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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장막의 아름다움 (시편 84:1-12)
제가 존경하는 어느 장로님이 어느날 갑자기 뇌졸중으로 눕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평생 동안 교회를 잘 섬기신 어른인데, 말년을 병상에서 보내시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너무 아팠습니다. 하루는 그 장로님께 병문안을 갔는데, 저에게 고백하기를 몸이 불편한 것보다 자신을 더 힘들게 하는 것은 외로움이라고 합니다. 특히 주일날 모든 가족이 교회에 가고 나서, 빈 집에 홀로 누워 기독교 TV의 설교를 들을 때면 한없이 눈물이 흘러 내린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외로움 때문에 눈물을 흘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죄송해서 눈물이 나오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지금 그렇게 병이 들어서 주일날인데도 교회에 나가지 못하고 혼자 예배드리고 있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몸 성히 교회에 나갈 때 더 열심히 할 걸’ 하는 생각이 든다는 것입니다. 목사님의 목회활동을 더 후원하고 협력하지 못했던 것도 후회스럽고, 살면서 너무 자기 권리만 챙겼던 것도 죄송스럽고, 돈 잘 벌 때 최선을 다해 헌금하지 못하고 인색했던 것 모두가 후회되는 일 뿐이었습니다. 이제라도 몸이 건강해 지면 교회 나가 봉사도 열심히 하고, 헌금도 많이 하고, 목사님도 잘 섬기고 싶은데, 그렇게 하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가 한탄스럽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 장로님의 말을 듣고, 우리가 지금 이렇게 교회 나와 예배드릴 수 있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감사하고 행복한 일인지 새삼스럽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모든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감사하지도 않고, 행복해 하지도 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더 가지지 못해서, 더 누리지 못해서 아쉬워하고 불평불만만 일삼고 있습니다. 혹시 내 자신이 그렇다고 하면 그 장로님의 후회 섞인 말을 되새겨 보고, 같은 후회를 반복하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한 때 전 유럽을 정복하고 세계정복의 야망을 품었던 나폴레옹 장군이 그만 워털루 전투에서 참패하여 세인트 헬레나 섬에 유배를 당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때 한 기자가 나폴레옹을 찾아와 물었습니다. “폐하, 참으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오셨는데, 폐하의 평생에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언제였습니까? 알프스 산맥을 넘어 오스트리아를 점령하실 때였습니까? 이집트를 점령하셨을 때였습니까? 아니면 황제에 오르셨을 때였습니까?” 기자의 질문을 들은 나폴레옹은 조용히 눈을 감고 한편의 드라마와 같은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였습니다. 긴 침묵의 시간이 흐른 후 드디어 입을 연 나폴레옹은 나직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평생에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전쟁이 치열하던 어느 주일 날 아침, 알프스 산 중턱의 교회에 들어가 철모를 벗고 예배를 드리던 때였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흘린 눈물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교회에 와서 예배드리는 이 시간처럼 귀한 시간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렇게 귀한 시간을 어떻게 보내고 있습니까? 예배의 감격에 푹 빠져 있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별다른 느낌도 없이 시계만 쳐다보며 그저 그런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까? 여러분, 무엇보다 예배에 성공해야 합니다. 예배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특별한 성전 사랑을 노래하고 있는 오늘 본문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함께 나누시길 합니다.
1. 하나님의 사람은 주의 성전을 사모합니다.
저는 지난 주에 어머님의 추도식을 지키기 위해 고향을 방문했습니다. 과거에는 고향을 찾을 때, 설레임으로 밤잠을 설치면서 마음이 들떠서 갔는데, 요즘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것은 그곳에 저의 어머님이 계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냥 어머님의 묘소만 있을 뿐입니다. 그러기에 저에게는 전혀 설레임이 없습니다. 실상 어머니가 계시지 않은 곳은 고향이 아닙니다. 어린 시절에 다니던 초등학교 운동장과, 친구들과 뛰놀던 앞산과, 맨발로 물고기를 잡던 시냇가를 서성거려도 어쩐지 허전하고 평안을 얻을 수가 었습니다. 산도 그때 그 산이고 물도 그 때 그 시냇물이지만 그리운 어머니도, 어려서 같이 뛰놀던 친구들도 다 고향을 등지고 외지로 떠나버렸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없는 고향은 이제 전혀 그리운 곳이 아니었습니다.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자신이 태어난 곳, 자라난 곳이 없어진 것은 아니지만, 평안을 얻고 기쁨을 얻는 마음의 고향을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찾아가도 반겨줄 사람이 없어서 이제는 돌아갈 고향도 없어져 버렸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옛 고향은 잃어 버렸지만, 우리에게는 영원한 고향이 있습니다. 결코 잃어버릴 수 없는 본향이 있습니다. 그곳에는 변함없이 우리를 기다리시는 분이 있습니다. 그곳은 바로 우리가 돌아가야 할 ‘하나님의 나라’, ‘하늘 나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가 이땅 위에 실현된 모형이 바로 ‘교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천국 백성으로 삼아 주시고, 이 땅위에 교회를 세우셔서 우리의 고향으로 삼아 주셨습니다. 교회는 나그네와 같은 우리 인생에 있어서 언제나 나를 기다리며 반겨주는 영적인 고향입니다. 새로운 고향입니다.
