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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한몸입니다. (고전12:12-27)
한국고유의 명절 설날입니다. 명절을 통해 여러분의 가족들이 주안에서 즐겁고 행복한 가정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요즘 우리나라의 아이들이 키가 10여년 전에 비하면 얼마나 커졌는지 모릅니다. 키는 큰데 비만 체질이 많고 허약체질이 많고 각종 질병을 많이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마음껏 뛰어놀고 자유롭게 거침없이 자라야 할 때인데 학원에서 하루를 다 보내고, 컴퓨터 앞에서 온 종일을 다 보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한국교회도 덩치만 크지 경건의 능력을 일찍 상실해 버렸다는 지적이 나온지 오래됐습니다. 속빈 강정과 같습니다. 80년대에는 양적 부흥의 시대였다면 90년대에는 교회 성장의 둔화기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21세기에는 교회의 몸집 보다 생명력 있는 건강한 교회가 되어야 하는 것이 앞으로의 과제입니다.
릭워렌 목사님은 “21세기 교회는 성장하는 교회가 아니라 건강한 교회가 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21세기 교회는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들의 모임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실천하여 건강한 교회를 이루어야 하는 것입니다. 수 보다 강함이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미디안의 군사 22만명을 무찔렀던 기드온 300명과 같이 말입니다. 거인 골리앗을 무너뜨린 어린 목동 다윗 처럼 말입니다.
우리 교회가 지금 성전건축의 큰 일을 시도하는 가운데 있지만 건강한 교회를 표방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마시고 건강한 교회를 추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오늘은 오늘은 공동체의식에 대해 말씀드릴려고 합니다.
교회는 성령의 창조하신 모임입니다.
교회는 성령께서 창조하신 모임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명을 감당하는 모임이기 때문에 다른 어떤 모임보다도 신비하고 강력한 모임입니다. 교회는 거룩하신 성령께서 주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비록 두 세 사람일지라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이면 그곳에 성령이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18:20)
교회는 한몸 공동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를 통하여 한 하나님 한 성령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모든 구원받은 성도들을 총칭해서 에클레시아 한몸 공동체 교회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성령은 교회 공동체를 도우라고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영입니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하나되게 하십니다. 그러나 마귀는 신앙 공동체를 이루지 못하도록 갖가지 계략을 꾸밉니다. 교회를 방해합니다. 예배를 방해합니다. 욕심과 교만과 온갖 책동을 다 하는 것입니다. 이 마귀의 계략에 걸려들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오직 성령은 일치의 영이십니다. 우리를 하나되게 하시고 서로 협력하게 하십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롬8:15) 그리스도께서 생명을 내어주시고 핏값으로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피값으로 우리를 사셨습니다. 한 피를 받은 형제 자매가 된 것입니다.
공동체의 일치를 방해하는 요인들
교회는 그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구성원을 볼 때에 매우 연합하기가 매우 어려운 곳입니다. 갑부도 있고 가난한 사람도 있습니다. 공부를 많이 한 박사도 있고 제대로 공부를 못한 사람도 있습니다. 각 지방의 사람들이 모여 있고 남녀노소가 골고루 모여 있습니다. 성격도 제 각각입니다. 내성적인 사람, 외향적인 사람, 과격한 사람, 소심한 사람, 느긋한 사람 등. 생각도 다 다릅니다.
교회는 다 다른 사람들이 모인 곳이지만 일치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창조하신 특별한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다른 모임과는 질적으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성령께 순종하기만 하면 일치될 수 있습니다.
교회가 하나되는 것은 성도들의 의무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일치를 방해하는 요인을 알고 제거해야 됩니다.
물론 교회 제일의 적은 사탄입니다. 사탄은 교회 일치를 방해합니다. 사탄이 작용하는 세상 권력이나 세상 문화도 교회 일치를 방해합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이 보여주는 방해물은 교회 밖의 세력들이 아닙니다. 성도 자신들이 안고 있는 문제입니다.
첫째는 열등감입니다.
“만일 발이 이르되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 인하여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요 또 귀가 이르되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 인하여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니”(고전12:15)
발이 손에 대해서 열등감을 가질 때, 귀가 눈에 대해서 열등감을 가질 때, 자신을 잘라내는 폐쇄 행동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25절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하여 돌아보게 하셨으니” 우리 모든 지체는 다른 지체를 위하여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창조섭리입니다. 모든 지체는 서로 돌보게 하나님이 창조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을 남과 비교하는 일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보면 비교하게 되고 자연히 열등의식을 가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열등감 때문에 고민하고 계신 분 계십니까? 나를 천하게 보지 말고 독특하게 창조하신 아름다운 지체로 볼 수 있게 되기를 위해서 기도하십시오.
