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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봉희목사 (지구촌교회-서울)
어떤 법관의 아들이 자동차를 몰고 거리를 신나게 달리다가 교통사고를 내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그 청년은 법정에 끌려가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법정에 와보니까 담당 판사가 바로 자기 아버지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흠, 우리 아버지야 나를 용서해주겠지''하고 자기 아버지를 쳐다보았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본 체도 않고 엄숙한 얼굴로 한참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이제부터 재판을 시작하겠습니다.'' ''피고의 이름을 대시요.''하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철없는 그 아들이, ''아버지 ! 저예요, 저!'' 하고 말했습니다. 이 아버지는 들은 척도 안하고 ''여기는 법정입니다. 사사로운 말은 하지 못합니다. 어서 피고의 이름을 대시오.'' 하고 호통을 치는 바람에 아들은 하는 수 없이 ''예, OOO입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피고의 주소는 ?'' ''아니, 아버지 주소하고 똑같아요'' 그랬더니 그 아버지는 다시 호통을 치면서 ''어서 주소를 대시요''라고 다그치셨습니다. 할 수 없이 주소를 다 댔습니다. 그리고 조서를 꾸며서 낭독한 후에 판결을 내렸습니다. "벌금 500만원"
그때 아들은 너무나도 상심하고 허탈하여 땅바닥에 주저앉아 아버지의 냉엄한 처사에 서글퍼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어느새 아버지는 법복을 벗고 깨끗한 신사복으로 갈아입으시고 다정한 아버지의 모습으로 찾아오셨습니다.
''아들아, 너무 지나치다고 생각되느냐?'' ''나는 이 나라의 법과 질서를 지켜야 될 법관인데 내 아들이라고 사사로운 인정에 끌려 법을 어길 수가 있겠느냐?'' 하면서 벌금을 물 수 있도록 500만원을 마련하여 주셨습니다.
''자, 이것을 가지고 교통계에 가서 벌금을 내면 너는 나갈 수 있다'' 그제서야 아들은 아버지의 깊으신 뜻을 깨달았습니다. 법을 살리기 위해서 아버지가 재판도 하고, 벌금도 내주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죄 값으로 멸망 받을 수밖에 없었는데, 우리 하나님은 공의도 살리고, 사랑도 살리기 위하여 죄 없으신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신 것입니다.
중세기의 위대한 신학자 안셀무스는 ''Cur Deus Homo''에서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의 방정식을 잘 설명합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의 교차점인 것입니다.
미국 선교사들이 알래스카에서 에스키모인들에게 전도할 때 "예수님은 착한 사냥꾼과 같으시다"는 비유를 즐겨 사용하였습니다.
옛날 에스키모인들이 거대한 알래스카 곰을 사냥할 때 그들 중의 한 사람은 희생을 각오해야만 했습니다. 즉 사냥꾼 중의 한 사람은 곰 앞에 바싹 다가가서 곰을 화나게 합니다. 그러면 곰은 두 발로 서서 앞발을 벌리고 가슴을 노출시킵니다. 그 순간 창이나 활로 정확하게 심장을 명중시켜야 곰을 잡습니다. 이때 치명상을 입은 곰은 자기 앞에 다가와 있는 사냥꾼을 덮쳐서 죽입니다. 그리고 나서 곰 자신도 얼마 못 가서 쓰러지고 맙니다.
이처럼 곰을 잡기 위해서 자기 목숨을 희생시키는 사람을 『착한 사냥꾼』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십자가를 지시므로 자신의 생명을 희생하셨습니다.
금세기 위대한 신학자였던 Bowman 박사가 인도 캘커타에서 선교할 때 한 노파가 길에서 이렇게 얘기하는 것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 노인과 한 동네의 친구였던 사람이 예수를 믿는 자기 친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우리가 믿는 힌두교의 많은 남신과 여신들로 만족할 수 없었니?''
노인의 대답이 멋집니다. "그들 가운데 나를 위해 죽은 신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야."
