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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호목사 (대한예수교장로회 영암교회)
좋은 생각의 힘
어떤 사람은 세상에는 나쁜 사람들만 있다고 말하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은 세상에는 좋은 사람들만 산다고 말합니다. 또한 어떤 사람은 좋은 사람도 있고 나쁜 사람도 있다고 말합니다. 어느 것이 정답인지 아무도 모릅니다. 단지,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나의 작은 노력으로 이 세상에 기쁨을 늘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환경이 사람을 만든다고 하지만 사실은 생각이 사람을 만듭니다. 우리 인간은 날씨의 영향을 크게 받습니다. 흐린 날씨나 비 오는 날씨가 여러 날 계속되면 누구나 우울해지고 심해지면 우울증으로 심한 정신적 고통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의 날씨는 그리스도인의 마음속에 들어있는 감사에 의해서 결정됩니다. 항상 그 마음속에 감사가 들어있으면 신앙생활의 날씨가 맑음, 쾌청, 따뜻함으로 나타나지만 그 마음으로 비치는 감사의 햇살이 불평이나 불만이라는 구름에 가려있으면 우울하고 어둡고 짜증나는 마음과 환경으로 바뀔 수가 있습니다. 좋은 사람이라고 할 때 그 사람은 좋은 생각을 하는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내 좋은 생각의 힘이 사람들을 부드럽게 만듭니다.
공평하신 하나님
세상이 공평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불공평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부정적인 비교의식에서 세상을 볼 때 나의 형편이나 처지나 환경에 비추어 세상은 불공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세상에는 많습니다. 심지어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볼 때도 하나님은 불공평하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공평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아주 이상한 일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세상 사람들 누구에게나 한 가지씩 약점이나 걱정이나 아픔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기를 저 사람은 무슨 걱정이 있을까 그렇게 생각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막상 그 사람의 사정을 알고 보면, 그 사람에게도 고민이나 걱정이나 약점이 있고 아파하며 사는 부분이 있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됩니다. 그때마다 우리가 다시 생각하게 되는 것은 이 세상에 한 가지 걱정이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구나 하는 것입니다. 모두가 다 나름대로의 삶의 아픔을 가슴에 품고 그리고 또 무거운 인생의 짐을 지고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어느 가정에든지 한 가지 근심이 없는 집이 없고 모든 가정들이 다 문제를 안고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도 그 수많은 사람들 중에 한 사람쯤만은, 한 가정쯤만은 예외가 있을 것 같은데 그 누구도, 그리고 그 어떤 가정도 여기에 예외가 없는 것 같습니다. 이점에 있어서 하나님은 참으로 공평하시다고 말할 수가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늘 공기를 마시고 햇볕을 쏘이고 살면서도 그것에 대해서 감사한 마음은커녕, 내가 공기를 마신다는 것, 햇볕을 받으며 산다는 것, 그 사실조차도 알지 못하고 사는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말할 수 없는 사랑과 은혜 속에 싸여서 살면서도 그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감사하지 못하고 사는 것이 사실입니다.
조용하면서도 깨질 수 없는 위대한 힘
삶의 모든 부분에 있어서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은 조용한 힘입니다. 햇볕은 하루 종일 아무 소리 없이 그 열을 발하지만 그 속에는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지구의 인력도 역시 소리 없는 힘으로 모든 질서를 잡고 있습니다. 이슬은 사람들이 잠을 자는 밤에 아무소리 없이 내리지만 모든 식물에 새로운 생기와 아름다움을 가져다줍니다. 그 무엇보다도 조용하면서도 깨질 수 없는 위대한 힘이 있는데 이는 바로 신앙인에게 부여된 하나님의 힘입니다. 하박국 선지자를 통해서 증거 되는 이 신앙인의 힘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유대인의 지혜서인 탈무드에 이런 글이 실려 있습니다. “참으로 지혜로운 자는 모든 경우에 있어서 배우는 사람이고, 참으로 강한 자는 자신을 절제할 줄 아는 사람이며 정말 부자는 자신이 가진 것에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감사하는 태도를 보면 세 가지 유형의 사람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감사해야 할 일이 있는데 감사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은혜를 입고도 입을 싹 씻고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을 배은망덕, 즉 은혜를 잊은 사람이라고 하며 짐승만도 못하게 취급합니다.
두 번째는 감사할 일이 있을 때만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즉 감사의 조건이 있을 때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사업이 번창을 해서 감사하고, 건강해서 감사하고, 자식이 공부 잘해서 감사하고, 가정이 행복해서 감사하고, 직장에서 승진을 해서 감사하고, 학위를 취득해서 감사하고, 바라던 일이 이루어져서 감사합니다. 당연히 감사해야지요. 좀 신앙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런 감사를 합니다. 이럴 때 감사만 잘 해도 정말로 훌륭한 사람입니다. 만일 이런 일이 있는데도 감사하지 않는 사람은 은혜를 입고도 모른척하는 괘씸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현재 내가 누리고 있는 것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결국 하나님을 온전히 믿지 않는 사람입니다.
