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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같은 회복을 ! (시편 126:1~6)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리실 때에 우리가 꿈꾸는 것 같았도다.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열방 중에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저희를 위하여 대사를 행하셨다 하였도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대사를 행하셨으니 우리는 기쁘도다. 여호와여 우리의 포로를 남방 시내들 같이 돌리소서.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시편 126:1~6.
오래 전 우리나라에 충격적 관습이 있었습니다. 늙어 가망이 없는 부모를 자식이 산 속에 혼자 내려놓고 돌아오는 고려장 관습입니다. 한 아들이 어머니를 업고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아들의 등에 기대있던 어머니가 “얘야, 어디 가냐?” 아들은 억장이 무너지지만 퉁명스럽게 “모르셔도 됩니다.” 산 속을 한참 들어가는데 어머니가 갑자기 나뭇가지를 하나씩 꺾기 시작하십니다. “어머니,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네가 나중에 혼자 내려올 때 길 잃어버릴까봐.” 아들은 어머니를 산에 두고 통곡하며 내려왔답니다. 이것이 어머니입니다. 이 어머니를 만드신 하나님이 또한 어머니와 같습니다.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어머니의 모습뿐 아니라 아버지의 모습도 지니고 계십니다.
꽤 오래 전에 TV에서 동물의 왕국을 보았습니다. 마침 그날 사자가 등장했어요. 수사자의 별명이 ‘백수(百獸)의 왕’이지만 알고 보니 놀고먹는 백수(白手)예요. 폼만 잡지 아무것도 안 합니다. 사냥도, 새끼양육도, 적과 싸움도 암사자가 합니다. 수사자는 누워 자다가 밥 가져오면 먹고 가끔 폼 잡고 한 바퀴 돕니다. 어느 날 사자 무리가 고기를 먹는데 하이에나 떼가 급습을 했습니다. 사자에게 하이에나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날은 너무 많아서 암사자들이 모두 나무 위로 도망쳤어요. 하이에나들이 남은 먹이를 먹고 있을 때 수사자가 나타났습니다. 그러더니 한 편의 중국 무술영화가 펼쳐집니다. 일당백으로 하이에나와 싸워 모두 죽이고 쫓아냈습니다. 그러자 그동안 수사자를 구박했던 암사자가 내려와 아양을 떱니다. “그동안 내가 미안했어.” 그리고 해설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의 왕국을 되찾았다.”(His kingdom has come back). 평소에는 어머니다운 모습이었으나 위기가 닥치면 아버지다운 모습을 보입니다. 어머니 사자가 못하는 것을 아버지 사자가 단숨에 판을 바꿔 버립니다.
우리가 고난당할 때 하나님의 두 가지 모습이 나타납니다. 어머니의 모습으로 고난 가운데 버틸 수 있게 해주시고 위로와 사랑으로 쓰다듬고 보살펴주십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아버지의 모습으로, 그 강한 힘으로 판을 뒤집고 단번에 해결하십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이런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열방 중에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저희를 위하여 대사를 행하셨다 하였도다.”(2절) 고3수험생을 둔 집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수험생들 무척 힘들지요. 어머니는 “어쩌냐. 현실이 이런 것을. 내가 해준 밥 먹고 힘내라.” 하면서 간식도 만들어주고 보약도 다려주고 쓰다듬어 주면서 “엄마가 있잖아. 힘내!” 합니다. 아버지가 보다 못해 “이건 우리 애만의 문제가 아니야. 우리나라 교육 자체가 틀렸어!”하고는 집을 박차고 나가 온 힘을 다해 교육제도를 바꿔버렸습니다. 그리고 집에 들어와서 “야! 이제 쉬어라. 내가 다 바꿨다.” 하십니다. 지금 이러한 하나님을 이야기합니다. “대사를 행하셨다.”
저는 오늘 시편 말씀을 묵상하면 소름이 끼칩니다.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옛 이웃나라 강대국 바벨론에게 침략을 당해 망합니다. 망해도 그렇게 망할 수가 없습니다. BC 587년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백성이 모두 노예로 끌려가게 됩니다. 이것을 ‘바벨론 유수’라고 합니다.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철저히 망할 뿐 아니라 영적으로, 종교적으로도 완전히 망합니다. 희망이 보이질 않습니다.
