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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인잔치의 질서 (마태복음 22:1-14)
이 사건에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나옵니다. 먼저 혼인집의 청함을 거절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임금님이 베푼 잔치에 청함 받은 사람들이 나는 밭에 일하러 가야 된다, 나는 장사하러 가야 된다, 또 어떤 악한 사람들은 그 청함에 심부름하는 종들을 능욕하고 잡아죽였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임금이 군대를 보내어 무리들을 전부 진멸했다는 비극으로 끝나는 사건입니다.
구원에 이르는 예복
또한 혼인잔치 집에 많은 사람들이 참여했는데 그 사람들 중에도 예복을 입은 사람들과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으로 나누어졌습니다. 본문에 주인이 한 사람을 보고 왜 예복을 입지 아니하였느냐 이렇게 말했는데 이것은 예복을 안입은 사람이 한 사람 뿐이라고 오해하면 안됩니다. 예복을 안입은 사람들 중에 한 사람을 지목해서 따지는 것입니다. 예복을 입지 아니한 사람에 대해서 그 주인이 너무 가혹한 형벌을 내립니다.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마22:13)고 했습니다.
예복을 안입었으면 그저 나가라 하면 될텐데 그 사람을 지옥에 던지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예복문제는 단순한 옷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면 이 예복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것은 구원론의 문제입니다. 예복을 안입으면 단순히 쫓겨나는 게 아니라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복은 중심으로 믿어 구원받은 자가 입고 있는 옷입니다.
그리고 이 옷은 여러 가지 의미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찬양은 노래가 아닙니다. 찬양은 소리도 아닙니다. 찬양은 구원받은 자가 부르는 노래입니다. 찬양은 소리나 이 세상의 음악의 개념으로 말하는 노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구원을 노래하는 것이 곧 찬양입니다.
청함 받음과 택함 받음
이 혼인잔치를 보면 사람들이 분류가 됩니다. 청함을 받고 안온 사람들과 청함을 받고 왔지만 예복을 안입은 사람들은 결과적으로 똑같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예복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마22:14).
혼인잔치 집에 청함을 받은 사람들은 많지만 예복을 입은 사람은 적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지상의 하나님 나라의 모습이요 하나님의 교회의 모습입니다. 현재 이 지구촌의 인구를 가지고 계산을 해봐도 그렇습니다. 성경 말씀을 우리와 같이 개신교의 입장에서 고백하고 있는 크리스찬들은 그 수가 많지 않습니다. 4억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천주교라든지 또 아르메니안교나 러시아정교, 희랍정교 같은 기독교의 근원을 둔 종파들을 전부 합쳐서 18억으로 추산하는데 그것은 올바른 신앙고백을 하는 성경적인 크리스찬은 결코 아닙니다. 그러므로 택함을 받은 자는 실제로 적은 것입니다. 대한민국의 교회가 약 5만여개가 있고 약 7만명의 목사들과 수만명의 강도사와 전도사들 그리고 수십만명의 장로님들이 계시는 나라니까 다른 나라에도 이렇게 크리스찬들이 많지 않겠느냐 라고 보겠지만 이 지구촌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면 이 혼인잔치의 혼주가 누구냐는 것입니다. 임금 곧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잔치를 베풀었다고 했습니다. 신랑은 자기 아들 곧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면 이제 신부가 누구냐는 것인데 바로 예복을 입은 사람입니다. 예복을 입은 사람이라야 그 집에 있는 아들과 더불어 그 잔치를 즐길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손님으로 초청을 했을 때 거절한 사람들은 유대인들을 말합니다. 데리러 간 사람은 세례 요한과 예수님을 말합니다. 세례요한이 유대인들에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하나님의 아들 혼인잔치에 초청을 했는데 그만 유대인들이 그 하늘나라의 청첩장을 가지고 온 세례 요한을 잡아 죽여버렸습니다. 예수님도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하나님의 혼인잔치에 초대했지만 그들이 예수님도 잡아 죽였습니다.
