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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영국 목사 (대흥교회)
오늘 우리가 나눌 말씀은 룻기의 결론 부분인 4장 말씀입니다.
룻기의 말씀은 엘리멜렉의 가정을 소개한 4장 85절로 되어진 짧은 책이지만 현대의 성도들에게 매우 현실적인 문제 해결을 가르쳐줍니다. 한 버림받은 이방 여인 룻, 그것도 남편을 잃고 아무런 소망도 없고, 한 끼니를 걱정해야하는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여인을 이스라엘 역사 속에 위대한 축복의 여인으로 어떻게 변화시켜 나가시는가? 보여줍니다.
1장에서는 우리들에게 선택이 얼마나 중요한 축복의 통로인가를 말씀합니다. 엘리멜렉의 선택이 가져온 슬픈 결과들, 오르바가 선택한 매우 현실의 안위와 행복을 위한 선택, 반면에 좀 모자란 듯한 룻의 선택이 비교되어 나옵니다. 홀로된 시어머니를 택하고, 세상의 행복보다는 그 하나님을 택한 것을 하나님께서 얼마나 귀히 보시는가? 말씀합니다. 중국 역사에 보면, 위나라가 제나라를 공격했을 때에 한 여인이 두 아이를 데리고 도망가는데 한 아이를 업고, 한 아이의 손을 잡고 뛰다가 잡히자, 업었던 아이를 내려두고, 손에 잡았던 아이를 안고 뛰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던 위나라 장군이 그 여인을 데려다가 물었습니다. 왜? 시간이 급한데 업고 가던 아이를 내려놓고 손에 잡고 가던 아이를 들고 뛰었는가? - 그 여인이 말하기를, 업은 아이는 내 자식이고, 손을 잡고 가던 아이는 형님 댁의 아이입니다. 형님아이를 데려오면서 약속하기를 반드시 아이를 살려서 데려오겠다고 하였기 때문에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내 아이를 내려놓았습니다. 이 말을 들은 위나라 장군은 그 자리에서 군대를 돌려서 돌아갔다고 합니다. 약속을 지키는 신뢰가 있고, 아름다운 선택을 감당하는 백성과 싸우면 승산이 없다는 결론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신앙과 하나님을 선택할 때에 그 선택을 통하여 축복하여 주십니다.
2장에서는 만남이 얼마나 중요한 축복의 통로인가를 말씀합니다. 모압 여인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와 베들레헴으로 돌아오자마자, 이삭줍기를 위해 우연히 밭에 나가서 일하게 되었는데, 그 밭이 기업 무를 자 중의 하나인 보아스의 밭이었습니다. 우리는 우연히 만나지만, 하나님은 놀라운 축복의 계획 속에서 만남을 이루어가십니다. 보잘것없고, 아무것도 아닌 한 사람과의 만남도 귀한 축복의 통로입니다. 좋은 목사라고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목회자의 최고의 축복은 좋은 성도만나는 것이고, 성도에게도 최고의 축복은 좋은 목회자를 만나는 것입니다. 겸손하게 만남을 이루고, 축복하는 만남을 이루어 가야 합니다. 보아스와 그 종들과의 인사는 교회의 중요한 전통 인사였습니다. “ 아도나이 임마헴 - 여바레흐아 아도나이…….” (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를……. - 하나님이 복주시기를……. ) 평생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축복합시다. 모든 만남은 축복의 통로입니다.
3장에서는 열정과 도전이 얼마나 중요한 축복의 통로인가를 말씀합니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주님 만날만한 장소에 성결한 모습으로 자꾸 나아가십시오. 하나님은 자꾸 문을 두드리는 자에게 축복의 문을 열어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믿음의 영웅들을 보면, 다 믿음으로 열정을 갖고 도전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믿음으로 도전할 때에 축복의 통로로 역사하십니다.
오늘 나눌 말씀은 마지막 4장입니다. 4장은 룻이 누린 축복의 가장 결정적인 통로를 말씀하는데, 그것은 기업 무를 자를 통한 축복입니다. 보아스는 성문에서 기업 무를 자 중에서 가장 가까운 자를 만나 그에게 나오미 가정과 룻에 대한 기업 무를 자에 대한 선택을 하게 합니다. 그 사람은 자기에게 유익이 되지 않을까하여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보아스에게 넘겼고, 보아스는 룻을 아내로 취하여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감당하게 됩니다.
