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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사람 (본문 눅2:25-35)
어떤 심리학 박사가 사람들에게 인생의 사는 목적을 조사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94%에 해당하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인생의 목적은 기다리는 데 있다고 대답하였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은 더 좋은 사람을 기다리고 기회를 기다리며 좋은소식을 기다리고 변화를 기다립니다. 그러나 우리는 많은 것을 기다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기다림은 행동이 없고 그저 막연하게 기다리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으로 주신 진정한 "기다림"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기다림"에는 두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그저 희망사항입니다. 막연하게 기다리고 그저 나아지겠지라는 희망인 것입니다. 이런 기다림에는 어떠한 내용도 약속도 없고 그저 바라기만 합니다.
다른 하나는 객관적인 약속이 있으며 미래로부터 지금을 점검할 수 있는 기다림입니다. 이 기다림은 반드시 성취되는 것이며 그 성취의 꿈을 갖는 것입니다 . 이것은 바로 소망의 기다림입니다. 즉 이렇게 진정한 기다림은 막연한 것이 아니라 내용이 있으며 그 내용이 현재 나를 변화시키게 됩니다. 과거가 나를 만들고 현재가 나를 만들어 간다는 생각은 거짓입니다. 그런 생각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미래로부터 약속되어진 그 내용이 지금의 나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산모가 하는 생각이 아이를 결정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합니다. 이렇듯 우리가 사모하고 생각하는 사람을 우리 또한 닮아가게 됩니다. 우리는 지금 누구를 열렬하게 사모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본문에서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던 시므온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시므온을 보면서 우리는 무엇을 기다리고 어떻게 기다려야 되는가를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시므온은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시므온은 자신의 형편의 어떠한 안위를 위해서 메시야를 기다린 것이 아닙니다. 그는 영적인 메시야, 즉 이스라엘을 구원해주실 분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생각이나 방법대로 기다린 것이 아닙니다. 그는 성령의 이끌림으로 메시야를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메시야를 기다렸다는 것의 두가지의 다른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는 메시야적 세대의 기다림입니다. 이것은 유토피아적인 세계를 꿈꾸는 것으로 세대를 변화시키고 사람들에게 안위를 주는 그러한 메시야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저 메시야 그분을 기다립니다. 그분 자체를 기다림으로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분께서 어떠한 나의 상황을 바꾸어 주시고 삶에서의 보이는 풍족함을 위해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그저 메시야 그분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분께서 나를 구원해 주실 뿐만 아니라 이 온 인류를 구원하실, 빛으로 오신 분임을 믿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시므온은 후자쪽인 그저 메시야 그분을 기다린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경에 근거한 메시야를 기다린것인 아니라 자신이 꿈꾼 변질되고 각색된 메시야를 기다린 것입니다. 자신의 조국을 해방시키며 자신의 안위를 찾아줄 그런 메시야를 기다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들의 생각에서 벗어난 예수님을 메시야로 모실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나는 메시야를 어떻게 기다려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우리가 기다려야 할 메시야에 대해 이번 크리스마스에 우리가 소망하는 메시야에 대해 다시한번 점검하고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첫째, 그저 막연하게 꿈꾸는 메시야가 아닌 구체적인 말씀을 갖고 그 말씀에 근거하는 기다림이여야 합니다. 바로 약속과 기다림이 있어야 합니다. 아무것도 약속한 것도 없는데 그저 막연하게 기다리는 것은 무서운 것입니다. 그것은 무지개를 꿈꾸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은 개꿈인 것입니다. 우리는 올바르게 메시야를 기다려야 합니다.
둘째, 책임이 있는 기다림이어야 합니다.
바로 준비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열처녀 비유에서 알듯이 슬기로운 다섯처녀는 기름을 준비하였지만 다른 다섯처녀는 기름을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준비가 없는 처녀는 바로 어리석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미래를 위해 나는 무엇을 준비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을 맞을 준비를, 영원한 나라를 갈 준비를 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은 바로 목숨을 바쳐 그 나라를 준비하지 않았습니까? 우리에게도 그러한 준비가 필요합니다.
세째, 약속을 현실화 하는 기다림이여야 합니다.
