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407
분류 |
---|
최성규목사 (인천순복음교회)
오늘 이 시간에는 "성공시키는 사람", 한 번 따라 하시면 감사하겠 습니다.
"성공시키는 사람". 우리가 그 동안 성공하는 사람이라는 말은 많이 했어요. 그런데 오늘은 그렇게 하지 아니하고 성공시키는 사람, 이런 제목으로 같이 은혜를 나눕니다. 한 번 따라 하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나는 성공한다."
다 그렇게 꼭 되시기를 바랍니다. 진정으로 성공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남을 성공시키는 사람입니다. 남이 망하고 나는 잘 됐다, 너는 죽고 나만 살았다. 다른 사람은 실패하고 나만 승리자가 되었다. 과연 그 사람이 성공자일까? 아마 세상의 환경에서는 그 사람을 성공했다고 말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진정한 양심으로 본다면, 성경의 가르침대로 우리가 본다면, 그 사람은 절대로 성공한 사람이 아닙니다. 진정한 성공은 남을 성공시키는 사람입니다. 남이 잘 되어야 내가 잘 될 수 있습니다. 남이 행복해야 내가 행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남이 즐거워야 내가 즐거울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성공시키는 분이십니다. 죄인을 의인되게 하십니다. 지옥 갈 자를 천국 가게 하십니다. 병든 자를 치료받아 건강하게 하십니다. 가난한 자를 축복하셔서 부유하게 하십니다. 슬픈 자에게 기쁨을 주십니다. 절망하는 자에게 소망을 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희망을 주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첫 아담은 우리를 다 절망시켜 놓았습니다. 죽게 만들었습니다. 망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아담 되신 예수님은 이 땅에 왜 오셨느냐? 우리에게 희망을 주시기 위해서.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의 희망입니다. 절망하고 가난하고 억울하고 병들고 약한 자들을 위로하시고, 영원한 소망과 위로와 구원을 주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얼마나 고통을 대신 당하셨는지 몰라요. 태어나실 때, 말이 잠자는 마구간에서 태어나셨어요. 사시면서 너무나 가난하셨어요. 그것만이 아닙니다. 맨 마지막에 예수님은 얼마나 많은 매를 맞았는지 몰라요. 또 가시관을 쓰셨어요. 양손과 양발에 못을 박히시고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셨어요. 왜 가난하셨습니까? 가난한 우리를 부요케 하시기 위하여, 왜 매를 맞으셨습니까? 병든 자를 치료해주시기 위하여, 왜 그 많은 저주를 당하셨습니까? 우리에게 평화를 주시기 위해서라고 주님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먼저 예수 믿고 구원받은 우리들, 목사가 되고, 장로가 되고, 권사가 되고, 집사가 되고, 또 교회의 제 작이 된 우리들, 누구처럼 살아가야 됩니까? 예수님처럼 살아가야 됩니다. 예수님이 사람들을 성공시키신 것처럼 우리도 사람들을 어찌하든지 성공시켜주면서 살아야 된다 그 말입니다. 자,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사람들을 성공시킬 수 있을까? 몇 가지로 나누어서 생각해보겠습니다.
첫째로, 칭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한 번 따라 하시겠습니다.
"칭찬하는 사람", 칭찬보다 더 좋은 보약은 없습니다. 칭찬보다 더 좋은 치료약도 없습니다. 병든 사람에게 칭찬해 주어봐요. 격려해 주어봐요. 하나님이 역사 하셔서 치료의 기적 을 나타나게 만들어 주실 줄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남에게 칭찬해주고 남을 인정해줄 때, 그 사람은 성공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칭찬하는 사람 주위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이기 마련인 것입니다. 누구든지 칭찬을 받기를 원하고 비난을 받기를 원치 아니하지요. 칭찬 해주는 사람 앞에는 사람이 막 모여요. 교회는 어떤 곳입니까? 칭찬해 주는 곳입니다. 정죄하는 곳이 아니 라 칭찬해주는 곳이에요. 사랑하는 여러분들이여! 오늘 이 말씀을 통하여 여러분들이 힘을 얻으시기를 바랍니다. 새 힘을 얻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잠언서 11장 30절에 이런 말씀을 합니다. "의인의 열매는 생명나무라 지혜로운 자는 사람을 얻느니라." 비난거리 보다는 칭찬거리를 사람에게서 찾아야 돼요. 누구를 만나든지 저 사람에게서 비난거리를 찾으려고 고민하지 마세요.
"어떻게 하면 칭찬거리를 찾을까? 얼마나 칭찬할게 있을까?"
하고 찾는 것입니다. 우리의 못된 습관 가운데 하나가 뭡니까? 남의 흠을 잡는 거예요. 남을 깎아 내리는 거예요. 또 남의 흉을 보면서 그것을 아주 즐기기까지 하는 거예요. 이건 잘못된 것입니다. 칭찬하면 칭찬이 갑절로 우리에게 돌아오고, 욕하면 욕이 갑절로 우리에게 돌아오기 마련인 것입니다. 마치 그것은 무엇과 같습니까? 산울림 법칙과 같습니다.
"사랑해"
그러면 산이 사랑한다고 막 말해요. 미워한다고 말하면
"미워해, 미워해"
하고 울림이 되어서 우리에게 들려오는 것입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더 많은 사람을 칭찬하면 칭찬할수록 자기는 칭찬을 받는 것입니다. 성경에 말합니다. 빌립보서 4장 8절입니다. "종말로 형제들아 무엇에든 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할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할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어찌하든지 사람을 만날 때, 어떻게 하면 칭찬해줄까? 칭찬 할 거리가 무엇이 있을까? 어찌하면 칭찬해줄까?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남을 성공시킬 수 있습니다. 하나님도 우리를 칭찬하십니다. 하나님 보실 때, 우리 인간은 너무나 작고 보잘 것 없는 티끌과 같은 존재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우리를 인정하시고 사랑하시고 구원하셨습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서 예수님 친히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 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세상 사람들은 나를 사랑해주지 아니할지라도, 하나님은 여러분을 인정하십니다.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여러분 을 구원하십니다.
