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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령한 복 (엡1:3-6)
오늘날 서양의 대부분의 나라는 양력 1월1일을 설날로 지내고 있습니다. 고대 바빌로니아에서는 봄이 시작되는 3월을 한해의 시작으로 여기고 새해 축하행사를 성대하게 벌였습니다. 농사가 사람들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던 당시에 사람들은 씨앗을 뿌리는 계절을 한 해의 시작으로 본 것입니다.
달력이 생기기 전부터 있어 왔던 설날이 이처럼 따뜻한 봄에서 지금처럼 추운 1월로 옮겨진 것은 약 2 천 년 전인 로마시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로마 시대에도 처음에는 봄의 시작인 3월 25일을 새해의 시작으로 경축하였습니다. 그러다 BC 46년 줄리어스 시저가 이집트에서 가져온 1년 365일제를 그의 율리우스력에 포함시키면서 1월1일이 새해의 첫날이 되었다합니다.
그러나 중국이나 아랍을 비롯한 일부 국가에서는 달의 움직임을 토대로 한 음력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구정 혹은 민속의 날로 불려오던 음력정월 초하룻날과 양력 1월 1일을 말하는 신정이 함께 사용되어 오다가 1989년부터 구정을 설날로 하여 민족의 가장 큰 명절로 지키며 설날이라고 합니다.
한 해의 시작인 설날을 원단, 세수, 신일이라고 하는데 여기에는 일년 동안 아무 탈 없이 지내게 해달라는 기원과 이때에는 몸과 마음을 정결히 하고 경거망동을 삼가야 한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설 명절의 신바람은 대보름달에 그 절정에 이르게 됩니다. 첫 해, 첫 보름, 새해에 비로소 만월을 맞는 날 그것이 곧 보름입니다. 그 충만, 그 원만, 그리고 광명…,으로 눈에 보이는 천체가운데 그토록 완벽한 것은 달리 없습니다. 그 달과 함께 한 해가 밝아와 겨울의 긴긴 어둠은 가시고 새 빛이 움트는 것입니다.
설은 한겨울 엄동설한 중 저만큼 불기운이 어려 있는 때, 가물이 얼음이 풀리고 논에서 얼음 살이 빠져 새 봄이란 말이 어울릴 때입니다.
울긋불긋한 한복저고리와 색동저고리, 곱게 땋은 머리에 두른 댕기로 옷차림은 더욱 빛이 나는 설빔으로 갈아입고 어른들께 새 해의 첫 인사로 세배를 했습니다. 이는 장유의 질서가 존중되는 사회의 기풍으로 어른들께 경의를 표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는 사람을 만나면 반갑게 새해인사로 서로 덕담을 나누며 복을 빌었습니다.
설날의 세시풍습에 복조리 걸기라 하여 전초에 대나무로 만든 조리를 붉은 실로 메어 벽에 걸어놓는 습속인데 조리는 쌀을 이는 그릇인데 복조리라는 복을 인다는 뜻으로 쓰인 것으로 봅니다.
설날은 명절다운 각종행사와 놀이가 치러지고 웃어른에게 세배하며 서로 축복을 빌어주는 대단히 의미 있는 날 이었습니다.
이러한 일은 삶의 눈물과 웃음이 함께 한 때문이라 할 것입니다. 이런 애기가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남편이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꼬깃꼬깃한 만 원짜리 한 장을 꺼냅니다. 무슨 돈이냐고 묻는 아내에게, 남편은 당신의 핼쑥한 모습이 안쓰럽다며 내일 몰래 혼자 고기 뷔페에 가서 소고기 실컷 먹고 오라고 주었습니다. 만 원짜리 한 장을 펴서 쥐어 주는 남편을 바라보던 아내의 눈가엔 물기가 고였습니다. '못 먹고 산지 하루 이틀도 아닌데....' 노인정에 다니시는 시아버지께서 며칠째 맘이 편찮으신 모양입니다. 아내는 앞치마에서 그 만원을 꺼내어 노인정에 가시는 시아버지 손에 쥐어드렸습니다. '제대로 용돈 한번 못 드려서 죄송해요. 작지만 이 돈으로 신세진 친구 분들과 약주 나누세요.' 시아버지는 어려운 살림을 힘겹게 끌어 나가는 며느리가 보기 안쓰럽습니다. 시아버지는 그돈 만원을 쓰지 못하고 노인정에 가서 실컷 자랑만 했습니다. 그리고 그 돈을 장롱 깊숙한 곳에 두었습니다. 다음해 설날, 할아버지는 손녀에게 세배를 받습니다. 주먹만 한 것이 이제는 훌쩍 자라서 내년엔 학교에 간답니다. 할아버지는 손녀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습니다. 절을 받으신 할아버지는 미리 준비해 놓은 그 만원을 손녀에게 세뱃 돈으로 줍니다. '할아버지, 고맙습니다.' 세뱃돈을 받은 아이는 부엌에서 손님상을 차리는 엄마를 불러냅니다. '엄마, 책가방 얼마야?' 엄마는 딸의 속을 알겠다는 듯 빙긋 웃습니다. 아이는 할아버지에게서 받은 만원을 엄마에게 내밀었습니다. '엄마한테 맡길래. 내년에 나 예쁜 책가방 사줘.' 요즘 남편이 힘이 드는 모양입니다. 내색은 하지 않지만 안 하던 잠꼬대까지 합니다. 아침에 싸주는 도시락 반찬이 매일 신 김치뿐이라는 것도 마음에 걸립니다. 아내는 조용히 일어나 남편의 속주머니에 낮에 딸 지연이가 맡긴 만 원을 넣어 둡니다. '여보, 내일 좋은 것 사서 드세요.' 라는 쪽지와 함께.......
