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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과 영적침체 (왕상 19:4-8)
여러분,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것이 무엇일까요? 어떤 분은 눈꺼풀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무거운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요? 저는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것은 사람의 마음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마음이 한 번 가라앉으면 자기 마음인데도 어떻게 할 수 없을 때가 많습니다. 그 생각에 머물러 있지 않고 다른 마음을 먹으려고 다짐하고 몸부림쳐도 도무지 마음이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마음이 그토록 무겁게 느껴지는 것이 신기하기도 하지만 이것이 현실입니다.
마음이 가라앉아서 움직이지 않은 상태를 ‘우울증’이라고 합니다. 이때의 마음은 숲에 나무가 울창하게 우거진 것처럼 슬픈 마음이 마음속에 우거져서 좀처럼 틈을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영적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의미를 알지 못하며 모든 관계가 단절됩니다. 우리는 이러한 마음의 우울 상태를 다른 말로 영적 침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 중에 ‘엘리야’는 참으로 멋지고 통쾌한 사역을 하였습니다. 그가 기도할 때에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역사가 있었습니다.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고 역전에 역전을 거듭하면서 참으로 신나는 사역을 하였습니다. 불가능이 없었습니다. 거대한 국가, 민족, 왕을 상대로 싸워서 이깁니다. 갈멜산에서는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과 대결해서 승리하고 우상숭배하는 모든 선지자를 죽이기도 했습니다. 그가 기도했더니 비가 오지 않았고 3년 육개월 간이나 내리지 않던 비가 내리기도 했습니다. 그런 역사를 그는 경험하며 살았습니다. 그에게는 승리의 감격이 있었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엘리야는 로뎀나무 아래에서 죽음을 구하는 사람으로 나타납니다. 분명히 갈멜산에서 보았던 예전의 엘리야가 아닙니다. 지금은 로뎀나무 아래에서 지칠대로 지쳐서 차라리 자신을 데려가 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있습니다. 가장 나약한 모습으로 밑바닥을 헤메며 아무 소망이 없어 보이는 보잘 것 없는 사람이 지금 엘리야의 모습입니다.
야고보는 엘리야를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라고 표현합니다. 평범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로뎀나무 아래의 엘리야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희망과 의욕에 넘쳐서 열심히 살고 있다가 어느날 뜻하지 않게 인생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차라리 죽고 싶은 생각을 하며 주저앉을 때가 있습니다. 모든 것이 의미 없는 것으로 여겨질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저 역시 그럴 때가 있습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죽어가는 영혼이 살아나고 믿지 않던 영혼이 주님을 만나게 될 때 주님께 내 삶을 다 드려도 아깝지 않다고 고백을 하며 삶의 보람과 의미를 느낍니다. 그러나 속상한 일이 생기고 나의 노력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마음이 들기 시작하면 금방 로뎀나무 아래의 엘리야처럼 낙심하고 침체되어서 모든 것을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들 때가 있습니다.
자신의 모습을 이해하기 위해서 엘리야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언제까지 이런 상태로 머물러 있을 수는 없습니다. 엘리야가 새롭게 극복하며 더 놀라운 삶을 살았던 것처럼 우리도 그러한 희망을 노래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엘리야가 이러한 상태에 이르게 된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어디에서 그에게 이러한 어려움이 시작되었으며 그가 어떻게 극복할 수 있었는지 알아가는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첫째, 엘리야가 지치고 낙담하며 그리고 절망한 것은 육체의 피곤과 탈진 때문입니다.
엘리야는 매우 바쁘고 힘든 시간을 보냈습니다. 승리하기 어려운 싸움들, 불가능해 보이는 일들, 우상숭배자들을 사형하는 일들, 3년 6개월간이나 내리지 않던 비를 기도를 해서 내리게 한일 등 여러 가지 일들을 합니다. 그는 간절히 기도한 후 저 멀리서 손바닥만한 구름을 보고 비가 올 것을 압니다. 그리고 아합왕에게 빨리 내려가 있으라고 통보를 한 후 더욱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비가 오기 시작하자 마차를 타고 먼저 출발한 아합왕 보다 먼저 이스르엘까지 25Km를 달려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하루 만에 이루어진 일이였습니다. 우상숭배자들과의 대결을 상상해 보십시다. 아합과 백성들의 지지를 받는 사람들이 산에 즐비해 있습니다. 엘리야는 혼자입니다. 그가 드리는 이 기도에 자신의 생명이 달려 있었습니다. 또한 이스라엘의 운명도 달려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에 대한 신앙의 고백도 달려 있었습니다. 너무 엄청난 큰 대결 앞에 그는 온 정성을 다해서 기도 했을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심령을 다해서 간절히 기도해 보신 적이 있으시다면 아실 것입니다. 몸속에 진액이 빠져나갑니다. 머리가 핑 돌면서 다음에 해야 할 것이 생각나지 않습니다. 엘리야는 그렇게 머리가 두 무릎사이에 들어갈 정도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의 기도는 비를 내리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25Km를 단숨에 달려갑니다. 상당히 육체적으로 무리했던 것입니다. 저는 엘리야가 이스르엘까지 단숨에 달려갔다는 것에 대해 묵상할 때 하나님이 손으로 떠서 직접 그를 이동시켜 준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것이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의 기도가 응답이 되고 그것이 기쁨과 감격이 될 때 힘이 넘치는 것을 느낍니다. 잠을 못자도 피곤치 않습니다. 달려가도 지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세벨이 우상숭배자인 자기의 선지자를 죽인 일로 인해서 엘리야를 죽이겠다고 위협을 하자 엘리야는 북쪽 이스라엘에서 남쪽 유다지역 최남단인 브엘세바까지 150km를 도망해 왔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갈 힘이 없어서 머문 곳이 바로 로뎀나무 아래였습니다.
