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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과 중풍병자의 친구들 (누가복음 5:17-26)
본문의 내용을 소개합니다. 주님께서 집에서 사람들에게 말씀을 가르치실 때 병을 고치는 주의 능력이 함께 했습니다. 그 때 한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침상에 메고 와서 예수님 앞에 들여놓고자했지만 사람들이 많아서 들어갈 길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포기하지 않고 방법을 찾다가 결국 지붕을 뜯어냅니다. 그리고 중풍병자 친구를 침상째 주님 앞에 내려놓습니다. 주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죄를 사해주시고 병을 고쳐주십니다. 주님께서 중풍병자에게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고 말씀하시자 중풍병으로 누워만 있던 이 사람의 몸에 주님의 치료의 능력이 쑥~ 들어가면서 새 힘이 솟고 주님의 말씀대로 일어나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자기 집으로 돌아갑니다. 이것을 지켜본 모든 사람들이 놀라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오늘 우리가 놀라운 일을 보았다.”라고 말합니다.
저는 이 놀라운 사건 속에서 우리들의 믿음성장을 위하여 두 가지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먼저는 주님은 어떤 분인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중풍병자를 주님에게 데리고 온 중풍병자의 친구들의 장점은 무엇인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1. 주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신앙생활은 주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아는 것이고 그분이 어떤 분인지를 앎으로 그 이름을 힘입어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성경도 그와 같은 목적으로 기록한 것입니다. 요 20:31에 보면 성경을 기록한 목적이 두 가지입니다. 믿고 얻는 것입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고 믿어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는 것이 성경의 목적입니다.
주님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요 17:3에서는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고 말씀합니다.
1) 병을 고치는 능력이 있으신 분입니다(17절).
마 4:23에 보면 주님의 공생애 기간 동안 3대 사역이 나옵니다. 첫째는 가르치시는 일을 하셨고, 둘째는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는 일을 하셨고, 셋째는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는 일을 하셨습니다. 이 가운데 시간적으로 보면 약 2/3를 병자를 고치시는데 사용하셨습니다.
주님의 사역의 정점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영원히 멸망 받을 인생을 대신한 고난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십자가 고난은 단지 십자가만 지신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시관을 쓰신 것, 채찍에 맞으신 것, 십자가를 짊어지시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신 것, 양손과 양발이 대못에 박히시고 십자가에 매달리신 것, 그리고 하나님과 단절된 고통을 당하신 것 모두가 포함 됩니다.
주님의 고난 가운데 채찍에 맞으신 이유를 성경에서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왜 주님이 채찍에 맞으셨습니까? 주전 690년경에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을 했습니다.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 53:5) 그리고 약 720년 후에 주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채찍에 맞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약 30년 후에 베드로 사도는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벧전 2:24)라고 말합니다. 주님이 채찍에 맞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신자들이 병으로부터 자유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병을 고치는 능력으로 중풍병자를 고치신 주님은 지금도 성령으로 역사하시며 믿음으로 반응하는 사람들의 병을 고치십니다. 제가 필리핀에서 집회를 할 때 한 달반 동안 하혈을 하신 사모님이 집회에 참석하셨는데 그 집회시간부터 하혈이 멈추고 치료가 일어난 일이 있습니다. 자궁에 혹이 있는 박미영 집사님은 집회 중에 화장실에 가서 핏덩어리를 쏟아내고 자궁에 혹이 치료가 되었습니다. 지난 주 금요일에 미국에서 배제니퍼집사님이 우리교회 금요기도회에 참석하셨습니다. 이분은 음식을 먹으면 계속 토하는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하고 식사를 할 때도 죽만 드셨는데 집회 참석한 후에 치료가 되었다고 전화를 받았습니다. 주님은 지금도 병든 자를 치료하시는 분입니다.
2) 믿음을 보시는 분입니다(20절).
주님께서 중풍병자를 치료하시기 전에 중풍병자와 그를 데리고 온 사람들의 믿음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치료해 주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능력을 보면 주님을 믿겠다고 하지만 주님은 믿음을 보이면 능력을 행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구원을 위한 모든 조건을 만들어놓으셨습니다. 자신이 대신 형벌을 당하시므로 죄사함의 모든 조건을 충족시키셨습니다. 그러나 그 사실을 믿을 때 구원을 얻는 것처럼 병고침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은 채찍에 맞으심으로 우리의 건강을 위한 모든 조건을 갖춰놓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어야만 치유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믿음을 보고 싶어 하시는 분입니다. 아벨이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드린 것이 믿음 때문이듯 우리의 일상생활과 영적생활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려면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히 11:6에 보면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나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에게는 주님이 믿음을 보신다는 것이 감사한 일입니다. 주님이 우리의 행위를 보시고, 우리의 공로를 보신다면 구원 받을 사람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롬3:23에 보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말씀하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행위나 공로를 보지 않으시고 믿음을 보시는 것이 감사합니다.
