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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복받고 기쁨이 되고 능력이 있으라 (신명기 33장 24~ 25절)
우리는 창세기 29~30장을 통해서 야곱의 두 아내 레아와 라헬의 자식 낳기 경쟁을 볼 수 있습니다. 자식이 뭔데 하는 생각을 할 수 있지만 자식을 못 낳는 이들이 어느 날 자식을 임신하게 되었을 때에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 지역교회 사모님도 그동안 아이를 낳지 못해 고민하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쌍둥이를 임신케 되어 얼마나 기뻐하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더욱 고대 사회에서는 자식을 낳고 못 낳고는 엄청난 차이가 있었습니다. 아무리 남편의 사랑을 많이 받아도 자식을 낳지 못하면 결코 행복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성경에서 사라나 한나 그리고 라헬을 통해서 잘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아들을 낳지 못한 라헬은 너무도 괴로워서 야곱에게 내게 자식을 낳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죽겠노라 라고 말하기 까지 합니다. The Bible 라는 영화를 보면 라헬이 “왜 하나님은 레아만 예뻐하시는 거죠?” 라는 말을 덧붙이며 괴로워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라헬은 자기의 시녀 빌하를 야곱에게 주어 두 아들을 얻었습니다. 그만큼 아들에 대한 집념이 강했던 것입니다. 그러자 레아도 이에 질세라 자기 시녀 실바를 야곱에게 내 줍니다. 그러자 실바도 아들을 두 아들을 낳게 됩니다.
그런데 아들을 낳고 난 두 여인 반응은 차이가 있습니다.
라헬은 하나님이 억울함을 풀어 주셨다 하면서 심판이라는 뜻인 단이라 이름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동안 너무 억울했는데 하나님이 심판하셨다는 것입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라헬이 억울했습니까? 진정 억울한 것은 레아였습니다. 남편의 사랑을 동생 라헬이 다 독차지 하였으니 얼마나 억울했겠습니까? 그런데 레아는 자신이 억울하다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라헬은 언니 레아가 얼마나 힘들었을까, 억울했을까는 전혀 생각지 않고는 자신이 억울하다 한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단은 어떠한 인물이 되었을까요? 창세기 49:16~18절에서 야곱은 단을 지나가는 말과 그 위에 탄자까지 물어서 떨어지게 하는 뱀, 독사로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신명기 33:22절에서 모세는 바산에서 뛰어나와 사람들을 못살게 구는 사자 새끼라 했습니다. 결국 단은 인간적인 계교를 잘 부렸습니다. 그리고 이 지파는 우상숭배의 앞잡이가 되었고 나중에는 그 씨가 점점 말라가 요한계시록 7장을 보면 아예 단 이라는 지파는 없어지는데 이는 주님 재림하실 때 이 지파는 아예 소멸되기 때문입니다. 결국 상대의 억울한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만 부리기만 하면 반드시 심판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레아는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그녀도 인간적인 방법을 취하는 모습은 라헬과 다를 바 없었지만 그래도 심성은 달랐습니다. 실바 즉 몸종을 통하여 난 아이였지만 “너는 복 받은 아이다”라고 하며 이름을 갓이라 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두 번째로 얻은 아들을 얻고는 기쁘다 라고 하여 이름을 아셀이라 하였습니다. 물론 비록 몸종을 통해서이지만 아들을 또 다시 얻게 된 것이 너무 기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쁨이란 뜻으로 아이를 아셀이라 이름하였습니다. 그런데 아셀은 행복한 자, 축복 받은 자라는 뜻도 있습니다. 그러니 “너는 기쁜 아이다. 너는 행복하고 축복 받은 아이다” 라고 부른 것입니다. 여러분 심판이라는 이름의 단에 비해서 복된이란 뜻의 갓, 기쁨, 행복이란 뜻의 아셀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이름입니까? 우리는 갓이 얼마나 복 받으며 살게 되었는지는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면 아셀은 어떻습니까? 아셀은 과연 어떠한 삶을 살게 되었을까요? 여러분 아셀 개인과 그 지파가 어떻게 살게 되었는지는 잘 알 수 없지만 우리는 야곱과 모세의 축복을 통해서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모세는 아셀을 이렇게 축복했습니다.
