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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한믿음 (엡4:13-16)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찌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엡 4:13-16
본문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라”고 가르칩니다. 우리의 신앙은 성장해야 됩니다. 우리 교회를 두고 사람들은 달려가는 교회, 성장하는 교회라고 말합니다. 외적으로 건물이 세워지고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것으로는 자란다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 개개인의 신앙이 교회 성장과 더불어 자라가야 합니다.
1. 왜 우리의 믿음이 자라야 합니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어머니는 아기를 해산하기 위해서 큰 출산의 고통을 겪지만, 아기가 무럭무럭 자라는 것을 보고 그 고통을 잊고 기뻐합니다. 해산도 중요하지만 성장이 더욱 중요합니다. 발육 부진아를 둔 부모는 고개를 들고 다니지도 못합니다. 어떤 아이는 뛰어다니고 말하는데, 어떤 아이는 정상적으로 성장하지 못합니다. 정상적으로 성장하지 못하는 아이를 둔 부모는 얼마나 안타까워하는지 모릅니다.
우리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자랄 때 자라고, 열매 맺어야 할 때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마태복음 3:8에 보면,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하셨습니다. 3:10에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않으며 찍어 버리겠다.”고 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3:6이하에 보면 “내가 삼 년을 와서 무화과나무에 실과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 버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5:5,6 이하에도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가르치십니다.
우리가 교회에 출석만 한다고 해서 믿음이 거저 성장하지는 않습니다. 돌감람나무 같은 자신을 찍어 버리고 참감람나무인 예수에게 접붙임되어야 제대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롬 11:17)
신앙의 성장은 기도를 잘하고 봉사를 잘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미혹과 유혹을 받았을 때 넘어가지 않는 굳은 믿음과 진리의 터 위에 굳게 서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어떻게 보면 열심 있는 신앙인 같은데 신앙의 뿌리를 내리지 못한 사람이 있습니다. 진리에 서 있지 못해서 사욕을 좇아갑니다(딤후 4:3). 이러한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실망할 뿐만 아니라 구역장을 실망시키고, 교역자를 실망시키고, 더 나아가 하나님을 실망시키게 됩니다.
어쩌다 보면 교회를 떠나 하나님이 없다고 하며 돌아다니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되어야 합니다(엡 4:14). 디모데후서 4:10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는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했습니다. 4:3에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고 했습니다. 일락을 좋아하는 자는 실상은 살았으나 죽은 자입니다.(딤전 5:6)
신앙은 세상 풍조를 헤쳐가는 것입니다. 밀려가거나 떠내려가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세상의 풍조에 휩쓸려갑니다. 결국 그들은 진리 안에서 기쁨을 맛보지도 못한 채 좌절과 실망 속에서 방황하고 맙니다. 우리의 신앙이 장성하여 그리스도만큼 자라가야 합니다.
2. 믿음이 자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초보의 신앙을 버려야 합니다. 초보적인 신앙은 율법을 말합니다. 율법에 얽매여 있는 신앙입니다. 히브리서 5:12에 보면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라고 했습니다. 믿는 사람들은 선생이 되어야 합니다. 어디를 가든지 지도자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의 초등 학문 아래서 종노릇해 왔습니다(갈 4:3, 골 2:8). 율법적인 종노릇입니다. 사람들은 예수 믿기가 힘들다고 합니다. 성경 말씀대로는 도저히 살 수 없다고 합니다. 그것은 아직 초보적인 율법에 얽매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완성시킬 사랑으로 오셨습니다. 갈라디아서 4:1,2에 “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그 아버지의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 있나니”라고 하였고, 4절에는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세상의 초등 학문이나 율법의 초보에 묶여 있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자유인이 된 것을 믿을 때 우리는 성장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4:9을 봅시다.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뿐더러 하나님의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 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저희에게 종노릇하려 하느냐.”
신앙 생활은 쉽거나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머리만한 돌멩이를 어린 아이는 들 수 없습니다. 그러나 건강한 어른에게는 그것이 전혀 무겁지 않습니다. 그만큼 장성해 있기 때문입니다.
