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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통의 길 (시 1:1-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에게 주님의 평화가 늘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 가을 하늘이 무척 맑고 높습니다. 가을은 풍성한 결실의 계절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문학의 계절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미국의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R. Frost)가 남긴 '가지 않은 길'이라는 유명한 시 한편을 소개하겠습니다.
노란 숲 속에 길이 두 갈래로 났습니다.
나는 두 길을 다 가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오랫동안 서서 한 길이 굽어 꺾여 내려간 데까지,
바라다볼 수 있는 데까지 멀리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똑같이 아름다운 다른 길을 택했습니다.
그 길에는 풀이 더 있고 사람이 걸은 자취가 적어,
아마 더 걸어야 될 길이라고 나는 생각했었던 게지요.
그 길을 걸으므로, 그 길도 거의 같아질 것이지만.
그 날 아침 두 길에는
낙엽을 밟은 자취는 없었습니다.
아, 나는 다음 날을 위하여 한 길은 남겨 두었습니다.
길은 길에 연하여 끝없으므로
내가 다시 돌아올 것을 의심하면서.
먼 훗날 나는 어디선가
한숨을 쉬며 이야기할 것입니다.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다고,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하였다고,
그리고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이 시의 주인공은 숲 속에 난 두 갈래의 길 중에서 자신이 선택하여 걸어온 길을 되돌아봅니다. 두 길 앞에서 망설이던 주인공은 결국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선택하였다고 고백합니다. 하지만 그 때문에 그의 인생이 완전히 달라졌음을 매우 아쉬워합니다. 아무리 발이 두 개가 있는 사람이라도, 동시에 두 길을 걸어 갈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항상 한 가지 길을 최선을 다해 선택해야 하며, 그 결과를 담담히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지만 사람은 지나온 길을 되돌아 볼 때마다 항상 아쉬움을 느낍니다. 만약 다른 길로 걸어왔더라면, 내 인생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랬더라면, 내 인생은 더 낫지 않았을까? 혹시 내가 잘못된 길을 걸어온 것은 아닐까?
하지만 내가 잘 살았는지, 못 살았는지를 누가 판단합니까? 물론 세상 사람이 판단할 것입니다. 하지만 남이 뭐라고 하든, 내 인생에 대한 판단은 내가 내려야 합니다. 남이 판단하기 전에 내 양심이 스스로 판단합니다. 하지만 인생을 다 살기 전에는 내가 잘 살았는지 못 살았는지 판단하기가 어렵습니다. "사람에 대한 올바른 판단은 관 뚜껑이 닫힐 때에 내려진다"고 합니다만, 꼭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역사를 보면, 어떤 충신은 죽은 지 오래 된 후에 역적으로 바뀌고, 역적으로 죽은 어떤 사람은 나중에 충신이 되는 경우도 더러 있습니다. 이것을 '역사의 심판'이라고 합니다.
인생과 역사에는 반드시 심판이 따릅니다. 만약 인생에 심판이 없다면, 사람은 제 멋대로 살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양심적으로 떳떳한 삶을 살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고 만약 역사의 심판이 없다면, 역사는 온통 혼돈에 빠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역사를 올바르게 세우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중요하고 무거운 심판은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하나님은 인생과 역사의 주관자가 되시고, 심판자가 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함부로 살아서는 안 됩니다. 길이라고 해서, 아무 길을 다 가서는 안 됩니다.
