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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도 만난 사람 (눅10:25-37)
저는 주일 설교를 할 때 다른 사람들의 설교를 참고하는 일이 거의 없습니다. 수년 전에 케직과 암스텔담 설교를 그대로 전달한 일은 있었습니다. 지난 월요일 조용기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감동과 은혜를 받고 오늘 아침 그 설교를 거의 그대로 전달하는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조용기 목사님은 기독교 교도소 설립 감사예배에서 “선한 이웃”이란 제목으로 짤막한 설교를 했습니다. 눅10장에 나오는 강도 만난 사람과 조승희군을 비교하면서 설교를 했습니다. 저는 설교 제목을 “강도 만난 사람과 조승희의 이야기”라고 정했습니다. 제가 이 제목을 가지고 주일 날 설교를 하겠다고 조용기 목사님에게 말을 해 두었습니다. 제가 조 목사님의 설교를 거의 그대로 전달하지만 저의 생각을 조금씩 추가한 것을 말씀 드립니다.
우선 조용기 목사님이 조승희군을 강도에 비유하지 않고 강도 만난 사람에 비유한 것은 뛰어난 착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조승희군도 21세기란 강도를 만나서 죽게 된 불쌍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조승희군은 21세기의 황금 만능주의, 향락주의, 이기주의, 무관심주의란 강도에게 맞아서 죽은 불쌍한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조용기 목사님은 조승희군의 끔찍한 살인 사건을 접하고 나서 조승희군에 대한 불쌍한 마음과 그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면서 깊은 고뇌와 고민에 빠졌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참으로 귀한 고뇌와 고민이라고 생각합니다. 목요일 아침에도 국가조찬기도회에서 조 목사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조군을 생각하면 불쌍한 마음만 든다는 말을 또 했습니다. 사실 지금으로부터 59년 전인 1948년 10월 25일 두 아들을 죽인 살인범 안재선이 잡혔다는 소식을 들은 손양원 목사님은 두 아들의 죽음을 비통해하면서도 안재선을 생각하면서 이렇게 중얼거린 일이 있었습니다. “저 영혼이 불쌍해서 어쩌나, 내 아들들은 죽어서 천국에 갔지만, 안재선은 죽으면 지옥 갈 텐데, 저 영혼이 불쌍해서 어쩌나.” 고귀한 슬픔이었고 고귀한 불쌍히 여김이었습니다. 조용기 목사님도 고귀한 슬픔과 고귀한 불쌍히 여김을 지녔다고 생각합니다. 조 목사님의 설교의 요점은 강도 만난 사람에 대한 우리들의 태도였습니다. 우리는 강도 만난 사람들을 대할 때 세 가지 태도를 지닐 수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첫째는 율법주의적인 태도입니다.
조용기 목사님은 제사장이 취했던 태도가 율법주의적인 태도였다고 지적했습니다. 여기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가 어떤 율법사와의 대화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어떤 율법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가로되.” 그러므로 율법사와 제사장이 지녔던 태도가 율법주의적인 태도였다고 말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여러 가지 종류의 불행과 비극을 만나게 됩니다. 자녀들이 가출하는 불행, 부부가 이혼하는 불행, 불치의 병에 걸리는 불행, 굶어서 죽어가는 불행, 병들어서 죽어가는 불행, 총이나 칼에 맞아서 죽는 불행, 아니 총이나 칼로 사람들을 죽이는 불행, 전쟁의 폐허 속에서 죽어가는 비극, 인종과 문화와 종교와 정치적인 이데올로기의 갈등과 증오와 대결로 인해 수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 비극 등 수 많은 불행과 비극을 접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여러 종류의 불행과 비극적인 사건에 접할 때 우선적으로 율법주의적인 판단의 태도를 지니게 됩니다. 불행을 당한 사람 자신이나 부모나 조상의 죄 때문이라고 판단하고 정죄하게 됩니다. 옳고 그름의 잣대를 가지고 모든 것을 판단하게 됩니다. 그리고는 곧 정죄를 하고 그냥 지나가게 됩니다. 어떤 때는 소위 ‘의분’을 품기도 합니다. 악에 세력에 대한 ‘분노’를 품기도 합니다. 간음한 또는 간음을 당한 불행한 여인을 목격할 때 ‘의분’을 품고 ‘돌’을 들기도 합니다. 강도들을 만나서 옷을 벗기 우고 매를 맞아 죽어가는 한 사람의 신음 소리가 ‘귀찮게’ 여겨지기도 합니다. 냉정한 이성만 움직이고 따뜻한 감성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기도 합니다. 사실 저부터 조승희의 사건을 처음 접했을 때 큰 일 났구나 란 생각과 함께, 미국이 무엇이 그리 좋다고 쏟아져 가더니 저런 불행을 당했지 라는 일종의 비판적인 판단을 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율법주의자가 되기가 너무 쉽습니다. 한국교회와 한국사회의 문제점이 바로 이와 같은 율법주의적인 판단과 정죄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주관적인 옳고 그름의 잣대를 가지고 모든 것을 판단하고 정죄하려고 합니다. 율법주의는 결국 우리로 하여금 불행과 비극을 외면하고 불행과 비극의 현장을 피해가게 만듭니다.
