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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그림자 부모 (신 27:16)
미국 버지니아 주에 있는 웹스터라는 교회에서 26년간 신앙 생활하던 자비스 부인이 사망하였습니다. 이 분은 많은 분들에게 좋은 모습을 남긴 신앙인의 사표였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를 잊지 못했습니다. 그의 추도식에서 의논되기를 그 마음을 기리기 위해서 어머니날을 제정하자는 결의를 하였습니다. 정부에서는 그 뜻을 받아들여 1913년 미국 의회에서 5월 둘째 주일을 어머니 날로 결정해서 오늘까지 지켜오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어버이날을 일반인들에게 알리기 위해서 1955년도에 5월 8일을 Mother's Day 즉 어머니 날로 지정하여 이승만 대통령이 확정 공포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소외된 아버지들이 우리들은 뭐냐 하고 항의해서 1974년도에 정부에서 어머니날을 어버이 날로 공식발표한 것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 어버이날에는 가슴에 카네이션을 달아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원래는 부모님의 은혜와 사랑에 감사하는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서 자식들이 가슴에 카네이션 꽃을 달았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부모님을 정성껏 섬기겠다는 뜻으로 부모님들의 가슴에 어머니가 없는 분들에게는 흰색의 카네이션을, 어머니가 있는 분들에게는 붉은 색의 카네이션을 달아드리기 시작한 것이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오늘 어버이 주일에 부모님들에게 카네이션 꽃을 달아드리는 전례가 생긴 것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인간 삶의 근간을 말하고 기본을 제시한 말씀입니다. 성경에 보면 이 세상에는 섬김의 대상이 둘이 있음을 말씀합니다. 하나는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이고 또 하나는 땅에 계시는 부모님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섬김과 부모님을 섬김에 복을 약속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이 일이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 여러 곳에서 부모공경에 대한 말씀을 하였고 계명으로 못을 박아 놓기까지 했습니다. 특히 오늘 읽은 본문은 짤막한 말씀이지만 아주 강렬하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의 부모를 경하게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신명기서는 가나안에 들어가서 살아가는 강령을 받는 과정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가나안은 성지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성스러운 땅입니다. 거기서는 아무렇게나 살수 없는 거룩한 땅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이제 가나안에 들어가서 살아야 할 삶의 강령과 지침을 내려 주시고 있습니다. 가나안에서는 구태의연하게 살면 안됩니다. 애굽에서 살던 노예근성 가지고는 살수 없는 곳입니다. 가나안에서는 거듭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27장에 보면 가서 살아야 할 지침을 하나님이 모세에게 내려 주시고 있습니다. “우상을 섬기지 말라, 섬기는 자나 우상을 만드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부모를 경홀히 여기지 말라, 그러면 저주를 받으리라”. “이웃의 경계표를 옮기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맹인이 가는 길을 잃게 하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고아나 과부를 억울하게 송사하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고 가나안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민으로 살아갈 강령을 내려 주셨습니다. 그 속에 16절에서 부모를 경홀히 여기지 말라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몇 가지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부모 공경의 대상
부모가 공경의 대상이라는 것은 성경 여러 곳에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엡 6:2- “네 부모를 공경하라, 이것이 첫 계명이다”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면서 말씀하시기를 “그러면 네가 복을 받고 장수하리라”고 했습니다. 자기 부모를 공경하는데 무슨 상이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성경은 상까지 제시하면서 부모를 공경하라고 강조합니다. 왜냐하면 이 문제는 그만큼 잘 지켜지지 않는 일이고 이 문제가 크게 세상의 문제가 될 시대가 올 것을 예고한 것입니다. 그 시대가 언제인가 하면 오늘입니다. 오늘이 그 시대입니다.
며칠 전 신문에 어느 81세 된 노모를 자식 남매가 서로 맡지 않겠다고 떼밀어 내어 양쪽 집을 오가다가 날이 저물었습니다. 버려진 이 어머니는 추운 길에서 잠을 자겠다고 하니까 동네 사람들이 경찰에 신고해서 들통 나 자녀들이 노인 학대 죄로 입건되었다는 소식입니다. 그때 노모는 오히려 자식 걱정을 했다고 합니다. “집이 어디냐”고 물으니까 “자식들은 잘못이 없다, 그냥 내가 길을 잃은 거다”하고 끝까지 자식을 변호했다고 합니다.