물론 사람이 걸어가는 길에는 항상 두 갈래 길만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 갈래 길이 있으며, 그래서 우리는 이 길과 저 길을 번갈아 가기도 하고, 때로는 인생을 돌아가기도 하고, 때로는 제 자리에 되돌아오기도 합니다. 그처럼 우리는 인생과 역사를 항상 흑백논리, 선악논리로만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검은 색과 흰 색 외에도 수많은 색이 있으며, 많은 색들이 서로 섞여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생과 역사를 너무 성급히 판단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지금 우리 나라에는 과거사에 대한 정리 때문에 많은 갈등을 빚고 있습니다. 잘못된 역사는 분명히 청산되어야 하고, 우리 후손에게 올바른 역사관을 심어 주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신중하고 지혜롭게, 그리고 너그럽게 판단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색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아무리 복잡한 색이라고 해도, 흰 색이 더 많이 들어 있는지, 아니면 검은 색이 더 많이 들어 있는지를 우리는 어느 정도 구분할 수 있습니다. 물론 색 중에는 희지도 않고 검지도 않은 회색도 있습니다. 그처럼 우리는 종종 중용과 중립을 선택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선과 악 사이에는 중립이 있을 수 없습니다. 옳은 것은 옳고, 그릇된 것은 그릇된 것입니다. 옳기도 하고, 그릇되기도 한 것은 없습니다. 만약 두 사람이 싸운다면 둘 중의 하나가 더 옳을 겁니다. 황희 정승이 말한 대로 모두가 옳을 수는 없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지 않았을 겁니다.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마 5:37).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과 우상 사이에도 중립이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 아무리 많은 길이 있어도, 우리는 오직 한 길만을 가야 합니다. 사람이 아무리 서로 다르게 생각하고, 서로 다르게 살아간다고 하더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오직 두 가지 길 밖에 없습니다. 하나는 의인의 길이고, 다른 하나는 악인의 길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도 인생의 길에는 오직 두 갈래 길만이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는 의인의 길이고, 다른 하나는 악인의 길입니다. 의인의 길은 철따라 과실을 풍성히 맺는 길이고, 악인의 길은 아무런 과실도 맺지 못하는 길입니다. 의인의 길은 형통한 길이고, 악인의 길은 망하는 길입니다. 의인의 길은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길이고, 악인의 길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길입니다. 왜 인생에는 이렇게 두 갈래 길이 선명하게 갈립니까? 그 원인은 바로 2절에서 설명됩니다. 의인은 타고나면서 결정된 것이 아니고 바로 그 자신의 선택입니다. 의인이 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고, 그 말씀을 주야로 묵상한 결과입니다. 의인은 항상 하나님의 말씀에 깊이 뿌리를 내립니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늘 생명수를 공급받습니다.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듯이, 의인은 어떠한 환난이 와도 넘어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옥토에 뿌리를 깊이 내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시절을 따라 온갖 과실을 맺습니다. 가뭄이 와도, 그의 잎사귀는 마르지 않습니다. 그는 좋은 환경에서나 불리한 환경에서나 언제나 선하게 행동합니다. 그가 하는 일은 모두 형통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의인의 길이 형통하다"는 말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무조건 매사에 항상 성공하고, 매사가 항상 잘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아무리 큰 나무라도, 태풍이 불 때에는 크게 흔들립니다. 혹심한 바람과 무거운 시련 때문에 때로는 가지가 부러지기도 하고, 허리가 휘기도 합니다. 아니 때로는 둥지가 잘려 나가듯이, 크게 낭패를 당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시련과 고통이 비켜 가지는 않습니다. 시인은 이런 사실도 모르는 바보가 아닙니다. 그런데도 왜 시인은 의인의 길이 형통하다고 말합니까? 땅에 깊이 뿌리를 내린 나무는 결코 뿌리 채 뽑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뿌리가 깊은 나무는 뿌리가 얕은 나무처럼 쉽게 넘어지지 않습니다. 그는 환난을 당하지만, 환난을 이깁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의인을 인정하십니다. 그는 의인이 모이는 곳,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영광을 누립니다.
하지만 악인은 그렇지 않습니다. 악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악인의 꾀를 좇기를 좋아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양심을 판단하고 선하게 살려고 노력하지 않고, 제 멋대로, 세상의 법칙대로 살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죄인의 길에 들어섭니다. 그는 하나님을 부인하는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습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뿌리를 내리지 않기 때문에 알찬 과실을 맺지 못합니다. 그가 맺는 것이라고는 오직 바람에 나는 쭉정이 밖에 없습니다. 그는 쭉정이처럼 바람따라, 세월따라, 유행따라 살아갑니다. 그러다가 바람을 잘 타면, 어쩌다가 높이 나르기도 합니다. 한없이 높아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결국 바람이 약해지면, 쭉정이는 결국 땅으로 곤두박질을 칠 수밖에 없습니다. 땅에 떨어져도, 알맹이가 없기 때문에 땅에 뿌리를 전혀 내릴 수 없습니다. 바람에 또 날립니다. 이처럼 악인의 인생은 언제나 가볍고, 변덕스럽고, 흥망성쇠를 반복합니다.
가을걷이가 되면, 추수꾼은 쭉정이를 모아 아궁이에 태워 버립니다. 이처럼 심판 날이 오면, 하나님은 쭉정이를 인정하시지 않고 심판하십니다. 이처럼 악인의 불행한 운명을 자초하는 것은 조상 탓이 아니고, 환경 탓도 아닙니다. 오직 그 자신의 선택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만해졌고, 악해졌고, 변덕스러워졌고, 그래서 쭉정이와 같은 인생을 살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떠한 환경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붙든다면, 여러분은 이미 승리한 사람입니다. 마귀가 오더라도,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말씀으로 마귀를 물리칠 수 있습니다. 어떤 시련이 오더라도, 말씀 위에 서 있는 사람은 반석 위에 지은 집과 같아서 결코 무너지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 악인의 길을 걷지 말고, 의인의 길을 걸어갑시다. 그리하여 복이 있는 사람, 행복한 사람이 됩시다. 형통한 사람이 됩시다.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사람이 됩시다. 그렇게 되기 위해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합시다.
