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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통하는 사람 (복Ⅱ ) (마태복음5:1-4)
오늘은 먼저 장학주일에 대하여 잠간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우리교회는 청소년들을 다음 세대의 일꾼으로 양성하고 선배들의 믿음을 잘 계승하게 하고자 하는 비전이 있습니다. 1982년부터 많은 성도들의 정성어린 헌금으로 지금까지 연인원 2,150명에게 총 7억 6천만 원의 장학금을 지급하였습니다. 현재, 5억 5천만 원의 장학금이 적립되어있습니다. 앞으로 장학금10억원을 목표로 기도하며 모금을 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장학기금의 이자 수익이 적은 관계로 많은 학생들에게 충분히 도움을 줄만큼 충분하지 못합니다. 앞으로는 중·고 대학생뿐만 아니라, 유학을 가는 대학원학생들에게도 장학금의 혜택을 주어 명실상부한 이 시대의 지도자들을 육성하는 대도 기여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금년부터 장학주일을 정하여 전교인들의 정성을 함께 모우기로 하였습니다. 종교가족 여러분들의 적극적인 기도와 동참을 부탁드립니다. 다음 주일에 드리는 장학헌금에 동참해주시고, 특별히 가정의 경조사가 있을 때에, 장학헌금을 드리면 장학기금마련에 힘이 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오늘말씀은 가난한 마음의 사람이 애통하게 되면, 위로를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애통한다는 말은 헬라어로 πενθο?ντε? 펜툰테스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의 뜻은 단순히 가난하고 배가 고파서 우는 것보다, 가난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안타까워하며 깊은 슬픔에 잠기는 것을 말합니다.
애통함으로 복을 받은 한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1874년 황해도 안악에서 양반집 아들로 태어난 김익두는, 공부를 곧 잘해서 과거시험에 몇 차례 응시를 하였으나 불행히도 낙방하였습니다. 그런데 친구의 보증을 서준 것이 잘못 되어서 살던 집을 날리게 되었습니다. 화가 난 그는 술에 빠지게 되었고, 나중에는 깡패두목이 되어 수많은 사람들을 괴롭혔습니다. 오죽했으면 장날 고개를 넘는 사람들은, 서낭당에 돌을 던지며, ‘오늘 김익두를 만나지 않게 해 주십시오’ 하고 빌었다고 합니다.
1900년 어느 날, 몹시 술에 취하여 공중변소에서 일보다가 미끄러져서 그만 똥통 속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살려달라고 소리쳤지만, 누구 하나 그를 도와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건져주기는커녕 그 머리 위에 오줌을 누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후에 그 부인이 와서 겨우 건져내었는데, 술이 깬 뒤에 부인이 그 날에 있었던 일들을 다 이야기 해 주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김익두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때까지 안악 골에서는 자기가 최고인줄 알고 주먹하나 믿고 천하를 휘 젖고 다니며 살았는데 내가 얼마나 악하게 살았으면, 내가 얼마나 미웠으면, 죽을 지경에 빠진 내 머리 위에 오줌까지 누었겠는가! 그는 며칠 동안 두문불출하고, 자기를 돌아보았습니다. 마침 동네의 교회에서 열린 부흥회에 참여하였다가 미국 선교사 W. L. Swallen의 설교를 듣고 은혜를 받았습니다. 죄악된 자신을 돌아보며 깊이 뉘우치며, 가슴을 치고, 통회자복하며 엄청난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였습니다. 그 이듬해인 1901년에 세례를 받고, 1910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되어 한국교회의 큰 획을 긋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김익두의 애통하는 마음은 똥통에 빠져서 고생한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죽을 고생을 하며 도움을 구하였으나 누구에게도 도움을 받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데 있었습니다. 그래서 김익두는 애통하였습니다. 그렇게 애통하는 김익두에게 임한 하나님의 은혜는 말할 수 없이 큰 하나님의 위로였습니다. 천하의 망나니를 훌륭한 목사로 세우셔서 한국교회 역사의 한 획을 긋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애통할 때 위로하시는 하나님의 복을 받습니다.
