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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풍병자 이야기 (마가복음 2:1-12)
중풍병자 사건은 단순한 병 고침의 문제가 아닌 주님이 왜 세상에 오셨는가, 주님이 왜 병을 고치시는가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건입니다. 중풍병자 치유 사건을 둘러싼 중요한 이야기들을 나누겠습니다.
한 사람을 위한 네 사람
이 사건을 접하면서 가장 도전 받는 말씀이 이것입니다.
여기 나오는 중풍병자는 혼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중증이었습니다. 그를 예수님께 데려온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3절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새”
많은 사람들이 그 환자를 보고 예수님께 가보라고 나을 수 있다고 말해주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떤 도움도 되지 않았습니다. 여기 나오는 네 사람은 자기들의 힘으로 예수님께 데려다 주었고 그것이 그 사람의 인생을 바꿔 놓았습니다.
한 사람을 위해 네 사람이 애쓰고 있습니다. 한 사람뿐이면 어려웠을 것입니다. 다행이 마음이 맞는 네 사람이 있었습니다. 네 사람이 힘을 합치니 한 삶을 침상에 누인 채로 예수님께 데려올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기적인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 가까이 좋은 자리 선점하고 비켜주지 않는 이기적인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중풍병자를 메고 온 사람들은 예수님께 가까이 가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에게 요청하지 않았겠습니까? ‘조금 비켜달라고’ 그러나 아무도 길을 터주지 않습니다. 예수 믿으면서 아주 이기적인 신앙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네 사람이기 때문에 함께 지붕으로 올라가 주님 앞에 그 사람을 내려놓을 수 있었습니다.
1장에서도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약한 사람을 도와주는 것을 보았습니다. 베드로의 장모 문제를 사람들이 예수님께 말씀드렸습니다. 많은 병자들과 귀신 들린 사람들을 데리고 나온 사람들이 있습니다.
한사람이 네 사람을 살리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네 사람이 한 사람을 살리는 것은 훨씬 쉽습니다.
주님은 이런 네 사람을 귀하게 보셨습니다.
5절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함께 마음을 모아 누군가는 돕는 그 믿음을 귀하게 보셨습니다.
우리는 혼자서도 많은 사람을 돕고 많은 사람이 덕 보게 하는 삶을 꿈꿔야 합니다.
한 사람이 여러 사람을 잘되게 하고 여러 사람을 돕기도 하는데 여러 사람이 한 사람을 돕는 것은 조금만 힘쓰면 가능한 일 아니겠습니까?
오늘날의 사회복지나 사회 보장 제도는 대부분 그런 것입니다.
여럿이 한 사람을 잘 살게 하는 것입니다. 여럿이 힘을 모아 한 사람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돕는 것이 보장 제도입니다.
우리 성도들의 헌금이 모아져서 큰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터키나 일본에 선교사를 파송하고 또 여러 지역에 선교사들을 협력하고 농촌교회를 우리교회처럼 섬기고 주변의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 장학금을 줄 수 있는 것도 우리 성도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아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북한을 돕기 위한 헌금을 새해 첫 주에 하면서 시작했습니다. 성도들의 함께 마음 모음으로 말미암아 어려운 우리 형제들에게 삶의 희망을 줄 수 있었습니다.
이 네 사람이 힘을 합치므로 한 사람을 안전하게 주님 앞으로 인도했습니다.
이 네 사람의 공동목표는 예수님 만나게 하는 일입니다. 한 중풍병자에게 예수님 만나도록 하기 위해 애쓴 것입니다. 우리는 함께 마음모아 누군가를 예수님 만나게 해야 합니다.
중풍병을 고쳐주지는 못해도 도와주고 격려해서 주님 앞에 나오게 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함께 짊어지는 일은 우리 몫입니다.
주님의 관심거리
중풍병자를 통해 주님이 주시는 정말 중요한 가르침이 이 부분입니다. 주님은 관심은 육체, 외적인 것에만 있지 않았습니다.
중풍병자를 보시고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5절,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죄의 문제입니다. 주님은 속, 마음, 내면을 더욱 중요하게 보았습니다.
중풍병자의 문제는 외적인 것이지만 주님은 그 사람의 마음에 숨은 죄의 문제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셨습니다.
죄문제가 해결되면 우리 인생은 여러 가지 문제를 가지고 있더라도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 인생의 문제가 있을 때마다 먼저 영적 점검을 하십시오.
내 영성에 문제는 없는가, 기도 생활을 제대로 하는가, 헌금생활은 어떤지, 또 섬김은 어떤지? 영적인 문제가 삶에 문제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우리들은 육적인 건강, 물질적 부, 그래서 사업이 잘되고 좋은 직장에 들어가는 것에 관심을 기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영적인 건강, 마음의 부요함을 더욱 중요하게 보십니다.