할렐루야! 그렇습니다. 예수님만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사랑의 구세주이십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본질적 핵심입니다. 공자, 맹자, 석가, 마호메트도 십자가를 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만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사랑의 구주이십니다.
1. 나의 십자가를 대신 지신 예수님
밤새도록 혹독한 고문을 당하신 예수님은 아침 9시에 사형언도를 받고 곧바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게 됩니다. 역사가들에 의하면 그 당시 십자가는 180근이나 되는 통나무 십자가였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지난밤에 심문을 받느라 한잠도 못 잔 생태에서 로마 군인들의 채찍과 발길질, 그리고 십자가의 무게에 못 이겨 자꾸만 쓰러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얼마나 무겁고 힘든 십자가였던가요? 그래서 로마 군인들은 건장하게 보이는 시몬이라는 한 흑인에게 강제로 십자가를 대신 지고 골고다 언덕까지 올라가도록 했습니다(21-22절).
여기서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십자가는 구레네 시몬이 대신 진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나의 십자가를 대신 지신 것입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이 대신 지셔야 할 것이 아니라, 내가 져야할 인생의 무거운 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내 인생의 그 무거운 모든 짐을 대신 져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일찍이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태복음 11:28)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내 인생의 모든 짐을 다 져주시는 예수님 앞에 모든 것을 맡기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왜 그처럼 주일 예배가 기다려집니까? 또 다시 내 인생의 모든 염려와 무거운 짐을 십자가 밑에 내려놓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내 인생을 주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내 인생의 모든 짐을 십자가 밑에 내려놓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무거운 짐을 나 홀로 지고 견디다 못해 쓰러질 때, 불쌍히 여겨 날 구원해줄 이, 은혜의 주님 오직 예수 내짐이 점점 무거워질 때 주 예수 앞에 아뢰일 때, 주께서 친히 날 구해 주사, 내대신 짐을 져주시네."
2. 나의 심판을 대신 받으신 예수님
오늘 본문의 내용은 아주 간단한 사건보도입니다.
예수님께서 아침 9시에 재판을 받으시고, 정오 12시에 십자가에 못 박히셔서, 오후 3시에 죽으신 재판보도입니다. 죄 없으신 예수님이 왜 이처럼 비참하게 죽으셔야 했던가요?
"나의 죄 때문입니다." "내가 받아야 할 심판을 대신 받으신 것입니다."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고, 그가 상처를 받은 것은 우리의 약함 때문이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써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매를 맞음으로써 우리의 병이 나았다.
우리는 모두 양처럼 길을 잃고 각기 제 갈 길로 흩어졌으나, 주님께서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지우셨다(담당시키셨습니다. 떠넘기신 것입니다).』(이사야 53:5-6)
그래서 예수님은 죄인의 모양으로 오셔서, 죄인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다가, 죄인의 신분으로 죽으신 것입니다. 죄인이 받아야 할 심판을 대신 받으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두 가지 점이 강조됩니다.
1) 죄인들 사이에 끼여, 죄인들과 함께 죽으십니다(27절).
완전히 죄인의 신분으로 낮아지셨음을 각인시켜 줍니다.
2)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쓸쓸하게 버림을 받습니다(33-34절).
우리를 대신하여 죄 없으신 아들이 심판 받으셔야 하는 사실 때문에 십자가 위에서 절규하는 아들의 애원을 외면하십니다. 그때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고 슬프셨으면 중천의 태양이 빛을 잃고 온 세상이 어두워졌겠습니까?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대로,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 범죄자 중 하나로 취급을 당하셨기 때문입니다"(이사야 53:15)
예수님은 왜 이처럼 혹독한 심판을 받으셔야만 했던가요?
『그는 세상 죄 지고 가는 어린양이셨기 때문입니다』(요한복음 1:29)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나의 죄에 대한 모든 심판을 다 당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하기만 하면 모든 죄를 다 용서받습니다. 그래서 누가는 의도적으로 십자가 곁의 두 죄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누가복음 23:39-43)
하나는 예수님을 믿지 않음으로 버림을 받고, 다른 하나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사랑을 받습니다.