아셀은 아들들 중에 더 복을 받으며 그의 형제에게 기쁨이 되며 그의 발이 기름에 잠길지로다 네 문빗장은 철과 놋이 될 것이니 네가 사는 날을 따라서 능력이 있으리로다
1. 아들들 중에서 더 복을 받으며
그렇습니다. 복을 받는 것만 해도 귀한 데 형제들 보다 더 복을 받는 다는 것입니다. 특히 그 앞 절에 납달리에 대해서 이렇게 축복했습니다. 납달리에 대하여는 일렀으되 은혜가 풍성하고 여호와의 복이 가득한 납달리여 너는 서쪽과 남쪽을 차지할지로다
그러면 아셀이 받은 복은 어떠한 것입니까?
1)좋은 땅을 얻는 복입니다.
야곱은 이렇게 축복했습니다. 아셀에게서 나는 먹을 것은 기름진 것이라 그가 왕의 수라상을 차리리로다.
아셀이 얼마나 좋은 땅을 얻게 될 것인지 그 땅에서 나는 식물이 기름진 것이라서 진상품이 되고 왕이 먹는 수라상에 오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아셀 지파가 기업으로 얻은 곳(수19:24-39)은 악고 평야가 자리잡고 있어 농사짓기에 적합하며, 지중해성 기후로 인해 포도와 올리브 같은 과실이 잘 자라는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아셀은 그의 발이 기름에 잠기게 될 정도로 복을 누리고 뿐만 아니라 철과 놋으로 지은 요새처럼 튼튼하고 안전한 거주지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아셀은 여러 모양으로 큰 복을 받은 지파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이러한 복을 받게 되기를 바랍니다. 물질의 복, 평안과 안전의 복, 땅의 기름진 복 말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잊지 마십시오. 이보다 더 귀한 복이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시37:11절을 보면 온유한 자들은 땅을 차지하며 풍성한 화평으로 즐거워하리로다 그리고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5:5) 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의 땅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 천국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의 의미는 온유한 자가 땅 부자가 된다는 것이 아니라 온유한 사람은 땅에서 천국을 경험하며 살고 풍성한 하나님의 평화를 누리며 즐거워하고 이 세상을 떠날 때 천국에서 영원히 주님과 함께 기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가장 큰 기쁨, 가장 큰 복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구원의 복이며 임마누엘의 복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고 천국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받고 사는 것입니다.
바울은 감옥에 있을 때 지난 3년 간 애써서 개척했던 에베소교회 교인들을 마음속으로 그리며 에베소서를 썼습니다. 그런데 그는 이 편지를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주신 은혜가 얼마나 기막힌 복인지를 밝히는 것으로 시작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이요.’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이 복은 우리가 땅에 살면서 얼마 동안 손에 쥐고 누리는 복이 아니라, 하늘나라에서 구원 받은 백성만 누릴 수 있는 복, 육신의 몸으로 즐기는 복이 아니라 새 몸을 입고 영원히 즐길 수 있는 복을 말합니다.