이 70여 년 동안 하나님께서는 두 가지 모습으로 역사하십니다. 하나는 어머니처럼 역사하십니다. “힘내라! 이 고난과 상처 가운데서 버티어라!”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주셨습니다. 긍휼을 베푸시고 사랑하시고 품어주십니다. 그런데 어느 날 꿈꾸지도 못했던 일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또 다른 모습, 아버지적 모습이 나타나 다 뒤집어 엎으셨습니다. 회복이 되었습니다. 그 날을 보면서 시편 기자는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리실 때에 우리가 꿈꾸는 것 같았도다.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열방 중에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저희를 위하여 대사를 행하셨다 하였도다.”(1,2절) 이것이 오늘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시는 회복의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정초에 여러분이 가장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표현은 각각 다르나 결론은 이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회복입니다. 과거로 완전히 돌아가지 못하더라도 반만 돌아갔으면 좋겠어요. 이 상처가 반만 나았으면 좋겠어요. 이 민족이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서 조금이라도 돌이킬 수 있으면 좋겠어요. 이 말씀을 듣기 전에 먼저 “아멘!”하실 일이 있습니다. “회복은 꼭 올 것입니다!” 이것을 믿기 바랍니다. 우리는 그동안 산전수전 많이 겪어서 돌이킬 수 없는 일을 너무나 많이 봤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생각합니다. ‘회복? 내가 인생을 살아 보니 그런 건 젊었을 때 얘기야. 갈라진 관계, 찢겨진 상처, 어쩔 수 없는 거지. 쏟아진 물이야. 그냥 이렇게 살다 가는 거야. 난리 좀 피우지마. 이게 인생이야!’ 그런데 성경은 꿈꾸는 것 같은 회복이 온다는 겁니다. 그동안 어머니 같은 하나님이 붙들어 오시다가 아버지 같은 하나님이 갑자기 일어나시면서 이것을 뒤집어엎는 날이 온다는 겁니다.
고난당할 때 두 가지의 영성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관리의 영성입니다. “이제 망했어, 죽었어. 돌이킬 수 없으니 더 이상 나빠지지 않게 여기서 관리하고 끝내자.” 두 번째는 회복의 영성입니다. “나는 포기 못합니다. 이 상처 그대로, 이 죄 그대로는 못 끝냅니다. 반드시 회복되어야 합니다.” 일반서적 부문에서도 최근 몇 년간 베스트셀러인 조엘 오스틴 목사님의 “긍정의 힘”을 읽어보셨을 것입니다. 참 좋은 책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이겁니다. “긍정적으로 살아라. 그러면 인생이 긍정적으로 풀린다. 비전을 키워라. 기대치를 높여라. 생각과 말을 조심해라. 인생은 생각을 따라 가게 되어있다. 행복하기를 선택하라.” 얼마나 좋은 말입니까! 그런데 저는 가끔 ‘누가 그거 할 줄 몰라서 안 하나? 너도 내 일 당해봐라. 그런 말이 나오는지. 어느 정도의 상황이라야 긍정적인 말이고 생각이고 하지!’ 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미 갈라지고 찢기고 엎질러진 상황에서 ‘잘 될 거야!’라는 생각은 위선입니다. 회복이 불가능할 때, 저와 여러분이 택하는 방법이 ‘유지’입니다. 회복은 오지 않습니다. 힘은 들지만 여기서 더 이상 나빠지지 않도록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붙들어 매는 것입니다.
얼마 전, 뉴스위크지가 커버스토리로 에너지 위기를 다뤘습니다. 특히 석유고갈이 큰 문제입니다. “지구를 구하는 7가지 방법”을 제시하였는데, 석유와 전기를 혼합한 하이브리드형 엔진을 쓰라는 것입니다. 단열재를 잘 사용해서 열 손실을 막고 백열전구 대신 형광등을 쓰며 공장 시스템을 정비해서 열 낭비를 줄이자는 등입니다. 결론은 이제 꿈 깨자는 것이지요. 이전까지는 지구를 구하는 방법으로 “석유가 고갈되기 전에 기적적인 대체연료를 개발하자”는 등 단칼에 해결하기를 꿈꿔왔어요. 이게 안 됩니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현실로 눈을 돌려서 남은 석유를 아껴 쓰기 위해 어떻게든 효율을 올려보자는 겁니다. 효율성의 철학으로 바뀌었습니다. 기적을 포기하고 관리에 들어갑니다.
