서 목회자나 신앙의 동료를 찾아 지혜를 구하는 게 아닙니까?
우리에게 꿈을 계시해 주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계시 받은 꿈을 이룰 수 있도록 또한 환경을 조성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계시 받은 꿈에 동참하겠노라 결단하며 발걸음을 옮겨 놓게 된다면. “꿈에 동참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다면 그 때에 가서 그 꿈에 동참하겠다” 하는 분들로 상당히 많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성경에 소개된 하나님께서 사람을 선택해서 쓰는 방법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 자신의 꿈에 동참하겠다 결단하며 먼저 발걸음을 내딛길 원하십니다. 성경에 언급된 하나님의 사람들은 한결같이 하나님의 꿈에 헌신할 결단을 하고 미지의 세계를 향해 믿음으로 발걸음을 내디뎠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교우 여러분, 이 말씀을 곰곰히 생각하며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사람들을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셋째, 하나님의 꿈에 동참하려면, 자신이 깨달은 지적 혹은 능력의 한도 내에서 일을 계획하고 추진하려는 사고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비천한 삶을 살아가는 자신의 현실과 자신이 처녀임을 내세우며 들려온 하나님의 꿈을 받아들이길 거부하는 마리아에게 가브리엘 천사장은 인내하면서 마리아에게 이렇게 설명해 줍니다.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가장 높으신 분의 능력이 너를 감싸 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한 분이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릴 것이다. 보아라, 네 친척 엘리사벳도 늙어서 임신하였다. 임신하지 못하는 여자라는 소문이 났으나, 그는 임신한 지 벌써 여섯이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35-37절. 표준 새번역). 계속 이어지는 천사장의 말을 듣는 가운데 마리아의 마음 속에 “그렇다면 내가 하나님의 꿈에 동참할 수 있겠다”는 믿음(자신감)이 생기게 되었고, 결국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리이다” (38절) 말로 하나님의 꿈에 동참할 결단을 고백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꿈에 동참하기 어려운 이유는 처한 현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믿음이 부족해서 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느니라” (롬 10:17). 하나님의 말씀을 자꾸 읽고 또 읽노라면 믿음이 커져 갑니다. 믿음이 커지면, 하나님의 꿈에 대한 이해와 헌신이 커지게 되지요.
마리아가 도저히 자신은 하나님의 꿈에 동참할 수 없다고 고집하고 있을 때, 그녀는 자신이 처한 환경을 너무나 잘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가브리엘 천사로부터 말씀을 듣는 도중 새롭게 깨달은 것은 자신에게 계시된 하나님의 꿈은 마리아 자신의 능력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과 그것은 절대적으로 하나님(하나님의 성령)께서 친히 이루어가실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가브리엘 천사장으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마리아는 처한 현실에 자신을 내어 맡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의 손에 자신을 내어 맡기는 것이 진정 현명한 삶의 자세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말씀을 매듭 지으며 말씀 드립니다. “마리아”는 헬라식 이름이고 히브리식으로는 “마리암(Mariam)인데, 그 뜻은 “쓴 몰약”입니다. “마리아”라는 이름의 원 뜻이 지니고 있듯 마리아의 인생은 그야 말로 쓰디쓴 몰약과 같은 인생이었습니다. 마리아가 자신에게 계시된 하나님의 꿈을 받아 들이기 전에는. 하지만 그녀가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리이다” 하며 하나님의 꿈을 받아 들인 이후 그녀의 생애는 놀라우리만치 가치 있는 인생이 됩니다. 오늘 설교를 위해 선택한 본문 이후 구절을 보면, 그 사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하게 되는데, 엘리사벳의 태중에 있던 아기가 뛰어 놀게 되고, 엘리사벳은 성령의 충만함 가운데 이렇게 말하면서 마리아를 반갑게 맞이합니다. “내 주의 어머니께서 내게 오시다니, 이것이 어찌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그대의 문안하는 말이 내 귀에 들어왔을 때에, 내 태 속에 있는 아기가 기뻐서 뛰놀았습니다. 