자, 그렇다면 하나님도 나를 인정하시는데, 하나님도 사랑하시는데, 하나님도 구원하시는데, 왜 우리가 뭐 잘났다고 다른 사람을 인정하지 않나 그거예요. 왜 내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않나 그거예요. 왜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지 않나 그거 예요. 그것은 아니다 그 말입니다. 우리는 누구를 닮아야 돼요? 하나님 을 닮아야 돼요. 그래서 누구든지 만나면 그 사람 속에서 칭찬 거리를 찾아야돼요.
"뭐가 잘 났지?"
그래야 돼요. 사람마다 다 특성이 있어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얼굴이 똑같은 사람 한 명도 없어요. 하나님은 같은 사람을 안 만들어 놓았어요. 그러므로 모두가 다 하나님 편에서 볼 때 우리는 모두가 다 작품이에요 작품. 상품이 아니고 작품이에요 작품. 작품은 값이 없어요. 너무나 비싸서 값이 없어요. 그러므로 우리의 한 영혼의 한 생명은 천하를 얻고도 그것을 가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천하를 주고도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우리가 이웃에게 행한 작은 일들을 기억하시고 칭찬하십니다. 별로 보잘 것 없는 사람에게 행한 지극히 작은 선행도 기억하시고 칭찬해주십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0잘 42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아주 작은 소자에게 냉수 한 그릇 떠준 것도 주님은 그 상을 결단코 잃지 안겠다 그랬습니다. 히브리서 11장 6절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 지니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들을 칭찬해줄 줄 알아야 돼요. 칭찬을 인색 해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칭찬할 때, 그 칭찬 받는 사람은 용기를 얻을 수 있어요. 힘을 얻을 수 있어요. 자신감을 얻을 수 있어요. 그러므로 어떤 보약보다 더 좋은 보약이 뭐냐? 그것은 칭찬이라는 보약이라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4장 5절에서 사도 바울이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것도 판단치 말라 그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그리고 우리는 구원받고 은혜 받은 우리들이 할 일이 뭐냐? 우리 주위의 많은 사람들을 칭찬해주는 거예요. 칭찬해주는 사람은 남을 성공시킬 수 있어요.
둘째로, 격려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위기가 되기도 하고 동시에 호기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때에 서로 성공하며 잘 살기 위해서는 상대방을 격려해주어야 될 것입니다. 남편은 아내를 격려해주어야 돼요. 아내는 남편을 격려해주어야 돼요. 마찬가지입니다. 이 자녀들도 수고하고 고생하시는 아버지, 어머니를 격려해드려야 돼요. 그뿐이 아닙니다. 부모들은 어렵게 살면서도 열심히 공부하고 애쓰고 수고하는 그 자녀를 보면서 정말로 격려해주어야 돼요.
"야, 너 참 아빠가 돈도 많이 못 벌어다주고, 용돈도 많이 못 주고, 학비도 제때 못 대주는데, 참고서적도 잘 사지 못하는데, 열심히 공부해주어서 참 고맙다. 참 감사하다."
그럴 때 그런 가정은 화목할 수 있어요. 없어도 잘 살 수 있어요. 없어도 행복할 수 있어요. 다른 것은 다 잃어버렸다 하더라도 거기 있는 모든 것이 있는 가정이 되어서 복되게 살아갈 수 있어요. 우리가 이 때에 서로 행복하기 위해서, 서로 성공하기 위해서, 이웃과 이웃끼리도, 성도와 성도끼리도, 친구와 친구끼리도, 격려해주어야 돼요. 히브리서 10장 23-25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고 굳게 잡아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서로 격려해주라는 거예요. 낙담하고 실패한 사람들을 격려해줄 때, 그 사람은 새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실패할 수밖에 없는 위치에서 다시 일어나서 얼마든지 성공할 수 있다 그 말인 것입니다. 인생의 영원한 실패나 영원한 성공은 없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과정 중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시적으로 실패한 사람이라도 다시 용기를 얻어 재기하면 얼마든지 성공할 수가 있어요. 우리는 특히 착한 일을 하다가 낙담한 사람들에게 힘과 용기를 불어 넣어주어야 할 것입니다. 이 사회는 아직도 착하게 사는 사람 이 언제나 성공하고 잘 살 수 있는 구조로 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착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정직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선행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억울함을 당할 때가 많다고 요. 어려움을 당할 때가 많다고요. 그럴 때, 그런 사람들을 낙심시키지 말고 그런 사람들을 찾아가서 격려 해주어야 돼요. 우리 교회 안에도 가끔 보면 그런 때가 있어요. 열심히 기도하는데, 열심히 봉사하는데, 열심히 헌금도 하는데, 열심히 충성도 하는데, 열심히 전도하는데 어려움을 당할 때가 있어요. 그런데 어리석은 사람들은
"흥, 그렇게 열심이더니 뭐 저래? 그렇게 충성하더니 뭐 저래?"
그래서 비웃는 사람이 있어요. 큰 잘못입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실 때 30배, 60배, 100배의 복을 준다구요. 지금 가진 것 보다 30배, 60배, 100배 복을 받으려면, 지금 가지고 있는 그릇을 깨버려야 돼요. 지금 가지고 있는 그릇을 바꾸어야 해요. 그릇을 바꾸기 위해서 그릇을 키우기 위해서 당장 우리에게 아픔도 주시고 고통도 주십니다. 그것을 우리 모두가 다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감사함으로 받아들일 때, 믿음을 키웠을 때, 그 큰 그릇 위에 주님은 축복하십니다. 영혼이 잘 되고 범사가 형통하고 강건할 수 있도록 지금 가지고 있는 것보다 30배, 60배, 100배 더 줄 것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알 수 없어요. 하나님만이 아시는 거예요. 지금 이 어려움 같지만, 어려움 뒤에는 분명히 축복이 오는 것입니다. 예 수를 믿고 고통 당하는 사람과 예수를 믿지 아니하고 고난 당하는 사람은 달라요. 예수를 믿지 아니하는 사람은 완전히 굴입니다. 깜깜한 굴입니다. 그러나 예수 믿고 구원받은 성도들이 당하는 아픔과 캄캄함은 굴이 아닙니다. 터널이에요, 터널. 분명히 지나가면 밝은 태양이 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굴속에 있는 어리석은 자가 아니라, 터널을 통과하는 자들인 것입니다. 터널만 통과하면 언제 깜깜했더냐? 언제 어두웠더냐? 우리는 새 삶으로 살아가는 역사가 우리에게 일어나는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서로 격려해주어야 돼요. 성도와 성도끼리 서로 격려해주어야 돼요.