첫째, 죄를 인하여 애통하는 사람입니다.
2천년 전 예루살렘 성문 밖 골고다 언덕으로 예수그리스도께서 무거운 십자가를 지시고 힘겹게 오르고 있었습니다. 무자비한 채찍에 맞아 갈기갈기 찢어진 몸에서 흐르는 피로 온몸을 물들었습니다. 짓눌러 씌워진 가시관의 가시가 박힌 머리에서는 형용할 수 없는 아픔과 함께 흘러내리는 피와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습니다. 고통으로 짓누르는 십자가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여 쓰러지고 또 쓰러지는 예수님을 채찍으로 내려치는 로마병정의 무자비함! 그 쓰라진 채찍질에도 쉽게 얼어 서지 못하는 예수를 위하여 로마병사는 그 곁에서 함께 따르던 구레네 사람 시몬에게 십자가를 함께 지도록 했습니다.
이 처절한 십자가의 길에는 백성들과 여인들이 함께 따르고 있었습니다. 평소에 예수님을 믿고 따르던 많은 여인들이 가슴을 치며 슬피 울고 있었습니다. 이 때였습니다. 그 무거운 고통의 십자가를 지시고 가시던 예수님께서 여인들을 향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들을 위하여 울라.”(누가복음23:28)
이 한마디 주님의 음성은 울던 여인들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그들은 왜 그렇게 슬피 울고 있었을까요?
첫째는, 사랑하고 존경하는 예수님이 그토록 처참한 지경에 빠진 것이 불쌍해서 울었습니다. 고통스러워하시는 예수님에 대한 한없는 동정의 눈물이었습니다.
둘째는, 예수님께 사정없이 잔인하게 채찍질하는 로마군 병들 때문에 원망하며 울었습니다.
셋째는 주님을 위해서 죽을지언정 주님을 부인하지 않겠다던 제자들이 한 사람도 보이진 않음을 안타까워하며 울었습니다. 용기 없는 제자들의 야속함을 아쉬워하며 울었습니다.
무엇보다 그렇게 고통을 당하시는 예수님을 위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들이 한심해서 울었습니다.
이렇게 슬피 울며 따르던 여인들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와 네 딸들을 위하여 울어라.”
고난 받는 나의 아픔을 애처롭게 생각하며 나를 바라보지 말고, 아직도 죄 가운데서 방황하고 있는 너와 네 자녀들의 죄를 인하여 애통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만약에 태초에 에덴동산의 선악과를 먹는 배반이 없었다면 십자가는 없었을 것입니다. 인간의 계속되는 죄악이 없었다면 예수님은 이 세상에 인간으로 오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십자가는 그 고난의 주님을 바라보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 오늘도 죄 중에 빠져 허덕이는 저와 여러분들을 위한 하나님의 사랑이며 긍휼이며, 자비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바라보는 자들이여! 오늘도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죄를 계속하고 있는 너와 네 자녀들을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울어야 합니다.
십자가 앞에 서있는 자들이여! 십자가에 비쳐져 있는 죄의 삯으로 마땅히 죽어야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 우십시오. 그리고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어둠 속에 살고 있는 자녀들을 위하여 우십시오.
회개하며 애통하며 우십시오.
그리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의롭다고 위로하여 주십니다.
찬송가145장입니다.
1.오 거룩하신 주님, 그 상하신 머리, 조롱과 욕에 싸여 가시관 쓰셨네,
아침 해처럼 밝던 주님의 얼굴이 고통과 치욕으로 창백해 지셨네.
2.주 당하신 그 고난 죄인 위함이라. 내 지은 죄로 인해 주 형벌 받았네.
내 주여 비옵나니, 이 약한 죄인을 은혜와 사랑으로 늘 지켜주소서.