사람에게 힘을 주는 말이 있습니다. 용기를 주고 격려 하는 말이 있는 반면에 어떤 말은 사람을 죽이기도 합니다. 사람을 낙담하고 절망하게 하는 말이 있습니다. 엘리야가 들은 이세벨의 말이 그런 말이었습니다. 힘이 빠져나간 상태에서 그는 150Km를 걸어서 도망합니다. 그리고 그는 오늘 본문에서처럼 더 이상 갈 힘이 없어서 로뎀나무 아래에서 지쳐 누워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자신을 데려가 달라고 간구하기까지 합니다.
육체를 가진 인간은 아무리 영적으로 엄청난 일을 하고 놀라운 역사를 일으킨다고 해도 과로하면 지칩니다. 그러다가 중병에 걸립니다. 육체가 탈진할 때 인간은 무엇이든지 더 이상 생각하거나 반응하기 싫어집니다. 자신의 모든 환경과 여건들이 힘들게 합니다. 그래서 영적으로도 심각한 영향을 받습니다. 창세기에 보면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 흙으로 사람을 만드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었다고 합니다. 나눌 수 없는 한 인격체가 탄생한 것입니다. 그래서 육체와 영혼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정신적인 고통과 좌절은 육체에 영향을 줍니다. 반대로 육체의 피로와 탈진은 정신에 영향을 미쳐서 아무런 일도 못하게 합니다.
우리 육체가 탈진하고 마음이 힘들어지면 자신의 스케쥴과 일의 양을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특히 우울증이 있는 사람들은 햇볕을 많이 쬐야 합니다. 노력해서라도 창을 박차고 나가서 햇볕을 쬐야 합니다. 그리고 기름기 없는 살코기 단백질을 자주 드셔야 합니다. 가능하면 사람을 만나면서 쉼을 가져야 회복할 수 있습니다. 일의 연속선상에서 긴장하며 사는 사람은 쉽게 탈진하고 지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을 아신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천사를 보내서 숯불에 구운 떡과 물 한 병을 주었습니다. 엘리야가 그것을 먹고 나자 힘을 내고 정신을 차려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땅으로 갈 수 있었습니다. 그가 먹어야 산다는 것을 하나님이 아셨습니다.
광야에 모인 5000명은 예수님의 말씀을 사모하여 모였지만 하루 종일 굶었습니다. 지치고 힘들어서 주님의 말씀을 들을 수도 없고, 또 돌아갈 힘도 없는 육체를 가진 존재임을 주님은 아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물고기 2마리와 보리떡 5개로 5000명을 먹이시고 그들의 육체가 힘을 얻고 만족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우리 마음이 너무 지치고 힘들 때 음식을 잘 먹고 쉼을 갖는다는 것이 얼마나 필요한지 모릅니다. 사역에 있어서도 예전에는 무조건 열심히 하라고 했지만 이제는 7년마다 안식년 제도를 두어서 쉬게 하며 재충전할 수 있는 시간을 줍니다. 바로 쉼이 없는 사역은 영적인 안정과 감각을 무너뜨릴 수 있고, 또한 육체의 피곤이 사역에 효율성을 잃게 하는 원인이 됨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시간과 건강관리에 유의하며 살피는 것이 중요 합니다
둘째, 엘리야가 침체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가 자기중심적인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4절을 보면 그는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라고 고백합니다. 또한 10절 말씀을 보면 호렙산에서 임재하신 하나님 앞에서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이 특심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라고 고백하며 14절에도 같은 내용으로 고백합니다.
엘리야는 어떤 생각을 했습니까? 그의 사역은 죽은 사람도 살려내는 사역이었습니다. 기도하면 응답이 되었습니다. 기도했을 때 내리던 비도 그쳤습니다. 다시 기도하니 안내리던 비가 내렸습니다. 850명의 바알의 선지자가 난리를 치며 백성들과 왕이 전적으로 후원해도 불이 내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하나님께 기도했을때 제단에 물을 부어도 불이 내려와서 제단을 다 태우게 합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이 되게 하는 놀라운 역사를 그는 일으켰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엘리야는 ‘정말 나는 이전의 열조보다도 새로운 일을 하고 있구나! 그들보다 위대하고 놀라운 일을 하고 있구나!’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는 세상의 어떤 것보다 놀라운 일을 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변할 것을 기대합니다. 이런 놀라운 일을 지켜본 아합왕과 이 민족이 변할 것을 기대합니다.
그러나 엘리야 자신이 원하는 대로 그 일들이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이 회개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오고 아합과 이세벨도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변하여 이제는 이 나라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나라가 될 것이라는 그 기대가 완전히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자기가 생각하기에 위대한 일을 하였는데 결과적으로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것입니다. 자신이 노력하고 기도해도 되지 않음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정말 최선을 다하고 정성을 들였던 일이 좌절되었을 때 겪는 어려움은 이루 말 할 수 없습니다.
