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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의 귀함 (본문 눅17:11-19)
오늘의 본문을 읽어가다 보면 지난날 제가 본 영화, 벤허의 한 장면이 연상됩니다. 여러분도 '벤허'를 감동 깊게 보셨을 줄 압니다. 그것은 루 윌리스의 소설 벤허를 윌리엄 와일러 감독이 영화로 만든 것입니다.
루 윌리스는 미국 인디애나주 브룩빌에서 태어나 법률을 전공하던 중 멕시코 전쟁이 일어나자 지원병으로 군대에 나가 1846년부터 1년간 전쟁에 참전한 뒤 미국 남북 전쟁 때 육군 소장으로 북군을 지휘하였습니다. 그는 처음에 기독교의 복음서의 이야기가 거짓말이라고 주장하는 글을 책의 제 1장에 쓰고, 제 2장 첫 페이지를 쓰다가 도저히 부인할 수 없는 사실 앞에 무릎을 꿇고 '당신은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르짖으며 그리스도에 대한 마음을 고쳐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 구주임을 증명하는 소설 벤허를 썼습니다.
소설 벤허는 주인공 벤허의 이야기와 예수 탄생과 고난의 길, 그리고 당시 사회의 실상을 보여 주는 이야기가 서로 혼합된 듯 하면서도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보여주는 긍휼, 사랑, 용서, 능력이 줄거리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 소설의 주인공 벤허는 부유한 가문의 아들로 태어나 청소년 시절, 새로 부임하는 로마 총독의 행렬을 보다가 실수를 저질러 노예로 끌려가고, 사랑하는 어머니와 누이동생 티르자는 붙잡혀 햇빛이 전혀 들지 않는 지하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벤허가 노예 생활을 마치고 어머니와 누이동생을 찾아 나서지만, 나병 환자가 된 그들을 만날 수 없게 됩니다.
나병 환자가 된 벤허의 어머니와 누이동생 티르자는 정상인들과 함께 살 수 없어 성 밖 멀리 떨어진 음침한 나병인 마을에 숨어서 살게 됩니다. 이른 새벽 벤허의 어머니는 잠자는 딸 티르자를 남겨 놓은 채 밖으로 나왔습니다. 지난 삼년 동안 그의 병세는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본래 고상한 성격과 높은 인격을 지녔던 여인이라 자신의 추한 모습이 외부로 나타나지 않도록 감싸고 있었습니다. 머리는 매만질 수 없도록 헝클어졌고, 눈썹, 입술, 콧등, 두 볼의 살은 거의 없었습니다. 뼈가 앙상하게 드러나 보이는 손등에는 더러운 분비물이 더덕더덕 붙어 있습니다.
그가 서 있는 곳 머리 위에도 무덤이고, 아래에도 무덤이며, 오른쪽과 왼쪽에도 모두 무덤 뿐입니다. 그는 자신의 무덤까지도 생각하면서 앉아 있는데, 기진맥진해서 비틀거리며 벤허의 하인 암라하가 동산으로 올라오고 있었습니다. 그를 알아본 어머니는 "더러운 나병환자야, 나병환자야!"라고 소리칩니다.
본래 유대 법에는 일반인이 나병인에게 접근할 수 없게 되어 있었습니다. 만약 상대가 나병인인 줄 모르고 접근하면 그 쪽에서 큰 소리로 자신이 나병환자임을 알려야 합니다. 그리고 바람이 부는 날이면 나병환자는 다른 사람과의 거리를 최소한 50야드 밖으로 물러서서 걸어가야 했습니다.
암라하는 이 같은 경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드디어 벤허의 어머니의 발머리에 이르게 됩니다. 그리고 여인의 옷자락에 미친 듯이 입맞춤을 합니다. 여인은 피하려고 하였으나 암라하의 격동된 감정이 너무 크다는 것을 알고 가라앉기를 조용히 기다립니다. 그러다가 심하게 꾸짖습니다.
"이게 무슨 짓이냐? 암라하! 나는 나병환자야.
너의 사랑을 이렇게 무조건 복종한다는 것으로 보여줄 셈인가? 몹쓸것 같으니... 너도 이제 몸을 망쳤다.
