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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건용 목사 (향린교회)
방치되어 있던 법궤는 가져오다
다윗이 전체 이스라엘의 왕이 된 후에 가장 먼저 한 일은 예루살렘을 점령한 일입니다. 그리고 다윗이 예루살렘을 점령하여 새로운 왕국의 수도로 삼은 후 가장 먼저 한 일은 야훼 하나님의 법궤를 그리로 옮겨온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일이 그리 순탄하게 이루어지지는 않았습니다.
영화 ‘인디아나 존스’에도 등장하는 하나님의 법궤는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탈출하여 광야를 유랑할 때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만들어졌습니다. 이것은 야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신다는 하나님의 현존(presence of God)의 상징, 곧 ‘임마누엘’(‘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의 상징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를 유랑할 때 법궤를 앞세워 행진했고 가나안에 정착한 후에는 그것을 성막 안에 안치하여 소중하게 모셨습니다. 이들에게 법궤는 곧 하나님의 임재(臨在)의 상징이고 하나님의 인도와 도우심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무엘상 4장을 보면 이스라엘 군대가 블레셋 군대와 싸울 때 전쟁터에 법궤를 갖고 나갔다가 그만 참패했고 법궤도 빼앗겨버리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스라엘은 법궤를 갖고 전쟁터에 나가면 승리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그 반대가 된 것입니다. 그 후 우여곡절 끝에 이스라엘은 법궤를 되찾아 왔지만 왜 그랬는지 그것을 본래 있던 곳으로 갖고 오지 않고 아비나답이란 사람의 집에 갖다 놓았습니다(삼상 6:19-7:1). 그로부터 20여 년의 세월이 흐른 후 다윗은 이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오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여기서 재미있는 사실 하나를 지적할 수 있습니다. 법궤를 옮겨오는 일같이 중요한 일을 실행하는 데 있어서 하나님의 의사를 여쭈어보고 허락을 받는 절차가 생략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다윗은 이와 관련해서 하나님께 한 마디로 여쭙지 않았습니다. 마치 이미 하나님의 허락을 받아놓은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다윗의 이런 태도는 바로 앞에서 그가 보여준 태도와 매우 대조적입니다. 블레셋 군이 쳐들어와 진을 치고 이스라엘을 공격할 준비를 했을 때 다윗은 야훼 하나님께 “블레셋 군을 쳐 올라가도 되겠습니까? 야훼께서는 그들을 제 손에 넘겨주시겠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셨고 다윗은 그 말씀을 듣고서야 비로소 블레셋 군을 공격했습니다. 물론 다윗 군이 승리했습니다(사무엘하 5:17-25). 그런데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셔오는 중차대한 일을 두고 다윗이 하나님의 뜻을 물어보지 않았다는 사실은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듭니다.
법궤를 옮겨오는 일은 생각같이 쉽지 않았습니다. 첫 번째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법궤를 실은 소가 날뛰는 바람에 법궤가 떨어지려 하자 수레를 몰던 사람이 법궤를 손으로 붙잡았는데 이것이 야훼 하나님 눈에 좋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는 그만 거기서 죽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법궤 옮기는 일을 중단하고 법궤를 갓 사람 오베데돔의 집에 갖다 두었습니다.
석 달이 지난 후 오베데돔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다는 말을 듣고 다윗은 드디어 때가 됐다고 믿고 법궤 옮기는 일을 재차 시도했습니다. 이번에는 매사에 극도로 조심스럽게 행했습니다. 또 소가 날뛸지도 모르니 이번에는 사람을 시켜 법궤를 매게 했습니다. 궤를 맨 사람들이 여섯 걸음을 옮길 때마다 다윗은 살진 황소 한 마리를 잡아 바쳤습니다. 다윗 자신은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모시옷을 입고 덩실덩실 춤을 췄다고 했습니다. 이 춤은 제사 행위의 일환이었습니다. 참으로 볼만 했겠습니다. 무사히 법궤가 예루살렘에 당도하자 다윗은 모여든 백성들에게 떡 한 개, 대추야자 한 뭉치, 건포도 떡 한 개 씩을 나눠줬다고 했습니다. 일의 성취가 얼마나 좋았으면 백성들에게 선물을 나눠줬겠습니까.