세 번째는 감사할 만한 일이 없는데도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감사는 불행 중에서, 고난 속에서 하는 감사입니다. 이런 감사는 고차원적인 감사이며 성숙한 신앙에서 나오는 감사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하박국 선지자의 감사가 이런 감사입니다. 도저히 감사라고는 할 수 없는 처지와 여건 속에서 그는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불평과 불만으로 하라고 하면 아무리 해도 끝나지 않을 환경에서 그는 기뻐했습니다. 정말로 감사의 조건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상황에서 그는 찬양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활동하던 시대는 신앙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매우 어려운 때였습니다.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을 저버렸습니다. 그리고 우상을 섬겼습니다. 종교 지도자들과 정부 관리들은 타락과 부패를 일삼고 있었습니다. 더군다나 국제 정세까지도 매우 불리하게 작용했습니다. 지금까지 형님 나라로 의지하고 있던 애굽은 이제 국운이 기울었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유다를 도울 수 없었습니다. 신흥 제국 바벨론은 강대국 앗수르를 멸망시키고 강력한 세력으로 등장했습니다. 그리고 시시 탐탐 유다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멀지 않아 군대를 거느리고 유다 나라를 침략해 오리라는 소문이 파다했습니다. 유다는 내적, 외적으로 아주 어려운 난관에 봉착했습니다.
선지자로서 누구보다도 이런 급박한 상황을 잘 알고 있었던 하박국은 가슴이 떨렸습니다. 두 다리에는 힘이 다 빠졌습니다. 도저히 마음을 진정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그의 심경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를 인하여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 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내 뼈에 썩는 것이 들어 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합3:16).
여러분은 이런 경험을 해 보셨는지요? “창자가 흔들리고 입술이 떨리며 뼈가 썩는 것 같고 온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상상해 보면 어떤 처지인지 조금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상황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바벨론은 드디어 침공해 왔습니다. 그리고 국토를 황폐하게 했습니다. 무화과나무, 포도나무, 감람나무의 열매들은 다 떨어져버렸습니다. 외양간의 소는 끌려 같습니다. 우리 안에 있었던 양들은 그들이 다 가져갔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생명을 부지하는데 필요한 양식마저 구하기가 힘들게 되었습니다. 정말로 극한 상황에 빠져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런 상황에서도 하박국은 감사를 했습니다. 찬양을 하며 기뻐했습니다. 환란과 역경 속에서 감사를 할 수 있다는 것, 극한 상황 속에서 찬양을 할 수 있다는 것,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만사가 형통할 때는 감사할 수 있습니다. 일이 순조롭게 풀려나갈 때는 찬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역경 속에서, 환란 속에서 감사와 찬양을 한다는 것은 고도의 믿음이 아니면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도 감사를 할 때 하나님은 그 감사를 통해 더욱 더 높은 차원의 믿음으로 승화시키십니다. 그리고 그 믿음을 통해 위대한 일을 하십니다. 우리 이런 성숙한 감사를 하고 싶지 않으십니까? 그래서 나도 한 번 하나님이 크게 쓰시는 도구가 되어보고 싶지 않으십니까?
우리의 삶 속에서 잃어버렸던 감사를 되찾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의무요 책임인데, 그렇다면 우리의 삶 속에서 되찾아야 할 감사의 모습들은 어떠한 것입니까?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구약의 말씀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너무도 놀라운 한 신앙인의 고백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본문을 기록한 하박국 선지자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박국의 감사 찬송을 들어보면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17) 17절 한 절속에서 무려 6가지가 없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위대한 신앙이며 감사의 모습입니다. 남들이 나의 삶을 보기에는 아무런 감사할 조건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나를 구원하시고 나의 여호와 되시는 하나님이 계시기에 이로 인하여 기뻐하고 감사한다는 고백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사라져도 우리의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시기에 소망과 기쁨이 넘친다는 고백인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러한 삶을 사는 자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하박국 3:19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우리의 힘이 되시고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실 것"이라고 기록합니다.
항상 기뻐하는 믿음의 태도
하박국은 성경 본문에서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18)모든 것이 나를 떠날지라도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은 나를 떠나지 않는다는 성숙한 신앙을 여기서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신앙을 소유한 자는 하박국과 같은 기쁨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높은 산을 오르며 뛰어 다니는 사슴과 같이 만드신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 (19절)
사슴은 결코 호랑이처럼 힘이 있지 않고 말처럼 몸집이 크거나 거세지도 않지만 높은 산을 오르는 발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박국은 하나님께서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신다고 노래하였습니다. 그동안 쓸데없이 세상 욕심과 권세욕에 기대하였던 삶의 구조를 갱신하고 사슴처럼 위엣 것을 찾으며 높은 산을 오르는 새로운 기상을 가질 수 있는 복된 기회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 삶의 주변에서 지나쳐버리는 것들 가운데 감사해야 할 내용들을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들의 삶 가운데는 정말로 얼마나 많은 감사가 넘쳐나고 있는지요? 이제 우리들의 삶의 주위들을 조용히 돌이켜 봅시다. 사실 우리는 우리의 삶 가운데서 감사하며 사는 법을 잊어버렸습니다. 내게 주어지는 모든 것들을 너무도 당연하게 감사하는 마음 없이 받아 왔습니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어려운 일들이 닥치거나 고통이 오면 너무도 쉽게 힘들어 하고 불평이 터져 나옵니다. 그러나 이러한 삶의 모습은 결코 우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리는 모습이 아닙니다.
믿음의 선배들, 신앙의 선배들의 고백을 기억해 보십시오. 하박국 선지자처럼 아무런 소출이 우리에게 없을지라도, 욥처럼 내가 깊은 환난 가운데 있을지라도, 우리를 위해 더 많은 것들을 준비해 두고 계획해 두신 하나님의 손길을 기억하면서 범사에 감사하는 삶을 산다면 우리의 생명을 영원한 죽음 가운데서 건지시고 생명으로 옮기신 하나님과 함께하는 기쁨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신앙의 눈으로 우리 삶의 주위를 둘러본다면 얼마나 많은 감사의 조건들이 있는지요?