"집사님! 더 좋은 일이 일어나. 집사님! 심은 데로 거둔다 그랬잖아. 우리는 기도를 심었잖아. 봉사를 심었잖아. 전도를 심었잖아. 사랑을 심었잖아. 충성으로 심었잖아. 우리는 많이 심었잖아. 지금은 아직 땅 속에서 싹이 나지 않을 때지만, 이제 싹이 날 거야. 이제 잎이 날거야 꽃이 필거야. 열매를 많이 맺을 거야 걱정하지마. 우리 함께 이 어려움을 같이 나누자고."
그런 말 있잖아요. 사랑은 나누면 나눌수록 커지고 고통은 나누면 나눌수록 작아진다 그랬어요. 하나님을 바라보며 선하게 살아온 사람들이야말로 이 세상의 빛입니다. 이 세상의 소금인 것입니다. 만약 이들이 열심히 세상의 악에 부딪혀서 낙담을 했다면, 우리는 누구보다도 이들을 찾아가서 붙들어주고 이들을 찾아가서 격려해주어야 됩니다.
하나님은 주님을 의지하는 자를 격려하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새로운 지도자가 된 여호수아가, 모세가 죽고 난 후에 이 여호수아가 이제 캄캄한 거예요.
"어떻게 될까?"
염려 근심했어요. 어떻게 300만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갈 수 있을까? 낙담하고 있었을 때, 불안하고 있었을 때, 우리 주님이 찾아가셔서 그를 용기를 불어넣어 주셨어 요. 여호수아 1장 9절에서 하나님은 불안해하고 있는 여호수아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네게 명한 것이 아니냐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 이 격려를 받은 여호수아가 다시 믿음을 회복했어요. 그리고 용기를 가졌어요. 그래서 300만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넉넉하게 들어간 줄 믿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 모세의 하나님이 여호수아의 하나님이신 것처럼, 여호수아의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신 것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역대하 15장 2절과 7절입니다. "저가 나가서 아사를 맞아 이르되 아사와 및 유다와 베냐민의 무리들아 내 말을 들으라 너희가 여호와와 함께 하면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실지라 너희가 만일 저를 찾으면 저가 너희의 만난 바 되시려니와 너희가 만일 저를 버리면 저도 너희를 버리시리라 그런즉 너희는 강하게 하라 손이 약하지 않게 하라 너희 행위에는 상급이 있음이니라." 아사 왕은 용기를 얻었습니다. 유다와 베냐민 땅은 물론 에브라임 산간 지대까지 그가 빼앗은 모든 땅에서 우상을 모조리 다 제거하고 성전 앞에 있는 여호와의 단을 수리했다 그랬습니다.
우리가 정말로 남을 성공시키는 사람이 되어지기 위해서는 어찌하든지 격려하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셋째로, 관용하는 사람이 되어 야 합니다.
남을 성공시키는 사람은 용서하고 이해하며 관용할 줄 아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런 마음을 가진 사람이 지혜가 있습니다. 그래서 관용하는 사람이 존경받을 수 있습니다. 친구를 얻을 수 있습니다. 칭찬 받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빌립보서 4장 5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그랬습니다.
성공하는 사람은 남을 일으켜 세우는 사람입니다. 상대방을 깎는다고 해서 반드시 승리자가 되는 것은 전혀 아닌 것입니다. 상대방을 죽였다고 그래서 반드시 내가 성공하는 것도 전혀 아닌 것입니다. 상대방을 실패케 했다고 내가 잘 되는 것 전혀 아닌 것입니다. 동업자를 망하게 했다고 하더라도 나만 잘 될 것이라고 생각하면 절대 안됩니다. 우리는 같아 살아야 해요. 따라 합시다.
"같이 살자! 같이 살자! 같이 살자!"
우리는 세상 문화에 빠지면 안돼요. 세상 문화는
"너 죽고 나 살자."
그거예요. 그러나 성경 문화는 그게 아닙니다.
"너 살고 나 살자."
그것입니다. 세상 문화는
"네가 망해야 내가 흥한다."
그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 문화는 그렇지 않습니다.
"네가 흥해야 나도 흥한 ."
그 말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서로 가슴을 열어야 돼요. 좁은 가슴 만들지 말고, 큰 가슴, 넓은 가슴, 높은 가슴, 깊은 가슴, 그래서 무엇이든지 다 받아들이는 거예요. 다 관용하는, 다 용납하면서 살아가는 그런 삶으로 우리가 살아갈 것입니다.
사회 모든 조직은 넓은 망으로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실패하고 낙심해서 일하지 않고 생산하지 않는 사람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그것은 결국 가진 자들의 부담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도 성공하고 남도 성공하는 이것이 우리 모두가 함께 성공 할 수 있는 비결이요 지혜인 것입니다.