주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질 줄 믿은 여자는 행복합니다” (눅 1:42-45).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인생의 변화를 시도해 보지 않겠습니까? “나는 너무 늦었다. 처한 환경이 나로 하여금 그렇게 할 수 없게 한다”고 말하지 말고, 비록 천한 몸이지만, 비록 처녀의 몸이지만, 비록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뜻하신다면,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이루어지리이다” 고백하며 “하나님의 뜻에 내 삶을 내어 맡기겠습니다” 고백하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하나님의 성령께서 하나님의 뜻에 삶을 내어맡기는 우리에게 임하실 것이며 그분의 능력으로 우리를 감싸주실 것입니다.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가장 높으신 분의 능력이 너를 감싸 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한 분이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릴 것이다” (35절). 강림절입니다. 나는 우리 모두가 이 강림절 기간 하나님의 아들을 잉태하는 축복, 성경을 통해 계시된 하나님의 꿈을 가슴에 품는 축복을 누릴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 한 아기를 처녀의 몸을 통해 이 땅에 보내시고자 하는 꿈을 가지셨는데, 보내심을 받을 아기의 이름은 “예수”이고, 그는 장성해서 “큰 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 “다윗의 왕위를 받을 자,” “야곱의 집에 왕노릇 할 자,” “영원한 왕국을 세울 자”가 되실 분이었습니다 (31-33).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가슴에 품고 있는 꿈을 이루기에 헌신해 줄 자를 찾으셨는데, 하나님께 발견하신 자가 갈릴리 나사렛이라는 동네에서 살고 있는 마리아라는 처녀였습니다. 하나님은 가브리엘 천사장을 마리아에게 보내어 하나님 자신의 꿈을 마리아에게 전달하셨고, 마리아는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리이다”라는 고백으로 하나님의 꿈에 동참할 결단을 했다는 것이 오늘 본문의 요약입니다.
우리는 흔히들 본문과 같은 말씀을 읽으면, “예수를 낳은 마리아는 참으로 좋겠다. 참으로 행복한 여인이다. 참으로 축복 받은 여인이다”고 생각하고 “어떻게 하면 나도 마리아처럼 행복한 사람, 축복된 사람이 될 수 없을까?” 생각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마리아에게 계시된 하나님의 위대한 꿈은 단지 마리아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 모두에게도 주어집니다. 물론 주어진 꿈이 동일하지는 않다는 차이는 있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위대한 꿈은 예수의 제자가 되는 것, 복음의 증인이 되는 것, 초대교회와 같은 사랑과 나눔이 있는 공동체를 이루는 것 등등 수 없이 많습니다. 이렇게 보면, “나는 나를 위해 계시된 하나님의 꿈을 받지 못했다”는 말은 옳지 않습니다. 우리 신앙인 모두에게는 하나님의 위대한 꿈이 계시 되었습니다. 문제는 계시된 꿈에 동참할 결단과 헌신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오늘 강림절 설교를 통하여,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꿈에 동참하기 위해 우리가 넘어서야 할 내적 갈등 문제에 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첫째, 하나님의 꿈에 동참하려면, 자기 비하 의식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의 꿈-처녀가 아기를 잉태하게 될 것-이라는 계시를 받은 자는 마리아입니다. 우리는 흔히 마리아를 생각할 때 “성모 마리아”라는 신격화된 존재를 생각하게 됩니다. 하지만 마리아는 신격화 할 위대한 존재는 아닙니다. 그녀는 신격화 될 정도로 위대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비천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녀가 살고 있는 동네는 갈릴리의 나사렛이라는 곳이었는데, 그 당시 갈릴리는 지극히 천한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던 곳이었고, 나사렛은 갈릴리 지역 중에서도 극히 평판이 좋지 못한 동네였습니다.