우리의 귀한 가치를 깨닫고 하나님 앞에 귀하게 사용되시기를 바랍니다.
열등감의 원인들은 대략 이런 것들입니다.
1) 신체적 조건입니다. 키가 작은 사람은 큰 사람에 대해서 열등감을 갖습니다. 체중이 많이 나가는 사람은 홀쭉한 사람에게 열등감을 갖습니다. 얼굴이 울퉁불퉁한 사람은 반반한 사람에게, 핸디캡이 있는 사람은 정상인에게 열등감을 가집니다.
2) 출신 배경입니다. 인종, 국적, 고향, 가문, 부모, 학교 등등. 한국 사람들은 서양 사람들에게 열등감을 갖고 후진국 사람들에게 우월감을 갖습니다. 부모의 신분이나 자신의 출신 학교 때문에 열등감을 갖기도 합니다. 심지어는 작은 교회에 다닌다고 열등감을 갖는 사람도 있습니다.
3) 직업입니다. 어떤 직업인가? 소위 말하는 고상한 직업인가? 육체노동을 하는 업종인가? 회사에서의 지위는 어떤가? CEO인가? 고급 간부인가? 평사원인가? 그 차이에 따라서 열등감을 가지게 됩니다.
4) 개인적인 능력입니다. 영어 실력이 좋은가? 특별한 기술이 있는가? 재산이 많은가? 지식이 있는가? 능력이 남만 못할 때에 열등감에 사로잡힙니다.
열등감은 공동체 구성원에게 해를 줍니다.
자신에게 해롭습니다. 가장 행복해야 할 순간에도 남과 비교하면서 불행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지구상에 사는 사람들 가운데 나와 똑 같은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다 다릅니다. 그렇다면 누구와 비교해도 나는 남과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남과 다른 것 때문에 열등감을 갖는다면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또 다른 사람들에게도 피해를 줍니다. 공동체에서 자꾸만 떨어져 나오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남들보다 덜 필요한 존재다! 나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인물이야!’항상 떨어져 나와 혼자 있으려고 합니다.
이 열등감은 반드시 극복해야만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하나님이 인정하신 소중한 존재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자시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시100:3) 나는 하나님의 자녀요, 상속자요, 가족입니다.
자신을 과소평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인정하신 자녀입니다.
열등감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그 모습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십시오. 세상에 완전한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사람들은 그 부족한 것을 가리우려고 애씁니다. 어떤 사람은 잊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그렇지 않은 것처럼 살려고 애씁니다.
그런데 그렇게 사는 것이 얼마나 피곤합니까?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51:3,5) 다윗은 자신의 부족을 솔직하게 시인하면서도 솔직합니다.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를 씻기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나로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듣게 하사 주께서 꺾으신 뼈로 즐거워하게 하소서!”(시51:7-8) 사람의 시선을 두려워 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우월감입니다.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하거나 하지 못하리라”(21절) 눈은 손보다 더 대접을 받습니다. 머리는 발보다 귀하게 여깁니다. 그래서 우월감을 갖게 됩니다. 사람은 누구 보다 조금이라도 더 대우를 받고 싶어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조금 좋은 학교 나왔다고 잘난 척 합니다. 조금 얼굴 좀 반반하게 생겼다고 뻐깁니다. 조금 돈 더 많다고 목에 힘을 줍니다.