신앙과 정치적 계산의 공존
왜 그랬을까요? 왜 다윗은 위험을 무릅쓰고 야훼 하나님의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려 했을까요? 이 일이 그에게 어떤 의미를 갖고 있었을까요? 여기에는 다윗의 신앙이 크게 작용했음이 분명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법궤를 블레셋 군에게서 되찾아 온 후 20여 년 동안 아비나답의 집에 방치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법궤가 이렇게 버려져 있다는 사실을 두고 볼 수 없었던 모양입니다. 따라서 그의 행위는 법궤의 소중함을 인식하고 법궤가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를 찾아준 행위였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 행위는 철저한 정치적 계산에서 나온 행위기도 했습니다. 그는 법궤를 있던 곳으로 돌려보내지 않고 예루살렘으로 가져옴으로써 새로운 왕국의 수도 예루살렘을 종교의 중심지로 만들려 했던 것입니다. 이제는 법궤를 보고 싶거나 법궤가 있는 곳에서 제사를 드리려면 누구나 예루살렘으로 와야 했습니다.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지 않았던 때에 예루살렘에 법궤를 갖다 놓고 그곳을 종교의 중심지로 만들었다는 얘기는 곧 예루살렘을 정치의 중심지로 만들었다는 얘기입니다. 곧 권력을 자신에게 집중시키는 데 법궤를 이용하려는 의도가 다윗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추측해봅니다. 소가 요동치는 바람에 궤가 떨어질 뻔하고 사람이 죽었던 일은 다윗의 정치적 의도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가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 말입니다. 하나님 눈에 좋지 않았던 일은 수레를 몰던 자가 법궤에 손을 댄 일이 아니라 법궤를 권력 강화의 수단으로 삼으려는 다윗의 의도가 아니었을까요?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온 일은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다윗의 궁극적인 목표는 야훼 하나님의 집, 곧 성전을 짓는 것이었습니다. 사무엘하 7장은 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다윗이 예언자 나단에게 말했습니다. “나는 이렇게 화려한 송백으로 지은 집에서 사는데 하나님의 궤는 아직 천막 안에 모셔둔 채 그대로 있소.” 자기는 화려한 궁전에서 사는데 하나님의 궤는 남루한 천막에 모셔놨으니 송구스러워 잠을 이룰 수 없다는 뜻입니다. 곧 성전을 지어 하나님께 바치고 싶다는 뜻이지요.
다윗의 이 말에는 복선이 깔려 있습니다. 서로 상반되는 두 가지 의도가 공존하고 있습니다. 우선 송구스러워 잠을 이룰 수 없다는 다윗의 말의 진실성을 의심할 이유는 없습니다. 이 말은 진심이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같으면 안 그러겠습니까? 교회는 가난한데 나만 부유하면 마음이 편하겠습니까? 다윗도 비슷한 심정이었겠지요. 그래서 하나님께 성전을 지어드려야겠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정치적 계산 또한 들어 있었습니다. 신학, 곧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생각을 바꾸려는 시도가 그것이었습니다. 법궤와 성막은 사람이 매고 어디든 갈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것들은 하나님의 자유를 상징합니다. 하나님은 가고 싶은 대로 마음대로 갈 수 있는 자유로운 분입니다. 떠나고 싶으면 언제든지 떠날 수 있는 분입니다. 하지만 성전은 그렇지 않습니다. 성전은 고정되어 있고 움직일 수 없습니다. 성전에는 “하나님은 딴 데 가지 마시고 영원히 여기서 사십시오.” 라는 인간의 소망이 담겨 있는 건물입니다. 곧 떠나고 싶을 때 마음대로 떠날 수 있는 하나님의 자유를 제한하고 싶어 하는 인간의 욕망의 산물이 바로 성전이란 말씀입니다. 다윗은 성전을 짓고 싶다고 말할 때 화려한 송백나무와 남루한 천막을 대조시켰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자유와 속박이 대조되고 있습니다. 그의 의식 깊은 곳에 있었던 것은 성전을 지어 바침으로써 하나님을 영구히 자기 곁에 모셔두고 싶다는 욕망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소원을 거절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언자 나단에게 “나는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에서 이끌어내던 때부터 지금까지 천막을 치고 옮겨 다녔고 집안에 살아본 적이 없다. 내가 누구에게 집을 지어 달라고 한 적이 있느냐?”라고 말씀하시며 성전 건축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대신 하나님은 다른 약속을 다윗에게 주셨습니다. 다윗의 후손이 영원한 왕조를 이루리라는 약속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다윗의 후손이 죄를 지으면 징계는 하겠지만 당신의 사랑만은 거두지 않겠다고 하나님은 다윗에게 약속하셨습니다.