엘리야처럼 최선을 다했던 일이 실패하고, 변화를 기대했는데 변하지 않을 때 낙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것을 참고 견디며 그 목적을 이루기위해서 달려왔는데 모든것이 그의 뜻대로 되지 않자 그는 좌절한 것입니다. 탈진하게 된 것입니다. 혹 여러분들 중에도 사업하다 여러 가지 이유로 좌절하신 적 있으십니까? 혹시 가정에서 자신은 최선을 다했는데, 아내 혹은 남편이 자신과 정반대의 생각하며 모든 노력을 물거품이 되게 하였습니까? 혹은 인간관계에서 그랬습니까? 기대한 사람이 변하지 않을 때, 또 자녀들에게 많은 기대를 하고 투자하고 노력했지만 생각만큼 나타나지 않은 결과들로 좌절한 경험이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외관이 화려하고 좋아보여도 침몰하는 타이타닉호에는 타지 않으려는 생각을 하고 있 습니다. 저도 우리교회가 한국교회를 변화하게 할 만한 교회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모든 것을 걸었습니다. 3년 6개월 동안 말하자면 올인을 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이전 경험으로 하는 말들이 제 마음속에 남아 있을 때가 있습니다. 무슨 이야기를 들어도 물리적인 충동을 일으키지 않기 위해 그냥 삼키려고 하고 새기기려고 노력합니다. 그리고 기도했습니다. ‘우리 교회의 비전과 꿈을 성도들과 함께 나눌 수 있는 일이 일어났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중직자들이 진정으로 헌신하는 모습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말입니다. 많은 변화도 생겼습니다. 그러나 정반대의 모습들, 변하지 않은 모습들을 바라볼 때면 한 순간에 모든 의미를 잃을 때도 있습니다. 정말 제가 무엇을 해야 할지 알지 못하는 상태가 지속되기도 합니다. 그만큼 저는 올인을 했습니다. 건강이 상할 정도로 최선을 다했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가 기대하는 것과 정반대의 모습일 때에는 얼마나 낙심하는지 모릅니다.
오늘 엘리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저 역시 이 말씀을 읽고 깨달은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의 성공을 위해서 엘리야를 부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엘리야가 기대하는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그를 부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엘리야를 부르신 목적은 ‘그가 얼마나 충성하느냐’를 기대하신 것입니다. 어떤 환경에 처하든지 해결하는 것은 하나님의 몫입니다. 단지 하나님이 명하시는 일을 엘리야가 충성된 마음으로 변함없이 성실하게 감당하는지를 보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아마 그가 원했던 데로 모든 것이 변화했다면 어쩌면 그는 자신이 기도한데로 모든 것이 변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 하나님께서 이 백성들을 향해 나아가시는 모습을 인정하기 보다는 자신의 기도로 모든 것을 이루었다는 자만심이 그를 사로잡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런 모습을 엘리야에게 깨우쳐 주시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붙들어 주심을 보게 합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목적과 하나님이 일하시는 때와 방법이 있다는 것을 다시금 엘리야는 고백합니다. 그리고 주님 앞에 헌신하는 모습을 우리는 봅니다. 낙심했던 여러분, 절망했던 여러분, 최선을 다해 돌보았던 자녀와 사업장이 실망을 주며 어려움을 당할 때 여러분은 힘들고 지쳐서 탈진될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러한 상황속에서 우리가 얼마나 주님 앞에 성실하게 섬기고 사랑하는가를 보십니다. 오늘 내가 알지 못하는 계획과 목적을 가지고 하나님의 일을 추진해 가시는 하나님을 다시금 신뢰하고 우리의 신앙고백을 드려야 합니다. 그래야 영적인 깊은 침체에서 빠져나올 수 있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엘리야를 위해서 천사를 보내십니다. 너무나 지쳐있는 엘리야에게 찾아가셔서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먹으라고 합니다. 조금 먹다 지쳐서 잠든 엘리야에게 다시 다가가서 그를 어루만지셨습니다. 어루만졌다는 것의 원래의 뜻은 어루만지면서 치유와 회복이 일어나게 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그로 하여금 다시 먹게 하고 하나님을 위한 새로운 사역이 준비된 곳으로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오늘 이 말씀을 함께 나누면서 주의 천사와 성령이 여러분의 마음을 어루만지셔서, 지치고 힘든 여러분의 마음이 다시 용기를 얻으시기 바랍니다. 힘을 얻어서 하나님의 선하심과 자신의 계획이 아닌 하나님의 계획을 바라보고 주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하며 걸어 나갈 때 여러분은 영적인 침체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셋째, 엘리야가 영적 침체에 빠지게 된 이유는 그가 상황중심적인 판단을 했기 때문입니다.
3절에 보니 ‘엘리야가 이 형편을 보고’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자기가 기대했던 현상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기를 죽이려는 세력이 더 기세등등한 것을 보고 그는 도망하기 시작합니다. 백성들 사이에서 쿠테타가 일어나서 왕이 바뀌든지 이세벨이 죽든지 해야 할 것 같은데 이세벨과 아합은 도무지 변하지 않습니다. 아합이 변하지 않았던 이유를 그 자신의 말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엘리야가 무엇을 했다”라고 말하지만 “하나님이 무엇을 했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의 시각 자체가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았음을 나타냅니다. 아합과 이세벨이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지 않고 오히려 엘리야를 죽이겠다고 다가오니 엘리야는 절망하며 그 현실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지금까지 엘리야는 현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인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죽어있는 아이를 보고서도 하나님이 역사하면 살아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기도했던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내리던 비도 오지 않고 오지 않던 비도 올 수 있음을 아는 확신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현실적인 현상을 보고 판단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 현실 너머에 있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자신의 환경을 바꾸어 왔던 그런 사역자였습니다. 그런 그가 하나님의 모습을 찾으려 하지 않고 자기에게 닥친 현실만을 생각한 것입니다.
사실 이세벨이 엘리야를 죽이려고 했다면 벌써 죽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루만 더 있다 죽이겠다고 말하는 것은 이세벨도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그것을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하지 않고 자기에게 들려오는 소리만을 듣고 행합니다. 내가 어려움을 당하면 자신의 연약함만을 묵상하게 됩니다. 주위의 환경과 문제들만 계속해서 생각합니다. 거기에 머물러 있으면 우리는 절망하고 맙니다.
