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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님을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 (행2:1-4)
지난 주일 성령 강림절을 맞아 방지일 목사님을 모시고 은혜와 감동이 넘치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길선주 목사님은 성령과 말씀과 기도에 사로잡혔던 분이었기 때문에 철저한 회개와 부흥운동을 일으키셨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진정한 부흥운동은 말씀 운동이고 성령 운동이고 기도 운동이고 회개운동이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방지일 목사님은 "영의 지배를 받아야 내 주장, 내 주관, 내 주체가 없어진다"고 말씀했습니다. "영의 지배를 받아야 죄를 회개하게 되고 예수를 증거하게 되고 바른 신앙인이 된다”고 말씀했습니다. 오늘 한국교회의 살길도 “영의 지배를 받는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날 한국교회는 성령과 말씀과 기도와 회개에 사로잡히는 것보다는 음악과 프로그램 등 인간적인 수단 방법에 치중하고 있고 정서와 감정에 치우치고 있고 심지어는 하나님을 조정하려고 한다는 경고의 말씀도 들었습니다. 가슴에 깊이 새겨야 할 경고의 말씀이었습니다. 성령강림절은 지났지만 오늘 아침에도 성령에 관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사실 오늘 아침에 드리려고 하는 말씀은 2년 전인 2005년 4월 24일 주일에 제가 설교한 말씀입니다. 2년 전에 한 저의 설교를 다시 읽어보았는데 다시 한 번 해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2년 전에는 “성령님을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는데 오늘 아침에는 “성령님을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 이야기” 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주셨다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요3:16). 하나님께서는 또한 자기의 백성들을 이처럼 사랑하사 하나님의 신인 성령님을 자기의 백성들에게 보내주셨다고 말씀했습니다. “그 때에 여호와께서 자기 땅을 위하여 중심이 뜨거우시며 그 백성을 긍휼히 여기실 것이라 그가 너희를 위하여 비를 내리시되 이른 비를 너희에게 적당하게 주시리니”(요엘2:18,23).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행2:1-4).
하나님께서 세상과 자기 백성들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예수님을 보내주셨고 성령님을 보내주셨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저는 이렇게 쉽게 생각해 보았습니다. 지성이 엄마 아빠가 지성이를 사랑해서 많은 것을 해 주었습니다. 영양분이 많은 음식도 먹여 주었고, 좋은 약도 먹여 주었고, 좋은 장난감도 사 주었고, 포근한 이불도 만들어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성이 엄마 아빠가 지성에게 준 가장 큰 사랑의 선물은 아빠의 간을 떼어주고 엄마의 눈물을 쏟아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사랑하셔서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있는 모든 아름다운 것들을 다 만들어주셨지만, 우리들에게 주신 가장 큰 사랑의 선물은 하나님 자신의 몸의 일부를 떼어서 주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보내 주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피와 살을 떼어서 주셨다는 말씀이고, 성령님을 보내 주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정신과 혼의 일부를 떼어서 주셨다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아침에는 성령님을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설교를 합니다. 아들과 성령님을 보내주신 이유와 목적 세 가지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첫째는 우리들을 살리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지성이 아빠와 엄마가 간을 떼어주고 눈물을 쏟아준 것은 지성이를 살리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시고 성령님을 보내신 것은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들을 살리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에스겔 37장은 죄와 허물로 죽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마른 뼈들의 모습으로 보여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뼈들이 살아난 것은 말씀과 생기 즉 하나님의 아들과 성령을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본즉 그 골짜기 지면에 뼈가 심히 많고 아주 말랐더라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하시기로 내가 대답하되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찌어다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로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리라 이에 내가 그 명대로 대언하였더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 일어나서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겔37:2-10). 하나님께서 마른 뼈들을 살리신 두 가지 방편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말씀이었고 다른 하나는 생기였습니다. 말씀은 예수님을 가리키고 생기는 성령님을 가리킨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들과 성령님을 우리들에게 보내신 목적은 우리들을 살리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아들과 성령은 우리들을 살리십니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엡2:1,4,5).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 갈수 없느니라”(요3:5).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고후3:6). 성령은 죽은 자들을 살리는 일을 하십니다. 마른 뼈들 위에 말씀과 성령이 임했을 때 살아 일어서서 큰 군대를 이루었다고 했습니다. 마가의 다락 방에서 기도하던 120명 위에 성령이 바람과 같이 임했다고 했습니다.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행2:2). 여기 바람은 생기를 가리키는데 생기는 살리는 영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들과 성령님을 우리들에게 보내주신 첫째 이유와 목적은 죽었던 우리들을 살리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극진한 사랑입니다.