3.나 무슨 말로 주께 다 감사드리랴. 끝없는 주의 사랑 한 없이 고마워.
보잘 것 없는 나를 주의 것 삼으사 주님만 사랑하며 나 살게 하소서. 아멘
둘째, 구원받아야할 영혼들을 인하여 애통하는 사람입니다.
로마서9:1-3입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진실을 말하거니와, 내 말이 거짓말이 아니고, 내 안에 계시는 성령님과 함께 내 양심이 증언하는 바는, 내게 나의 민족을 위하는 큰 슬픔과 고통이 있는 것입니다. 곧 육신으로 나와 동족, 내 겨레를 위하여서라면, 그리스도에게서 나 자신이 저주를 받아 추방을 당할지라도 원하는 바입니다.”
사도바울은 천국의 영광을 경험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복음 때문에 로마감옥 있을 때에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훨씬 더 나으나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여러분에게는 더 필요할 것입니다.”(빌립보서1:23,24)
죽음을 끝이라고 누가 말하였습니까. 바울사도는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의 영광을 바라보았습니다. 이 영광을 아는 바울사도는 구원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바라볼 때 그 안타까움은 이루 말로 다 헤아릴 수 없었습니다. 특히 예수님이 이스라엘에 오셨는데도, 그를 믿지 못하고 구원을 받지 못한 자기민족 골육친척들을 생각하며 애통해 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16:19이하에 기록된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를 기억합니다.
부자는 이 세상에서 남부럽지 않게 잘 살다가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 집 문간에서 버려지는 부스러기를 주어먹으면서 온 몸에 헌데가 나서 늘 괴로워하던 거지도 죽었습니다. 그런데, 부자는 죽어 지옥에서 괴로움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반대로 그 집 문 깐에서 얻어먹던 거지나사로는 천국의 아브라함의 품속에서 한없는 위로를 받고 있었습니다. 부자가 아브라함에게 간청합니다.
“나사로를 시켜서 손끝에 물 한 방울을 찍어 자기 혀끝을 시원하게 해주십시오.”
“나사로를 다시 살려서내 아버지 집으로 보내어 내 5형제들에게 복음을 전해서 그들은 나와 같이 이곳에 와서 고생하는 일이 없게 해주십시오.”
여기, 이 부자의 애끓는 애원과 애통을 봅니다. 세상에서 떵떵거리며 살면서 ‘영생은 무슨 영생! 누가 죽어 봤나? 천국은 무슨 얼어 죽을 놈의 천국이냐? 산 사람의 일도 다 모르는 판에 무슨 죽은 다음의 일이냐?’ 하며 빈정거리며 세상의 쾌락에 휩쓸려 살고 있는 영혼들을 인하여 애통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 복이 있습니다.
이들은 어떻게 하든지 한 영혼이라도 더 건지기 위하여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복음전하는 일에 힘쓰는 자들입니다.
오는 수요일 저녁 특별한 목사님 한분이 우리교회에 오셔서 말씀을 전하십니다. 이스라엘 본토출신으로, 1991년 교회를 개척하여 현재 200명이 출석하고 있는 이스라엘 최대의 개신교교회 담임목사님이십니다. 이 교회에서 지금 세계 볼리비아, 슬로바키아, 프랑스, 헝거리, 하이파 등에 선교사를 파송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 동족의 구원을 위하여 노방전도, 축호전도, 웹사이트를 통한 전도, 신문광고를 통한 전도, 고속도로 네온사인광고 전도를 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심정으로 동족의 구원을 위하여 복음을 전하는 분입니다.
영혼의 구원을 위하여 애통하는 사람은 천하보다 귀한영혼을 살려내는 결과를 경험하게 됩니다. 영혼구원을 위하여 애통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세상의 축복으로 위로하십니다.
셋째, 새로운 도전을 인하여 애통하는 사람입니다.
느헤미야를 기억하십니까?
