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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 일어나심이니라 (스가랴 1장18절-2장13절)
이차대전 중 미국과 일본 사이의 전쟁이 저 유명한 '진주만 공습'으로 발발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미국으로서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이 기습 작전은 당시 일본의 연합함대 사령관이었던 야마모도 제독이 계획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전에 미국 유학을 다녀왔던 경험이 있었던 까닭에 미국의 힘을 당시 일본인들 중에서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일본이 미국과 전쟁을 하게 될 경우, 장기전으로 들어가면 도무지 상대가 되지 않을 것으로 판단하고, 초전에 기습하여 미국 태평양 함대의 전투능력을 완전히 제거한 후에 유리한 조건으로 종전협정을 빨리 맺는 것이 최상책이라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진주만 공습 결과는 적어도 야마모도 제독에게는 만족스럽지 못했습니다.
비록 미국의 전함들은 거의 전멸시키다시피 했지만, 해군의 주력인 항공모함들은 한 척도 침몰시키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공습일에 미국 항공모함들은 진주만에 정박하고 있지 않고 공해상에서 훈련 중에 있었던 까닭에 피해를 면했던 것입니다.
태평양 전쟁을 속전속결로 끝내려던 자신의 계획이 무너지고 장기전으로 이어지게 될 것이 분명해지자, 야마모도 제독은 그 진주만 공습이 대승리가 아니라 실상은 '잠자는 사자를 깨운' 격 밖에 되지 않았다고 탄식했다고 합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일본과 전쟁 상태에 있지는 않던 미국이 이제 '진주만을 상기하자!'라는 구호 아래 일본을 대항하여 벌떡 일어섰으니, 그 미국의 무서운 공업력과 막대한 자원을 알고 있던 야마모도로서는 실로 두려울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어떤 힘 있는 존재가 그 앉아 있던 자리에서 일어서게 되면 그 가진 힘이 작용을 하게 되고 그 결과 반드시 무슨 큰일이 벌어지게 됩니다.
그런 맥락에서 오늘 본문의 제일 마지막 2장 13절은 실로 경천동지를 일으킬 만한 말씀입니다.
바로 "13무릇 혈기 있는 자들이 여호와 앞에서 잠잠할 것은 여호와께서 그 성소에서 일어나심이니라 하라 하더라"는 말씀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 성소, 즉 그 거하시는 처소에서 '일어나신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은 죽은 신이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이심을 선포하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가만히 앉아 있는 우상이 아니라 움직이시며 역사하시는 주권과 능력의 하나님 되심을 선포하는 말씀입니다.
살아 계셔서 그 전능하신 능력으로 활동하시는 하나님께서 일어나셨으니, 반드시 어떤 작용과 결과가 따라 나올 수밖에 없을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은 오늘도 하나님께서 살아 계실 뿐 아니라 일어나셔서 역사하고 계심을 증거한 주는 사실들이 과연 무엇인지를 함께 상고해보고자 합니다.
1. 교회가 세상의 온갖 불신세력들을 끝내 이기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는 증거입니다.
1장 18절로부터 21절에 기록하기를 "18내가 눈을 들어 본즉 네 뿔이 보이기로 19이에 내게 말하는 천사에게 묻되 이들이 무엇이니이까 내게 대답하되 이들은 유다와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을 헤친 뿔이니라 20때에 여호와께서 공장 네 명을 내게 보이시기로 21내가 가로되 그들이 무엇하러 왔나이까 하매 대답하여 가라사대 그 뿔들이 유다를 헤쳐서 사람으로 능히 머리를 들지 못하게 하매 이 공장들이 와서 그것들을 두렵게 하고 이전에 뿔들을 들어유다 땅을 헤친 열국의 뿔을 떨어치려 하느니라 하시더라"고 했습니다.
본문은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스가랴 선지자를 통하여 소망의 메시지를 전해 주시는 장면이 계속되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 첫 번째 계시로서 '말 탄 자들의 이상'을 보여 주셨던 하나님께서는 이제 두 번째로 '뿔들과 공장들의 이상'을 그에게 보여 주고 계십니다.
스가랴 선지자가 "눈을 들어 본즉 네 뿔이 보였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가 자기 곁에서 해석해 주는 천사에게 그 뿔들의 상징하는 바가 무엇인지 물어 보자, 그 천사는 "이들은 유다와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을 헤친 뿔"들이라고 대답해 주었습니다.
즉 그 네 뿔들은 이스라엘 백성을 사면에서 위협하는 모든 이방 세력들을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뿔'이란 공포스러운 위협, 적대적인 힘의 대표적인 상징이었습니다.
첫 번째 이상에서는 말 탄 자들이 나타났지만 '말'만 강조된 것처럼, 여기서도 어쩌면 뿔 달린 동물이 나타났지만 '뿔'만 강조되고 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 상징하는 바를 더욱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사나운 들소 따위가 눈앞에서 뿔을 겨누고 있으면 공포에 사로잡힌 사람의 눈에는 오직 그 뿔만 크게 보이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하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눈에는 사면팔방에 있는 주변의 이방 나라들이 바로 그런 뿔처럼 보였던 것입니다.
애굽, 앗수르, 바벨론 같은 나라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문자 그대로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결국 그 뿔들이 "유다와 이스라엘을 헤쳐서" 즉 땅을 침범하고 백성들을 사방으로 '흩어지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 이방 열국들이 "유다를 헤쳐서 사람으로 능히 머리를 들지 못하게 한" 즉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최악의 수치를 당하게 만든' 뿔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바로 그 때에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스가랴에게 "공장 네 명"을 또 보여 주셨습니다.
이것은 두말할 것 없이 "네 개의 뿔들"과 대조되는 것입니다.
'공장'이란 단어는 '대장장이' 혹은 '기술자'를 가리키는 것인데, 이들은 바로 그 유다에 대하여 위협적이었던 뿔들을 오히려 "두렵게 하고" 그 열국의 뿔들을 "떨어치려" 즉 '꺾으려고' 하나님께서 보낸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이 정확하게 어떤 식으로 그 뿔들을 꺾게 되는지는 묘사되어 있지 않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 '공장'들은 그런 일을 쉽게 해 낼 수 있는 어떤 기술과 도구들을 가지고 있는 전문가인 것만은 확실합니다.