의학도 마찬가지입니다. 얼마 전 KBS “생로병사”라는 프로그램에서 새로운 암 치료법을 소개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표적치료제를 개발했다고 합니다. 암 환자들에게 희망이 찾아오는 것 같아요. 이전의 암 연구는 기적적인 명약을 개발해서 단칼에 암세포를 박멸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으로 해결이 안 되자 바뀝니다. 완전히 죽일 수는 없고, 암 세포에도 혈액이 들어간다니까 혈액이 들어가는 혈관 생성 억제제를 개발해서 영양을 줄여 반이라도 죽이자는 것입니다. 암 세포와 공존하는 방법을 택합니다. 대단한 패러다임의 전환입니다. 현실에 눈을 돌려 공존하면서 조금씩 수명을 늘여가도록 합니다. 기적을 바라지 않고 유지합니다. 이것은 의학과 환경뿐 아니라 현대 문명의 트렌드입니다. 완전한 해결이 아니라,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효율을 최대한 높여보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인생철학으로 사십니까? 살아 보니까 인생이 장난이 아니에요. 직장문제, 가정문제, 병, 관계, 돌이킬 수 없는 일, 힘든 일이 너무 많아요. 한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할 수 없지. 포기할 것은 포기하고, 이 상처, 이 죄, 다 받아들이고 공존해. 최소한으로만 아파하고 최소한으로만 힘들 거야.” 그리고 이렇게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어머니 같은 하나님, 오늘도 나를 위로해주세요. 아파요.” 그런데 또 다른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 아직 포기 못해. 하나님, 이 상처 완전히 해결해주세요. 이 죄 깨끗이 씻어주세요. 이 팔자 완전히 고쳐주세요. 이 죽음 일으켜 주세요.” 그리고 이렇게 기도합니다. “아버지 같으신 하나님, 단칼에 해결해주세요!” 여러분은 어떻게 사십니까?
저는 13년 동안 미국에 있다가 3년 전 귀국했습니다. 지금은 많이 적응했지만 처음엔 ‘회복을 바라는 영성이 다 없어지고 유지의 영성만 남았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믿음과 관리가 섞여있습니다. ‘돌이킬 수 없는 것 더 이상 그러지 말자. 하나님, 저 잘 버티게 해 주세요. 잘 받아들이게 해 주세요.’ 이것을 신앙이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아닙니다! 회복은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십니다. 그 때만 온다면 여러분의 돌이킬 수 없는 모든 문제, 상처, 죄, 죽음도 돌이키실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전에 대 배신의 드라마가 펼쳐집니다. 제자들이 다 도망가고 믿었던 수제자 베드로는 저주까지 했습니다. 설마하며 따라가 봤더니 주님이 정말 돌아가셨습니다. 정말 돌이킬 수 없습니다. 베드로는 돌아와서 “주님, 회복시켜주세요. 내 죄도 씻어 주시고 주님도 부활해주세요”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21장 3절에서 기가 막힌 말을 합니다.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죽을 수도 없고, 돌이킬 수도 없고, 그래서 다시 이 인생을 유지하는 차원으로 돌아갑니다.
많은 현대의 크리스천들이 이러한 영성에 머물러 있습니다. 완전히 해결해주실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소식이 없고 갈수록 태산입니다. 더 곪았습니다. 이제는 신앙 없다고 뛰쳐나갈 수는 없고, 직책이 직책인지라 “열심히 살 거야! 최선을 다 할 거야!” 바꿔서 말하면 이것입니다. “고기 잡으러 갈 거야.” 이것을 신앙인 줄 압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돌이킬 수 없는, 여러분만이 아는 그 일을 경험한 기억을 가지고 계실 것입니다. 상처의 완전한 회복, 죄의 완전한 해결, 기구한 운명의 완전한 회복, 불가능합니다. 꿈꾸면 꿈꿀수록 더 힘듭니다. 그래서 살 길을 찾습니다. 기대를 버리고 그냥 유지, 관리하면서 비틀거리며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리고 또 기도합니다. “어머니 같은 하나님, 나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며, 오늘도 날 품어 주세요.” 대단한 신앙인 것 같지만, 이상합니다.
본문을 보세요. 놀라운 장면이 있습니다. 꿈같은 날이 왔습니다.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서 큰일을 일으키셨습니다. 돌이키셨습니다.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인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돌이키셨습니다. 원래대로 바꾸셨습니다. 영어성경은 이것을 bring back(다시 뒤로 돌렸다), turn(방향을 바꿨다), restore(회복시켰다)라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에게 오늘 이런 회복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인생은 그냥 버티는 것이 아닙니다. 완전한 혁신, 기적, 회복은 있습니다. 아버지는 이것을 하시고 그 날은 반드시 올 것임을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요한복음 5장을 보니, 예수께서 지나가시는데 38년 된 병자가 누워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묻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6절) 기가 막힌 말씀입니다. “너 지금 그것이 유지의 영성이냐, 회복의 영성이냐?” 오랫동안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있는 여러분에게도 이렇게 묻습니다. “아직도 회복하고자 하느냐? 그것이 가능하다고 믿느냐?” 하나님의 전능을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왜 돌이킬 수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오래 되었어요? 그게 어떻다는 것입니까? 불가능했어요? 그 불가능이 하나님 앞에 뭡니까? 왜 아직도 기대하지 않으십니까?