오늘 자식들이 이런 부모의 마음을 모릅니다. 성경은 이런 일이 발생할 때가 올 것을 에고하고 이 계명을 성경에 못을 박아 놓은 것입니다. 부모 공경하는 자에게는 상을 주겠다고 까지 언약을 했습니다. 저는 그 기사를 잃고 에덴의 집에 전화해서 이 노인을 받아줄 수 없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믿지 않는 분이 들어오면 함께 있는 분들이 융합이 어려워지고 또 그런 부모를 맡으면 그때 그 자식들이 와서 부모를 잘못 모셨느니 말이 많고 또 병이라도 나면 그런 자식들이 또 귀찮게 행동한다고 어렵다고 해서 못 받았습니다. 이런 자식들은 성경 말씀대로 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이런 자식들을 생각하면 고려장 설화를 다룬 김형영의 “따뜻한 봄날”이라는 시가 생각납니다. 아들이 어머니에게 봄꽃 구경 가자고 꼬여 엎고 산속으로 갑니다. “어머니 꽃구경 가요, 제 등에 업혀 꽃구경 가요, 세상이 온통 꽃핀 봄날 어머니는 좋아라. 아들 등에 업혔네, 마을을 지나고 들을 지나고 산자락에 휘감겨 숲길이 멀어지자 어이구머니나 어머니는 그만 말을 잃었네, 봄구경 꽃구경 눈 감아버리더니 한 움큼 한 움큼 솔잎을 따서 가는 길바닥에 뿌리며 가네, 어머니 지금 뭐하시나요, 꽃구경은 안하시고 뭐하시나요, 솔잎은 뿌려서 뭘 하게요, 아들아 아들아 내 아들아 너 혼자 돌아갈 길이 걱정이구나, 산 길 잃고 헤맬까 걱정이구나.” 예부터 한국을 동방예의지국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것도 아주 오래전 지나버렸습니다. 이제는 노부모는 애물단지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오늘 노부모들은 방치되고 폭력까지 당하고 갈취까지 당한다고 합니다. 보건 복지부의 통계를 보니까 노인 학대 가해자가 아들인 경우가 56.3%, 며느리인 경우가 12.6%라고 합니다. 아들 내외를 합치면 69%입니다. 참으로 불행한 일입니다.
미국 정부가 중산층에서 아이를 낳아 18세까지 키우는데 드는 돈을 통계 내 보니까 과외비와 학비를 제외하고도 고등학교까지 가르치는데 1억 6천만 원이 든다고 발표했습니다. 먹을 것 입을 것 못 입고 가르쳤는데 다 키워놓으니까 이렇게 버림을 받습니다. 그러면 저희들은 행복할 줄 압니까. 저들도 당합니다. 속담에 콩 심은데 콩나고 팥 심은데 팥난다고 했습니다. 이다음에 자기도 똑 같이 당합니다. 옛날 고려장이 있을 때 아들이 늙은 어머니를 지게에 지고 깊은 산중으로 가서 버리고 돌아왔습니다. 집에서 놀던 어린 아들이 “어디 갔다 오느냐”고 물으니까 어머니를 산에 버리고 왔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어린 아들이 “그 지게 잘 두라”고 했습니다. “그래야 이다음에 나도 그 지게로 아버지 지고 가서 버릴 것 아니냐.”고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 소리 못하고 돌아가 버린 어머니를 모시고 왔다고 합니다. 출 20:12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했습니다. 엡 5:3 “그러면 네가 복을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읽은 본문에서는 “네 부모를 경하게 여기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부모에게 자식은 면류관
부모라는 존재는 생존만으로도 복이고 은혜입니다. 부모는 자식을 우상으로 알고 살아갑니다. 그만큼 자식은 부모에게 자랑거리이고 꿈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자식은 상급이고 면류관”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자식은 장사의 전통에 가득 들어있는 화살 같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자식들이 오늘 이 시대는 부모들이 가지는 이런 꿈을 여지없이 부서트리고 있습니다. 공경은 고사하고 찾아와야 할 대 오지도 않습니다. 명절 때도 잠간 왔다가 가 버립니다. 자식들이 오기를 일 년 내내 기다렸는데 잠간 왔다가 그냥 돌아갑니다. 아니면 바쁘다고 전화 한 통화 하고 오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 부모들도 자식들이 안온다고 서운해 할 것이 없습니다. 그때는 똑같이 수단을 쓰면 됩니다. 자식 놈들이 숨 가쁘게 헐레벌떡 내려오게 하는 법을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부산에 사는 노부부가 60주년 결혼기념일이 되었습니다. 