또한 '뿔'이 네 개고 '공장' 또한 넷이었으니, 각 '뿔'들마다 그 해당되는 '공장'이 반드시 있어서 하나도 남기지 않고 다 꺾여 버렸음도 틀림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 뿔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볼 때에는 도무지 손 쓸 수 없는 공포의 대상이었지만, 하나님께서 꺾어 버리고자 하실 때에는 지극히 간단하게 그리고 단숨에 처리해 버리실 수 있는 존재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한때 강력한 '뿔'처럼 보였던 모든 이방 세력들이 예외가 없이 결국 그처럼 하나님의 손에 차례로 꺾여 넘어지고 역사상에서 사라져 버리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의 교회는 항상 세상의 불신세력에 의해 사방으로 포위되어 왔습니다.
로마제국이 초대 기독교를 박해했던 300여 년 동안 그 세력은 마치 성난 들소의 거친 '뿔'과 같은 공포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의 로마 황제를 당신의 '공장'으로 사용하셔서 로마제국이 오히려 기독교를 국교로 인정하도록 만들어 버리셨습니다.
중세 로마 가톨릭이 개혁주의 기독교인들을 박해하며 셀 수 없는 수많은 사람들을 고문실과 화형대에서 죽였을 때 그 세력 역시 하늘을 찌를 듯한 '뿔'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 천년의 왕국을 자랑하던 교권의 뿔 역시 종교개혁자라는 '공장'들에 의하여 간단히 꺾이고 말았습니다.
일본제국주의가 우리나라 땅을 점령하고 그 제국주의의 '뿔'을 가지고 신사참배를 강요해 왔을 때에 조국의 참된 목사들과 성도들은 죽음 외에는 피할 길이 없어 보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미국이라는 '공장'을 사용하셔서 우리에게 기적적인 해방의 날을 맞이하게 해 주셨습니다.
또한 과거 소련이 공산주의 사상으로 무장하여 그 야심의 손길을 뻗치는 나라와 민족마다 유물론과 무신론의 '뿔'로써 기독교를 탄압할 때에는 아직 자유민주사회에 있는 교회와 성도들에게조차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미소 간의 군비전쟁과 그 주권자들을 또한 '공장'으로 사용하시니까, 그 막강해 보이던 소련의 뿔이 어느 날 아침에 보니 제풀에 뽑혀 있었던 것 아니었습니까?
이처럼 세상 불신세력의 뿔들은 때가 될 때 하나님께서 사용하시고 조종하시는 역사의 '사건'이나 '인물'이라는 '공장'들에 의하여 실로 한 순간에 간단히 꺾여 버렸습니다.
물론 아직도 꺾이지 않은 뿔들이나 앞으로 또 나타날 새로운 뿔들 역시 반드시 꺾이고야 말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때나 지금이나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위협하려고 등장하는 '뿔'들의 숫자와 꼭 같은 숫자의 '공장'들을 반드시 보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속한 백성, 그 세우신 교회를 위협하는 세상의 뿔들은 아무리 그 당시에는 강하고 날카롭게 보여도 결국은 망하고야 마는 역사의 증거를 통하여 오늘도 그 하나님께서 살아 계심을 확신하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2. 교회가 계속 자라며 땅을 정복해 나가고 있는 것이 또한 하나님께서 역사하고 계시는 증거입니다.
2장 1절로 5절에 기록하기를 "1내가 또 눈을 들어 본즉 한 사람이 척량 줄을 그 손에 잡았기로 2네가 어디로 가느냐 물은즉 내게 대답하되 예루살렘을 척량하여 그 장광을 보고자 하노라 할 때에 3내게 말하는 천사가 나가매 다른 천사가 나와서 그를 맞으며 4이르되 너는 달려가서 그 소년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예루살렘에 사람이 거하리니 그 가운데 사람과 육축이 많으므로 그것이 성곽 없는 촌락과 같으리라 5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그 사면에서 불 성곽이 되며 그 가운데서 영광이 되리라"고 했습니다.
이 세 번째 이상 속에서 스가랴 선지자는 "척량줄"을 잡고 어디론가 가고 있는 어떤 "한 사람"을 보게 됩니다.
'척량줄'이란 바로 길이를 잴 때 쓰는 줄로서, 말하자면 긴 줄자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스가랴 선지자가 그 사람에게 어디 가느냐고 물었을 때 그 사람은 "예루살렘을 척량하여 그 장광을 보려고" 가고 있다고 했습니다.
즉 예루살렘의 크기를 재어 보려고 간다고 대답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지금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새 예루살렘을 재건하려 하면서 그 미래에 대하여 계획하고 있는 것 혹은 기대하고 있는 것을 상징합니다.
그들은 미래의 예루살렘이 과연 어떤 크기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게 될 것인지 궁금했습니다.
과연 이전의 다윗과 솔로몬 당시의 예루살렘 모습을 되찾을 수 있을지, 혹은 그보다는 훨씬 못한 모습으로 재건될지, 여러 가지 추측들을 하고 있었습니다.
또 현실적으로만 생각한다면, 지금 인구도 몇 만 밖에 되지 않는 상황에서는 새 예루살렘을 크게 재건하려는 시도보다는 그저 형편에 맞도록 조그맣게 짓는 것이 그 운영이나 방어에 있어서 훨씬 더 능률적일지도 몰랐습니다.
그런 여러 가지 궁금증, 불안감, 조바심 등이 교차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심정을 바로 그 '예루살렘의 장광을 보고자 척량줄을 자기고 가는 그 사람'이 대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무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이어지는 말씀에 "내게 말하는 천사가 나가매 다른 천사가 나와서 그를 맞으며"라고 했습니다.
즉 지금 스가랴 곁에서 이상을 해석해 주고 있는 천사가 앞으로 나아가자 다른 천사가 나타나서 그에게 말해 주는 장면입니다.
"너는 달려가서 그 소년에게 고하여 이르기를"이라고 했습니다.