하나는 회개하지 않음으로 정죄를 받고, 다른 하나는 회개하므로 사죄를 받습니다.
하나는 끝까지 믿음을 거부하므로 심판을 받아 지옥에 가고, 다른 하나는 비록 마지막 순간이지만 예수님을 영접하므로 구원을 받아 천국에 가게 됩니다.
파스칼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인간을 크게 두 부류로 구분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한 부류는 자기가 죄인이면서도 그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고, 또 한 부류는 자기가 죄인인 것을 절실히 깨닫고 있는 사람인데, 전자는 희망이 없는 죄인이고 후자는 희망이 있는 죄인으로, 인간은 이 두 가지로만 구분될 따름이라''고 말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당신은 어느 편에 서 있는 것 같습니까?
"희망이 없는 죄인, 희망이 있는 죄인"
십자가는 사람을 두 종류로만 구분합니다.
구원받지 못한 자와 구원받은 자,
용서받지 못한 자와 용서받은 자,
회개하지 않는 자와 회개하는 자,
거듭나지 못한 자와 거듭난 자,
정죄를 당하는 자와 사죄를 받는 자,
버림을 당하는 자와 사랑을 받는 자,
지옥에 떨어지는 자와 천국에 들어가는 자,
실락원의 인생과 복락원의 인생,
왼편에 선 자와 오른편에 선 자,
영벌에 들어갈 자와, 영생을 누릴 자!
골고다 언덕 예수님 곁에서 두 사람의 죄수가 함께 죽게 되었는데, 하나는 지옥으로 떨어지고 하나는 천국으로 올라갑니다.
두 여인이 맷돌을 가는데, 한 여인은 버림을 당하고 한 여인은 들림을 받습니다.
두 사람이 들에서 밭을 가는데, 한 사람은 버림을 당하고 한 사람은 휴거됩니다.
두 사람이 한 방에 누워서 잠을 자는데, 한 사람은 버림을 당하고 한 사람은 주님께로 올라갑니다.
너무나도 가까웠던 이 두 사람, 그러나 이제는 너무나 멀어지고 말았습니다. 이 만날 수 없는 차이! 이 좁힐 수 없는 간격! 다시는 번복될 수 없는 결정!
그때 십자가 곁에 섰던 한 죄수가 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하나, 예수님의 이름을 부른 것뿐이었습니다.
"예수님, 주님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누가복음 23:42)
예수님은 너무나 황홀하게 대답하십니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우리가 여기서 용기를 얻을 수 있는 것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1) 택함 받은 자는 반드시 구원받는다는 사실입니다.
아마도 십자가상에 여섯 시간 이상 매달려 있으면서 처음에는 두 강도가 함께 예수님을 비웃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은 나중에 회개하고 구원받습니다.
바울은 소아시아의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매우 생생한 전도체험을 합니다.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행 13:48)
2) 전도는 마지막까지 해야 합니다.
십자가 곁의 강도는 언제 구원받았습니까? 죽음의 문턱에서 구원받았습니다. 아침에는 마귀하고 조반을 먹었는데, 저녁에는 주님과 함께 낙원에서 식사를 즐깁니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우리 주만 믿으면 모두 구원 받으며 영생복락 면류관 확실히 받겠네''
3. 나의 구원을 완성하신 예수님
예수님께서 죽으실 때 신기한 일이 일어났습니다(37-38절). 예수님께서 한 번 큰 소리를 지르시고 돌아가시니, 지성소와 성소를 가로막고 있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쫙 찢어졌습니다.
여기 "큰 소리를 지르셨다"는 것은, 요한복음 19장 30절 말씀의 내용입니다.
"다 이루었다." 헬라어로는 한 마디입니다. 테텔레스타이.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신 것입니다. "다 이루었다."