둘째는 우리들을 만남과 교제의 존재들로 만드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지성이 아빠와 엄마가 간을 떼어주고 눈물을 쏟아 주면서 지성이를 살린 목적은 지성이가 엄마 아빠와 말을 주고 받고 사랑을 주고 받으며 살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혜성이와 말을 주고 받고 사랑을 주고 받으며 살도록 하기 위해서였고, 할머니 할아버지와 말을 주고 받고 사랑을 주고 받으며 살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커 가면서 친구들과 함께 놀기도 하고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과 교제하면서 살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사람은 만남과 교제의 존재입니다. 사람은 만남과 교제를 통해서 기쁨과 보람과 행복을 누리며 살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죄는 생명을 앗아가고 죄는 만남과 교제도 앗아 갑니다. 그래서 사람이 불행해집니다. 인사도 하지 않고 만나지도 않고 교제도 하지 않는 사람은 영이 죽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예수님과 성령님이 오셔서 하시는 중요한 일은 우리 죄인들로 하여금 만남과 교제의 삶을 살게 하시는 일입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과 교제하게 되고 이웃과 교제하게 됩니다. 그리고 성령님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과 친밀하게 교제하게 되고 이웃과 친밀하게 교제하게 됩니다. 오순절 날 성령이 임했을 때 저희가 모두 방언을 했다고 했습니다.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행2:1-4). 여기 방언은 하나님과 친밀하게 말하는 것을 의미하고 사람들과 친밀하게 말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성령은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아바 아바지’ 라고 부르면서 하나님과 친밀하게 말하게 하고, 이웃들을 형제 자매라고 부르면서 이웃들과 친밀하게 말을 하게 합니다. 말은 만남과 교제의 가장 중요한 수단입니다. 성령 충만한 초대교회 성도들은 날마다 함께 모여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들과 성령님을 우리들에게 보내주신 둘째 이유와 목적은 말도 인사도 할 줄 몰랐던 우리들을 말도 하고 인사도 하고 교제도 하는 만남과 교제의 존재들로 만드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극진한 사랑입니다.
셋째는 우리들을 주의 일을 하는 봉사자들로 만드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지성이 아빠와 엄마가 간을 떼어주고 눈물을 쏟아 주면서 지성이를 살린 또 하나의 목적은 지성이가 엄마 아빠와 말과 사랑을 주고 받으며 살뿐만 아니라 커서 좋은 일을 하는 훌륭한 일꾼으로 만들기 위해서였습니다. 사람이 사는 목적은 좋은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일 할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고 봉사할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성령님은 우리들로 하여금 주의 일을 하게 하십니다. 봉사하게 하십니다. "성령으로 봉사하며"(빌3:3) 라고 했습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예수님의 증인이 된다고 말씀했습니다. “오직 성련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내 증인이 되리라”(행1:8). 성령님은 우리들에게 여러 가지 은사들을 주시는데 그 모든 은사들은 우리들로 하여금 주님의 일을 하게 하는 은사들입니다. “어떤 이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어떤 이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 이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이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이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주시나니”(고전12:8-10).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혹 권위하는 자면 권위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롬12:6-8).
성령을 받은 자는 열심히 주의 일을 합니다. “내 평생 소원 이것뿐 주의 일하다가” 이렇게 찬송을 부르면서 열심히 주의 일을 합니다. 특히 교제와 기도와 봉사와 전도의 일을 열심히 합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예루살렘교회의 성도들은 열심히 교제하고 열심히 기도하고 열심히 봉사하고 열심히 전도하면서 주의 일을 했습니다.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2:42-47).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예루살렘 교회의 일곱 집사들은 자기의 재산과 소유를 팔아서 구제하는 일에 힘을 썼고 전도하는 일에 힘을 썼고 선교하는 일에 힘을 썼습니다. 성령님은 이기적이고 무능하고 게으른 우리들로 하여금 열심히 주님의 일을 열심히 하게 하고 그래서 기쁨과 행복을 누리며 살게 하십니다. 물질과 시간에 인색한 사람은 주님과 거리가 먼 사람이고 성령님과 거리가 먼 사람입니다. 우리 조선의 초대교회 신앙의 선배들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자기들의 몸은 돌보지 않고 자기들의 몸이 부서지고 닳도록 주님의 일을 열심히 했습니다. 이기풍 목사님이 그랬고 최권능 목사님이 그랬고 윤함애 사모님이 그랬습니다. 윤함애 사모는 기도의 여인이었고 사랑과 봉사의 여인이었습니다. 최봉석 목사는 고난의 십자가를 짊어진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들과 성령님을 우리들에게 보내주신 셋째 이유와 목적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이기적이고 무능하고 게으른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일을 하는 하나님의 일꾼들로 만드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극진한 사랑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래서 아들과 성령님을 우리들에게 보내어주셨습니다. 첫째는 우리들을 살리시기 위해서였습니다. 둘째는 우리들을 만남과 교제의 사람들로 만드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셋째는 우리들을 봉사하며 사는 주님의 일꾼들로 만드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것이 우리들을 향한 하나님의 극진한 사랑이었습니다. 자신의 몸의 일부를 떼어주시면서 까지 우리들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진실하고 충만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예수님과 성령님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사모하고 예수님으로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성령님을 사모하고 성령님으로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생명이 충만하고, 교제가 충만하고, 봉사가 충만한 행복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일곱 집사님들이 성령이 충만했던 것처럼 우리 교회 집사님들과 권사님들이 모두 성령님으로 충만하기 바랍니다. 사도들이 성령 충만했던 것처럼 우리 교회 교역자들과 장로님들이 모두 성령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마치기 전에 영화 이야기를 간단히 하겠습니다. 최근에 깐느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으면서 유명해진 영화 '밀양'에 대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사실 저는 여 배우가 누군지도 모르고 그 영화를 본 일도 없습니다. 그런데 바로 어제 아침 우연히 CBS 인터넷 뉴스에 실린 '밀양'이라는 영화에 대한 어느 사람의 해설을 읽고 그 해설에 공감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해설의 일부를 여러분들에게 그대로 소개합니다.