이 "그 소년"이란 바로 앞에 나온 '척량줄 잡은 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 사람을 '소년' 혹은 '청년'이라고 부르고 있는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이 아직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깨닫지 못하는 어린아이와 같은 수준에서 예루살렘의 미래에 대하여 설왕설래하고 있음을 비유하는 것입니다.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 향하여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사람이 거하리니 그 가운데 사람과 육축이 많으므로 그것이 성곽 없는 촌락과 같으리라"고 예언해 주셨습니다.
"성곽 없는 촌락"이란, 그 새 예루살렘이 어떤 경계선이 없는 도성이 될 것이란 뜻입니다.
성을 쌓아 놓으면 그것이 아무리 크다 해도 그 안에 수용할 수 있는 인구에는 결국 한계가 있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미래의 예루살렘은 그처럼 어떤 영역이 정해져 있는 도시, 너무 많은 사람이 찾아오면 받아들일 수 없게 될 제한이 있는 도시가 아니라, 무한한 발전과 확장만이 계속될 '성곽 없는' 도성이 될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비록 성곽이 없어도 조금도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스스로 "그 사면에서 불성곽"이 되어 지켜 주시며 또한 "그 가운데 거하심으로써 영광을 드러내실"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새 예루살렘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사람은 척량줄을 잡고 얼마만큼 크게 지으면 될까 하고 그 한계를 생각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잴 수 없는, 사람이 상상도 하지 못했던 무한한 크기의 예루살렘을 계획하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사실을 "달려가서 그 소년에게 고하라"고, 즉 예루살렘의 미래를 궁금해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속히 전해 주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재건했던 예루살렘성은 실제로 '성곽'도 있었고 따라서 그 주민도 제한될 수밖에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여기서 말씀하고 계시는 예루살렘이란 그런 한 지역적인 도시로서의 예루살렘이 아니라 바로 교회를 가리켜 하신 말씀임에 틀림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를 생각할 때에도 우리는 그저 사람의 기준과 판단으로 재어 보는 수준에만 머무르기 쉽습니다.
"내년에 얼마만큼 교회 예산을 세우면 가장 적당할까?," "새로 짓는 교회당은 어디에다 얼마만큼 크게 지어야 이 지역 사회 전도에 충분할까?," "우리 교단에 속한 교회 숫자와 세계에 파송한 선교사의 숫자가 작년에 얼마나 증가했는가?," "한국 사회에서 기독교인들의 영향력은 과연 얼마나 되는 것일까?" - 주로 이런 정도의 수준에서만 궁금해 하고 계획을 세우고들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당신의 나라를 위하여 세우고 계획하고 계시는 크기는 실로 엄청난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뜻 안에서의 교회란 것은, 그런 '사람의 척량줄' 가지고는 잴 수도 없을 만큼 방대한 것입니다.
그것은 끝없이 커지고 확장만 되어지는 '성곽 없는 도성'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확장에 따른 어떤 불안이나 문제가 조금도 나타날 수 없는 것은 바로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광이 그 교회를 통하여 나타나며 그 하나님께서 불성곽이 되셔서 지키시는 도성이기 때문입니다.
초대 기독교는 세상 불신자들이 보기에는 얼마 안가서 곧 사라질 유대인의 작은 하나의 종파로만 여겨졌었습니다.
하지만 이 '영적 예루살렘'은 그 후 2000년의 세월을 거치면서 살아 계신 하나님의 불성곽의 보호 아래 이처럼 '많은 사람과 육축이 거하는,' 실로 셀 수도 없는 무수한 신자들과 그들의 전 생애까지 함께 수용하는, 사상 최대의 도성으로 땅을 정복해가고 있지 않습니까?
마치 '가루 서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도 같이 교회를 통한 천국운동이 계속 확장일로에 있는 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오늘도 역사하고 계심을 뚜렷이 보여주는 또 하나의 증거임을 확신하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3. 교회에 구원 받은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모이고 있는 것이 곧 하나님께서 일어나 계신 증거입니다.
6절로부터 9절까지의 말씀에 "6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너를 하늘의 사방 바람 같이 흩어지게 하였거니와 이제 너희는 북방 땅에서 도망할지니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7바벨론 성에 거하는 시온아 이제 너는 피할지니라 8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를 노략한 열국으로 영광을 위하여 나를 보내셨나니 무릇 너희를 범하는 자는 그의 눈동자를 범하는 것이라 9내가 손을 그들 위에 움직인즉 그들이 자기를 섬기던 자에게 노략거리가 되리라 하셨나니 너희가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보내신 줄 알리라"고 기록했습니다.
이 6절 이하의 말씀은 지금까지 나타났던 것과는 다른 문체로 이어집니다.
즉 5절 이전까지의 말씀은 스가랴가 본 이상에 대한 내용이지만, 여기서부터는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을 스가랴 선지자가 시적인 형태로 선포하고 있는 내용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너를 흩어지게 하였지만 이제 너희는 북방 땅에서 도망할지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북방 땅"이란 이스라엘을 침공해 올 이방 세력을 예언할 때 선지자들이 썼던 표현이었습니다.
즉 전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방 열국 가운데 흩어지게 하셨지만 이제는 그 이방 땅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다시 모이라는 말씀입니다.
"바벨론 성에 거하는 시온아 이제 너는 피할지니라"는 말씀 역시 같은 뜻입니다.
이제는 그 포로 생활하던 곳에서 떠나 예루살렘성 재건과 새로운 이스라엘의 신앙공동체 재건에 함께 참여하라는 명령인 것입니다.
"너희를 노략한 열국으로 영광을 위하여 나를 보내셨나니"라는 말은 '여호와께서 나를 영광스럽게 들어 주시고 너희를 약탈한 열국으로 나를 보내셨다.'라는 뜻입니다.
여기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나'란 바로 장차 오실 메시아를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 하나님의 백성을 "범하는 자"를 "그(하나님)의 눈동자를 범하는" 즉 당신을 직접 대적하는 자로 원수로 여기실 것이며, 그런 자들 위에 "손을 움직여" 오히려 그들이 도리어 남의 노략거리가 되게 하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교회의 머리가 되시며 하나님과 성도의 원수를 심판하실 메시아로 오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 예수님의 사역을 통하여 사람들은 예수님이 바로 "여호와께서 보내신" 메시아인 줄을 "알게" 될 것이었습니다.