많이 가져서 넘침이 아니라 감사함이 많으니 넘친다
고마움은 도움을 받음에 있지 않고 도움을 줄 수 있음에 있습니다. 넘치는 삶이 행복한 것이고 넘치면 누군가에게 주고 싶습니다. 그런데 많이 가져서 넘침이 아니라 감사함이 많으니 넘칩니다. 주고 또 주어도 사랑하므로 더 주고 싶은 마음이 고마운 것입니다. 내 아는 것, 내 가진 것이 너에게로 가서 꽃으로 피어나고 별이 되어 빛나도록......
오늘 본문에서 하박국 선지자는 “나는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리로다”라고 주관적인 말을 했는데 그것은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나만은 기뻐할 수 있고 감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원래 은혜는 주관적인 것입니다. 남이야 어떻게 생각하든 내게 내려진 사죄의 은총을 감사하고 은혜 입은 나만을 생각하기 때문에 감사합니다. 감사는 은혜에서 시작된 것이요 모든 감사는 은혜를 은혜로 받아드리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사람들이 보는 하늘보다 더 맑고 아름다운 하늘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도, 자연도, 사람도 더욱 사랑스럽고 아름답게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소중한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오늘의 나의 존재가 소중함을 새롭게 인식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의 실패, 여러분들의 약점, 여러분들의 삶의 부끄러운 인생의 아픔, 그것으로 말미암아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가끔씩 하늘을 보면서, 떨어지는 나뭇잎을 보면서 하나님의 끝없는 그 사랑에 대하여 작은 것으로 만족하며 살 수 있는 은혜를 주심에 대하여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참으로 풍성한 계절입니다. 우리 앞에 펼쳐진 세상에 널려진 수많은 사랑의 파편을 보면서 가슴 벅찬 날들을 살아갈 수 있음에 또한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가시은총
우리 인생을 가시밭길이라 말합니다. 그 만큼 가시가 많다는 뜻이며, 가시를 떠나서는 살수 없다는 말이겠지요. 가시 없는 사람은 한사람도 없습니다. 가시의 목적은 아프게 하는 것이고, 가시의 사명은 찌르는데 있습니다. 그러니, 가시로 인하여 아픈 것은 기이한 일이 아니며 우리를 사정없이 후벼 파는 가시는, 나름대로는 '한 영혼을 세우라'는 사명(?)에 충실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런데 가시 중에 어떤 가시가 가장 아프고 힘들까요? 그것은 '사람가시'입니다. 우리들을 힘들게 하고 고통스럽게 하는 가시 중에 질병의 가시, 궁핍함의 가시, 실패의 가시, 열등의 가시, 핍박의 가시, 멸시의 가시, 억울함의 가시 등도 만만치 않지만 그러나, 사람가시에 감히 비교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가시가 찌를 때 소리를 냅니다. 저항하기도 하구요. 충돌하기도 하지요. 또는 가시를 내 힘으로 뽑아내려고 안간힘을 쓰기도 합니다. 피하려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코드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가시로 인한 신음소리, 탄식소리, 원망의 소리를, 기도의 소리, 찬송의 소리로 바꾸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람가시로 인하여, 내가 더 많이 깨어지고 더 많이 죽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가시가 머무는 아주 특별한 이유입니다. 그러므로 가시를 떠나 도망가면, 더 큰 가시가 준비되어 있고 가시를 내 힘으로 뽑아내면, 또 다른 것으로 대가를 치루어야 합니다. 가시의 목적은 그 사람이 아니라, 내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온전히 세워지기 전에는, 박힌 가시는 제거되지 않을 겁니다. 그것이 숨기신 하나님의 사랑이며, 가시은총이며, 충분하고 필연적인, 주님의 은혜입니다.
이 세상에는 가시로 인하여, 주저앉아 자포자기하는 사람과 가시로 인하여 더 성숙하고, 더 큰 축복의 세계로 나아가는 분들로 나누어집니다. 바울이 대표적인 가시모델입니다. 바울은 평생을 가시로 인한 강함과 유익과 자고하지 않음과 은혜의 머뭄을 감사하며 자랑하게 됩니다. 없었으면 하는 가시 피해가고 싶은 가시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아무에게나 허락하시지 않으시는 값진 은혜입니다. 감당할 수 있기에 허락하신 가시, 그 가시가 아니면 깨어지지 않을 나임을 아시기에 속상해 하시며 찔러두신 그 가시. 이제 응어리를 푸시고 여러분의 응어리와 한속에 주의 보혈을 바르시기 바랍니다. 한 방울,두 방울, 그러다 보면 달라 질수 있고 회복 될 수 있을 겁니다. 우리와 똑같이 가시면류관의 통증을 나 위하여 견뎌내신 그분을 조용히 바라보세요. 하나님은 우리의 가시를 뽑아주시기도 하시지만 요동 없는 가시의 통증을 오히려 초월케 하시며 감사케 하는 충분한 은혜도 주십니다. 그 은혜가 우리에게 족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가시로 인하여 행복할 수 없고, 그로인하여 감사할 수 없다고 투정하지만 사실은 그 가시로 인하여 잃은 것보다 얻은 것이 더 많음과 손해보다 유익이 더 크다는 사실도 시간이 흐른 후에야 깨닫게 되는 진리입니다. 가시는 우리를 철들게 합니다. 가시는 우리를 성숙케 합니다. 가시는 우리를 이 땅에 정붙이지 못하게 합니다. 가시는 우리를 천국의 환상으로 이끌어 갑니다. 가시는 우리의 새벽을 깨웁니다. 가시는 우리의 잠든 영성을 각성시킵니다.