이 말씀을 묵상하던 한 그리스도인 시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 날 그 하늘을 날던 새들은, 시커먼 먹구름으로 뒤덮인 하늘을 보며 다 이루었다고 조아립니다. 그 구름은 더 높이 있는 구름에게 외칩니다. 다 이루었다. 다시 그 구름들은 하나님의 보좌를 옹위하고 있는 영광의 그룹들을 향하여 외칩니다. 다 이루었다. 그리고 천사들은 하나님의 보좌 앞에 엎드려 말합니다. 아버지 하나님이시여! 당신의 보내심을 받은 독생자 예수는 범죄한 인간을 구속하시기 위하여 방금 그 십자가에서 붉은 피를 쏟으시므로 인류의 구원을 다 이루셨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는 2천년 전 예수님이 비참하게 지셨던 십자가를 통하여 너무나 황홀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특히 요한복음 3장 16절에서는『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독생자이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대신 달아 죽이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이런 놀라운 확신을 표명합니다.
"참으로 이상하고도 놀라운 일이다! 만약 내가 창조주 하나님이었다면 벌써 이 세상을 심판해버렸을 텐데, 이상하게도 하나님은 나를 이처럼 사랑하시다니? 그분은 사랑하시는 것도 마치 나 한 사람밖에는 사랑할 사람이 없는 것처럼 날 사랑하시는도다. 아니 내가 이 세상에 남아 있는 유일한 생존자라고 할지라도 그분은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목숨을 버리셨을 것이다."
M. Luther는 요한복음 3장 16절을 『축소된 복음(Gospel in miniature)』이라고 합니다.
복음의 에센스 중의 본질입니다. 이 짧은 말씀에는 『최고(greatest)』들만이 등장합니다.
"하나님이"… 최고의 애인(greatest lover)입니다.
"세상을"… 최고의 숫자(greatest number)입니다. 민족과 인종을 다 포함합니다.
"이처럼 사랑하사"… 최고의 수준(greatest degree)입니다. 자기 생명을 희생시킨 사랑입니다.
"독생자를"… 최고의 선물(greatest gift)입니다.
"주셨으니"… 최고의 행동(greatest act)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다 주신 것입니다.
"누구든지"… 최고의 초청(greatest invitation)입니다. 제한 없는 우주적 초청입니다.
"저를 믿는 자마다"… 최고의 단순함(greatest simplicity)입니다. 믿기만 하면 구원받습니다.
"멸망하지 않고"… 최고의 해방(greatest deliverance)입니다. 죽어야할 죄수가 석방된 것입니다
"영생을 얻으리라"… 최고의 소유(greatest possession)입니다. 영생, 그 이상의 재산은 없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이 지셨던 비참한 십자가를 통하여 너무나 황홀한 구원의 은총을 받은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설명합니다(요한복음 3: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십자가의 위력입니다. 십자가의 놀라운 은혜입니다.
위대한 수학자요 천문학자이며 과학자였던 코페르니쿠스가 죽음을 앞에 두고 유언을 남겼습니다. 그 유언을 따라 그가 묻혀있는 무덤의 묘비에는 이런 글귀가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나는 바울이 가진 특권을 구하지 않는다. 나는 베드로에게 주신 능력도 구하지 않는다. 나는 다만 십자가에서 강도에게 주신 용서를 원할 뿐이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십자가의 사랑을 통한 용서와 구원의 은총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통해서만 구원받습니다. 십자가만이 구원의 능력입니다.