“주께서 일어나사 시온을 긍휼히 여기시리니 지금은 그를 긍휼히 여기실 때라 정한 기한이 옴이니이다”(시102:13) 그 때가 차면 하나님께서 회복시키신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아버지 같은 하나님께 매달리시기 바랍니다. 바다가 막히면 갈라주시면 됩니다. 병, 회복시키시면 됩니다. 상처, 새 살이 돋으면 됩니다. “열방 중에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저희를 위하여 대사를 행하셨다.” 이 날이 올 줄로 믿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호세아 6장에서 선지자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이런 날이 왔다는 겁니다. 그저 그 때 그 때 넘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어느 날 갑자기 판을 다 바꾸시고 우리를 돌이키십니다. 우리는 그 날을 찬양하기를 원합니다. 시온의 포로를 돌리실 때 꿈꾸는 것 같은 날, 여러분에게 임하실 줄 믿습니다.
두 번째 하나님의 회복은 그냥 과거로의 복귀만은 아닙니다. 더 큰 축복으로 업그레이드 됩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5절) 회복이 보이질 않으나 눈물로 씨를 뿌립니다. 회복이 되었을 때는 단을 가지고 돌아옵니다. 제 신학교 교수님의 말씀이 아직도 기억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회복시키시는 모습이 꼭 원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그냥 도는 것이 아니라 나선형(spiral)으로 전진하면서 도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회복입니다. 88올림픽 때의 한 장면을 모두 기억하실 것입니다. 화려한 행사가 펼쳐지던 중에 갑자기 조용해지면서 불이 꺼졌습니다. 한 줄기 조명이 비취는 가운데 한 아이가 굴렁쇠를 굴리며 나왔어요. 메시지입니다. “우리 민족은 굴렁쇠와 같다.” 이렇게 찢겼지만 원처럼 또 돌아갑니다. 제 자리에서 도는 것이 아니고 전진하며 나아갑니다. 과거로 회복되는 것 같으나 전진하고 발전합니다. 하나님의 회복은 굴렁쇠와 같은 회복입니다.
극심한 고난 가운데 있었던 욥의 회복이 그랬습니다. 잘 지내던 욥에게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지, 재산과 아이들이 다 죽고 믿었던 아내마저 떠나고 병이 와서 기왓장으로 몸을 긁고 있습니다. 남았던 관계마저 다 깨집니다. 돌이킬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말합니다. “빨리 죽여주세요. 더 험한 꼴 보기 전에.” 어느 날, 회복이 옵니다. 떠나갔던 재산이 돌아오고 떠나갔던 자식들이, 아내가 돌아왔습니다. 병도 회복되었습니다. 이것만이 아닙니다.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욥에게 그 전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신지라.”(욥42:10) 하나님의 회복은 이러합니다. 우리에게 임할 회복은 무언가 더 큰 풍성함을 가져올 것입니다.
이어령 박사님은 고령인데도 여전히 왕성하게 활동하십니다. 얼마 전, TV 대담을 봤는데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감수성이 예민한 청년시절에, 우리말에 우리 민족의 희망이 있다고 믿고 순 우리말을 붙들고 고민을 많이 했다고 합니다. ‘시간’에 관한 단어들을 살펴보면 다 우리말이라고 합니다. 과거를 말하는 ‘그저께’나 ‘어제’, 현재를 뜻하는 ‘오늘’도 우리말 입니다. 그런데 ‘내일’은 한자어입니다. 이 박사님은 거기서 좌절했다고 합니다. “그럴 줄 알았어! 우리 민족은 정말 미래가 없어.” 그러다가 정신 차리고 봤더니 내일 다음은 ‘모레’, 그 다음은 ‘글피’, 그 다음은 ‘그글피’, 모두 순 우리말이었습니다. 감격했습니다. “그래, 이게 바로 우리 민족의 상징이야.” 내일은 암담해 보입니다. 가까운 미래는 돌이킬 수 없을 것 같아요. 하지만 조금만 참고 넘기면 모레가 보이고 글피가 보이고 그글피가 보입니다.
여러분, 어떤 상처를 가지고 계십니까? 어떤 돌이킬 수 없는 일을 저질렀습니까? 죽음처럼 돌이킬 수 없는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돌이키시는 부활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의 문제, 그 상처, 아무것도 아닙니다. 때만 오면 될 것입니다. 2007년 한 해가 꿈꾸는 것 같이 하나님의 큰일로 회복되는 한 해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하나님의 때가 찰 때 여러분의 가족과 이 교회와 민족에 거대한 회복이 몰려올 줄로 믿습니다.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리실 때 꿈꾸는 것 같았도다. 아멘”
출처/김광건 목사 설교 중에서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리실 때에 우리가 꿈꾸는 것 같았도다.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열방 중에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저희를 위하여 대사를 행하셨다 하였도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대사를 행하셨으니 우리는 기쁘도다. 여호와여 우리의 포로를 남방 시내들 같이 돌리소서.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시편 126:1~6.