가데스바네아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분노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열명의 정탐꾼이 “그 땅은 참 좋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지만 우리는 그 땅 사람들에 비하면 메꾸기와 같다.”라고 말하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절망적인 이야기를 듣고 낙담한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 절망적인 현상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놀라운 약속과 은혜가 있음을 알았습니다. 우리가 우리자신의 문제에만 집착해 있고 그 환경만 바라볼 때 하나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현실에 갇혀있는 하나님을 묵상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그 현실을 새롭게 바꾸어 가시는 그 능력의 하나님을 묵상하고 계십니까? 능력의 하나님을 바라볼 때에 하나님께서 놀라운 역사를 이루어 주십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시선을 집중했을 때에는 계속해서 물위를 걸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는 뱃사람입니다. 물결의 무서움을 체험한 사람입니다. 문득 출렁이는 물결을 바라보고 자기 자신이 물 위를 걷고 있다는 것을 믿지 못할 때 그는 물에 빠지고 맙니다. 여기까지 오실 때 여러분은 자신의 힘으로 오셨습니까? 하나님의 인도하심입니까? 여러분이 원하는 대로 살아왔다면 이 자리에 있을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정말 패망할 수밖에 없는 나를 구속하시고 하나님께서 이 자리로 인도하심을 바라보면서 현실 너머에 있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엘리야에게 이 일 이후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난 것을 우리는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동안 그가 일만 하였다면 이 일 후에는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사람을 세우라고 맡기는 것을 봅니다. 우리가 사역을 할 때에 일을 하는 것은 누구라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사람을 세우는 일입니다. 그 일은 아무나 할 수 없습니다. 그 일은 사랑할 수 있는 사람, 그 영혼이 귀함을 알고 아름다움을 아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깊은 침체와 어려움을 체험한 사람에게 사람을 맡겨주십니다.
베드로에게 주님은 언제 사람을 맡겨주셨습니까? 그는 끝까지 주님을 따르겠다는 자신 있는 고백을 하루아침에 저주하는 자기 자신을 보면서 깊은 절망감에 빠져들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지만 자신은 예전에 하던 일터로 돌아갑니다. “나는 안돼, 나는 이 정도밖에 안돼.”라고 낙담한 중에 주님은 그를 찾아가셨습니다. “베드로야 내 양을 먹이라”라고 주님은말씀 하십니다. 자기를 아는 사람, 자기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아는 사람, 자기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인정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사람을 맡기는 것입니다.
영혼의 소중함을 잃은 채로 사역을 한다면 교회는 메말라 버릴 것입니다. 한 생명 한 생명이 얼마나 소중합니까? 저도 일을 완벽하게 하려는 사람입니다. 굉장히 섬세합니다. 일을 하면 시작부터 끝까지 완벽하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제가 자녀와 아버지를 잃어 버렸을때 영혼과 생명의 소중함을 경험하면서 “생명이 귀한 줄을 알겠느냐!”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아마 그런 체험이 없었으면 지금의 제가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할 수도 없고 여러분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일어서도록 도와주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일로써 뭐든지 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셨던 그 아픔과 고통을 통해 한 사람 한 사람이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알았기에, 또한 주님께서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고 계심을 깨달았기에 주님을 전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깊은 침체에 있습니까? 여러분에게 새로운 일을 맡기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세나무 이야기’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는 올리브나무, 떡갈나무, 소나무가 등장합니다. 이 나무들에게는 꿈이 있었습니다. 올리브나무는 아름다운 보석상자가 되어 정교한 보석을 담겠다는 꿈을 키워 나갔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나무꾼이 와서 그 나무를 베어서 동물들에게 밥을 먹이는 죽통, 구유라고 하는 것을 만들었습니다. 떡갈나무는 큰 배의 재목이 되어서 임금님을 모시고 다니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나무 또한 어느 한 나무꾼에게 잘려서 조그만 낚시 배가 되었습니다. 또 높은 산 위에 있던 소나무는 고고하고 청청한 모습을 통해서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증거 하겠다고 생각하였지만 어느 날 벼락에 맞아서 꺽이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이 주워서 쓰레기통에 버렸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많이 흘렀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셨습니다. 누울 곳이 없었던 아기 예수는 바로 보석상자가 되고 싶어 했던 그 올리브 나무로 만든 말구유에 눕게 되었습니다. 올리브나무는 보석보다 더 귀한 메시야를 품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얼마 뒤에 예수님께서는 많은 사람들에게 말씀을 선포하셨습니다. 조그만 낚시 배에 올라서 말입니다. 그 낚시 배는 임금님을 태우고 싶다던 그 떡갈나무로 만든 것이었습니다. 세상의 왕이 아니라 만왕의 왕이 되시는 그 주님을 모시는 일에 쓰임을 받았던 것입니다. 소나무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로마병정들은 이 소나무를 쓰레기더미에서 발견하여 그것으로 예수님을 매달 십자가를 만듭니다. 이 십자가는 수많은 사람에게 주님의 구원을 증거 하도록 쓰임을 받습니다.
위 이야기의 요점은 ‘주님은 우리가 생각하고 계획한 것 보다 훨씬 더 귀하고 놀라운 것을 우리를 위해 예비하고 계신다’ 는 것입니다. 우리를 향한 주님의 계획은 한 번도 변함없으시고 지금도 여전히 우리를 인도하고 계심을 깨달아야 합니다. 깊은 침체와 절망가운데 있습니까? 건강을 먼저 체크해 보십시오. 시간 사용에 대해서도 확인해 보십시오. 그리고 내가 기대한 대로 되지 않았다고 낙심하지 마시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다시 고백하기 바랍니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새로운 사실들을 깨닫게 하시고 더 귀한 일을 맡기시려고 섭리하심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엘리야의 침체, 즉 로뎀나무 아래에서의 그 절망과 좌절에서 벗어나시기 바랍니다. 다시금 주님이 주시는 힘을 얻어 새로운 그 사역의 현장, 호렙산 그 동굴을 향해서 오늘도 묵묵히 걸어가는 여러분이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김형준 목사 설교 중에서
여러분,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것이 무엇일까요? 어떤 분은 눈꺼풀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무거운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요? 저는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것은 사람의 마음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마음이 한 번 가라앉으면 자기 마음인데도 어떻게 할 수 없을 때가 많습니다. 그 생각에 머물러 있지 않고 다른 마음을 먹으려고 다짐하고 몸부림쳐도 도무지 마음이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마음이 그토록 무겁게 느껴지는 것이 신기하기도 하지만 이것이 현실입니다.