다윗은 이 약속을 듣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제가 무엇이기에 이토록 사랑해주십니까! 제게 베풀어주신 사랑만도 분에 넘치는데 훗날 종의 집안에 일어날 일까지 알려주시니 고마운 마음 헤아릴 수 없습니다.” 이렇게 감사와 찬양의 기도를 바친 후 다윗은 다음과 같은 말로 하나님께 청원했습니다. “하나님, 이제 당신께서 하신 말씀을 길이 변치 말고 이루어주십시오. 주님이야말로 참 하나님이시며 하시는 말씀에 거짓이 없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이 종에게 좋은 말씀을 내려주셨으니 부디 종의 왕실에 복을 내려주시어 하나님 앞에 영원히 서게 해주십시오. 야훼 나의 주님, 주님의 말씀대로 이 종의 왕실은 복을 길이 받아 누리겠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을 변치 말고 반드시 이루어 달라는 당부의 기도입니다.
누구의 목소리인가?
우리는 ‘사무엘하’라는 책을 세세하게 짜인 각본에 의해서 감독은 연출하고 배우는 연기하는 연극이 아니라 전체적인 방향만 주고 구체적인 연기는 전적으로 배우에게 맡기는 방식의 연극으로 읽고 있습니다. 지난 번 설교에서 살펴본 사무엘하 1-4장에 등장하는 배우들은 주연, 조연을 막론하고 무대 뒤의 연출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각자의 욕망이 이끄는 대로 연기하는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그들은 무대 뒤에 연출자가 있다는 사실조차 의식하지 않은 채 극의 전체적인 흐름은 나 몰라라 하며 각자의 욕망만을 추구하는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그런데 오늘 읽은 사무엘하 5-7장이 그리는 장면은 이와는 사뭇 다릅니다. 오늘 연극의 두 주인공은 다윗과 나단인데 이 두 사람은 앞의 장면에 등장하는 인물들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다윗은 두 장면 모두에 등장하지만 서로 다른 모습입니다. 나단은 예언자입니다. 연출자의 입장을 대변하는 사람이란 말씀입니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곧 연출자의 말로 받아들이게 되어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그대로 전하도록 되어 있는 예언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말 그랬습니까? 나단은 자기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만을 전했습니까? 그가 전한 말 가운데 자기 생각은 추호도 없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리 그가 예언자라 해도 그의 말 가운데는 하나님의 말씀과 예언자 자신의 말이 뒤섞여 있습니다. 그는 다윗이 성전을 짓겠다고 제안했을 때 그렇게 하라고 말했습니다. “야훼께서 함께 하시니 무엇이든지 뜻대로 하십시오.” 이 말은 다윗의 제안을 나단이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 허락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그 말은 밤중에 야훼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시자 뒤집혔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이 성전을 짓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면 다윗의 뜻대로 하라는 나단의 말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 자신의 말이었던 것입니다. 성전 건축과같이 중차대한 일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가 어떻게 하나님의 뜻이 아닌 자신의 뜻을 마치 하나님의 뜻인 양 전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렇다고 나단이 거짓 예언자였는가 하면 절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사람 모두에게 인정받는 참 예언자였습니다.