이어지는 10절로 12절에도 기록하기를 "10여호와의 말씀에 시온의 딸아 노래하고 기뻐하라 이는 내가 임하여 네 가운데 거할 것임이니라 11그 날에 많은 나라가 여호와께 속하여 내 백성이 될 것이요 나는 네 가운데 거하리라 네가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네게 보내신 줄 알리라 12여호와께서 장차 유다를 취하여 거룩한 땅에서 자기 소유를 삼으시고 다시 예루살렘을 택하시리니"고 했습니다.
"내가 임하여 네 가운데 거할 것이라"는 말씀은 두말할 것 없이 바로 '임마누엘' 즉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언한 말씀입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머리가 되신 교회는 이 땅의 "많은 나라"에 속했던 사람들을 "내 백성" 즉 하나님의 백성으로 불러 모으는 예루살렘이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교회야말로 하나님께서 "자기 소유를 삼으시고 택하신" 하나님의 나라요, 하나님의 도성이요, 하나님의 선택하신 자들의 신앙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교회에 부름 받아 모인 "시온의 딸"된 택자들에게는 그야말로 "노래하고 기뻐할" 수밖에 없는 새 생활이 있을 따름입니다.
오늘도 이 지구상 방방곡곡에 세워져 있는 교회에 교인들이 모이고 있는 것은 참으로 신기한 일 아니겠습니까?
주중에 일했으니 집에서 좀 편히 쉬든지, 아니면 어디 놀러나가야 할 날인데도 주일만 되면 새벽부터 밤까지 이 많은 교인들이 부지런히 모여듭니다.
그저 주일예배만 드리는 것이 아니라 주중에도 새벽기도회를 모이고, 그뿐 아니라 온갖 교회 일들에 뼈 빠지게 봉사를 하고 복음사업이나 성전건축을 위해서 죽도록 헌금까지 바치면서 아예 교회를 자기 집처럼 여기고 사는 것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해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새 예루살렘'의 머리로 세워주셨기 때문입니다.
교인들이 교회에 모이는 것은 목사의 인기 때문이 결코 아니라 바로 이 예수님이 너무나도 믿음직한 우리의 구세주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에 택함 받은 자는 저 '북방 땅'과 '바벨론 성'과 같은 세상의 장망성에서 빨리 '도망'해 나와서 이 주님의 도피성 안으로 '피해' 오게 됩니다.
적어도 성도들에게 있어서는 이처럼 죄악의 도성을 탈출하여 교회에 모이게 되는 기쁨이 이만저만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새 예루살렘인 교회에서 성도는 더 이상 죄악의 세력이 범할 수 없도록 하나님 당신의 '눈동자' 같이 보호를 받으면서 오직 '기뻐하며 찬송하는' 중생의 삶을 누리게 되니, 그 재미는 정말 '맛을 본 사람만' 알 수 있습니다.
바로 그 때문에 오늘도 이 지상교회 안에는 택하심을 입고 구원 받은 성도들이 원근각지에서 모여들어서 그 교회 안에 임재하시는 주님과 교제하고 그 왕국의 백성 된 은혜와 축복을 만끽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땅에 '보내심'을 받고 오신 성자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함으로써 교회에 모이기를 힘쓰고 기쁨과 감사만 넘치는 신앙생활하게 되는 성도들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는 이 신기한 현상 역시, 오늘도 하나님께서 그 성소에서 일어나셔서 당신의 크신 뜻을 진행하고 계시는 뚜렷한 증거임을 확신하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님 여러분, 다시 한 번 2장 13절의 말씀에 "13무릇 혈기 있는 자들이 여호와 앞에서 잠잠할 것은 여호와께서 그 성소에서 일어나심이니라 하라 하더라"고 했습니다.
"혈기 있는 자" 즉 '육체를 지닌 자'들은 오늘도 시끌벅적하게 살아가고들 있습니다.
제각기 자기 생각이 옳다고 떠들고, 자기 마음대로 사느라고 떠들썩한 세상인 것입니다.
사람이 만일 이 우주 가운데 최고의 존재라면 그렇게 떠들어도 아무 상관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 성소에서 일어나실 때에는 "무릇 혈기 있는 자들이 그 앞에서 잠잠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웃어른이 나타나셔도 그 앞에서 정숙하고 예의를 차려야 마땅하다면 하물며 천지의 대주재이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일어나실 때에야 오죽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고 하나님께서 인생과 우주 가운데서 역사하고 계시는 것을 깨달을 때에, 사람은 그 앞에서 겸손히 입을 다물고 머리를 숙여야만 하는 것이 지극히 마땅하기 때문입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그 성소에서' 일어나십니다.
이 세상에서 다른 장소, 다른 단체가 아니라 바로 당신께서 지정하시고 구별하셔서 세우신 '교회를 통하여' 그 위대한 구속사를 움직이시면서 당신의 살아 계심을 선포해 주고 계십니다.
교회가 끝내 세상의 불신 세력들을 이기게 하시며, 한 알의 겨자씨 같던 교회를 세상의 수많은 택자들을 품을 수 있는 큰 왕국으로 성장하게 하시며, 그 택하신 백성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아래 오늘도 교회에 부지런히 모으고 계시는 것이야말로, 우리 하나님은 결코 죽은 하나님도, 상상의 하나님도 아니라 실존하시고 또한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너무나도 뚜렷이 증거해 주는 것입니다.
이 경향교회 역시 30여 년 전에 개척이 시작되었을 때에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절대로 안 될 것이라고만 했으며, IMF 시절 때에 이 강서 성전 건축을 시작하자 경향교회는 곧 망하게 될 것이라고 공공연히 비관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그와 같은 예상을 완전히 깨뜨리시고, 을지로 창고에서 개척할 당시에는 그 어느 누구도 꿈조차 꿀 수 없었던 이 엄청난 강서 성전의 시대를 우리로 하여금 맞이하게 해 주시지 않으셨습니까?