19세기 영국의 시인 W. Cooper는 십자가의 구원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거기에만, 오직 거기에만, 이신론자가 무어라고 떠들든, 무신론자(이런 비열한 노예가 땅에 있다면 말이다)가 무어라고 헛소리를 하든 거기에만, 오직 거기에만 구원의 능력이 있다네"
십자가는 구원의 능력이요, 사랑의 증표요, 승리의 상징입니다. 오늘 우리 모두 그 십자가를 바라보며, 그 십자가를 믿으며, 그 십자가를 붙잡으며, 그 십자가를 사랑하며, 그 십자가를 기뻐하는 복된 신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어떤 법관의 아들이 자동차를 몰고 거리를 신나게 달리다가 교통사고를 내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그 청년은 법정에 끌려가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법정에 와보니까 담당 판사가 바로 자기 아버지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흠, 우리 아버지야 나를 용서해주겠지''하고 자기 아버지를 쳐다보았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본 체도 않고 엄숙한 얼굴로 한참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이제부터 재판을 시작하겠습니다.'' ''피고의 이름을 대시요.''하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철없는 그 아들이, ''아버지 ! 저예요, 저!'' 하고 말했습니다. 이 아버지는 들은 척도 안하고 ''여기는 법정입니다. 사사로운 말은 하지 못합니다. 어서 피고의 이름을 대시오.'' 하고 호통을 치는 바람에 아들은 하는 수 없이 ''예, OOO입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피고의 주소는 ?'' ''아니, 아버지 주소하고 똑같아요'' 그랬더니 그 아버지는 다시 호통을 치면서 ''어서 주소를 대시요''라고 다그치셨습니다. 할 수 없이 주소를 다 댔습니다. 그리고 조서를 꾸며서 낭독한 후에 판결을 내렸습니다. "벌금 500만원"
그때 아들은 너무나도 상심하고 허탈하여 땅바닥에 주저앉아 아버지의 냉엄한 처사에 서글퍼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어느새 아버지는 법복을 벗고 깨끗한 신사복으로 갈아입으시고 다정한 아버지의 모습으로 찾아오셨습니다.
''아들아, 너무 지나치다고 생각되느냐?'' ''나는 이 나라의 법과 질서를 지켜야 될 법관인데 내 아들이라고 사사로운 인정에 끌려 법을 어길 수가 있겠느냐?'' 하면서 벌금을 물 수 있도록 500만원을 마련하여 주셨습니다.
''자, 이것을 가지고 교통계에 가서 벌금을 내면 너는 나갈 수 있다'' 그제서야 아들은 아버지의 깊으신 뜻을 깨달았습니다. 법을 살리기 위해서 아버지가 재판도 하고, 벌금도 내주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죄 값으로 멸망 받을 수밖에 없었는데, 우리 하나님은 공의도 살리고, 사랑도 살리기 위하여 죄 없으신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신 것입니다.
중세기의 위대한 신학자 안셀무스는 ''Cur Deus Homo''에서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의 방정식을 잘 설명합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의 교차점인 것입니다.
미국 선교사들이 알래스카에서 에스키모인들에게 전도할 때 "예수님은 착한 사냥꾼과 같으시다"는 비유를 즐겨 사용하였습니다.
옛날 에스키모인들이 거대한 알래스카 곰을 사냥할 때 그들 중의 한 사람은 희생을 각오해야만 했습니다. 즉 사냥꾼 중의 한 사람은 곰 앞에 바싹 다가가서 곰을 화나게 합니다. 그러면 곰은 두 발로 서서 앞발을 벌리고 가슴을 노출시킵니다. 그 순간 창이나 활로 정확하게 심장을 명중시켜야 곰을 잡습니다. 이때 치명상을 입은 곰은 자기 앞에 다가와 있는 사냥꾼을 덮쳐서 죽입니다. 그리고 나서 곰 자신도 얼마 못 가서 쓰러지고 맙니다.
이처럼 곰을 잡기 위해서 자기 목숨을 희생시키는 사람을 『착한 사냥꾼』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십자가를 지시므로 자신의 생명을 희생하셨습니다.
금세기 위대한 신학자였던 Bowman 박사가 인도 캘커타에서 선교할 때 한 노파가 길에서 이렇게 얘기하는 것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 노인과 한 동네의 친구였던 사람이 예수를 믿는 자기 친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우리가 믿는 힌두교의 많은 남신과 여신들로 만족할 수 없었니?''
노인의 대답이 멋집니다. "그들 가운데 나를 위해 죽은 신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야."