사람들은 복 받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복을 말할 때 흔히 오복을 말합니다.
수(壽)·부(富)·강녕(康寧)·유호덕(攸好德)·고종명(考終命)을 말합니다. 이러한 복은 세상적인 복입니다. 세상적인 복은 배금주의를 신봉하게 하였으며 많은 물질을 얻는데 모든 정신을 쏟게 만들었습니다. 이와 더불어 성도들도 물질을 모으는데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따라서 교회 내에서는 신앙의 크기와 물질적 축복의 비례적 관계를 당연시하게 되었습니다. 그런가하면 물질적 축복과 더불어 팽배해 있는 것은 육체의 축복입니다. 건강을 위해서라면 물질도 아까워 하지 않습니다. 건강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자신의 육체의 건강만을 위해 염려할 것이 아니라 영적 건강을 위해 더욱 염려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신령한 복'을 말씀합니다. 이 복은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것으로 지상적이며 육적인 축복이 아니라 천상적이며 영적인 복입니다. 성도들이 누려야 할 참된 축복은 현세적인 것이 아니라 영혼 구원에 있음을 보여 줍니다.
하늘에 속한 복
(엡 1: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언젠가 한 여성이 많은 괴로움을 품고 하나님이 참으로 자기를 사랑해 주시는 것일까, 자신을 잊어버리신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녀는 산책을 하면서 포도원 옆을 지나갔습니다. 포도밭은 가을 햇볕을 받아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포도나무마다 많은 잎이 있었지만, 잎만 있고 열매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때 하늘의 정원사가 그녀에게 속삭이며 말했습니다. “너는 너 자신이 당하고 있는 여러 가지 괴로움과 문제로 고통 받고 있느냐? 기억하여라! 내 딸아, 정원사가 가지치기와 손질을 그만두고, 써레질과 경작을 멈추는 것은 그가 그 포도나무로부터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게 되었을 때뿐이란다. 너는 내가 가지치기를 그만두기를 원하느냐? 너는 내가 너의 인생에서 잎사귀 외에는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기를 원하느냐? 만일 그렇다면, 나는 가지치기를 그만두고, 경작을 그만두고, 써레질도 그만두고, 너에게서 잎사귀 외에는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기로 할 것이다.” 그녀는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뜨거운 눈물을 닦으면서 위를 올려다 보았습니다. 이제 그녀는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하늘 정원사이신 하나님, 알겠습니다. 이젠 알겠습니다. 나를 써레질하시고 경작해 주세요! 주님이 내 인생에 허락한 시련들로 인해 나는 더욱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될 것입니다. 주님께 간구하옵나니, 이러한 슬픔과 고통을 통하여 나의 삶에서 열매를 거둘 수 있게 된다면 부디 나의 삶을 경작하여 주옵소서!”
모든 소원과 꿈과 희망이 좌절될지라도 기뻐하십시오. 그리고 기억해야 할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포도나무의 가지를 쳐 주시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이라는 것입니다.(하늘 정원사-21세기 예화)
하늘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때 합력하여 선이 됩니다.
(롬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이 어느 날 식당에서 음식을 주문하면서 자기 음식에는 브로콜리를 넣지 말라고 부탁했습니다. 이 일은 곧 입소문을 통해 퍼졌습니다. ‘부시는 브로콜리를 싫어한다’는 소문으로 애꿎은 피해를 본 브로콜리 재배 농장주들은 함께 모여 대책을 논의했습니다. 그들은 거친 항의 대신에 한 통의 편지와 대형 화물차에 가득 실은 브로콜리를 대통령에게 선사하기로 했습니다. “대통령님. 이것은 당신을 대통령으로 뽑아준 미국 사람들이 즐겨 먹는 채소입니다. 단백질이 많고 철분이 다량 함유돼 있으며… 몸에 상당히 이롭습니다. 지금까지의 생각을 바꾸셔서 이것을 즐겨 드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편지의 내용과 선물 사건은 언론을 통해 보도돼 엄청난 홍보 효과를 거뒀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를 원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될줄 믿습니다.