"영화의 내용은 단순하다. 교통사고로 남편을 잃고 유괴범에게 아들까지 살해당한 여주인공 '신애'가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고 그 힘으로 고통을 이겨가던 중 어느 날 자신의 아들을 죽인 범인을 용서하겠다며 범인을 면회 가겠다고 나선다. 신애는 자신이 하나님을 알게 되고 믿게 되면서 마음의 평안을 얻게 되었고 자신의 아들을 죽인 범인을 용서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범인으로부터 뜻밖의 말을 듣는다. 범인은 자신은 감옥에 와서 하나님을 알게 되었고 그 하나님께 회개하고 이미 용서를 받았으며 지금은 너무도 마음이 평안하다고 말한다. 순간 신애의 얼굴에 당혹한 기색이 역력해진다. ‘그래요? 하나님께서 용서해주셨어요?’ 범인과의 면회를 마치고 나온 신애는 주차장에서 기절한다. 결국 신애는 그와 같은 살인범의 말에 충격을 받고 기독교의 신앙을 버린다.” 영화에 대한 분석적 해설은 다음과 같이 이어졌습니다.
“신애와 범인이 구원과 용서를 말하지만 정작 그들의 삶이 비극인 이유는 그들이 말하는 구원과 용서가 허상이기 때문이다. 이들의 구원과 용서가 허상인 까닭은 그것이 허영과 탐욕에 바탕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애의 비극의 원천은 허영이다. 아들의 죽음은 신애 자신의 허영이 부른 비극인 셈이다. 신애의 허영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신애는 상처받은 자들을 위한 기도회에 참석한 후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하며 믿음생활을 한다. 그녀는 예전에는 보지 못하고 알지 못했던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알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더 이상 고통 가운데 통곡하지 않으며 마음의 평안을 얻었다고 주장한다. 모두가 그녀의 믿음에 감탄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그런데 과연 그런가? 그녀는 진정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고 알게 되었던 것일까? 그녀는 진정 그 믿음의 힘으로 범인을 용서할 수 있었던 것일까? 아니다. 그녀는 여전히 눈에 보이는 세계에 붙잡혀 있을 뿐 진정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알지 못했다. 신애는 용서를 보여주려 했다. 범인에게 그리고 교인들에게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 자신에게 범인을 용서하는 모습을 보여주려 했다. 허영이란 실제보다 더 크게 보이려고 하는 마음이다. 돈이 없으면서도 돈 많은 것처럼 보이고자 사지도 못할 땅을 보러 다녔던 것처럼 신애의 용서에는 영적인 허영이 감추어져 있다. 자신이 범인을 용서하는 모습을 굳이 보여주고자 하는 것에 영적 허영의 덫이 놓여있다."
저는 이와 같은 영화에 대한 해설을 읽으면서 이창동 감독이나 상당수의 불신자들의 눈에 비친 오늘날 한국교회의 신자들의 모습이 ‘허상’의 모습이 아닐까 하는 심각한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이창동 감독이나 상당수의 불신자들이 용서와 구원을 전하는 기독교 복음의 깊은 내용을 알 수 없다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창동 감독이나 상당수의 불신자들의 눈에 비친 오늘날 한국교회의 신자들의 모습이 허상의 모습이 아닐까 하는 심각한 생각을 떨쳐버리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얼마 전에 옥한흠 목사는 오늘의 한국교회는 ‘허수’ ‘허세’ ‘허상’ 등 `3허(虛)'에 사로잡혀 있다고 분석한 일도 있었습니다. 사실 이 세상의 모든 종교 안에는 ‘허영’과 ‘허상’이 자리잡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오늘날 기독교 안에도 이와 같은 ‘허영’과 ‘허상’이 적지 않게 자리잡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몸의 일부를 떼어서 우리들에게 주신 중요한 이유는 우리들에게서 이와 같은 모든 종교적인 ‘허영’과 ‘허상’을 제거하시고 우리들을 하나님 닮은 진실하고 겸손하고 참된 하나님의 자녀들로 만들어주시기 위함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날마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받아 먹어야 하고 하나님의 생기를 받아 마셔야 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 충만 성령님 충만 그리고 하나님 충만한 삶, 하나님 닮은 진실하고 겸손하고 참된 하나님의 자녀들로서의 복된 삶을 살게 되기를 바랍니다.
출처/김명혁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