3)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으신 분입니다(20, 24절).
중풍병자와 친구들의 믿음을 보신 주님은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24절에서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죄 가운데서 구원하실 수 있는 이유는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죄 사함의 권세가 있습니다.
첫째는 주님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죄 사함의 권세가 있습니다. 딛2:13에서 사도 바울은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합니다. 주님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죄를 사할 권세가 있습니다.
둘째는 그분이 우리의 죄 값을 계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죄를 사할 권세가 있으신 것입니다. 엡 1:7에 보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해서 죄 값을 치르셨기에 죄를 사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4) 사람의 생각까지도 아시는 분입니다(22절).
21-24에 보면 주님은 주님의 말씀에 비판적인 사람들의 생각을 아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생각에 맞는 대답을 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생각까지도 아시는 분입니다.
가끔 안수기도를 하고나면 “목사님이 자기가 속으로 기도하는 것을 그대로 말했어요.”라는 신자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제가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제 속에 계시는 성령께서 기도 받는 사람의 마음의 생각까지 읽고 계시는데 제가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기도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생각을 잘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생각은 복과 저주를 불러오기 때문입니다. 마치 향기가 나는 꽃에는 벌과 나비가 모이고,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쓰레기 더미에는 파리가 모이는 것과 같습니다. 믿음의 생각, 긍적적인 생각, 축복의 생각을 하면 좋은 일이 일어나고, 불신앙의 생각, 부정적인 생각, 저주의 생각을 하면 나쁜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렘 6:19에 보면 “땅이여 들으라 내가 이 백성에게 재앙을 내리리니 이것이 그들의 생각의 결과라”고 말씀합니다. 실제로 욥이 고난을 당한 배경을 보면 그의 부정적인 생각의 결과이기도 한 것입니다. 욥 3:25에 보면 욥이 “나의 두려워하는 그것이 내게 임하고 내가 무서워하는 그것이 내 몸에 미쳤구나.”라고 말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면서도 늘 마음으로 혹시 저주를 받지 않을까 생각하고 근심하고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그 결과 그에게 자신이 두려워하고 무서워하던 저주가 임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단의 역사도 생각을 통해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요 13:2에 보면 마귀가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님을 팔려는 생각을 넣었습니다. 만약 가룟 유다가 그 생각을 물리쳤다면 그는 마귀에게 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가룟 유다가 마귀가 준 생각을 받아드리니 마귀가 가룟 유다의 마음에 들어가게 된 것이고 결국 예수님을 은 30에 팔아먹게 된 것입니다.
고후 10:4, 5에 보면 사람의 생각은 영적 전쟁터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생각을 지키면 승리할 수 있고 생각을 빼앗기면 패배하는 것입니다. 우리 속에 죄악의 생각이 들어올 때 그 생각과 반대 되는 말씀으로 채우려고 해야 합니다. 만약 죄악 된 생각을 받아드리고 묵상하기 시작하면 그 생각이 우리의 감정과 의지를 지배하게 될 것이고 결국은 그 죄악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생각을 지키는 방법은 하나님과 교제하고, 필요한 것이 있다면 하나님께 구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빌 4:6-7에 보면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말씀합니다.
주님은 생각까지 아시는 분입니다.
5) 말씀에 능력이 있으신 분입니다(24, 25절).
24절과 25절을 보면 주님께서 중풍병자에게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시자 그 사람이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일어나서 침상을 가지고 자기 집으로 돌아갑니다.
중풍병자에게는 일어설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러니 친구들에게 들려서 온 것 아닙니까! 그런데 예수님이 말씀하시니 자기의 능력으로 할 수 없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중풍병자의 능력으로 할 수 없는 일을 명하셨고 중풍병자는 그 말씀의 능력으로 자기의 능력으로 할 수 없는 일을 하게 된 것입니다.
말씀은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말씀으로 창조하셨습니다. “빛이 있으라”하시니 빛이 있었고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습니다. 구약의 믿음의 사람들은 주님의 능력의 말씀을 들었고 그 말씀에 순종할 때 말씀대로 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모세가 이끌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물을 얻지 못해서 고생할 때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반석 앞에 세우시고 지팡이로 치라고 하셨습니다. 모세가 그 말씀대로 순종해서 반석을 치자 반석에서 물이 솟아났던 일이 있습니다. 99세 된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돌이 지나면 자식을 볼 것이라고 말씀하시자 그대로 되었습니다. 100세 된 아브라함과 90세 된 사라가 자식을 보았습니다.