1876년 여름 미네소타주의 농사가 메뚜기로 인해 모두 망쳐버렸습니다. 다음해인 1877년 봄, 농부들은 메뚜기 때문에 걱정이 태산 같았습니다. 저들은 올해에도 메뚜기로 인해 수천 명의 사람들에게 재난이 닥칠 것으로 믿었습니다. 상황이 너무 긴박하게 돌아가자 미네소타의 주지사 존 S. 필즈베리는 그해 4월 26일을 금식기도의 날로 공포했습니다. 주지사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모든 미네소타 주민들에게 이 같은 재해를 막아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할 것을 촉구했습니다. 4월 26일, 모든 관공서, 학교, 상점들이 문을 닫았습니다. 주 전체가 엄숙하고도 거룩한 하루를 보냈습니다. 다음날 새벽이 밝아왔습니다. 그날은 4월이라 하기에는 이상하리만큼 기온이 한여름 날씨처럼 치솟았습니다. 더운 날씨 때문에 수십 억 마리의 메뚜기 애벌레가 알에서 깨어 나와 땅에 기어 다녔습니다. 모든 주민들은 공포에 질렸습니다. 더운 날씨는 사흘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알에 있던 모든 애벌레가 깨어 땅으로 기어 나왔습니다. 이제 애벌레가 농작물을 망치는 것은 시간 문제였습니다. 나흘 째 되던 날이었습니다. 어제까지 한여름처럼 무더웠던 날씨가 갑자기 급강하하여 그날 밤 온 땅에 찬 서리가 내렸습니다. 마치 불에 태우거나 독약을 뿌린 것처럼 기어 다니던 애벌레들이 모두 얼어 죽어 버렸습니다. 너무나 감격한 농부들은 그날을 결코 잊을 수 없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하나님이 인간의 기도에 응답하신 좋은 실례로 아직도 미네소타 주 역사 속에서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며 나아갈 때 하늘의 복을 주시며 현실의 복도 주시는 줄 믿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받는 복
(엡 1:4,5)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늘 나라의 비밀을 알고 섬기게 합니다.
(엡 1:8,9)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도시의 중심가에서 작은 식당을 운영하는 최 집사가 새해를 맞아 결단하고 30여년 동안 열어왔던 식당에 ‘주일은 쉽니다’란 표지를 내걸었습니다. 이제 비로소 나와 내 집은 여호와만 섬긴다는 신앙고백을 할 수 있어 기쁘다고 했습니다. 지난 주일엔 종업원 10명을 교회에 등록시켰습니다. 주일에 예배드리는 것을 그날 근무하는 것으로 인정해주었습니다. 종업원들의 기쁨이 얼마나 컸을까요. 그는 말 합니다.
“목사님으로부터 주일을 잘 지키라는 설교를 듣고 두 가지가 가슴에 꽂혔습니다. 첫째는, 잘 사는 것도 좋지만 잘 믿는 것도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주일날 문을 닫으면 안 믿는 사람이 장사가 잘 되니 이 또한 큰 기쁨이라는 것입니다. 두 가지 깨달음으로 인해 제 삶이 달라졌어요.” 라고 고백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기를 원 할 때 심령의 평안을 주시고 삶에도 복된 은총으로 함께 하는 줄 믿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의 복을 누리게 됩니다.
(갈3:26)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벨기에의 극작가 마테를링크는 1908년 파랑새라는 동화극을 발표했습니다. 가난한 나무꾼의 아들 형제가 행복을 준다는 파랑새를 찾아 먼 길을 떠났습니다. 그들은 이곳저곳 많은 곳을 여행하며 파랑새를 찾았습니다. 그러나 파랑새는 그 어느 곳에도 없었습니다. 그 형제는 지쳐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헤매고 찾아다니던 파랑새는 자기집 새장 안에 있었습니다.
옛말에 길은 가까운데 있다고 했습니다. 행복도 가까운 데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행복을 가까운 곳에서 찾으려 하지 않고 먼 곳에서 찾으려 애를 씁니다. 행복은 내 나라에서 찾아야 하고 내 가정에서 찾아야 하고 내 생활에서, 내 직장에서, 내 친구에게서, 내 마음에서 찾아야 합니다. 더욱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 안에서 찾아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진정한 길이십니다.
(요 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한 나그네가 홀로 사막을 여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걱정에 휩싸였습니다.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마을에 도착하거나 마실 물이 있는 오아시스를 발견하지 못하면 영락없이 죽을 형편이었습니다. 나그네는 불안과 공포에 몸을 떨며 걸음을 재촉했습니다.그때 나그네는 사람의 발자국을 발견하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습니다. “이제 살았다. 이 발자국을 따라가면 분명히 마을이 나타날 것이다. 이 발자국을 나침반 삼아 부지런히 걷자” 나그네는 발자국을 따라 열심히 걸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걸어도 마을과 오아시스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밤이 되자 섬뜩한 생각이 들어 발자국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는 지금까지 자신의 발자국을 따라 제자리를 맴돌고 있었습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은 잘못을 끊임없이 되풀이하며 삶을 허비합니다. 그러다 문득 인생의 밤을 만나면 섬뜩한 기분이 들 것입니다.예수 그리스도.그분은 인생의 참된 나침반입니다.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모든 것을 얻게 되었습니다.