오래 전 우리나라에 충격적 관습이 있었습니다. 늙어 가망이 없는 부모를 자식이 산 속에 혼자 내려놓고 돌아오는 고려장 관습입니다. 한 아들이 어머니를 업고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아들의 등에 기대있던 어머니가 “얘야, 어디 가냐?” 아들은 억장이 무너지지만 퉁명스럽게 “모르셔도 됩니다.” 산 속을 한참 들어가는데 어머니가 갑자기 나뭇가지를 하나씩 꺾기 시작하십니다. “어머니,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네가 나중에 혼자 내려올 때 길 잃어버릴까봐.” 아들은 어머니를 산에 두고 통곡하며 내려왔답니다. 이것이 어머니입니다. 이 어머니를 만드신 하나님이 또한 어머니와 같습니다.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어머니의 모습뿐 아니라 아버지의 모습도 지니고 계십니다.
꽤 오래 전에 TV에서 동물의 왕국을 보았습니다. 마침 그날 사자가 등장했어요. 수사자의 별명이 ‘백수(百獸)의 왕’이지만 알고 보니 놀고먹는 백수(白手)예요. 폼만 잡지 아무것도 안 합니다. 사냥도, 새끼양육도, 적과 싸움도 암사자가 합니다. 수사자는 누워 자다가 밥 가져오면 먹고 가끔 폼 잡고 한 바퀴 돕니다. 어느 날 사자 무리가 고기를 먹는데 하이에나 떼가 급습을 했습니다. 사자에게 하이에나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날은 너무 많아서 암사자들이 모두 나무 위로 도망쳤어요. 하이에나들이 남은 먹이를 먹고 있을 때 수사자가 나타났습니다. 그러더니 한 편의 중국 무술영화가 펼쳐집니다. 일당백으로 하이에나와 싸워 모두 죽이고 쫓아냈습니다. 그러자 그동안 수사자를 구박했던 암사자가 내려와 아양을 떱니다. “그동안 내가 미안했어.” 그리고 해설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의 왕국을 되찾았다.”(His kingdom has come back). 평소에는 어머니다운 모습이었으나 위기가 닥치면 아버지다운 모습을 보입니다. 어머니 사자가 못하는 것을 아버지 사자가 단숨에 판을 바꿔 버립니다.
우리가 고난당할 때 하나님의 두 가지 모습이 나타납니다. 어머니의 모습으로 고난 가운데 버틸 수 있게 해주시고 위로와 사랑으로 쓰다듬고 보살펴주십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아버지의 모습으로, 그 강한 힘으로 판을 뒤집고 단번에 해결하십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이런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열방 중에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저희를 위하여 대사를 행하셨다 하였도다.”(2절) 고3수험생을 둔 집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수험생들 무척 힘들지요. 어머니는 “어쩌냐. 현실이 이런 것을. 내가 해준 밥 먹고 힘내라.” 하면서 간식도 만들어주고 보약도 다려주고 쓰다듬어 주면서 “엄마가 있잖아. 힘내!” 합니다. 아버지가 보다 못해 “이건 우리 애만의 문제가 아니야. 우리나라 교육 자체가 틀렸어!”하고는 집을 박차고 나가 온 힘을 다해 교육제도를 바꿔버렸습니다. 그리고 집에 들어와서 “야! 이제 쉬어라. 내가 다 바꿨다.” 하십니다. 지금 이러한 하나님을 이야기합니다. “대사를 행하셨다.”
저는 오늘 시편 말씀을 묵상하면 소름이 끼칩니다.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옛 이웃나라 강대국 바벨론에게 침략을 당해 망합니다. 망해도 그렇게 망할 수가 없습니다. BC 587년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백성이 모두 노예로 끌려가게 됩니다. 이것을 ‘바벨론 유수’라고 합니다.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철저히 망할 뿐 아니라 영적으로, 종교적으로도 완전히 망합니다. 희망이 보이질 않습니다.