말씀의 능력을 믿으십시오. 그러면 말씀대로 될 것입니다. 히4:2에 보면 “그들과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들은 바 그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아니함이라”고 말씀합니다. 같은 복음을 들었는데 어떤 사람에게는 유익하고 어떤 사람에게는 유익하지 않은 이유는 믿음으로 반응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다보면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응답하십니다. 말씀으로 성령의 음성과 감동으로 그리고 말씀 사역자의 가르침을 통해서 응답하십니다. 이럴 때 말씀의 능력을 믿고 순종해 보세요.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의 능력이 있으신 분입니다.
2. 중풍병자의 친구들은 어떤 장점을 가지고 있는가?
좋은 친구를 둔다는 것은 큰 축복입니다. 국민일보에 실린 이야기입니다. 한 어머니가 혹독한 사춘기를 맞은 딸로 인해 엄청난 마음의 고통을 겪고 있었습니다. 딸은 술 마시고 담배피우며 놀기 좋아하는 세 명의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점점 어머니의 품에서 멀어져갔습니다. 어머니가 충고를 할 때마다 딸은 장담을 했습니다. “어머니, 걱정하지마세요. 저는 물들지 않아요.” 그러나 딸은 점점 친구들을 닮아가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어머니는 은쟁반에 썩은 사과 하나와 싱싱한 사과 세 개를 담아 가져왔습니다. 딸이 말했습니다. “썩은 사과 하나가 다른 사과를 모두 썩게 할 텐데요?” 어머니의 대답. “무슨 소리냐. 싱싱한 사과 세 개가 썩은 사과 하나를 오히려 싱싱하게 만들 수도 있는데…” 일주일 후 어머니가 은쟁반의 사과를 딸에게 보여주었습니다. 사과는 모두 썩어 있었습니다. 그때 어머니가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딸아, 친구도 이 사과와 같단다.” 그때서야 딸은 어머니에게 용서를 빌었습니다.
잠 27:17에 보면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 같이 사람이 그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중풍병자는 좋은 친구를 두었기 때문에 주님 앞에 나올 수 있었습니다. 우리들도 주변에 중풍병자처럼 영적으로 중풍병에 걸린 사람들에게 좋은 친구가 되어야 합니다.
1) 사랑입니다.
중풍병자의 친구들은 중풍병자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그들은 고통당하는 친구를 그냥 내버려둘 수 없었습니다.
사랑은 관심입니다. 친구들의 사랑은 관심으로 나타났습니다. 친구들이 중풍병자를 사랑했기 때문에 그의 고통에 관심을 가졌고 그 관심이 그를 주님 앞으로 데리고 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은 배려입니다. 주님은 사랑이 많으신 분인 것은 여러 가지로 증명이 됩니다. 그 가운데 한 가지는 배려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쉽습니다. 그 이유는 듣는 사람들을 고려했기 때문입니다. 배려입니다. 주님의 수준에서 말씀하셨다면 알아들을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주님은 사람들이 주님처럼 될 수 없는 것을 아셨기에 주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찾아오신 것입니다. 배려입니다. 레 19:9, 10에 보면 곡식을 거둘 때에 밭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라고 하십니다. 포도원에서 열매를 딸 때도 다 따지 말고 떨어진 열매도 줍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 이유는 가난한 사람들이 남겨진 것으로 먹고 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배려입니다. 중풍병자의 친구들은 중풍병자가 스스로 주님 앞에 갈 수 없었기에 자기들이 수고를 한 것입니다. 침상에 누이고 침상을 메고 주님 앞에 나아갔던 것입니다. 사랑의 배려인 것입니다.
가장 큰 사랑은 주님을 만나게 해주는 것입니다. 중풍병자에게 먹을 것을 주고 입을 것을 주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주님을 만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중풍병자는 주님을 만남으로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보다 더 큰 사랑은 없습니다. 물에 빠진 사람에게 사랑은 빵을 주는 것이나 옷을 주는 것이 아니라 물에서 건져주는 것입니다. 내가 건질 수 없으면 구조대에게 연락해서 구조하게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 문제를 가진 모든 사람들에게 가장 큰 사랑은 구원자 되시는 주님을 만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증거 하는 것은 가장 큰 사랑입니다. 주님을 몰라 영적인 중풍병에 걸린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만큼 큰 사랑은 없습니다.
2) 믿음입니다.
20절에 보니 주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셨다고 합니다. 믿음은 나타나는 것입니다. 보여 지는 것입니다. 구체적인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들의 믿음의 특징을 세 가지로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첫째는 올바른 믿음입니다. 주님을 만나면 치료될 수 있다는 믿음입니다. 주님은 치료자라는 믿음을 자긴 것입니다. 그들은 주님을 치료자로 믿었습니다. 주님만 만나면 친구가 치료 될 것을 믿었기에 친구를 주님께로 데리고 왔던 것입니다.