그래서 요사이 재벌들 정신들 좀 차려야 돼요. 중소기업 다 망하게 해 놓으면 자기들만 뭐 될 것 같지요? 아니에요. 같이 살아야지. 정치하는 지도자들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나만 지도자가 되려고 하지말고 빨리 자기 후배들을 훌륭한 지도자로 만들어 놓아야 이 나라가 건강한 나라가 되고, 이 나라가 살기 좋은 나라가 되고, 이 나라가 행복하고 부유한 나라가 될 것 아닙니까? 우리나라 안에서 서로서로 싸우지 말고 경쟁을 다른 나라와 세계와의 경쟁이지 자기들끼리만 경쟁은 아니다 그 말인 것입니다. 야고보서 3장 17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분명히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악의 없는 실수나 지혜 부족한 것은 용서해주고 관용해주어야 돼요. 아무도 처음부터 완벽하게 잘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때로는 시행착오를 하면서 배우고 발전하는 것입니다. 관용과 이해는 감사의 보답으로 돌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열심히 일하다가 실수했다면, 그것은 용서해주고 관용해주어야 돼요. 나쁜 것은 뭡니까? 실수할까봐 일 안하는 거지요. 복지부동 하는 거지요. 더 나쁜 거지요. 일하다가 실수할 수 있어요.
에디슨(T. A. Edison)이 전구를 발명했어요. 1만 번 실험해서 발명되었다는 것 아니에요. 그러면 에디슨은 전구를 발명하기 위해서 몇 번 실패했습니까? 9,999번을 실수했다고요. 그런데 만 번째 다시 한 번 실험해서 전구가 나왔다고요. 에디슨은 실패자입니까? 아니지요. 성공 자지요. 9,999번이 실패한 것이 아닙니다. 마지막에 성공했으니까 성공자인 거예요. 그런데 9,999번까지 실패한 것을 보고
"실패했다, 나쁘다"
그러면 안 된다 이것이지요.
관용을 가지고 받아주는 거예요. 왜요? 일하다가 실패했으니까, 잘 하려고 하다가 잘못됐으니까, 관용해주어야 돼요. 그런 사회가 되었을 때, 이 관용하는 사회가 되었을 때, 이 사회는 발전할 것입니다. 신지식이 더 확장될 것입니다. 살기 좋은 나라가 될 것이고, 정말로 맑고 밝고 환한 사회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디도서 3장 2절에 이런 말합니다. "아무도 훼방하지 말며 다투지 말며 관용하며 범사에 온유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낼 것을 기억하게 하라"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넷째로, 나누어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진심으로 남을 성공시키기를 원하는 사람은 자신의 것으로 나누어주고 베풀어주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 말인 것입니다. 남을 배려하는 마음은 반드시 행동을 수반하게 되어 있습니다. 입술로만 잘 되라고 할 것이 아니라 실제로 구제하고 필요한 것을 나누어줄 때, 많은 사람이 힘을 얻어서 성공할 수가 있고 다시 재기할 수가 있다 그 말인 것입니다.
구제는 남을 성공시키고 복 받기 위한 중요한 원리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말씀 하나 봅니다. 잠언서 11장 24-25절입니다.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 는 자는 윤택하여지리라." .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이야기가 있어요. 착한 농부 형제 이야기.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형이 동생을 데리고 공부시키고 또 일 시켰어요. 이제 결혼할 때가 되었어요. 그래서 동생 장가를 들였어요. 그리고 나서 1년 동안 농사를 졌습니다. 형이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아, 동생이 새 살림 낫기 때문에 얼마나 생활하기가 힘들까? 내가 좀 도와주어야지. 그러나 도와준다고 말하면 그가 사양하고 거부할 것이니까 몰래 주어야지". 그래서 한 밤에 농사지은 논에서 볏단을 실어다가 동생 논에다가 살짝 갖다 주었어요. 그런데 동생은 동생대로
"형이 나를 장가 들여서 새 살림 내주느라고 얼마나 돈을 많이 쓰셨을까? 우리형이 큰살림하느라고 고생하실까? 나는 좀 덜 쓰더라도 내가 형 좀 보태 드려야지". 농사를 잘 지어서 볏단을 실어다가 몰래 형 논에 갖다가 드렸어요. 형이나 동생이 그 다음날 아침에 논에 가 보았더니, 분명히 나는 동생에게 갖다주고, 형에게 갖다가 드렸는데 똑같은 볏단이라
"이상하다."
그 다음에 또 한 거예요. 그 다음에 또 한 거예요. 매일 같아요. 그러다가 형제의 마음은 같은 마음이었나 봐요.
"그럼 오늘 새벽에 더 일찍 가보자."
그래서 형도 볏단을 싣고 가고, 동생도 볏단을 싣고 오다가 중간에서 딱 만났어요.
이것이 지금 우리 사회에 필요한 거 아닙니까? 이런 삶이 되었다면, 형제가 어찌 싸우겠으며, 형제가 어찌 다투겠으며, 어찌 미워하겠으며, 이런 갈등이 있겠으며, 부정이 있겠습니까?
우리는 남을 성공시키기 위해서 줄줄 알아야 돼요. 주님 말씀하십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말씀했습니다. 주님 말씀했습니다. 누가복음 6장 38절입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주님 말씀하셨습니다.
결론입니다. 우리는 모두가 다 성공하는 사람이 되어야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만 성공하겠다고 말하면 다 망합니다. 그런 이기심, 탐심, 욕심, 교만, 다 버리고
"나를 사랑하신 하나님이 나에게 이처럼 은혜를 주셨는데, 내가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을 성공시킬까? 내가 남을 어떻게 성공시킬까?"
마음을 먹고 칭찬하고 격려해주고 위로해주고 내게 있는 것 나누어주고 베풀어주면, 더 많은 사람이 성공하며, 남이 성공하고 내가 남을 성공시켜 주었으면, 나는 성공한 사람이다. 그것이 산울림의 법칙으로 우리에게 다 주께서 돌아오도록 30배, 60배, 100배로 갚아주실 줄 믿습니다. 이런 사회가 살기 좋은 사회, 이런 사회가 부정이 없는 사회, 이런 사회가 주께 영광 돌리는 사회, 이런 사회가 맑고 밝고 환한 사회, 행복한 가정, 성공하는 인생이 될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성공시키는 사람", 한 번 따라 하시면 감사하겠 습니다.