마음이 가라앉아서 움직이지 않은 상태를 ‘우울증’이라고 합니다. 이때의 마음은 숲에 나무가 울창하게 우거진 것처럼 슬픈 마음이 마음속에 우거져서 좀처럼 틈을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영적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의미를 알지 못하며 모든 관계가 단절됩니다. 우리는 이러한 마음의 우울 상태를 다른 말로 영적 침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 중에 ‘엘리야’는 참으로 멋지고 통쾌한 사역을 하였습니다. 그가 기도할 때에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역사가 있었습니다.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고 역전에 역전을 거듭하면서 참으로 신나는 사역을 하였습니다. 불가능이 없었습니다. 거대한 국가, 민족, 왕을 상대로 싸워서 이깁니다. 갈멜산에서는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과 대결해서 승리하고 우상숭배하는 모든 선지자를 죽이기도 했습니다. 그가 기도했더니 비가 오지 않았고 3년 육개월 간이나 내리지 않던 비가 내리기도 했습니다. 그런 역사를 그는 경험하며 살았습니다. 그에게는 승리의 감격이 있었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엘리야는 로뎀나무 아래에서 죽음을 구하는 사람으로 나타납니다. 분명히 갈멜산에서 보았던 예전의 엘리야가 아닙니다. 지금은 로뎀나무 아래에서 지칠대로 지쳐서 차라리 자신을 데려가 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있습니다. 가장 나약한 모습으로 밑바닥을 헤메며 아무 소망이 없어 보이는 보잘 것 없는 사람이 지금 엘리야의 모습입니다.
야고보는 엘리야를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라고 표현합니다. 평범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로뎀나무 아래의 엘리야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희망과 의욕에 넘쳐서 열심히 살고 있다가 어느날 뜻하지 않게 인생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차라리 죽고 싶은 생각을 하며 주저앉을 때가 있습니다. 모든 것이 의미 없는 것으로 여겨질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저 역시 그럴 때가 있습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죽어가는 영혼이 살아나고 믿지 않던 영혼이 주님을 만나게 될 때 주님께 내 삶을 다 드려도 아깝지 않다고 고백을 하며 삶의 보람과 의미를 느낍니다. 그러나 속상한 일이 생기고 나의 노력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마음이 들기 시작하면 금방 로뎀나무 아래의 엘리야처럼 낙심하고 침체되어서 모든 것을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들 때가 있습니다.
자신의 모습을 이해하기 위해서 엘리야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언제까지 이런 상태로 머물러 있을 수는 없습니다. 엘리야가 새롭게 극복하며 더 놀라운 삶을 살았던 것처럼 우리도 그러한 희망을 노래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엘리야가 이러한 상태에 이르게 된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어디에서 그에게 이러한 어려움이 시작되었으며 그가 어떻게 극복할 수 있었는지 알아가는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첫째, 엘리야가 지치고 낙담하며 그리고 절망한 것은 육체의 피곤과 탈진 때문입니다.
엘리야는 매우 바쁘고 힘든 시간을 보냈습니다. 승리하기 어려운 싸움들, 불가능해 보이는 일들, 우상숭배자들을 사형하는 일들, 3년 6개월간이나 내리지 않던 비를 기도를 해서 내리게 한일 등 여러 가지 일들을 합니다. 그는 간절히 기도한 후 저 멀리서 손바닥만한 구름을 보고 비가 올 것을 압니다. 그리고 아합왕에게 빨리 내려가 있으라고 통보를 한 후 더욱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비가 오기 시작하자 마차를 타고 먼저 출발한 아합왕 보다 먼저 이스르엘까지 25Km를 달려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하루 만에 이루어진 일이였습니다. 우상숭배자들과의 대결을 상상해 보십시다. 아합과 백성들의 지지를 받는 사람들이 산에 즐비해 있습니다. 엘리야는 혼자입니다. 그가 드리는 이 기도에 자신의 생명이 달려 있었습니다. 또한 이스라엘의 운명도 달려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에 대한 신앙의 고백도 달려 있었습니다. 너무 엄청난 큰 대결 앞에 그는 온 정성을 다해서 기도 했을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심령을 다해서 간절히 기도해 보신 적이 있으시다면 아실 것입니다. 몸속에 진액이 빠져나갑니다. 머리가 핑 돌면서 다음에 해야 할 것이 생각나지 않습니다. 엘리야는 그렇게 머리가 두 무릎사이에 들어갈 정도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의 기도는 비를 내리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25Km를 단숨에 달려갑니다. 상당히 육체적으로 무리했던 것입니다. 저는 엘리야가 이스르엘까지 단숨에 달려갔다는 것에 대해 묵상할 때 하나님이 손으로 떠서 직접 그를 이동시켜 준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것이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의 기도가 응답이 되고 그것이 기쁨과 감격이 될 때 힘이 넘치는 것을 느낍니다. 잠을 못자도 피곤치 않습니다. 달려가도 지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세벨이 우상숭배자인 자기의 선지자를 죽인 일로 인해서 엘리야를 죽이겠다고 위협을 하자 엘리야는 북쪽 이스라엘에서 남쪽 유다지역 최남단인 브엘세바까지 150km를 도망해 왔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갈 힘이 없어서 머문 곳이 바로 로뎀나무 아래였습니다.