둘째는 행동하는 믿음입니다. 그들은 주님이 치료자라는 사실을 믿고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친구를 데리고 주님 앞으로 나아갔던 것입니다. 야고보 장로가 말한 대로 살아있는 믿음은 행함이 있는 믿음입니다. 그들이 행동하지 않았다면 믿음의 역사를 체험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행동하지 않았다면 중풍병자는 고쳐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셋째, 적극적이고 모험적인 믿음입니다. 호텔에 가보면 어쩌다가 문이 잠길 수 있습니다. 그러면 프론트에 이야기하면 마스터키로 열어줍니다. 마스터키만 있으면 호텔 안에 있는 모든 방을 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십니까? 신령한 의미에서 마스터키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마스터키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외쳤습니다. “네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중풍병자의 친구들은 주님은 모든 문제의 마스터키라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주님 앞에 적극적으로 나아갑니다. 주님이 계신 곳에 갔지만 사람들 때문에 주님에게 접근할 수가 없자 포기하지 않고 방법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지붕을 뜯어낼 생각을 합니다. 그들은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벗기고 병자를 침상째 무리 가운데로 예수 앞에 달아 내립니다.
우리들도 중풍병자의 친구들처럼 문제를 가지고 주님 앞에 나옵니다. 그들이 자신들의 믿음을 보였던 것처럼 주님은 우리들의 믿음을 주님 앞에 보여드리기를 원하십니다. 구체적인 행동을 통해서 믿음을 보이십시오. 때로는 모험을 통해서 믿음을 보여야 합니다.
3) 집중력입니다.
저는 중풍병자의 친구들이 보인 집중력을 우리가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중풍병자를 주님 앞에 데리고 가는 일에 집중했습니다. 그들의 집중력은 장애물을 극복하는 적극적이고 모험적인 행동까지 하게 했습니다.
집중할 때 기적이 일어납니다. 기도에 집중해야 기도의 응답을 받습니다. 찬송할 때도 집중해야 찬송 중에 임하신 주님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말씀에 집중해야 말씀이 내 속에 파고 들어오고 말씀이 믿어지고 말씀이 실제가 됩니다.
세계적인 사람들은 한 가지에 집중하므로 세계적인 사람이 된 것입니다. 박지성 선수는 축구에 집중한 것이고, 박세리 선수는 골프에 집중한 것입니다. 그들은 다른 것을 좇아가지 않았습니다. 오직 축구, 오직 골프에 집중한 것입니다.
전세계 위인들과 성인들, 소위 성공했던 사람들의 공통점을 찾으려 몸부림했던 스티븐 코비는 가장 기본적인 공통점 3가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① 소중한 일에 집중하며 살더라. ② 비전과 목적에 맞게끔 살더라. ③ 환경에 끌려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주도적으로 살아간다고 요약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세계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은 가장 소중한 일이라고 여기는 비전을 받았고 그 비전에 집중해서 살았다는 것입니다. 비전에 집중하다보니 환경에 끌려 다니는 것이 아니라 환경을 변화시켰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비전에 집중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부르신 부르심에 집중해야 합니다. 어떤 장애물이 있더라도 비전에 집중하면 방법이 보이고 길이 열리게 됩니다. 세계 수많은 교회를 컨설팅한 피트 드라커라는 사람은 이 땅에 있는 많은 목회자들과 성도들에게 소중한 충고를 하고 있습니다. “많은 일을 올바로 하려 하지 말고 올바른 일을 하라.” 즉 내게 주신 사명, 우리 교회에 주신 비전에 집중하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위대한 사도로서 기독교계에 엄청난 영향력을 끼친 이유는 그가 자신의 사명에 집중했기 때문입니다. 행 20:24에 보면 그는 이런 고백을 합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제가 기도하는 기도 제목 중에 하나는 우리 성도들 가운데 신 28:1에서 말씀하신대로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난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의 약속입니다. 주님은 그 약속을 이루실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에게 이루실까요?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사람입니다. 둘째는 주님이 주신 비전에 집중하는 사람입니다.
신앙생활은 베드로가 바다 위를 걸었던 것과 같습니다. 세상의 바다에서 수많은 유혹의 파도가 있지만 우리의 인생의 목적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베드로가 바다에 빠지지 않고 바다 위를 걸을 때는 주님에게 그의 시선이 집중되었을 때입니다. 그가 시선을 주님에게서 떼고 파도를 보자 두려움이 밀려왔고 결국 바다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우리도 집중된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주님이 주신 비전을 바라보십시오. 어떤 파도가 밀려와도 집중하면 극복할 수 있습니다. 길이 보일 것입니다.