그날은 자식들이 왔으면 좋겠다 싶었습니다. 그런데 아들딸들이 올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할머니가 남편에게 “어떻게 하면 애들이 내려올까요"하고 물었습니다. 그때 할아버지가 서울에 사는 아들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얘야, 나 네 어머니와 이혼하기로 했다, 이제는 지긋지긋해서 네 어머니와 더 이상 못살겠다, 그러니 대전에 사는 네 누이에게도 알려줘라“. 그리고 전화를 끊었습니다. 그리고 할아버지는 할머니에게 “애들이 조금 있으면 올 거요, 나 케이크 사러가요”하고 나가버렸습니다. 조금 있으니까 대전에 사는 딸에게서 급히 전화가 왔습니다. 전화를 받자마자 대뜸 고함부터 질렀습니다. “무슨 일이예요, 이혼은 절대 안돼요, 내가 지금 당장 갈 테니 기다리세요” 하고 전화를 끊었습니다. 이런 방법 매년 똑같이 쓰면 안 됩니다. 금년은 이렇게 하고 내년에는 “얘야, 갑자기 네 아버지가 입원하셨단다” 그러고 전화를 끊으면 됩니다. 그리고 그 다음해에는 “얘야, 돈이 필요해서 땅좀 팔아야겠다”고 해 보십시오. 헐레벌떡 내려 올 것입니다.
오늘 노부모님이 살아계심 자체만도 은혜이고 축복임을 알아야 합니다. 부모가 어떤 존재인데 갖다 버립니까. 그러니까 속이 상한 61세 이상 된 노인 중에 자살한 노인이 2004년 4,220명이나 되었고 가출한 노인이 6,149명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부모에게 자식은 면류관입니다. 오직 희망이고 뜻이고 목적입니다. 그런 희망, 목적을 꺾는 것이 죄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했습니다. 우리에게는 부모는 인생의 울타리입니다. 자식들은 그에게서 배우고 든든함을 느끼고 계신 것만으로도 삶에 울타리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젊은이들은 이 울타리가 없으면 자유로울 것 같이 생각하는데 절대로 그것이 아닙니다.
어느 학교에 젊은 교장이 취임하자마자 운동장의 울타리와 담장을 헐어버렸습니다. 담장이 아이들의 정서를 구속하고 아이들의 사고를 좁아지게 만든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울타리가 없어진 후에 나타난 현상은 학생들이 운동장에서 놀기를 꺼려하더라는 것입니다. 갑자기 울타리가 없어지니까 모두 교실 안으로 들어와 아이들의 행동반경이 더 좁아지더라는 것입니다. 울타리는 구속의 상징이 아니고 심리적 안정의 한계선임을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입니다. 울타리가 없어진 후 아이들이 더 심리적으로 불안을 느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는 도덕의 울타리, 종교의 울타리, 공중도덕의 울타리, 훈계의 울타리가 있어야 합니다. 이 젊은 교장은 그것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학생들에게는 울타리가 필요하다면서 다시 울타리를 세웠다고 합니다. 그래서 부모는 자식이 나이를 먹어도 여전히 울타리가 되어주려고 합니다. 성경은 그런 부모를 “공경하라“고 강조하십니다.
하나님의 그림자
성경은 하나님 사랑과 부모님 사랑을 동격으로 말씀하십니다. 성경은 하나님께 망령되이 행하는 자를 돌로 쳐 죽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또 성경은 부모를 욕되게 하는 자도 돌로 쳐 죽이라고 했습니다. 또 성경은 하나님을 공경하는 자는 복을 받을 것이라고 했고 또 부모를 공경하는 자도 복을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부모님은 이 땅에 계시는 눈에 보이는 하나님의 그림자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눈에 보이는 부모도 공경치 못하면서 어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느냐”고 반문하십니다. 부모는 하나님의 그림자입니다. 부모에게는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아들을 희생시키셨고 하루를 천년같이 기다리시는 심정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런데 부모에게도 똑같은 그 마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땅의 부모들도 자식을 위해서 무슨 희생이라도 감수하십니다. 그 마음이 곧 하나님이 가지신 마음입니다.
