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과 불신앙의 사이  (히11:24-26)


흔히 인간을 일러서<꿈을 가진 존재>라고 합니다. 이 말은 그 꿈이 허황된 꿈이든 건전한 꿈이든지 인간이라면 누구나 꿈을 가지고 살기 때문에 붙여진 말이라 생각됩니다. 그렇습니다. 꿈마저도 가져보지 못한다면 인간이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세상에는 내가 가져야 할 꿈이 있고 버려야 할 꿈이 있다는 것입니다. 잘못 된 꿈을 가져서 망하는 사람도 있고 잘 된 꿈을 가지고 성공하는 사람도 있습니다.“꿈 깨!”라는 말을 자주 사용합니다만 이 말처럼 깨어나지 못하고 계속가면 내가 망할 꿈이라면 빨리 깨어나야죠. 얼른 제 자리로 돌아오려면 그 허황된 꿈을 버려야만 합니다. 비단 꿈 만이겠습니까? 우리의 신앙생활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영역을 이해하지 못해서 정말 가져야 할 것과 진정으로 버려야 할 것을 구분하지 못하고 신앙의 퇴보의 길을 걸을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하나님께서 잡으라고 주시는 것도 가지지 못할 때가 있는가하면 일찌감치 하나님께서 포기하라고 명하신 것을 아직까지 부여잡고 목을 매고 있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런데 선 듯 버리지 못하는 이 애착이 어디에서 시작 되는지를 가만히 생각해보면 결국 어리석은 욕심에서 비롯됩니다. 그래서 욕심이라는 것이 우리에게 득이 되기보다는 실을 가져다 줄때가 훨씬 더 많습니다. 대부분의 욕심을 따르다 보면 아주 우스운 존재로 만들어 버릴 때가 많습니다. 때로는 아주 비참하게 하기도하고 때로는 얼굴 들고 다니지 못할 정도의 부끄러움을 주기도 하는 것이 이 욕심입니다. 욕심이라는 말을 우리사전에는“무엇을 지나치게 탐내거나 누리고 싶어 하는 마음”이라고 적어 놓고 있습니다. 히브리말로 그 뜻을 살펴보아도 같습니다.“무엇을 가지기 위해서 온 마음이 그 곳으로 쏠리는 것”이라고 정리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욕심이 빗나가면 사람을 망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 욕심에 빠지면 아무것도 보이지가 않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이 욕심이 얽어매면 풀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 욕심을 이길 수 있는 단 하나의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신앙으로 극복 할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물질에 관한 욕심, 명예에 관한 욕심, 그 어떤 것도 신앙 외에 풀 수 있는 방법이 어디 있겠습니까? 위대한 사도 바울은 자기의 지나온 모든 것들, 즉 공적(功績), 명예(名譽), 신분(身分), 심지어는 지위(地位)까지도 이 모든 것들을“배설물처럼 여기노라”는 전대미문(前代未聞)의 신앙고백을 한 사람으로 유명한데 이런 고백이 있기까지 얼마나 우여곡절(迂餘曲折)을 겪고 얻어 낸 고백입니까? 사실 바울도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입니다. 왜 편하고 좋은 것을 몰랐겠습니까? 왜 욕심이 없었겠습니까? 정말 버리기 싫은 것들도 많았겠지요. 그러나 그가 예수 안에 사는 법을 배웠을 때 이 모든 것들의 가치 없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욕심에서 벗어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잘 압니다. 그래서 고민하고 갈등하며 살아갑니다. 날마다 이 갈등이 없는 날이 없습니다. 세상에 대해서는 그 나름대로의 욕심이 있기에 그에 따른 갈등이 있고 신앙에 있어서도 말할 수 없는 갈등 속에 살아갑니다.