그 당시 갈릴리 나사렛에 대한 좋지 않는 평판을 잘 알려주는 예화가 요한복음 1:43-51에 소개 되고 있습니다. “나를 좇으라”는 예수님의 초청을 받고 예수님의 제자가 된 갈릴리 사람 빌립이 며칠 후 평소에 성경에 약속된 메시야를 기다리고 살아가고 있던 나다나엘이라는 친구를 찾아가서 말합니다.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 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45절). 그러자 나다나엘이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고 반문하지요. 바로 여기에서 그 당시 일반인들(갈릴리 사람들까지 포함)이 나사렛이라는 동네에 관해 어떠한 시각을 가지고 있는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나사렛이라는 동네에서는 도저히 인재가 나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걸출한 인재가 절대로 나올 수 없다는 두메산골 나사렛. 마리아는 바로 그러한 곳에서 살던 처녀였습니다. 그녀의 부모가 언제 돌아가셨는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가브리엘 천사장을 통하여 하나님의 꿈을 계시 받았을 때는 마리아는 이미 고아의 처지였고, 그녀의 나이는 13-15세 정도 되었습니다. 어려서 부모를 잃었던 마리아는 타인의 마구간이나 집안 청소하며 살아가던 불쌍한 소녀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바로 그러한 보잘 것 없는 곳에서 비천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마리아에게 천사장 가브리엘을 보내셨습니다.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28절) 인사하며 가브리엘 천사가 나타나자 마리아는 너무 당혹해졌습니다. “처녀가 그 말을 듣고 놀라 이런 인사가 어찌 함인고 생각하매” (29절). 이 구절은 “마리아가 가브리엘 천사의 인사를 들어보니 도무지 자신에게 합당한 인사가 아니기에 그저 어안이 벙벙했을 뿐이었다”는 의미입니다.
갈릴리 나사렛이라는 두메 산골에서 살고 있는 마리아에게 가브리엘 천사장을 보내셨던 하나님은 한결같이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임하십니다. 우리가 어떤 곳, 어떤 처지와 환경에서 살아가던지 간에 하나님께서는 동일하게 임하셔서 “나와 함께 꿈을 꾸며 살아가자”고 제안하십니다. 가브리엘 천사장의 입술을 통해 자신의 꿈을 마리아에게 계시하셨던 하나님은 성경을 통하여, 목회자, 혹은 신앙의 동료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꿈을 우리에게 계시해 주십니다.
혹시 우리 가운데 어떤 분은 “나에게도 가브리엘 천사장을 보내어 하나님의 꿈을 계시하여 주신다면 나 역시 마리아처럼 하나님의 꿈에 동참하겠습니다” 라고 부르짖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자신의 꿈으로 초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싶다면, 성경을 읽기 바랍니다. 성경을 깊게 묵상하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성령의 영감 가운데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꿈이 살아서 들려올 것입니다. 너무너무 분명하게. 도저히 거부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너무 강력하게.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28절)는 천사장 가브리엘의 인사는 특별한 사람에게나 들려오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성경 말씀을 깊게 묵상하노라면 그 누구나 들을 수 있는 음성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깊게 묵상하며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고자 하는 자를 찾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너무너무 열심히.