할렐루야! 그렇습니다. 예수님만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사랑의 구세주이십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본질적 핵심입니다. 공자, 맹자, 석가, 마호메트도 십자가를 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만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사랑의 구주이십니다.
1. 나의 십자가를 대신 지신 예수님
밤새도록 혹독한 고문을 당하신 예수님은 아침 9시에 사형언도를 받고 곧바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게 됩니다. 역사가들에 의하면 그 당시 십자가는 180근이나 되는 통나무 십자가였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지난밤에 심문을 받느라 한잠도 못 잔 생태에서 로마 군인들의 채찍과 발길질, 그리고 십자가의 무게에 못 이겨 자꾸만 쓰러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얼마나 무겁고 힘든 십자가였던가요? 그래서 로마 군인들은 건장하게 보이는 시몬이라는 한 흑인에게 강제로 십자가를 대신 지고 골고다 언덕까지 올라가도록 했습니다(21-22절).
여기서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십자가는 구레네 시몬이 대신 진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나의 십자가를 대신 지신 것입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이 대신 지셔야 할 것이 아니라, 내가 져야할 인생의 무거운 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내 인생의 그 무거운 모든 짐을 대신 져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일찍이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태복음 11:28)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내 인생의 모든 짐을 다 져주시는 예수님 앞에 모든 것을 맡기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왜 그처럼 주일 예배가 기다려집니까? 또 다시 내 인생의 모든 염려와 무거운 짐을 십자가 밑에 내려놓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내 인생을 주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내 인생의 모든 짐을 십자가 밑에 내려놓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무거운 짐을 나 홀로 지고 견디다 못해 쓰러질 때, 불쌍히 여겨 날 구원해줄 이, 은혜의 주님 오직 예수 내짐이 점점 무거워질 때 주 예수 앞에 아뢰일 때, 주께서 친히 날 구해 주사, 내대신 짐을 져주시네."
2. 나의 심판을 대신 받으신 예수님
오늘 본문의 내용은 아주 간단한 사건보도입니다.
예수님께서 아침 9시에 재판을 받으시고, 정오 12시에 십자가에 못 박히셔서, 오후 3시에 죽으신 재판보도입니다. 죄 없으신 예수님이 왜 이처럼 비참하게 죽으셔야 했던가요?
"나의 죄 때문입니다." "내가 받아야 할 심판을 대신 받으신 것입니다."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고, 그가 상처를 받은 것은 우리의 약함 때문이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써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매를 맞음으로써 우리의 병이 나았다.
우리는 모두 양처럼 길을 잃고 각기 제 갈 길로 흩어졌으나, 주님께서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지우셨다(담당시키셨습니다. 떠넘기신 것입니다).』(이사야 53:5-6)
그래서 예수님은 죄인의 모양으로 오셔서, 죄인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다가, 죄인의 신분으로 죽으신 것입니다. 죄인이 받아야 할 심판을 대신 받으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두 가지 점이 강조됩니다.
1) 죄인들 사이에 끼여, 죄인들과 함께 죽으십니다(27절).
완전히 죄인의 신분으로 낮아지셨음을 각인시켜 줍니다.
2)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쓸쓸하게 버림을 받습니다(33-34절).
우리를 대신하여 죄 없으신 아들이 심판 받으셔야 하는 사실 때문에 십자가 위에서 절규하는 아들의 애원을 외면하십니다. 그때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고 슬프셨으면 중천의 태양이 빛을 잃고 온 세상이 어두워졌겠습니까?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대로,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 범죄자 중 하나로 취급을 당하셨기 때문입니다"(이사야 53:15)
예수님은 왜 이처럼 혹독한 심판을 받으셔야만 했던가요?
『그는 세상 죄 지고 가는 어린양이셨기 때문입니다』(요한복음 1:29)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나의 죄에 대한 모든 심판을 다 당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하기만 하면 모든 죄를 다 용서받습니다. 그래서 누가는 의도적으로 십자가 곁의 두 죄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누가복음 23:39-43)
하나는 예수님을 믿지 않음으로 버림을 받고, 다른 하나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사랑을 받습니다.