사무엘하 6-7장을 통해서 우리가 물어야 할 근본적인 질문은 이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과 사람의 말을 구별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뜻과 사람의 욕망을 구별할 수 있습니까? 사무엘하 1-5장에 등장했던 인물들은 무대 뒤의 연출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욕망만을 추구하는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이에 반해 6-7장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하나님의 뜻을 내세웁니다. 그러나 조금만 깊이 살펴보면 이들이 내세우는 하나님의 뜻에는 자기 자신의 욕망이 뒤얽혀 있습니다.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가져오고 성전을 지으려 했던 다윗의 의도가 그랬습니다. 성전 건축을 허락했던 나단에게도 분명 그 자신의 의도가 있었을 것입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뜻과 자신의 욕망이 뒤얽혀 있는 주인공들의 마음이 그들의 언어와 행위로 표출됐습니다. 이들의 언어와 행위는 어디까지가 그들 욕망의 표현이고 어디서부터가 하나님의 뜻입니까? 이와 같은 갈등과 이중성은 다윗과 나단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을 갖고 산다고 하는 우리가 하는 말과 행위에도 대부분의 경우에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 하는 의지와 나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고자 하는 욕구가 뒤섞여 있습니다. 우리가 아주 양심을 저버리지 않고 눈곱만큼이라도 양심이 살아 있는 한 우리가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실행하고 있다고 말하지 못합니다. 반대로 우리가 신앙을 헌신짝처럼 내버리지 않는 한 우리는 전적으로 욕망의 화신이 되지도 못합니다. 우리는 신앙이 있기에, 눈곱만큼이라도 양심이 살아 있기에 제어되지 않은 욕망의 화신이 되지도 못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기 위해 내 욕망을 억제하려고 노력합니다. 나는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어디까지가 내 욕망이고 어디까지가 하나님의 뜻인지를 분별하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게다가 우리에게는 스스로를 속이려는 경향도 존재합니다. 사도 바울의 외침대로, 나는 선을 행하고 싶지만 악을 향해 치달리고 있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 하지만 죄의 법의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지금 내가 하는 말은 누구의 목소리입니까? 하나님의 목소리입니까, 아니면 내 욕망의 외침입니까? “나는 이렇게 화려한 송백으로 지은 집에서 사는데 하나님의 궤는 아직 천막 안에 모셔둔 채 그대로 있소.”라는 말은 누구의 목소리입니까?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열정에서 나온 목소리입니까, 아니면 다윗의 욕망의 외침입니까? “야훼께서 함께 하시니 무엇이든지 뜻대로 하십시오.” 이 목소리는 누구의 목소리입니까? 하나님의 뜻을 대변하는 목소리입니까, 아니면 정치적 의도를 숨기고 있는 자연인 나단의 목소리입니까?
어떤 사람이 환상 중에 하나님의 목소리를 생생하게 들었다고 흥분해서 제게 얘기했습니다. 대단한 경험이긴 하지만 찬물을 끼얹는 것 같아 미안해하면서 제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그 목소리가 하나님의 목소리인지 어떻게 아십니까?” 이 질문은 모든 신앙인에게 중요한 질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금 내가 하는 말은 누구의 목소리입니까? 우리는 지금 이 질문의 한 가운데 들어와 있습니다. 다음 주일에 계속해서 생각해보고 답을 찾아야 할 질문입니다. ♣
방치되어 있던 법궤는 가져오다
다윗이 전체 이스라엘의 왕이 된 후에 가장 먼저 한 일은 예루살렘을 점령한 일입니다. 그리고 다윗이 예루살렘을 점령하여 새로운 왕국의 수도로 삼은 후 가장 먼저 한 일은 야훼 하나님의 법궤를 그리로 옮겨온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일이 그리 순탄하게 이루어지지는 않았습니다.
영화 ‘인디아나 존스’에도 등장하는 하나님의 법궤는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탈출하여 광야를 유랑할 때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만들어졌습니다. 이것은 야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신다는 하나님의 현존(presence of God)의 상징, 곧 ‘임마누엘’(‘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의 상징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를 유랑할 때 법궤를 앞세워 행진했고 가나안에 정착한 후에는 그것을 성막 안에 안치하여 소중하게 모셨습니다. 이들에게 법궤는 곧 하나님의 임재(臨在)의 상징이고 하나님의 인도와 도우심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무엘상 4장을 보면 이스라엘 군대가 블레셋 군대와 싸울 때 전쟁터에 법궤를 갖고 나갔다가 그만 참패했고 법궤도 빼앗겨버리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스라엘은 법궤를 갖고 전쟁터에 나가면 승리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그 반대가 된 것입니다. 그 후 우여곡절 끝에 이스라엘은 법궤를 되찾아 왔지만 왜 그랬는지 그것을 본래 있던 곳으로 갖고 오지 않고 아비나답이란 사람의 집에 갖다 놓았습니다(삼상 6:19-7:1). 그로부터 20여 년의 세월이 흐른 후 다윗은 이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오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여기서 재미있는 사실 하나를 지적할 수 있습니다. 법궤를 옮겨오는 일같이 중요한 일을 실행하는 데 있어서 하나님의 의사를 여쭈어보고 허락을 받는 절차가 생략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다윗은 이와 관련해서 하나님께 한 마디로 여쭙지 않았습니다. 마치 이미 하나님의 허락을 받아놓은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다윗의 이런 태도는 바로 앞에서 그가 보여준 태도와 매우 대조적입니다. 블레셋 군이 쳐들어와 진을 치고 이스라엘을 공격할 준비를 했을 때 다윗은 야훼 하나님께 “블레셋 군을 쳐 올라가도 되겠습니까? 야훼께서는 그들을 제 손에 넘겨주시겠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셨고 다윗은 그 말씀을 듣고서야 비로소 블레셋 군을 공격했습니다. 물론 다윗 군이 승리했습니다(사무엘하 5:17-25). 그런데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셔오는 중차대한 일을 두고 다윗이 하나님의 뜻을 물어보지 않았다는 사실은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듭니다.