주전 586년 유다가 바벨론제국에 멸망당하고, 바벨론이 페르샤제국에 정복된 다음 느헤미야는 아닥사스다 왕의 의전비서관으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생활에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그는 사람을 보내어 고국 예루살렘의 형편을 살피고 와서 보고를 하도록 하였습니다. 보고자의 보고는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어려웠습니다.
“사로잡혀오지 않고, 그 곳에 남아 있는 유다 사람들은, 거기에서 고생이 아주 심합니다. 업신여김을 받습니다. 예루살렘 성벽은 허물어지고, 성문들은 다 불에 탔습니다.”(느1:3)
이 소식을 들은 느헤미야는 조국의 현실을 생각하며 울었습니다.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슬퍼하며 금식하며 주야로 기도하였습니다.
느헤미야1:4-7입니다.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 가로되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이여,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언약을 지키시며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간구하나이다. 이제 종이 주의 종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주야로 기도하오며 이스라엘 자손의 주 앞에 범죄함을 자복하오니, 주는 귀를 기울이시며, 눈을 여시사, 종의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나와 나의 아비 집이 범죄하여, 주를 향하여 심히 악을 행하여 주의 종 모세에게 주께서 명하신 계명과 율례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였나이다.’”
감히 그 먼 이국땅에서 조국의 회복을 꿈꾸며 기도하였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새로운 도전의 의지입니다. 그러나 자신에게 그 꿈을 이룰만한 힘이 없기 때문에 하늘의 하나님께 애통하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자신의 욕심만을 위하지 않고, 이 땅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큰일을 꿈꾸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도전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는 주전 444년에 귀환하여 52일 만에 성벽을 재건하였습니다.
모세는 애굽 땅에 있는 자기백성들의 해방을 꿈꾸었습니다. 젊은 시절 그 일을 시도했다가 실패의 고배를 마시고, 미디안 광야에 도망해서 망명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자기민족의 해방에 대한 꿈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십니다. 애굽으로 가라 하십니다. 그 때 모세는 전과 기록을 가진 자였고, 이미 입이 둔하여 말을 잘 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민족을 해방시킬만한 어떤 자원도 가지지 못하였습니다. 그럼에도 가라 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가서 마침내 자기 백성을 해방시켰습니다.
베드로는 실수 많은 허물투성이의 제자였습니다. 물위로 걷다가 물 속에 빠졌던 사람입니다. 예수님께 십자가를 지지 말라고 만류하다가 심한 책망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을 모른다고 배반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떠나 다시 고기 잡으러 나갈 때도 앞장을 섰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에게 “내 양을 먹이라” 하신 주님의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오순절 날에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마침내 그 일들을 해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꼭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자신의 부족을 알기에, 연약함을 알기에 새벽마다, 밤마다, 날마다, 일마다, 때마다 하나님께 울며 애통하며 기도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
마음이 가난하여 하나님 밖에는 어디에도 의지할 곳 없어,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며 기도하며 애통하며 하나님의 위로를 기다리는 사람 복이 있습니다.
암 선고를 받은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자신의 삶의 한계를 직감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생애를 슬픔이나 눈물에 맡겨 둘 수는 없습니다. 이 어려움을 패배라고 단정해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자신을 동정하고 자학하는 이기적인 슬픔에 자신을 맡길 수는 없었습니다. 험한 인생 살아오면서 경험했던 수많은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해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도 감사할 수 있는 삶의 조건들을 헤아리기 시작했습니다. 감사하였습니다. 찬양하였습니다. 기도하였습니다.
이 상황에서 하나님 밖에는 어디에도 의지할 데 없는 가난한 마음으로 애통하며 기도하였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언제나 용기를 주십니다.
흔들리지 않는 마음의 평정을 주십니다.
우리 곁에 항상 친구처럼 다정히 함께 계셔서 때를 따라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그 어떤 상황 앞에서도 꺾이지 않고 포기하지 않는 열정을 주십니다.
그리고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새로운 비전의 약속을 붙잡고 도전할 의지를 주십니다.