예수님이 누구십니까?
이 중병자 치유 사건을 통해 주님이 의도하신 것은 주님의 정체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단순하게 병을 고치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10절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바로 인간의 깊은 속의 문제를 해결하실 분입니다.
죄를 해결하신 주님이 중병병자의 현실적 문제도 해결해 주셨습니다.
11,12절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그가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가거늘”
죄사함이 중요합니다. 영적 치유가 먼저입니다. 이것이 되면 다른 문제는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두려움, 염려, 걱정도 다 이런 죄의 문제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마음도 치유되면 우리는 이기적으로 살지 않고 누군가를 도와주고 일으켜주고 생명을 주며 살 수 있습니다.
마음이 편치 않은 자들
6,7절 “어떤 서기관들이 거기 앉아서 마음에 생각하기를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신성 모독이로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좋은 일, 선한 일, 놀라운 일이지만 트집거리로 삼기를 좋아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좋은 일을 좋은 일로 보면 좋을텐데 그 좋은 것에서 문제거리를 사명감 가지고 찾아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거룩한 척 하고 자기는 못하니까 남이 하는 것 마음에 안드는 그런 사람입니다.
뒤에서 수근 거립니다. 공연히 트집 잡습니다. 사단은 이렇게 훼방하고 싶은 것입니다.
귀가 뒤로 열려있지 않는 것은 뒤에서 하는 소리는 관심 두지 말라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앞에서 하는 말에는 관심을 두라는 것입니다. 정당하게 앞에서 말하고 앞에서 할 수 있는 말만 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앞에서도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면 하지 않는 것이 가장 바람직합니다.
아울러 속으로만 해야 하는 말이라면 하지 말아야 합니다.
12절의 일반 군중들은 반응이 다릅니다. “저희가 다 놀라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며 가로되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하더라”
이렇게 영광돌리면 될 일을 시비거리를 만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논쟁은 3장 6절까지 계속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3:6에서 “예수를 어떻게 죽일까 의논”하는 일로 발전합니다.
중풍병자를 고쳐주시는 주님의 치유사건 주변에 이렇게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우리들의 속을 아름답게 가꾸고 우리의 작은 힘을 모아 많은 사람들을 일으키는 복된 삶을 살면 좋겠습니다.
출처/ 김관선목사 설교 중에서
중풍병자 사건은 단순한 병 고침의 문제가 아닌 주님이 왜 세상에 오셨는가, 주님이 왜 병을 고치시는가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건입니다. 중풍병자 치유 사건을 둘러싼 중요한 이야기들을 나누겠습니다.
한 사람을 위한 네 사람
이 사건을 접하면서 가장 도전 받는 말씀이 이것입니다.
여기 나오는 중풍병자는 혼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중증이었습니다. 그를 예수님께 데려온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3절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새”
많은 사람들이 그 환자를 보고 예수님께 가보라고 나을 수 있다고 말해주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떤 도움도 되지 않았습니다. 여기 나오는 네 사람은 자기들의 힘으로 예수님께 데려다 주었고 그것이 그 사람의 인생을 바꿔 놓았습니다.
한 사람을 위해 네 사람이 애쓰고 있습니다. 한 사람뿐이면 어려웠을 것입니다. 다행이 마음이 맞는 네 사람이 있었습니다. 네 사람이 힘을 합치니 한 삶을 침상에 누인 채로 예수님께 데려올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기적인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 가까이 좋은 자리 선점하고 비켜주지 않는 이기적인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중풍병자를 메고 온 사람들은 예수님께 가까이 가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에게 요청하지 않았겠습니까? ‘조금 비켜달라고’ 그러나 아무도 길을 터주지 않습니다. 예수 믿으면서 아주 이기적인 신앙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네 사람이기 때문에 함께 지붕으로 올라가 주님 앞에 그 사람을 내려놓을 수 있었습니다.
1장에서도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약한 사람을 도와주는 것을 보았습니다. 베드로의 장모 문제를 사람들이 예수님께 말씀드렸습니다. 많은 병자들과 귀신 들린 사람들을 데리고 나온 사람들이 있습니다.
한사람이 네 사람을 살리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네 사람이 한 사람을 살리는 것은 훨씬 쉽습니다.
주님은 이런 네 사람을 귀하게 보셨습니다.
5절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함께 마음을 모아 누군가는 돕는 그 믿음을 귀하게 보셨습니다.
우리는 혼자서도 많은 사람을 돕고 많은 사람이 덕 보게 하는 삶을 꿈꿔야 합니다.
