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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정받는 사람 (누가복음 18:9-14)
대전이 입박해 오는 급박한 때, 군사령관은 한 부대를 시찰하고 있었습니다. 그 부대는 전세가 어려워져서 급하게 편성된 부대였기 때문에 사령관이 아는 이들은 별로 없었습니다. 이런 병사들로 전쟁을 제대로 치를 수 있을까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한 병사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 병사는 예전에 혁혁한 전공을 세운 사람으로 사령관도 잘 알고 있는 병사였습니다. 그는 지난번 전쟁터의 총탄과 피바다 속에서도 살아남은 백전불굴의 병사였습니다. 사령관은 그를 보는 순간 이번 전쟁에서도 아군이 승리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사령관은 그 부대의 부대장에게 "나는 저 병사를 잘 알고 있네. 그리고 나는 저 병사를 믿네"라는 말을 남기고 가벼운 마음으로 돌아갔습니다. 그 말을 들은 부대장은 까다로운 사령관이 믿을 정도로 대단한 병사가 자신의 부대에 있다는 것이 자랑스러웠고 힘이 되었습니다. 결국 그 부대는 모든 병사들이 이길 수 있다는 확신에 가득차게 되었고, 적과의 싸움에서 큰 전공을 거두게 되었습니다.
세상에서 이처럼 믿음직한 사람 한 명만 곁에 있어도 마음이 든든합니다. 그 사람과 함께 한다면 어떤 일이든 잘 해낼 수 있을 것이라는 긍정적인 기대와 확신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믿을만한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정작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고 믿을만한 사람인지는 잘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러분은 가정에서 다른 가족들이 믿을만한 가족입니까? 여러분은 회사에서 직장동료나 상사들이 인정할 만한 일꾼입니까? 여러분은 교회에서 인정받을 만한 교우입니까? 또한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인정할 만한 성도들입니까?
우리는 이 세상 누구에게 인정을 받는 것보다 하나님으로부터 믿을만한 하나님의 자녀라는 인정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형식적인 신앙, 편한 것만 추구하는 신앙, 자신의 유익만을 추구하는 신앙을 과감히 넘어서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어려운 일, 힘든 일은 있을 때, 그 일을 해결할 수 있는 사람으로 가장 먼저 떠오르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나 주님의 기쁨 되기 원하네'라는 찬양이 있습니다. 구원받은 성도라면 '주님의 기쁨'이 되기를 원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주님의 기쁨이 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주님으로부터 인정받는 사람이 될 수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은 우리가 잘 아는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이 두 사람은 같은 유대인이면서도 삶의 방식은 극과 극이었습니다. 먼저, 바리새인들은 신앙에 최고의 가치를 두고 사는 사람들로써, 세속적인 일에는 별 관심을 갖지 않고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려고 부단히 노력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많은 사람들의 존경과 인정을 한 몸에 받았습니다.
반면에 세리는 부와 명예와 권세를 갖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현실주의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로마의 권력을 등에 업고 그들에게 협조하면서 실익을 챙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신앙보다는 현실의 행복을 추구하는 그들은 동족들로부터 매국노라는 지탄을 받았습니다. 누구도 그들과 가까이 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이 두 부류의 사람을 비교하면서 바리새인이 결코 세리보다 나을 것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에게는 세리보다 바리새인이 인정을 받을 지 모르지만 하나님께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인정을 받고 '주님의 기쁨'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본문 말씀을 통해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교만한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
예수님은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는 바리새인의 기도와, 사람들로부터 멸시를 당하는 세리의 기도를 나란히 놓고 비교하셨습니다. 당시 바리새인은 '의인'의 대표요, 세리는 '죄인'의 대표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극과 극의 두 사람을 비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일반적인 사람들의 생각과는 달리 세리가 바리새인보다 더 의롭다고 판단하셨습니다(14절).
만일 오늘날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려고 나름대로 노력하는 사람보다, 세리처럼 손가락질 받는 이의 기도가 더 낫다고 한다면 정말 허탄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럼 왜 주님께서는 세리를 더 칭찬하셨겠습니까?