출처/최이우 목사 설교 중에서
오늘은 먼저 장학주일에 대하여 잠간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우리교회는 청소년들을 다음 세대의 일꾼으로 양성하고 선배들의 믿음을 잘 계승하게 하고자 하는 비전이 있습니다. 1982년부터 많은 성도들의 정성어린 헌금으로 지금까지 연인원 2,150명에게 총 7억 6천만 원의 장학금을 지급하였습니다. 현재, 5억 5천만 원의 장학금이 적립되어있습니다. 앞으로 장학금10억원을 목표로 기도하며 모금을 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장학기금의 이자 수익이 적은 관계로 많은 학생들에게 충분히 도움을 줄만큼 충분하지 못합니다. 앞으로는 중·고 대학생뿐만 아니라, 유학을 가는 대학원학생들에게도 장학금의 혜택을 주어 명실상부한 이 시대의 지도자들을 육성하는 대도 기여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금년부터 장학주일을 정하여 전교인들의 정성을 함께 모우기로 하였습니다. 종교가족 여러분들의 적극적인 기도와 동참을 부탁드립니다. 다음 주일에 드리는 장학헌금에 동참해주시고, 특별히 가정의 경조사가 있을 때에, 장학헌금을 드리면 장학기금마련에 힘이 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오늘말씀은 가난한 마음의 사람이 애통하게 되면, 위로를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애통한다는 말은 헬라어로 πενθο?ντε? 펜툰테스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의 뜻은 단순히 가난하고 배가 고파서 우는 것보다, 가난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안타까워하며 깊은 슬픔에 잠기는 것을 말합니다.
애통함으로 복을 받은 한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1874년 황해도 안악에서 양반집 아들로 태어난 김익두는, 공부를 곧 잘해서 과거시험에 몇 차례 응시를 하였으나 불행히도 낙방하였습니다. 그런데 친구의 보증을 서준 것이 잘못 되어서 살던 집을 날리게 되었습니다. 화가 난 그는 술에 빠지게 되었고, 나중에는 깡패두목이 되어 수많은 사람들을 괴롭혔습니다. 오죽했으면 장날 고개를 넘는 사람들은, 서낭당에 돌을 던지며, ‘오늘 김익두를 만나지 않게 해 주십시오’ 하고 빌었다고 합니다.
1900년 어느 날, 몹시 술에 취하여 공중변소에서 일보다가 미끄러져서 그만 똥통 속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살려달라고 소리쳤지만, 누구 하나 그를 도와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건져주기는커녕 그 머리 위에 오줌을 누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후에 그 부인이 와서 겨우 건져내었는데, 술이 깬 뒤에 부인이 그 날에 있었던 일들을 다 이야기 해 주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김익두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때까지 안악 골에서는 자기가 최고인줄 알고 주먹하나 믿고 천하를 휘 젖고 다니며 살았는데 내가 얼마나 악하게 살았으면, 내가 얼마나 미웠으면, 죽을 지경에 빠진 내 머리 위에 오줌까지 누었겠는가! 그는 며칠 동안 두문불출하고, 자기를 돌아보았습니다. 마침 동네의 교회에서 열린 부흥회에 참여하였다가 미국 선교사 W. L. Swallen의 설교를 듣고 은혜를 받았습니다. 죄악된 자신을 돌아보며 깊이 뉘우치며, 가슴을 치고, 통회자복하며 엄청난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였습니다. 그 이듬해인 1901년에 세례를 받고, 1910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되어 한국교회의 큰 획을 긋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김익두의 애통하는 마음은 똥통에 빠져서 고생한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죽을 고생을 하며 도움을 구하였으나 누구에게도 도움을 받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데 있었습니다. 그래서 김익두는 애통하였습니다. 그렇게 애통하는 김익두에게 임한 하나님의 은혜는 말할 수 없이 큰 하나님의 위로였습니다. 천하의 망나니를 훌륭한 목사로 세우셔서 한국교회 역사의 한 획을 긋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애통할 때 위로하시는 하나님의 복을 받습니다.