둘째는 의식주의적인 태도입니다.
조용기 목사님은 레위인의 태도가 의식주의적인 태도라고 지적했습니다. 레위인은 아론을 도와서 성막에서 제사 의식을 감당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제사의식이 제대로 수행되도록 제사의 모든 준비와 진행을 철저하게 감당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제사 제도와 제사 의식을 마련해주셨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예배 의식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예배의 핵심인 마음은 떠나고 예배의 형식과 의식만 남게 된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탄식하신 일이 있었습니다.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사1:11,12). 예수님 당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비슷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마9:13).
그런데 누가복음 10장에 나오는 레위인은 제사 의식에만 모든 관심을 기울였고 강도 만난 사람의 신음 소리를 듣는 데는 아무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도 그런 경향을 띠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들끼리 감동적이고 은혜로운 예배를 멋지게 드리는데 거의 모든 관심을 기울이고 사회 구석 구석에서 우는 신음 소리에는 아무런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때가 너무 많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예배는 본래부터 수직적인 방향만을 강조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서 예배의 수평성을 지적하신 일이 있었습니다.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고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주린 자에게 식물을 나눠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네 집에 들이며 벗은 자를 보면 입히는 것이 아니겠느냐”(사58:6-7). “너희가 많이 기도할찌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 너희는 선행을 배우며 학대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사1:15-17). 그러나 우리는 우리끼리의 예배의 의식에만 관심을 가지고 우리끼리 만족을 누릴 때가 많다고 생각합니다. 의식주의는 결국 우리로 하여금 불행과 비극을 외면하고 불행과 비극의 현장을 피해가게 만듭니다.
셋째는 긍휼과 자비의 태도입니다.
여기 나오는 어떤 사마리아인은 강도 만난 사람을 보고 ‘불쌍히’ 여겼다고 했고 ‘자비’를 베풀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를 가리켜 ‘선한’ 사마리아인이라고 부릅니다. 조용기 목사님은 지금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사마리아인이 품었던 긍휼과 자비의 마음과 행위라고 지적했습니다. 강도 만난 사람을 돕는 일은 큰 교회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라고 지적했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은 자기가 가지고 있던 기름과 포도주로 강도 만난 사람을 도왔다고 지적했습니다. 무엇이든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작은 것으로도 얼마든지 강도 만난 사람을 도울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작은 교회도 도울 수 있고 가난한 사람들도 도울 수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마음이 있는 곳에 길이 있습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만 있으면 도울 수 있는 길은 얼마든지 열립니다.
