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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수하시는 예수 (마가복음 10:13-16)
오늘은 5월 첫 주 어린이 주일입니다. 1856년 미국 매사추세츠 주에서 목회하던 레오날도 목사가 6월 둘째주일을 어린이 주일로 지키자고 제창한 것이 오늘 어린이 주일이 탄생하게 된 동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마침내 세계 여러 나라로 퍼져나갔습니다. 그래서 오늘까지 세계적으로 6월 둘째주일을 어린이 주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6월 둘째주일을 어린이 주일로 지키자고 한 이유는 6월이 일 년 중에서 가장 꽃이 많이 피는 계절이고 산천이 가장 푸르고 아름다운 때이기 때문에 어린이들 이미지와 가장 일치한다고 해서 6월 둘째주일을 어린이 주일로 제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6월의 산천초목을 보십시오. 모든 산들과 초목 들이 잎이 만발하고 이글이글 불타오르는 것 같이 충만하게 솟아납니다. 얼마나 보기가 좋습니까. 모든 생명체가 만발하고 불타오르는 것을 보면 참 감격적입니다. 우리나라도 6월 둘째주일을 어린이 주일로 지켜오다가 방정환 선생 등의 제창으로 5월 5일을 어린이 날로 수정해서 지키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1956년부터 5월 첫 주일을 어린이 주일로 지키게 된 것이 오늘날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오늘은 어린이들의 존재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보는 주일이 되었으면 합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서도 예수님이 어린 아이들의 값을 재인식 시키는 내용이 나오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많은 병자들을 고치셨습니다. 그리고 가르치셨습니다. 또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기적을 행하기도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주위에는 언제나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대부분 어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그 사람들 틈에 어린아이들이 왔다고 했습니다. 부모들이 아이들을 예수께 안수 받게 해 주려고 데리고 왔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진지하던 분위기가 시끄러워졌을 것입니다. 아이들은 언제나 시끄럽습니다. 조용하지를 못합니다. 아이들이 모이면 언제나 시끄럽고 혼란을 일으키고 움직이고 부산합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아이들을 꾸짖었을 것입니다. 꾸짖었다가 보다 조용히 하라고 했거나 아이들은 여기 오면 안 된다. 내 보내려 했을 것입니다.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정색을 하시면서 어린아이들에 대한 값이나 의미를 소홀히 할 우려를 지적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말씀하시기를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이 저들의 것이니라.” 하고 오히려 제자들을 꾸짖으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어린 아이에 대한 의미를 몇 가지로 새롭게 부여하고 있습니다.
인격적 대상
당시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어린아이들은 인격적으로 대하지 않습니다. 제자들은 아이들이 시끄럽게 하니까 너희들은 비켜라, 집에 가라하고 꾸짖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의 현실에서도 흔히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랬더니 예수님이 정색을 하시면서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내쫒지 말라고 오히려 제자들을 꾸짖으셨다고 했습니다. 당시 사회적 인식도 아이들을 무시했습니다. 성경에 보면 아이들은 사람의 숫자에 포함되지도 않았습니다. 오늘 우리 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집에 가서 어른이 없고 아이들만 있으면 “여기 사람 없냐”하고 묻습니다. 아이들은 아직 사람으로 취급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대부분 교회에서도 아이들은 어른들처럼 대접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때도 그랬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작심하시고 아이들도 완전한 하나의 인격체임을 새롭게 인식시켜 주시려고 하셨을 것입니다.
어린 아이들의 인격을 소홀히 하면 경시하게 되고 무시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아이들을 버리게 되고 어린아이를 구타하는 사건이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무슨 죄가 있다고 그렇게 모질게 구타하고 온 몸이 퍼렇게 멍들도록 때립니까. 그것은 아이들의 인격을 무시하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아이들의 인격을 무시하면 부모들이 불화하거나 가난에 찌들게 되면 아이들과 함께 동반자살 합니까. 아니면 아이들을 길거리에 고아원에 내 버리라는 것입니까. 그것이 얼마나 큰 죄입니까. 아이들의 인격을 존중하면 그리고 그 아이에게 하나님의 형상이 있다는 것을 안다면 그럴 수 있습니까. 그러니까 예수님은 어린이들의 인격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셨을 것입니다.