포기하지 않는 혼주
그러나 혼주는 그 잔치를 그냥 포기하지 않습니다. 다른 종들을 다시 보냈습니다. 앞에 보낸 종들이 죽었지만 포기하지 않고 다른 종들을 보냈습니다. 그 다른 종들이 누구일까요? 사도들이요 오늘의 전도자들입니다. 하나님은 천국잔치를 배설해 놓고 이 혼인잔치에 하나님이 마감하는 날까지 계속 종들을 보내어 초청을 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주인의 호의에 따라서 우리도 아들의 혼인잔치에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우리가 그 혼인잔치에 초청자로 나서서 혼주의 종이 되어 많은 사람들을 혼인잔치로 이끌어오는 역할을 해야 되는 사명이 주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복을 보면 상당히 역사적인 뿌리가 있습니다. 잔치를 하면 주인이 그 집에 초청된 사람에게 예복을 주는 풍습이 있습니다. 이것은 고대로부터 있었습니다. 창세기 45장에 보면 요셉이 그 형들을 만나서 사실을 다 밝히고 정식으로 형들을 대접했습니다. 처음에 왔을 때는 요셉이 자기 모습을 숨기고 형님들을 대했지만 이제 형님과 화해하고 자기가 요셉이라는 것을 밝히고 예의를 갖추고 자기 형님들을 자기 나라에 온 귀빈으로 대우를 하면서 형들에게 양식과 옷을 한 벌씩 주었습니다.
이 옷은 이제는 요셉을 만날 수 있는 옷입니다. 이제는 궁중에 출입할 수 있는 옷입니다. 이 옷을 입고는 총리가 베풀 수 있는 자리에 올 수 있는 옷입니다. 그런데 이 옷을 요셉은 하나밖에 없는 자기 동생에게는 다섯 벌을 주었다고 했습니다. 너무도 그 동생이 사랑스러워서 다섯 벌을 주었다고 했습니다. 주인이 주는 예복을 입고 초청을 받았을 때는 반드시 그 예복을 입고 잔치에 참석해야만 주인에게 예의가 될 뿐 아니라 곧 주인의 의도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예배와 관계해서 보면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바로 혼인잔치인 것입니다. 주인이 베푼 혼인잔치에 우리가 초청을 받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자리의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초점이 되는 문제는 내가 예복을 입고 이 자리에 앉아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복을 입고 하나님의 혼인잔치에 참석하여 예배를 드리고 있는가? 과연 나는 예수 그리스도와 파트너가 되기에 합당한 신부인가? 예수가 나의 신랑으로서 내가 어울리는 파트너가 될 수 있는 신부냐는 것입니다. 그 조건에 핵심적인 것이 바로 예복이라는 것입니다.
예복은 성령이 지으신다
요한계시록 19장 6절에 "내가 들으니 허다한 무리의 음성도 같고 많은 물소리도 같고 큰 뇌성도 같아서 가로되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였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고 했습니다.
어린양의 혼인기약이 이르렀고 그 혼인에 참석할 사람들은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했다는 것인데 깨끗한 세마포가 예복입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의의 옷입니다. 그런데 이 예복의 원료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라고 했습니다. 세마포가 성도들의 옳은 행실로 지어진 옷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옳은 행실의 실체가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이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하기로 내가 그 발 앞에 엎드려 경배하려 하니 그가 나더러 말하기를 나는 너와 및 예수의 증거를 받은 네 형제들과 같이 된 종이니 삼가 그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 예수의 증거는 대언의 영이라 하더라"(계19:9∼10)고 했습니다.
여기 예복에 대한 모든 설명이 다 나와 있습니다. 이 예복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라고 직접적으로 말씀했는데 그 옳은 행실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너와 및 예수의 증거를 받은 네 형제들과 같이 된 종이니 삼가 그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계19:10)
다시 말하면 옳은 행실이라는 것은 예수의 증거를 받은 행실입니다. 나도 예수의 증거를 받았고 당신도 예수의 증거를 받았다 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또 설명하는 말이 뒤에 나옵니다.
"예수의 증거는 대언의 영이라 하더라." 이것은 성경 전체에 계속 일관성 있게 확인되고 있는 말입니다. 성도들의 옳은 행실은 예수의 증거를 받은 것입니다. 그 예수의 증거가 대언의 영이라는 것입니다. 대언의 영은 성령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성령이 우리의 예복을 지으신 분입니다. 성령이 우리 예복을 확인하시는 분입니다.
에베소서 1장 13절에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어리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구원에 인치는 역할을 하십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에게 성령이 도장을 찍어서 하나님의 구원을 보증하신 이가 성령이십니다. 그 성령이 우리에게 예복을 지어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확인시켜줄 영은 성령이십니다. 이 성령께서 우리에게 믿음으로 예복을 입혀주신 분입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게 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라고 인쳐 주셔서 보증해주신 영입니다. 그 영이 우리에게 예복을 주셨는데 성도들의 옳은 행실의 실체는 믿음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를 나의 구주로 믿는 행위를 옳은 행실이라 했습니다. 하늘나라 세마포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믿는 행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행위에 성령께서 우리에게 예복을 입혀주시는 것입니다. 이 예복에 대해서 확인을 주십니다.