이철환이 쓴 “먼 불빛“이라는 글이 있습니다. 매일 사고치는 아들이 몇 번씩 경찰서에 드나들었습니다. 이제 한번만 더 사고 치면 교도소 행입니다. 아버지는 그런 아들을 바라보며 조바심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버지는 물건을 훔치고 감옥에 들어갑니다. 그 모습을 보고 아들이 “어떻게 아버지가 이를 수가 있는가"하고 충격을 받습니다. 그 아들이 아버지를 면회 갔습니다. 초라해진 아버지 의 모습을 보는 순간 분노합니다. 그때 아버지가 아들에게 “너는 제발 죄짓지 말고 똑바로 살아라, 너는 교도소에 들어오면 안 된다, 여기는 들어올 곳이 못된다, 너만큼은 정직하게 살라“고 애원했습니다. 그러자 아들은 “아버지가 지금 그런 말 할 자격이 있느냐”고 욕하고 나와 버렸습니다. 집에 돌아와 어머니가 아들에게 아버지의 심정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네 아버지가 정말 나쁜 짓 한줄 아느냐, 너 때문이야, 네가 또 한 번만 더 죄를 지으면 교도소에 들어가야 하니까 네가 교도소에 가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아버지가 일부러 물건을 훔치고 일부러 교도소에 들어가신 거야“. 그래서 아들이 바로섰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이 마음이 곧 하나님의 마음의 그림자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부모를 공경하라고 했습니다.
호이트 성을 가진 아들과 아버지의 이야기를 TV에서 방영한 적이 있습니다. 아버지 딕이 아들을 낳았습니다. 아들 릭은 탯줄이 목에 감긴 채 태어나는 바람에 중증 뇌성마비 장애자가 되었습니다. 의사는 양육을 포기하고 시설에 맡기라고 했지만 부모는 이 아이를 사랑으로 키우겠다고 정성으로 양육했습니다. 이 아이는 전신이 마비되어 손과 목만 움직이고 말도 못합니다. 아들이 열 살 때 장애인을 위한 기금마련을 위해서 달리기 대회를 하는데 아버지는 아들을 엎고 구경나갔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장애인인 아들이 자신도 달리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현실은 어림도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때 아버지는 아들의 소원을 이루어주려고 아들을 태우고 휠체어를 밀며 마라톤을 시작했습니다. 42.195 Km를 3시간 45분에 완주하고 다음에는 2시간 50분에 완주했습니다. 다음에는 철인 3종 경기에도 출전했습니다. 3종 경기는 수영으로, 사이클로, 마라톤으로 총 226.3Km 17시간에 완주해야 하는 경기입니다. 사이클을 탈 때는 아들을 자전거에 태우고 가고 수영할 때는 보트에 아들을 태우고 몸에 줄을 묶은 채 헤엄쳐 가고 코스가 바뀔 때마다 다 큰 아들을 안아서 옮겨 싣고 경기를 했는데 그 경기를 30년 동안 200번 이상 완주한 기록을 남겼다고 합니다. 처음엔 사람들이 무모한 짓을 한다고 했지만 아버지는 장애인인 아들을 기쁘게 해 주려고 그 경기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이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이 마음을 하나님이 이 땅의 부모들에게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의 자식 놈들은 그런 부모의 마음도 모르고 실망시키고 눈물 나게 하고 모른 척 하고 갖다 버리고 그럽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은 “그런 부모를 공경하지 않고 경홀히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가나안에는 아무나 들어가는 곳이 아닙니다. 가나안은 거듭난 사람만이 들어가는 곳입니다. 거기 들어가면 하나님의 따라야 합니다. 그것이 부모를 공경하는 일입니다. 그래야 이 탁한 세상을 우리들이 정화하고 무너진 질서를 세우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살아가게 됩니다
출처/이정익목사 설교자료 중에서
미국 버지니아 주에 있는 웹스터라는 교회에서 26년간 신앙 생활하던 자비스 부인이 사망하였습니다. 이 분은 많은 분들에게 좋은 모습을 남긴 신앙인의 사표였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를 잊지 못했습니다. 그의 추도식에서 의논되기를 그 마음을 기리기 위해서 어머니날을 제정하자는 결의를 하였습니다. 