지금 우리 한국교회와 한국 사회에게 필요한 것은 강도 만난 사람들에게 대한 긍휼과 자비의 마음과 행위입니다. 조용기 목사님은 2005년 4월 8일 바로 이 자리에서 “제가 잘못했습니다” 라고 말하면서 세 가지 죄를 통회 자복했습니다. 값싼 은혜에 안주한 죄와 사회악에 침묵한 죄와 함께 사랑을 실천하지 못한 죄를 통회 자복했습니다. “세 번째로 마음에 크게 통회하고 자복하는 것은 너무 이웃에 대해서 무관심하게 살았다는 것입니다. 고난 당하는 사람의 고난에 가끔 참여했지만 그것은 형식적이었고 진심으로 이웃의 고난에 동참하는 그런 일을 하지 못했습니다. 배 고픈 사람 먹이고 헐벗은 사람 입히고 병든 사람 치료해 주는 것이 예수님을 위해서 해 주는 것인데 그런 일을 중심으로 하지 못한 죄가 너무나 많습니다.” 그래서 조용기 목사님은 최근에 “얼마 있으면 은퇴하게 되는데 조금되는 은퇴비를 받아서 북한에 어린이 심장병원을 건립하는데 돕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너무너무 귀한 생각과 귀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말씀을 마무리하면서 두 가지 말씀을 더 드립니다. 이번 버지니아 공대 참사에 대한 미국군민들이 보여준 성숙한 자세에 대해서 우리는 많은 것을 배우게 됩니다. 우리는 불행을 당할 때 너무 성급하게 분노하며 다른 사람들을 정죄합니다. 그런데 미국사람들은 너무나 큰 슬픔을 당했는데도 불구하고 조승희군에 대한 분노를 나타내는 대신 그에 대한 긍휼의 마음을 지니면서 자기들의 연대적인 책임을 통감한 일입니다. 무참하게 목숨을 잃은 32명에게 조의를 표하는데 그치지 않고 살인범 조승희군의 자리도 마련하고 그에게도 애도를 표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기독교문화와 유교문화의 차이점을 너무나 생생하게 봅니다.
그러나 우리들에게도 기독교적인 긍휼을 가슴에 품었던 선배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될 것입니다. 손양원 목사님과 한경직 목사님이야말로 긍휼의 가슴을 지녔던 분들이었습니다. 그 분들은 한국의 성 프랜시스였습니다. 한 평생 한경직 목사님을 보필했던 영락교회의 이창로 장로님은 한경직 목사님의 목회의 특징중의 하나가 긍휼의 목회였다고 지적했습니다. 한경직 목사님께서 신의주제이교회에서부터 고아원과 양로원 등을 설립하여 고아와 과부와 노인과 가난한자와 병든 자와 죄수와 핍박 받는 자들을 돌아본 사랑과 봉사의 사역은 한경직 목사님의 긍휼의 마음에서 비롯했다고 지적했습니다. 이태형 기자도 한경직 목사님의 가슴에는 ‘야웨 라하밈’ 즉 여호와의 긍휼과 자비가 자리하고 있었다고 지적했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은 독재자들은 물론 일본 사람들과 북한 사람들을 향해서도 긍휼을 가슴에 품고 남한 산성에서 일본 사람들과 북한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지금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선한 사마리아인이 품었던 긍휼의 마음입니다. 신사참배를 강요했던 일본 사람들, 여인들을 끌고 가서 위안부로 만들었던 일본 사람들을 향해서 긍휼의 가슴을 지니기가 쉬운 것은 아닙니다. 사랑하는 가족들을 무참하게 학살한 공산주의자들을 향해서 긍휼의 가슴을 지니기가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부활의 주님께서는 지금도 우리들에게 이런 질문을 하고 계십니다.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가로되 자비를 [긍휼을]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라”(마5:4345). 들을 귀가 있는 사람들은 주님의 음성을 조금이라도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순종할 가슴이 있는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순종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귀한 말씀을 전해주신 조용기 목사님에게 감사를 드리고 지극히 부족한 저에게 귀한 깨달음을 주신 성령님께 무한한 감사를 돌립니다.