밤송이 속에 알밤이 들어있듯, 가시 속에 주님이 계시고 가시 속에 천국이 있음을 봅니다. 밤 가시로 알밤을 보호하듯 하나님도 가시넝쿨을 두어 우리를 사단과 세상으로부터 보양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밤 가시가 우리에게 맛 나는 알밤을 제공하듯 하나님의 가시는 우리에게 기막히고 유익한 은혜를 경험케 하십니다. 대부분의 향기나무에는 가시가 많습니다. 장미, 아카시아 등. 우리도 가시로 인하여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할 수 있겠지요? 향기는 아무에게나 나는 것이 아니듯, 예수향기도 역시 그러합니다.
가시는 곧 향기입니다. 가시를 너무 깊이 묵상하지 마십시오. 가시 속에 내재하는 하나님의 섭리를 묵상하십시오. 뽑히지 않는 가시와 뽑아 주시지 않으시는 하나님으로 인하여 불평하지 마십시오.
오늘 우리의 삶 가운데서 감사할 것이 없다고 말하기 전에 우리들의 삶 가운데 얼마나 많은 하나님의 축복이 있었는지 찾아보십시오. 찬송가 489장에 나오는 가사 가운데 “세상 모든 풍파가 우리를 흔들어 약한 마음으로 낙심하게 될 때에, 세상 근심 걱정이 우리를 누르고 십자가를 등에 지고 나갈 때 내려주신 주의 복을 세어 보아라” 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렇게 될 때에 감사로 제사 드리는 자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처럼, 오늘 우리가 드리는 이 예배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리는 아름다운 예배가 될 것입니다.
인연
사람들은 아무 생각 없이 인연의 씨를 뿌린다./
아무 생각 없이 뿌렸기 때문에 무슨 씨를 뿌렸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그리고 나중에 피어난 꽃을 보고 미운 꽃이 피었다 투덜댄다.
정채봉 씨가 쓴 짧은 글입니다.
크다고 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넌센스 퀴즈 가운데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무거운 것은 졸릴 때 내려오는 눈꺼풀이고, 이 세상에서 제일 힘 센 것은 머리를 뚫고 올라오는 머리카락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작은 구름이 하늘을 덮고 비를 몰고 온 것처럼 비록 어려운 형편과 환경 가운데에도 작은 감사의 햇살이 비치기 시작하면 그 인생은 복된 삶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깜깜한 밤에 하늘은 더욱 찬란한 빛을 발한다
누구에게나 헤어나기 어려운 시간은 있습니다. 그 시간은 나를 살찌우는 계기가 되어 한 발짝 더 도약할 수 있는 시발점이 될 수도 있습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하늘은 우리 모두를 바라보고 있고 작은 바람도 전 세계 곳곳에 삶의 기운으로 불어옵니다.
감사는 믿음의 완성이요 구원의 완성이다.
감사함으로 구원이 완성됩니다. 감사는 치료의 완성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가득 찰 때 우리 인생은 완전히 치료받은 인생이 됩니다. 병에서는 고침을 받았지만 감사할 줄 모르면 아직 병자이며 치료를 더 받아야 합니다. 감사할 줄 몰랐던 아홉 사람은 문둥병은 치료 받았지만 문둥병보다 더 심한 병에 다시 빠져들게 됩니다. 감사를 모르는 병 말입니다. 감사는 구원의 십일조입니다.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하박국은 모든 것이 뒤틀린 세상에서도 마침내 감사가 터져 나왔습니다. 세상에 대한 분노, 불평, 절망에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믿음의 완성, 구원의 완성을 이룬 것입니다. 인생의 문제에서 완전히 치료받은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날씨
감사의 햇살이 환하게 내리 비치면 그 생활은 맑음입니다. 감사의 햇살이 불평의 구름에 가리우면 그 생활은 흐림입니다. 그리고 그 불평이 연속되면 그 생활은 장마가 되는 것입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행복은 감사의 문으로 들어오고 불평의 문으로 나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불행한 사람이라도 감사하면 행복한 사람이 됩니다. 행복한 사람이라도 불평하면 그는 불행한 사람입니다. 감사하십시오. 하나님을 향해 감사하고 옆에 있는 사람을 놓고 감사하고, 보는 것마다 감사하십시오. 감사하면 내가 행복해 집니다.
마음으로 감사합니까? 그러면 입으로 감사하십시오. 입으로 감사합니까? 그러면 예물을 들고 감사하십시오. 사람 앞에서도 마음으로 감사합니까? 입으로 표현하십시오. 입으로 감사합니까? 그렇다면 조그마한 예물이라도 들고 감사하다고 하십시오. 하나님 앞에 나올 때도 마음으로 감사합니까? 그러면 입으로 감사하십시오. 임을 크게 벌려 감사 찬송을 불러야 합니다. 입으로 감사합니까? 예물 들고 나와 우리 하나님 앞에 드리십시오. 좋으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그 감사를 받으시고 우리에게 더 큰 축복으로 내려 주실 것입니다.