실로 하나님께서 바로 '이 성소에서' 일어나신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머리되신 교회를 통하여 이처럼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역사하심을 확실히 체험함으로써 바로 이 교회를 통하여 또한 그 하나님께 날마다 찬양과 영광을 돌리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출처/석기현 목사 설교 중에서
이차대전 중 미국과 일본 사이의 전쟁이 저 유명한 '진주만 공습'으로 발발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미국으로서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이 기습 작전은 당시 일본의 연합함대 사령관이었던 야마모도 제독이 계획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전에 미국 유학을 다녀왔던 경험이 있었던 까닭에 미국의 힘을 당시 일본인들 중에서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일본이 미국과 전쟁을 하게 될 경우, 장기전으로 들어가면 도무지 상대가 되지 않을 것으로 판단하고, 초전에 기습하여 미국 태평양 함대의 전투능력을 완전히 제거한 후에 유리한 조건으로 종전협정을 빨리 맺는 것이 최상책이라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진주만 공습 결과는 적어도 야마모도 제독에게는 만족스럽지 못했습니다.
비록 미국의 전함들은 거의 전멸시키다시피 했지만, 해군의 주력인 항공모함들은 한 척도 침몰시키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공습일에 미국 항공모함들은 진주만에 정박하고 있지 않고 공해상에서 훈련 중에 있었던 까닭에 피해를 면했던 것입니다.
태평양 전쟁을 속전속결로 끝내려던 자신의 계획이 무너지고 장기전으로 이어지게 될 것이 분명해지자, 야마모도 제독은 그 진주만 공습이 대승리가 아니라 실상은 '잠자는 사자를 깨운' 격 밖에 되지 않았다고 탄식했다고 합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일본과 전쟁 상태에 있지는 않던 미국이 이제 '진주만을 상기하자!'라는 구호 아래 일본을 대항하여 벌떡 일어섰으니, 그 미국의 무서운 공업력과 막대한 자원을 알고 있던 야마모도로서는 실로 두려울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어떤 힘 있는 존재가 그 앉아 있던 자리에서 일어서게 되면 그 가진 힘이 작용을 하게 되고 그 결과 반드시 무슨 큰일이 벌어지게 됩니다.
그런 맥락에서 오늘 본문의 제일 마지막 2장 13절은 실로 경천동지를 일으킬 만한 말씀입니다.
바로 "13무릇 혈기 있는 자들이 여호와 앞에서 잠잠할 것은 여호와께서 그 성소에서 일어나심이니라 하라 하더라"는 말씀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 성소, 즉 그 거하시는 처소에서 '일어나신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은 죽은 신이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이심을 선포하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가만히 앉아 있는 우상이 아니라 움직이시며 역사하시는 주권과 능력의 하나님 되심을 선포하는 말씀입니다.
살아 계셔서 그 전능하신 능력으로 활동하시는 하나님께서 일어나셨으니, 반드시 어떤 작용과 결과가 따라 나올 수밖에 없을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은 오늘도 하나님께서 살아 계실 뿐 아니라 일어나셔서 역사하고 계심을 증거한 주는 사실들이 과연 무엇인지를 함께 상고해보고자 합니다.
1. 교회가 세상의 온갖 불신세력들을 끝내 이기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는 증거입니다.
1장 18절로부터 21절에 기록하기를 "18내가 눈을 들어 본즉 네 뿔이 보이기로 19이에 내게 말하는 천사에게 묻되 이들이 무엇이니이까 내게 대답하되 이들은 유다와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을 헤친 뿔이니라 20때에 여호와께서 공장 네 명을 내게 보이시기로 21내가 가로되 그들이 무엇하러 왔나이까 하매 대답하여 가라사대 그 뿔들이 유다를 헤쳐서 사람으로 능히 머리를 들지 못하게 하매 이 공장들이 와서 그것들을 두렵게 하고 이전에 뿔들을 들어유다 땅을 헤친 열국의 뿔을 떨어치려 하느니라 하시더라"고 했습니다.
본문은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스가랴 선지자를 통하여 소망의 메시지를 전해 주시는 장면이 계속되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 첫 번째 계시로서 '말 탄 자들의 이상'을 보여 주셨던 하나님께서는 이제 두 번째로 '뿔들과 공장들의 이상'을 그에게 보여 주고 계십니다.
스가랴 선지자가 "눈을 들어 본즉 네 뿔이 보였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가 자기 곁에서 해석해 주는 천사에게 그 뿔들의 상징하는 바가 무엇인지 물어 보자, 그 천사는 "이들은 유다와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을 헤친 뿔"들이라고 대답해 주었습니다.
즉 그 네 뿔들은 이스라엘 백성을 사면에서 위협하는 모든 이방 세력들을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뿔'이란 공포스러운 위협, 적대적인 힘의 대표적인 상징이었습니다.
첫 번째 이상에서는 말 탄 자들이 나타났지만 '말'만 강조된 것처럼, 여기서도 어쩌면 뿔 달린 동물이 나타났지만 '뿔'만 강조되고 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 상징하는 바를 더욱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사나운 들소 따위가 눈앞에서 뿔을 겨누고 있으면 공포에 사로잡힌 사람의 눈에는 오직 그 뿔만 크게 보이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하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눈에는 사면팔방에 있는 주변의 이방 나라들이 바로 그런 뿔처럼 보였던 것입니다.
애굽, 앗수르, 바벨론 같은 나라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문자 그대로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결국 그 뿔들이 "유다와 이스라엘을 헤쳐서" 즉 땅을 침범하고 백성들을 사방으로 '흩어지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 이방 열국들이 "유다를 헤쳐서 사람으로 능히 머리를 들지 못하게 한" 즉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최악의 수치를 당하게 만든' 뿔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바로 그 때에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스가랴에게 "공장 네 명"을 또 보여 주셨습니다.
이것은 두말할 것 없이 "네 개의 뿔들"과 대조되는 것입니다.
'공장'이란 단어는 '대장장이' 혹은 '기술자'를 가리키는 것인데, 이들은 바로 그 유다에 대하여 위협적이었던 뿔들을 오히려 "두렵게 하고" 그 열국의 뿔들을 "떨어치려" 즉 '꺾으려고' 하나님께서 보낸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이 정확하게 어떤 식으로 그 뿔들을 꺾게 되는지는 묘사되어 있지 않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 '공장'들은 그런 일을 쉽게 해 낼 수 있는 어떤 기술과 도구들을 가지고 있는 전문가인 것만은 확실합니다.