사람에게 힘을 주는 말이 있습니다. 용기를 주고 격려 하는 말이 있는 반면에 어떤 말은 사람을 죽이기도 합니다. 사람을 낙담하고 절망하게 하는 말이 있습니다. 엘리야가 들은 이세벨의 말이 그런 말이었습니다. 힘이 빠져나간 상태에서 그는 150Km를 걸어서 도망합니다. 그리고 그는 오늘 본문에서처럼 더 이상 갈 힘이 없어서 로뎀나무 아래에서 지쳐 누워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자신을 데려가 달라고 간구하기까지 합니다.
육체를 가진 인간은 아무리 영적으로 엄청난 일을 하고 놀라운 역사를 일으킨다고 해도 과로하면 지칩니다. 그러다가 중병에 걸립니다. 육체가 탈진할 때 인간은 무엇이든지 더 이상 생각하거나 반응하기 싫어집니다. 자신의 모든 환경과 여건들이 힘들게 합니다. 그래서 영적으로도 심각한 영향을 받습니다. 창세기에 보면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 흙으로 사람을 만드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었다고 합니다. 나눌 수 없는 한 인격체가 탄생한 것입니다. 그래서 육체와 영혼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정신적인 고통과 좌절은 육체에 영향을 줍니다. 반대로 육체의 피로와 탈진은 정신에 영향을 미쳐서 아무런 일도 못하게 합니다.
우리 육체가 탈진하고 마음이 힘들어지면 자신의 스케쥴과 일의 양을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특히 우울증이 있는 사람들은 햇볕을 많이 쬐야 합니다. 노력해서라도 창을 박차고 나가서 햇볕을 쬐야 합니다. 그리고 기름기 없는 살코기 단백질을 자주 드셔야 합니다. 가능하면 사람을 만나면서 쉼을 가져야 회복할 수 있습니다. 일의 연속선상에서 긴장하며 사는 사람은 쉽게 탈진하고 지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을 아신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천사를 보내서 숯불에 구운 떡과 물 한 병을 주었습니다. 엘리야가 그것을 먹고 나자 힘을 내고 정신을 차려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땅으로 갈 수 있었습니다. 그가 먹어야 산다는 것을 하나님이 아셨습니다.
광야에 모인 5000명은 예수님의 말씀을 사모하여 모였지만 하루 종일 굶었습니다. 지치고 힘들어서 주님의 말씀을 들을 수도 없고, 또 돌아갈 힘도 없는 육체를 가진 존재임을 주님은 아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물고기 2마리와 보리떡 5개로 5000명을 먹이시고 그들의 육체가 힘을 얻고 만족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우리 마음이 너무 지치고 힘들 때 음식을 잘 먹고 쉼을 갖는다는 것이 얼마나 필요한지 모릅니다. 사역에 있어서도 예전에는 무조건 열심히 하라고 했지만 이제는 7년마다 안식년 제도를 두어서 쉬게 하며 재충전할 수 있는 시간을 줍니다. 바로 쉼이 없는 사역은 영적인 안정과 감각을 무너뜨릴 수 있고, 또한 육체의 피곤이 사역에 효율성을 잃게 하는 원인이 됨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시간과 건강관리에 유의하며 살피는 것이 중요 합니다
둘째, 엘리야가 침체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가 자기중심적인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4절을 보면 그는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라고 고백합니다. 또한 10절 말씀을 보면 호렙산에서 임재하신 하나님 앞에서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이 특심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라고 고백하며 14절에도 같은 내용으로 고백합니다.
엘리야는 어떤 생각을 했습니까? 그의 사역은 죽은 사람도 살려내는 사역이었습니다. 기도하면 응답이 되었습니다. 기도했을 때 내리던 비도 그쳤습니다. 다시 기도하니 안내리던 비가 내렸습니다. 850명의 바알의 선지자가 난리를 치며 백성들과 왕이 전적으로 후원해도 불이 내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하나님께 기도했을때 제단에 물을 부어도 불이 내려와서 제단을 다 태우게 합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이 되게 하는 놀라운 역사를 그는 일으켰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엘리야는 ‘정말 나는 이전의 열조보다도 새로운 일을 하고 있구나! 그들보다 위대하고 놀라운 일을 하고 있구나!’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는 세상의 어떤 것보다 놀라운 일을 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변할 것을 기대합니다. 이런 놀라운 일을 지켜본 아합왕과 이 민족이 변할 것을 기대합니다.
그러나 엘리야 자신이 원하는 대로 그 일들이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이 회개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오고 아합과 이세벨도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변하여 이제는 이 나라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나라가 될 것이라는 그 기대가 완전히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자기가 생각하기에 위대한 일을 하였는데 결과적으로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것입니다. 자신이 노력하고 기도해도 되지 않음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정말 최선을 다하고 정성을 들였던 일이 좌절되었을 때 겪는 어려움은 이루 말 할 수 없습니다.