생활이 넉넉해지고 문명의 혜택이 많아질수록 신앙은 나태해 집니다. 새벽 기도는 물론 철야 예배까지 드리던 사람도 현실의 무사안일주의에 빠져 세상을 좇아갑니다. 이런 사람들은 신앙이 자랐다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초보적인 모든 것, 세상적인 관심, 율법적인 구속 요소들을 버리지 못한다면 수십년 교회다녀도 결코 성장되지 못합니다.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 이것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 학문을 좇음이요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니라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 그는 모든 정사와 권세의 머리시라.”(골 2:8-10)
초보적인 신앙이란 교회를 처음 나와서 인간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내가 회개해야 내 영혼이 산다’라고 생각하고 교회에 나오는 사람은 극히 적습니다. 대부분 친구따라, 부모님따라, 아니면 누구의 인도로 억지로 나옵니다. 그는 자기를 인도한 사람을 따라 배웁니다. 그는 지나치게 사람들을 의지하기 때문에 실망하거나 낙심하기도 합니다. 사람을 통해 교회에 나왔지만 하나님을 의지하는 신앙으로 바뀌어야 될 줄 믿습니다.
초보적인 신앙의 또 다른 형태는 물질적인 축복 때문에 교회에 출석하는 경우입니다. 자기의 어떤 사욕을 채우기 위해서 열심히 신앙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기의 목적이 이루어지면 교회를 떠나 버리고 맙니다. 불치의 병을 고치기 위하여 새벽 기도, 철야 기도 다 나오다가 병이 치료되면 그날부터 교회를 떠납니다. 육적인 욕망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실망하기도 합니다. 교회가 육적인 욕망을 이루기 위한 곳이 아니라 영적인 것을 발견하는 곳인 줄 믿을 때 진정 성장할 수 있습니다.
어린 아이는 경험이 적습니다. 유혹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장성한 사람은 판단력이 있습니다. 눈초리만 보아도 그 사람의 생각까지 알 수 있습니다. 초보적인 신앙을 젖먹이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이라 했습니다(히 5:13). 영적인 체험이 있을 때 초보적인 신앙을 버릴 수 있습니다. 말씀은 영적인 양식입니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라고 했습니다(요 6:48). 이 ‘말씀’은 치료의 역사가 있습니다. 위경(危境)에서부터 우리를 구출해 줍니다.
신앙생활은 목선을 타고 노를 젓는 것과 같습니다. 물결이 내리칩니다. 거슬러올라가기란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 물결을 헤쳐갈 수 있는 배가 있습니다. 동력을 단 배입니다. 이 배는 아무리 물결이 세다 할지라도 거뜬히 거슬러 올라갑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도 우리 자신의 힘으로 하려고 하면 어렵습니다. 그러나 우리 속에 성령의 능력, 즉 예수님의 능력이 있으면 우리는 쉽게 세파를 헤쳐 나갈 수 있습니다. 내가 은혜받고, 마력과 같은 성령의 불이 내게 강하게 오면, 나의 신앙 생활은 동력을 단 배처럼 달릴 줄 믿습니다.
사람 중엔 육체적인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건강을 위해서, 여러 가지 문제 해결을 위해서 교회에 나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소원 성취나 현실적인 것을 위하여 교회에 나옵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을 가지고 교회에 다닐 수는 없습니다. 그는 틀림없이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고 맙니다.
신앙 생활 중에 연단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처음엔 사람들이 모두 천사처럼 아름답게 보입니다. 그러다가 하루하루 교제가 계속되다 보면 인간적인 본성이 드러나게 됩니다. 때에 따라서는 이용당하기도 하고, 상처도 받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수용할 수 있는 신앙이 갖추어지기 전에 이런 여러 가지 일을 당하게 됩니다. 그는 교회가 세상보다 더 구차스런 곳이라 생각하고 결국 교회를 떠나기까지 합니다.
어떤 사람은 목적을 두고 교회에 출석합니다. 자녀가 좋은 대학에 들어가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처음부터 주일 예배는 물론 새벽 기도, 철야기도까지 빠지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좋은 성적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그는 교회를 원망하고 떠나 버립니다.
우리의 믿음은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야 합니다. 베드로 전서 2:2에 보면 “갓난 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교회에 출석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이 구원받도록 믿음이 자라야 합니다.