"성공시키는 사람". 우리가 그 동안 성공하는 사람이라는 말은 많이 했어요. 그런데 오늘은 그렇게 하지 아니하고 성공시키는 사람, 이런 제목으로 같이 은혜를 나눕니다. 한 번 따라 하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나는 성공한다."
다 그렇게 꼭 되시기를 바랍니다. 진정으로 성공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남을 성공시키는 사람입니다. 남이 망하고 나는 잘 됐다, 너는 죽고 나만 살았다. 다른 사람은 실패하고 나만 승리자가 되었다. 과연 그 사람이 성공자일까? 아마 세상의 환경에서는 그 사람을 성공했다고 말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진정한 양심으로 본다면, 성경의 가르침대로 우리가 본다면, 그 사람은 절대로 성공한 사람이 아닙니다. 진정한 성공은 남을 성공시키는 사람입니다. 남이 잘 되어야 내가 잘 될 수 있습니다. 남이 행복해야 내가 행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남이 즐거워야 내가 즐거울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성공시키는 분이십니다. 죄인을 의인되게 하십니다. 지옥 갈 자를 천국 가게 하십니다. 병든 자를 치료받아 건강하게 하십니다. 가난한 자를 축복하셔서 부유하게 하십니다. 슬픈 자에게 기쁨을 주십니다. 절망하는 자에게 소망을 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희망을 주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첫 아담은 우리를 다 절망시켜 놓았습니다. 죽게 만들었습니다. 망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아담 되신 예수님은 이 땅에 왜 오셨느냐? 우리에게 희망을 주시기 위해서.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의 희망입니다. 절망하고 가난하고 억울하고 병들고 약한 자들을 위로하시고, 영원한 소망과 위로와 구원을 주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얼마나 고통을 대신 당하셨는지 몰라요. 태어나실 때, 말이 잠자는 마구간에서 태어나셨어요. 사시면서 너무나 가난하셨어요. 그것만이 아닙니다. 맨 마지막에 예수님은 얼마나 많은 매를 맞았는지 몰라요. 또 가시관을 쓰셨어요. 양손과 양발에 못을 박히시고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셨어요. 왜 가난하셨습니까? 가난한 우리를 부요케 하시기 위하여, 왜 매를 맞으셨습니까? 병든 자를 치료해주시기 위하여, 왜 그 많은 저주를 당하셨습니까? 우리에게 평화를 주시기 위해서라고 주님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먼저 예수 믿고 구원받은 우리들, 목사가 되고, 장로가 되고, 권사가 되고, 집사가 되고, 또 교회의 제 작이 된 우리들, 누구처럼 살아가야 됩니까? 예수님처럼 살아가야 됩니다. 예수님이 사람들을 성공시키신 것처럼 우리도 사람들을 어찌하든지 성공시켜주면서 살아야 된다 그 말입니다. 자,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사람들을 성공시킬 수 있을까? 몇 가지로 나누어서 생각해보겠습니다.
첫째로, 칭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한 번 따라 하시겠습니다.
"칭찬하는 사람", 칭찬보다 더 좋은 보약은 없습니다. 칭찬보다 더 좋은 치료약도 없습니다. 병든 사람에게 칭찬해 주어봐요. 격려해 주어봐요. 하나님이 역사 하셔서 치료의 기적 을 나타나게 만들어 주실 줄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남에게 칭찬해주고 남을 인정해줄 때, 그 사람은 성공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칭찬하는 사람 주위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이기 마련인 것입니다. 누구든지 칭찬을 받기를 원하고 비난을 받기를 원치 아니하지요. 칭찬 해주는 사람 앞에는 사람이 막 모여요. 교회는 어떤 곳입니까? 칭찬해 주는 곳입니다. 정죄하는 곳이 아니 라 칭찬해주는 곳이에요. 사랑하는 여러분들이여! 오늘 이 말씀을 통하여 여러분들이 힘을 얻으시기를 바랍니다. 새 힘을 얻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잠언서 11장 30절에 이런 말씀을 합니다. "의인의 열매는 생명나무라 지혜로운 자는 사람을 얻느니라." 비난거리 보다는 칭찬거리를 사람에게서 찾아야 돼요. 누구를 만나든지 저 사람에게서 비난거리를 찾으려고 고민하지 마세요.
"어떻게 하면 칭찬거리를 찾을까? 얼마나 칭찬할게 있을까?"
하고 찾는 것입니다. 우리의 못된 습관 가운데 하나가 뭡니까? 남의 흠을 잡는 거예요. 남을 깎아 내리는 거예요. 또 남의 흉을 보면서 그것을 아주 즐기기까지 하는 거예요. 이건 잘못된 것입니다. 칭찬하면 칭찬이 갑절로 우리에게 돌아오고, 욕하면 욕이 갑절로 우리에게 돌아오기 마련인 것입니다. 마치 그것은 무엇과 같습니까? 산울림 법칙과 같습니다.
"사랑해"
그러면 산이 사랑한다고 막 말해요. 미워한다고 말하면
"미워해, 미워해"
하고 울림이 되어서 우리에게 들려오는 것입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더 많은 사람을 칭찬하면 칭찬할수록 자기는 칭찬을 받는 것입니다. 성경에 말합니다. 빌립보서 4장 8절입니다. "종말로 형제들아 무엇에든 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할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할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어찌하든지 사람을 만날 때, 어떻게 하면 칭찬해줄까? 칭찬 할 거리가 무엇이 있을까? 어찌하면 칭찬해줄까?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남을 성공시킬 수 있습니다. 하나님도 우리를 칭찬하십니다. 하나님 보실 때, 우리 인간은 너무나 작고 보잘 것 없는 티끌과 같은 존재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우리를 인정하시고 사랑하시고 구원하셨습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서 예수님 친히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 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세상 사람들은 나를 사랑해주지 아니할지라도, 하나님은 여러분을 인정하십니다.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여러분 을 구원하십니다.