일찍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루살렘에 세워진 성전을 고향으로 삼았습니다. 저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성전을 어머니로 삼고 살았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그 어디에 살든지 예루살렘 성전을 향하여 집을 짓고 문을 열어놓고 기도했습니다. 그들은 1년에 ‘유월절’과 ‘오순절’과 ‘장막절’을 3대 절기로 지키며 예루살렘 성전에 제물을 가지고 올라와 제물을 드리면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들은 성전에 한번 가면 일주일씩 절기를 지켰고 며칠씩 걸어서 오고 갔기에, 예루살렘에 한 번 오려면 20여일의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이렇게 1년에 세 번씩이나 매번 20일을 성전에서 예배를 드리는데 바쳤습니다. 또한 안식일에도 ‘월삭’이라고 매월 첫날을 드렸습니다. 이렇게 많은 시간을 성전 예배에 드리는데 어떻게 벌어 먹었는지 알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성전에 가는 것을 부담스럽게 생각하거나 거추장스럽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것을 삶의 기쁨이요, 자랑으로 여겼습니다.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생존하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시 84:1-2)
보통 사람들은 먹고 살기 위해서 몸이 쇠약해질 정도로 일하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몸이 쇠약할 정도로 하나님의 성전을 사모한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성전에 대한 사랑이 큰 지를 비유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가장 좋아하는 일 만큼이나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지 되돌아 보시기를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한다고 고백한다면 그의 몸된 교회를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2. 하나님의 사람은 모든 문제를 주의 집에서 해결되는 줄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성전에 이렇게 많은 시간과 물질을 드린 이유가 있습니다.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시 84:5). 그들은 하나님의 성전을 사모하는 것에서 힘을 얻고 복을 받는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대체로 사람들은 세상의 권력과 재력을 얻는 것이 복된 일로 여기고 거기에서 힘을 얻으려고 노력합니다. 그리고 좀더 많은 재물과 명예와 권력을 손에 넣기 위해서 고군분투합니다. 그러나 전도서는 그러한 삶이 무의미하고 헛된 것이라 증언하고 있습니다.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자보다도 소와 양 떼의 소유를 많게 하였으며, 은금과 왕들의 보배와 여러 도의 보배를 쌓고 또 노래하는 남녀와 인생들의 기뻐하는 처와 첩들을 많이 두었노라...그 후에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수고한 모든 수고가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며 해 아래서 무익한 것이로다”(전 2: 7-11)
이스라엘 민족은 주변의 강대국을 의지하여 자신의 안전을 도모하다가 결국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오히려 열강들의 힘겨루기에 희생되어 멸망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대제국보다 더 위대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하고 언제 쓰러질 지 모르는, 상한 갈대를 의지하는 오류를 범했던 것입니다. 오직 우리의 힘과 능력은 하나님으로부터만 얻을 수가 있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복은 아무도 빼앗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복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사 40:31)
그렇습니다.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가 힘을 얻습니다. 진정한 힘을 얻는 자는 재물을 많이 가진 자가 아니요, 권력을 거머쥔 자가 아니요, 세상 지식을 많이 소유한 자가 아닌, 그 얼굴을 하나님께 향하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주일날 교회에 와서 기도하고 말씀을 듣는 것이야말로 모든 문제 해결의 지름길인 것입니다. “저희는 눈물 골짜기로 통행할 때에 그곳으로 많은 샘의 곳이 되게 하며 이른비도 은택을 입히나이다”(6절)는 말씀처럼 성도들이 사업실패, 자녀들의 문제, 질병, 인간관계의 어려운 일 등의 ‘눈물 골짜기’를 통과할 때, 오히려 거기에서 생명수가 터지고, 해갈의 빗줄기가 내릴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주 안에 계시다면 걱정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사모하여 끝까지 나가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그 고난의 골짜기 한복판에서 맑은 물이 솟아나는 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저희는 힘을 얻고 더 얻어 나아가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각기 나타나리이다”(7절)라는 말씀처럼,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교회에서 열심히 예배드리고 헌신하는 가운데, 말씀 속에서 주님을 만나는 일입니다. 더욱 힘차게 찬송하고, 더욱 열심히 기도하고, 더욱 땀흘려 헌신하여 하나님의 은혜 받으시길 바랍니다. 바로 그때 우리의 어려웠던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사람은 주의 장막에서 행복을 얻습니다.