구원에 이르는 믿음이라는 것은 영혼 구원의 믿음입니다. 교회에 와서 선한 양심도 가지고, 이해심도 키우고, 관용하는 포용력도 자랐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신앙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사랑과 십자가의 고난의 의미를 깨닫지 못한다면 아무리 인내심이 있고 열심히 섬기고 용서하는 마음이 있다 해도 그 사람의 신앙 인격은 성장할 수 없습니다.
믿음에 대한 가치관이 바뀌어야 합니다. 그 어떤 목적을 위함보다도 ‘내 영혼이 구원받는다’‘지금 죽어도 나는 천국에 간다’는 확신입니다. 영혼 구원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쓰러지게 됩니다. 구원의 확신을 가진 자라 하더라도 영적으로 자라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농사철이 되면 농산부에서는 병충해 방지를 위하여 농민들을 독려합니다. 한창 벼가 자랄 때 병들어 버리면 그해 농사는 망하기 때문입니다. 어린아이들이 자라는 것도 그렇습니다. 어릴 때 병이 들고 먹지 못하면 자라지 못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영적으로 태어난 사람이라 하더라도 세상의 유혹과 욕심에 병들게 되면 그는 결코 성장하지 못합니다. 이것이 영적인 병입니다. 베드로전서 2:1에 “그러므로 모든 악덕과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라고 했습니다. 벼가 잘 자라기 위해서는 병충약을 제때에 사용해야 병충해가 방지됩니다. 또 어린 아이가 잘 자라도록 하기 위해서는 음식을 작 먹여야 합니다.
영적 성장은 말씀을 사모함에서부터 옵니다. 누구를 만나든지 말씀을 증거하고 성경을 보면서 말씀대로 살려고 하는 사람이 식욕 왕성한 어린아이와 같이 잘 자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성장하려면 신령한 젖을 사모해야 합니다(벧전 2:2). 같은 시기에 신앙 생활을 했는데 왜 아무개는 저렇게 빨리 성장하나?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벌써부터 성경 공부를 시작했으며 시간 있으면 성경 읽고 의문 나는 것은 물어보고 합니다. 예배에 열심히 참석합니다. 그러니까 그는 자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3. 어디까지 신앙이 자라야 합니까?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 이르기까지 자라야 합니다.
①그리스도의 분량에 이른다는 말은 우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는 자체입니다(갈 4:19).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빌 2:5).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고전 2:16).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의 분량까지 신앙이 이르렀습니다. 그는 로마서 5:3에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룬다”고 했습니다.
②그리스도의 분량에 이른 신앙은 연단을 받아도 소망이 있는 신앙입니다.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는 어린아이가 아니라 장성한 자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것입니다(히 5:14). 바울 사도는 사도행전 14:22에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의 신앙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는 신앙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4:13)
③그리스도의 분량에 찬 신앙을 가지면 신령한 제사장이 됩니다. “너희도 산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시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벧전 2:5). 거룩한 제사장이란 말은 하나님과 영적이 제사장이 됩니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벧전 2:9). 예수 그리스도는 영적 제사장입니다(히 3:1). 대제사장입니다. (히 4:12-14)
④그리스도의 분량에 이르렀다는 말은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것입니다.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엡 4:12).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며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엡 4:15, 16). 주가 내 안에, 내가 주 안에 연결되고 상합되고 결합될 때 우리의 신앙도 그리스도를 닮아 장성하게 자랍니다.
초보적인 신앙을 버리고 완전한 신앙으로 돌아갑니다. 하나님을 지식적으로 생각하던 것이 체험적인 신앙이 됩니다. 날마다 교회에 끌려오던 신앙이 다른 사람을 이끄는 신앙으로 바뀝니다. 이제는, 교회에 와서 자신의 어떤 아쉬운 문제를 해결하려고 구하던 신앙이 하나님께 드리는 신앙으로 장성해야 할 줄 믿습니다. 내 뜻대로 안 되면 원망하던 신앙이 이제는 기도하면서 “내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합니다”라고 하는 신앙으로 바뀔 줄 믿습니다.
여러분의 신앙이 장성하기를 축원합니다.