(벧전 1:18,)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이런 글이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내게 자기를 주셨습니다. 그에게 있는 생명을 주셨고, 성령을 주셨고,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인내와 희망과 환희를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내게 하나님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함께 우주 만물을 주셨습니다. 그는 나의 죽은 영혼을 살리시어 나로 하여금 부하게 하시고 지혜로운 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나의 전부입니다. 그는 나의 식물이요, 의복이며 가옥입니다. 그는 또 내가 하나님 앞에 설 때의 자랑이입니다. 그는 또 나의 지식이며 나의 ‘새벽 별’이며 나의 노래의 제목이며 예술의 이상입니다. 그는 또 나의 자각의 근저이므로 나의 철학과 윤리의 기초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누리는 모두가 되시기 바랍니다.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의 죄를 사해 주셨기 때문입다.
(엡 1: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스코틀랜드의 어느 신자 의사는 가난한 사람들을 많이 돌보아 왔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병원에 입원할 때는 으레 '면제'라는 빨간 글씨를 써 두었습니다. 이 일은 너무 자주 있는 일이라서 장부는 온통 빨간 글씨로 뒤범벅이었습니다. 그가 죽자 그의 유언 집행자들은 '면제'된 빚을 거두어들인다면 고인의 유산에 큰 도움이 되리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실패하자 다시 법정에 소송을 걸었습니다. 이때 판사는 '면제'라는 장부를 보고 '이 돈의 액수를 받아내도록 집행할 법정은 이 세상에는 없습니다.'라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모든 죄를 면죄해 주시고 영원한 천국의 복락을 주셨습니다.
선택된 복
(엡 1:4,5)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선택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엡 1:11)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성 프란시스코의 이러한 예화가 있습니다. 아시스의 성자 프란시스에게 한번은 브라더 마세오가 진지하게 물었습니다. “당신이 그렇게 용모가 뛰어나지도 아니하고 학식도 없으며 귀족의 혈통도 아닌데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들이 당신을 따르며 모든 이들이 당신 보기를 바라며, 당신에게서 듣기를 바라며, 당신에게 순종하기를 원하고 있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요? 어째서 세상 사람들이 당신에게 순종하기를 원하고 있는지 그 이유가 궁금합니다.” 그때에 프란시스가 대답하기를 “그 이유는 가장 높이 계시는 분의 시선이 그런 일을 하시고자 뜻하셨기 때문이오. 그분은 모든 사람들을 보고 계시는데 가장 거룩한 눈으로 죄인 중에서도 더 이상 죄인일 수 없는 작은 사람, 이보다 더 자격 없고 이보다 더 죄인인 사람을 찾을 수 없으셨던 것이오. 그래서 그분은 놀라운 일을 성취하기 위하여 나를 택하신 것이오. 그분은 나보다 더 천한 인간을 찾으실 수 없으셨기 때문에 나를 택하셨고 또한 이 세상의 고귀한 신분과 위엄, 강함, 미모 그리고 학식을 깨뜨리기 원하셔서 그렇게도 미천한 나를 택하셨던 것이오.” (21세기 예화-신령한 근심이 있는 사람)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시고 복 주심을 바로 깨닫는 모두가 되시기 바랍니다.
선한 일에 열심하도록 하셨습니다.
(딛 2:14)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나이팅게일은 30세 되던 날 이런 일기를 썼습니다. '오늘 내 나이 서른이 되었다. 예수가 그의 사명을 시작한 나이다. 주님, 오늘부터 당신의 부르심에 따라 살겠습니다. 유치했던 생각은 이제 버리고 나를 세상에 태어나게 하신 주님의 목적에 순종하겠습니다.' 그 후 헌신적인 간호사로서 나이팅게일은 세상에 널리 알려졌습니다. '성공적인 생활의 비결이 무엇이냐?'라고 묻는 기자의 질문에 그녀는 조용히 대답했습니다. '비결은 하나뿐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불러 주신 그 뜻에 나를 맡기고 사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는 생활과 나의 음성만을 듣는 생활의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대하는 것은 우리의 선택입니다. 마음의 선택에서 한 발자국 전진하여 몸으로 하는 선택, 즉 나의 생애를 방향 짓는 결단이 요구됩니다. 그리고 이 결정은 나의 이름을 불러 개인적으로 맡겨 주신 하나님의 목적을 자각하는 데서 더욱 구체적이며 가치 있게 발전됩니다.
선택하시고 써 주시는 은혜와 복을 주심을 감사하며 충성 다합시다.
설날 복을 빌고 복을 받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다른 방법으로 복을 빌고 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말씀의 잔치를 통하여 하늘에 속한 복 그리스도 안에서의 복 선택된 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금번 성회를 통하여 이 복을 받아 누리는 모두가 되기를 원합니다.