다시는 너의 주인 어른, 벤허에게 돌아갈 수 없게 되었구나! 그러니 누가 우리에게 먹을 것을 날라다 주겠느냐?
이제 우리는 모두 망해 버렸구나!"라고 깊이 한탄합니다.
그 때 티르자가 잠에서 깨어 밖으로 나왔습니다. 티르자를 본 암라하는 다시 그에게로 달려갈려고 하지만 너무 단호하게 다가가지 말라는 어머니의 외침에 그만 멈춥니다.
거기서 암라하는 나병인을 고쳐주며 많은 기적을 행하며 다니는 매우 훌륭한 분을 그들에게 소개합니다. 그리고 그들을 그분에게로 안내 하겠다고 합니다. 암라하는 두 사람을 부축해서 산비탈에서 평지로 내려옵니다.
마침내 그들이 있는 산벼랑 너머로 한 떼의 군중들이 나타났습니다. 두 여인은 수천명의 군중들이 저마다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오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때 그 군중 속에 그들의 병을 낫게 해 줄 분이 계시다는 것을 알고, 두 여인은 그들 앞으로 다가서며 큰 소리로 외칩니다.
"오 오! 주여! 주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옵소서.
우리의 몸을 깨끗하게 만들어 주소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군중들이, "나병인이다. 돌로 쳐 죽이라!"고 소리칩니다. 그 때 나귀를 탄 사람이 그들에게로 가까이와 말을 건넵니다.
"그대들은 내가 그대들의 몸을 깨끗하게 해 줄 수 있다고 믿습니까?"
그들은 믿는다고 고백합니다. 그 때 나귀에 탄 분은 그들에게 그들이 믿는대로 되라고 말합니다. 그 순간 어머니는 딸을 안고 눈물을 흘립니다. 그들이 구원 받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두 여인은 행렬이 산 너머로 사라질 때까지 무릎을 꿇고 앉아 있습니다. 멀리서 들리는 노랫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게 되자 기적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나병을 앓고 있는 두 여인의 심장 속에는 피가 새롭게 솟아오르고, 혈액이 더 빠르게 온몸을 돌기 시작합니다. 녹슬고 병든 몸에서도 아픔도 없이 병이 나아가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 무섭던 병이 기적처럼 사라지면서 기력도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습니다. 육체뿐만 아니라 정신에서도 기운이 솟아났습니다.
오늘의 본문에는 예수께서 두 여인이 있던 벳바게로 지나가시지 않고, 예루살렘으로 가시면서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를 지나가시게 됩니다. 지나가시는 길에 한 마을에 들어섰을 때 나병환자 열명이 예수를 만나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고 멀리 서서 소리를 높여,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소리를 칩니다. 그들 열명 가운데는 한 사람의 사마리아인도 끼여 있었습니다. 본래 사마리아 사람과 유대인은 서로 상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처해있는 비참한 상황은 인종의 편견, 사회적 지위의 벽도 다 무의미한 것이 되게 했습니다. 오직 그들의 공통 관심사는 그 불행에서 벗어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고 "제사장들에게 가서 너희 몸을 보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대로 가다가 그들의 몸이 깨끗하게 된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중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발견하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아래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습니다. 본문에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말씀하십니다.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하셨습니다.
복음서 기자 누가는 절망적인 상황에 있던 열 사람의 나병환자 모두가 그들이 간절히 기다렸던 구원의 은혜를 입었지만, 그들 중 오직 한 사람만-그것도 이방인- 감사하기 위해 돌아왔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누가는 감사가 얼마나 어렵고 귀한 것(희귀한 것)인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삶의 비극은 우리들이 불행한 일을 당했을 때 불행 그 자체에만 매달리지 그것을 통해 자신에게 진정 필요한 것이 하나님의 긍휼임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아홉 사람의 나병환자들은 그러한 유형의 사람들을 대표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나병에서 낫게 된 것이 그들의 삶 전체에 임한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임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들에게는 단지 병고치는 것만이 목적이었습니다. 그러나 돌아온 한 사람은 나병 가운데서 하나님의 구원을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그는 자기에게 필요한 것이 건강 이전에 하나님의 긍휼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긍휼이 없는 삶이 얼마나 비참한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에게 있어 나병에서 깨끗케 된 것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찾아오신 사건이었습니다. 그는 나병에서 풀려남과 함께 그의 존재 가치 전체를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새롭게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사마리아인의 기쁨과 감사는 거기에 있었습니다. 그에게 나병에서 풀려나게 된 사건은 어쩌다 나병에 걸려 인생을 망칠 뻔했다가 기적으로 낫게 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불행에 처해 있을 때 불행 그 자체만을 없이 해 보려고 하지, 그러한 것을 통해서 자신에게 진정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지 못합니다.