내 인생의 오늘의 상황이 아무리 어둡고 답답해도 기도할 수 있는 특권을 주시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게 하신 하나님, 그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이 나와 함께 있을진대 오늘도 우리의 삶의 주인 되신 그리스도 예수를 붙들고 성령님의 도우심과 교통하심을 힘입어 내일을 향해서 나아가는 모든 자녀들의 삶의 발걸음마다 금년 한 해 함께 하셨듯이 내년은 더 영광스러운 은혜로 성도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좋은 생각의 힘
어떤 사람은 세상에는 나쁜 사람들만 있다고 말하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은 세상에는 좋은 사람들만 산다고 말합니다. 또한 어떤 사람은 좋은 사람도 있고 나쁜 사람도 있다고 말합니다. 어느 것이 정답인지 아무도 모릅니다. 단지,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나의 작은 노력으로 이 세상에 기쁨을 늘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환경이 사람을 만든다고 하지만 사실은 생각이 사람을 만듭니다. 우리 인간은 날씨의 영향을 크게 받습니다. 흐린 날씨나 비 오는 날씨가 여러 날 계속되면 누구나 우울해지고 심해지면 우울증으로 심한 정신적 고통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의 날씨는 그리스도인의 마음속에 들어있는 감사에 의해서 결정됩니다. 항상 그 마음속에 감사가 들어있으면 신앙생활의 날씨가 맑음, 쾌청, 따뜻함으로 나타나지만 그 마음으로 비치는 감사의 햇살이 불평이나 불만이라는 구름에 가려있으면 우울하고 어둡고 짜증나는 마음과 환경으로 바뀔 수가 있습니다. 좋은 사람이라고 할 때 그 사람은 좋은 생각을 하는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내 좋은 생각의 힘이 사람들을 부드럽게 만듭니다.
공평하신 하나님
세상이 공평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불공평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부정적인 비교의식에서 세상을 볼 때 나의 형편이나 처지나 환경에 비추어 세상은 불공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세상에는 많습니다. 심지어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볼 때도 하나님은 불공평하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공평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아주 이상한 일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세상 사람들 누구에게나 한 가지씩 약점이나 걱정이나 아픔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기를 저 사람은 무슨 걱정이 있을까 그렇게 생각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막상 그 사람의 사정을 알고 보면, 그 사람에게도 고민이나 걱정이나 약점이 있고 아파하며 사는 부분이 있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됩니다. 그때마다 우리가 다시 생각하게 되는 것은 이 세상에 한 가지 걱정이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구나 하는 것입니다. 모두가 다 나름대로의 삶의 아픔을 가슴에 품고 그리고 또 무거운 인생의 짐을 지고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어느 가정에든지 한 가지 근심이 없는 집이 없고 모든 가정들이 다 문제를 안고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도 그 수많은 사람들 중에 한 사람쯤만은, 한 가정쯤만은 예외가 있을 것 같은데 그 누구도, 그리고 그 어떤 가정도 여기에 예외가 없는 것 같습니다. 이점에 있어서 하나님은 참으로 공평하시다고 말할 수가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늘 공기를 마시고 햇볕을 쏘이고 살면서도 그것에 대해서 감사한 마음은커녕, 내가 공기를 마신다는 것, 햇볕을 받으며 산다는 것, 그 사실조차도 알지 못하고 사는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말할 수 없는 사랑과 은혜 속에 싸여서 살면서도 그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감사하지 못하고 사는 것이 사실입니다.
조용하면서도 깨질 수 없는 위대한 힘
삶의 모든 부분에 있어서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은 조용한 힘입니다. 햇볕은 하루 종일 아무 소리 없이 그 열을 발하지만 그 속에는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지구의 인력도 역시 소리 없는 힘으로 모든 질서를 잡고 있습니다. 이슬은 사람들이 잠을 자는 밤에 아무소리 없이 내리지만 모든 식물에 새로운 생기와 아름다움을 가져다줍니다. 그 무엇보다도 조용하면서도 깨질 수 없는 위대한 힘이 있는데 이는 바로 신앙인에게 부여된 하나님의 힘입니다. 하박국 선지자를 통해서 증거 되는 이 신앙인의 힘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유대인의 지혜서인 탈무드에 이런 글이 실려 있습니다. “참으로 지혜로운 자는 모든 경우에 있어서 배우는 사람이고, 참으로 강한 자는 자신을 절제할 줄 아는 사람이며 정말 부자는 자신이 가진 것에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감사하는 태도를 보면 세 가지 유형의 사람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감사해야 할 일이 있는데 감사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은혜를 입고도 입을 싹 씻고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을 배은망덕, 즉 은혜를 잊은 사람이라고 하며 짐승만도 못하게 취급합니다.
두 번째는 감사할 일이 있을 때만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즉 감사의 조건이 있을 때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사업이 번창을 해서 감사하고, 건강해서 감사하고, 자식이 공부 잘해서 감사하고, 가정이 행복해서 감사하고, 직장에서 승진을 해서 감사하고, 학위를 취득해서 감사하고, 바라던 일이 이루어져서 감사합니다. 당연히 감사해야지요. 좀 신앙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런 감사를 합니다. 이럴 때 감사만 잘 해도 정말로 훌륭한 사람입니다. 만일 이런 일이 있는데도 감사하지 않는 사람은 은혜를 입고도 모른척하는 괘씸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현재 내가 누리고 있는 것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결국 하나님을 온전히 믿지 않는 사람입니다.