출처/강성찬 목사 설교 중에서
오늘날 서양의 대부분의 나라는 양력 1월1일을 설날로 지내고 있습니다. 고대 바빌로니아에서는 봄이 시작되는 3월을 한해의 시작으로 여기고 새해 축하행사를 성대하게 벌였습니다. 농사가 사람들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던 당시에 사람들은 씨앗을 뿌리는 계절을 한 해의 시작으로 본 것입니다.
달력이 생기기 전부터 있어 왔던 설날이 이처럼 따뜻한 봄에서 지금처럼 추운 1월로 옮겨진 것은 약 2 천 년 전인 로마시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로마 시대에도 처음에는 봄의 시작인 3월 25일을 새해의 시작으로 경축하였습니다. 그러다 BC 46년 줄리어스 시저가 이집트에서 가져온 1년 365일제를 그의 율리우스력에 포함시키면서 1월1일이 새해의 첫날이 되었다합니다.
그러나 중국이나 아랍을 비롯한 일부 국가에서는 달의 움직임을 토대로 한 음력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구정 혹은 민속의 날로 불려오던 음력정월 초하룻날과 양력 1월 1일을 말하는 신정이 함께 사용되어 오다가 1989년부터 구정을 설날로 하여 민족의 가장 큰 명절로 지키며 설날이라고 합니다.
한 해의 시작인 설날을 원단, 세수, 신일이라고 하는데 여기에는 일년 동안 아무 탈 없이 지내게 해달라는 기원과 이때에는 몸과 마음을 정결히 하고 경거망동을 삼가야 한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설 명절의 신바람은 대보름달에 그 절정에 이르게 됩니다. 첫 해, 첫 보름, 새해에 비로소 만월을 맞는 날 그것이 곧 보름입니다. 그 충만, 그 원만, 그리고 광명…,으로 눈에 보이는 천체가운데 그토록 완벽한 것은 달리 없습니다. 그 달과 함께 한 해가 밝아와 겨울의 긴긴 어둠은 가시고 새 빛이 움트는 것입니다.
설은 한겨울 엄동설한 중 저만큼 불기운이 어려 있는 때, 가물이 얼음이 풀리고 논에서 얼음 살이 빠져 새 봄이란 말이 어울릴 때입니다.
울긋불긋한 한복저고리와 색동저고리, 곱게 땋은 머리에 두른 댕기로 옷차림은 더욱 빛이 나는 설빔으로 갈아입고 어른들께 새 해의 첫 인사로 세배를 했습니다. 이는 장유의 질서가 존중되는 사회의 기풍으로 어른들께 경의를 표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는 사람을 만나면 반갑게 새해인사로 서로 덕담을 나누며 복을 빌었습니다.
설날의 세시풍습에 복조리 걸기라 하여 전초에 대나무로 만든 조리를 붉은 실로 메어 벽에 걸어놓는 습속인데 조리는 쌀을 이는 그릇인데 복조리라는 복을 인다는 뜻으로 쓰인 것으로 봅니다.
설날은 명절다운 각종행사와 놀이가 치러지고 웃어른에게 세배하며 서로 축복을 빌어주는 대단히 의미 있는 날 이었습니다.
이러한 일은 삶의 눈물과 웃음이 함께 한 때문이라 할 것입니다. 이런 애기가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남편이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꼬깃꼬깃한 만 원짜리 한 장을 꺼냅니다. 무슨 돈이냐고 묻는 아내에게, 남편은 당신의 핼쑥한 모습이 안쓰럽다며 내일 몰래 혼자 고기 뷔페에 가서 소고기 실컷 먹고 오라고 주었습니다. 만 원짜리 한 장을 펴서 쥐어 주는 남편을 바라보던 아내의 눈가엔 물기가 고였습니다. '못 먹고 산지 하루 이틀도 아닌데....' 노인정에 다니시는 시아버지께서 며칠째 맘이 편찮으신 모양입니다. 아내는 앞치마에서 그 만원을 꺼내어 노인정에 가시는 시아버지 손에 쥐어드렸습니다. '제대로 용돈 한번 못 드려서 죄송해요. 작지만 이 돈으로 신세진 친구 분들과 약주 나누세요.' 시아버지는 어려운 살림을 힘겹게 끌어 나가는 며느리가 보기 안쓰럽습니다. 시아버지는 그돈 만원을 쓰지 못하고 노인정에 가서 실컷 자랑만 했습니다. 그리고 그 돈을 장롱 깊숙한 곳에 두었습니다. 다음해 설날, 할아버지는 손녀에게 세배를 받습니다. 주먹만 한 것이 이제는 훌쩍 자라서 내년엔 학교에 간답니다. 할아버지는 손녀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습니다. 절을 받으신 할아버지는 미리 준비해 놓은 그 만원을 손녀에게 세뱃 돈으로 줍니다. '할아버지, 고맙습니다.' 세뱃돈을 받은 아이는 부엌에서 손님상을 차리는 엄마를 불러냅니다. '엄마, 책가방 얼마야?' 엄마는 딸의 속을 알겠다는 듯 빙긋 웃습니다. 아이는 할아버지에게서 받은 만원을 엄마에게 내밀었습니다. '엄마한테 맡길래. 내년에 나 예쁜 책가방 사줘.' 요즘 남편이 힘이 드는 모양입니다. 내색은 하지 않지만 안 하던 잠꼬대까지 합니다. 아침에 싸주는 도시락 반찬이 매일 신 김치뿐이라는 것도 마음에 걸립니다. 아내는 조용히 일어나 남편의 속주머니에 낮에 딸 지연이가 맡긴 만 원을 넣어 둡니다. '여보, 내일 좋은 것 사서 드세요.' 라는 쪽지와 함께.......