자, 그렇다면 하나님도 나를 인정하시는데, 하나님도 사랑하시는데, 하나님도 구원하시는데, 왜 우리가 뭐 잘났다고 다른 사람을 인정하지 않나 그거예요. 왜 내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않나 그거예요. 왜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지 않나 그거 예요. 그것은 아니다 그 말입니다. 우리는 누구를 닮아야 돼요? 하나님 을 닮아야 돼요. 그래서 누구든지 만나면 그 사람 속에서 칭찬 거리를 찾아야돼요.
"뭐가 잘 났지?"
그래야 돼요. 사람마다 다 특성이 있어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얼굴이 똑같은 사람 한 명도 없어요. 하나님은 같은 사람을 안 만들어 놓았어요. 그러므로 모두가 다 하나님 편에서 볼 때 우리는 모두가 다 작품이에요 작품. 상품이 아니고 작품이에요 작품. 작품은 값이 없어요. 너무나 비싸서 값이 없어요. 그러므로 우리의 한 영혼의 한 생명은 천하를 얻고도 그것을 가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천하를 주고도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우리가 이웃에게 행한 작은 일들을 기억하시고 칭찬하십니다. 별로 보잘 것 없는 사람에게 행한 지극히 작은 선행도 기억하시고 칭찬해주십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0잘 42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아주 작은 소자에게 냉수 한 그릇 떠준 것도 주님은 그 상을 결단코 잃지 안겠다 그랬습니다. 히브리서 11장 6절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 지니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들을 칭찬해줄 줄 알아야 돼요. 칭찬을 인색 해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칭찬할 때, 그 칭찬 받는 사람은 용기를 얻을 수 있어요. 힘을 얻을 수 있어요. 자신감을 얻을 수 있어요. 그러므로 어떤 보약보다 더 좋은 보약이 뭐냐? 그것은 칭찬이라는 보약이라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4장 5절에서 사도 바울이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것도 판단치 말라 그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그리고 우리는 구원받고 은혜 받은 우리들이 할 일이 뭐냐? 우리 주위의 많은 사람들을 칭찬해주는 거예요. 칭찬해주는 사람은 남을 성공시킬 수 있어요.
둘째로, 격려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위기가 되기도 하고 동시에 호기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때에 서로 성공하며 잘 살기 위해서는 상대방을 격려해주어야 될 것입니다. 남편은 아내를 격려해주어야 돼요. 아내는 남편을 격려해주어야 돼요. 마찬가지입니다. 이 자녀들도 수고하고 고생하시는 아버지, 어머니를 격려해드려야 돼요. 그뿐이 아닙니다. 부모들은 어렵게 살면서도 열심히 공부하고 애쓰고 수고하는 그 자녀를 보면서 정말로 격려해주어야 돼요.
"야, 너 참 아빠가 돈도 많이 못 벌어다주고, 용돈도 많이 못 주고, 학비도 제때 못 대주는데, 참고서적도 잘 사지 못하는데, 열심히 공부해주어서 참 고맙다. 참 감사하다."
그럴 때 그런 가정은 화목할 수 있어요. 없어도 잘 살 수 있어요. 없어도 행복할 수 있어요. 다른 것은 다 잃어버렸다 하더라도 거기 있는 모든 것이 있는 가정이 되어서 복되게 살아갈 수 있어요. 우리가 이 때에 서로 행복하기 위해서, 서로 성공하기 위해서, 이웃과 이웃끼리도, 성도와 성도끼리도, 친구와 친구끼리도, 격려해주어야 돼요. 히브리서 10장 23-25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고 굳게 잡아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서로 격려해주라는 거예요. 낙담하고 실패한 사람들을 격려해줄 때, 그 사람은 새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실패할 수밖에 없는 위치에서 다시 일어나서 얼마든지 성공할 수 있다 그 말인 것입니다. 인생의 영원한 실패나 영원한 성공은 없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과정 중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시적으로 실패한 사람이라도 다시 용기를 얻어 재기하면 얼마든지 성공할 수가 있어요. 우리는 특히 착한 일을 하다가 낙담한 사람들에게 힘과 용기를 불어 넣어주어야 할 것입니다. 이 사회는 아직도 착하게 사는 사람 이 언제나 성공하고 잘 살 수 있는 구조로 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착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정직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선행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억울함을 당할 때가 많다고 요. 어려움을 당할 때가 많다고요. 그럴 때, 그런 사람들을 낙심시키지 말고 그런 사람들을 찾아가서 격려 해주어야 돼요. 우리 교회 안에도 가끔 보면 그런 때가 있어요. 열심히 기도하는데, 열심히 봉사하는데, 열심히 헌금도 하는데, 열심히 충성도 하는데, 열심히 전도하는데 어려움을 당할 때가 있어요. 그런데 어리석은 사람들은
"흥, 그렇게 열심이더니 뭐 저래? 그렇게 충성하더니 뭐 저래?"
그래서 비웃는 사람이 있어요. 큰 잘못입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실 때 30배, 60배, 100배의 복을 준다구요. 지금 가진 것 보다 30배, 60배, 100배 복을 받으려면, 지금 가지고 있는 그릇을 깨버려야 돼요. 지금 가지고 있는 그릇을 바꾸어야 해요. 그릇을 바꾸기 위해서 그릇을 키우기 위해서 당장 우리에게 아픔도 주시고 고통도 주십니다. 그것을 우리 모두가 다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감사함으로 받아들일 때, 믿음을 키웠을 때, 그 큰 그릇 위에 주님은 축복하십니다. 영혼이 잘 되고 범사가 형통하고 강건할 수 있도록 지금 가지고 있는 것보다 30배, 60배, 100배 더 줄 것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알 수 없어요. 하나님만이 아시는 거예요. 지금 이 어려움 같지만, 어려움 뒤에는 분명히 축복이 오는 것입니다. 예 수를 믿고 고통 당하는 사람과 예수를 믿지 아니하고 고난 당하는 사람은 달라요. 예수를 믿지 아니하는 사람은 완전히 굴입니다. 깜깜한 굴입니다. 그러나 예수 믿고 구원받은 성도들이 당하는 아픔과 캄캄함은 굴이 아닙니다. 터널이에요, 터널. 분명히 지나가면 밝은 태양이 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굴속에 있는 어리석은 자가 아니라, 터널을 통과하는 자들인 것입니다. 터널만 통과하면 언제 깜깜했더냐? 언제 어두웠더냐? 우리는 새 삶으로 살아가는 역사가 우리에게 일어나는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서로 격려해주어야 돼요. 성도와 성도끼리 서로 격려해주어야 돼요.