사마리아인의 감사는 보다 깊은 차원의 감사입니다. 그에게 있어 나병에서 나음을 얻은 것은 단지 외형적으로 나타난 불행이 제거된 것이 아닙니다. 그에게서 병나음은 하나님께서 그를 버리지 않으셨고, 포기하지 않으셨다는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감사를 가지고 그 구원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왔습니다. 본문에서 강조하는 감사는 그것을 주신 분에게로 돌아와 그 분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구약 성서 열왕기하 5장에 시리아 장군 나아만의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시리아왕이 극진히 사랑하는 군사령관 나아만 장군은 불행하게도 나병에 걸렸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를 찾아가 그의 병을 고쳐주기를 간절히 구합니다. 엘리사가 그에게 지시한대로 하자 그의 병이 깨끗이 나았습니다. 나아만은 엘리사에게 나귀 두 마리에 실을 흙을 달래서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그 이유는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면 하나님께서 그에게 하신 일을 잊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기 위해서 였습니다. 나아만은 그의 병나음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에게 병고침은 곧 구원의 사건 그 자체였습니다.
사람들은 오직 육체적인 건강, 정치적 자유, 사회적 안정 그 자체만을 구합니다. 그러한 것들만을 구할 때 그것이 우상이 됩니다. 그러한 것들 안에는 하나님이 안계십니다. 그러한 것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손길을 보게될 때 하나님께 돌아와 그를 예배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우리 인간을 위해서 하신 구원의 사건을 기억하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감사는 믿음으로 생각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보고 그에게로 돌아와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예수께 돌아오지 않은 아홉 사람의 나병환자와 같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에 살면서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고 피조된 것들을 하나님 대신 섬기며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거기에는 늘 염려와 불안 걱정, 다툼이 있습니다.
금년 한 해를 거의 다 보내면서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이 하나님께 감사를 가지고 돌아오고 있는가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오히려 염려와 근심, 걱정으로 또는 물질에 노예가 되어 하나님을 멀리 떠나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들에게 닥쳐오는 불행을 해결하거나, 예방하기 위해 온갖 자구책들을 마련하느라 여념이 없습니다. 자신의 불행, 실패, 질병, 고난, 성공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을 깨달은 사람은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감사를 드리게 됩니다.
오늘의 본문 사건을 통해서 우리가 깊이 생각하게 되는 것은 우리의 생에 일어나는 모든 문제를 통해서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만 있다면 그것이 얼마나 행복이며 축복인가를 알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지금 이 시간 지난 일 년간 또는 지금까지의 생의 결과가 하나님께 돌아와 감사를 드리는 시간인지 그렇지 않고 이 시간이 하나님을 멀리 떠나 있는 시간인지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만약 우리 모두가 지난 한 해 동안 믿음으로 살아왔다면 이 시간은 하나님께 감사의 시간일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물질이나 피조적인 것들에 매달려 살았다고 하면 이 시간 하나님을 멀리 떠나 있을 것입니다.
지금 이 시간에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않았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예수님의 이 말씀은 은혜 없이,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을 향해 언제나 던지시는 물음일지도 모릅니다. 너희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로 한 해를 살아오지 않았느냐? 그런데 이 소수의 사람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자가 없느냐?
너희들은 왜 그렇게 욕심이 많으냐, 너희들은 왜 그렇게 염려가 많으냐, 너희들은 왜 그렇게 불안해 하느냐, 너희들에게 왜 그렇게 평안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모르느냐? 왜 눈에 보이는 이 모든 것들을 통해 나를 보지 못하느냐? 묻고 계십니다
출처/임영수목사 설교자료 중에서
오늘의 본문을 읽어가다 보면 지난날 제가 본 영화, 벤허의 한 장면이 연상됩니다. 여러분도 '벤허'를 감동 깊게 보셨을 줄 압니다. 그것은 루 윌리스의 소설 벤허를 윌리엄 와일러 감독이 영화로 만든 것입니다.