엘리야처럼 최선을 다했던 일이 실패하고, 변화를 기대했는데 변하지 않을 때 낙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것을 참고 견디며 그 목적을 이루기위해서 달려왔는데 모든것이 그의 뜻대로 되지 않자 그는 좌절한 것입니다. 탈진하게 된 것입니다. 혹 여러분들 중에도 사업하다 여러 가지 이유로 좌절하신 적 있으십니까? 혹시 가정에서 자신은 최선을 다했는데, 아내 혹은 남편이 자신과 정반대의 생각하며 모든 노력을 물거품이 되게 하였습니까? 혹은 인간관계에서 그랬습니까? 기대한 사람이 변하지 않을 때, 또 자녀들에게 많은 기대를 하고 투자하고 노력했지만 생각만큼 나타나지 않은 결과들로 좌절한 경험이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외관이 화려하고 좋아보여도 침몰하는 타이타닉호에는 타지 않으려는 생각을 하고 있 습니다. 저도 우리교회가 한국교회를 변화하게 할 만한 교회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모든 것을 걸었습니다. 3년 6개월 동안 말하자면 올인을 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이전 경험으로 하는 말들이 제 마음속에 남아 있을 때가 있습니다. 무슨 이야기를 들어도 물리적인 충동을 일으키지 않기 위해 그냥 삼키려고 하고 새기기려고 노력합니다. 그리고 기도했습니다. ‘우리 교회의 비전과 꿈을 성도들과 함께 나눌 수 있는 일이 일어났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중직자들이 진정으로 헌신하는 모습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말입니다. 많은 변화도 생겼습니다. 그러나 정반대의 모습들, 변하지 않은 모습들을 바라볼 때면 한 순간에 모든 의미를 잃을 때도 있습니다. 정말 제가 무엇을 해야 할지 알지 못하는 상태가 지속되기도 합니다. 그만큼 저는 올인을 했습니다. 건강이 상할 정도로 최선을 다했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가 기대하는 것과 정반대의 모습일 때에는 얼마나 낙심하는지 모릅니다.
오늘 엘리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저 역시 이 말씀을 읽고 깨달은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의 성공을 위해서 엘리야를 부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엘리야가 기대하는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그를 부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엘리야를 부르신 목적은 ‘그가 얼마나 충성하느냐’를 기대하신 것입니다. 어떤 환경에 처하든지 해결하는 것은 하나님의 몫입니다. 단지 하나님이 명하시는 일을 엘리야가 충성된 마음으로 변함없이 성실하게 감당하는지를 보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아마 그가 원했던 데로 모든 것이 변화했다면 어쩌면 그는 자신이 기도한데로 모든 것이 변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 하나님께서 이 백성들을 향해 나아가시는 모습을 인정하기 보다는 자신의 기도로 모든 것을 이루었다는 자만심이 그를 사로잡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런 모습을 엘리야에게 깨우쳐 주시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붙들어 주심을 보게 합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목적과 하나님이 일하시는 때와 방법이 있다는 것을 다시금 엘리야는 고백합니다. 그리고 주님 앞에 헌신하는 모습을 우리는 봅니다. 낙심했던 여러분, 절망했던 여러분, 최선을 다해 돌보았던 자녀와 사업장이 실망을 주며 어려움을 당할 때 여러분은 힘들고 지쳐서 탈진될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러한 상황속에서 우리가 얼마나 주님 앞에 성실하게 섬기고 사랑하는가를 보십니다. 오늘 내가 알지 못하는 계획과 목적을 가지고 하나님의 일을 추진해 가시는 하나님을 다시금 신뢰하고 우리의 신앙고백을 드려야 합니다. 그래야 영적인 깊은 침체에서 빠져나올 수 있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엘리야를 위해서 천사를 보내십니다. 너무나 지쳐있는 엘리야에게 찾아가셔서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먹으라고 합니다. 조금 먹다 지쳐서 잠든 엘리야에게 다시 다가가서 그를 어루만지셨습니다. 어루만졌다는 것의 원래의 뜻은 어루만지면서 치유와 회복이 일어나게 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그로 하여금 다시 먹게 하고 하나님을 위한 새로운 사역이 준비된 곳으로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오늘 이 말씀을 함께 나누면서 주의 천사와 성령이 여러분의 마음을 어루만지셔서, 지치고 힘든 여러분의 마음이 다시 용기를 얻으시기 바랍니다. 힘을 얻어서 하나님의 선하심과 자신의 계획이 아닌 하나님의 계획을 바라보고 주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하며 걸어 나갈 때 여러분은 영적인 침체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셋째, 엘리야가 영적 침체에 빠지게 된 이유는 그가 상황중심적인 판단을 했기 때문입니다.
3절에 보니 ‘엘리야가 이 형편을 보고’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자기가 기대했던 현상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기를 죽이려는 세력이 더 기세등등한 것을 보고 그는 도망하기 시작합니다. 백성들 사이에서 쿠테타가 일어나서 왕이 바뀌든지 이세벨이 죽든지 해야 할 것 같은데 이세벨과 아합은 도무지 변하지 않습니다. 아합이 변하지 않았던 이유를 그 자신의 말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엘리야가 무엇을 했다”라고 말하지만 “하나님이 무엇을 했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의 시각 자체가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았음을 나타냅니다. 아합과 이세벨이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지 않고 오히려 엘리야를 죽이겠다고 다가오니 엘리야는 절망하며 그 현실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지금까지 엘리야는 현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인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죽어있는 아이를 보고서도 하나님이 역사하면 살아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기도했던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내리던 비도 오지 않고 오지 않던 비도 올 수 있음을 아는 확신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현실적인 현상을 보고 판단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 현실 너머에 있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자신의 환경을 바꾸어 왔던 그런 사역자였습니다. 그런 그가 하나님의 모습을 찾으려 하지 않고 자기에게 닥친 현실만을 생각한 것입니다.
사실 이세벨이 엘리야를 죽이려고 했다면 벌써 죽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루만 더 있다 죽이겠다고 말하는 것은 이세벨도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그것을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하지 않고 자기에게 들려오는 소리만을 듣고 행합니다. 내가 어려움을 당하면 자신의 연약함만을 묵상하게 됩니다. 주위의 환경과 문제들만 계속해서 생각합니다. 거기에 머물러 있으면 우리는 절망하고 맙니다.