이 70여 년 동안 하나님께서는 두 가지 모습으로 역사하십니다. 하나는 어머니처럼 역사하십니다. “힘내라! 이 고난과 상처 가운데서 버티어라!”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주셨습니다. 긍휼을 베푸시고 사랑하시고 품어주십니다. 그런데 어느 날 꿈꾸지도 못했던 일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또 다른 모습, 아버지적 모습이 나타나 다 뒤집어 엎으셨습니다. 회복이 되었습니다. 그 날을 보면서 시편 기자는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리실 때에 우리가 꿈꾸는 것 같았도다.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열방 중에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저희를 위하여 대사를 행하셨다 하였도다.”(1,2절) 이것이 오늘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시는 회복의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정초에 여러분이 가장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표현은 각각 다르나 결론은 이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회복입니다. 과거로 완전히 돌아가지 못하더라도 반만 돌아갔으면 좋겠어요. 이 상처가 반만 나았으면 좋겠어요. 이 민족이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서 조금이라도 돌이킬 수 있으면 좋겠어요. 이 말씀을 듣기 전에 먼저 “아멘!”하실 일이 있습니다. “회복은 꼭 올 것입니다!” 이것을 믿기 바랍니다. 우리는 그동안 산전수전 많이 겪어서 돌이킬 수 없는 일을 너무나 많이 봤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생각합니다. ‘회복? 내가 인생을 살아 보니 그런 건 젊었을 때 얘기야. 갈라진 관계, 찢겨진 상처, 어쩔 수 없는 거지. 쏟아진 물이야. 그냥 이렇게 살다 가는 거야. 난리 좀 피우지마. 이게 인생이야!’ 그런데 성경은 꿈꾸는 것 같은 회복이 온다는 겁니다. 그동안 어머니 같은 하나님이 붙들어 오시다가 아버지 같은 하나님이 갑자기 일어나시면서 이것을 뒤집어엎는 날이 온다는 겁니다.
고난당할 때 두 가지의 영성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관리의 영성입니다. “이제 망했어, 죽었어. 돌이킬 수 없으니 더 이상 나빠지지 않게 여기서 관리하고 끝내자.” 두 번째는 회복의 영성입니다. “나는 포기 못합니다. 이 상처 그대로, 이 죄 그대로는 못 끝냅니다. 반드시 회복되어야 합니다.” 일반서적 부문에서도 최근 몇 년간 베스트셀러인 조엘 오스틴 목사님의 “긍정의 힘”을 읽어보셨을 것입니다. 참 좋은 책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이겁니다. “긍정적으로 살아라. 그러면 인생이 긍정적으로 풀린다. 비전을 키워라. 기대치를 높여라. 생각과 말을 조심해라. 인생은 생각을 따라 가게 되어있다. 행복하기를 선택하라.” 얼마나 좋은 말입니까! 그런데 저는 가끔 ‘누가 그거 할 줄 몰라서 안 하나? 너도 내 일 당해봐라. 그런 말이 나오는지. 어느 정도의 상황이라야 긍정적인 말이고 생각이고 하지!’ 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미 갈라지고 찢기고 엎질러진 상황에서 ‘잘 될 거야!’라는 생각은 위선입니다. 회복이 불가능할 때, 저와 여러분이 택하는 방법이 ‘유지’입니다. 회복은 오지 않습니다. 힘은 들지만 여기서 더 이상 나빠지지 않도록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붙들어 매는 것입니다.
얼마 전, 뉴스위크지가 커버스토리로 에너지 위기를 다뤘습니다. 특히 석유고갈이 큰 문제입니다. “지구를 구하는 7가지 방법”을 제시하였는데, 석유와 전기를 혼합한 하이브리드형 엔진을 쓰라는 것입니다. 단열재를 잘 사용해서 열 손실을 막고 백열전구 대신 형광등을 쓰며 공장 시스템을 정비해서 열 낭비를 줄이자는 등입니다. 결론은 이제 꿈 깨자는 것이지요. 이전까지는 지구를 구하는 방법으로 “석유가 고갈되기 전에 기적적인 대체연료를 개발하자”는 등 단칼에 해결하기를 꿈꿔왔어요. 이게 안 됩니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현실로 눈을 돌려서 남은 석유를 아껴 쓰기 위해 어떻게든 효율을 올려보자는 겁니다. 효율성의 철학으로 바뀌었습니다. 기적을 포기하고 관리에 들어갑니다.