또한 '뿔'이 네 개고 '공장' 또한 넷이었으니, 각 '뿔'들마다 그 해당되는 '공장'이 반드시 있어서 하나도 남기지 않고 다 꺾여 버렸음도 틀림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 뿔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볼 때에는 도무지 손 쓸 수 없는 공포의 대상이었지만, 하나님께서 꺾어 버리고자 하실 때에는 지극히 간단하게 그리고 단숨에 처리해 버리실 수 있는 존재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한때 강력한 '뿔'처럼 보였던 모든 이방 세력들이 예외가 없이 결국 그처럼 하나님의 손에 차례로 꺾여 넘어지고 역사상에서 사라져 버리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의 교회는 항상 세상의 불신세력에 의해 사방으로 포위되어 왔습니다.
로마제국이 초대 기독교를 박해했던 300여 년 동안 그 세력은 마치 성난 들소의 거친 '뿔'과 같은 공포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의 로마 황제를 당신의 '공장'으로 사용하셔서 로마제국이 오히려 기독교를 국교로 인정하도록 만들어 버리셨습니다.
중세 로마 가톨릭이 개혁주의 기독교인들을 박해하며 셀 수 없는 수많은 사람들을 고문실과 화형대에서 죽였을 때 그 세력 역시 하늘을 찌를 듯한 '뿔'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 천년의 왕국을 자랑하던 교권의 뿔 역시 종교개혁자라는 '공장'들에 의하여 간단히 꺾이고 말았습니다.
일본제국주의가 우리나라 땅을 점령하고 그 제국주의의 '뿔'을 가지고 신사참배를 강요해 왔을 때에 조국의 참된 목사들과 성도들은 죽음 외에는 피할 길이 없어 보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미국이라는 '공장'을 사용하셔서 우리에게 기적적인 해방의 날을 맞이하게 해 주셨습니다.
또한 과거 소련이 공산주의 사상으로 무장하여 그 야심의 손길을 뻗치는 나라와 민족마다 유물론과 무신론의 '뿔'로써 기독교를 탄압할 때에는 아직 자유민주사회에 있는 교회와 성도들에게조차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미소 간의 군비전쟁과 그 주권자들을 또한 '공장'으로 사용하시니까, 그 막강해 보이던 소련의 뿔이 어느 날 아침에 보니 제풀에 뽑혀 있었던 것 아니었습니까?
이처럼 세상 불신세력의 뿔들은 때가 될 때 하나님께서 사용하시고 조종하시는 역사의 '사건'이나 '인물'이라는 '공장'들에 의하여 실로 한 순간에 간단히 꺾여 버렸습니다.
물론 아직도 꺾이지 않은 뿔들이나 앞으로 또 나타날 새로운 뿔들 역시 반드시 꺾이고야 말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때나 지금이나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위협하려고 등장하는 '뿔'들의 숫자와 꼭 같은 숫자의 '공장'들을 반드시 보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속한 백성, 그 세우신 교회를 위협하는 세상의 뿔들은 아무리 그 당시에는 강하고 날카롭게 보여도 결국은 망하고야 마는 역사의 증거를 통하여 오늘도 그 하나님께서 살아 계심을 확신하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2. 교회가 계속 자라며 땅을 정복해 나가고 있는 것이 또한 하나님께서 역사하고 계시는 증거입니다.
2장 1절로 5절에 기록하기를 "1내가 또 눈을 들어 본즉 한 사람이 척량 줄을 그 손에 잡았기로 2네가 어디로 가느냐 물은즉 내게 대답하되 예루살렘을 척량하여 그 장광을 보고자 하노라 할 때에 3내게 말하는 천사가 나가매 다른 천사가 나와서 그를 맞으며 4이르되 너는 달려가서 그 소년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예루살렘에 사람이 거하리니 그 가운데 사람과 육축이 많으므로 그것이 성곽 없는 촌락과 같으리라 5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그 사면에서 불 성곽이 되며 그 가운데서 영광이 되리라"고 했습니다.
이 세 번째 이상 속에서 스가랴 선지자는 "척량줄"을 잡고 어디론가 가고 있는 어떤 "한 사람"을 보게 됩니다.
'척량줄'이란 바로 길이를 잴 때 쓰는 줄로서, 말하자면 긴 줄자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스가랴 선지자가 그 사람에게 어디 가느냐고 물었을 때 그 사람은 "예루살렘을 척량하여 그 장광을 보려고" 가고 있다고 했습니다.
즉 예루살렘의 크기를 재어 보려고 간다고 대답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지금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새 예루살렘을 재건하려 하면서 그 미래에 대하여 계획하고 있는 것 혹은 기대하고 있는 것을 상징합니다.
그들은 미래의 예루살렘이 과연 어떤 크기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게 될 것인지 궁금했습니다.
과연 이전의 다윗과 솔로몬 당시의 예루살렘 모습을 되찾을 수 있을지, 혹은 그보다는 훨씬 못한 모습으로 재건될지, 여러 가지 추측들을 하고 있었습니다.
또 현실적으로만 생각한다면, 지금 인구도 몇 만 밖에 되지 않는 상황에서는 새 예루살렘을 크게 재건하려는 시도보다는 그저 형편에 맞도록 조그맣게 짓는 것이 그 운영이나 방어에 있어서 훨씬 더 능률적일지도 몰랐습니다.
그런 여러 가지 궁금증, 불안감, 조바심 등이 교차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심정을 바로 그 '예루살렘의 장광을 보고자 척량줄을 자기고 가는 그 사람'이 대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무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이어지는 말씀에 "내게 말하는 천사가 나가매 다른 천사가 나와서 그를 맞으며"라고 했습니다.
즉 지금 스가랴 곁에서 이상을 해석해 주고 있는 천사가 앞으로 나아가자 다른 천사가 나타나서 그에게 말해 주는 장면입니다.
"너는 달려가서 그 소년에게 고하여 이르기를"이라고 했습니다.