하나는 회개하지 않음으로 정죄를 받고, 다른 하나는 회개하므로 사죄를 받습니다.
하나는 끝까지 믿음을 거부하므로 심판을 받아 지옥에 가고, 다른 하나는 비록 마지막 순간이지만 예수님을 영접하므로 구원을 받아 천국에 가게 됩니다.
파스칼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인간을 크게 두 부류로 구분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한 부류는 자기가 죄인이면서도 그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고, 또 한 부류는 자기가 죄인인 것을 절실히 깨닫고 있는 사람인데, 전자는 희망이 없는 죄인이고 후자는 희망이 있는 죄인으로, 인간은 이 두 가지로만 구분될 따름이라''고 말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당신은 어느 편에 서 있는 것 같습니까?
"희망이 없는 죄인, 희망이 있는 죄인"
십자가는 사람을 두 종류로만 구분합니다.
구원받지 못한 자와 구원받은 자,
용서받지 못한 자와 용서받은 자,
회개하지 않는 자와 회개하는 자,
거듭나지 못한 자와 거듭난 자,
정죄를 당하는 자와 사죄를 받는 자,
버림을 당하는 자와 사랑을 받는 자,
지옥에 떨어지는 자와 천국에 들어가는 자,
실락원의 인생과 복락원의 인생,
왼편에 선 자와 오른편에 선 자,
영벌에 들어갈 자와, 영생을 누릴 자!
골고다 언덕 예수님 곁에서 두 사람의 죄수가 함께 죽게 되었는데, 하나는 지옥으로 떨어지고 하나는 천국으로 올라갑니다.
두 여인이 맷돌을 가는데, 한 여인은 버림을 당하고 한 여인은 들림을 받습니다.
두 사람이 들에서 밭을 가는데, 한 사람은 버림을 당하고 한 사람은 휴거됩니다.
두 사람이 한 방에 누워서 잠을 자는데, 한 사람은 버림을 당하고 한 사람은 주님께로 올라갑니다.
너무나도 가까웠던 이 두 사람, 그러나 이제는 너무나 멀어지고 말았습니다. 이 만날 수 없는 차이! 이 좁힐 수 없는 간격! 다시는 번복될 수 없는 결정!
그때 십자가 곁에 섰던 한 죄수가 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하나, 예수님의 이름을 부른 것뿐이었습니다.
"예수님, 주님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누가복음 23:42)
예수님은 너무나 황홀하게 대답하십니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우리가 여기서 용기를 얻을 수 있는 것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1) 택함 받은 자는 반드시 구원받는다는 사실입니다.
아마도 십자가상에 여섯 시간 이상 매달려 있으면서 처음에는 두 강도가 함께 예수님을 비웃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은 나중에 회개하고 구원받습니다.
바울은 소아시아의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매우 생생한 전도체험을 합니다.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행 13:48)
2) 전도는 마지막까지 해야 합니다.
십자가 곁의 강도는 언제 구원받았습니까? 죽음의 문턱에서 구원받았습니다. 아침에는 마귀하고 조반을 먹었는데, 저녁에는 주님과 함께 낙원에서 식사를 즐깁니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우리 주만 믿으면 모두 구원 받으며 영생복락 면류관 확실히 받겠네''
3. 나의 구원을 완성하신 예수님
예수님께서 죽으실 때 신기한 일이 일어났습니다(37-38절). 예수님께서 한 번 큰 소리를 지르시고 돌아가시니, 지성소와 성소를 가로막고 있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쫙 찢어졌습니다.
여기 "큰 소리를 지르셨다"는 것은, 요한복음 19장 30절 말씀의 내용입니다.
"다 이루었다." 헬라어로는 한 마디입니다. 테텔레스타이.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신 것입니다. "다 이루었다."