정부에서는 그 뜻을 받아들여 1913년 미국 의회에서 5월 둘째 주일을 어머니 날로 결정해서 오늘까지 지켜오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어버이날을 일반인들에게 알리기 위해서 1955년도에 5월 8일을 Mother's Day 즉 어머니 날로 지정하여 이승만 대통령이 확정 공포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소외된 아버지들이 우리들은 뭐냐 하고 항의해서 1974년도에 정부에서 어머니날을 어버이 날로 공식발표한 것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 어버이날에는 가슴에 카네이션을 달아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원래는 부모님의 은혜와 사랑에 감사하는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서 자식들이 가슴에 카네이션 꽃을 달았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부모님을 정성껏 섬기겠다는 뜻으로 부모님들의 가슴에 어머니가 없는 분들에게는 흰색의 카네이션을, 어머니가 있는 분들에게는 붉은 색의 카네이션을 달아드리기 시작한 것이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오늘 어버이 주일에 부모님들에게 카네이션 꽃을 달아드리는 전례가 생긴 것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인간 삶의 근간을 말하고 기본을 제시한 말씀입니다. 성경에 보면 이 세상에는 섬김의 대상이 둘이 있음을 말씀합니다. 하나는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이고 또 하나는 땅에 계시는 부모님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섬김과 부모님을 섬김에 복을 약속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이 일이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 여러 곳에서 부모공경에 대한 말씀을 하였고 계명으로 못을 박아 놓기까지 했습니다. 특히 오늘 읽은 본문은 짤막한 말씀이지만 아주 강렬하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의 부모를 경하게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신명기서는 가나안에 들어가서 살아가는 강령을 받는 과정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가나안은 성지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성스러운 땅입니다. 거기서는 아무렇게나 살수 없는 거룩한 땅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이제 가나안에 들어가서 살아야 할 삶의 강령과 지침을 내려 주시고 있습니다. 가나안에서는 구태의연하게 살면 안됩니다. 애굽에서 살던 노예근성 가지고는 살수 없는 곳입니다. 가나안에서는 거듭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27장에 보면 가서 살아야 할 지침을 하나님이 모세에게 내려 주시고 있습니다. “우상을 섬기지 말라, 섬기는 자나 우상을 만드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부모를 경홀히 여기지 말라, 그러면 저주를 받으리라”. “이웃의 경계표를 옮기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맹인이 가는 길을 잃게 하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고아나 과부를 억울하게 송사하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고 가나안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민으로 살아갈 강령을 내려 주셨습니다. 그 속에 16절에서 부모를 경홀히 여기지 말라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몇 가지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부모 공경의 대상
부모가 공경의 대상이라는 것은 성경 여러 곳에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엡 6:2- “네 부모를 공경하라, 이것이 첫 계명이다”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면서 말씀하시기를 “그러면 네가 복을 받고 장수하리라”고 했습니다. 자기 부모를 공경하는데 무슨 상이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성경은 상까지 제시하면서 부모를 공경하라고 강조합니다. 왜냐하면 이 문제는 그만큼 잘 지켜지지 않는 일이고 이 문제가 크게 세상의 문제가 될 시대가 올 것을 예고한 것입니다. 그 시대가 언제인가 하면 오늘입니다. 오늘이 그 시대입니다.
며칠 전 신문에 어느 81세 된 노모를 자식 남매가 서로 맡지 않겠다고 떼밀어 내어 양쪽 집을 오가다가 날이 저물었습니다. 버려진 이 어머니는 추운 길에서 잠을 자겠다고 하니까 동네 사람들이 경찰에 신고해서 들통 나 자녀들이 노인 학대 죄로 입건되었다는 소식입니다. 그때 노모는 오히려 자식 걱정을 했다고 합니다. “집이 어디냐”고 물으니까 “자식들은 잘못이 없다, 그냥 내가 길을 잃은 거다”하고 끝까지 자식을 변호했다고 합니다.