주님을 영접하면 주님의 다스림안에 있어야합니다. 주님이 진실로 나의 보좌에 앉으시고 나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동박박사들이 헤롯을 찾아갔을때 온 예루살렘은 소동이 됩니다. 그리고 대제사장들과 서기관은 메시야가 베들레헴에서 나시게 됨을 알고 동방박사들에게 이야기해줍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기 예수께 경배하러 오기는 커녕 오히려 그분을 죽이려 했습니다. 진리을 알면서도 그 아는 것을 순종함으로 현실화시키지 못했던 것입니다. 또한 베들레헴 어느 곳도 아기 예수님이 누울 곳이 없어서 말구유에 누우셨다는 것도 슬픈일이 아닐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메시야를 기다리지만 메시야를 기다림에 대한 현실적인 순종의 모습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신앙의 모순입니까? 바로 우리 또한 이러한 모습을 갖고 있지 않습니까?
그들이 예수님을 핍박하고 죽이기까지 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자신이 꿈꾸워왔던 메시야가 아니므로 자신의 왕좌를 내줄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고정관념과 생각을 깨뜨리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메시야를 고백하고 영접해야 합니다. 우리 또한 우리가 기다리는 예수님의 모습은 실제의 모습에 색깔을 칠하여서 변질되어 있을 줄 모릅니다.그래서 내가 생각한 메시야와 다르다는 생각에 진정한 메시야를 영접하지 못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시므온은 오늘 본문 29절부터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시므온은 메시야를 보고 구원을 보았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자신의 안위가 아닌 만민의 구원이시며 빛이되신 예수님을 본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놓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죽어도 좋다는 고백인 것입니다.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면 죽어도 좋은 것입니다. 그러한 기쁨이 우리에게 충만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메시야는 이땅에 오셨고 지금도 오시고 계십니다. 우리곁에 오셔서 우리가 진정한 그분의 모습 그대로 영접하길 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기다림이 정말 구체적인 말씀을 붙잡고 열심히 준비하여 그분의 말씀대로 순종함으로 약속의 말씀을 현실로 성취하시길 원하십니다. 이러한 축복을 모든 성도님들이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출처/오경남목사 설교자료 중에서
어떤 심리학 박사가 사람들에게 인생의 사는 목적을 조사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94%에 해당하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인생의 목적은 기다리는 데 있다고 대답하였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은 더 좋은 사람을 기다리고 기회를 기다리며 좋은소식을 기다리고 변화를 기다립니다. 그러나 우리는 많은 것을 기다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기다림은 행동이 없고 그저 막연하게 기다리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으로 주신 진정한 "기다림"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기다림"에는 두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그저 희망사항입니다. 막연하게 기다리고 그저 나아지겠지라는 희망인 것입니다. 이런 기다림에는 어떠한 내용도 약속도 없고 그저 바라기만 합니다.
다른 하나는 객관적인 약속이 있으며 미래로부터 지금을 점검할 수 있는 기다림입니다. 이 기다림은 반드시 성취되는 것이며 그 성취의 꿈을 갖는 것입니다 . 이것은 바로 소망의 기다림입니다. 즉 이렇게 진정한 기다림은 막연한 것이 아니라 내용이 있으며 그 내용이 현재 나를 변화시키게 됩니다. 과거가 나를 만들고 현재가 나를 만들어 간다는 생각은 거짓입니다. 그런 생각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미래로부터 약속되어진 그 내용이 지금의 나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산모가 하는 생각이 아이를 결정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합니다. 이렇듯 우리가 사모하고 생각하는 사람을 우리 또한 닮아가게 됩니다. 우리는 지금 누구를 열렬하게 사모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본문에서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던 시므온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시므온을 보면서 우리는 무엇을 기다리고 어떻게 기다려야 되는가를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시므온은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시므온은 자신의 형편의 어떠한 안위를 위해서 메시야를 기다린 것이 아닙니다. 그는 영적인 메시야, 즉 이스라엘을 구원해주실 분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생각이나 방법대로 기다린 것이 아닙니다. 그는 성령의 이끌림으로 메시야를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메시야를 기다렸다는 것의 두가지의 다른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는 메시야적 세대의 기다림입니다. 