과학자의 말에 의하면 지능지수가 높은 사람이 지능지수가 낮은 사람보다도 더 열등의식을 느낀다고 합니다. 그리고 지능지수가 낮은 사람들은 열등감에 대해서 그다지 심각한 문제가 없다는 것입니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자살하는 이유도 이 열등감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또 열등의식은 가면을 쓰고 나타나기도 합니다. 항상 자기를 최고로 생각해서 자랑하는 우월감 같은 것도 결국은 열등의식의 가면이라고 합니다. 이런 열등의식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남이 하는 일을 비웃기를 잘합니다. 이것은 자기의 열등감을 가리는 가면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 열등감은 믿는 사람에게도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될 일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월감 중에 가장 나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신앙의 우월감입니다. 자기 신앙이 가장 바르고 가장 옳다고 여기는 것을 말합니다. 자기가 가장 잘 믿는다고. . .가장 기도 많이 한다고 우월감을 가집니다. 이것은 바라새인과 같은 태도입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잠16:18) 좋은 교회, 건강한 교회를 만들려면 교만, 우월감을 버려야 합니다. 모든 사람을 다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우리 가운데는 사람의 눈에 띄지 않게 일하는 분도 계십니다. 그러나 그런 분들은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분입니다. 사실 우리 몸에 꼭 필요한 기관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 몸의 뼈, 장기, . . . 그러므로 “나는 저 사람보다 쓸모가 없는 사람이야”하는 생각이 들면 ‘나는 가장 소중한 존재’라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한몸이 되기 위해서는 서로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약4장11~12절에서는 서로 비방하지 말고 판단하지 말라고 합니다. 서로 비방하고 판단하게 되면 서로 미워할 수밖에 없고 분리 될 수밖에 없고 싸울 수밖에 없습니다.
형제 비방, 판단을 버려야 합니다. 형제를 비방하는 것은 하나님의 역할을 대신하는 교만입니다. 남을 비방하고 판단하는 것은 내가 스스로 하나님이 되어 하나님의 권리를 도전하는 악입니다.
우리 모두는 흠이 있는 사람입니다. 완전하시고 흠이 없으시고 죄가 없으신 분은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판단하실 분은 하나님 한 분밖에 안 계십니다.
주님의 사랑으로 사랑하고 진정으로 하나되고 연합되고 서로 사랑하려고 하면, 무엇보다도 비방하지 아니하고 판단하지 아니하는 것이 급선무인 것입니다.
좋은 교회는 교향악과 같은 모임이 되어야 합니다. 서로 조화를 이루고, 서로 서로 돌보아주고, 그리고 사랑으로 연합하여 항상 따뜻함을 잃지 않아야 합니다.
교회의 가장 아름다운 정신은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것입니다.
흔히‘저 사람은 나보다 늦게 믿었다.’‘저 사람은 무식하다.’‘저사람은 항상 말뿐이다.’‘저사람은 분위기가 촌스럽다.’ ‘저사람은 우리교회에 온지 얼마되지 않았다’‘저사람은 외모가 이상하게 생겼다’ . . . .이런 이유들로 사람을 판단하고 무시합니다.
자기 이웃을 멸시하는 자는 어리석은 자입니다. “지혜 없는 자는 그 이웃을 멸시하나 명철한 자는 잠잠하느니라”(잠11:12)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모임’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혼자서는 결코 안됩니다. 함께 하는 곳입니다. 나 혼자서 잘 믿겠다는 생각은 교만이고 아집입니다. 주님은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함께 하시겠다고 했습니다(마18:20).
또 끼리끼리 모인다면 콩가루 교회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어떤 성도가 참 기쁜 일이 생겨서 기뻐 할 때 내가 기쁘지 않고 질투가 일어난다면사랑이 아닙니다. 참가족이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고전12:25)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하여 돌아보게 하셨으니”발바닥에 가시만 하나 찔려도 손도 동원되고 눈도 동원되고 신경도 동원되고 온몸이 동원되어 찔린 가시를 빼내는 것입니다.
문둥이들은 발가락이 떨어져도 고통이 없습니다. 손가락이 잘려나가도 몸에 통증이 없습니다. 지체의식은 함께 울고 함께 웃고 함께 영광을 누리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됨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힘이 아름답가도 했습니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시133:1)
우리 말을 연구하는 어떤 분은 “아름답다”라는 말의 어원을 추적하였더니 ‘지식의 안다’는 것과 ‘포용한다. 안다’라는 말과 ‘품에 가득하다. 아름’ 이라고 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고, 또 우리가 몸이 아프고 병들어서 ‘눕게된다. 앓는다’는 말도 ‘아름답다’와 같은 어원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아름다운 것과 병을 앓는 것은 전혀 관계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우리가 아이들을 키울 때 아이들이 한번씩 병치레를 하고 나면 꾀가 늘고 재주가 늘고 한번씩 호되게 앓고 나면 한껏 성숙하게 된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가만히 앉아있지를 못합니다. 병들고 안달이 납니다.
아가서를 보면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의 사랑의 노래가 서로 듀엣처럼 오고갑니다. 화답하듯 노래가 오고갑니다. 술람미 여인이 솔로몬을 향하여 이렇게 노래합니다. “내가 사랑하였으므로 병이 났습니다. 사랑하였으므로 병이 났습니다.”