오늘 자식들이 이런 부모의 마음을 모릅니다. 성경은 이런 일이 발생할 때가 올 것을 에고하고 이 계명을 성경에 못을 박아 놓은 것입니다. 부모 공경하는 자에게는 상을 주겠다고 까지 언약을 했습니다. 저는 그 기사를 잃고 에덴의 집에 전화해서 이 노인을 받아줄 수 없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믿지 않는 분이 들어오면 함께 있는 분들이 융합이 어려워지고 또 그런 부모를 맡으면 그때 그 자식들이 와서 부모를 잘못 모셨느니 말이 많고 또 병이라도 나면 그런 자식들이 또 귀찮게 행동한다고 어렵다고 해서 못 받았습니다. 이런 자식들은 성경 말씀대로 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이런 자식들을 생각하면 고려장 설화를 다룬 김형영의 “따뜻한 봄날”이라는 시가 생각납니다. 아들이 어머니에게 봄꽃 구경 가자고 꼬여 엎고 산속으로 갑니다. “어머니 꽃구경 가요, 제 등에 업혀 꽃구경 가요, 세상이 온통 꽃핀 봄날 어머니는 좋아라. 아들 등에 업혔네, 마을을 지나고 들을 지나고 산자락에 휘감겨 숲길이 멀어지자 어이구머니나 어머니는 그만 말을 잃었네, 봄구경 꽃구경 눈 감아버리더니 한 움큼 한 움큼 솔잎을 따서 가는 길바닥에 뿌리며 가네, 어머니 지금 뭐하시나요, 꽃구경은 안하시고 뭐하시나요, 솔잎은 뿌려서 뭘 하게요, 아들아 아들아 내 아들아 너 혼자 돌아갈 길이 걱정이구나, 산 길 잃고 헤맬까 걱정이구나.” 예부터 한국을 동방예의지국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것도 아주 오래전 지나버렸습니다. 이제는 노부모는 애물단지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오늘 노부모들은 방치되고 폭력까지 당하고 갈취까지 당한다고 합니다. 보건 복지부의 통계를 보니까 노인 학대 가해자가 아들인 경우가 56.3%, 며느리인 경우가 12.6%라고 합니다. 아들 내외를 합치면 69%입니다. 참으로 불행한 일입니다.
미국 정부가 중산층에서 아이를 낳아 18세까지 키우는데 드는 돈을 통계 내 보니까 과외비와 학비를 제외하고도 고등학교까지 가르치는데 1억 6천만 원이 든다고 발표했습니다. 먹을 것 입을 것 못 입고 가르쳤는데 다 키워놓으니까 이렇게 버림을 받습니다. 그러면 저희들은 행복할 줄 압니까. 저들도 당합니다. 속담에 콩 심은데 콩나고 팥 심은데 팥난다고 했습니다. 이다음에 자기도 똑 같이 당합니다. 옛날 고려장이 있을 때 아들이 늙은 어머니를 지게에 지고 깊은 산중으로 가서 버리고 돌아왔습니다. 집에서 놀던 어린 아들이 “어디 갔다 오느냐”고 물으니까 어머니를 산에 버리고 왔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어린 아들이 “그 지게 잘 두라”고 했습니다. “그래야 이다음에 나도 그 지게로 아버지 지고 가서 버릴 것 아니냐.”고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 소리 못하고 돌아가 버린 어머니를 모시고 왔다고 합니다. 출 20:12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했습니다. 엡 5:3 “그러면 네가 복을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읽은 본문에서는 “네 부모를 경하게 여기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부모에게 자식은 면류관
부모라는 존재는 생존만으로도 복이고 은혜입니다. 부모는 자식을 우상으로 알고 살아갑니다. 그만큼 자식은 부모에게 자랑거리이고 꿈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자식은 상급이고 면류관”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자식은 장사의 전통에 가득 들어있는 화살 같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자식들이 오늘 이 시대는 부모들이 가지는 이런 꿈을 여지없이 부서트리고 있습니다. 공경은 고사하고 찾아와야 할 대 오지도 않습니다. 명절 때도 잠간 왔다가 가 버립니다. 자식들이 오기를 일 년 내내 기다렸는데 잠간 왔다가 그냥 돌아갑니다. 아니면 바쁘다고 전화 한 통화 하고 오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 부모들도 자식들이 안온다고 서운해 할 것이 없습니다. 그때는 똑같이 수단을 쓰면 됩니다. 자식 놈들이 숨 가쁘게 헐레벌떡 내려오게 하는 법을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부산에 사는 노부부가 60주년 결혼기념일이 되었습니다. 