이 "그 소년"이란 바로 앞에 나온 '척량줄 잡은 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 사람을 '소년' 혹은 '청년'이라고 부르고 있는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이 아직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깨닫지 못하는 어린아이와 같은 수준에서 예루살렘의 미래에 대하여 설왕설래하고 있음을 비유하는 것입니다.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 향하여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사람이 거하리니 그 가운데 사람과 육축이 많으므로 그것이 성곽 없는 촌락과 같으리라"고 예언해 주셨습니다.
"성곽 없는 촌락"이란, 그 새 예루살렘이 어떤 경계선이 없는 도성이 될 것이란 뜻입니다.
성을 쌓아 놓으면 그것이 아무리 크다 해도 그 안에 수용할 수 있는 인구에는 결국 한계가 있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미래의 예루살렘은 그처럼 어떤 영역이 정해져 있는 도시, 너무 많은 사람이 찾아오면 받아들일 수 없게 될 제한이 있는 도시가 아니라, 무한한 발전과 확장만이 계속될 '성곽 없는' 도성이 될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비록 성곽이 없어도 조금도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스스로 "그 사면에서 불성곽"이 되어 지켜 주시며 또한 "그 가운데 거하심으로써 영광을 드러내실"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새 예루살렘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사람은 척량줄을 잡고 얼마만큼 크게 지으면 될까 하고 그 한계를 생각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잴 수 없는, 사람이 상상도 하지 못했던 무한한 크기의 예루살렘을 계획하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사실을 "달려가서 그 소년에게 고하라"고, 즉 예루살렘의 미래를 궁금해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속히 전해 주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재건했던 예루살렘성은 실제로 '성곽'도 있었고 따라서 그 주민도 제한될 수밖에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여기서 말씀하고 계시는 예루살렘이란 그런 한 지역적인 도시로서의 예루살렘이 아니라 바로 교회를 가리켜 하신 말씀임에 틀림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를 생각할 때에도 우리는 그저 사람의 기준과 판단으로 재어 보는 수준에만 머무르기 쉽습니다.
"내년에 얼마만큼 교회 예산을 세우면 가장 적당할까?," "새로 짓는 교회당은 어디에다 얼마만큼 크게 지어야 이 지역 사회 전도에 충분할까?," "우리 교단에 속한 교회 숫자와 세계에 파송한 선교사의 숫자가 작년에 얼마나 증가했는가?," "한국 사회에서 기독교인들의 영향력은 과연 얼마나 되는 것일까?" - 주로 이런 정도의 수준에서만 궁금해 하고 계획을 세우고들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당신의 나라를 위하여 세우고 계획하고 계시는 크기는 실로 엄청난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뜻 안에서의 교회란 것은, 그런 '사람의 척량줄' 가지고는 잴 수도 없을 만큼 방대한 것입니다.
그것은 끝없이 커지고 확장만 되어지는 '성곽 없는 도성'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확장에 따른 어떤 불안이나 문제가 조금도 나타날 수 없는 것은 바로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광이 그 교회를 통하여 나타나며 그 하나님께서 불성곽이 되셔서 지키시는 도성이기 때문입니다.
초대 기독교는 세상 불신자들이 보기에는 얼마 안가서 곧 사라질 유대인의 작은 하나의 종파로만 여겨졌었습니다.
하지만 이 '영적 예루살렘'은 그 후 2000년의 세월을 거치면서 살아 계신 하나님의 불성곽의 보호 아래 이처럼 '많은 사람과 육축이 거하는,' 실로 셀 수도 없는 무수한 신자들과 그들의 전 생애까지 함께 수용하는, 사상 최대의 도성으로 땅을 정복해가고 있지 않습니까?
마치 '가루 서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도 같이 교회를 통한 천국운동이 계속 확장일로에 있는 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오늘도 역사하고 계심을 뚜렷이 보여주는 또 하나의 증거임을 확신하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3. 교회에 구원 받은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모이고 있는 것이 곧 하나님께서 일어나 계신 증거입니다.
6절로부터 9절까지의 말씀에 "6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너를 하늘의 사방 바람 같이 흩어지게 하였거니와 이제 너희는 북방 땅에서 도망할지니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7바벨론 성에 거하는 시온아 이제 너는 피할지니라 8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를 노략한 열국으로 영광을 위하여 나를 보내셨나니 무릇 너희를 범하는 자는 그의 눈동자를 범하는 것이라 9내가 손을 그들 위에 움직인즉 그들이 자기를 섬기던 자에게 노략거리가 되리라 하셨나니 너희가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보내신 줄 알리라"고 기록했습니다.
이 6절 이하의 말씀은 지금까지 나타났던 것과는 다른 문체로 이어집니다.
즉 5절 이전까지의 말씀은 스가랴가 본 이상에 대한 내용이지만, 여기서부터는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을 스가랴 선지자가 시적인 형태로 선포하고 있는 내용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너를 흩어지게 하였지만 이제 너희는 북방 땅에서 도망할지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북방 땅"이란 이스라엘을 침공해 올 이방 세력을 예언할 때 선지자들이 썼던 표현이었습니다.
즉 전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방 열국 가운데 흩어지게 하셨지만 이제는 그 이방 땅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다시 모이라는 말씀입니다.
"바벨론 성에 거하는 시온아 이제 너는 피할지니라"는 말씀 역시 같은 뜻입니다.
이제는 그 포로 생활하던 곳에서 떠나 예루살렘성 재건과 새로운 이스라엘의 신앙공동체 재건에 함께 참여하라는 명령인 것입니다.
"너희를 노략한 열국으로 영광을 위하여 나를 보내셨나니"라는 말은 '여호와께서 나를 영광스럽게 들어 주시고 너희를 약탈한 열국으로 나를 보내셨다.'라는 뜻입니다.
여기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나'란 바로 장차 오실 메시아를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 하나님의 백성을 "범하는 자"를 "그(하나님)의 눈동자를 범하는" 즉 당신을 직접 대적하는 자로 원수로 여기실 것이며, 그런 자들 위에 "손을 움직여" 오히려 그들이 도리어 남의 노략거리가 되게 하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교회의 머리가 되시며 하나님과 성도의 원수를 심판하실 메시아로 오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 예수님의 사역을 통하여 사람들은 예수님이 바로 "여호와께서 보내신" 메시아인 줄을 "알게" 될 것이었습니다.