룻기의 시작을 보시면 3명의 죽음(엘리멜렉과 말론과 기룐)의 스토리로부터 시작되지만, 마지막에는 오벳과 이새와 다윗, 세 명의 역사적 출생의 결론으로 끝납니다.(이름만 들어도 전율이 오는 이름들…….) 장례식으로 시작된 스토리가 혼인 잔치로 끝납니다. 한 가난한 모압 여인의 이삭줍기에서 시작되어서 풍요로운 삶으로 스토리가 끝납니다. 이것이 기업 무를 자의 축복을 통해서 얻는 변화입니다. 우리 모든 성도님들의 이민의 삶도 “기업 무를 자” 안에서, 이렇게 변화된 스토리의 인생이 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모든 슬픔과 절망이 변해서 소망의 도전으로, 생명과 축제의 삶으로 변화될 수 있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기업 무를 자의 은혜
오늘 말씀을 이해하시려면, 기업 무를 자에 대한 제도를 알아야 합니다. 지난주에도 “기업 무를 자”라는 단어가 나와서 잠깐 언급했었습니다. 우리말로는 “기업 무를 자”라는 것이 매우 생소합니다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고엘 제도”라고 하면 쉽게 이해를 합니다. 영어로는 Redeemer (구조, 구출, 구세주)라는 뜻으로 변역했습니다. 고엘 제도의 원래의 목적은 혈통 보존과 억울한 죽음을 이기는 생명 존속을 위한 제도였습니다. 빚도 대신 갚아 주었지만, 원수까지도 대신 해결해 주어야만 했습니다. 가장 가까운 형제로부터 순서를 정하여서, 기업을 잃어버리고, 혈통이 끊어져버린 친족을 대신해서 그 빚진 것들을 대신 다 갚아주고, 물질적으로나 혈연적으로나 대를 이어주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고엘 제도는 결코 억지로는 하지 않고 자원하는 자만이 실천할 수 있었습니다. 가장 가까운 형제가 자원하지 않으면 그 다음 형제로, 그 다음 먼 형제로……. 그 기업 무를 책무와 권한이 넘어갔던 것입니다. ( 부채를 탕감하고 돌보아줄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어야 하고 , 또한 자원해야 합니다 ) 모압 여인 룻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기업 무를 자에 대해서 생소했습니다. 그러나 룻의 삶의 가장 놀라운 변화와 축복의 이유를 한 가지만 말하라고 하면, 그것은 “기업 무를 자” 때문이었습니다.
가난하고 이방 백성이었으며 아무 소망이 없는 룻에게 “기업 무를 자”로 세워진 보아스의 모습은 마치 우리의 구원을 이루는 대표적 사건이었습니다. 영어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Redeemer”라고 부릅니다. (고엘, 기업 무를 자)라는 뜻입니다. “본래 죄를 범함으로 말미암아 이방인이었던 우리는 룻과 같이 이삭줍기로 하루하루 먹고 살다가 죽는 것 밖에 아무런 소망이 없었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Redeemer ( 고엘, 구조 자 ) 가 되어 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나라의 기업을 풍족히 누릴 수 있는 보장을 받게 된 것입니다.
죄악 속에 팽개쳐진 우리를 위해 죽으신 고엘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갚아주시고 베푸신 축복이 무엇입니까?
(1)첫째는 죄악으로부터의 구원입니다. 과거에 엘리멜렉의 집을 보면, 자기 재산과 재물을 사랑하고, 사리사욕에 대단히 민감하고, 좀 더 잘 살기를 원하였던 그들……. 하나님 중심보다는 잘 먹고 잘살기를 구하여, 모압 땅으로 나아갔던 엘리멜렉의 가정이었지만, 그 가정의 빛은 오직 “고엘” (보아스)이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를 구속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자기 피를 대신 지불하시고 죄용서를 이루신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진 빚들을 피로 갚아주신 것입니다. 로마서5:8 -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2)예수님은 우리의 고엘(기업 무를 자)이 되어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얻게 하신 축복이 “ 우리를 하나님의 후사가 되게 하시고, 우리의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워지지 않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10절에 보면, “ 또 말론의 아내 모압 여인 룻을 사서 나의 아내로 취하고 그 죽은 자의 기업을 그 이름으로 잇게 하여 그 이름이 그 형제 중과 그곳 성문에서 끊어지지 않게 함에 너희가 오늘날 증인이 되었느니라…….” 그 이름을 형제 중에서 끊어지지 않도록 하였다고 말씀합니다. 바로 예수님은 그의 “십자가 사랑”으로, 우리로 하여금 천국 문에서 우리의 이름을 불리도록, 하나님의 후사가 되는 축복을 얻게 된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로마서 5:15-17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넘쳤으리라 또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을 인하여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
(3)그리고 덤으로 주신 축복은, 나오미와 룻이 빈손들이고 돌아왔지만, 기업 무를 자 보아스로 말미암아, 그의 가진 모든 것, 그의 명예와 그의 물질과 그의 모든 것을 함께 누릴 수 있는 축복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우리들에게 주신 기업의 축복은 “예수 그리스도의 존귀한 이름과 그 성결과 그 능력과 풍성함”을 함께 누리게 되는 축복을 얻게 된 줄로 믿습니다. 롬 8: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주의 것이 다 우리 것이 된 줄로 믿습니다. 내 모든 것은 주의 것이며, 주의 모든 것이 내 것이 되는 삶이되시기를 원합니다.