루 윌리스는 미국 인디애나주 브룩빌에서 태어나 법률을 전공하던 중 멕시코 전쟁이 일어나자 지원병으로 군대에 나가 1846년부터 1년간 전쟁에 참전한 뒤 미국 남북 전쟁 때 육군 소장으로 북군을 지휘하였습니다. 그는 처음에 기독교의 복음서의 이야기가 거짓말이라고 주장하는 글을 책의 제 1장에 쓰고, 제 2장 첫 페이지를 쓰다가 도저히 부인할 수 없는 사실 앞에 무릎을 꿇고 '당신은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르짖으며 그리스도에 대한 마음을 고쳐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 구주임을 증명하는 소설 벤허를 썼습니다.
소설 벤허는 주인공 벤허의 이야기와 예수 탄생과 고난의 길, 그리고 당시 사회의 실상을 보여 주는 이야기가 서로 혼합된 듯 하면서도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보여주는 긍휼, 사랑, 용서, 능력이 줄거리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 소설의 주인공 벤허는 부유한 가문의 아들로 태어나 청소년 시절, 새로 부임하는 로마 총독의 행렬을 보다가 실수를 저질러 노예로 끌려가고, 사랑하는 어머니와 누이동생 티르자는 붙잡혀 햇빛이 전혀 들지 않는 지하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벤허가 노예 생활을 마치고 어머니와 누이동생을 찾아 나서지만, 나병 환자가 된 그들을 만날 수 없게 됩니다.
나병 환자가 된 벤허의 어머니와 누이동생 티르자는 정상인들과 함께 살 수 없어 성 밖 멀리 떨어진 음침한 나병인 마을에 숨어서 살게 됩니다. 이른 새벽 벤허의 어머니는 잠자는 딸 티르자를 남겨 놓은 채 밖으로 나왔습니다. 지난 삼년 동안 그의 병세는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본래 고상한 성격과 높은 인격을 지녔던 여인이라 자신의 추한 모습이 외부로 나타나지 않도록 감싸고 있었습니다. 머리는 매만질 수 없도록 헝클어졌고, 눈썹, 입술, 콧등, 두 볼의 살은 거의 없었습니다. 뼈가 앙상하게 드러나 보이는 손등에는 더러운 분비물이 더덕더덕 붙어 있습니다.
그가 서 있는 곳 머리 위에도 무덤이고, 아래에도 무덤이며, 오른쪽과 왼쪽에도 모두 무덤 뿐입니다. 그는 자신의 무덤까지도 생각하면서 앉아 있는데, 기진맥진해서 비틀거리며 벤허의 하인 암라하가 동산으로 올라오고 있었습니다. 그를 알아본 어머니는 "더러운 나병환자야, 나병환자야!"라고 소리칩니다.
본래 유대 법에는 일반인이 나병인에게 접근할 수 없게 되어 있었습니다. 만약 상대가 나병인인 줄 모르고 접근하면 그 쪽에서 큰 소리로 자신이 나병환자임을 알려야 합니다. 그리고 바람이 부는 날이면 나병환자는 다른 사람과의 거리를 최소한 50야드 밖으로 물러서서 걸어가야 했습니다.
암라하는 이 같은 경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드디어 벤허의 어머니의 발머리에 이르게 됩니다. 그리고 여인의 옷자락에 미친 듯이 입맞춤을 합니다. 여인은 피하려고 하였으나 암라하의 격동된 감정이 너무 크다는 것을 알고 가라앉기를 조용히 기다립니다. 그러다가 심하게 꾸짖습니다.
"이게 무슨 짓이냐? 암라하! 나는 나병환자야.
너의 사랑을 이렇게 무조건 복종한다는 것으로 보여줄 셈인가? 몹쓸것 같으니... 너도 이제 몸을 망쳤다.