아이들의 인격을 무시하는 사회는 병든 사회입니다. 그런 가정이 있다면 그 가정도, 그 부모도 병든 가정이고 병든 어른입니다. 일제가 악랄했어도 어린 아이들에게까지 그렇게 모질게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공산군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충남 병촌교회가 6?25때 66명이 희생되었습니다. 그때 구덩이를 파고 구덩이에 넣어 죽였는데 그때 희생된 사람 중 1살, 2살, 5살, 7살, 8살, 11살, 12살 아이들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또 정읍의 두암교회 신자들이 6?25때 27명이 순교했는데 그 27명중에서도 1살, 3살, 4살, 5살, 8살, 10살, 12살, 14살, 16살 아이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거기 어디에 존엄이 있고 인격이 있고 신성이 있고 가치라는 말들이 있습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이 없는 사회가 무서운 사회인 것입니다.
아이들은 잘 가꾸고 가르쳐야 할 대상입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는 말 한마디가 중요합니다. 아이들은 백지와 같은 때입니다. 백지에 그림을 그리기에 따라 달라지듯 마치 아이들이 그런 때입니다. 지존파의 대부였던 김기환이라는 사람이 집이 너무 가난해서 미술시간에 크레파스를 가져가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때마다 선생님으로부터 꾸중을 들었습니다. 어느 날인가는 선생님이 “다음에는 훔쳐서라도 가져오라”며 머리를 쥐어박았다고 합니다. 그날 아이들 앞에서 창피를 당한 김기환은 그때부터 필요한 것은 훔쳐서 가져왔다고 합니다. 그리고 결국 17년 후에 이 아이가 살인범이 되어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사형받기 전에 최후 진술에서 이 젊은이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내가 오늘 이렇게 된 것은 초등학교 때 그 선생님 때문이다” 아이가 어리다고 아직 아무 것도 모른다고 무시하고 창피주고 함부로 말한 것이 이렇게 무서운 결과를 가져오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성경에서 어린 아이의 존재의 의미를 다시 새롭게 인식시켜 주고 있습니다.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이 말씀은 아이들의 인격을 존중하고 값을 인정하라는 말씀입니다.
어른들의 거울
예수님은 본문에서 “천국은 이런 사람의 것이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천국은 어린 아이들의 세계다”라는 말은 아닙니다. 천국은 이 아이들처럼 “순수하고 맑고 깨끗해야 갈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아이들은 참 맑고 깨끗합니다. 아이들을 보면 거울과 같습니다. 아이들을 보면 나를 보고 자신을 들여다 볼 수 있습니다. 아이들은 거짓을 모르고 꾸밈을 모릅니다.
요즘 저의 집에 불필요한 전화가 많이 옵니다. 요즘 장기기증 운동을 펼치고 있는데 많은 사람들이 이 일에 동참하고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데 개중에는 또 이 운동을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 반대하는 사람들이 자주 집으로 전화를 해서 왜 그 일에 앞장서느냐 하고 따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느 날 저녁에 또 전화가 왔습니다. 그래서 “나 없다고 하라” 했더니 어린 손녀가 옆에 있다가 “있는데” 라고 말했습니다. 순간 얼마나 민망하고 미안한지 할 말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의 얼굴을 쳐다보니까 말이 안 나왔습니다. 아이들이 그렇습니다. 아이들은 거울과 같습니다. 아이들을 보면 나를 보게 됩니다. 내 모습이 얼마나 거짓된지를 알게 됩니다. 아이들은 있는 그대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고 표현하고 그대로 믿어버립니다.