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자신과 자신의 뜻을 계시해주기 위해 분주하신 하나님의 열심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둘째, 하나님의 꿈에 동참하려면, 처한 현실 속에서 생각하고 결정하려는 사고 방식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인사하며 다가온 가브리엘 천사장이 갈릴리 나사렛 두메 산골에서 조실부모하여 힘들게 살아가던 마리아에게 다음과 같은 놀라운 소식을 전해줍니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마리아야, 너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다. 보아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니, 너는 그의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는 위대하게 되고, 가장 높으신 분의 아들이라고 불릴 것이다. 주 하나님께서 그에게 그의 조상 다윗의 왕위를 주실 것이다. 그는 영원히 야곱의 집을 다스리고, 그의 나라는 무궁할 것이다” (30-33절. 표준 새번역). 갈릴리 나사렛에서 살아가고 있는 자신에게 하나님의 천사장을 통해 하나님의 인사가 전해진 것도 놀라운 일인데, 더욱 놀라운 것은 처녀인 자신의 몸이 아들을 잉태할 것이고, 그 아들이 높고 위대하신 하나님의 아들이고, 영원한 왕국을 세울 자가 될 것이라는 소식입니다. 정말로 귀가 막힐 소식입니다. 도저히 이해할 수도 없고, 상상할 수도 없는 소식입니다. “처녀인 내가 잉태를 한다고!” “그것도 높고 위대하신 하나님의 아들을 잉태한다고?” “그리고 그 아들이 영원한 왕국을 세울 것이라고?” 그래서 마리아는 양쪽 귀를 손바닥으로 막으며 “아니야! 아니야! 나 같은 비천한 자가 어떻게 그런 일을! 아니야! 아니야! 나 같은 처녀가 어떻게 그런 일이! 제발 더 이상 나에게 그런 말씀하지 마세요”라고 가브리엘 천사장에게 외치며 들려진 소식을 애써 부인하려 합니다. 왜? 갈릴리 나사렛 두메 산골에 살고 있는 마리아 자신은 그런 위대한 일을 이룰 자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마리아 자신은 지금껏 하고 있는 대로 타인의 마구간과 집안을 청소하며 살다가 좀더 나이 들면 결혼을 약속해 둔 사랑하는 사람 요셉과 결혼하여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자신이 간직할 꿈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가브리엘 천사장을 통해 전해진 하나님의 꿈엔 귀를 막고 정혼한 요셉과 결혼하여 단란한 가정을 꾸리는 꿈을 꾸며 살아가는 것이 마리아 자신에게 현실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래서 마리아는 이렇게 외치며 가브리엘 천사장에게 자신의 뜻을 분명하게 전달합니다.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34절).
깊은 말씀의 묵상 중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꿈을 알게 될 때, 혹은 설교자나 신앙의 동료를 통하여 하나님의 꿈을 전달 받을 때, 많은 신앙인들이 마리아처럼 자신이 처해 있는 현실을 보고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가능하겠습니까)?” 외치며 자신에게 들려온 하나님의 꿈이 자신에게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생각해 버립니다. 얼마나 많은 신앙의 사람들이 현실의 벽 속에 자신을 가두고 (자신의 꿈을 가두고) 살아가는지 모릅니다. 물론 우리는 현실을 부인하고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신앙인일 수록 현실을 분명하게 직시해야 합니다. 하지만 자신에게 계시된 하나님의 꿈을 현실의 벽 속에 쳐넣어 두어서는 아니 됩니다. 자신에게 계시된 하나님의 꿈을 이루기 위해 지금 처해 있는 현실을 넘어설 방도를 찾는 게 현명합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게 아닙니까? 그래서 성경이나 신앙서적을 읽으며 지혜를 찾는 게 아닙니까? 그래서 목회자나 신앙의 동료를 찾아 지혜를 구하는 게 아닙니까?