의학도 마찬가지입니다. 얼마 전 KBS “생로병사”라는 프로그램에서 새로운 암 치료법을 소개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표적치료제를 개발했다고 합니다. 암 환자들에게 희망이 찾아오는 것 같아요. 이전의 암 연구는 기적적인 명약을 개발해서 단칼에 암세포를 박멸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으로 해결이 안 되자 바뀝니다. 완전히 죽일 수는 없고, 암 세포에도 혈액이 들어간다니까 혈액이 들어가는 혈관 생성 억제제를 개발해서 영양을 줄여 반이라도 죽이자는 것입니다. 암 세포와 공존하는 방법을 택합니다. 대단한 패러다임의 전환입니다. 현실에 눈을 돌려 공존하면서 조금씩 수명을 늘여가도록 합니다. 기적을 바라지 않고 유지합니다. 이것은 의학과 환경뿐 아니라 현대 문명의 트렌드입니다. 완전한 해결이 아니라,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효율을 최대한 높여보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인생철학으로 사십니까? 살아 보니까 인생이 장난이 아니에요. 직장문제, 가정문제, 병, 관계, 돌이킬 수 없는 일, 힘든 일이 너무 많아요. 한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할 수 없지. 포기할 것은 포기하고, 이 상처, 이 죄, 다 받아들이고 공존해. 최소한으로만 아파하고 최소한으로만 힘들 거야.” 그리고 이렇게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어머니 같은 하나님, 오늘도 나를 위로해주세요. 아파요.” 그런데 또 다른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 아직 포기 못해. 하나님, 이 상처 완전히 해결해주세요. 이 죄 깨끗이 씻어주세요. 이 팔자 완전히 고쳐주세요. 이 죽음 일으켜 주세요.” 그리고 이렇게 기도합니다. “아버지 같으신 하나님, 단칼에 해결해주세요!” 여러분은 어떻게 사십니까?
저는 13년 동안 미국에 있다가 3년 전 귀국했습니다. 지금은 많이 적응했지만 처음엔 ‘회복을 바라는 영성이 다 없어지고 유지의 영성만 남았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믿음과 관리가 섞여있습니다. ‘돌이킬 수 없는 것 더 이상 그러지 말자. 하나님, 저 잘 버티게 해 주세요. 잘 받아들이게 해 주세요.’ 이것을 신앙이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아닙니다! 회복은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십니다. 그 때만 온다면 여러분의 돌이킬 수 없는 모든 문제, 상처, 죄, 죽음도 돌이키실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전에 대 배신의 드라마가 펼쳐집니다. 제자들이 다 도망가고 믿었던 수제자 베드로는 저주까지 했습니다. 설마하며 따라가 봤더니 주님이 정말 돌아가셨습니다. 정말 돌이킬 수 없습니다. 베드로는 돌아와서 “주님, 회복시켜주세요. 내 죄도 씻어 주시고 주님도 부활해주세요”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21장 3절에서 기가 막힌 말을 합니다.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죽을 수도 없고, 돌이킬 수도 없고, 그래서 다시 이 인생을 유지하는 차원으로 돌아갑니다.
많은 현대의 크리스천들이 이러한 영성에 머물러 있습니다. 완전히 해결해주실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소식이 없고 갈수록 태산입니다. 더 곪았습니다. 이제는 신앙 없다고 뛰쳐나갈 수는 없고, 직책이 직책인지라 “열심히 살 거야! 최선을 다 할 거야!” 바꿔서 말하면 이것입니다. “고기 잡으러 갈 거야.” 이것을 신앙인 줄 압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돌이킬 수 없는, 여러분만이 아는 그 일을 경험한 기억을 가지고 계실 것입니다. 상처의 완전한 회복, 죄의 완전한 해결, 기구한 운명의 완전한 회복, 불가능합니다. 꿈꾸면 꿈꿀수록 더 힘듭니다. 그래서 살 길을 찾습니다. 기대를 버리고 그냥 유지, 관리하면서 비틀거리며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리고 또 기도합니다. “어머니 같은 하나님, 나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며, 오늘도 날 품어 주세요.” 대단한 신앙인 것 같지만, 이상합니다.
본문을 보세요. 놀라운 장면이 있습니다. 꿈같은 날이 왔습니다.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서 큰일을 일으키셨습니다. 돌이키셨습니다.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인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돌이키셨습니다. 원래대로 바꾸셨습니다. 영어성경은 이것을 bring back(다시 뒤로 돌렸다), turn(방향을 바꿨다), restore(회복시켰다)라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에게 오늘 이런 회복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인생은 그냥 버티는 것이 아닙니다. 완전한 혁신, 기적, 회복은 있습니다. 아버지는 이것을 하시고 그 날은 반드시 올 것임을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요한복음 5장을 보니, 예수께서 지나가시는데 38년 된 병자가 누워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묻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6절) 기가 막힌 말씀입니다. “너 지금 그것이 유지의 영성이냐, 회복의 영성이냐?” 오랫동안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있는 여러분에게도 이렇게 묻습니다. “아직도 회복하고자 하느냐? 그것이 가능하다고 믿느냐?” 하나님의 전능을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왜 돌이킬 수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오래 되었어요? 그게 어떻다는 것입니까? 불가능했어요? 그 불가능이 하나님 앞에 뭡니까? 왜 아직도 기대하지 않으십니까?
