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인들을 위한 잔치  (마26:26-30)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만찬을 나누신 내용입니다. 이것이 이 시간 우리 모두가 거행하려고 하는 성찬예식입니다. 당시 만찬을 나누었던 장소는 예루살렘에 있는 마가의 다락방입니다. 식탁 위에 준비된 음식은 떡과 포도주 뿐 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참석한 사람은 예수님을 비롯 13사람 뿐 이었습니다. 참으로 의미 있는 만찬이었습니다. 분명히 그날 밤 잔치는 적은 사람들이 작은 방에서 초라하게 떡과 잔을 나눈 조촐한 잔치였습니다. 또 그날 밤의 잔치는 죄인들을 위한 잔치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생겨났습니다. 그날 밤의 잔치가 기독교 2천년 동안 모든 기독교인들에 의하여 지금까지 계승되어 오고있다는 사실입니다. 지금 우리도 그 예식을 거행하려고 합니다. 왜 성찬 예식이 죄인들의 잔치일까요?
예수님께서는 눅5:32에서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죄인들을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대속의 죽음을 죽으신 것입니다. 성찬예식이 무엇입니까? 바로 여기에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기념하는 예식입니다.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이 거룩한 성찬예식은 누구를 위한 잔치이며, 어떤 잔치입니까?

첫째. 이 잔치는 사랑의 잔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는 일과 그 일로 인한 제자들의 배반을 생각하셨지만 제자들에 대한 그 용서와 사랑으로 잔치를 시작하셨습니다. 죄인들을 위한 사랑의 잔치인 성찬예식에 참여하신 성도님들이여 지금 조용히 자신에게 물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지 못하고 미워했던 사람은 없는가. 오늘부터 사랑해야 되겠다고 작정하고 싶지는 않은가?. 그리고 이렇게 고백해 보십시오. '주님 미워하는 마음을 없애주옵소서. 주님 이제부터 사랑하게 하소서' 사랑하는 것은 이론이 아닙니다. 논리도 아닙니다. 실천입니다. 눅22:17에 보면 예수님께서 만찬을 거행하실 때에 '너희끼리 나누라'고 하셨습니다. 너희끼리 사이 좋게 지내라. 그러한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너희끼리 다투지 말고 헐뜯지 말고 서로 사랑하라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주신 말씀이 있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세 번을 반복하셨습니다. 그 때 베드로는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지금도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예수님을 사랑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둘째. 죄인이 회개하도록 하는 잔치였습니다.
이 잔치에는 예수님을 팔아먹은 인신매매범인 가룟유다가 참여했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피를 흘려야만 했습니까? 본문28절에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라고 했습니다. 여기 죄는 누구의 죄입니까? 바로 나의 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 죄 때문에 오셨습니다. 내 죄 때문에 고통 받으셨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내 죄 때문에 몸을 찢기셨고, 피를 흘리셨습니다. 그리고 내 죄 때문에 갈보리 언덕 십자가에 높이 달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하시며 절규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 허물 때문에 매 맞으셨고 내 죄악 때문에 창에 찔리셨고 내 완악 때문에 머리에 가시관을 쓰셨습니다.
성도의 새 출발은 회개로부터 시작됩니다. 다시 말하면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말하며 참회하는 그것이 바로 성도의 새 출발 입니다. 물론 처음에는 교회에 나올 때 저마다 의인이었습니다. 스스로 깨끗합니다. 스스로 떳떳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난 순간 자기가 무서운 죄인임을 깨닫게 됩니다. 바울은 말하기를 '나는 죄인가운데 괴수로다'고 했습니다. 베드로도 밤새껏 그물을 던져 고기를 낚았지만 한 마리도 잡지를 못한 골탕먹은 한 밤을 지내고 새벽녘에 그물을 씻고 있었을 때 주님께서 '네 그물을 깊은데로 던져라'라는 분부대로 그물을 던지고 많은 고기를 낚을 수 있었습니다. 그 때 그는 스스로 고백하기를 '주여 나를 떠나주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했습니다. 생각하면 죄인 아닌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성찬예식에 참여하시려는 여러분! 이 성찬예식이 누구를 위한 예식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성경에서 '너희를 위한'이라고 했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위하여 베풀어주신 성찬예식인지라 우리 모두는 이 예식에 동참하면서 십자가 지신 주님을 생각하고 내 죄를 깨닫고 통회 자복하는 시간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성찬예식에 동참하는 시간은 내 죄를 회개하는 시간인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셋째 믿음을 고백하는 자의 잔치 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이 예식에 동참할 자격이 없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교회는 어떤 곳입니까? 성찬예식을 집행하는 곳입니다. 이 예식을 우리 주님을 나의 주로 고백을 하는 것이 기독교의 핵심 입니다. 교회는 주님의 은혜를 감사하고 주님께 헌신을 다짐하면서 도마처럼 나의 주여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 믿음의 사람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물론 처음에는 믿음이 보잘 것 없고 가치도 없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성숙한 믿음 되기를 위해서 새벽재단을 쌓기도 하고 열심히 봉사를 하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을 기념하면서 하나님의 백성끼리 교제를 나누는 예식입니다. 따라서 성찬예식을 교제를 위한 예식이기도 합니다. 교제는 두 가지 의미 있습니다. 하나는 주님과의 교제요. 또 하나는 형제끼리의 교제입니다. 여기 두 교제는 믿는 성도들에게 다 소중합니다. 하나도 소홀히 할 수 없는 것이 교제입니다. 우리는 여기 펼쳐진 성찬 상 앞에서 무너지는 교제를 회복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먼저 확인 할 것이 있습니다. 왜 나는 주님과 멀어졌는가? 왜 나는 형제와 담을 쌓고 있는가? 왜 나는 형제를 미워하는가? 저마다 해답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여기 성찬 상 앞에서 정말 성찬예식은 나의 믿음을 고백케 하는 예식입니다. 주님과의 교제가 끊어지면 내 영혼은 죽습니다. 형제와 교제가 끊어지면 기도, 전도, 봉사에 소홀해 집니다. 그리고 내 영혼이 시들어 갑니다. 그렇다면 이 교제를 회복시켜야 합니다. 교제를 회복시키는 비결은 오직 믿음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참 교제는 어렵습니다. 또 믿음으로 만들어진 교제라야 참 교제입니다. 그런데 무엇이 우리의 교제를 가로막고 방해합니까? 나의 죄이며, 죄가 나로 하여금 하나님을 멀리하게 했고, 형제와 멀리하게 한 것입니다. 인생이 무엇입니까? 저마다 냄새나는 죄인들입니다.
결론으로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행하는 예식은 믿음을 고백하는 성스러운 예식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나 같은 죄인을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것을 믿나이다 하면서 동참하는 예식이 성찬예식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없이는 성찬예식에 열 번을 참석해도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는 것 같아도 믿음이 없습니다. 믿음이 큰 것 같은데 믿음이 없습니다. 홍해를 갈라지게 할 수 있는 믿음이 있는 줄로 알았는데 착각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예식에 동참하는 성도들 겸손한 자세로 믿음의 옷깃을 여미면서 '나는 죄인입니다' '나는 형제를 사랑하지 못했습니다''나는 믿음도 없었습니다' '이제 부터는 형제를 사랑하고 주님만을 믿겠나이다'라고 고백하는 복된 시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박종갑목사 설교자료 중에서(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