사람들은 복 받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복을 말할 때 흔히 오복을 말합니다.
수(壽)·부(富)·강녕(康寧)·유호덕(攸好德)·고종명(考終命)을 말합니다. 이러한 복은 세상적인 복입니다. 세상적인 복은 배금주의를 신봉하게 하였으며 많은 물질을 얻는데 모든 정신을 쏟게 만들었습니다. 이와 더불어 성도들도 물질을 모으는데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따라서 교회 내에서는 신앙의 크기와 물질적 축복의 비례적 관계를 당연시하게 되었습니다. 그런가하면 물질적 축복과 더불어 팽배해 있는 것은 육체의 축복입니다. 건강을 위해서라면 물질도 아까워 하지 않습니다. 건강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자신의 육체의 건강만을 위해 염려할 것이 아니라 영적 건강을 위해 더욱 염려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신령한 복'을 말씀합니다. 이 복은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것으로 지상적이며 육적인 축복이 아니라 천상적이며 영적인 복입니다. 성도들이 누려야 할 참된 축복은 현세적인 것이 아니라 영혼 구원에 있음을 보여 줍니다.
하늘에 속한 복
(엡 1: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언젠가 한 여성이 많은 괴로움을 품고 하나님이 참으로 자기를 사랑해 주시는 것일까, 자신을 잊어버리신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녀는 산책을 하면서 포도원 옆을 지나갔습니다. 포도밭은 가을 햇볕을 받아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포도나무마다 많은 잎이 있었지만, 잎만 있고 열매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때 하늘의 정원사가 그녀에게 속삭이며 말했습니다. “너는 너 자신이 당하고 있는 여러 가지 괴로움과 문제로 고통 받고 있느냐? 기억하여라! 내 딸아, 정원사가 가지치기와 손질을 그만두고, 써레질과 경작을 멈추는 것은 그가 그 포도나무로부터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게 되었을 때뿐이란다. 너는 내가 가지치기를 그만두기를 원하느냐? 너는 내가 너의 인생에서 잎사귀 외에는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기를 원하느냐? 만일 그렇다면, 나는 가지치기를 그만두고, 경작을 그만두고, 써레질도 그만두고, 너에게서 잎사귀 외에는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기로 할 것이다.” 그녀는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뜨거운 눈물을 닦으면서 위를 올려다 보았습니다. 이제 그녀는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하늘 정원사이신 하나님, 알겠습니다. 이젠 알겠습니다. 나를 써레질하시고 경작해 주세요! 주님이 내 인생에 허락한 시련들로 인해 나는 더욱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될 것입니다. 주님께 간구하옵나니, 이러한 슬픔과 고통을 통하여 나의 삶에서 열매를 거둘 수 있게 된다면 부디 나의 삶을 경작하여 주옵소서!”
모든 소원과 꿈과 희망이 좌절될지라도 기뻐하십시오. 그리고 기억해야 할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포도나무의 가지를 쳐 주시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이라는 것입니다.(하늘 정원사-21세기 예화)
하늘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때 합력하여 선이 됩니다.
(롬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이 어느 날 식당에서 음식을 주문하면서 자기 음식에는 브로콜리를 넣지 말라고 부탁했습니다. 이 일은 곧 입소문을 통해 퍼졌습니다. ‘부시는 브로콜리를 싫어한다’는 소문으로 애꿎은 피해를 본 브로콜리 재배 농장주들은 함께 모여 대책을 논의했습니다. 그들은 거친 항의 대신에 한 통의 편지와 대형 화물차에 가득 실은 브로콜리를 대통령에게 선사하기로 했습니다. “대통령님. 이것은 당신을 대통령으로 뽑아준 미국 사람들이 즐겨 먹는 채소입니다. 단백질이 많고 철분이 다량 함유돼 있으며… 몸에 상당히 이롭습니다. 지금까지의 생각을 바꾸셔서 이것을 즐겨 드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편지의 내용과 선물 사건은 언론을 통해 보도돼 엄청난 홍보 효과를 거뒀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를 원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될줄 믿습니다.