출처/이신건 목사 설교 중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에게 주님의 평화가 늘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 가을 하늘이 무척 맑고 높습니다. 가을은 풍성한 결실의 계절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문학의 계절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미국의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R. Frost)가 남긴 '가지 않은 길'이라는 유명한 시 한편을 소개하겠습니다.
노란 숲 속에 길이 두 갈래로 났습니다.
나는 두 길을 다 가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오랫동안 서서 한 길이 굽어 꺾여 내려간 데까지,
바라다볼 수 있는 데까지 멀리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똑같이 아름다운 다른 길을 택했습니다.
그 길에는 풀이 더 있고 사람이 걸은 자취가 적어,
아마 더 걸어야 될 길이라고 나는 생각했었던 게지요.
그 길을 걸으므로, 그 길도 거의 같아질 것이지만.
그 날 아침 두 길에는
낙엽을 밟은 자취는 없었습니다.
아, 나는 다음 날을 위하여 한 길은 남겨 두었습니다.
길은 길에 연하여 끝없으므로
내가 다시 돌아올 것을 의심하면서.
먼 훗날 나는 어디선가
한숨을 쉬며 이야기할 것입니다.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다고,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하였다고,
그리고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이 시의 주인공은 숲 속에 난 두 갈래의 길 중에서 자신이 선택하여 걸어온 길을 되돌아봅니다. 두 길 앞에서 망설이던 주인공은 결국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선택하였다고 고백합니다. 하지만 그 때문에 그의 인생이 완전히 달라졌음을 매우 아쉬워합니다. 아무리 발이 두 개가 있는 사람이라도, 동시에 두 길을 걸어 갈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항상 한 가지 길을 최선을 다해 선택해야 하며, 그 결과를 담담히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지만 사람은 지나온 길을 되돌아 볼 때마다 항상 아쉬움을 느낍니다. 만약 다른 길로 걸어왔더라면, 내 인생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랬더라면, 내 인생은 더 낫지 않았을까? 혹시 내가 잘못된 길을 걸어온 것은 아닐까?
하지만 내가 잘 살았는지, 못 살았는지를 누가 판단합니까? 물론 세상 사람이 판단할 것입니다. 하지만 남이 뭐라고 하든, 내 인생에 대한 판단은 내가 내려야 합니다. 남이 판단하기 전에 내 양심이 스스로 판단합니다. 하지만 인생을 다 살기 전에는 내가 잘 살았는지 못 살았는지 판단하기가 어렵습니다. "사람에 대한 올바른 판단은 관 뚜껑이 닫힐 때에 내려진다"고 합니다만, 꼭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역사를 보면, 어떤 충신은 죽은 지 오래 된 후에 역적으로 바뀌고, 역적으로 죽은 어떤 사람은 나중에 충신이 되는 경우도 더러 있습니다. 이것을 '역사의 심판'이라고 합니다.
인생과 역사에는 반드시 심판이 따릅니다. 만약 인생에 심판이 없다면, 사람은 제 멋대로 살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양심적으로 떳떳한 삶을 살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고 만약 역사의 심판이 없다면, 역사는 온통 혼돈에 빠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역사를 올바르게 세우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중요하고 무거운 심판은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하나님은 인생과 역사의 주관자가 되시고, 심판자가 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함부로 살아서는 안 됩니다. 길이라고 해서, 아무 길을 다 가서는 안 됩니다.