법궤를 옮겨오는 일은 생각같이 쉽지 않았습니다. 첫 번째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법궤를 실은 소가 날뛰는 바람에 법궤가 떨어지려 하자 수레를 몰던 사람이 법궤를 손으로 붙잡았는데 이것이 야훼 하나님 눈에 좋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는 그만 거기서 죽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법궤 옮기는 일을 중단하고 법궤를 갓 사람 오베데돔의 집에 갖다 두었습니다.
석 달이 지난 후 오베데돔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다는 말을 듣고 다윗은 드디어 때가 됐다고 믿고 법궤 옮기는 일을 재차 시도했습니다. 이번에는 매사에 극도로 조심스럽게 행했습니다. 또 소가 날뛸지도 모르니 이번에는 사람을 시켜 법궤를 매게 했습니다. 궤를 맨 사람들이 여섯 걸음을 옮길 때마다 다윗은 살진 황소 한 마리를 잡아 바쳤습니다. 다윗 자신은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모시옷을 입고 덩실덩실 춤을 췄다고 했습니다. 이 춤은 제사 행위의 일환이었습니다. 참으로 볼만 했겠습니다. 무사히 법궤가 예루살렘에 당도하자 다윗은 모여든 백성들에게 떡 한 개, 대추야자 한 뭉치, 건포도 떡 한 개 씩을 나눠줬다고 했습니다. 일의 성취가 얼마나 좋았으면 백성들에게 선물을 나눠줬겠습니까.
신앙과 정치적 계산의 공존
왜 그랬을까요? 왜 다윗은 위험을 무릅쓰고 야훼 하나님의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려 했을까요? 이 일이 그에게 어떤 의미를 갖고 있었을까요? 여기에는 다윗의 신앙이 크게 작용했음이 분명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법궤를 블레셋 군에게서 되찾아 온 후 20여 년 동안 아비나답의 집에 방치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법궤가 이렇게 버려져 있다는 사실을 두고 볼 수 없었던 모양입니다. 따라서 그의 행위는 법궤의 소중함을 인식하고 법궤가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를 찾아준 행위였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 행위는 철저한 정치적 계산에서 나온 행위기도 했습니다. 그는 법궤를 있던 곳으로 돌려보내지 않고 예루살렘으로 가져옴으로써 새로운 왕국의 수도 예루살렘을 종교의 중심지로 만들려 했던 것입니다. 이제는 법궤를 보고 싶거나 법궤가 있는 곳에서 제사를 드리려면 누구나 예루살렘으로 와야 했습니다.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지 않았던 때에 예루살렘에 법궤를 갖다 놓고 그곳을 종교의 중심지로 만들었다는 얘기는 곧 예루살렘을 정치의 중심지로 만들었다는 얘기입니다. 곧 권력을 자신에게 집중시키는 데 법궤를 이용하려는 의도가 다윗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추측해봅니다. 소가 요동치는 바람에 궤가 떨어질 뻔하고 사람이 죽었던 일은 다윗의 정치적 의도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가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 말입니다. 하나님 눈에 좋지 않았던 일은 수레를 몰던 자가 법궤에 손을 댄 일이 아니라 법궤를 권력 강화의 수단으로 삼으려는 다윗의 의도가 아니었을까요?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온 일은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다윗의 궁극적인 목표는 야훼 하나님의 집, 곧 성전을 짓는 것이었습니다. 사무엘하 7장은 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다윗이 예언자 나단에게 말했습니다. “나는 이렇게 화려한 송백으로 지은 집에서 사는데 하나님의 궤는 아직 천막 안에 모셔둔 채 그대로 있소.” 자기는 화려한 궁전에서 사는데 하나님의 궤는 남루한 천막에 모셔놨으니 송구스러워 잠을 이룰 수 없다는 뜻입니다. 곧 성전을 지어 하나님께 바치고 싶다는 뜻이지요.