이 복은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신분과 죄 사함 받는 복, 그리고 하나님나라에서 영원토록 누릴 영광스러운 기업을 얻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자기 운명을 알 수 없는 형편에 있었지만 어쩌면 평생 감옥에서 나오지 못하고 죽을지도 몰랐지만 이 놀라온 복을 써 내려가면서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찬송하리로다.’하고 했고 또한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3번(엡1:6,12,14)이나 언급하는 편지를 썼습니다. 이런 이유로 바울 곁에 접근했던 감옥의 간수들이 많이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서 받는 복만 생각하고 예수를 믿습니다. 따라서 지난 100년 간 기독교에 큰 해를 끼친 지성인 중 한 사람인 심리학자 프로이드의 말이 어떤 면에서 일리가 있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기독교는 소원성취다. 기독교는 여러 가지 인간적인 욕구를 채우기 위해서 고안해 낸 하나의 환상이다.” 정말 우리가 잊지 말아야 될 복은 세상적이고 육적인 복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을 걸고 약속하신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아셀에 대한 야곱의 축복도 영적으로 생각해 보면 굶주린 영혼에게 하늘의 신령한 만나를 주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늘의 만나, 하나님의 말씀, 복음은 땅에서 얻는 것이 아니라 만왕의 왕이신 주님께로부터 얻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을 돌 보사 친히 일용할 양식을 베푸시며 믿는 이들에게 신령한 양식을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요6:51『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요6:54) 그렇습니다. 주님 자신이 그리고 주님의 말씀이 얼마나 "기름진 음식"이며 얼마나 "영생 있는 음료"인지요 이것을 먹고 마시는 자는 진정으로 만족하게 됩니다. 다윗은 시 63:5~7절에서 골수와 기름진 것을 먹음과 같이 나의 영혼이 만족할 것이라 나의 입이 기쁜 입술로 주를 찬송하되 내가 나의 침상에서 주를 기억하며 새벽에 주의 말씀을 작은 소리로 읊조릴 때에 하오리니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음이라 내가 주의 날개 그늘에서 즐겁게 부르리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욥도 내가 그의 입술의 명령을 어기지 아니하고 정한 음식보다 그의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도다(욥 23:12)라고 말했습니다. 좋은 음식을 먹음으로 육의 건강을 유지할 수 있는 것처럼 좋은 영의 말씀을 먹음으로 인하여 영의 건강을 유지할 수 있고 그것을 나누는 자는 참으로 복된 사람입니다.
2. 그의 형제에게 기쁨이 되며
아셀은 더 많이 복을 받을 뿐만 아니라 그 형제에게 기쁨이 될 것이라 하였습니다. 이 말은 무슨 뜻입니까? 어떻게 하면 형제의 기쁨이 됩니까? 사실 어느 한 사람이 복을 많이 받으면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그리 되지 않고 오히려 기쁨이 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부자가 3대 가는 법 없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경주 최 부잣집의 부가 1600년대 초반부터 12대 300년 동안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기적 같은 일입니다. 경주 최 부잣집의 부가오랫동안 지속될 수 있었던 이유는 강한 정신을 물질과 함께 물려주었기 때문입니다. 경주 최 부잣집의 가훈 중에는 ‘만 석 이상의 소득은 사회에 환원한다(욕심 내지 말라). 흉년에 논을 사지 말라(부끄러운 일을 하지 말라). 사방 100리 안에서는 굶어죽는 사람이 없도록 하라. 손님을 융숭하게 대접하라(인심을 사라). 진사 이상 벼슬을 하지 마라(두 마리 토끼를 쫓지 말라).’와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지만 최 부자'가 논을 사면 박수를 쳤고 동학혁명이나 다른 민란이 때 다른 부잣집과는 달리 전혀 해를 당하지 않았답니다.
아셀 지파도 이처럼 받은 복을 나누어 가져 형제의 기쁨이 되었고 늘 형제들과 좋은 인간관계를 맺으며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는 어려운 사람, 왕따를 당하는 사람, 외로운 이들이 많고 외톨이도 많습니다. 그래서 이번 총기사고 같은 것도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참으로 슬픈 일입니다. 이번 총기참사가 일어나 버지니아 공대 캠퍼스 중앙 잔디밭인 드릴 필드에는 이번 참사의 사망자 33명을 기리는 추모 석들이 타원형으로 놓여 있는데 이중 에는 조 씨를 위한 추모석도 등장했습니다. 그런데 그 추모 석에는 "네가 그렇게 필사적으로 필요로 했던 도움을 받지 못했다는 걸 알고 가슴이 아팠단다. 머지않아 너의 가족이 평온을 찾아 치유될 수 있기를 바란다. 하나님의 복을(I feel bad in knowing that you did not get help that you so desperately needed. I hope in time that your family will find comfort and healing. God bless. Barvara)"라는 내용의 쪽지가 놓여 보는 이들의 가슴을 울리고 있다 합니다.