그날은 자식들이 왔으면 좋겠다 싶었습니다. 그런데 아들딸들이 올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할머니가 남편에게 “어떻게 하면 애들이 내려올까요"하고 물었습니다. 그때 할아버지가 서울에 사는 아들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얘야, 나 네 어머니와 이혼하기로 했다, 이제는 지긋지긋해서 네 어머니와 더 이상 못살겠다, 그러니 대전에 사는 네 누이에게도 알려줘라“. 그리고 전화를 끊었습니다. 그리고 할아버지는 할머니에게 “애들이 조금 있으면 올 거요, 나 케이크 사러가요”하고 나가버렸습니다. 조금 있으니까 대전에 사는 딸에게서 급히 전화가 왔습니다. 전화를 받자마자 대뜸 고함부터 질렀습니다. “무슨 일이예요, 이혼은 절대 안돼요, 내가 지금 당장 갈 테니 기다리세요” 하고 전화를 끊었습니다. 이런 방법 매년 똑같이 쓰면 안 됩니다. 금년은 이렇게 하고 내년에는 “얘야, 갑자기 네 아버지가 입원하셨단다” 그러고 전화를 끊으면 됩니다. 그리고 그 다음해에는 “얘야, 돈이 필요해서 땅좀 팔아야겠다”고 해 보십시오. 헐레벌떡 내려 올 것입니다.
오늘 노부모님이 살아계심 자체만도 은혜이고 축복임을 알아야 합니다. 부모가 어떤 존재인데 갖다 버립니까. 그러니까 속이 상한 61세 이상 된 노인 중에 자살한 노인이 2004년 4,220명이나 되었고 가출한 노인이 6,149명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부모에게 자식은 면류관입니다. 오직 희망이고 뜻이고 목적입니다. 그런 희망, 목적을 꺾는 것이 죄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했습니다. 우리에게는 부모는 인생의 울타리입니다. 자식들은 그에게서 배우고 든든함을 느끼고 계신 것만으로도 삶에 울타리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젊은이들은 이 울타리가 없으면 자유로울 것 같이 생각하는데 절대로 그것이 아닙니다.
어느 학교에 젊은 교장이 취임하자마자 운동장의 울타리와 담장을 헐어버렸습니다. 담장이 아이들의 정서를 구속하고 아이들의 사고를 좁아지게 만든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울타리가 없어진 후에 나타난 현상은 학생들이 운동장에서 놀기를 꺼려하더라는 것입니다. 갑자기 울타리가 없어지니까 모두 교실 안으로 들어와 아이들의 행동반경이 더 좁아지더라는 것입니다. 울타리는 구속의 상징이 아니고 심리적 안정의 한계선임을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입니다. 울타리가 없어진 후 아이들이 더 심리적으로 불안을 느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는 도덕의 울타리, 종교의 울타리, 공중도덕의 울타리, 훈계의 울타리가 있어야 합니다. 이 젊은 교장은 그것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학생들에게는 울타리가 필요하다면서 다시 울타리를 세웠다고 합니다. 그래서 부모는 자식이 나이를 먹어도 여전히 울타리가 되어주려고 합니다. 성경은 그런 부모를 “공경하라“고 강조하십니다.
하나님의 그림자
성경은 하나님 사랑과 부모님 사랑을 동격으로 말씀하십니다. 성경은 하나님께 망령되이 행하는 자를 돌로 쳐 죽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또 성경은 부모를 욕되게 하는 자도 돌로 쳐 죽이라고 했습니다. 또 성경은 하나님을 공경하는 자는 복을 받을 것이라고 했고 또 부모를 공경하는 자도 복을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부모님은 이 땅에 계시는 눈에 보이는 하나님의 그림자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눈에 보이는 부모도 공경치 못하면서 어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느냐”고 반문하십니다. 부모는 하나님의 그림자입니다. 부모에게는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아들을 희생시키셨고 하루를 천년같이 기다리시는 심정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런데 부모에게도 똑같은 그 마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땅의 부모들도 자식을 위해서 무슨 희생이라도 감수하십니다. 그 마음이 곧 하나님이 가지신 마음입니다.