“주께서 일어나사 시온을 긍휼히 여기시리니 지금은 그를 긍휼히 여기실 때라 정한 기한이 옴이니이다”(시102:13) 그 때가 차면 하나님께서 회복시키신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아버지 같은 하나님께 매달리시기 바랍니다. 바다가 막히면 갈라주시면 됩니다. 병, 회복시키시면 됩니다. 상처, 새 살이 돋으면 됩니다. “열방 중에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저희를 위하여 대사를 행하셨다.” 이 날이 올 줄로 믿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호세아 6장에서 선지자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이런 날이 왔다는 겁니다. 그저 그 때 그 때 넘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어느 날 갑자기 판을 다 바꾸시고 우리를 돌이키십니다. 우리는 그 날을 찬양하기를 원합니다. 시온의 포로를 돌리실 때 꿈꾸는 것 같은 날, 여러분에게 임하실 줄 믿습니다.
두 번째 하나님의 회복은 그냥 과거로의 복귀만은 아닙니다. 더 큰 축복으로 업그레이드 됩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5절) 회복이 보이질 않으나 눈물로 씨를 뿌립니다. 회복이 되었을 때는 단을 가지고 돌아옵니다. 제 신학교 교수님의 말씀이 아직도 기억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회복시키시는 모습이 꼭 원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그냥 도는 것이 아니라 나선형(spiral)으로 전진하면서 도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회복입니다. 88올림픽 때의 한 장면을 모두 기억하실 것입니다. 화려한 행사가 펼쳐지던 중에 갑자기 조용해지면서 불이 꺼졌습니다. 한 줄기 조명이 비취는 가운데 한 아이가 굴렁쇠를 굴리며 나왔어요. 메시지입니다. “우리 민족은 굴렁쇠와 같다.” 이렇게 찢겼지만 원처럼 또 돌아갑니다. 제 자리에서 도는 것이 아니고 전진하며 나아갑니다. 과거로 회복되는 것 같으나 전진하고 발전합니다. 하나님의 회복은 굴렁쇠와 같은 회복입니다.
극심한 고난 가운데 있었던 욥의 회복이 그랬습니다. 잘 지내던 욥에게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지, 재산과 아이들이 다 죽고 믿었던 아내마저 떠나고 병이 와서 기왓장으로 몸을 긁고 있습니다. 남았던 관계마저 다 깨집니다. 돌이킬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말합니다. “빨리 죽여주세요. 더 험한 꼴 보기 전에.” 어느 날, 회복이 옵니다. 떠나갔던 재산이 돌아오고 떠나갔던 자식들이, 아내가 돌아왔습니다. 병도 회복되었습니다. 이것만이 아닙니다.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욥에게 그 전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신지라.”(욥42:10) 하나님의 회복은 이러합니다. 우리에게 임할 회복은 무언가 더 큰 풍성함을 가져올 것입니다.
이어령 박사님은 고령인데도 여전히 왕성하게 활동하십니다. 얼마 전, TV 대담을 봤는데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감수성이 예민한 청년시절에, 우리말에 우리 민족의 희망이 있다고 믿고 순 우리말을 붙들고 고민을 많이 했다고 합니다. ‘시간’에 관한 단어들을 살펴보면 다 우리말이라고 합니다. 과거를 말하는 ‘그저께’나 ‘어제’, 현재를 뜻하는 ‘오늘’도 우리말 입니다. 그런데 ‘내일’은 한자어입니다. 이 박사님은 거기서 좌절했다고 합니다. “그럴 줄 알았어! 우리 민족은 정말 미래가 없어.” 그러다가 정신 차리고 봤더니 내일 다음은 ‘모레’, 그 다음은 ‘글피’, 그 다음은 ‘그글피’, 모두 순 우리말이었습니다. 감격했습니다. “그래, 이게 바로 우리 민족의 상징이야.” 내일은 암담해 보입니다. 가까운 미래는 돌이킬 수 없을 것 같아요. 하지만 조금만 참고 넘기면 모레가 보이고 글피가 보이고 그글피가 보입니다.
여러분, 어떤 상처를 가지고 계십니까? 어떤 돌이킬 수 없는 일을 저질렀습니까? 죽음처럼 돌이킬 수 없는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돌이키시는 부활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의 문제, 그 상처, 아무것도 아닙니다. 때만 오면 될 것입니다. 2007년 한 해가 꿈꾸는 것 같이 하나님의 큰일로 회복되는 한 해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하나님의 때가 찰 때 여러분의 가족과 이 교회와 민족에 거대한 회복이 몰려올 줄로 믿습니다.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리실 때 꿈꾸는 것 같았도다. 아멘”
출처/김광건 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