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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의가 빛나리라 (시 37: 5-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에게 우리 주님의 평화가 가득 넘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갑자기 자살한 연예인 이은주 씨의 유언에는 이런 글이 쓰여 있었습니다. "이렇게 사는 게 사는 게 아니다." 그녀가 얼마나 힘들게 살았기에 이런 유언을 남겼는가를 생각하면, 연민과 동정의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남긴 유언은 우리 모두를 숙연케 합니다. "이렇게 사는 게 사는 게 아니다." 그럼 어떻게 사는 게 사는 것이란 말입니까? 어떻게 해야 잘 사는 것이란 말입니까? 그녀는 우리에게 이런 질문, 아니 숙제를 던지고 홀연히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게 사는 게 잘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김수환 추기경이 한 말이 기억납니다. "잘 살지 못한다면, 산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하지만 영원히 살지 못한다면, 잘 산다는 것도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과연 지혜롭고 올바른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람이 영원히 살 수 있다고 믿을 때, 비로소 잘 살려고 노력하게 됩니다. 내일 죽으면 모든 게 끝장이라고 생각하면, 허무한 인생을 굳이 잘 살려고 애쓸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이런 노래가 있습니다.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늙어지면 못 노나니!" 늙어지면 잘 못 노니, 젊을 때에 잘 놀자는 말입니다. 하지만 젊어서 열심히 일하지 않는다면, 늙어서 어떻게 놀 수가 있단 말입니까? 그러므로 가사를 이렇게 바꾸어야 합니다. "일하세, 일하세, 젊어서 일하세, 늙어지면 잘 놀도록!" 하지만 정말 언제나 잘 놀고 싶다면, 가사를 이렇게 바꾸어야 합니다. "노세, 노세 살아서 노세, 죽으면 못 노나니!" 죽으면 흙으로 돌아갈 허무한 인생인데, 인생이 뭐 대단하다고 그리 수고스럽게, 땀흘려, 힘들게 사느냐 그 말입니다. 만약 인생이 정말 죽음으로 모두 끝장난다면, 살아 있을 때에 잘 노는 게 잘 사는 게 아니겠습니까? 죽으면 만사가 끝장이고, 죽으면 영생도 없고 심판도 없다고 생각하면, 사람들은 아무렇게 살기 쉽습니다. 죽으면 끝장날 인생을 잘 살아서 무엇하겠습니까? 영생이 있다고 믿기 때문에 하루하루를 잘 살려고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입니까? 의롭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김수환 추기경의 말을 이렇게 고쳐 쓰고 싶습니다. "잘 살지 못한다면, 산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하지만 의롭게 살지 못한다면, 잘 산다는 것도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의롭게 살 수 있습니까? 이 질문은 성경 전체를 꿰뚫는 가장 중요한 질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양심대로 사는 것이 의롭게 사는 길이라고 합니다. 양심도 분명히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는 역할을 하지만, 양심은 죄로 인해 심하게 더럽혀졌고, 시대와 환경과 민족에 따라 제 각기 다릅니다. 옛날 우리 나라에 늙은 부모를 산에 버렸다는 고려장 이야기가 있지만, 실제로 이런 일은 전혀 없었다고 합니다. 늙고 병든 부모를 버리는 것은 동서양 고금에 걸쳐서 양심을 팔아먹는 일입니다. 하지만 아프리카에는 늙고 병든 부모를 죽이는 것을 최고의 효도로 생각한 민족(피지족)도 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병들어 죽으면, 그의 영혼도 병들어 안식하지 못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모가 병이 들기 시작하면, 부모를 빨리 죽였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인륜과 양심이라는 것은 어디서나 똑 같지 않습니다.