우리에게 꿈을 계시해 주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계시 받은 꿈을 이룰 수 있도록 또한 환경을 조성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계시 받은 꿈에 동참하겠노라 결단하며 발걸음을 옮겨 놓게 된다면. “꿈에 동참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다면 그 때에 가서 그 꿈에 동참하겠다” 하는 분들로 상당히 많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성경에 소개된 하나님께서 사람을 선택해서 쓰는 방법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 자신의 꿈에 동참하겠다 결단하며 먼저 발걸음을 내딛길 원하십니다. 성경에 언급된 하나님의 사람들은 한결같이 하나님의 꿈에 헌신할 결단을 하고 미지의 세계를 향해 믿음으로 발걸음을 내디뎠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교우 여러분, 이 말씀을 곰곰히 생각하며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사람들을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셋째, 하나님의 꿈에 동참하려면, 자신이 깨달은 지적 혹은 능력의 한도 내에서 일을 계획하고 추진하려는 사고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비천한 삶을 살아가는 자신의 현실과 자신이 처녀임을 내세우며 들려온 하나님의 꿈을 받아들이길 거부하는 마리아에게 가브리엘 천사장은 인내하면서 마리아에게 이렇게 설명해 줍니다.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가장 높으신 분의 능력이 너를 감싸 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한 분이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릴 것이다. 보아라, 네 친척 엘리사벳도 늙어서 임신하였다. 임신하지 못하는 여자라는 소문이 났으나, 그는 임신한 지 벌써 여섯이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35-37절. 표준 새번역). 계속 이어지는 천사장의 말을 듣는 가운데 마리아의 마음 속에 “그렇다면 내가 하나님의 꿈에 동참할 수 있겠다”는 믿음(자신감)이 생기게 되었고, 결국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리이다” (38절) 말로 하나님의 꿈에 동참할 결단을 고백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꿈에 동참하기 어려운 이유는 처한 현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믿음이 부족해서 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느니라” (롬 10:17). 하나님의 말씀을 자꾸 읽고 또 읽노라면 믿음이 커져 갑니다. 믿음이 커지면, 하나님의 꿈에 대한 이해와 헌신이 커지게 되지요.
마리아가 도저히 자신은 하나님의 꿈에 동참할 수 없다고 고집하고 있을 때, 그녀는 자신이 처한 환경을 너무나 잘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가브리엘 천사로부터 말씀을 듣는 도중 새롭게 깨달은 것은 자신에게 계시된 하나님의 꿈은 마리아 자신의 능력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과 그것은 절대적으로 하나님(하나님의 성령)께서 친히 이루어가실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가브리엘 천사장으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마리아는 처한 현실에 자신을 내어 맡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의 손에 자신을 내어 맡기는 것이 진정 현명한 삶의 자세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말씀을 매듭 지으며 말씀 드립니다. “마리아”는 헬라식 이름이고 히브리식으로는 “마리암(Mariam)인데, 그 뜻은 “쓴 몰약”입니다. “마리아”라는 이름의 원 뜻이 지니고 있듯 마리아의 인생은 그야 말로 쓰디쓴 몰약과 같은 인생이었습니다. 마리아가 자신에게 계시된 하나님의 꿈을 받아 들이기 전에는. 하지만 그녀가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리이다” 하며 하나님의 꿈을 받아 들인 이후 그녀의 생애는 놀라우리만치 가치 있는 인생이 됩니다. 오늘 설교를 위해 선택한 본문 이후 구절을 보면, 그 사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하게 되는데, 엘리사벳의 태중에 있던 아기가 뛰어 놀게 되고, 엘리사벳은 성령의 충만함 가운데 이렇게 말하면서 마리아를 반갑게 맞이합니다. “내 주의 어머니께서 내게 오시다니, 이것이 어찌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그대의 문안하는 말이 내 귀에 들어왔을 때에, 내 태 속에 있는 아기가 기뻐서 뛰놀았습니다. 주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질 줄 믿은 여자는 행복합니다” (눅 1:42-45).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인생의 변화를 시도해 보지 않겠습니까? “나는 너무 늦었다. 처한 환경이 나로 하여금 그렇게 할 수 없게 한다”고 말하지 말고, 비록 천한 몸이지만, 비록 처녀의 몸이지만, 비록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뜻하신다면,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이루어지리이다” 고백하며 “하나님의 뜻에 내 삶을 내어 맡기겠습니다” 고백하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하나님의 성령께서 하나님의 뜻에 삶을 내어맡기는 우리에게 임하실 것이며 그분의 능력으로 우리를 감싸주실 것입니다.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가장 높으신 분의 능력이 너를 감싸 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한 분이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릴 것이다” (35절). 강림절입니다. 나는 우리 모두가 이 강림절 기간 하나님의 아들을 잉태하는 축복, 성경을 통해 계시된 하나님의 꿈을 가슴에 품는 축복을 누릴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