1876년 여름 미네소타주의 농사가 메뚜기로 인해 모두 망쳐버렸습니다. 다음해인 1877년 봄, 농부들은 메뚜기 때문에 걱정이 태산 같았습니다. 저들은 올해에도 메뚜기로 인해 수천 명의 사람들에게 재난이 닥칠 것으로 믿었습니다. 상황이 너무 긴박하게 돌아가자 미네소타의 주지사 존 S. 필즈베리는 그해 4월 26일을 금식기도의 날로 공포했습니다. 주지사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모든 미네소타 주민들에게 이 같은 재해를 막아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할 것을 촉구했습니다. 4월 26일, 모든 관공서, 학교, 상점들이 문을 닫았습니다. 주 전체가 엄숙하고도 거룩한 하루를 보냈습니다. 다음날 새벽이 밝아왔습니다. 그날은 4월이라 하기에는 이상하리만큼 기온이 한여름 날씨처럼 치솟았습니다. 더운 날씨 때문에 수십 억 마리의 메뚜기 애벌레가 알에서 깨어 나와 땅에 기어 다녔습니다. 모든 주민들은 공포에 질렸습니다. 더운 날씨는 사흘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알에 있던 모든 애벌레가 깨어 땅으로 기어 나왔습니다. 이제 애벌레가 농작물을 망치는 것은 시간 문제였습니다. 나흘 째 되던 날이었습니다. 어제까지 한여름처럼 무더웠던 날씨가 갑자기 급강하하여 그날 밤 온 땅에 찬 서리가 내렸습니다. 마치 불에 태우거나 독약을 뿌린 것처럼 기어 다니던 애벌레들이 모두 얼어 죽어 버렸습니다. 너무나 감격한 농부들은 그날을 결코 잊을 수 없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하나님이 인간의 기도에 응답하신 좋은 실례로 아직도 미네소타 주 역사 속에서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며 나아갈 때 하늘의 복을 주시며 현실의 복도 주시는 줄 믿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받는 복
(엡 1:4,5)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늘 나라의 비밀을 알고 섬기게 합니다.
(엡 1:8,9)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도시의 중심가에서 작은 식당을 운영하는 최 집사가 새해를 맞아 결단하고 30여년 동안 열어왔던 식당에 ‘주일은 쉽니다’란 표지를 내걸었습니다. 이제 비로소 나와 내 집은 여호와만 섬긴다는 신앙고백을 할 수 있어 기쁘다고 했습니다. 지난 주일엔 종업원 10명을 교회에 등록시켰습니다. 주일에 예배드리는 것을 그날 근무하는 것으로 인정해주었습니다. 종업원들의 기쁨이 얼마나 컸을까요. 그는 말 합니다.
“목사님으로부터 주일을 잘 지키라는 설교를 듣고 두 가지가 가슴에 꽂혔습니다. 첫째는, 잘 사는 것도 좋지만 잘 믿는 것도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주일날 문을 닫으면 안 믿는 사람이 장사가 잘 되니 이 또한 큰 기쁨이라는 것입니다. 두 가지 깨달음으로 인해 제 삶이 달라졌어요.” 라고 고백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기를 원 할 때 심령의 평안을 주시고 삶에도 복된 은총으로 함께 하는 줄 믿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의 복을 누리게 됩니다.
(갈3:26)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벨기에의 극작가 마테를링크는 1908년 파랑새라는 동화극을 발표했습니다. 가난한 나무꾼의 아들 형제가 행복을 준다는 파랑새를 찾아 먼 길을 떠났습니다. 그들은 이곳저곳 많은 곳을 여행하며 파랑새를 찾았습니다. 그러나 파랑새는 그 어느 곳에도 없었습니다. 그 형제는 지쳐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헤매고 찾아다니던 파랑새는 자기집 새장 안에 있었습니다.
옛말에 길은 가까운데 있다고 했습니다. 행복도 가까운 데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행복을 가까운 곳에서 찾으려 하지 않고 먼 곳에서 찾으려 애를 씁니다. 행복은 내 나라에서 찾아야 하고 내 가정에서 찾아야 하고 내 생활에서, 내 직장에서, 내 친구에게서, 내 마음에서 찾아야 합니다. 더욱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 안에서 찾아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진정한 길이십니다.
(요 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한 나그네가 홀로 사막을 여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걱정에 휩싸였습니다.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마을에 도착하거나 마실 물이 있는 오아시스를 발견하지 못하면 영락없이 죽을 형편이었습니다. 나그네는 불안과 공포에 몸을 떨며 걸음을 재촉했습니다.그때 나그네는 사람의 발자국을 발견하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습니다. “이제 살았다. 이 발자국을 따라가면 분명히 마을이 나타날 것이다. 이 발자국을 나침반 삼아 부지런히 걷자” 나그네는 발자국을 따라 열심히 걸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걸어도 마을과 오아시스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밤이 되자 섬뜩한 생각이 들어 발자국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는 지금까지 자신의 발자국을 따라 제자리를 맴돌고 있었습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은 잘못을 끊임없이 되풀이하며 삶을 허비합니다. 그러다 문득 인생의 밤을 만나면 섬뜩한 기분이 들 것입니다.예수 그리스도.그분은 인생의 참된 나침반입니다.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모든 것을 얻게 되었습니다.