다윗의 이 말에는 복선이 깔려 있습니다. 서로 상반되는 두 가지 의도가 공존하고 있습니다. 우선 송구스러워 잠을 이룰 수 없다는 다윗의 말의 진실성을 의심할 이유는 없습니다. 이 말은 진심이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같으면 안 그러겠습니까? 교회는 가난한데 나만 부유하면 마음이 편하겠습니까? 다윗도 비슷한 심정이었겠지요. 그래서 하나님께 성전을 지어드려야겠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정치적 계산 또한 들어 있었습니다. 신학, 곧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생각을 바꾸려는 시도가 그것이었습니다. 법궤와 성막은 사람이 매고 어디든 갈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것들은 하나님의 자유를 상징합니다. 하나님은 가고 싶은 대로 마음대로 갈 수 있는 자유로운 분입니다. 떠나고 싶으면 언제든지 떠날 수 있는 분입니다. 하지만 성전은 그렇지 않습니다. 성전은 고정되어 있고 움직일 수 없습니다. 성전에는 “하나님은 딴 데 가지 마시고 영원히 여기서 사십시오.” 라는 인간의 소망이 담겨 있는 건물입니다. 곧 떠나고 싶을 때 마음대로 떠날 수 있는 하나님의 자유를 제한하고 싶어 하는 인간의 욕망의 산물이 바로 성전이란 말씀입니다. 다윗은 성전을 짓고 싶다고 말할 때 화려한 송백나무와 남루한 천막을 대조시켰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자유와 속박이 대조되고 있습니다. 그의 의식 깊은 곳에 있었던 것은 성전을 지어 바침으로써 하나님을 영구히 자기 곁에 모셔두고 싶다는 욕망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소원을 거절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언자 나단에게 “나는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에서 이끌어내던 때부터 지금까지 천막을 치고 옮겨 다녔고 집안에 살아본 적이 없다. 내가 누구에게 집을 지어 달라고 한 적이 있느냐?”라고 말씀하시며 성전 건축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대신 하나님은 다른 약속을 다윗에게 주셨습니다. 다윗의 후손이 영원한 왕조를 이루리라는 약속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다윗의 후손이 죄를 지으면 징계는 하겠지만 당신의 사랑만은 거두지 않겠다고 하나님은 다윗에게 약속하셨습니다.
다윗은 이 약속을 듣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제가 무엇이기에 이토록 사랑해주십니까! 제게 베풀어주신 사랑만도 분에 넘치는데 훗날 종의 집안에 일어날 일까지 알려주시니 고마운 마음 헤아릴 수 없습니다.” 이렇게 감사와 찬양의 기도를 바친 후 다윗은 다음과 같은 말로 하나님께 청원했습니다. “하나님, 이제 당신께서 하신 말씀을 길이 변치 말고 이루어주십시오. 주님이야말로 참 하나님이시며 하시는 말씀에 거짓이 없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이 종에게 좋은 말씀을 내려주셨으니 부디 종의 왕실에 복을 내려주시어 하나님 앞에 영원히 서게 해주십시오. 야훼 나의 주님, 주님의 말씀대로 이 종의 왕실은 복을 길이 받아 누리겠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을 변치 말고 반드시 이루어 달라는 당부의 기도입니다.
누구의 목소리인가?
우리는 ‘사무엘하’라는 책을 세세하게 짜인 각본에 의해서 감독은 연출하고 배우는 연기하는 연극이 아니라 전체적인 방향만 주고 구체적인 연기는 전적으로 배우에게 맡기는 방식의 연극으로 읽고 있습니다. 지난 번 설교에서 살펴본 사무엘하 1-4장에 등장하는 배우들은 주연, 조연을 막론하고 무대 뒤의 연출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각자의 욕망이 이끄는 대로 연기하는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그들은 무대 뒤에 연출자가 있다는 사실조차 의식하지 않은 채 극의 전체적인 흐름은 나 몰라라 하며 각자의 욕망만을 추구하는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그런데 오늘 읽은 사무엘하 5-7장이 그리는 장면은 이와는 사뭇 다릅니다. 오늘 연극의 두 주인공은 다윗과 나단인데 이 두 사람은 앞의 장면에 등장하는 인물들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다윗은 두 장면 모두에 등장하지만 서로 다른 모습입니다. 나단은 예언자입니다. 연출자의 입장을 대변하는 사람이란 말씀입니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곧 연출자의 말로 받아들이게 되어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그대로 전하도록 되어 있는 예언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말 그랬습니까? 나단은 자기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만을 전했습니까? 그가 전한 말 가운데 자기 생각은 추호도 없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리 그가 예언자라 해도 그의 말 가운데는 하나님의 말씀과 예언자 자신의 말이 뒤섞여 있습니다. 그는 다윗이 성전을 짓겠다고 제안했을 때 그렇게 하라고 말했습니다. “야훼께서 함께 하시니 무엇이든지 뜻대로 하십시오.” 이 말은 다윗의 제안을 나단이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 허락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그 말은 밤중에 야훼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시자 뒤집혔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이 성전을 짓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면 다윗의 뜻대로 하라는 나단의 말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 자신의 말이었던 것입니다. 성전 건축과같이 중차대한 일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가 어떻게 하나님의 뜻이 아닌 자신의 뜻을 마치 하나님의 뜻인 양 전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렇다고 나단이 거짓 예언자였는가 하면 절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사람 모두에게 인정받는 참 예언자였습니다.