어떤 분이 예수를 믿게 된 동기를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어느 날 교회에 갔다 온 아이가 먹지도 않고 잠도 안자고 눈물만 흘리고 한숨만 쉬고 앉아 있었습니다. 왜 그러냐고 물어도 대답도 안하고 울기만 하더라고 합니다. 겨우 설득해서 말문이 열렸는데 아이가 하는 말이 “나는 이다음에 천국에 갈 텐데 우리 아빠가 지옥갈테니 걱정이 되어서 잠을 잘 수가 없다”고 말하더라고 합니다. 그래서 “어디서 들었느냐”고 물으니 교회에서 선생님으로부터 들었는데 예수님을 믿으면 천국에 가고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고 하셨는데 “우리가족 다 믿는데 아빠만 안 믿으니 우리 아빠는 분명 지옥에 갈 것 아니냐”면서 대성통곡을 하면서 울더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그 심성이 곱고 영혼이 맑고 그 믿음이 순수합니까. 어른들은 들어도 그냥 지나쳐 버리지만 어린 아이들은 그대로 믿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천국은 이런 어린아이들 같아야 간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어른들의 거울입니다. 아이들을 보면 백지와 같은 깨끗함을 보고 맑음을 보게 됩니다. 우리 어른들도 모두 다 그런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탁한 세상을 살다보니까 그 맑던 마음이 오염되고 추해지고 탁해져서 눈에 핏발이 서고 욕심이 불일 듯 일어나서 어른이 되면 모두 볼따구니가 두툼하게 솟아오르고 심술, 욕망, 탐욕이 가득 채워져서 배가 두툼하게 솟아오르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는 모두 어른들의 거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 아이들처럼 되지 않으면 천국에 갈 수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어린이는 보화
제자들은 아이들을 꾸짖어 내 보내려 했지만 예수님은 정색을 하면서 아이들을 꾸짖지 말라고 타 이르셨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들에게 일일이 안수해 주셨습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들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아이들의 소원을 들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하나하나 안수해 주셨습니다. 또 하나의 의미는 아이들의 소중함을 알게 해 주신 것입니다. 아이들은 무시하거나 꾸짖어 돌려보낼 대상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후에 유아세례를 주게 된 근거로 작용했습니다. 아이들도 당당하게 세례를 받을 수 있고 영적 복을 받을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유아세례를 처음 주창한 사람은 이레네우스였고 그 후에 오리겐이 주장하였고 다음에는 털투리안이라는 신학자들이 주장하였습니다. 그들 모두 이 본문에 의해서 유아세례를 강조하였습니다. 특히 종교개혁자들은 “아이들은 어른들 보다 더 순수하기 때문에 아이들에게 어렸을 때 세례를 베풀어서 타락하지 않게 보살피고 거룩하게 훈련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에 동참시키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아이들 교육에 더 세심한 배려가 있어야 합니다. 아이들은 참 중요한 때입니다.
아이들은 마치 보화와 같습니다. 아이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앞으로 20여년이 지나야 그 아이의 진가를 겨우 볼 수 있는 보화가 잠재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아이가 장차 뭐가 될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꾸짖지 말고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고 제자들을 질책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아이들을 마치 보화처럼 안아주시고 사랑하시고 안수해 주셨습니다. 아이들은 장차 뭐가 될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래서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합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어렸을 때 교회에 왔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선생님들이 그 아이를 무시했을 것입니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은 그 아이가 처음 교회에 왔을 때 키는 작고 가난해서 옷은 남루했을 것이고 코는 흘렸을 것이고 얼굴은 검고 보잘 것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아이를 챙기지 못하고 무시했을 것입니다. 누가 장차 그 아이가 커서 대통령이 될 것이라고 짐작이나 했겠습니까. 후에 그 아이가 커서 대통령이 될 것이라는 것을 미리 알 수 있다면 그때 그 아이를 그렇게 소홀하게 대했겠습니까. 그러니까 아이들은 마치 보화와 같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후에 어느 은사가 이제라도 예수를 믿으라고 하니까 나도 어렸을 때 교회에 갔었다고 대답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별 재미를 느끼지 못해서 계속 다니지 않았다고 대답했다는 것입니다. 그 말이 별로 챙겨주는 사람이 없었다는 말입니다. 그때 교사 누군가가 잘 보살피고 챙겨주었더라면 더 좋은 지도자가 되어 그의 말년에 있었던 불행한 역사를 만들지 않고 이 나라의 운명을 더 바람직하게 바꾸어 놓았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 부분이 아주 아쉬운 부분입니다.