2. 예수 안에서 누리는 최고의 축복
(1)기업 무를 자로 말미암아 룻이 누린 최고의 축복은 변화입니다. 장례식의 슬픈 모습으로 시작된 삶이 혼인잔치의 축제로 마치는 것이 룻이 누린 축복입니다. 아비멜렉과 말론과 기룐의 죽음으로 절망적인 가정이 기업 무를 자로 말미암아 오벳과 이새와 다윗으로 이어지는 소망의 세계로 변화되었습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누리는 변화의 축복입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태어나서 죽음으로 끝이 나지만, 기업 무를 자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 그의 피 값으로 변화된 자녀들은 소망의 세계로 들어가게 된 줄로 믿습니다.
창세기 5장에는 아담의 족보가 나오고, 마태복음1장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가 나옵니다. 특징이 있다면 아담의 족보의 사람들은 무지하게 오래 살았다는 것 (보통 930, 870, 무두셀라는 969년)과 모든 문장의 결론은 죽었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태복음1장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보면 얼마나 살았는지는 잘 모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에서는 오래 살고 적게 살고가 별로 의미가 없습니다. 중요한 특징은 죽었더라.…….가 아니라, 낳고. 낳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최고의 축복은 소망의 세계에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제일먼저 베푸신 이적은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보여주신 물이 포도주가 되는 변화”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구속의 주로 오셔서 우리에게 이루실 공생애의 사역을 한마디로 말하라면 “변화”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안에서 누리는 최고의 축복은 변화입니다. 쓸데없고 모자라고 소망 없는 자가 죽음이 없는 귀한 존재로 생명과 소망의 세계 가운데 살게 된 줄로 믿습니다. 세상에는 변화되어서는 안 될 것이 있고, 변화되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시편4:2에서 죄악 된 인생을 향하여 이렇게 하나님은 선포하십니다. “ “인생들아 어느 때까지 나의 영광을 변하여 욕되게 하며 허사를 좋아하는고.” 하나님의 영광을 변하게 하는 것들은 유해한 변화입니다. 그러나 시편 30:11에 보면, 다윗이 고백하는 말 “주께서 나의 슬픔을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
우리 신앙의 삶은 변화로부터 이루어져갑니다. 룻이 누린 변화! 슬픔과 절망과 두려움과 죽음으로부터 결국은 평강과 풍성함과 행복과 소망과 생명으로 변화되어져가는 것이 신앙의 변화입니다. 바로 이 책이 룻기의 말씀입니다. 룻이 누린 축복들을 봅시다.
(2)오늘 말씀 11,12절을 보면, 성문의 많은 이웃과 장로들과 백성들로부터 “ 칭찬의 축복” “자녀를 갖는 축복” “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축복” 받는 것을 봅니다.
대부분 축복하면 엄청난 부와 영화와 권력과 힘과 건강과 장수, 자녀들이 좋은 대학,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 등을 생각합니다만, 이런 것은 다 없어질 것들이고 참된 축복의 삶이 무엇인지를 룻기에서 말씀해 줍니다. 룻은 모든 장로와 백성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룻이 잘나서가 아니라, 보아스의 존귀와 칭찬이 그대로 룻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또한 룻은 평범한 자녀를 가졌다는 것이 축복입니다. 나이 들어 오벳을 낳았습니다. 시세로는 말하기를 “인류의 축복 중에 자녀를 주신 축복보다 더 큰 것은 없다” 여기에 소망이 있고 꿈이 있고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가 펼쳐집니다. 우리들이 누리는 가장 큰 축복은 평범한 축복입니다. 살아가면서 건강한 몸으로 살아간다는 것보다 더 큰 축복은 없습니다. 아파보면 깨닫게 됩니다. 한쪽 발목을 다친 적이 있습니다. 한발로 산다는 것이 참 힘들어요. 한발만 쓰니까 피곤하고, 목발을 짚으니까, 옆구리가 아프고 두 다리로 서서 살아가는 것만도 감사한 것입니다. 우리 평범한 삶!!!! 날마다 산해진미의 진수성찬은 먹지 못하고, 고래 등 같은 집에서 잘 수 없다고 할지라도, 우리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살아가고, 두 눈과 두 귀로 분수 있고 들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일인지 모릅니다. 풍성하지는 못하지만, 땀 흘려 일하고 떳떳하게 일한 대가를 받아올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축복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월급 봉투가지고 남의 것과 비교해서 기분나빠하는 사람은 정말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어떤 회사의 간부직원이 이런 고백을 합니다. 어느 날 부적절한 뇌물을 한번 받고 나니까, 그날부터 퇴근도 없어지고 휴가도 없어졌다는 겁니다. 집에 퇴근해가도 불안하고, 휴가를 가도 들통이 날까봐 불안하고 초조합니다. 그 뇌물이 얼마나 풍성한 육적인 생활은 할 수 있는지 모르지만, 그 형벌을 스스로 받으면서 살아가는 겁니다.
정직하고 성실하게 평범하게 살아가는 것은 우리 성도들이 누려야할 행복한 모습입니다.
(3) 우리가 하나님의 다스림과 돌보심 속에 살아갈 수 있다는 것 ! 원래 행복이라는 단어 beatus 라는 말은 “하나님의 돌보심의 은혜를 받고 있을 때에 나타나는 현상”이라는 뜻입니다. 평범한 삶속에서 하나님이 보호하시고 지켜주심을 믿고 감사하고 그 축복을 누리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원합니다.