이철환이 쓴 “먼 불빛“이라는 글이 있습니다. 매일 사고치는 아들이 몇 번씩 경찰서에 드나들었습니다. 이제 한번만 더 사고 치면 교도소 행입니다. 아버지는 그런 아들을 바라보며 조바심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버지는 물건을 훔치고 감옥에 들어갑니다. 그 모습을 보고 아들이 “어떻게 아버지가 이를 수가 있는가"하고 충격을 받습니다. 그 아들이 아버지를 면회 갔습니다. 초라해진 아버지 의 모습을 보는 순간 분노합니다. 그때 아버지가 아들에게 “너는 제발 죄짓지 말고 똑바로 살아라, 너는 교도소에 들어오면 안 된다, 여기는 들어올 곳이 못된다, 너만큼은 정직하게 살라“고 애원했습니다. 그러자 아들은 “아버지가 지금 그런 말 할 자격이 있느냐”고 욕하고 나와 버렸습니다. 집에 돌아와 어머니가 아들에게 아버지의 심정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네 아버지가 정말 나쁜 짓 한줄 아느냐, 너 때문이야, 네가 또 한 번만 더 죄를 지으면 교도소에 들어가야 하니까 네가 교도소에 가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아버지가 일부러 물건을 훔치고 일부러 교도소에 들어가신 거야“. 그래서 아들이 바로섰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이 마음이 곧 하나님의 마음의 그림자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부모를 공경하라고 했습니다.
호이트 성을 가진 아들과 아버지의 이야기를 TV에서 방영한 적이 있습니다. 아버지 딕이 아들을 낳았습니다. 아들 릭은 탯줄이 목에 감긴 채 태어나는 바람에 중증 뇌성마비 장애자가 되었습니다. 의사는 양육을 포기하고 시설에 맡기라고 했지만 부모는 이 아이를 사랑으로 키우겠다고 정성으로 양육했습니다. 이 아이는 전신이 마비되어 손과 목만 움직이고 말도 못합니다. 아들이 열 살 때 장애인을 위한 기금마련을 위해서 달리기 대회를 하는데 아버지는 아들을 엎고 구경나갔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장애인인 아들이 자신도 달리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현실은 어림도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때 아버지는 아들의 소원을 이루어주려고 아들을 태우고 휠체어를 밀며 마라톤을 시작했습니다. 42.195 Km를 3시간 45분에 완주하고 다음에는 2시간 50분에 완주했습니다. 다음에는 철인 3종 경기에도 출전했습니다. 3종 경기는 수영으로, 사이클로, 마라톤으로 총 226.3Km 17시간에 완주해야 하는 경기입니다. 사이클을 탈 때는 아들을 자전거에 태우고 가고 수영할 때는 보트에 아들을 태우고 몸에 줄을 묶은 채 헤엄쳐 가고 코스가 바뀔 때마다 다 큰 아들을 안아서 옮겨 싣고 경기를 했는데 그 경기를 30년 동안 200번 이상 완주한 기록을 남겼다고 합니다. 처음엔 사람들이 무모한 짓을 한다고 했지만 아버지는 장애인인 아들을 기쁘게 해 주려고 그 경기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이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이 마음을 하나님이 이 땅의 부모들에게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의 자식 놈들은 그런 부모의 마음도 모르고 실망시키고 눈물 나게 하고 모른 척 하고 갖다 버리고 그럽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은 “그런 부모를 공경하지 않고 경홀히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가나안에는 아무나 들어가는 곳이 아닙니다. 가나안은 거듭난 사람만이 들어가는 곳입니다. 거기 들어가면 하나님의 따라야 합니다. 그것이 부모를 공경하는 일입니다. 그래야 이 탁한 세상을 우리들이 정화하고 무너진 질서를 세우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살아가게 됩니다
출처/이정익목사 설교자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