이것은 유토피아적인 세계를 꿈꾸는 것으로 세대를 변화시키고 사람들에게 안위를 주는 그러한 메시야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저 메시야 그분을 기다립니다. 그분 자체를 기다림으로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분께서 어떠한 나의 상황을 바꾸어 주시고 삶에서의 보이는 풍족함을 위해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그저 메시야 그분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분께서 나를 구원해 주실 뿐만 아니라 이 온 인류를 구원하실, 빛으로 오신 분임을 믿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시므온은 후자쪽인 그저 메시야 그분을 기다린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경에 근거한 메시야를 기다린것인 아니라 자신이 꿈꾼 변질되고 각색된 메시야를 기다린 것입니다. 자신의 조국을 해방시키며 자신의 안위를 찾아줄 그런 메시야를 기다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들의 생각에서 벗어난 예수님을 메시야로 모실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나는 메시야를 어떻게 기다려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우리가 기다려야 할 메시야에 대해 이번 크리스마스에 우리가 소망하는 메시야에 대해 다시한번 점검하고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첫째, 그저 막연하게 꿈꾸는 메시야가 아닌 구체적인 말씀을 갖고 그 말씀에 근거하는 기다림이여야 합니다. 바로 약속과 기다림이 있어야 합니다. 아무것도 약속한 것도 없는데 그저 막연하게 기다리는 것은 무서운 것입니다. 그것은 무지개를 꿈꾸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은 개꿈인 것입니다. 우리는 올바르게 메시야를 기다려야 합니다.
둘째, 책임이 있는 기다림이어야 합니다.
바로 준비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열처녀 비유에서 알듯이 슬기로운 다섯처녀는 기름을 준비하였지만 다른 다섯처녀는 기름을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준비가 없는 처녀는 바로 어리석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미래를 위해 나는 무엇을 준비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을 맞을 준비를, 영원한 나라를 갈 준비를 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은 바로 목숨을 바쳐 그 나라를 준비하지 않았습니까? 우리에게도 그러한 준비가 필요합니다.
세째, 약속을 현실화 하는 기다림이여야 합니다.
주님을 영접하면 주님의 다스림안에 있어야합니다. 주님이 진실로 나의 보좌에 앉으시고 나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동박박사들이 헤롯을 찾아갔을때 온 예루살렘은 소동이 됩니다. 그리고 대제사장들과 서기관은 메시야가 베들레헴에서 나시게 됨을 알고 동방박사들에게 이야기해줍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기 예수께 경배하러 오기는 커녕 오히려 그분을 죽이려 했습니다. 진리을 알면서도 그 아는 것을 순종함으로 현실화시키지 못했던 것입니다. 또한 베들레헴 어느 곳도 아기 예수님이 누울 곳이 없어서 말구유에 누우셨다는 것도 슬픈일이 아닐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메시야를 기다리지만 메시야를 기다림에 대한 현실적인 순종의 모습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신앙의 모순입니까? 바로 우리 또한 이러한 모습을 갖고 있지 않습니까?
그들이 예수님을 핍박하고 죽이기까지 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자신이 꿈꾸워왔던 메시야가 아니므로 자신의 왕좌를 내줄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고정관념과 생각을 깨뜨리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메시야를 고백하고 영접해야 합니다. 우리 또한 우리가 기다리는 예수님의 모습은 실제의 모습에 색깔을 칠하여서 변질되어 있을 줄 모릅니다.그래서 내가 생각한 메시야와 다르다는 생각에 진정한 메시야를 영접하지 못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시므온은 오늘 본문 29절부터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시므온은 메시야를 보고 구원을 보았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자신의 안위가 아닌 만민의 구원이시며 빛이되신 예수님을 본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놓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죽어도 좋다는 고백인 것입니다.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면 죽어도 좋은 것입니다. 그러한 기쁨이 우리에게 충만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메시야는 이땅에 오셨고 지금도 오시고 계십니다. 우리곁에 오셔서 우리가 진정한 그분의 모습 그대로 영접하길 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기다림이 정말 구체적인 말씀을 붙잡고 열심히 준비하여 그분의 말씀대로 순종함으로 약속의 말씀을 현실로 성취하시길 원하십니다. 이러한 축복을 모든 성도님들이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출처/오경남목사 설교자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