3. 룻이 남긴 향기 (효도, 겸손)
룻기를 마치면서 마지막으로 나눌 말씀은 축복받은 룻이 남긴 아름다운 발자취입니다. 성도의 삶은 아름다운 발자취를 남길 수 있어야 합니다. 룻이 남긴 아름다운 향기중의 하나가 효도입니다. 룻은 끝까지 어머니를 따랐으며, 끝까지 어머니께 순종하였습니다. 룻에게 결정적인 위기가 있었다면 동서 오르바가 어머니를 따르겠다고 하다가 말고, 마음을 바꾸어 모압 땅과 새 신랑을 찾아 떠날 때였을 것입니다. 나오미도 “ 보라 네 동서는 그 백성과 그 신에게로 돌아가나니 너도 동서를 따라 돌아가라” 그래도, 룻은 단호한 마음으로 고백하기를 “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저 같으면 같이 남기로 했다가 오르바가 떠나는 순간에 무지하게 오르바를 원망했을 것 같아요. 그러나 4장까지를 보면, 원망할 것 하나도 없어요. 만약에 오르바도 같이 베들레헴에 돌아왔다면, 룻 혼자 차지할 그 엄청난 축복을 나누었을 것입니다. 부모를 섬길 때에 때때로 형제가 원망스러울 때가 있지 않습니까? 도대체 자식은 나 혼자란 말인가? 아니, 왜 나만 부모를 모셔야 한 단말인가? 원망할 것 없어요. 축복도 우리의 것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십계명 가운데 모두 내가 언제라도 죽기 전에 지킬 수 있지만, 지키고 싶어도 지킬 수 없는 계명이 하나 있습니다. “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은 유효한 기간이 있는 계명입니다. 내가 순종하고 싶어도 부모님이 안계시면 지킬 수 없어요. 평생 5계명을 범한 죄인일 뿐입니다.
순종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키베드”라는 단어입니다. 이 말은 “ 우리 내장 가운데 간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우리의 내장 가운데 가장 중요한 기관이 “간”입니다. 여러 가지 다른 암은 수술도 하고 고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지만, 간은 일단 고장 나면 치명적입니다. 세상에 아무 겁도 없는 사람을 뭐라고 합니까? “ 간이 부었다”고 말합니다. 구제불능이라는 말입니다. 중국어에도 “ 쥐뿔도 없는 사람이 건방을 떠는 것을 가리켜서 - 배 밖으로 간이 나왔다”는 표현을 씁니다. 간염, 간경화증 간에 관한한 아무것도 현대 의학으로는 고칠 수 없습니다. 네 부모를 간과같이 여기라……. 이것이 순종입니다.
일석 삼조라는 말의 의미를 아십니까? 한 번에 세 가지의 유익을 얻는다는 말입니다. 효도야 말로 일석 삼조의 축복이 있는 계명입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명령에 대하여 순종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행위가 됩니다. 둘째는 제 5계명 부모에 대한 효도를 감당하는 우리들 자신이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셋째는 이 효도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놀라운 축복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록펠러(1837-1935) 어려서 무척 가난하였습니다. 신문팔이. 공장 직공 등……. 그러나 아름다운 유산을 가지고 있었는데, 어머니의 유산이었습니다. 10계명의 유산이었습니다.
1. 하나님을 친아버지로 믿고 섬겨라
2. 목사님을 거역하지 말고 늘 함께 하라.
3. 오른쪽 주머니에는 십일조를 보관해 두어라.
4. 원수를 만들지 말라
5. 예배를 드릴 때 항상 앞자리에 앉아서 드려라
6. 매일 아침마다 그 날의 목표를 세우고 하나님께 기도하라
7. 잠자리에 들기 전에는 반드시 하루를 반성하고 기도를 드려라
8. 남을 도울 수 있을 때에는 힘껏 도와라
9. 주일예배는 꼭 본 교회에서 드려라
10. 아침에는 제일 먼저 성경을 읽어라.
부모에게 잘하는 것은 우리의 향기로운 발자취이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며 축복하실만한 아름다움입니다.
또한, 룻의 아름다움은 겸손입니다. 물 한잔에도 땅에 엎드릴 줄 아는 마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축복하시며, 성도가 남길 아름다운 향기입니다. “왜 날 안 알아주시나요?” “왜 난 인정 안하세요?” 그러지 맙시다. 하나님이 알아주시면 되요. 우리 대흥교회가 처음 교회당을 빌려볼 때에 미국교회 목사님이 주일날 오후에 우리 교회 예배가 끝나면 , 교회에 볼 일이 있어서 온 것처럼 오셔서 아기들 방의 기저귀들, 쓰레기통을 다 비웠어요. 몰랐는데, 떠나신 다음에 교회가 알게 되었습니다. 향기의 발자취입니다. 겸손하고 부모의 뜻에 순종하는 향기로운 삶의 발자취를 남길 수 있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우리가 나눌 말씀은 룻기의 결론 부분인 4장 말씀입니다.