가데스바네아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분노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열명의 정탐꾼이 “그 땅은 참 좋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지만 우리는 그 땅 사람들에 비하면 메꾸기와 같다.”라고 말하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절망적인 이야기를 듣고 낙담한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 절망적인 현상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놀라운 약속과 은혜가 있음을 알았습니다. 우리가 우리자신의 문제에만 집착해 있고 그 환경만 바라볼 때 하나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현실에 갇혀있는 하나님을 묵상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그 현실을 새롭게 바꾸어 가시는 그 능력의 하나님을 묵상하고 계십니까? 능력의 하나님을 바라볼 때에 하나님께서 놀라운 역사를 이루어 주십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시선을 집중했을 때에는 계속해서 물위를 걸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는 뱃사람입니다. 물결의 무서움을 체험한 사람입니다. 문득 출렁이는 물결을 바라보고 자기 자신이 물 위를 걷고 있다는 것을 믿지 못할 때 그는 물에 빠지고 맙니다. 여기까지 오실 때 여러분은 자신의 힘으로 오셨습니까? 하나님의 인도하심입니까? 여러분이 원하는 대로 살아왔다면 이 자리에 있을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정말 패망할 수밖에 없는 나를 구속하시고 하나님께서 이 자리로 인도하심을 바라보면서 현실 너머에 있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엘리야에게 이 일 이후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난 것을 우리는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동안 그가 일만 하였다면 이 일 후에는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사람을 세우라고 맡기는 것을 봅니다. 우리가 사역을 할 때에 일을 하는 것은 누구라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사람을 세우는 일입니다. 그 일은 아무나 할 수 없습니다. 그 일은 사랑할 수 있는 사람, 그 영혼이 귀함을 알고 아름다움을 아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깊은 침체와 어려움을 체험한 사람에게 사람을 맡겨주십니다.
베드로에게 주님은 언제 사람을 맡겨주셨습니까? 그는 끝까지 주님을 따르겠다는 자신 있는 고백을 하루아침에 저주하는 자기 자신을 보면서 깊은 절망감에 빠져들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지만 자신은 예전에 하던 일터로 돌아갑니다. “나는 안돼, 나는 이 정도밖에 안돼.”라고 낙담한 중에 주님은 그를 찾아가셨습니다. “베드로야 내 양을 먹이라”라고 주님은말씀 하십니다. 자기를 아는 사람, 자기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아는 사람, 자기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인정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사람을 맡기는 것입니다.
영혼의 소중함을 잃은 채로 사역을 한다면 교회는 메말라 버릴 것입니다. 한 생명 한 생명이 얼마나 소중합니까? 저도 일을 완벽하게 하려는 사람입니다. 굉장히 섬세합니다. 일을 하면 시작부터 끝까지 완벽하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제가 자녀와 아버지를 잃어 버렸을때 영혼과 생명의 소중함을 경험하면서 “생명이 귀한 줄을 알겠느냐!”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아마 그런 체험이 없었으면 지금의 제가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할 수도 없고 여러분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일어서도록 도와주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일로써 뭐든지 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셨던 그 아픔과 고통을 통해 한 사람 한 사람이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알았기에, 또한 주님께서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고 계심을 깨달았기에 주님을 전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깊은 침체에 있습니까? 여러분에게 새로운 일을 맡기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세나무 이야기’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는 올리브나무, 떡갈나무, 소나무가 등장합니다. 이 나무들에게는 꿈이 있었습니다. 올리브나무는 아름다운 보석상자가 되어 정교한 보석을 담겠다는 꿈을 키워 나갔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나무꾼이 와서 그 나무를 베어서 동물들에게 밥을 먹이는 죽통, 구유라고 하는 것을 만들었습니다. 떡갈나무는 큰 배의 재목이 되어서 임금님을 모시고 다니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나무 또한 어느 한 나무꾼에게 잘려서 조그만 낚시 배가 되었습니다. 또 높은 산 위에 있던 소나무는 고고하고 청청한 모습을 통해서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증거 하겠다고 생각하였지만 어느 날 벼락에 맞아서 꺽이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이 주워서 쓰레기통에 버렸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많이 흘렀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셨습니다. 누울 곳이 없었던 아기 예수는 바로 보석상자가 되고 싶어 했던 그 올리브 나무로 만든 말구유에 눕게 되었습니다. 올리브나무는 보석보다 더 귀한 메시야를 품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얼마 뒤에 예수님께서는 많은 사람들에게 말씀을 선포하셨습니다. 조그만 낚시 배에 올라서 말입니다. 그 낚시 배는 임금님을 태우고 싶다던 그 떡갈나무로 만든 것이었습니다. 세상의 왕이 아니라 만왕의 왕이 되시는 그 주님을 모시는 일에 쓰임을 받았던 것입니다. 소나무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로마병정들은 이 소나무를 쓰레기더미에서 발견하여 그것으로 예수님을 매달 십자가를 만듭니다. 이 십자가는 수많은 사람에게 주님의 구원을 증거 하도록 쓰임을 받습니다.
위 이야기의 요점은 ‘주님은 우리가 생각하고 계획한 것 보다 훨씬 더 귀하고 놀라운 것을 우리를 위해 예비하고 계신다’ 는 것입니다. 우리를 향한 주님의 계획은 한 번도 변함없으시고 지금도 여전히 우리를 인도하고 계심을 깨달아야 합니다. 깊은 침체와 절망가운데 있습니까? 건강을 먼저 체크해 보십시오. 시간 사용에 대해서도 확인해 보십시오. 그리고 내가 기대한 대로 되지 않았다고 낙심하지 마시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다시 고백하기 바랍니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새로운 사실들을 깨닫게 하시고 더 귀한 일을 맡기시려고 섭리하심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엘리야의 침체, 즉 로뎀나무 아래에서의 그 절망과 좌절에서 벗어나시기 바랍니다. 다시금 주님이 주시는 힘을 얻어 새로운 그 사역의 현장, 호렙산 그 동굴을 향해서 오늘도 묵묵히 걸어가는 여러분이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김형준 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