한 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교회가 낡아서 재건축을 위한 기도회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매일 저녁 정기적으로 온 교인들이 모여 기도회를 가졌습니다. 하루는 교회를 위해서 각자가 십시일반(十匙一飯)으로 헌금을 하기로 작정한 날이었습니다. 그런데 평소에 알부자로 소문난 장로님이 그날따라 보이지 않았습니다. 사실 적잖이 부담이 되어서 기도회에 참석하지를 않았습니다. 그리고 기도회가 막 끝나갈 무렵 장로님이 고민이 역력한 얼굴로 허겁지겁 들어와서 고개를 숙이고 기도를 합니다. 그 때 다 썩은 예배당 지붕이 삐걱하더니 나무토막 하나가 떨어지면서 장로님의 뒤통수를 치고 말았습니다. 놀라 쓰러진 장로님이 얼떨결에 소리를 질렀습니다.“아이쿠 주님! 500만원 내 놓겠습니다.”바로 그 때 옆에서 기도하던 집사님의 기도소리가 갑자기 커집니다.“주님! 한 서너 번만 더 내리쳐 주시옵소서!”

사람이 아무런 의식 없이 살던 때는 고민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사는 것이 무엇인지, 죄가 무엇인지, 하나님 앞에서의 욕심이 어떤 것인지를 깨달은 순간부터는 고민과 갈등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특히나 신앙인으로서 이런 갈등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참으로 괴로운 일입니다. 이러한 욕심을 버릴 줄 아는 신앙에까지 나아가야 하는데 이게 어려운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될 것입니까? 가장 좋은 신앙은 사도 바울이“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고백한 것처럼 우리도 예수 안에서<날마다 죽는 경험>을 할 수만 있다면 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 한다>는 속담을 여태껏 생각해 보지 못한 다른 각도에서 생각을 해 봅니다. 지렁이를 밟으면 꿈틀하는 이유가 뭘까요? 어떤 사람이 이것을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답을 얻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어떤 사람이 아주 현명한 이유를 밝혀주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지렁이가 밟아도 꿈틀하는 이유는 덜 밟았기 때문에 죽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재밌는 답입니다.
오늘 아직까지도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온전히 순종치 못하고 때때로 내 고집이 꿈틀거리고, 내 욕심이 꿈틀거리며 내 자존심이 살아 꿈틀거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날마다 예수 안에서 죽는 경험을 한다면 순종하지 못할 일이 없을 것이고, 버리지 못할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신앙생활은 언제나 우리에게 결단을 요구합니다. 이 결단의 중심에는 언제나<버릴 것>을 요구하는데 인간이 자기의 것을 버리는 것만큼 어려운 것은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은 버릴 것을 버리고 선택할 것을 잘 선택하고 나면 얻어지는 것이 훨씬 유익한 것들이요, 영원한 가치가 있다는 것이 신앙의 원리입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에서 버릴 것을 버리고 가질 것을 가질 줄 아는 신앙의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그가 바로[모세]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모세는 자기가 인간적으로, 세상 적으로 누릴 수 있는 모든 영화들을 버렸던 사람입니다. 그것도 별로 필요 없는 것을 버린 것이 아니라 인간이 이 땅에서 살면서 누리기에 최고의 것들을 버린 사람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를 바보라고 비웃을지도 모릅니다. 우리 또한 신앙 없는 눈으로 바라보면 모세가 바보처럼 여겨집니다. 그가 과감하게 버린 것들이 어떻게 얻어진 것들인지 아십니까? 순탄하게 얻은 것이 아닙니다. 죽음의 지경에서 벗어난 뒤에 주어진 것들입니다. 더구나 얻은 것을 버린 뒤에 그에게는 다시 죽음이 닥쳐왔습니다. 그 정도로 자기의 목숨을 부지해 줄만한 세상 적 가치가 있는 것들이요, 그것만 가지고 있으면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는 권세마저도 누릴 수 있는 대단한 것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모세는 버렸습니다. 믿음을 위해서라면 버리는 일을 주저하지 않고 오히려 죽음의 길을 택했던 모세입니다. 오늘 날 우리가 참으로 버리기 어려워하고 아까워하는 그 모든 것들을 모세는 버렸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고자하는<모세의 신앙>이자 우리가 가져야 할<믿음>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모세가 취한 뚜렷한 신앙의 결단 행위를 무엇이라고 표현하고 있느냐하면“거절하고 선택했다”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말을 좀 더 들여다보면 궁극적으로는<신앙과 불신앙>의 갈림길이라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즉 오늘 모세는 신앙과 불신앙의 사이에서 보여 주어야할 뚜렷한 행로를 결정해 줍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십시다. 무엇을<선택하는 것>이 쉬울까요?<거절하는 것>이 쉬운가요? 그렇습니다. 사람은 선택하기보다 거절하기가 더 어려운 겁니다.