룻기의 말씀은 엘리멜렉의 가정을 소개한 4장 85절로 되어진 짧은 책이지만 현대의 성도들에게 매우 현실적인 문제 해결을 가르쳐줍니다. 한 버림받은 이방 여인 룻, 그것도 남편을 잃고 아무런 소망도 없고, 한 끼니를 걱정해야하는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여인을 이스라엘 역사 속에 위대한 축복의 여인으로 어떻게 변화시켜 나가시는가? 보여줍니다.
1장에서는 우리들에게 선택이 얼마나 중요한 축복의 통로인가를 말씀합니다. 엘리멜렉의 선택이 가져온 슬픈 결과들, 오르바가 선택한 매우 현실의 안위와 행복을 위한 선택, 반면에 좀 모자란 듯한 룻의 선택이 비교되어 나옵니다. 홀로된 시어머니를 택하고, 세상의 행복보다는 그 하나님을 택한 것을 하나님께서 얼마나 귀히 보시는가? 말씀합니다. 중국 역사에 보면, 위나라가 제나라를 공격했을 때에 한 여인이 두 아이를 데리고 도망가는데 한 아이를 업고, 한 아이의 손을 잡고 뛰다가 잡히자, 업었던 아이를 내려두고, 손에 잡았던 아이를 안고 뛰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던 위나라 장군이 그 여인을 데려다가 물었습니다. 왜? 시간이 급한데 업고 가던 아이를 내려놓고 손에 잡고 가던 아이를 들고 뛰었는가? - 그 여인이 말하기를, 업은 아이는 내 자식이고, 손을 잡고 가던 아이는 형님 댁의 아이입니다. 형님아이를 데려오면서 약속하기를 반드시 아이를 살려서 데려오겠다고 하였기 때문에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내 아이를 내려놓았습니다. 이 말을 들은 위나라 장군은 그 자리에서 군대를 돌려서 돌아갔다고 합니다. 약속을 지키는 신뢰가 있고, 아름다운 선택을 감당하는 백성과 싸우면 승산이 없다는 결론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신앙과 하나님을 선택할 때에 그 선택을 통하여 축복하여 주십니다.
2장에서는 만남이 얼마나 중요한 축복의 통로인가를 말씀합니다. 모압 여인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와 베들레헴으로 돌아오자마자, 이삭줍기를 위해 우연히 밭에 나가서 일하게 되었는데, 그 밭이 기업 무를 자 중의 하나인 보아스의 밭이었습니다. 우리는 우연히 만나지만, 하나님은 놀라운 축복의 계획 속에서 만남을 이루어가십니다. 보잘것없고, 아무것도 아닌 한 사람과의 만남도 귀한 축복의 통로입니다. 좋은 목사라고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목회자의 최고의 축복은 좋은 성도만나는 것이고, 성도에게도 최고의 축복은 좋은 목회자를 만나는 것입니다. 겸손하게 만남을 이루고, 축복하는 만남을 이루어 가야 합니다. 보아스와 그 종들과의 인사는 교회의 중요한 전통 인사였습니다. “ 아도나이 임마헴 - 여바레흐아 아도나이…….” (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를……. - 하나님이 복주시기를……. ) 평생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축복합시다. 모든 만남은 축복의 통로입니다.
3장에서는 열정과 도전이 얼마나 중요한 축복의 통로인가를 말씀합니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주님 만날만한 장소에 성결한 모습으로 자꾸 나아가십시오. 하나님은 자꾸 문을 두드리는 자에게 축복의 문을 열어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믿음의 영웅들을 보면, 다 믿음으로 열정을 갖고 도전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믿음으로 도전할 때에 축복의 통로로 역사하십니다.
오늘 나눌 말씀은 마지막 4장입니다. 4장은 룻이 누린 축복의 가장 결정적인 통로를 말씀하는데, 그것은 기업 무를 자를 통한 축복입니다. 보아스는 성문에서 기업 무를 자 중에서 가장 가까운 자를 만나 그에게 나오미 가정과 룻에 대한 기업 무를 자에 대한 선택을 하게 합니다. 그 사람은 자기에게 유익이 되지 않을까하여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보아스에게 넘겼고, 보아스는 룻을 아내로 취하여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감당하게 됩니다.