신약 시대의 바리새인들은 형식이나 관습을 중요시하였고 철저하게 금식을 지켰습니다. 율법을 잘 알고 있었던 바리새인들은 모세의 율법을 잘 연구했고, 레위기의 청결 의식도 철저하게 지키려고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점차 전통이나 장로들의 유전을 중요하게 여겨 거의 하나님의 말씀과 동등하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종종 그들의 형식적인 신앙과 교만에 대해 지적하시곤 하였습니다. 오늘 본문 또한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비유로 하신 말씀입니다(눅 18:9).
즉 예수님은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한 가장 큰 원인으로 '교만'을 꼽으셨습니다. 11절에 나와있는 바리새인의 기도를 잘 살펴보면, 처음부터 끝까지 '나'를 내세우는 기도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눅 18:11-12)
바리새인의 기도에는 자신이 '죄인'이라는 의식은 전혀 없습니다. 그들은 자기 자신을 철두철미하게 '의인'으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높이고 자신을 낮추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의 기도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랑만 늘어놓는 교만한 기도였습니다.
이처럼 영적 교만은 자기 자신의 죄를 보지 못하게 합니다. 자기 자신의 타락한 상태에 대한 인식이 없이 다른 것들을 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요한일서 2장 8절에서도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가정에서 창문을 닫고 커튼을 치면 방이 깨끗해 보입니다. 그러나 창문을 열고 햇볕이 들어오면 보이지 않았던 먼지가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 자신도 세상적인 기준으로 보면 의롭게 보일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빛으로 보면 죄와 허물 투성이입니다. 그런데도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지 못하는 것은 마치 창문을 닫아놓은 방안에서, 먼지가 없다고 여기는 것처럼 자신을 속이는 것입니다.
프랑스에서 비행기 추락으로 346명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는데 그 사고는 어처구니 없게도 작은 나사 하나가 빠지는 바람에 화물칸의 문이 완전히 닫히지 않아서 일어났다고 합니다. 작은 나사 하나가 전혀 예기치 못하는 결과를 빚어낸 것입니다.
사람들은 교만을 큰 죄라고 여기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오히려 그것을 자신감이나 사회적 능력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작은 나사하나가 비행기를 추락시킬 수 있듯이 교만은 우리의 영혼을 파멸하는 치명적인 죄인 것입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는 잠언 16장 18절의 말씀은 이를 경고해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의로운 것은 다만 주님이 그렇게 여겨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만 죄인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 앞에서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고 주님을 찬양하는 것 외에는 내세울 것이 없습니다. 세리는 바로 이러한 기도를 드렸기 때문에 '의인의 대표'인 바리새인보다 의롭다는 인정을 받은 것입니다.
2. 자신이 죄인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면 가장 먼저 자신의 죄에 대해 큰 슬픔을 느낍니다. 창문을 통해 햇빛이 들어오면 방안의 먼지가 뿌옇게 보이는 것처럼, 거룩하신 주님 앞에서 자신의 죄가 낱낱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세리의 기도가 바로 이러한 기도였습니다. 세리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외딴 곳에서 머리를 잔뜩 숙이고 가슴을 치며,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 18:13)라고 기도했습니다.
비록 세리는 돈과 권력과 명예를 추구하면서 많은 것을 누리고 있었지만 마음 한 구석에 웅크리고 있는 죄책감은 그를 끊임없이 괴롭혔습니다. 그는 스스로 '죄인'임을 잘 알고 있었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 때문에 얼굴도 들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기도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 세리를 향해 예수님은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고 선언하셨습니다(눅 18:14절)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라는 말의 헬라어 동사는 δεδικαιωμενοσ (데디카이오메노스)인데 이 동사의 시제는 과거완료형입니다. 이는 과거의 동작이 완전히 끝나 불변하는 경우에만 사용하는 시제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의로움 곧 구원의 확신은 언제까지나 변함이 없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사람들로부터 '죄인의 대표'라고 여겨졌던 세리는 주님으로부터 '의인의 대표'라고 인정을 받게 된 것입니다.
에든버러 대학의 제임스 심프슨 경은 진통제를 발견해서 고통 없이 수술을 받게 했습니다. 그것은 의학계의 노벨상 감이고 대 발견이었습니다. 그의 강의 시간에 한 학생이 노교수 심프슨 경에게 "선생님의 생애 가운데 가장 뜻깊고 소중한 발견 한 가지를 들라고 하면 무엇을 들겠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물어볼 것도 없이 그가 발견한 진통제는 대단한 것이었기에 학생들은 그러한 대답을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한참 동안 머리를 숙이고 있던 심프슨 교수는 "나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소중한 발견은 나는 죄인이라는 사실과 예수님이 나의 구주라는 사실을 발견한 것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인생을 뒤바꿀만한 대단한 발견은 다름 아닌 우리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과 그 죄 문제를 해결해 주실 분이 주님 밖에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발견한 세리는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습니다.