삶이 혼인잔치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주인의 혼인잔치 영역을 다 포함합니다. 여러분이 직장에 가서도 주인이 초청한 혼인잔치의 분위기가 연결이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가정으로 돌아가도 혼인잔치는 연결이 됩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이 혼인잔치는 그토록 소중한 개념입니다. 이것이 단순한 한 집안의 일이 아니라 크리스찬의 삶의 전 생애가 주인의 혼인잔치 영역이라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무엇을 하든지 예복입은 자로 하시기 바랍니다. 그렇지 않을 때 우리의 삶에는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저의 장모님이 소천을 하고 장례식을 했습니다. 연세가 94세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94세를 사시다가 소천을 하면 호상이라며 장수하셨다고 인사를 합니다. 그런데 요즘은 돌아가신 어머니 연세가 84세라고 하면 오래 사셨네요 라는 인사가 안나오고 적당하게 사셨습니다 라고 합니다. 그러나 10년 전에는 84세를 사셨다 하면 오늘날 94세를 살았다 할 때 느끼는 감각처럼 장수하셨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1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은 84세에 소천했다 하면 적당히 사셨습니다 그럽니다. 그런데 10년 후에 여자들의 평균연령이 90세가 됩니다. 그러니까 10년 후에 조문 가서 94세에 가셨습니다 해도 적당히 사셨네요 그럴 것입니다.
여러분, 이제 우리가 한 가지 깊이 생각할 게 있습니다. 제가 어머님의 상을 치르면서 설교자니까 남들과 달리 생각해 보았고 느껴 보았습니다. 오래 사는 것은 장수도 아니고 복도 아닙니다. 이제는 장수를 질적으로 생각해야 됩니다. 질적인 장수를 살아야 복이지 나이만 오래 사시는 장수는 표준이 되는 장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저희 어머니도 스스로 살지 못한 세월이 10년이 넘습니다. 스스로 살지 못하는 그 시간이 무슨 뜻이 있나요? 그게 복입니까? 그게 장수입니까? 하나님이 주신 시간은 틀림없지만 다른 측면에서 볼 때 그것은 질적인 장수의 복이 아닙니다. 기쁨도 보람도 없는 장수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질적인 장수를 누리도록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질적인 장수를 구하는 기도를 해야 됩니다. 이것은 기도할 제목이고 반드시 우리의 종말을 하나님이 인도하신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제 친구의 모친이 한달 전쯤 소천하셨는데 84세까지도 남의 힘을 빌려서 사신 어른이 아닙니다. 출입을 다 하시고 구역예배나 새벽기도를 다 가신 분인데 집에서 기도하나 어디서 기도하나 그 권사님의 입에서 끊이지 않는 기도는 "하나님, 자녀들에게 짐이 되지 않게 살다가 하나님 나라 가기를 바랍니다"라는 이 기도를 늘 하셨다는 것입니다. 자녀들 귀에 그 기도가 그대로 각인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어른이 주일 지나고 월요일에 아침식사를 가족과 함께 나누고 마루에서 그대로 가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 친구가 인사말씀할 때 '하나님이 어머니의 기도를 그대로 응답해 주신 것 같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맺는 말
여러분, 이제 우리의 삶의 개념을 바꾸어야 됩니다. 혼인잔치의 예복은 우리의 나이와 늙음을 초월하는 영원한 예복입니다. 이 옷은 낡아지고 좀먹고 더러워지는 옷이 아닙니다. 우리가 아무리 육체가 쇠하고 늙어도 예복을 입고 사는 자의 삶 속에는 주인을 기쁘게 하는 삶이 있습니다. 이 예복이 더러워지지 않는 삶을 살다가 주님 앞에 가야 됩니다.
그리고 질적인 장수를 위해서 기도해야 됩니다. 질적인 장수가 무엇일까요? 저는 세 가지로 말씀을 드려봅니다.
첫째로 인생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을 믿고 사는 것이 질적인 장수입니다. 하나님 모르고 백살을 산들, 백오십을 산들 그것은 인생의 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알고 믿고 살아야 됩니다.
두번째는 기본적인 건강을 누려야 장수의 질을 높이는 것입니다.
세번째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사명을 알고 살아야 됩니다. 내 생애를 통해서 하나님이 이루시는 뜻이 있습니다. 그 사명을 위해서 내가 살아야 합니다. 자기 사명을 놓치고 사는 사람은 질적인 장수가 안됩니다. 나이 드셔도 하나님 앞에 사명이 있습니다. 자손들 위해 기도할 사명도 있고 내 생애를 통해서 이루실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그것을 내가 이루어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주어질 때 우리는 다 질적인 장수가 될 줄로 믿습니다. 이 예복을 함께 누리기를 바랍니다.
출처/이용호 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