대개의 사람들은 사회가 정한 규범과 법을 성실히 지키는 것이야말로 의롭게 사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사람이 규범과 법을 잘 지켜야만, 사회도 안정이 되고, 국가도 평안합니다. 그리고 개인도 가급적 사회가 정해놓은 법의 테두리 안에서 살아야만, 평안하게 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회 규범과 법도 항상 옳고 영원한 잣대가 되지 못합니다. 대개 사회의 규범과 법을 만드는 사람들은 지도층이기 때문에 일반 백성들은 불만을 품기 쉽습니다. 그리고 지도층이 법망을 교묘하게 피하거나 빠져나가는 일이 다반사이기 때문에 일반 백성들도 법을 잘 지키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법을 위반한 죄로 잡혀 들어가는 사람들을 보면, 일반 백성뿐만 아니라 지도층에 속한 사람들조차도 양심의 가책이나 미안한 마음을 가지기보다는, 힘과 운이 없어서 잡혀 들어간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이 TV를 보시면, 도박이나 다른 사소한 범죄로 잡혀 들어가는 사람들은 고개를 푹 숙이고 얼굴을 가리지만, 권력자들이나 정치가들은 잡혀 들어가더라도 아무런 잘못도 없다는 듯이 고개를 뻣뻣이 들기도 하고, 심지어는 싱글벙글 웃기까지 합니다. 자기만 잡혀가는 게 억울하다는 표정이고, 힘있는 실력자의 도움으로 곧 풀려날 거라는 기대를 품습니다. 이러니 누가 법 앞에서 만인이 공정하다고 하겠으며, 누가 법을 정직하게 지키려고 하겠습니까? 경제적으로 잘 사는 나라가 선진국이 아니라, 양심과 규범과 법이 잘 통하는 나라가 선진국입니다. 우리 모두는 이런 나라를 만들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하지만 양심과 규범과 법은 사람이 살아 있을 동안만 유효한 것입니다. 양심적으로 산다고 잘 산다는 보장도 없지만, 양심적으로 산다고 영원히 산다는 보장은 더욱 없습니다. 더욱이 세상의 규범과 법으로 영원히 살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은 영생의 비결이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레위기 18장 5절은 말합니다. 너희는 나의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인하여 살리라." 신명기 4장 40절을 말합니다.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규례와 명령을 지키라. 너와 네 후손이 복을 받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한없이 오래 살리라." "이사야 55장 3절도 말합니다.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 구약성경만이 행함을 강조하는 게 아닙니다. 신약성경도 영생을 위해 행함을 강조합니다. 누가복음 10장 28절을 말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이처럼 성경은 한결같이 영생의 비결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이 곧 의로운 사람이고, 이런 사람이 영원히 산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알기도 어렵거니와, 설령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안다고 해도, 모든 말씀을 지키기는 여간 어렵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사람이 자신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바라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아모스 5장 4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아모스 5장 6절도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하박국 2장 4절은 유명한 말입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바로 이 말씀을 이어 받아서 바울도 이렇게 말합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7).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니라"(갈 3:11). 히브리서 기자도 말합니다.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히 10:38).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려면, 먼저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려면, 먼저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찾으려면, 먼저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으려면,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믿음은 무엇보다도 나를 하나님에게 맡기는 일입니다. 나의 잘못과 걱정만이 아니라 나의 계획과 꿈을 하나님에게 맡기는 일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내 뜻에 맡기는 것이 아니라 나를 하나님의 뜻에 맡기는 일입니다. 하나님을 내 뜻대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나를 하나님의 뜻대로 바꾸는 일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에게 모든 것을 맡기지 않는 것은 거짓으로 믿는 사람, 아니 안 믿는 사람입니다.