첫째, 죄를 인하여 애통하는 사람입니다.
2천년 전 예루살렘 성문 밖 골고다 언덕으로 예수그리스도께서 무거운 십자가를 지시고 힘겹게 오르고 있었습니다. 무자비한 채찍에 맞아 갈기갈기 찢어진 몸에서 흐르는 피로 온몸을 물들었습니다. 짓눌러 씌워진 가시관의 가시가 박힌 머리에서는 형용할 수 없는 아픔과 함께 흘러내리는 피와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습니다. 고통으로 짓누르는 십자가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여 쓰러지고 또 쓰러지는 예수님을 채찍으로 내려치는 로마병정의 무자비함! 그 쓰라진 채찍질에도 쉽게 얼어 서지 못하는 예수를 위하여 로마병사는 그 곁에서 함께 따르던 구레네 사람 시몬에게 십자가를 함께 지도록 했습니다.
이 처절한 십자가의 길에는 백성들과 여인들이 함께 따르고 있었습니다. 평소에 예수님을 믿고 따르던 많은 여인들이 가슴을 치며 슬피 울고 있었습니다. 이 때였습니다. 그 무거운 고통의 십자가를 지시고 가시던 예수님께서 여인들을 향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들을 위하여 울라.”(누가복음23:28)
이 한마디 주님의 음성은 울던 여인들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그들은 왜 그렇게 슬피 울고 있었을까요?
첫째는, 사랑하고 존경하는 예수님이 그토록 처참한 지경에 빠진 것이 불쌍해서 울었습니다. 고통스러워하시는 예수님에 대한 한없는 동정의 눈물이었습니다.
둘째는, 예수님께 사정없이 잔인하게 채찍질하는 로마군 병들 때문에 원망하며 울었습니다.
셋째는 주님을 위해서 죽을지언정 주님을 부인하지 않겠다던 제자들이 한 사람도 보이진 않음을 안타까워하며 울었습니다. 용기 없는 제자들의 야속함을 아쉬워하며 울었습니다.
무엇보다 그렇게 고통을 당하시는 예수님을 위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들이 한심해서 울었습니다.
이렇게 슬피 울며 따르던 여인들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와 네 딸들을 위하여 울어라.”
고난 받는 나의 아픔을 애처롭게 생각하며 나를 바라보지 말고, 아직도 죄 가운데서 방황하고 있는 너와 네 자녀들의 죄를 인하여 애통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만약에 태초에 에덴동산의 선악과를 먹는 배반이 없었다면 십자가는 없었을 것입니다. 인간의 계속되는 죄악이 없었다면 예수님은 이 세상에 인간으로 오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십자가는 그 고난의 주님을 바라보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 오늘도 죄 중에 빠져 허덕이는 저와 여러분들을 위한 하나님의 사랑이며 긍휼이며, 자비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바라보는 자들이여! 오늘도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죄를 계속하고 있는 너와 네 자녀들을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울어야 합니다.
십자가 앞에 서있는 자들이여! 십자가에 비쳐져 있는 죄의 삯으로 마땅히 죽어야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 우십시오. 그리고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어둠 속에 살고 있는 자녀들을 위하여 우십시오.
회개하며 애통하며 우십시오.
그리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의롭다고 위로하여 주십니다.
찬송가145장입니다.
1.오 거룩하신 주님, 그 상하신 머리, 조롱과 욕에 싸여 가시관 쓰셨네,
아침 해처럼 밝던 주님의 얼굴이 고통과 치욕으로 창백해 지셨네.
2.주 당하신 그 고난 죄인 위함이라. 내 지은 죄로 인해 주 형벌 받았네.
내 주여 비옵나니, 이 약한 죄인을 은혜와 사랑으로 늘 지켜주소서.
3.나 무슨 말로 주께 다 감사드리랴. 끝없는 주의 사랑 한 없이 고마워.