출처/김명혁목사 설교 중에서
저는 주일 설교를 할 때 다른 사람들의 설교를 참고하는 일이 거의 없습니다. 수년 전에 케직과 암스텔담 설교를 그대로 전달한 일은 있었습니다. 지난 월요일 조용기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감동과 은혜를 받고 오늘 아침 그 설교를 거의 그대로 전달하는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조용기 목사님은 기독교 교도소 설립 감사예배에서 “선한 이웃”이란 제목으로 짤막한 설교를 했습니다. 눅10장에 나오는 강도 만난 사람과 조승희군을 비교하면서 설교를 했습니다. 저는 설교 제목을 “강도 만난 사람과 조승희의 이야기”라고 정했습니다. 제가 이 제목을 가지고 주일 날 설교를 하겠다고 조용기 목사님에게 말을 해 두었습니다. 제가 조 목사님의 설교를 거의 그대로 전달하지만 저의 생각을 조금씩 추가한 것을 말씀 드립니다.
우선 조용기 목사님이 조승희군을 강도에 비유하지 않고 강도 만난 사람에 비유한 것은 뛰어난 착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조승희군도 21세기란 강도를 만나서 죽게 된 불쌍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조승희군은 21세기의 황금 만능주의, 향락주의, 이기주의, 무관심주의란 강도에게 맞아서 죽은 불쌍한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조용기 목사님은 조승희군의 끔찍한 살인 사건을 접하고 나서 조승희군에 대한 불쌍한 마음과 그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면서 깊은 고뇌와 고민에 빠졌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참으로 귀한 고뇌와 고민이라고 생각합니다. 목요일 아침에도 국가조찬기도회에서 조 목사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조군을 생각하면 불쌍한 마음만 든다는 말을 또 했습니다. 사실 지금으로부터 59년 전인 1948년 10월 25일 두 아들을 죽인 살인범 안재선이 잡혔다는 소식을 들은 손양원 목사님은 두 아들의 죽음을 비통해하면서도 안재선을 생각하면서 이렇게 중얼거린 일이 있었습니다. “저 영혼이 불쌍해서 어쩌나, 내 아들들은 죽어서 천국에 갔지만, 안재선은 죽으면 지옥 갈 텐데, 저 영혼이 불쌍해서 어쩌나.” 고귀한 슬픔이었고 고귀한 불쌍히 여김이었습니다. 조용기 목사님도 고귀한 슬픔과 고귀한 불쌍히 여김을 지녔다고 생각합니다. 조 목사님의 설교의 요점은 강도 만난 사람에 대한 우리들의 태도였습니다. 우리는 강도 만난 사람들을 대할 때 세 가지 태도를 지닐 수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첫째는 율법주의적인 태도입니다.
조용기 목사님은 제사장이 취했던 태도가 율법주의적인 태도였다고 지적했습니다. 여기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가 어떤 율법사와의 대화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어떤 율법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가로되.” 그러므로 율법사와 제사장이 지녔던 태도가 율법주의적인 태도였다고 말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여러 가지 종류의 불행과 비극을 만나게 됩니다. 자녀들이 가출하는 불행, 부부가 이혼하는 불행, 불치의 병에 걸리는 불행, 굶어서 죽어가는 불행, 병들어서 죽어가는 불행, 총이나 칼에 맞아서 죽는 불행, 아니 총이나 칼로 사람들을 죽이는 불행, 전쟁의 폐허 속에서 죽어가는 비극, 인종과 문화와 종교와 정치적인 이데올로기의 갈등과 증오와 대결로 인해 수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 비극 등 수 많은 불행과 비극을 접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여러 종류의 불행과 비극적인 사건에 접할 때 우선적으로 율법주의적인 판단의 태도를 지니게 됩니다. 불행을 당한 사람 자신이나 부모나 조상의 죄 때문이라고 판단하고 정죄하게 됩니다. 옳고 그름의 잣대를 가지고 모든 것을 판단하게 됩니다. 그리고는 곧 정죄를 하고 그냥 지나가게 됩니다. 어떤 때는 소위 ‘의분’을 품기도 합니다. 악에 세력에 대한 ‘분노’를 품기도 합니다. 간음한 또는 간음을 당한 불행한 여인을 목격할 때 ‘의분’을 품고 ‘돌’을 들기도 합니다. 강도들을 만나서 옷을 벗기 우고 매를 맞아 죽어가는 한 사람의 신음 소리가 ‘귀찮게’ 여겨지기도 합니다. 냉정한 이성만 움직이고 따뜻한 감성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기도 합니다. 사실 저부터 조승희의 사건을 처음 접했을 때 큰 일 났구나 란 생각과 함께, 미국이 무엇이 그리 좋다고 쏟아져 가더니 저런 불행을 당했지 라는 일종의 비판적인 판단을 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율법주의자가 되기가 너무 쉽습니다. 한국교회와 한국사회의 문제점이 바로 이와 같은 율법주의적인 판단과 정죄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주관적인 옳고 그름의 잣대를 가지고 모든 것을 판단하고 정죄하려고 합니다. 율법주의는 결국 우리로 하여금 불행과 비극을 외면하고 불행과 비극의 현장을 피해가게 만듭니다.