사무엘하 6-7장을 통해서 우리가 물어야 할 근본적인 질문은 이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과 사람의 말을 구별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뜻과 사람의 욕망을 구별할 수 있습니까? 사무엘하 1-5장에 등장했던 인물들은 무대 뒤의 연출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욕망만을 추구하는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이에 반해 6-7장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하나님의 뜻을 내세웁니다. 그러나 조금만 깊이 살펴보면 이들이 내세우는 하나님의 뜻에는 자기 자신의 욕망이 뒤얽혀 있습니다.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가져오고 성전을 지으려 했던 다윗의 의도가 그랬습니다. 성전 건축을 허락했던 나단에게도 분명 그 자신의 의도가 있었을 것입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뜻과 자신의 욕망이 뒤얽혀 있는 주인공들의 마음이 그들의 언어와 행위로 표출됐습니다. 이들의 언어와 행위는 어디까지가 그들 욕망의 표현이고 어디서부터가 하나님의 뜻입니까? 이와 같은 갈등과 이중성은 다윗과 나단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을 갖고 산다고 하는 우리가 하는 말과 행위에도 대부분의 경우에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 하는 의지와 나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고자 하는 욕구가 뒤섞여 있습니다. 우리가 아주 양심을 저버리지 않고 눈곱만큼이라도 양심이 살아 있는 한 우리가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실행하고 있다고 말하지 못합니다. 반대로 우리가 신앙을 헌신짝처럼 내버리지 않는 한 우리는 전적으로 욕망의 화신이 되지도 못합니다. 우리는 신앙이 있기에, 눈곱만큼이라도 양심이 살아 있기에 제어되지 않은 욕망의 화신이 되지도 못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기 위해 내 욕망을 억제하려고 노력합니다. 나는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어디까지가 내 욕망이고 어디까지가 하나님의 뜻인지를 분별하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게다가 우리에게는 스스로를 속이려는 경향도 존재합니다. 사도 바울의 외침대로, 나는 선을 행하고 싶지만 악을 향해 치달리고 있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 하지만 죄의 법의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지금 내가 하는 말은 누구의 목소리입니까? 하나님의 목소리입니까, 아니면 내 욕망의 외침입니까? “나는 이렇게 화려한 송백으로 지은 집에서 사는데 하나님의 궤는 아직 천막 안에 모셔둔 채 그대로 있소.”라는 말은 누구의 목소리입니까?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열정에서 나온 목소리입니까, 아니면 다윗의 욕망의 외침입니까? “야훼께서 함께 하시니 무엇이든지 뜻대로 하십시오.” 이 목소리는 누구의 목소리입니까? 하나님의 뜻을 대변하는 목소리입니까, 아니면 정치적 의도를 숨기고 있는 자연인 나단의 목소리입니까?
어떤 사람이 환상 중에 하나님의 목소리를 생생하게 들었다고 흥분해서 제게 얘기했습니다. 대단한 경험이긴 하지만 찬물을 끼얹는 것 같아 미안해하면서 제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그 목소리가 하나님의 목소리인지 어떻게 아십니까?” 이 질문은 모든 신앙인에게 중요한 질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금 내가 하는 말은 누구의 목소리입니까? 우리는 지금 이 질문의 한 가운데 들어와 있습니다. 다음 주일에 계속해서 생각해보고 답을 찾아야 할 질문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