여기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는 말도 중요하지만 "집에 내려갔다"는 말에도 큰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본문에 나오지는 않지만, 자신이 죄인임을 애통해하며 머리를 숙이고 가슴을 치며 기도하던 모습과,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갈 때의 모습은 대조적인 모습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분명 그가 집으로 내려갈 때는 얼굴이 달라졌을 것입니다. 이제는 죄 문제로 시달리던 괴로운 모습이 아니라, 모든 죄를 용서 받은 의인의 환한 얼굴이 되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여전히 그를 죄인이라고 정죄하겠지만, 이미 그는 죄로부터의 해방감을 맛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1-2)
주님으로부터 '의인'이라는 인정을 받은 세리는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된 모습으로 "집"에 내려갔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모습으로 매일 집에 돌아가십니까? 우리도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집'으로 내려가야 합니다. 가정에서 변화된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구원받은 사람으로써 매일 새로운 모습으로 "집"에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그 가정 또한 구원받은 가정으로써 기쁨과 행복이 넘치는 집이 되길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정예배가 있어야 합니다. 한경직 목사는 우리 가정은 작은 교회라고 했습니다. 교회 안에는 반드시 제단이 있어야 하는 것처럼, 우리 가정에도 제단을 쌓고 온 가족이 함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3.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서야 합니다.
미디안 광야에서 40년 동안 양치기로 지내던 모세는 어느 날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나타나신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출 3:5)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거룩한 자리에서 신을 벗고 하나님 앞에 엎드린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는 사명을 받고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40년 동안 광야를 헤매다가 이제 막 가나안으로 들어가려고 할 때, 첫 관문인 여리고를 눈 앞에 두고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군대장관'을 만났습니다. 그는 여호수아에게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수 5:14-15)라고 명령했습니다. 여호수아는 이 말을 듣고 하나님을 만난 그 거룩한 자리에서 신을 벗고 엎드렸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능력을 받아 여리고 성을 점령하는 대장군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는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장소요, 사명을 받는 장소입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은 우리가 신은 신을 벗을 것을 요구하십니다.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인정받고 사명을 받음에 있어 겸손과 순종이 필요함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세리를 비교하시면서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눅 18:14)는 말씀으로 결론을 맺으셨습니다. 이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어떤 태도를 가지고 나아가느냐에 따라 하나님의 평가가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를 높이는 자는 천한 데에 처할 것입니다. 반면,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를 낮추는 자는 하나님께서 그를 높여 주실 것입니다.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관을 제하며 면류관을 벗길지라. 그대로 두지 못하리니 낮은 자를 높이고 높은 자를 낮출 것이니라"(겔 21:26)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설 때, 스스로 죄인임을 깨닫고 겸손하게 서야 합니다. 우리가 신고 있는 신을 벗어야 합니다. 아무리 위대한 선지자나 왕이라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 설 때, 그들은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사 6:5).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렘 1:6).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종으로 종의 아비 다윗을 대신하여 왕이 되게 하셨사오나 종은 작은 아이라 출입할 줄을 알지 못하고"(왕상 3:7). 또한 예수님의 수제자인 베드로도 예수님과의 첫 대면에서 자신이 죄인임을 깊이 깨닫고 예수님의 무릎 아래 엎드려서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 5:8)라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겸손히 서는 사람은 다름 아닌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유대인 랍비의 교훈집에도 "언제나 기도하는 사람은 무쇠보다 더 강한 담을 둘러치는 사람이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인정받는 길은 이처럼 매일 기도로 하나님 앞에서는 것입니다. 특별히 매일 새벽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서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인정을 받은 사람으로써 큰 일을 감당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매일 겸손하게 기도함으로써 하나님 앞에 설 때,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하나님께 인정받는 사람이 되어 교회를 위해, 나라와 민족을 위해 크게 쓰임 받는 하나님 나라의 일꾼이 되시길 바랍니다.
출처/전병금목사 설교자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