출처/김충기목사 설교 중에서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찌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엡 4:13-16
본문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라”고 가르칩니다. 우리의 신앙은 성장해야 됩니다. 우리 교회를 두고 사람들은 달려가는 교회, 성장하는 교회라고 말합니다. 외적으로 건물이 세워지고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것으로는 자란다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 개개인의 신앙이 교회 성장과 더불어 자라가야 합니다.
1. 왜 우리의 믿음이 자라야 합니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어머니는 아기를 해산하기 위해서 큰 출산의 고통을 겪지만, 아기가 무럭무럭 자라는 것을 보고 그 고통을 잊고 기뻐합니다. 해산도 중요하지만 성장이 더욱 중요합니다. 발육 부진아를 둔 부모는 고개를 들고 다니지도 못합니다. 어떤 아이는 뛰어다니고 말하는데, 어떤 아이는 정상적으로 성장하지 못합니다. 정상적으로 성장하지 못하는 아이를 둔 부모는 얼마나 안타까워하는지 모릅니다.
우리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자랄 때 자라고, 열매 맺어야 할 때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마태복음 3:8에 보면,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하셨습니다. 3:10에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않으며 찍어 버리겠다.”고 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3:6이하에 보면 “내가 삼 년을 와서 무화과나무에 실과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 버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5:5,6 이하에도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가르치십니다.
우리가 교회에 출석만 한다고 해서 믿음이 거저 성장하지는 않습니다. 돌감람나무 같은 자신을 찍어 버리고 참감람나무인 예수에게 접붙임되어야 제대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롬 11:17)
신앙의 성장은 기도를 잘하고 봉사를 잘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미혹과 유혹을 받았을 때 넘어가지 않는 굳은 믿음과 진리의 터 위에 굳게 서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어떻게 보면 열심 있는 신앙인 같은데 신앙의 뿌리를 내리지 못한 사람이 있습니다. 진리에 서 있지 못해서 사욕을 좇아갑니다(딤후 4:3). 이러한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실망할 뿐만 아니라 구역장을 실망시키고, 교역자를 실망시키고, 더 나아가 하나님을 실망시키게 됩니다.
어쩌다 보면 교회를 떠나 하나님이 없다고 하며 돌아다니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되어야 합니다(엡 4:14). 디모데후서 4:10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는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했습니다. 4:3에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고 했습니다. 일락을 좋아하는 자는 실상은 살았으나 죽은 자입니다.(딤전 5:6)
신앙은 세상 풍조를 헤쳐가는 것입니다. 밀려가거나 떠내려가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세상의 풍조에 휩쓸려갑니다. 결국 그들은 진리 안에서 기쁨을 맛보지도 못한 채 좌절과 실망 속에서 방황하고 맙니다. 우리의 신앙이 장성하여 그리스도만큼 자라가야 합니다.
2. 믿음이 자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초보의 신앙을 버려야 합니다. 초보적인 신앙은 율법을 말합니다. 율법에 얽매여 있는 신앙입니다. 히브리서 5:12에 보면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라고 했습니다. 믿는 사람들은 선생이 되어야 합니다. 어디를 가든지 지도자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의 초등 학문 아래서 종노릇해 왔습니다(갈 4:3, 골 2:8). 율법적인 종노릇입니다. 사람들은 예수 믿기가 힘들다고 합니다. 성경 말씀대로는 도저히 살 수 없다고 합니다. 그것은 아직 초보적인 율법에 얽매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완성시킬 사랑으로 오셨습니다. 갈라디아서 4:1,2에 “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그 아버지의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 있나니”라고 하였고, 4절에는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세상의 초등 학문이나 율법의 초보에 묶여 있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자유인이 된 것을 믿을 때 우리는 성장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4:9을 봅시다.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뿐더러 하나님의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 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저희에게 종노릇하려 하느냐.”
신앙 생활은 쉽거나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머리만한 돌멩이를 어린 아이는 들 수 없습니다. 그러나 건강한 어른에게는 그것이 전혀 무겁지 않습니다. 그만큼 장성해 있기 때문입니다.