둘째는 의식주의적인 태도입니다.
조용기 목사님은 레위인의 태도가 의식주의적인 태도라고 지적했습니다. 레위인은 아론을 도와서 성막에서 제사 의식을 감당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제사의식이 제대로 수행되도록 제사의 모든 준비와 진행을 철저하게 감당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제사 제도와 제사 의식을 마련해주셨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예배 의식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예배의 핵심인 마음은 떠나고 예배의 형식과 의식만 남게 된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탄식하신 일이 있었습니다.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사1:11,12). 예수님 당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비슷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마9:13).
그런데 누가복음 10장에 나오는 레위인은 제사 의식에만 모든 관심을 기울였고 강도 만난 사람의 신음 소리를 듣는 데는 아무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도 그런 경향을 띠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들끼리 감동적이고 은혜로운 예배를 멋지게 드리는데 거의 모든 관심을 기울이고 사회 구석 구석에서 우는 신음 소리에는 아무런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때가 너무 많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예배는 본래부터 수직적인 방향만을 강조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서 예배의 수평성을 지적하신 일이 있었습니다.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고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주린 자에게 식물을 나눠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네 집에 들이며 벗은 자를 보면 입히는 것이 아니겠느냐”(사58:6-7). “너희가 많이 기도할찌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 너희는 선행을 배우며 학대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사1:15-17). 그러나 우리는 우리끼리의 예배의 의식에만 관심을 가지고 우리끼리 만족을 누릴 때가 많다고 생각합니다. 의식주의는 결국 우리로 하여금 불행과 비극을 외면하고 불행과 비극의 현장을 피해가게 만듭니다.
셋째는 긍휼과 자비의 태도입니다.
여기 나오는 어떤 사마리아인은 강도 만난 사람을 보고 ‘불쌍히’ 여겼다고 했고 ‘자비’를 베풀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를 가리켜 ‘선한’ 사마리아인이라고 부릅니다. 조용기 목사님은 지금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사마리아인이 품었던 긍휼과 자비의 마음과 행위라고 지적했습니다. 강도 만난 사람을 돕는 일은 큰 교회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라고 지적했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은 자기가 가지고 있던 기름과 포도주로 강도 만난 사람을 도왔다고 지적했습니다. 무엇이든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작은 것으로도 얼마든지 강도 만난 사람을 도울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작은 교회도 도울 수 있고 가난한 사람들도 도울 수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마음이 있는 곳에 길이 있습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만 있으면 도울 수 있는 길은 얼마든지 열립니다.