이어지는 10절로 12절에도 기록하기를 "10여호와의 말씀에 시온의 딸아 노래하고 기뻐하라 이는 내가 임하여 네 가운데 거할 것임이니라 11그 날에 많은 나라가 여호와께 속하여 내 백성이 될 것이요 나는 네 가운데 거하리라 네가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네게 보내신 줄 알리라 12여호와께서 장차 유다를 취하여 거룩한 땅에서 자기 소유를 삼으시고 다시 예루살렘을 택하시리니"고 했습니다.
"내가 임하여 네 가운데 거할 것이라"는 말씀은 두말할 것 없이 바로 '임마누엘' 즉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언한 말씀입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머리가 되신 교회는 이 땅의 "많은 나라"에 속했던 사람들을 "내 백성" 즉 하나님의 백성으로 불러 모으는 예루살렘이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교회야말로 하나님께서 "자기 소유를 삼으시고 택하신" 하나님의 나라요, 하나님의 도성이요, 하나님의 선택하신 자들의 신앙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교회에 부름 받아 모인 "시온의 딸"된 택자들에게는 그야말로 "노래하고 기뻐할" 수밖에 없는 새 생활이 있을 따름입니다.
오늘도 이 지구상 방방곡곡에 세워져 있는 교회에 교인들이 모이고 있는 것은 참으로 신기한 일 아니겠습니까?
주중에 일했으니 집에서 좀 편히 쉬든지, 아니면 어디 놀러나가야 할 날인데도 주일만 되면 새벽부터 밤까지 이 많은 교인들이 부지런히 모여듭니다.
그저 주일예배만 드리는 것이 아니라 주중에도 새벽기도회를 모이고, 그뿐 아니라 온갖 교회 일들에 뼈 빠지게 봉사를 하고 복음사업이나 성전건축을 위해서 죽도록 헌금까지 바치면서 아예 교회를 자기 집처럼 여기고 사는 것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해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새 예루살렘'의 머리로 세워주셨기 때문입니다.
교인들이 교회에 모이는 것은 목사의 인기 때문이 결코 아니라 바로 이 예수님이 너무나도 믿음직한 우리의 구세주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에 택함 받은 자는 저 '북방 땅'과 '바벨론 성'과 같은 세상의 장망성에서 빨리 '도망'해 나와서 이 주님의 도피성 안으로 '피해' 오게 됩니다.
적어도 성도들에게 있어서는 이처럼 죄악의 도성을 탈출하여 교회에 모이게 되는 기쁨이 이만저만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새 예루살렘인 교회에서 성도는 더 이상 죄악의 세력이 범할 수 없도록 하나님 당신의 '눈동자' 같이 보호를 받으면서 오직 '기뻐하며 찬송하는' 중생의 삶을 누리게 되니, 그 재미는 정말 '맛을 본 사람만' 알 수 있습니다.
바로 그 때문에 오늘도 이 지상교회 안에는 택하심을 입고 구원 받은 성도들이 원근각지에서 모여들어서 그 교회 안에 임재하시는 주님과 교제하고 그 왕국의 백성 된 은혜와 축복을 만끽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땅에 '보내심'을 받고 오신 성자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함으로써 교회에 모이기를 힘쓰고 기쁨과 감사만 넘치는 신앙생활하게 되는 성도들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는 이 신기한 현상 역시, 오늘도 하나님께서 그 성소에서 일어나셔서 당신의 크신 뜻을 진행하고 계시는 뚜렷한 증거임을 확신하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님 여러분, 다시 한 번 2장 13절의 말씀에 "13무릇 혈기 있는 자들이 여호와 앞에서 잠잠할 것은 여호와께서 그 성소에서 일어나심이니라 하라 하더라"고 했습니다.
"혈기 있는 자" 즉 '육체를 지닌 자'들은 오늘도 시끌벅적하게 살아가고들 있습니다.
제각기 자기 생각이 옳다고 떠들고, 자기 마음대로 사느라고 떠들썩한 세상인 것입니다.
사람이 만일 이 우주 가운데 최고의 존재라면 그렇게 떠들어도 아무 상관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 성소에서 일어나실 때에는 "무릇 혈기 있는 자들이 그 앞에서 잠잠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웃어른이 나타나셔도 그 앞에서 정숙하고 예의를 차려야 마땅하다면 하물며 천지의 대주재이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일어나실 때에야 오죽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고 하나님께서 인생과 우주 가운데서 역사하고 계시는 것을 깨달을 때에, 사람은 그 앞에서 겸손히 입을 다물고 머리를 숙여야만 하는 것이 지극히 마땅하기 때문입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그 성소에서' 일어나십니다.
이 세상에서 다른 장소, 다른 단체가 아니라 바로 당신께서 지정하시고 구별하셔서 세우신 '교회를 통하여' 그 위대한 구속사를 움직이시면서 당신의 살아 계심을 선포해 주고 계십니다.
교회가 끝내 세상의 불신 세력들을 이기게 하시며, 한 알의 겨자씨 같던 교회를 세상의 수많은 택자들을 품을 수 있는 큰 왕국으로 성장하게 하시며, 그 택하신 백성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아래 오늘도 교회에 부지런히 모으고 계시는 것이야말로, 우리 하나님은 결코 죽은 하나님도, 상상의 하나님도 아니라 실존하시고 또한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너무나도 뚜렷이 증거해 주는 것입니다.
이 경향교회 역시 30여 년 전에 개척이 시작되었을 때에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절대로 안 될 것이라고만 했으며, IMF 시절 때에 이 강서 성전 건축을 시작하자 경향교회는 곧 망하게 될 것이라고 공공연히 비관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그와 같은 예상을 완전히 깨뜨리시고, 을지로 창고에서 개척할 당시에는 그 어느 누구도 꿈조차 꿀 수 없었던 이 엄청난 강서 성전의 시대를 우리로 하여금 맞이하게 해 주시지 않으셨습니까?
실로 하나님께서 바로 '이 성소에서' 일어나신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머리되신 교회를 통하여 이처럼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역사하심을 확실히 체험함으로써 바로 이 교회를 통하여 또한 그 하나님께 날마다 찬양과 영광을 돌리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출처/석기현 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