출처/ 마경훈목사 설교 중에서
본문의 내용을 소개합니다. 주님께서 집에서 사람들에게 말씀을 가르치실 때 병을 고치는 주의 능력이 함께 했습니다. 그 때 한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침상에 메고 와서 예수님 앞에 들여놓고자했지만 사람들이 많아서 들어갈 길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포기하지 않고 방법을 찾다가 결국 지붕을 뜯어냅니다. 그리고 중풍병자 친구를 침상째 주님 앞에 내려놓습니다. 주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죄를 사해주시고 병을 고쳐주십니다. 주님께서 중풍병자에게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고 말씀하시자 중풍병으로 누워만 있던 이 사람의 몸에 주님의 치료의 능력이 쑥~ 들어가면서 새 힘이 솟고 주님의 말씀대로 일어나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자기 집으로 돌아갑니다. 이것을 지켜본 모든 사람들이 놀라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오늘 우리가 놀라운 일을 보았다.”라고 말합니다.
저는 이 놀라운 사건 속에서 우리들의 믿음성장을 위하여 두 가지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먼저는 주님은 어떤 분인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중풍병자를 주님에게 데리고 온 중풍병자의 친구들의 장점은 무엇인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1. 주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신앙생활은 주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아는 것이고 그분이 어떤 분인지를 앎으로 그 이름을 힘입어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성경도 그와 같은 목적으로 기록한 것입니다. 요 20:31에 보면 성경을 기록한 목적이 두 가지입니다. 믿고 얻는 것입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고 믿어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는 것이 성경의 목적입니다.
주님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요 17:3에서는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고 말씀합니다.
1) 병을 고치는 능력이 있으신 분입니다(17절).
마 4:23에 보면 주님의 공생애 기간 동안 3대 사역이 나옵니다. 첫째는 가르치시는 일을 하셨고, 둘째는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는 일을 하셨고, 셋째는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는 일을 하셨습니다. 이 가운데 시간적으로 보면 약 2/3를 병자를 고치시는데 사용하셨습니다.
주님의 사역의 정점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영원히 멸망 받을 인생을 대신한 고난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십자가 고난은 단지 십자가만 지신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시관을 쓰신 것, 채찍에 맞으신 것, 십자가를 짊어지시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신 것, 양손과 양발이 대못에 박히시고 십자가에 매달리신 것, 그리고 하나님과 단절된 고통을 당하신 것 모두가 포함 됩니다.
주님의 고난 가운데 채찍에 맞으신 이유를 성경에서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왜 주님이 채찍에 맞으셨습니까? 주전 690년경에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을 했습니다.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 53:5) 그리고 약 720년 후에 주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채찍에 맞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약 30년 후에 베드로 사도는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벧전 2:24)라고 말합니다. 주님이 채찍에 맞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신자들이 병으로부터 자유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병을 고치는 능력으로 중풍병자를 고치신 주님은 지금도 성령으로 역사하시며 믿음으로 반응하는 사람들의 병을 고치십니다. 제가 필리핀에서 집회를 할 때 한 달반 동안 하혈을 하신 사모님이 집회에 참석하셨는데 그 집회시간부터 하혈이 멈추고 치료가 일어난 일이 있습니다. 자궁에 혹이 있는 박미영 집사님은 집회 중에 화장실에 가서 핏덩어리를 쏟아내고 자궁에 혹이 치료가 되었습니다. 지난 주 금요일에 미국에서 배제니퍼집사님이 우리교회 금요기도회에 참석하셨습니다. 이분은 음식을 먹으면 계속 토하는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하고 식사를 할 때도 죽만 드셨는데 집회 참석한 후에 치료가 되었다고 전화를 받았습니다. 주님은 지금도 병든 자를 치료하시는 분입니다.
2) 믿음을 보시는 분입니다(20절).
주님께서 중풍병자를 치료하시기 전에 중풍병자와 그를 데리고 온 사람들의 믿음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치료해 주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능력을 보면 주님을 믿겠다고 하지만 주님은 믿음을 보이면 능력을 행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구원을 위한 모든 조건을 만들어놓으셨습니다. 자신이 대신 형벌을 당하시므로 죄사함의 모든 조건을 충족시키셨습니다. 그러나 그 사실을 믿을 때 구원을 얻는 것처럼 병고침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은 채찍에 맞으심으로 우리의 건강을 위한 모든 조건을 갖춰놓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어야만 치유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믿음을 보고 싶어 하시는 분입니다. 아벨이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드린 것이 믿음 때문이듯 우리의 일상생활과 영적생활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려면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히 11:6에 보면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나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에게는 주님이 믿음을 보신다는 것이 감사한 일입니다. 주님이 우리의 행위를 보시고, 우리의 공로를 보신다면 구원 받을 사람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롬3:23에 보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말씀하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행위나 공로를 보지 않으시고 믿음을 보시는 것이 감사합니다.