세 번째는 감사할 만한 일이 없는데도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감사는 불행 중에서, 고난 속에서 하는 감사입니다. 이런 감사는 고차원적인 감사이며 성숙한 신앙에서 나오는 감사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하박국 선지자의 감사가 이런 감사입니다. 도저히 감사라고는 할 수 없는 처지와 여건 속에서 그는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불평과 불만으로 하라고 하면 아무리 해도 끝나지 않을 환경에서 그는 기뻐했습니다. 정말로 감사의 조건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상황에서 그는 찬양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활동하던 시대는 신앙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매우 어려운 때였습니다.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을 저버렸습니다. 그리고 우상을 섬겼습니다. 종교 지도자들과 정부 관리들은 타락과 부패를 일삼고 있었습니다. 더군다나 국제 정세까지도 매우 불리하게 작용했습니다. 지금까지 형님 나라로 의지하고 있던 애굽은 이제 국운이 기울었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유다를 도울 수 없었습니다. 신흥 제국 바벨론은 강대국 앗수르를 멸망시키고 강력한 세력으로 등장했습니다. 그리고 시시 탐탐 유다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멀지 않아 군대를 거느리고 유다 나라를 침략해 오리라는 소문이 파다했습니다. 유다는 내적, 외적으로 아주 어려운 난관에 봉착했습니다.
선지자로서 누구보다도 이런 급박한 상황을 잘 알고 있었던 하박국은 가슴이 떨렸습니다. 두 다리에는 힘이 다 빠졌습니다. 도저히 마음을 진정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그의 심경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를 인하여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 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내 뼈에 썩는 것이 들어 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합3:16).
여러분은 이런 경험을 해 보셨는지요? “창자가 흔들리고 입술이 떨리며 뼈가 썩는 것 같고 온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상상해 보면 어떤 처지인지 조금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상황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바벨론은 드디어 침공해 왔습니다. 그리고 국토를 황폐하게 했습니다. 무화과나무, 포도나무, 감람나무의 열매들은 다 떨어져버렸습니다. 외양간의 소는 끌려 같습니다. 우리 안에 있었던 양들은 그들이 다 가져갔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생명을 부지하는데 필요한 양식마저 구하기가 힘들게 되었습니다. 정말로 극한 상황에 빠져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런 상황에서도 하박국은 감사를 했습니다. 찬양을 하며 기뻐했습니다. 환란과 역경 속에서 감사를 할 수 있다는 것, 극한 상황 속에서 찬양을 할 수 있다는 것,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만사가 형통할 때는 감사할 수 있습니다. 일이 순조롭게 풀려나갈 때는 찬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역경 속에서, 환란 속에서 감사와 찬양을 한다는 것은 고도의 믿음이 아니면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도 감사를 할 때 하나님은 그 감사를 통해 더욱 더 높은 차원의 믿음으로 승화시키십니다. 그리고 그 믿음을 통해 위대한 일을 하십니다. 우리 이런 성숙한 감사를 하고 싶지 않으십니까? 그래서 나도 한 번 하나님이 크게 쓰시는 도구가 되어보고 싶지 않으십니까?
우리의 삶 속에서 잃어버렸던 감사를 되찾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의무요 책임인데, 그렇다면 우리의 삶 속에서 되찾아야 할 감사의 모습들은 어떠한 것입니까?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구약의 말씀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너무도 놀라운 한 신앙인의 고백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본문을 기록한 하박국 선지자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박국의 감사 찬송을 들어보면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17) 17절 한 절속에서 무려 6가지가 없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위대한 신앙이며 감사의 모습입니다. 남들이 나의 삶을 보기에는 아무런 감사할 조건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나를 구원하시고 나의 여호와 되시는 하나님이 계시기에 이로 인하여 기뻐하고 감사한다는 고백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사라져도 우리의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시기에 소망과 기쁨이 넘친다는 고백인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러한 삶을 사는 자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하박국 3:19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우리의 힘이 되시고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실 것"이라고 기록합니다.
항상 기뻐하는 믿음의 태도
하박국은 성경 본문에서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18)모든 것이 나를 떠날지라도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은 나를 떠나지 않는다는 성숙한 신앙을 여기서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신앙을 소유한 자는 하박국과 같은 기쁨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높은 산을 오르며 뛰어 다니는 사슴과 같이 만드신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 (19절)
사슴은 결코 호랑이처럼 힘이 있지 않고 말처럼 몸집이 크거나 거세지도 않지만 높은 산을 오르는 발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박국은 하나님께서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신다고 노래하였습니다. 그동안 쓸데없이 세상 욕심과 권세욕에 기대하였던 삶의 구조를 갱신하고 사슴처럼 위엣 것을 찾으며 높은 산을 오르는 새로운 기상을 가질 수 있는 복된 기회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 삶의 주변에서 지나쳐버리는 것들 가운데 감사해야 할 내용들을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들의 삶 가운데는 정말로 얼마나 많은 감사가 넘쳐나고 있는지요? 이제 우리들의 삶의 주위들을 조용히 돌이켜 봅시다. 사실 우리는 우리의 삶 가운데서 감사하며 사는 법을 잊어버렸습니다. 내게 주어지는 모든 것들을 너무도 당연하게 감사하는 마음 없이 받아 왔습니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어려운 일들이 닥치거나 고통이 오면 너무도 쉽게 힘들어 하고 불평이 터져 나옵니다. 그러나 이러한 삶의 모습은 결코 우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리는 모습이 아닙니다.
믿음의 선배들, 신앙의 선배들의 고백을 기억해 보십시오. 하박국 선지자처럼 아무런 소출이 우리에게 없을지라도, 욥처럼 내가 깊은 환난 가운데 있을지라도, 우리를 위해 더 많은 것들을 준비해 두고 계획해 두신 하나님의 손길을 기억하면서 범사에 감사하는 삶을 산다면 우리의 생명을 영원한 죽음 가운데서 건지시고 생명으로 옮기신 하나님과 함께하는 기쁨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신앙의 눈으로 우리 삶의 주위를 둘러본다면 얼마나 많은 감사의 조건들이 있는지요?