물론 사람이 걸어가는 길에는 항상 두 갈래 길만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 갈래 길이 있으며, 그래서 우리는 이 길과 저 길을 번갈아 가기도 하고, 때로는 인생을 돌아가기도 하고, 때로는 제 자리에 되돌아오기도 합니다. 그처럼 우리는 인생과 역사를 항상 흑백논리, 선악논리로만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검은 색과 흰 색 외에도 수많은 색이 있으며, 많은 색들이 서로 섞여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생과 역사를 너무 성급히 판단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지금 우리 나라에는 과거사에 대한 정리 때문에 많은 갈등을 빚고 있습니다. 잘못된 역사는 분명히 청산되어야 하고, 우리 후손에게 올바른 역사관을 심어 주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신중하고 지혜롭게, 그리고 너그럽게 판단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색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아무리 복잡한 색이라고 해도, 흰 색이 더 많이 들어 있는지, 아니면 검은 색이 더 많이 들어 있는지를 우리는 어느 정도 구분할 수 있습니다. 물론 색 중에는 희지도 않고 검지도 않은 회색도 있습니다. 그처럼 우리는 종종 중용과 중립을 선택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선과 악 사이에는 중립이 있을 수 없습니다. 옳은 것은 옳고, 그릇된 것은 그릇된 것입니다. 옳기도 하고, 그릇되기도 한 것은 없습니다. 만약 두 사람이 싸운다면 둘 중의 하나가 더 옳을 겁니다. 황희 정승이 말한 대로 모두가 옳을 수는 없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지 않았을 겁니다.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마 5:37).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과 우상 사이에도 중립이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 아무리 많은 길이 있어도, 우리는 오직 한 길만을 가야 합니다. 사람이 아무리 서로 다르게 생각하고, 서로 다르게 살아간다고 하더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오직 두 가지 길 밖에 없습니다. 하나는 의인의 길이고, 다른 하나는 악인의 길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도 인생의 길에는 오직 두 갈래 길만이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는 의인의 길이고, 다른 하나는 악인의 길입니다. 의인의 길은 철따라 과실을 풍성히 맺는 길이고, 악인의 길은 아무런 과실도 맺지 못하는 길입니다. 의인의 길은 형통한 길이고, 악인의 길은 망하는 길입니다. 의인의 길은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길이고, 악인의 길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길입니다. 왜 인생에는 이렇게 두 갈래 길이 선명하게 갈립니까? 그 원인은 바로 2절에서 설명됩니다. 의인은 타고나면서 결정된 것이 아니고 바로 그 자신의 선택입니다. 의인이 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고, 그 말씀을 주야로 묵상한 결과입니다. 의인은 항상 하나님의 말씀에 깊이 뿌리를 내립니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늘 생명수를 공급받습니다.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듯이, 의인은 어떠한 환난이 와도 넘어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옥토에 뿌리를 깊이 내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시절을 따라 온갖 과실을 맺습니다. 가뭄이 와도, 그의 잎사귀는 마르지 않습니다. 그는 좋은 환경에서나 불리한 환경에서나 언제나 선하게 행동합니다. 그가 하는 일은 모두 형통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의인의 길이 형통하다"는 말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무조건 매사에 항상 성공하고, 매사가 항상 잘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아무리 큰 나무라도, 태풍이 불 때에는 크게 흔들립니다. 혹심한 바람과 무거운 시련 때문에 때로는 가지가 부러지기도 하고, 허리가 휘기도 합니다. 아니 때로는 둥지가 잘려 나가듯이, 크게 낭패를 당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시련과 고통이 비켜 가지는 않습니다. 시인은 이런 사실도 모르는 바보가 아닙니다. 그런데도 왜 시인은 의인의 길이 형통하다고 말합니까? 땅에 깊이 뿌리를 내린 나무는 결코 뿌리 채 뽑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뿌리가 깊은 나무는 뿌리가 얕은 나무처럼 쉽게 넘어지지 않습니다. 그는 환난을 당하지만, 환난을 이깁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의인을 인정하십니다. 그는 의인이 모이는 곳,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영광을 누립니다.
하지만 악인은 그렇지 않습니다. 악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악인의 꾀를 좇기를 좋아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양심을 판단하고 선하게 살려고 노력하지 않고, 제 멋대로, 세상의 법칙대로 살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죄인의 길에 들어섭니다. 그는 하나님을 부인하는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습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뿌리를 내리지 않기 때문에 알찬 과실을 맺지 못합니다. 그가 맺는 것이라고는 오직 바람에 나는 쭉정이 밖에 없습니다. 그는 쭉정이처럼 바람따라, 세월따라, 유행따라 살아갑니다. 그러다가 바람을 잘 타면, 어쩌다가 높이 나르기도 합니다. 한없이 높아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결국 바람이 약해지면, 쭉정이는 결국 땅으로 곤두박질을 칠 수밖에 없습니다. 땅에 떨어져도, 알맹이가 없기 때문에 땅에 뿌리를 전혀 내릴 수 없습니다. 바람에 또 날립니다. 이처럼 악인의 인생은 언제나 가볍고, 변덕스럽고, 흥망성쇠를 반복합니다.
가을걷이가 되면, 추수꾼은 쭉정이를 모아 아궁이에 태워 버립니다. 이처럼 심판 날이 오면, 하나님은 쭉정이를 인정하시지 않고 심판하십니다. 이처럼 악인의 불행한 운명을 자초하는 것은 조상 탓이 아니고, 환경 탓도 아닙니다. 오직 그 자신의 선택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만해졌고, 악해졌고, 변덕스러워졌고, 그래서 쭉정이와 같은 인생을 살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떠한 환경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붙든다면, 여러분은 이미 승리한 사람입니다. 마귀가 오더라도,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말씀으로 마귀를 물리칠 수 있습니다. 어떤 시련이 오더라도, 말씀 위에 서 있는 사람은 반석 위에 지은 집과 같아서 결코 무너지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 악인의 길을 걷지 말고, 의인의 길을 걸어갑시다. 그리하여 복이 있는 사람, 행복한 사람이 됩시다. 형통한 사람이 됩시다.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사람이 됩시다. 그렇게 되기 위해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합시다.
출처/이신건 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