"집사님! 더 좋은 일이 일어나. 집사님! 심은 데로 거둔다 그랬잖아. 우리는 기도를 심었잖아. 봉사를 심었잖아. 전도를 심었잖아. 사랑을 심었잖아. 충성으로 심었잖아. 우리는 많이 심었잖아. 지금은 아직 땅 속에서 싹이 나지 않을 때지만, 이제 싹이 날 거야. 이제 잎이 날거야 꽃이 필거야. 열매를 많이 맺을 거야 걱정하지마. 우리 함께 이 어려움을 같이 나누자고."
그런 말 있잖아요. 사랑은 나누면 나눌수록 커지고 고통은 나누면 나눌수록 작아진다 그랬어요. 하나님을 바라보며 선하게 살아온 사람들이야말로 이 세상의 빛입니다. 이 세상의 소금인 것입니다. 만약 이들이 열심히 세상의 악에 부딪혀서 낙담을 했다면, 우리는 누구보다도 이들을 찾아가서 붙들어주고 이들을 찾아가서 격려해주어야 됩니다.
하나님은 주님을 의지하는 자를 격려하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새로운 지도자가 된 여호수아가, 모세가 죽고 난 후에 이 여호수아가 이제 캄캄한 거예요.
"어떻게 될까?"
염려 근심했어요. 어떻게 300만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갈 수 있을까? 낙담하고 있었을 때, 불안하고 있었을 때, 우리 주님이 찾아가셔서 그를 용기를 불어넣어 주셨어 요. 여호수아 1장 9절에서 하나님은 불안해하고 있는 여호수아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네게 명한 것이 아니냐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 이 격려를 받은 여호수아가 다시 믿음을 회복했어요. 그리고 용기를 가졌어요. 그래서 300만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넉넉하게 들어간 줄 믿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 모세의 하나님이 여호수아의 하나님이신 것처럼, 여호수아의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신 것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역대하 15장 2절과 7절입니다. "저가 나가서 아사를 맞아 이르되 아사와 및 유다와 베냐민의 무리들아 내 말을 들으라 너희가 여호와와 함께 하면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실지라 너희가 만일 저를 찾으면 저가 너희의 만난 바 되시려니와 너희가 만일 저를 버리면 저도 너희를 버리시리라 그런즉 너희는 강하게 하라 손이 약하지 않게 하라 너희 행위에는 상급이 있음이니라." 아사 왕은 용기를 얻었습니다. 유다와 베냐민 땅은 물론 에브라임 산간 지대까지 그가 빼앗은 모든 땅에서 우상을 모조리 다 제거하고 성전 앞에 있는 여호와의 단을 수리했다 그랬습니다.
우리가 정말로 남을 성공시키는 사람이 되어지기 위해서는 어찌하든지 격려하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셋째로, 관용하는 사람이 되어 야 합니다.
남을 성공시키는 사람은 용서하고 이해하며 관용할 줄 아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런 마음을 가진 사람이 지혜가 있습니다. 그래서 관용하는 사람이 존경받을 수 있습니다. 친구를 얻을 수 있습니다. 칭찬 받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빌립보서 4장 5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그랬습니다.
성공하는 사람은 남을 일으켜 세우는 사람입니다. 상대방을 깎는다고 해서 반드시 승리자가 되는 것은 전혀 아닌 것입니다. 상대방을 죽였다고 그래서 반드시 내가 성공하는 것도 전혀 아닌 것입니다. 상대방을 실패케 했다고 내가 잘 되는 것 전혀 아닌 것입니다. 동업자를 망하게 했다고 하더라도 나만 잘 될 것이라고 생각하면 절대 안됩니다. 우리는 같아 살아야 해요. 따라 합시다.
"같이 살자! 같이 살자! 같이 살자!"
우리는 세상 문화에 빠지면 안돼요. 세상 문화는
"너 죽고 나 살자."
그거예요. 그러나 성경 문화는 그게 아닙니다.
"너 살고 나 살자."
그것입니다. 세상 문화는
"네가 망해야 내가 흥한다."
그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 문화는 그렇지 않습니다.
"네가 흥해야 나도 흥한 ."
그 말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서로 가슴을 열어야 돼요. 좁은 가슴 만들지 말고, 큰 가슴, 넓은 가슴, 높은 가슴, 깊은 가슴, 그래서 무엇이든지 다 받아들이는 거예요. 다 관용하는, 다 용납하면서 살아가는 그런 삶으로 우리가 살아갈 것입니다.
사회 모든 조직은 넓은 망으로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실패하고 낙심해서 일하지 않고 생산하지 않는 사람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그것은 결국 가진 자들의 부담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도 성공하고 남도 성공하는 이것이 우리 모두가 함께 성공 할 수 있는 비결이요 지혜인 것입니다.