천재적인 한줄타기 곡예사 블롱댕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나야가라 폭포 양쪽 계곡에 한 줄을 타고 건너온 사람이며, 심지어는 100층이 넘는 마천루 빌딩과 건너편에 있는 낮은 건물 사이에 비스듬히 걸친, 바람에 심하게 흔들리는 한 줄을 타고 건너올 정도로 정말 한줄타기에 천재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어느 날 많은 청중 앞에서 작은 꼬마를 품에 앉고 매우 높은 한 줄을 타는 곡예를 연출했습니다. 그러자 청중들은 박수갈채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블롱댕은 박수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작은 꼬마 앞으로 가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너는 나의 재주와 능력을 보았지?" 꼬마가 말했습니다. "보고 말고요, 정말 대단해요." 그 말을 받은 즉시 블롱댕이 말했습니다. "네 능력을 믿는다는 말이지?" "네, 믿어요" "그럼, 이제 너를 안고 한 줄을 탈 테니, 내 품에 오렴." 그러자 꼬마는 기겁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이구, 싫어요, 무서워요." 이 꼬마는 블롱댕의 능력을 보고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그에게 자신을 맡기지 못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말로는 믿는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오늘날도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은 하면서도, 실제로는 하나님을 믿지 않고, 그래서 하나님에게 모든 것을 맡기지 않는 엉터리 신자가 많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만약 여러분이 하나님을 진심으로 믿는다면,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십시오! 모든 것을 하나님과 의논하시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의지하십시오. 그리하시면, 몸도 마음도 평안합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하나님이 친히 여러분과 함께, 그리고 때로는 여러분을 대신하여, 여러분의 일을 이루어주십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하나님은 여러분의 의를 빛내 주십니다. 다윗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하시리로다." 예수님도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마 13:43). 하나님을 믿지 않은 사람들도 종종 부르는 "나 같은 죄일 살리신"(Amazing Grace)의 4절 가사도 이 구절을 본따서 지은 것 같습니다. "거기서 우리 영원히 주님의 은혜로 해처럼 밝게 살면서 주 찬양하리라."
오늘 우리가 읽은 시편 37편은 다윗이 지은 시로서, 다윗 자신의 신앙고백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윗만큼 신앙의 시를 지은 사람이 없으며, 그만큼 하나님을 철저히 순종한 사람도 없습니다. 구약성경에 많은 신앙 위인들이 나오지만, 다윗의 후손에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나셨습니다. 그는 이상적인 인간이요, 이상적인 신앙인이요, 이상적인 왕이요, 이상적인 메시아의 모델이었습니다. 왜 그의 인생이 이토록 찬란히 빛났습니까? 바로 일평생 하나님을 의지하였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이 사울왕을 이을 사람을 찾으려고 이새의 집에 갔다가, 들에서 양을 치고 돌아온 다윗을 보자 뭐라고 말했습니까? "그의 빛이 붉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답더라"(삼상 16:12). 다윗의 외모가 빛났다는 말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바로 앞 구절에서 하나님은 "사람과 같이 외모를 보시지 않고 중심을 보신다"(삼상 16:7)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왜 다윗은 빛이 나는 사람이었습니까? 양을 치는 목동으로서 하나님을 자신의 목자로 철저히 바라보고 살았고, 하나님을 철저히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작은 돌멩이 몇 개로 거인 골리앗을 넘어뜨린 것도 단지 그의 뛰어난 재주 때문만이 아니라 하나님을 철저히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골리앗 앞에서 그는 뭐라고 말했습니까? "내 솜씨 한번 맛볼래, 내 돌멩이를 맞고 안 죽은 놈이 없어." 그렇게 말했습니까? 아닙니다.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붙이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머리를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로 오늘날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삼상 17:45-47). 다윗의 간이 큰 게 아니라, 그의 믿음이 참으로 큽니다. 다윗이 남의 아내를 범하고 그의 남편을 죽게 한 범죄를 저지른 후에 왕으로서는 민망할 정도로 처절히, 침상을 눈물로 적시면서 회개한 것도 바로 하나님을 두려워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철저히 신뢰했기 때문이 아닙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떻게 사는 게 잘 사는 것이냐? 이런 질문을 가지고 설교를 시작하였습니다. 우리는 어떤 대답을 얻었습니까? 오래 사는 것, 성공해서 떵떵거리며 사는 것, 잘 먹고 잘 놀고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의롭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의롭게 사는 것만이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길이고, 영원히 사는 길이며, 영원히 빛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의로운 사람이 될 수 있는가? 이런 질문도 던졌습니다. 그 대답은 무엇이었습니까? 의로운 일을 많이 행하는 자가 의로운 자입니다. 하지만 누가 의로운 일을 많이 행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철저히 의지하는 자입니다. 이런 자를 하나님은 해와 같이 빛내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도 일평생 하나님을 의지하심으로써, 의롭게 사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의롭게 사심으로써, 잘 사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리하여 이 땅에서도 세상의 빛으로 사시고, 하늘나라에서도 해같이 빛나시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길이 찬양하시는 영광을 모두 다 누리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출처/이신건 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