룻기의 시작을 보시면 3명의 죽음(엘리멜렉과 말론과 기룐)의 스토리로부터 시작되지만, 마지막에는 오벳과 이새와 다윗, 세 명의 역사적 출생의 결론으로 끝납니다.(이름만 들어도 전율이 오는 이름들…….) 장례식으로 시작된 스토리가 혼인 잔치로 끝납니다. 한 가난한 모압 여인의 이삭줍기에서 시작되어서 풍요로운 삶으로 스토리가 끝납니다. 이것이 기업 무를 자의 축복을 통해서 얻는 변화입니다. 우리 모든 성도님들의 이민의 삶도 “기업 무를 자” 안에서, 이렇게 변화된 스토리의 인생이 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모든 슬픔과 절망이 변해서 소망의 도전으로, 생명과 축제의 삶으로 변화될 수 있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기업 무를 자의 은혜
오늘 말씀을 이해하시려면, 기업 무를 자에 대한 제도를 알아야 합니다. 지난주에도 “기업 무를 자”라는 단어가 나와서 잠깐 언급했었습니다. 우리말로는 “기업 무를 자”라는 것이 매우 생소합니다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고엘 제도”라고 하면 쉽게 이해를 합니다. 영어로는 Redeemer (구조, 구출, 구세주)라는 뜻으로 변역했습니다. 고엘 제도의 원래의 목적은 혈통 보존과 억울한 죽음을 이기는 생명 존속을 위한 제도였습니다. 빚도 대신 갚아 주었지만, 원수까지도 대신 해결해 주어야만 했습니다. 가장 가까운 형제로부터 순서를 정하여서, 기업을 잃어버리고, 혈통이 끊어져버린 친족을 대신해서 그 빚진 것들을 대신 다 갚아주고, 물질적으로나 혈연적으로나 대를 이어주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고엘 제도는 결코 억지로는 하지 않고 자원하는 자만이 실천할 수 있었습니다. 가장 가까운 형제가 자원하지 않으면 그 다음 형제로, 그 다음 먼 형제로……. 그 기업 무를 책무와 권한이 넘어갔던 것입니다. ( 부채를 탕감하고 돌보아줄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어야 하고 , 또한 자원해야 합니다 ) 모압 여인 룻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기업 무를 자에 대해서 생소했습니다. 그러나 룻의 삶의 가장 놀라운 변화와 축복의 이유를 한 가지만 말하라고 하면, 그것은 “기업 무를 자” 때문이었습니다.
가난하고 이방 백성이었으며 아무 소망이 없는 룻에게 “기업 무를 자”로 세워진 보아스의 모습은 마치 우리의 구원을 이루는 대표적 사건이었습니다. 영어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Redeemer”라고 부릅니다. (고엘, 기업 무를 자)라는 뜻입니다. “본래 죄를 범함으로 말미암아 이방인이었던 우리는 룻과 같이 이삭줍기로 하루하루 먹고 살다가 죽는 것 밖에 아무런 소망이 없었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Redeemer ( 고엘, 구조 자 ) 가 되어 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나라의 기업을 풍족히 누릴 수 있는 보장을 받게 된 것입니다.
죄악 속에 팽개쳐진 우리를 위해 죽으신 고엘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갚아주시고 베푸신 축복이 무엇입니까?
(1)첫째는 죄악으로부터의 구원입니다. 과거에 엘리멜렉의 집을 보면, 자기 재산과 재물을 사랑하고, 사리사욕에 대단히 민감하고, 좀 더 잘 살기를 원하였던 그들……. 하나님 중심보다는 잘 먹고 잘살기를 구하여, 모압 땅으로 나아갔던 엘리멜렉의 가정이었지만, 그 가정의 빛은 오직 “고엘” (보아스)이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를 구속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자기 피를 대신 지불하시고 죄용서를 이루신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진 빚들을 피로 갚아주신 것입니다. 로마서5:8 -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2)예수님은 우리의 고엘(기업 무를 자)이 되어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얻게 하신 축복이 “ 우리를 하나님의 후사가 되게 하시고, 우리의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워지지 않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10절에 보면, “ 또 말론의 아내 모압 여인 룻을 사서 나의 아내로 취하고 그 죽은 자의 기업을 그 이름으로 잇게 하여 그 이름이 그 형제 중과 그곳 성문에서 끊어지지 않게 함에 너희가 오늘날 증인이 되었느니라…….” 그 이름을 형제 중에서 끊어지지 않도록 하였다고 말씀합니다. 바로 예수님은 그의 “십자가 사랑”으로, 우리로 하여금 천국 문에서 우리의 이름을 불리도록, 하나님의 후사가 되는 축복을 얻게 된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로마서 5:15-17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넘쳤으리라 또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을 인하여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
(3)그리고 덤으로 주신 축복은, 나오미와 룻이 빈손들이고 돌아왔지만, 기업 무를 자 보아스로 말미암아, 그의 가진 모든 것, 그의 명예와 그의 물질과 그의 모든 것을 함께 누릴 수 있는 축복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우리들에게 주신 기업의 축복은 “예수 그리스도의 존귀한 이름과 그 성결과 그 능력과 풍성함”을 함께 누리게 되는 축복을 얻게 된 줄로 믿습니다. 롬 8: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주의 것이 다 우리 것이 된 줄로 믿습니다. 내 모든 것은 주의 것이며, 주의 모든 것이 내 것이 되는 삶이되시기를 원합니다.