(벧전 1:18,)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이런 글이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내게 자기를 주셨습니다. 그에게 있는 생명을 주셨고, 성령을 주셨고,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인내와 희망과 환희를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내게 하나님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함께 우주 만물을 주셨습니다. 그는 나의 죽은 영혼을 살리시어 나로 하여금 부하게 하시고 지혜로운 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나의 전부입니다. 그는 나의 식물이요, 의복이며 가옥입니다. 그는 또 내가 하나님 앞에 설 때의 자랑이입니다. 그는 또 나의 지식이며 나의 ‘새벽 별’이며 나의 노래의 제목이며 예술의 이상입니다. 그는 또 나의 자각의 근저이므로 나의 철학과 윤리의 기초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누리는 모두가 되시기 바랍니다.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의 죄를 사해 주셨기 때문입다.
(엡 1: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스코틀랜드의 어느 신자 의사는 가난한 사람들을 많이 돌보아 왔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병원에 입원할 때는 으레 '면제'라는 빨간 글씨를 써 두었습니다. 이 일은 너무 자주 있는 일이라서 장부는 온통 빨간 글씨로 뒤범벅이었습니다. 그가 죽자 그의 유언 집행자들은 '면제'된 빚을 거두어들인다면 고인의 유산에 큰 도움이 되리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실패하자 다시 법정에 소송을 걸었습니다. 이때 판사는 '면제'라는 장부를 보고 '이 돈의 액수를 받아내도록 집행할 법정은 이 세상에는 없습니다.'라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모든 죄를 면죄해 주시고 영원한 천국의 복락을 주셨습니다.
선택된 복
(엡 1:4,5)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선택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엡 1:11)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성 프란시스코의 이러한 예화가 있습니다. 아시스의 성자 프란시스에게 한번은 브라더 마세오가 진지하게 물었습니다. “당신이 그렇게 용모가 뛰어나지도 아니하고 학식도 없으며 귀족의 혈통도 아닌데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들이 당신을 따르며 모든 이들이 당신 보기를 바라며, 당신에게서 듣기를 바라며, 당신에게 순종하기를 원하고 있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요? 어째서 세상 사람들이 당신에게 순종하기를 원하고 있는지 그 이유가 궁금합니다.” 그때에 프란시스가 대답하기를 “그 이유는 가장 높이 계시는 분의 시선이 그런 일을 하시고자 뜻하셨기 때문이오. 그분은 모든 사람들을 보고 계시는데 가장 거룩한 눈으로 죄인 중에서도 더 이상 죄인일 수 없는 작은 사람, 이보다 더 자격 없고 이보다 더 죄인인 사람을 찾을 수 없으셨던 것이오. 그래서 그분은 놀라운 일을 성취하기 위하여 나를 택하신 것이오. 그분은 나보다 더 천한 인간을 찾으실 수 없으셨기 때문에 나를 택하셨고 또한 이 세상의 고귀한 신분과 위엄, 강함, 미모 그리고 학식을 깨뜨리기 원하셔서 그렇게도 미천한 나를 택하셨던 것이오.” (21세기 예화-신령한 근심이 있는 사람)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시고 복 주심을 바로 깨닫는 모두가 되시기 바랍니다.
선한 일에 열심하도록 하셨습니다.
(딛 2:14)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나이팅게일은 30세 되던 날 이런 일기를 썼습니다. '오늘 내 나이 서른이 되었다. 예수가 그의 사명을 시작한 나이다. 주님, 오늘부터 당신의 부르심에 따라 살겠습니다. 유치했던 생각은 이제 버리고 나를 세상에 태어나게 하신 주님의 목적에 순종하겠습니다.' 그 후 헌신적인 간호사로서 나이팅게일은 세상에 널리 알려졌습니다. '성공적인 생활의 비결이 무엇이냐?'라고 묻는 기자의 질문에 그녀는 조용히 대답했습니다. '비결은 하나뿐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불러 주신 그 뜻에 나를 맡기고 사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는 생활과 나의 음성만을 듣는 생활의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대하는 것은 우리의 선택입니다. 마음의 선택에서 한 발자국 전진하여 몸으로 하는 선택, 즉 나의 생애를 방향 짓는 결단이 요구됩니다. 그리고 이 결정은 나의 이름을 불러 개인적으로 맡겨 주신 하나님의 목적을 자각하는 데서 더욱 구체적이며 가치 있게 발전됩니다.
선택하시고 써 주시는 은혜와 복을 주심을 감사하며 충성 다합시다.
설날 복을 빌고 복을 받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다른 방법으로 복을 빌고 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말씀의 잔치를 통하여 하늘에 속한 복 그리스도 안에서의 복 선택된 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금번 성회를 통하여 이 복을 받아 누리는 모두가 되기를 원합니다.
출처/강성찬 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