많이 가져서 넘침이 아니라 감사함이 많으니 넘친다
고마움은 도움을 받음에 있지 않고 도움을 줄 수 있음에 있습니다. 넘치는 삶이 행복한 것이고 넘치면 누군가에게 주고 싶습니다. 그런데 많이 가져서 넘침이 아니라 감사함이 많으니 넘칩니다. 주고 또 주어도 사랑하므로 더 주고 싶은 마음이 고마운 것입니다. 내 아는 것, 내 가진 것이 너에게로 가서 꽃으로 피어나고 별이 되어 빛나도록......
오늘 본문에서 하박국 선지자는 “나는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리로다”라고 주관적인 말을 했는데 그것은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나만은 기뻐할 수 있고 감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원래 은혜는 주관적인 것입니다. 남이야 어떻게 생각하든 내게 내려진 사죄의 은총을 감사하고 은혜 입은 나만을 생각하기 때문에 감사합니다. 감사는 은혜에서 시작된 것이요 모든 감사는 은혜를 은혜로 받아드리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사람들이 보는 하늘보다 더 맑고 아름다운 하늘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도, 자연도, 사람도 더욱 사랑스럽고 아름답게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소중한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오늘의 나의 존재가 소중함을 새롭게 인식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의 실패, 여러분들의 약점, 여러분들의 삶의 부끄러운 인생의 아픔, 그것으로 말미암아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가끔씩 하늘을 보면서, 떨어지는 나뭇잎을 보면서 하나님의 끝없는 그 사랑에 대하여 작은 것으로 만족하며 살 수 있는 은혜를 주심에 대하여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참으로 풍성한 계절입니다. 우리 앞에 펼쳐진 세상에 널려진 수많은 사랑의 파편을 보면서 가슴 벅찬 날들을 살아갈 수 있음에 또한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가시은총
우리 인생을 가시밭길이라 말합니다. 그 만큼 가시가 많다는 뜻이며, 가시를 떠나서는 살수 없다는 말이겠지요. 가시 없는 사람은 한사람도 없습니다. 가시의 목적은 아프게 하는 것이고, 가시의 사명은 찌르는데 있습니다. 그러니, 가시로 인하여 아픈 것은 기이한 일이 아니며 우리를 사정없이 후벼 파는 가시는, 나름대로는 '한 영혼을 세우라'는 사명(?)에 충실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런데 가시 중에 어떤 가시가 가장 아프고 힘들까요? 그것은 '사람가시'입니다. 우리들을 힘들게 하고 고통스럽게 하는 가시 중에 질병의 가시, 궁핍함의 가시, 실패의 가시, 열등의 가시, 핍박의 가시, 멸시의 가시, 억울함의 가시 등도 만만치 않지만 그러나, 사람가시에 감히 비교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가시가 찌를 때 소리를 냅니다. 저항하기도 하구요. 충돌하기도 하지요. 또는 가시를 내 힘으로 뽑아내려고 안간힘을 쓰기도 합니다. 피하려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코드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가시로 인한 신음소리, 탄식소리, 원망의 소리를, 기도의 소리, 찬송의 소리로 바꾸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람가시로 인하여, 내가 더 많이 깨어지고 더 많이 죽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가시가 머무는 아주 특별한 이유입니다. 그러므로 가시를 떠나 도망가면, 더 큰 가시가 준비되어 있고 가시를 내 힘으로 뽑아내면, 또 다른 것으로 대가를 치루어야 합니다. 가시의 목적은 그 사람이 아니라, 내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온전히 세워지기 전에는, 박힌 가시는 제거되지 않을 겁니다. 그것이 숨기신 하나님의 사랑이며, 가시은총이며, 충분하고 필연적인, 주님의 은혜입니다.
이 세상에는 가시로 인하여, 주저앉아 자포자기하는 사람과 가시로 인하여 더 성숙하고, 더 큰 축복의 세계로 나아가는 분들로 나누어집니다. 바울이 대표적인 가시모델입니다. 바울은 평생을 가시로 인한 강함과 유익과 자고하지 않음과 은혜의 머뭄을 감사하며 자랑하게 됩니다. 없었으면 하는 가시 피해가고 싶은 가시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아무에게나 허락하시지 않으시는 값진 은혜입니다. 감당할 수 있기에 허락하신 가시, 그 가시가 아니면 깨어지지 않을 나임을 아시기에 속상해 하시며 찔러두신 그 가시. 이제 응어리를 푸시고 여러분의 응어리와 한속에 주의 보혈을 바르시기 바랍니다. 한 방울,두 방울, 그러다 보면 달라 질수 있고 회복 될 수 있을 겁니다. 우리와 똑같이 가시면류관의 통증을 나 위하여 견뎌내신 그분을 조용히 바라보세요. 하나님은 우리의 가시를 뽑아주시기도 하시지만 요동 없는 가시의 통증을 오히려 초월케 하시며 감사케 하는 충분한 은혜도 주십니다. 그 은혜가 우리에게 족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가시로 인하여 행복할 수 없고, 그로인하여 감사할 수 없다고 투정하지만 사실은 그 가시로 인하여 잃은 것보다 얻은 것이 더 많음과 손해보다 유익이 더 크다는 사실도 시간이 흐른 후에야 깨닫게 되는 진리입니다. 가시는 우리를 철들게 합니다. 가시는 우리를 성숙케 합니다. 가시는 우리를 이 땅에 정붙이지 못하게 합니다. 가시는 우리를 천국의 환상으로 이끌어 갑니다. 가시는 우리의 새벽을 깨웁니다. 가시는 우리의 잠든 영성을 각성시킵니다.