3)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으신 분입니다(20, 24절).
중풍병자와 친구들의 믿음을 보신 주님은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24절에서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죄 가운데서 구원하실 수 있는 이유는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죄 사함의 권세가 있습니다.
첫째는 주님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죄 사함의 권세가 있습니다. 딛2:13에서 사도 바울은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합니다. 주님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죄를 사할 권세가 있습니다.
둘째는 그분이 우리의 죄 값을 계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죄를 사할 권세가 있으신 것입니다. 엡 1:7에 보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해서 죄 값을 치르셨기에 죄를 사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4) 사람의 생각까지도 아시는 분입니다(22절).
21-24에 보면 주님은 주님의 말씀에 비판적인 사람들의 생각을 아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생각에 맞는 대답을 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생각까지도 아시는 분입니다.
가끔 안수기도를 하고나면 “목사님이 자기가 속으로 기도하는 것을 그대로 말했어요.”라는 신자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제가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제 속에 계시는 성령께서 기도 받는 사람의 마음의 생각까지 읽고 계시는데 제가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기도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생각을 잘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생각은 복과 저주를 불러오기 때문입니다. 마치 향기가 나는 꽃에는 벌과 나비가 모이고,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쓰레기 더미에는 파리가 모이는 것과 같습니다. 믿음의 생각, 긍적적인 생각, 축복의 생각을 하면 좋은 일이 일어나고, 불신앙의 생각, 부정적인 생각, 저주의 생각을 하면 나쁜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렘 6:19에 보면 “땅이여 들으라 내가 이 백성에게 재앙을 내리리니 이것이 그들의 생각의 결과라”고 말씀합니다. 실제로 욥이 고난을 당한 배경을 보면 그의 부정적인 생각의 결과이기도 한 것입니다. 욥 3:25에 보면 욥이 “나의 두려워하는 그것이 내게 임하고 내가 무서워하는 그것이 내 몸에 미쳤구나.”라고 말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면서도 늘 마음으로 혹시 저주를 받지 않을까 생각하고 근심하고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그 결과 그에게 자신이 두려워하고 무서워하던 저주가 임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단의 역사도 생각을 통해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요 13:2에 보면 마귀가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님을 팔려는 생각을 넣었습니다. 만약 가룟 유다가 그 생각을 물리쳤다면 그는 마귀에게 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가룟 유다가 마귀가 준 생각을 받아드리니 마귀가 가룟 유다의 마음에 들어가게 된 것이고 결국 예수님을 은 30에 팔아먹게 된 것입니다.
고후 10:4, 5에 보면 사람의 생각은 영적 전쟁터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생각을 지키면 승리할 수 있고 생각을 빼앗기면 패배하는 것입니다. 우리 속에 죄악의 생각이 들어올 때 그 생각과 반대 되는 말씀으로 채우려고 해야 합니다. 만약 죄악 된 생각을 받아드리고 묵상하기 시작하면 그 생각이 우리의 감정과 의지를 지배하게 될 것이고 결국은 그 죄악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생각을 지키는 방법은 하나님과 교제하고, 필요한 것이 있다면 하나님께 구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빌 4:6-7에 보면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말씀합니다.
주님은 생각까지 아시는 분입니다.
5) 말씀에 능력이 있으신 분입니다(24, 25절).
24절과 25절을 보면 주님께서 중풍병자에게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시자 그 사람이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일어나서 침상을 가지고 자기 집으로 돌아갑니다.
중풍병자에게는 일어설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러니 친구들에게 들려서 온 것 아닙니까! 그런데 예수님이 말씀하시니 자기의 능력으로 할 수 없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중풍병자의 능력으로 할 수 없는 일을 명하셨고 중풍병자는 그 말씀의 능력으로 자기의 능력으로 할 수 없는 일을 하게 된 것입니다.
말씀은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말씀으로 창조하셨습니다. “빛이 있으라”하시니 빛이 있었고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습니다. 구약의 믿음의 사람들은 주님의 능력의 말씀을 들었고 그 말씀에 순종할 때 말씀대로 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모세가 이끌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물을 얻지 못해서 고생할 때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반석 앞에 세우시고 지팡이로 치라고 하셨습니다. 모세가 그 말씀대로 순종해서 반석을 치자 반석에서 물이 솟아났던 일이 있습니다. 99세 된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돌이 지나면 자식을 볼 것이라고 말씀하시자 그대로 되었습니다. 100세 된 아브라함과 90세 된 사라가 자식을 보았습니다.