2. 예수 안에서 누리는 최고의 축복
(1)기업 무를 자로 말미암아 룻이 누린 최고의 축복은 변화입니다. 장례식의 슬픈 모습으로 시작된 삶이 혼인잔치의 축제로 마치는 것이 룻이 누린 축복입니다. 아비멜렉과 말론과 기룐의 죽음으로 절망적인 가정이 기업 무를 자로 말미암아 오벳과 이새와 다윗으로 이어지는 소망의 세계로 변화되었습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누리는 변화의 축복입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태어나서 죽음으로 끝이 나지만, 기업 무를 자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 그의 피 값으로 변화된 자녀들은 소망의 세계로 들어가게 된 줄로 믿습니다.
창세기 5장에는 아담의 족보가 나오고, 마태복음1장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가 나옵니다. 특징이 있다면 아담의 족보의 사람들은 무지하게 오래 살았다는 것 (보통 930, 870, 무두셀라는 969년)과 모든 문장의 결론은 죽었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태복음1장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보면 얼마나 살았는지는 잘 모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에서는 오래 살고 적게 살고가 별로 의미가 없습니다. 중요한 특징은 죽었더라.…….가 아니라, 낳고. 낳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최고의 축복은 소망의 세계에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제일먼저 베푸신 이적은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보여주신 물이 포도주가 되는 변화”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구속의 주로 오셔서 우리에게 이루실 공생애의 사역을 한마디로 말하라면 “변화”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안에서 누리는 최고의 축복은 변화입니다. 쓸데없고 모자라고 소망 없는 자가 죽음이 없는 귀한 존재로 생명과 소망의 세계 가운데 살게 된 줄로 믿습니다. 세상에는 변화되어서는 안 될 것이 있고, 변화되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시편4:2에서 죄악 된 인생을 향하여 이렇게 하나님은 선포하십니다. “ “인생들아 어느 때까지 나의 영광을 변하여 욕되게 하며 허사를 좋아하는고.” 하나님의 영광을 변하게 하는 것들은 유해한 변화입니다. 그러나 시편 30:11에 보면, 다윗이 고백하는 말 “주께서 나의 슬픔을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
우리 신앙의 삶은 변화로부터 이루어져갑니다. 룻이 누린 변화! 슬픔과 절망과 두려움과 죽음으로부터 결국은 평강과 풍성함과 행복과 소망과 생명으로 변화되어져가는 것이 신앙의 변화입니다. 바로 이 책이 룻기의 말씀입니다. 룻이 누린 축복들을 봅시다.
(2)오늘 말씀 11,12절을 보면, 성문의 많은 이웃과 장로들과 백성들로부터 “ 칭찬의 축복” “자녀를 갖는 축복” “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축복” 받는 것을 봅니다.
대부분 축복하면 엄청난 부와 영화와 권력과 힘과 건강과 장수, 자녀들이 좋은 대학,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 등을 생각합니다만, 이런 것은 다 없어질 것들이고 참된 축복의 삶이 무엇인지를 룻기에서 말씀해 줍니다. 룻은 모든 장로와 백성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룻이 잘나서가 아니라, 보아스의 존귀와 칭찬이 그대로 룻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또한 룻은 평범한 자녀를 가졌다는 것이 축복입니다. 나이 들어 오벳을 낳았습니다. 시세로는 말하기를 “인류의 축복 중에 자녀를 주신 축복보다 더 큰 것은 없다” 여기에 소망이 있고 꿈이 있고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가 펼쳐집니다. 우리들이 누리는 가장 큰 축복은 평범한 축복입니다. 살아가면서 건강한 몸으로 살아간다는 것보다 더 큰 축복은 없습니다. 아파보면 깨닫게 됩니다. 한쪽 발목을 다친 적이 있습니다. 한발로 산다는 것이 참 힘들어요. 한발만 쓰니까 피곤하고, 목발을 짚으니까, 옆구리가 아프고 두 다리로 서서 살아가는 것만도 감사한 것입니다. 우리 평범한 삶!!!! 날마다 산해진미의 진수성찬은 먹지 못하고, 고래 등 같은 집에서 잘 수 없다고 할지라도, 우리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살아가고, 두 눈과 두 귀로 분수 있고 들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일인지 모릅니다. 풍성하지는 못하지만, 땀 흘려 일하고 떳떳하게 일한 대가를 받아올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축복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월급 봉투가지고 남의 것과 비교해서 기분나빠하는 사람은 정말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어떤 회사의 간부직원이 이런 고백을 합니다. 어느 날 부적절한 뇌물을 한번 받고 나니까, 그날부터 퇴근도 없어지고 휴가도 없어졌다는 겁니다. 집에 퇴근해가도 불안하고, 휴가를 가도 들통이 날까봐 불안하고 초조합니다. 그 뇌물이 얼마나 풍성한 육적인 생활은 할 수 있는지 모르지만, 그 형벌을 스스로 받으면서 살아가는 겁니다.
정직하고 성실하게 평범하게 살아가는 것은 우리 성도들이 누려야할 행복한 모습입니다.
(3) 우리가 하나님의 다스림과 돌보심 속에 살아갈 수 있다는 것 ! 원래 행복이라는 단어 beatus 라는 말은 “하나님의 돌보심의 은혜를 받고 있을 때에 나타나는 현상”이라는 뜻입니다. 평범한 삶속에서 하나님이 보호하시고 지켜주심을 믿고 감사하고 그 축복을 누리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원합니다.