그래서 요사이 재벌들 정신들 좀 차려야 돼요. 중소기업 다 망하게 해 놓으면 자기들만 뭐 될 것 같지요? 아니에요. 같이 살아야지. 정치하는 지도자들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나만 지도자가 되려고 하지말고 빨리 자기 후배들을 훌륭한 지도자로 만들어 놓아야 이 나라가 건강한 나라가 되고, 이 나라가 살기 좋은 나라가 되고, 이 나라가 행복하고 부유한 나라가 될 것 아닙니까? 우리나라 안에서 서로서로 싸우지 말고 경쟁을 다른 나라와 세계와의 경쟁이지 자기들끼리만 경쟁은 아니다 그 말인 것입니다. 야고보서 3장 17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분명히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악의 없는 실수나 지혜 부족한 것은 용서해주고 관용해주어야 돼요. 아무도 처음부터 완벽하게 잘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때로는 시행착오를 하면서 배우고 발전하는 것입니다. 관용과 이해는 감사의 보답으로 돌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열심히 일하다가 실수했다면, 그것은 용서해주고 관용해주어야 돼요. 나쁜 것은 뭡니까? 실수할까봐 일 안하는 거지요. 복지부동 하는 거지요. 더 나쁜 거지요. 일하다가 실수할 수 있어요.
에디슨(T. A. Edison)이 전구를 발명했어요. 1만 번 실험해서 발명되었다는 것 아니에요. 그러면 에디슨은 전구를 발명하기 위해서 몇 번 실패했습니까? 9,999번을 실수했다고요. 그런데 만 번째 다시 한 번 실험해서 전구가 나왔다고요. 에디슨은 실패자입니까? 아니지요. 성공 자지요. 9,999번이 실패한 것이 아닙니다. 마지막에 성공했으니까 성공자인 거예요. 그런데 9,999번까지 실패한 것을 보고
"실패했다, 나쁘다"
그러면 안 된다 이것이지요.
관용을 가지고 받아주는 거예요. 왜요? 일하다가 실패했으니까, 잘 하려고 하다가 잘못됐으니까, 관용해주어야 돼요. 그런 사회가 되었을 때, 이 관용하는 사회가 되었을 때, 이 사회는 발전할 것입니다. 신지식이 더 확장될 것입니다. 살기 좋은 나라가 될 것이고, 정말로 맑고 밝고 환한 사회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디도서 3장 2절에 이런 말합니다. "아무도 훼방하지 말며 다투지 말며 관용하며 범사에 온유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낼 것을 기억하게 하라"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넷째로, 나누어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진심으로 남을 성공시키기를 원하는 사람은 자신의 것으로 나누어주고 베풀어주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 말인 것입니다. 남을 배려하는 마음은 반드시 행동을 수반하게 되어 있습니다. 입술로만 잘 되라고 할 것이 아니라 실제로 구제하고 필요한 것을 나누어줄 때, 많은 사람이 힘을 얻어서 성공할 수가 있고 다시 재기할 수가 있다 그 말인 것입니다.
구제는 남을 성공시키고 복 받기 위한 중요한 원리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말씀 하나 봅니다. 잠언서 11장 24-25절입니다.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 는 자는 윤택하여지리라." .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이야기가 있어요. 착한 농부 형제 이야기.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형이 동생을 데리고 공부시키고 또 일 시켰어요. 이제 결혼할 때가 되었어요. 그래서 동생 장가를 들였어요. 그리고 나서 1년 동안 농사를 졌습니다. 형이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아, 동생이 새 살림 낫기 때문에 얼마나 생활하기가 힘들까? 내가 좀 도와주어야지. 그러나 도와준다고 말하면 그가 사양하고 거부할 것이니까 몰래 주어야지". 그래서 한 밤에 농사지은 논에서 볏단을 실어다가 동생 논에다가 살짝 갖다 주었어요. 그런데 동생은 동생대로
"형이 나를 장가 들여서 새 살림 내주느라고 얼마나 돈을 많이 쓰셨을까? 우리형이 큰살림하느라고 고생하실까? 나는 좀 덜 쓰더라도 내가 형 좀 보태 드려야지". 농사를 잘 지어서 볏단을 실어다가 몰래 형 논에 갖다가 드렸어요. 형이나 동생이 그 다음날 아침에 논에 가 보았더니, 분명히 나는 동생에게 갖다주고, 형에게 갖다가 드렸는데 똑같은 볏단이라
"이상하다."
그 다음에 또 한 거예요. 그 다음에 또 한 거예요. 매일 같아요. 그러다가 형제의 마음은 같은 마음이었나 봐요.
"그럼 오늘 새벽에 더 일찍 가보자."
그래서 형도 볏단을 싣고 가고, 동생도 볏단을 싣고 오다가 중간에서 딱 만났어요.
이것이 지금 우리 사회에 필요한 거 아닙니까? 이런 삶이 되었다면, 형제가 어찌 싸우겠으며, 형제가 어찌 다투겠으며, 어찌 미워하겠으며, 이런 갈등이 있겠으며, 부정이 있겠습니까?
우리는 남을 성공시키기 위해서 줄줄 알아야 돼요. 주님 말씀하십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말씀했습니다. 주님 말씀했습니다. 누가복음 6장 38절입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주님 말씀하셨습니다.
결론입니다. 우리는 모두가 다 성공하는 사람이 되어야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만 성공하겠다고 말하면 다 망합니다. 그런 이기심, 탐심, 욕심, 교만, 다 버리고
"나를 사랑하신 하나님이 나에게 이처럼 은혜를 주셨는데, 내가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을 성공시킬까? 내가 남을 어떻게 성공시킬까?"
마음을 먹고 칭찬하고 격려해주고 위로해주고 내게 있는 것 나누어주고 베풀어주면, 더 많은 사람이 성공하며, 남이 성공하고 내가 남을 성공시켜 주었으면, 나는 성공한 사람이다. 그것이 산울림의 법칙으로 우리에게 다 주께서 돌아오도록 30배, 60배, 100배로 갚아주실 줄 믿습니다. 이런 사회가 살기 좋은 사회, 이런 사회가 부정이 없는 사회, 이런 사회가 주께 영광 돌리는 사회, 이런 사회가 맑고 밝고 환한 사회, 행복한 가정, 성공하는 인생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