백범 김구 선생은 ‘나의 소원’이라는 글에서 “나는 일찍이 우리 독립정부의 문지기가 되기를 원했다. 왜 그런고 하면 독립한 제 나라의 빈천이 남의 밑에 사는 부귀보다 기쁘고, 영광스럽고, 희망이 많기 때문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식민지 국가에서 부귀 영화를 누리고 사는 것보다, 자주 독립 국가에서 문지기로 사는 훨씬 더 의미있고 기쁜 일이라는 것입니다. 제 생각입니다만, 백범 선생의 이 말은 아마도 시편 말씀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 아닌가 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시편 기자는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날 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10절)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다른 곳’이란 하나님 없이 자신을 위하여 살아가는 삶의 현장을 말합니다. 여러분,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세상에서의 삶이 어떻습니까? 일례로 세상에서는 사람을 평가할 때도, 그 사람의 됨됨이를 보고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외모와, 재력, 학벌 등으로 평가합니다. 쉽게 말하면 어떤 옷을 입고, 어떤 차를 타고 다니고, 어느 지역에 살며, 몇 평짜리 아파트에 사느냐에 따라 “사모님”이 되기도 하고, “아줌마”가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기 위해서 끊임없이 자신을 치장하고, 위장해야 합니다. 경기 불황 속에서도 수입 명품과 외제차가 불티나게 팔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인정이라는 것이 ‘나 자신’에 대한 평가가 아니라, ‘얼마 짜리냐’라는 상품으로 취급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 이러한 세상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긴장되고 힘든 일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 아버지께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세상에 둘도 없는, 딱 하나밖에 없는 ‘걸작품’입니다. 우리는 공장에서 찍어낸 제품이 아니라, ‘해산의 수고’로 낳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두는 다른 어떤 것으로도 바꿀 수 없는 ‘왕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 곧 소중한 존재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러분을 상품으로 보는 사람과 함께 있는 것이 행복합니까, 아니면 여러분을 존재 그 자체로 보는 사람과 함께 있는 것이 행복합니까? 어린 아이를 보십시오. 재벌회사 회장님이 안아줄 때 행복합니까, 사랑하는 엄머가 안아줄 때 행복합니까? 하나님 모신 삶이 행복한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의 저명한 정치가 가운데 어떤 독실한 신자가 있습니다. 그분은 사회적으로 대단한 위치에 있고, 매우 바쁜 분인데도 주일이면 자신이 다니는 교회의 차량 안내 위원으로 봉사를 합니다. 그런데 다른 무엇보다 주일 아침에 예배를 드리기 위해 교회에 나오는 성도들의 차량을 안내하는 것이 자신에게는 ‘최고의 영광스런 자리라고 생각한다’고 합니다. 예수 믿고 병낫고, 승진하고, 사업이 번창한 것도 행복한 일이지만, 주의 몸된 교회를 위해 헌신하는 것 자체를 기쁨으로 여길 줄 아는 그리스도인들이야말로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깨달은 신자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이런 신앙고백을 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에서 모든 것을 다 가졌다 해도 하나님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성도들 가운데는 교회를 삶의 중심으로 여기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교회의 변두리에 서성거리다가 나그네처럼 지나치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를 소중한 존재로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주의 성전을 고향처럼 여기고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더욱이 우리는 지금 성전건축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사모하는 성전, 우리의 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성전, 우리에게 행복을 줄 수 있는 고향같은 성전을 건축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의 일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일입니다. 이 성전을 사모하여 앞으로 나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출처/전병금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