한 사람이 여러 사람을 잘되게 하고 여러 사람을 돕기도 하는데 여러 사람이 한 사람을 돕는 것은 조금만 힘쓰면 가능한 일 아니겠습니까?
오늘날의 사회복지나 사회 보장 제도는 대부분 그런 것입니다.
여럿이 한 사람을 잘 살게 하는 것입니다. 여럿이 힘을 모아 한 사람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돕는 것이 보장 제도입니다.
우리 성도들의 헌금이 모아져서 큰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터키나 일본에 선교사를 파송하고 또 여러 지역에 선교사들을 협력하고 농촌교회를 우리교회처럼 섬기고 주변의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 장학금을 줄 수 있는 것도 우리 성도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아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북한을 돕기 위한 헌금을 새해 첫 주에 하면서 시작했습니다. 성도들의 함께 마음 모음으로 말미암아 어려운 우리 형제들에게 삶의 희망을 줄 수 있었습니다.
이 네 사람이 힘을 합치므로 한 사람을 안전하게 주님 앞으로 인도했습니다.
이 네 사람의 공동목표는 예수님 만나게 하는 일입니다. 한 중풍병자에게 예수님 만나도록 하기 위해 애쓴 것입니다. 우리는 함께 마음모아 누군가를 예수님 만나게 해야 합니다.
중풍병을 고쳐주지는 못해도 도와주고 격려해서 주님 앞에 나오게 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함께 짊어지는 일은 우리 몫입니다.
주님의 관심거리
중풍병자를 통해 주님이 주시는 정말 중요한 가르침이 이 부분입니다. 주님은 관심은 육체, 외적인 것에만 있지 않았습니다.
중풍병자를 보시고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5절,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죄의 문제입니다. 주님은 속, 마음, 내면을 더욱 중요하게 보았습니다.
중풍병자의 문제는 외적인 것이지만 주님은 그 사람의 마음에 숨은 죄의 문제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셨습니다.
죄문제가 해결되면 우리 인생은 여러 가지 문제를 가지고 있더라도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 인생의 문제가 있을 때마다 먼저 영적 점검을 하십시오.
내 영성에 문제는 없는가, 기도 생활을 제대로 하는가, 헌금생활은 어떤지, 또 섬김은 어떤지? 영적인 문제가 삶에 문제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우리들은 육적인 건강, 물질적 부, 그래서 사업이 잘되고 좋은 직장에 들어가는 것에 관심을 기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영적인 건강, 마음의 부요함을 더욱 중요하게 보십니다.
예수님이 누구십니까?
이 중병자 치유 사건을 통해 주님이 의도하신 것은 주님의 정체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단순하게 병을 고치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10절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바로 인간의 깊은 속의 문제를 해결하실 분입니다.
죄를 해결하신 주님이 중병병자의 현실적 문제도 해결해 주셨습니다.
11,12절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그가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가거늘”
죄사함이 중요합니다. 영적 치유가 먼저입니다. 이것이 되면 다른 문제는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두려움, 염려, 걱정도 다 이런 죄의 문제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마음도 치유되면 우리는 이기적으로 살지 않고 누군가를 도와주고 일으켜주고 생명을 주며 살 수 있습니다.
마음이 편치 않은 자들
6,7절 “어떤 서기관들이 거기 앉아서 마음에 생각하기를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신성 모독이로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좋은 일, 선한 일, 놀라운 일이지만 트집거리로 삼기를 좋아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좋은 일을 좋은 일로 보면 좋을텐데 그 좋은 것에서 문제거리를 사명감 가지고 찾아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거룩한 척 하고 자기는 못하니까 남이 하는 것 마음에 안드는 그런 사람입니다.
뒤에서 수근 거립니다. 공연히 트집 잡습니다. 사단은 이렇게 훼방하고 싶은 것입니다.
귀가 뒤로 열려있지 않는 것은 뒤에서 하는 소리는 관심 두지 말라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앞에서 하는 말에는 관심을 두라는 것입니다. 정당하게 앞에서 말하고 앞에서 할 수 있는 말만 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앞에서도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면 하지 않는 것이 가장 바람직합니다.
아울러 속으로만 해야 하는 말이라면 하지 말아야 합니다.
12절의 일반 군중들은 반응이 다릅니다. “저희가 다 놀라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며 가로되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하더라”
이렇게 영광돌리면 될 일을 시비거리를 만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논쟁은 3장 6절까지 계속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3:6에서 “예수를 어떻게 죽일까 의논”하는 일로 발전합니다.
중풍병자를 고쳐주시는 주님의 치유사건 주변에 이렇게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우리들의 속을 아름답게 가꾸고 우리의 작은 힘을 모아 많은 사람들을 일으키는 복된 삶을 살면 좋겠습니다.
출처/ 김관선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