말씀의 능력을 믿으십시오. 그러면 말씀대로 될 것입니다. 히4:2에 보면 “그들과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들은 바 그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아니함이라”고 말씀합니다. 같은 복음을 들었는데 어떤 사람에게는 유익하고 어떤 사람에게는 유익하지 않은 이유는 믿음으로 반응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다보면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응답하십니다. 말씀으로 성령의 음성과 감동으로 그리고 말씀 사역자의 가르침을 통해서 응답하십니다. 이럴 때 말씀의 능력을 믿고 순종해 보세요.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의 능력이 있으신 분입니다.
2. 중풍병자의 친구들은 어떤 장점을 가지고 있는가?
좋은 친구를 둔다는 것은 큰 축복입니다. 국민일보에 실린 이야기입니다. 한 어머니가 혹독한 사춘기를 맞은 딸로 인해 엄청난 마음의 고통을 겪고 있었습니다. 딸은 술 마시고 담배피우며 놀기 좋아하는 세 명의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점점 어머니의 품에서 멀어져갔습니다. 어머니가 충고를 할 때마다 딸은 장담을 했습니다. “어머니, 걱정하지마세요. 저는 물들지 않아요.” 그러나 딸은 점점 친구들을 닮아가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어머니는 은쟁반에 썩은 사과 하나와 싱싱한 사과 세 개를 담아 가져왔습니다. 딸이 말했습니다. “썩은 사과 하나가 다른 사과를 모두 썩게 할 텐데요?” 어머니의 대답. “무슨 소리냐. 싱싱한 사과 세 개가 썩은 사과 하나를 오히려 싱싱하게 만들 수도 있는데…” 일주일 후 어머니가 은쟁반의 사과를 딸에게 보여주었습니다. 사과는 모두 썩어 있었습니다. 그때 어머니가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딸아, 친구도 이 사과와 같단다.” 그때서야 딸은 어머니에게 용서를 빌었습니다.
잠 27:17에 보면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 같이 사람이 그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중풍병자는 좋은 친구를 두었기 때문에 주님 앞에 나올 수 있었습니다. 우리들도 주변에 중풍병자처럼 영적으로 중풍병에 걸린 사람들에게 좋은 친구가 되어야 합니다.
1) 사랑입니다.
중풍병자의 친구들은 중풍병자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그들은 고통당하는 친구를 그냥 내버려둘 수 없었습니다.
사랑은 관심입니다. 친구들의 사랑은 관심으로 나타났습니다. 친구들이 중풍병자를 사랑했기 때문에 그의 고통에 관심을 가졌고 그 관심이 그를 주님 앞으로 데리고 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은 배려입니다. 주님은 사랑이 많으신 분인 것은 여러 가지로 증명이 됩니다. 그 가운데 한 가지는 배려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쉽습니다. 그 이유는 듣는 사람들을 고려했기 때문입니다. 배려입니다. 주님의 수준에서 말씀하셨다면 알아들을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주님은 사람들이 주님처럼 될 수 없는 것을 아셨기에 주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찾아오신 것입니다. 배려입니다. 레 19:9, 10에 보면 곡식을 거둘 때에 밭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라고 하십니다. 포도원에서 열매를 딸 때도 다 따지 말고 떨어진 열매도 줍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 이유는 가난한 사람들이 남겨진 것으로 먹고 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배려입니다. 중풍병자의 친구들은 중풍병자가 스스로 주님 앞에 갈 수 없었기에 자기들이 수고를 한 것입니다. 침상에 누이고 침상을 메고 주님 앞에 나아갔던 것입니다. 사랑의 배려인 것입니다.
가장 큰 사랑은 주님을 만나게 해주는 것입니다. 중풍병자에게 먹을 것을 주고 입을 것을 주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주님을 만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중풍병자는 주님을 만남으로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보다 더 큰 사랑은 없습니다. 물에 빠진 사람에게 사랑은 빵을 주는 것이나 옷을 주는 것이 아니라 물에서 건져주는 것입니다. 내가 건질 수 없으면 구조대에게 연락해서 구조하게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 문제를 가진 모든 사람들에게 가장 큰 사랑은 구원자 되시는 주님을 만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증거 하는 것은 가장 큰 사랑입니다. 주님을 몰라 영적인 중풍병에 걸린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만큼 큰 사랑은 없습니다.
2) 믿음입니다.
20절에 보니 주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셨다고 합니다. 믿음은 나타나는 것입니다. 보여 지는 것입니다. 구체적인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들의 믿음의 특징을 세 가지로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첫째는 올바른 믿음입니다. 주님을 만나면 치료될 수 있다는 믿음입니다. 주님은 치료자라는 믿음을 자긴 것입니다. 그들은 주님을 치료자로 믿었습니다. 주님만 만나면 친구가 치료 될 것을 믿었기에 친구를 주님께로 데리고 왔던 것입니다.