밤송이 속에 알밤이 들어있듯, 가시 속에 주님이 계시고 가시 속에 천국이 있음을 봅니다. 밤 가시로 알밤을 보호하듯 하나님도 가시넝쿨을 두어 우리를 사단과 세상으로부터 보양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밤 가시가 우리에게 맛 나는 알밤을 제공하듯 하나님의 가시는 우리에게 기막히고 유익한 은혜를 경험케 하십니다. 대부분의 향기나무에는 가시가 많습니다. 장미, 아카시아 등. 우리도 가시로 인하여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할 수 있겠지요? 향기는 아무에게나 나는 것이 아니듯, 예수향기도 역시 그러합니다.
가시는 곧 향기입니다. 가시를 너무 깊이 묵상하지 마십시오. 가시 속에 내재하는 하나님의 섭리를 묵상하십시오. 뽑히지 않는 가시와 뽑아 주시지 않으시는 하나님으로 인하여 불평하지 마십시오.
오늘 우리의 삶 가운데서 감사할 것이 없다고 말하기 전에 우리들의 삶 가운데 얼마나 많은 하나님의 축복이 있었는지 찾아보십시오. 찬송가 489장에 나오는 가사 가운데 “세상 모든 풍파가 우리를 흔들어 약한 마음으로 낙심하게 될 때에, 세상 근심 걱정이 우리를 누르고 십자가를 등에 지고 나갈 때 내려주신 주의 복을 세어 보아라” 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렇게 될 때에 감사로 제사 드리는 자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처럼, 오늘 우리가 드리는 이 예배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리는 아름다운 예배가 될 것입니다.
인연
사람들은 아무 생각 없이 인연의 씨를 뿌린다./
아무 생각 없이 뿌렸기 때문에 무슨 씨를 뿌렸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그리고 나중에 피어난 꽃을 보고 미운 꽃이 피었다 투덜댄다.
정채봉 씨가 쓴 짧은 글입니다.
크다고 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넌센스 퀴즈 가운데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무거운 것은 졸릴 때 내려오는 눈꺼풀이고, 이 세상에서 제일 힘 센 것은 머리를 뚫고 올라오는 머리카락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작은 구름이 하늘을 덮고 비를 몰고 온 것처럼 비록 어려운 형편과 환경 가운데에도 작은 감사의 햇살이 비치기 시작하면 그 인생은 복된 삶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깜깜한 밤에 하늘은 더욱 찬란한 빛을 발한다
누구에게나 헤어나기 어려운 시간은 있습니다. 그 시간은 나를 살찌우는 계기가 되어 한 발짝 더 도약할 수 있는 시발점이 될 수도 있습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하늘은 우리 모두를 바라보고 있고 작은 바람도 전 세계 곳곳에 삶의 기운으로 불어옵니다.
감사는 믿음의 완성이요 구원의 완성이다.
감사함으로 구원이 완성됩니다. 감사는 치료의 완성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가득 찰 때 우리 인생은 완전히 치료받은 인생이 됩니다. 병에서는 고침을 받았지만 감사할 줄 모르면 아직 병자이며 치료를 더 받아야 합니다. 감사할 줄 몰랐던 아홉 사람은 문둥병은 치료 받았지만 문둥병보다 더 심한 병에 다시 빠져들게 됩니다. 감사를 모르는 병 말입니다. 감사는 구원의 십일조입니다.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하박국은 모든 것이 뒤틀린 세상에서도 마침내 감사가 터져 나왔습니다. 세상에 대한 분노, 불평, 절망에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믿음의 완성, 구원의 완성을 이룬 것입니다. 인생의 문제에서 완전히 치료받은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날씨
감사의 햇살이 환하게 내리 비치면 그 생활은 맑음입니다. 감사의 햇살이 불평의 구름에 가리우면 그 생활은 흐림입니다. 그리고 그 불평이 연속되면 그 생활은 장마가 되는 것입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행복은 감사의 문으로 들어오고 불평의 문으로 나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불행한 사람이라도 감사하면 행복한 사람이 됩니다. 행복한 사람이라도 불평하면 그는 불행한 사람입니다. 감사하십시오. 하나님을 향해 감사하고 옆에 있는 사람을 놓고 감사하고, 보는 것마다 감사하십시오. 감사하면 내가 행복해 집니다.
마음으로 감사합니까? 그러면 입으로 감사하십시오. 입으로 감사합니까? 그러면 예물을 들고 감사하십시오. 사람 앞에서도 마음으로 감사합니까? 입으로 표현하십시오. 입으로 감사합니까? 그렇다면 조그마한 예물이라도 들고 감사하다고 하십시오. 하나님 앞에 나올 때도 마음으로 감사합니까? 그러면 입으로 감사하십시오. 임을 크게 벌려 감사 찬송을 불러야 합니다. 입으로 감사합니까? 예물 들고 나와 우리 하나님 앞에 드리십시오. 좋으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그 감사를 받으시고 우리에게 더 큰 축복으로 내려 주실 것입니다.
내 인생의 오늘의 상황이 아무리 어둡고 답답해도 기도할 수 있는 특권을 주시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게 하신 하나님, 그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이 나와 함께 있을진대 오늘도 우리의 삶의 주인 되신 그리스도 예수를 붙들고 성령님의 도우심과 교통하심을 힘입어 내일을 향해서 나아가는 모든 자녀들의 삶의 발걸음마다 금년 한 해 함께 하셨듯이 내년은 더 영광스러운 은혜로 성도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