보잘 것 없는 나를 주의 것 삼으사 주님만 사랑하며 나 살게 하소서. 아멘
둘째, 구원받아야할 영혼들을 인하여 애통하는 사람입니다.
로마서9:1-3입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진실을 말하거니와, 내 말이 거짓말이 아니고, 내 안에 계시는 성령님과 함께 내 양심이 증언하는 바는, 내게 나의 민족을 위하는 큰 슬픔과 고통이 있는 것입니다. 곧 육신으로 나와 동족, 내 겨레를 위하여서라면, 그리스도에게서 나 자신이 저주를 받아 추방을 당할지라도 원하는 바입니다.”
사도바울은 천국의 영광을 경험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복음 때문에 로마감옥 있을 때에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훨씬 더 나으나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여러분에게는 더 필요할 것입니다.”(빌립보서1:23,24)
죽음을 끝이라고 누가 말하였습니까. 바울사도는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의 영광을 바라보았습니다. 이 영광을 아는 바울사도는 구원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바라볼 때 그 안타까움은 이루 말로 다 헤아릴 수 없었습니다. 특히 예수님이 이스라엘에 오셨는데도, 그를 믿지 못하고 구원을 받지 못한 자기민족 골육친척들을 생각하며 애통해 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16:19이하에 기록된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를 기억합니다.
부자는 이 세상에서 남부럽지 않게 잘 살다가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 집 문간에서 버려지는 부스러기를 주어먹으면서 온 몸에 헌데가 나서 늘 괴로워하던 거지도 죽었습니다. 그런데, 부자는 죽어 지옥에서 괴로움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반대로 그 집 문 깐에서 얻어먹던 거지나사로는 천국의 아브라함의 품속에서 한없는 위로를 받고 있었습니다. 부자가 아브라함에게 간청합니다.
“나사로를 시켜서 손끝에 물 한 방울을 찍어 자기 혀끝을 시원하게 해주십시오.”
“나사로를 다시 살려서내 아버지 집으로 보내어 내 5형제들에게 복음을 전해서 그들은 나와 같이 이곳에 와서 고생하는 일이 없게 해주십시오.”
여기, 이 부자의 애끓는 애원과 애통을 봅니다. 세상에서 떵떵거리며 살면서 ‘영생은 무슨 영생! 누가 죽어 봤나? 천국은 무슨 얼어 죽을 놈의 천국이냐? 산 사람의 일도 다 모르는 판에 무슨 죽은 다음의 일이냐?’ 하며 빈정거리며 세상의 쾌락에 휩쓸려 살고 있는 영혼들을 인하여 애통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 복이 있습니다.
이들은 어떻게 하든지 한 영혼이라도 더 건지기 위하여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복음전하는 일에 힘쓰는 자들입니다.
오는 수요일 저녁 특별한 목사님 한분이 우리교회에 오셔서 말씀을 전하십니다. 이스라엘 본토출신으로, 1991년 교회를 개척하여 현재 200명이 출석하고 있는 이스라엘 최대의 개신교교회 담임목사님이십니다. 이 교회에서 지금 세계 볼리비아, 슬로바키아, 프랑스, 헝거리, 하이파 등에 선교사를 파송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 동족의 구원을 위하여 노방전도, 축호전도, 웹사이트를 통한 전도, 신문광고를 통한 전도, 고속도로 네온사인광고 전도를 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심정으로 동족의 구원을 위하여 복음을 전하는 분입니다.
영혼의 구원을 위하여 애통하는 사람은 천하보다 귀한영혼을 살려내는 결과를 경험하게 됩니다. 영혼구원을 위하여 애통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세상의 축복으로 위로하십니다.
셋째, 새로운 도전을 인하여 애통하는 사람입니다.
느헤미야를 기억하십니까?