둘째는 행동하는 믿음입니다. 그들은 주님이 치료자라는 사실을 믿고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친구를 데리고 주님 앞으로 나아갔던 것입니다. 야고보 장로가 말한 대로 살아있는 믿음은 행함이 있는 믿음입니다. 그들이 행동하지 않았다면 믿음의 역사를 체험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행동하지 않았다면 중풍병자는 고쳐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셋째, 적극적이고 모험적인 믿음입니다. 호텔에 가보면 어쩌다가 문이 잠길 수 있습니다. 그러면 프론트에 이야기하면 마스터키로 열어줍니다. 마스터키만 있으면 호텔 안에 있는 모든 방을 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십니까? 신령한 의미에서 마스터키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마스터키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외쳤습니다. “네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중풍병자의 친구들은 주님은 모든 문제의 마스터키라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주님 앞에 적극적으로 나아갑니다. 주님이 계신 곳에 갔지만 사람들 때문에 주님에게 접근할 수가 없자 포기하지 않고 방법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지붕을 뜯어낼 생각을 합니다. 그들은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벗기고 병자를 침상째 무리 가운데로 예수 앞에 달아 내립니다.
우리들도 중풍병자의 친구들처럼 문제를 가지고 주님 앞에 나옵니다. 그들이 자신들의 믿음을 보였던 것처럼 주님은 우리들의 믿음을 주님 앞에 보여드리기를 원하십니다. 구체적인 행동을 통해서 믿음을 보이십시오. 때로는 모험을 통해서 믿음을 보여야 합니다.
3) 집중력입니다.
저는 중풍병자의 친구들이 보인 집중력을 우리가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중풍병자를 주님 앞에 데리고 가는 일에 집중했습니다. 그들의 집중력은 장애물을 극복하는 적극적이고 모험적인 행동까지 하게 했습니다.
집중할 때 기적이 일어납니다. 기도에 집중해야 기도의 응답을 받습니다. 찬송할 때도 집중해야 찬송 중에 임하신 주님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말씀에 집중해야 말씀이 내 속에 파고 들어오고 말씀이 믿어지고 말씀이 실제가 됩니다.
세계적인 사람들은 한 가지에 집중하므로 세계적인 사람이 된 것입니다. 박지성 선수는 축구에 집중한 것이고, 박세리 선수는 골프에 집중한 것입니다. 그들은 다른 것을 좇아가지 않았습니다. 오직 축구, 오직 골프에 집중한 것입니다.
전세계 위인들과 성인들, 소위 성공했던 사람들의 공통점을 찾으려 몸부림했던 스티븐 코비는 가장 기본적인 공통점 3가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① 소중한 일에 집중하며 살더라. ② 비전과 목적에 맞게끔 살더라. ③ 환경에 끌려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주도적으로 살아간다고 요약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세계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은 가장 소중한 일이라고 여기는 비전을 받았고 그 비전에 집중해서 살았다는 것입니다. 비전에 집중하다보니 환경에 끌려 다니는 것이 아니라 환경을 변화시켰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비전에 집중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부르신 부르심에 집중해야 합니다. 어떤 장애물이 있더라도 비전에 집중하면 방법이 보이고 길이 열리게 됩니다. 세계 수많은 교회를 컨설팅한 피트 드라커라는 사람은 이 땅에 있는 많은 목회자들과 성도들에게 소중한 충고를 하고 있습니다. “많은 일을 올바로 하려 하지 말고 올바른 일을 하라.” 즉 내게 주신 사명, 우리 교회에 주신 비전에 집중하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위대한 사도로서 기독교계에 엄청난 영향력을 끼친 이유는 그가 자신의 사명에 집중했기 때문입니다. 행 20:24에 보면 그는 이런 고백을 합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제가 기도하는 기도 제목 중에 하나는 우리 성도들 가운데 신 28:1에서 말씀하신대로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난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의 약속입니다. 주님은 그 약속을 이루실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에게 이루실까요?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사람입니다. 둘째는 주님이 주신 비전에 집중하는 사람입니다.
신앙생활은 베드로가 바다 위를 걸었던 것과 같습니다. 세상의 바다에서 수많은 유혹의 파도가 있지만 우리의 인생의 목적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베드로가 바다에 빠지지 않고 바다 위를 걸을 때는 주님에게 그의 시선이 집중되었을 때입니다. 그가 시선을 주님에게서 떼고 파도를 보자 두려움이 밀려왔고 결국 바다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우리도 집중된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주님이 주신 비전을 바라보십시오. 어떤 파도가 밀려와도 집중하면 극복할 수 있습니다. 길이 보일 것입니다.
출처/ 마경훈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