다시는 너의 주인 어른, 벤허에게 돌아갈 수 없게 되었구나! 그러니 누가 우리에게 먹을 것을 날라다 주겠느냐?
이제 우리는 모두 망해 버렸구나!"라고 깊이 한탄합니다.
그 때 티르자가 잠에서 깨어 밖으로 나왔습니다. 티르자를 본 암라하는 다시 그에게로 달려갈려고 하지만 너무 단호하게 다가가지 말라는 어머니의 외침에 그만 멈춥니다.
거기서 암라하는 나병인을 고쳐주며 많은 기적을 행하며 다니는 매우 훌륭한 분을 그들에게 소개합니다. 그리고 그들을 그분에게로 안내 하겠다고 합니다. 암라하는 두 사람을 부축해서 산비탈에서 평지로 내려옵니다.
마침내 그들이 있는 산벼랑 너머로 한 떼의 군중들이 나타났습니다. 두 여인은 수천명의 군중들이 저마다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오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때 그 군중 속에 그들의 병을 낫게 해 줄 분이 계시다는 것을 알고, 두 여인은 그들 앞으로 다가서며 큰 소리로 외칩니다.
"오 오! 주여! 주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옵소서.
우리의 몸을 깨끗하게 만들어 주소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군중들이, "나병인이다. 돌로 쳐 죽이라!"고 소리칩니다. 그 때 나귀를 탄 사람이 그들에게로 가까이와 말을 건넵니다.
"그대들은 내가 그대들의 몸을 깨끗하게 해 줄 수 있다고 믿습니까?"
그들은 믿는다고 고백합니다. 그 때 나귀에 탄 분은 그들에게 그들이 믿는대로 되라고 말합니다. 그 순간 어머니는 딸을 안고 눈물을 흘립니다. 그들이 구원 받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두 여인은 행렬이 산 너머로 사라질 때까지 무릎을 꿇고 앉아 있습니다. 멀리서 들리는 노랫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게 되자 기적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나병을 앓고 있는 두 여인의 심장 속에는 피가 새롭게 솟아오르고, 혈액이 더 빠르게 온몸을 돌기 시작합니다. 녹슬고 병든 몸에서도 아픔도 없이 병이 나아가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 무섭던 병이 기적처럼 사라지면서 기력도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습니다. 육체뿐만 아니라 정신에서도 기운이 솟아났습니다.
오늘의 본문에는 예수께서 두 여인이 있던 벳바게로 지나가시지 않고, 예루살렘으로 가시면서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를 지나가시게 됩니다. 지나가시는 길에 한 마을에 들어섰을 때 나병환자 열명이 예수를 만나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고 멀리 서서 소리를 높여,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소리를 칩니다. 그들 열명 가운데는 한 사람의 사마리아인도 끼여 있었습니다. 본래 사마리아 사람과 유대인은 서로 상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처해있는 비참한 상황은 인종의 편견, 사회적 지위의 벽도 다 무의미한 것이 되게 했습니다. 오직 그들의 공통 관심사는 그 불행에서 벗어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고 "제사장들에게 가서 너희 몸을 보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대로 가다가 그들의 몸이 깨끗하게 된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중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발견하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아래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습니다. 본문에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말씀하십니다.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하셨습니다.
복음서 기자 누가는 절망적인 상황에 있던 열 사람의 나병환자 모두가 그들이 간절히 기다렸던 구원의 은혜를 입었지만, 그들 중 오직 한 사람만-그것도 이방인- 감사하기 위해 돌아왔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누가는 감사가 얼마나 어렵고 귀한 것(희귀한 것)인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삶의 비극은 우리들이 불행한 일을 당했을 때 불행 그 자체에만 매달리지 그것을 통해 자신에게 진정 필요한 것이 하나님의 긍휼임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아홉 사람의 나병환자들은 그러한 유형의 사람들을 대표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나병에서 낫게 된 것이 그들의 삶 전체에 임한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임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들에게는 단지 병고치는 것만이 목적이었습니다. 그러나 돌아온 한 사람은 나병 가운데서 하나님의 구원을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그는 자기에게 필요한 것이 건강 이전에 하나님의 긍휼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긍휼이 없는 삶이 얼마나 비참한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에게 있어 나병에서 깨끗케 된 것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찾아오신 사건이었습니다. 그는 나병에서 풀려남과 함께 그의 존재 가치 전체를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새롭게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사마리아인의 기쁨과 감사는 거기에 있었습니다. 그에게 나병에서 풀려나게 된 사건은 어쩌다 나병에 걸려 인생을 망칠 뻔했다가 기적으로 낫게 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불행에 처해 있을 때 불행 그 자체만을 없이 해 보려고 하지, 그러한 것을 통해서 자신에게 진정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지 못합니다.