자 그렇다면 선택보다 힘든 거절에 대해 모세는 어떻게 했습니까? 무엇을 거절합니까? 먼저는 명예와 지위를 거절했습니다. 모세가 거절한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는 자리는 엄청난 명예와 지위가 있는 자립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이 자리를 단숨에 거절했습니다. 우리도 살아가면서 추구하는 명예나 지위가 얼마나 많습니까? 통장이나 반장, 아파트 부녀회장등 굉장한 명예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심지어는 아이들의 학교 반장 자리를 놓고 엄마들이 학교에서 대판싸움을 벌였다는 웃지 못 할 이야기를 얼마 전 신문에서 읽었습니다. 그에 비한다면 오늘 모세가 누릴 수 있었던 자리는 감히 누구나 쉽게 넘볼 수 없는 굉장한 명예입니다. 그런 명예와 지위를 버린 모세를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면 그런 명예는 마땅히 거절돼야 하며 하나님 앞에서 믿음으로 바로 살아가는 데 거침이 되는 지위라면 거절해야 한다는 것이 모세가 명예와 지위를 거절한 의미입니다.
뿐만 아니라 모세는 일확천금을 누릴 수 있는 재물의 기회도 거절했습니다. 본문에서 이 사실을“애굽의 모든 보화를 거절했다”고 표현했는데 이 말의 배경을 쉽게 이해하려면 당시 애굽의 재력이 어마어마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한 마디로 당시 애굽은 경제력, 군사력, 기술과 과학, 학문과 문화가 있었고 돈과 힘이 있었습니다. 고로 오늘 본문이 말하고 있는“애굽의 모든 보화”라고 하는 것은 한 마디로 이 세상에서 인간이 얻을 수 있는 그 모든 것들의 대명사로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이 모든 것을 다 버렸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정말 우리 생각처럼 세상 물정(世上物情)을 몰라서 그랬을까요? 아닙니다. 오직 그의 믿음 때문입니다. 모세가 버렸던 애굽은 이 세상의 상징이요, 불신앙의 요소들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언제나 먹을 것, 입을 것, 마실 것, 보는 것이 풍족하고 즐길 것도 풍성합니다. 그리고 세상은 이 속에서 우리가 영원히 정들이고 살 것을 권유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모세에게도 마찬가지로 이러한 유혹의 마음이 작용했을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은 모세가 이 모든 것을 거절했다고 분명히 기록합니다.
더 나아가 모세의 신앙이 위대한 것은 모든 것을<버리는 것>으로 끝내지 않았다는데 있습니다.“거절 한다”는 것은<소극적 차원>이고,“선택 한다”는 것은<적극적인 차원>입니다. 거절은 그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보다 낳은 것을 선택하는 것에 의미가 있습니다. 결국은 선택하기 위해서 우리는 거절해야합니다. 더 좋은 것을 선택하기 위해서는 좋지 못한 것을 거절해야 합니다. 불신앙적인 것을 거절할 줄 아는 용기가 있다면 신앙적인 것을 선택할 줄 아는 적극적인 자세가 필요합니다. 모세는 애굽의 이 화려한 모든 것을 거절하고 무엇을 선택했습니까?“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더 큰 재물로 여겼다”고 했습니다. 이 분명한 신앙적가치관이 모세를 뜨겁게 만들었습니다. 가치관의 문제입니다. 세상이냐, 신앙이냐는 것이나 신앙과 불신앙의 사이에서 선택의 결과는 가치관의 문제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은 민족의 고유명절인 중추절입니다. 고유의 정신이 사라지고 수많은 사람들이 흥청대는 날이 되지 않기를 원하는 마음 간절합니다. 또한 우리들에게는 신앙과 불신앙의 사이에서 수 없는 갈등이 오고가는 날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이든지 여러분의 신앙적 가치관이 신앙과 불신앙의 사이에서 현명한 결단을 가져다주기를 바랍니다.


출처/김철현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