여러분 사랑하는 사람 때문에 병이 난적이 있습니까? 그런 아픔이 있다면 우리는 아름다운 공동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를 너무 사랑해서 아픔을 겪었다면 아름답다는 것입니다.
하나됨이 없는 곳에 사단이 틈탑니다.
가룟 유다가 배신하게 된 원인이 무엇입니까? 혼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예수님과 함께 하고, 다른 11명의 제자들과 함께 할 때는 감히 마귀가 틈을 탈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슬슬 뒤로 꽁무니를 빼면서 마음에 불평과 부정적인 생각으로 가득 차서, 외로움을 느끼고 있을 때 마귀가 그의 마음에 들어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좋은 친구가 옆에 있어주면서 나의 외로움을 달래주고, 이해해 주는 사람이 있으면 우리는 마귀 사탄의 유혹과 시험도 이길 수가 있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라.(요14:16) 성령은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우리를 보호하고, 위로하고, 변호하고, 상담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분과 함께 하면 우리는 강한 하나님의 군대가 되어서 악한 마귀 사탄의 공격을 막아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언제나 하나님과, 성령님과, 성도들과 함께 하기를 기뻐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교회의 연결고리는 예수그리스도입니다.
교회의 각 마디를 연결 시켜 주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즉 보혈입니다.
엡2:13, 16-19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 .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초대 교회 시대에 교회가 로마 정부로부터 엄청난 박해를 받을 때가 있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지하 공동묘지인 카타콤 등에 숨어서 지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그리스도인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신분을 나타낼 때에 땅에 물고기를 그렸습니다. 물고기 그림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신분을 다른 그리스도인들에게 알리는 일종의 암호입니다. 물고기는 헬라어로 ‘익투스’로서 “예수 그리스도는 나의 구주십니다.”라는 헬라어 문장의 각각 첫 머리 글자를 딴 글자와 일치하기 때문에 물고기 그림이 그리스도인의 상징이 된 것입니다.
물고기 그림을 그리면 서로는 부둥켜안습니다. 그가 노예이든 병자이든 가난한 사람이든 관계가 없습니다. 서로의 신분이 무엇이든 모두 그리스도안에서 한 가족이기 때문입니다.
한몸 공동체가 되면 따뜻하게 됩니다.
전4:11-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팔레스타인 지방은 낮에는 몹시 더웠다가 밤이면 기온이 많이 내려가서 춥습니다. 그래서 잠을 잘 때는 서로 몸을 붙이고 자면 서로의 체온으로 따뜻하게 잠을 잘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또한 연합의 비결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서로 몸을 붙이고 체온을 연합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무리 추운 날도 따뜻하게 지낼 수 있습니다. 세상이 아무리 힘들어도 따뜻한 사람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따뜻함’이라는 것은 체온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마음의 따뜻함, 믿음의 따뜻함, 사랑을 의미합니다. 사랑이 따끈따끈한 교회, 은혜로운 교회가 되시기 바랍니다.
사랑이 없다면 기도도 봉사도 구제도 선교도 다 소용없습니다.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13:3) 사랑이 힘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랑으로 힘 있는 공동체를 만들어 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성령의 뜻에 순종할 때 하나되는 교회가 됩니다.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엡4:3-4)
사랑으로 하나가 되는 비결은? 성령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고집을 버리고 순종해야 합니다. 성령은 우리를 변화시키십니다. 지금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나쁜 습관을 버리라고 . . 변화되라고 . . .
현대 심리학 용어 중에 ‘고착상태’라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과거의 종래의 유치한 습관, 혹은 부정적인 습관을 버리지 않고 계속 유지함으로써 심리적 안정을 얻으려고 하는 현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고착상태에 빠진 사람은 변화를 싫어합니다. 무조건 변화는 싫어하고 변화를 두려워합니다. 그리고 변화되지 않은 낡은 것에 매여서 거기서 안정을 누리려고 합니다.
변화를 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퇴보하는 것입니다. 영적 고착상태는 참 문제입니다. 옛날에 내가 왕성 할 때의 얘기만 하면서 그 때의 일만 강조하고 주장하고 다른 사람을 그 옛날로 끌고 갈려고 한다면 그것은 고착상태이며 그런 고착상태를 가진 사람은 교회 공동체에 도움이 아니라 방해거리가 되는 것입니다.
출처/임경택 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