이 말씀을 묵상하던 한 그리스도인 시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 날 그 하늘을 날던 새들은, 시커먼 먹구름으로 뒤덮인 하늘을 보며 다 이루었다고 조아립니다. 그 구름은 더 높이 있는 구름에게 외칩니다. 다 이루었다. 다시 그 구름들은 하나님의 보좌를 옹위하고 있는 영광의 그룹들을 향하여 외칩니다. 다 이루었다. 그리고 천사들은 하나님의 보좌 앞에 엎드려 말합니다. 아버지 하나님이시여! 당신의 보내심을 받은 독생자 예수는 범죄한 인간을 구속하시기 위하여 방금 그 십자가에서 붉은 피를 쏟으시므로 인류의 구원을 다 이루셨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는 2천년 전 예수님이 비참하게 지셨던 십자가를 통하여 너무나 황홀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특히 요한복음 3장 16절에서는『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독생자이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대신 달아 죽이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이런 놀라운 확신을 표명합니다.
"참으로 이상하고도 놀라운 일이다! 만약 내가 창조주 하나님이었다면 벌써 이 세상을 심판해버렸을 텐데, 이상하게도 하나님은 나를 이처럼 사랑하시다니? 그분은 사랑하시는 것도 마치 나 한 사람밖에는 사랑할 사람이 없는 것처럼 날 사랑하시는도다. 아니 내가 이 세상에 남아 있는 유일한 생존자라고 할지라도 그분은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목숨을 버리셨을 것이다."
M. Luther는 요한복음 3장 16절을 『축소된 복음(Gospel in miniature)』이라고 합니다.
복음의 에센스 중의 본질입니다. 이 짧은 말씀에는 『최고(greatest)』들만이 등장합니다.
"하나님이"… 최고의 애인(greatest lover)입니다.
"세상을"… 최고의 숫자(greatest number)입니다. 민족과 인종을 다 포함합니다.
"이처럼 사랑하사"… 최고의 수준(greatest degree)입니다. 자기 생명을 희생시킨 사랑입니다.
"독생자를"… 최고의 선물(greatest gift)입니다.
"주셨으니"… 최고의 행동(greatest act)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다 주신 것입니다.
"누구든지"… 최고의 초청(greatest invitation)입니다. 제한 없는 우주적 초청입니다.
"저를 믿는 자마다"… 최고의 단순함(greatest simplicity)입니다. 믿기만 하면 구원받습니다.
"멸망하지 않고"… 최고의 해방(greatest deliverance)입니다. 죽어야할 죄수가 석방된 것입니다
"영생을 얻으리라"… 최고의 소유(greatest possession)입니다. 영생, 그 이상의 재산은 없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이 지셨던 비참한 십자가를 통하여 너무나 황홀한 구원의 은총을 받은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설명합니다(요한복음 3: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십자가의 위력입니다. 십자가의 놀라운 은혜입니다.
위대한 수학자요 천문학자이며 과학자였던 코페르니쿠스가 죽음을 앞에 두고 유언을 남겼습니다. 그 유언을 따라 그가 묻혀있는 무덤의 묘비에는 이런 글귀가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나는 바울이 가진 특권을 구하지 않는다. 나는 베드로에게 주신 능력도 구하지 않는다. 나는 다만 십자가에서 강도에게 주신 용서를 원할 뿐이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십자가의 사랑을 통한 용서와 구원의 은총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통해서만 구원받습니다. 십자가만이 구원의 능력입니다.
19세기 영국의 시인 W. Cooper는 십자가의 구원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거기에만, 오직 거기에만, 이신론자가 무어라고 떠들든, 무신론자(이런 비열한 노예가 땅에 있다면 말이다)가 무어라고 헛소리를 하든 거기에만, 오직 거기에만 구원의 능력이 있다네"
십자가는 구원의 능력이요, 사랑의 증표요, 승리의 상징입니다. 오늘 우리 모두 그 십자가를 바라보며, 그 십자가를 믿으며, 그 십자가를 붙잡으며, 그 십자가를 사랑하며, 그 십자가를 기뻐하는 복된 신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