3. 룻이 남긴 향기 (효도, 겸손)
룻기를 마치면서 마지막으로 나눌 말씀은 축복받은 룻이 남긴 아름다운 발자취입니다. 성도의 삶은 아름다운 발자취를 남길 수 있어야 합니다. 룻이 남긴 아름다운 향기중의 하나가 효도입니다. 룻은 끝까지 어머니를 따랐으며, 끝까지 어머니께 순종하였습니다. 룻에게 결정적인 위기가 있었다면 동서 오르바가 어머니를 따르겠다고 하다가 말고, 마음을 바꾸어 모압 땅과 새 신랑을 찾아 떠날 때였을 것입니다. 나오미도 “ 보라 네 동서는 그 백성과 그 신에게로 돌아가나니 너도 동서를 따라 돌아가라” 그래도, 룻은 단호한 마음으로 고백하기를 “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저 같으면 같이 남기로 했다가 오르바가 떠나는 순간에 무지하게 오르바를 원망했을 것 같아요. 그러나 4장까지를 보면, 원망할 것 하나도 없어요. 만약에 오르바도 같이 베들레헴에 돌아왔다면, 룻 혼자 차지할 그 엄청난 축복을 나누었을 것입니다. 부모를 섬길 때에 때때로 형제가 원망스러울 때가 있지 않습니까? 도대체 자식은 나 혼자란 말인가? 아니, 왜 나만 부모를 모셔야 한 단말인가? 원망할 것 없어요. 축복도 우리의 것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십계명 가운데 모두 내가 언제라도 죽기 전에 지킬 수 있지만, 지키고 싶어도 지킬 수 없는 계명이 하나 있습니다. “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은 유효한 기간이 있는 계명입니다. 내가 순종하고 싶어도 부모님이 안계시면 지킬 수 없어요. 평생 5계명을 범한 죄인일 뿐입니다.
순종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키베드”라는 단어입니다. 이 말은 “ 우리 내장 가운데 간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우리의 내장 가운데 가장 중요한 기관이 “간”입니다. 여러 가지 다른 암은 수술도 하고 고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지만, 간은 일단 고장 나면 치명적입니다. 세상에 아무 겁도 없는 사람을 뭐라고 합니까? “ 간이 부었다”고 말합니다. 구제불능이라는 말입니다. 중국어에도 “ 쥐뿔도 없는 사람이 건방을 떠는 것을 가리켜서 - 배 밖으로 간이 나왔다”는 표현을 씁니다. 간염, 간경화증 간에 관한한 아무것도 현대 의학으로는 고칠 수 없습니다. 네 부모를 간과같이 여기라……. 이것이 순종입니다.
일석 삼조라는 말의 의미를 아십니까? 한 번에 세 가지의 유익을 얻는다는 말입니다. 효도야 말로 일석 삼조의 축복이 있는 계명입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명령에 대하여 순종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행위가 됩니다. 둘째는 제 5계명 부모에 대한 효도를 감당하는 우리들 자신이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셋째는 이 효도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놀라운 축복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록펠러(1837-1935) 어려서 무척 가난하였습니다. 신문팔이. 공장 직공 등……. 그러나 아름다운 유산을 가지고 있었는데, 어머니의 유산이었습니다. 10계명의 유산이었습니다.
1. 하나님을 친아버지로 믿고 섬겨라
2. 목사님을 거역하지 말고 늘 함께 하라.
3. 오른쪽 주머니에는 십일조를 보관해 두어라.
4. 원수를 만들지 말라
5. 예배를 드릴 때 항상 앞자리에 앉아서 드려라
6. 매일 아침마다 그 날의 목표를 세우고 하나님께 기도하라
7. 잠자리에 들기 전에는 반드시 하루를 반성하고 기도를 드려라
8. 남을 도울 수 있을 때에는 힘껏 도와라
9. 주일예배는 꼭 본 교회에서 드려라
10. 아침에는 제일 먼저 성경을 읽어라.
부모에게 잘하는 것은 우리의 향기로운 발자취이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며 축복하실만한 아름다움입니다.
또한, 룻의 아름다움은 겸손입니다. 물 한잔에도 땅에 엎드릴 줄 아는 마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축복하시며, 성도가 남길 아름다운 향기입니다. “왜 날 안 알아주시나요?” “왜 난 인정 안하세요?” 그러지 맙시다. 하나님이 알아주시면 되요. 우리 대흥교회가 처음 교회당을 빌려볼 때에 미국교회 목사님이 주일날 오후에 우리 교회 예배가 끝나면 , 교회에 볼 일이 있어서 온 것처럼 오셔서 아기들 방의 기저귀들, 쓰레기통을 다 비웠어요. 몰랐는데, 떠나신 다음에 교회가 알게 되었습니다. 향기의 발자취입니다. 겸손하고 부모의 뜻에 순종하는 향기로운 삶의 발자취를 남길 수 있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