주전 586년 유다가 바벨론제국에 멸망당하고, 바벨론이 페르샤제국에 정복된 다음 느헤미야는 아닥사스다 왕의 의전비서관으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생활에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그는 사람을 보내어 고국 예루살렘의 형편을 살피고 와서 보고를 하도록 하였습니다. 보고자의 보고는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어려웠습니다.
“사로잡혀오지 않고, 그 곳에 남아 있는 유다 사람들은, 거기에서 고생이 아주 심합니다. 업신여김을 받습니다. 예루살렘 성벽은 허물어지고, 성문들은 다 불에 탔습니다.”(느1:3)
이 소식을 들은 느헤미야는 조국의 현실을 생각하며 울었습니다.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슬퍼하며 금식하며 주야로 기도하였습니다.
느헤미야1:4-7입니다.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 가로되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이여,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언약을 지키시며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간구하나이다. 이제 종이 주의 종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주야로 기도하오며 이스라엘 자손의 주 앞에 범죄함을 자복하오니, 주는 귀를 기울이시며, 눈을 여시사, 종의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나와 나의 아비 집이 범죄하여, 주를 향하여 심히 악을 행하여 주의 종 모세에게 주께서 명하신 계명과 율례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였나이다.’”
감히 그 먼 이국땅에서 조국의 회복을 꿈꾸며 기도하였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새로운 도전의 의지입니다. 그러나 자신에게 그 꿈을 이룰만한 힘이 없기 때문에 하늘의 하나님께 애통하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자신의 욕심만을 위하지 않고, 이 땅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큰일을 꿈꾸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도전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는 주전 444년에 귀환하여 52일 만에 성벽을 재건하였습니다.
모세는 애굽 땅에 있는 자기백성들의 해방을 꿈꾸었습니다. 젊은 시절 그 일을 시도했다가 실패의 고배를 마시고, 미디안 광야에 도망해서 망명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자기민족의 해방에 대한 꿈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십니다. 애굽으로 가라 하십니다. 그 때 모세는 전과 기록을 가진 자였고, 이미 입이 둔하여 말을 잘 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민족을 해방시킬만한 어떤 자원도 가지지 못하였습니다. 그럼에도 가라 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가서 마침내 자기 백성을 해방시켰습니다.
베드로는 실수 많은 허물투성이의 제자였습니다. 물위로 걷다가 물 속에 빠졌던 사람입니다. 예수님께 십자가를 지지 말라고 만류하다가 심한 책망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을 모른다고 배반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떠나 다시 고기 잡으러 나갈 때도 앞장을 섰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에게 “내 양을 먹이라” 하신 주님의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오순절 날에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마침내 그 일들을 해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꼭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자신의 부족을 알기에, 연약함을 알기에 새벽마다, 밤마다, 날마다, 일마다, 때마다 하나님께 울며 애통하며 기도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
마음이 가난하여 하나님 밖에는 어디에도 의지할 곳 없어,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며 기도하며 애통하며 하나님의 위로를 기다리는 사람 복이 있습니다.
암 선고를 받은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자신의 삶의 한계를 직감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생애를 슬픔이나 눈물에 맡겨 둘 수는 없습니다. 이 어려움을 패배라고 단정해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자신을 동정하고 자학하는 이기적인 슬픔에 자신을 맡길 수는 없었습니다. 험한 인생 살아오면서 경험했던 수많은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해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도 감사할 수 있는 삶의 조건들을 헤아리기 시작했습니다. 감사하였습니다. 찬양하였습니다. 기도하였습니다.
이 상황에서 하나님 밖에는 어디에도 의지할 데 없는 가난한 마음으로 애통하며 기도하였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언제나 용기를 주십니다.
흔들리지 않는 마음의 평정을 주십니다.
우리 곁에 항상 친구처럼 다정히 함께 계셔서 때를 따라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그 어떤 상황 앞에서도 꺾이지 않고 포기하지 않는 열정을 주십니다.
그리고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새로운 비전의 약속을 붙잡고 도전할 의지를 주십니다.
출처/최이우 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