미국의 영적 부흥사 무디의 일화를 읽어보면 그런 경우가 또 있었습니다. 어느 날 무디라는 어린 아이가 교회에 들어 왔습니다. 그때 그 아이의 얼굴에서는 관심을 받아 보지 못해서 두려운 모습과 차가운 표정이 가득 담긴 그런 얼굴로 왔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아이가 들어오자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았지만 애니라는 여교사가 그를 받아들여 품고 사랑하고 보살펴 주어서 그 아이가 마침내 얼굴이 펴지고 밝아지고 웃음을 되찾고 교회에 잘 다니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아이가 성장해서 미국에서 18세기 말에 영적 대각성운동을 일으켰던 디엘 무디라는 걸출한 부흥사를 태어나게 한 것입니다. 오늘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들은 한 가지 알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어린 한 영혼이 20년 후에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를 생각하고 교육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오늘 당장의 모습만 보면 꾸짖고 조용히 하라고 큰소리로 내 쫓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가 20년, 30년 후에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를 생각해 보면 소중하게 여기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어느 교사가 집에 가는 길에 골목길에서 놀고 있는 네 아이를 발견하게 됩니다. 이 교사가 그 아이들을 불러 놓고 전도를 합니다. 아이들에게 예수 이야기, 성경 이야기를 전해 줍니다. 그랬더니 그때부터 이 아이들이 열심히 교회에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 아이들이 교회 안에서 놀면서 자라갔습니다. 그리고 30년 후에 선생님의 생일날에 네 통의 축하전보가 도착했습니다. 하나는 중국의 선교지에서 선교사로부터 온 전보였고 두 번째는 미국 연방은행 총재로부터 온 전보였고 세 번째는 대통령 비서관으로부터 온 전보였고 네 번째는 미국 대통령 허버트 후버로부터 온 전보였다는 것입니다. 그때 네 아이들이 성장해서 보낸 전보였습니다. 아이들의 장래를 누가 미리 알 수 있겠습니까. 그 아이가 장차 성장해서 무엇이 되고 어떤 사람이 될는지 누가 알겠습니까. 그래서 아이들은 보화와 같은 존재인 것입니다.
저는 얼마 전에 아주 오랜 만에 초등학교 담임선생님을 만났습니다. 제가 아주 어렸을 때 만난 담임선생님이니까 잘 모르고 또 생각조차 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만나자 마자 대뜸 하시는 말씀이 “너는 목사가 될 줄 알았다”하고 말씀했습니다. 칭찬의 말씀이지만 어렸을 때부터 미래를 알 수 있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대부분은 그것을 알 수가 없습니다. 장차 무엇이 될 것인지, 장차 어떤 사람이 될 것인지 그것은 아무도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숨겨 놓으셨습니다. 그러니까 아이들은 모두 보배이고 보화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본문에서 아이들의 값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린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사람의 것이니라 하시고 그들에게 안수하셨다“고 했습니다. 생명 하나, 어린 영혼 하나를 소중히 하라는 교훈을 주시기 위해서 입니다. 그리고 그 어린 생명, 어린 영혼 하나를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게 하라는 가르침도 주고 계십니다.
출처/이정익목사 설교자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