지금 우리 한국교회와 한국 사회에게 필요한 것은 강도 만난 사람들에게 대한 긍휼과 자비의 마음과 행위입니다. 조용기 목사님은 2005년 4월 8일 바로 이 자리에서 “제가 잘못했습니다” 라고 말하면서 세 가지 죄를 통회 자복했습니다. 값싼 은혜에 안주한 죄와 사회악에 침묵한 죄와 함께 사랑을 실천하지 못한 죄를 통회 자복했습니다. “세 번째로 마음에 크게 통회하고 자복하는 것은 너무 이웃에 대해서 무관심하게 살았다는 것입니다. 고난 당하는 사람의 고난에 가끔 참여했지만 그것은 형식적이었고 진심으로 이웃의 고난에 동참하는 그런 일을 하지 못했습니다. 배 고픈 사람 먹이고 헐벗은 사람 입히고 병든 사람 치료해 주는 것이 예수님을 위해서 해 주는 것인데 그런 일을 중심으로 하지 못한 죄가 너무나 많습니다.” 그래서 조용기 목사님은 최근에 “얼마 있으면 은퇴하게 되는데 조금되는 은퇴비를 받아서 북한에 어린이 심장병원을 건립하는데 돕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너무너무 귀한 생각과 귀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말씀을 마무리하면서 두 가지 말씀을 더 드립니다. 이번 버지니아 공대 참사에 대한 미국군민들이 보여준 성숙한 자세에 대해서 우리는 많은 것을 배우게 됩니다. 우리는 불행을 당할 때 너무 성급하게 분노하며 다른 사람들을 정죄합니다. 그런데 미국사람들은 너무나 큰 슬픔을 당했는데도 불구하고 조승희군에 대한 분노를 나타내는 대신 그에 대한 긍휼의 마음을 지니면서 자기들의 연대적인 책임을 통감한 일입니다. 무참하게 목숨을 잃은 32명에게 조의를 표하는데 그치지 않고 살인범 조승희군의 자리도 마련하고 그에게도 애도를 표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기독교문화와 유교문화의 차이점을 너무나 생생하게 봅니다.
그러나 우리들에게도 기독교적인 긍휼을 가슴에 품었던 선배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될 것입니다. 손양원 목사님과 한경직 목사님이야말로 긍휼의 가슴을 지녔던 분들이었습니다. 그 분들은 한국의 성 프랜시스였습니다. 한 평생 한경직 목사님을 보필했던 영락교회의 이창로 장로님은 한경직 목사님의 목회의 특징중의 하나가 긍휼의 목회였다고 지적했습니다. 한경직 목사님께서 신의주제이교회에서부터 고아원과 양로원 등을 설립하여 고아와 과부와 노인과 가난한자와 병든 자와 죄수와 핍박 받는 자들을 돌아본 사랑과 봉사의 사역은 한경직 목사님의 긍휼의 마음에서 비롯했다고 지적했습니다. 이태형 기자도 한경직 목사님의 가슴에는 ‘야웨 라하밈’ 즉 여호와의 긍휼과 자비가 자리하고 있었다고 지적했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은 독재자들은 물론 일본 사람들과 북한 사람들을 향해서도 긍휼을 가슴에 품고 남한 산성에서 일본 사람들과 북한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지금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선한 사마리아인이 품었던 긍휼의 마음입니다. 신사참배를 강요했던 일본 사람들, 여인들을 끌고 가서 위안부로 만들었던 일본 사람들을 향해서 긍휼의 가슴을 지니기가 쉬운 것은 아닙니다. 사랑하는 가족들을 무참하게 학살한 공산주의자들을 향해서 긍휼의 가슴을 지니기가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부활의 주님께서는 지금도 우리들에게 이런 질문을 하고 계십니다.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가로되 자비를 [긍휼을]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라”(마5:4345). 들을 귀가 있는 사람들은 주님의 음성을 조금이라도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순종할 가슴이 있는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순종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귀한 말씀을 전해주신 조용기 목사님에게 감사를 드리고 지극히 부족한 저에게 귀한 깨달음을 주신 성령님께 무한한 감사를 돌립니다.
출처/김명혁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