사마리아인의 감사는 보다 깊은 차원의 감사입니다. 그에게 있어 나병에서 나음을 얻은 것은 단지 외형적으로 나타난 불행이 제거된 것이 아닙니다. 그에게서 병나음은 하나님께서 그를 버리지 않으셨고, 포기하지 않으셨다는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감사를 가지고 그 구원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왔습니다. 본문에서 강조하는 감사는 그것을 주신 분에게로 돌아와 그 분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구약 성서 열왕기하 5장에 시리아 장군 나아만의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시리아왕이 극진히 사랑하는 군사령관 나아만 장군은 불행하게도 나병에 걸렸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를 찾아가 그의 병을 고쳐주기를 간절히 구합니다. 엘리사가 그에게 지시한대로 하자 그의 병이 깨끗이 나았습니다. 나아만은 엘리사에게 나귀 두 마리에 실을 흙을 달래서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그 이유는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면 하나님께서 그에게 하신 일을 잊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기 위해서 였습니다. 나아만은 그의 병나음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에게 병고침은 곧 구원의 사건 그 자체였습니다.
사람들은 오직 육체적인 건강, 정치적 자유, 사회적 안정 그 자체만을 구합니다. 그러한 것들만을 구할 때 그것이 우상이 됩니다. 그러한 것들 안에는 하나님이 안계십니다. 그러한 것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손길을 보게될 때 하나님께 돌아와 그를 예배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우리 인간을 위해서 하신 구원의 사건을 기억하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감사는 믿음으로 생각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보고 그에게로 돌아와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예수께 돌아오지 않은 아홉 사람의 나병환자와 같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에 살면서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고 피조된 것들을 하나님 대신 섬기며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거기에는 늘 염려와 불안 걱정, 다툼이 있습니다.
금년 한 해를 거의 다 보내면서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이 하나님께 감사를 가지고 돌아오고 있는가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오히려 염려와 근심, 걱정으로 또는 물질에 노예가 되어 하나님을 멀리 떠나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들에게 닥쳐오는 불행을 해결하거나, 예방하기 위해 온갖 자구책들을 마련하느라 여념이 없습니다. 자신의 불행, 실패, 질병, 고난, 성공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을 깨달은 사람은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감사를 드리게 됩니다.
오늘의 본문 사건을 통해서 우리가 깊이 생각하게 되는 것은 우리의 생에 일어나는 모든 문제를 통해서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만 있다면 그것이 얼마나 행복이며 축복인가를 알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지금 이 시간 지난 일 년간 또는 지금까지의 생의 결과가 하나님께 돌아와 감사를 드리는 시간인지 그렇지 않고 이 시간이 하나님을 멀리 떠나 있는 시간인지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만약 우리 모두가 지난 한 해 동안 믿음으로 살아왔다면 이 시간은 하나님께 감사의 시간일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물질이나 피조적인 것들에 매달려 살았다고 하면 이 시간 하나님을 멀리 떠나 있을 것입니다.
지금 이 시간에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않았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예수님의 이 말씀은 은혜 없이,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을 향해 언제나 던지시는 물음일지도 모릅니다. 너희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로 한 해를 살아오지 않았느냐? 그런데 이 소수의 사람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자가 없느냐?
너희들은 왜 그렇게 욕심이 많으냐, 너희들은 왜 그렇게 염려가 많으냐, 너희들은 왜 그렇게 불안해 하느냐, 너희들에게 왜 그렇게 평안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모르느냐? 왜 눈에 보이는 이 모든 것들을 통해 나를 보지 못하느냐? 묻고 계십니다
출처/임영수목사 설교자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