여러분 사무엘상 22장을 보면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몰려들었을 때 다윗은 저들을 받아들여 함께 기도하고 위로하고 하나님 경외하는 것을 가르쳤습니다. 바로 우리 교회도 이러한 공동체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여러분 성경은 말씀합니다.“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 말라 이 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히 13:16) 그러면 우리가 가장 나누어 주어야 할 것이 무엇일까요?
3. 아셀은 네가 사는 날을 따라서 능력이 있으리로다 라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이 말은 “네가 날이 지남에 다라 힘이 강해지리라”는 뜻입니다. 날이 갈수록 능력이 더해가는 삶, 향상되는 삶입니다. 날이 갈수록 지혜로워지는 아이, 낳이 갈수록 건강해 지는 인생, 날이 갈수록 신앙이 자라는 성도, 날이 갈수록 봉사를 잘하는 충성된 성도, 날이 갈수록 담대한 성도 얼마나 복된 일입니까! 사람 중에는 날이 갈수록 힘이 약해지고 이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봄 동산이 날이 갈수록 푸르름이 더해가는 것처럼 날마다 능력이 더해가는 삶은 참으로 복된 삶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강건하기를 원하십니다.그래서 강하고 담대하라(수1:6) 이제는 내가 너희를 구원하여 너희가 복이 되게 하리니 두려워하지 말지니라 손을 견고히 할지니라 (슥8:12) 그리고 사도요한은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요3서2절)
그런데 여러분 우리의 육신의 강건함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바로 속사람의 강건 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을 위해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엡3:16)
여러분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고후5:17)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내 안에 오시면 우리 안에 새사람, 속사람이 싹트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처음에 별로 눈에 띄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생명입니다. 그래서 자라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라되 강하게 자라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의 속사람이 튼튼해야 합니다.
여러분 몸이 건강한 사람은 병균에 대한 저항력이 셉니다. 우리 몸을 보면 병균이 침입할 때 거식세포가 생겨 병균을 포위하고 적진에 들어가 잡아먹고 다시 나옵니다. 그리고 항원을 가지고 다른 임파구인 T cell, B cell에게 가서 제시합니다. T cell은 killer cell(나쁜 세포, 균을 쥭이는 살상세포)을 만듭니다. B cell은 적진에 가서 균을 잡아먹고 싸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건강하다는 것은 항원에 대해 항체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몸이 약한 사람은 조금만 균이 들어와도 병에 걸립니다. 이것이 가장 심한 경유가 에이즈(AIDS-후천성 면역결핍증)입니다. AIDS는 조그만 균이 들어와도 면역이 결핍되었기에 그로 인해 저항력이 없어서 결국 죽게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영적으로 병이 들면 쉽게 시험에 들고 불평불만과 원망을 하고 낙심, 좌절하게 됩니다. 그러나 강건하면 유혹을 이겨내고 감사하며 믿음에 굳게 서게 되는 것입니다. 날마다 주님 주시는 은혜와 사랑가운데 살아가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속사람이 자라려면 겉 사람이 깨어져야 합니다. 겉이 단단하면 속이 있는 것이 나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씨앗은 흙을 뚫고 나오고 새는 알을 깨고 나옵니다. 깨어지지 않으면 나올 수 없습니다. 옛날의 가치관, 잘못된 사고방식 이런 것들이 깨어져야 합니다. 속사람이 자라나기 위해서 겉 사람이 깨어져야 하고 속사람이 더 건강하게 자라기 위해서는 성령의 단비가 내려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라고 기도한 것 입니다. 성령이 역사하시면 우리가 능력 있는 주님의 일꾼이 됩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행1:8) 권능을 받고 내 증인이 되리라.
그렇습니다. 주님은 단지 물질로만 이웃을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그리스도께서 값없이 주신 왕의 사랑, 용서 그리고 구원의 소식, 복음을 나누어 주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성령을 주시고 권능을 주시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으로 능력 받은 베드로는 말했습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행3:6)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과 능력의 구주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 예수의 증인이 되도록 날이 갈수록 성령의 능력으로 강건하기를 축복합니다.
출처/박승남목사 설교자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