생활이 넉넉해지고 문명의 혜택이 많아질수록 신앙은 나태해 집니다. 새벽 기도는 물론 철야 예배까지 드리던 사람도 현실의 무사안일주의에 빠져 세상을 좇아갑니다. 이런 사람들은 신앙이 자랐다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초보적인 모든 것, 세상적인 관심, 율법적인 구속 요소들을 버리지 못한다면 수십년 교회다녀도 결코 성장되지 못합니다.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 이것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 학문을 좇음이요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니라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 그는 모든 정사와 권세의 머리시라.”(골 2:8-10)
초보적인 신앙이란 교회를 처음 나와서 인간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내가 회개해야 내 영혼이 산다’라고 생각하고 교회에 나오는 사람은 극히 적습니다. 대부분 친구따라, 부모님따라, 아니면 누구의 인도로 억지로 나옵니다. 그는 자기를 인도한 사람을 따라 배웁니다. 그는 지나치게 사람들을 의지하기 때문에 실망하거나 낙심하기도 합니다. 사람을 통해 교회에 나왔지만 하나님을 의지하는 신앙으로 바뀌어야 될 줄 믿습니다.
초보적인 신앙의 또 다른 형태는 물질적인 축복 때문에 교회에 출석하는 경우입니다. 자기의 어떤 사욕을 채우기 위해서 열심히 신앙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기의 목적이 이루어지면 교회를 떠나 버리고 맙니다. 불치의 병을 고치기 위하여 새벽 기도, 철야 기도 다 나오다가 병이 치료되면 그날부터 교회를 떠납니다. 육적인 욕망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실망하기도 합니다. 교회가 육적인 욕망을 이루기 위한 곳이 아니라 영적인 것을 발견하는 곳인 줄 믿을 때 진정 성장할 수 있습니다.
어린 아이는 경험이 적습니다. 유혹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장성한 사람은 판단력이 있습니다. 눈초리만 보아도 그 사람의 생각까지 알 수 있습니다. 초보적인 신앙을 젖먹이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이라 했습니다(히 5:13). 영적인 체험이 있을 때 초보적인 신앙을 버릴 수 있습니다. 말씀은 영적인 양식입니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라고 했습니다(요 6:48). 이 ‘말씀’은 치료의 역사가 있습니다. 위경(危境)에서부터 우리를 구출해 줍니다.
신앙생활은 목선을 타고 노를 젓는 것과 같습니다. 물결이 내리칩니다. 거슬러올라가기란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 물결을 헤쳐갈 수 있는 배가 있습니다. 동력을 단 배입니다. 이 배는 아무리 물결이 세다 할지라도 거뜬히 거슬러 올라갑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도 우리 자신의 힘으로 하려고 하면 어렵습니다. 그러나 우리 속에 성령의 능력, 즉 예수님의 능력이 있으면 우리는 쉽게 세파를 헤쳐 나갈 수 있습니다. 내가 은혜받고, 마력과 같은 성령의 불이 내게 강하게 오면, 나의 신앙 생활은 동력을 단 배처럼 달릴 줄 믿습니다.
사람 중엔 육체적인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건강을 위해서, 여러 가지 문제 해결을 위해서 교회에 나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소원 성취나 현실적인 것을 위하여 교회에 나옵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을 가지고 교회에 다닐 수는 없습니다. 그는 틀림없이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고 맙니다.
신앙 생활 중에 연단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처음엔 사람들이 모두 천사처럼 아름답게 보입니다. 그러다가 하루하루 교제가 계속되다 보면 인간적인 본성이 드러나게 됩니다. 때에 따라서는 이용당하기도 하고, 상처도 받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수용할 수 있는 신앙이 갖추어지기 전에 이런 여러 가지 일을 당하게 됩니다. 그는 교회가 세상보다 더 구차스런 곳이라 생각하고 결국 교회를 떠나기까지 합니다.
어떤 사람은 목적을 두고 교회에 출석합니다. 자녀가 좋은 대학에 들어가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처음부터 주일 예배는 물론 새벽 기도, 철야기도까지 빠지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좋은 성적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그는 교회를 원망하고 떠나 버립니다.
우리의 믿음은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야 합니다. 베드로 전서 2:2에 보면 “갓난 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교회에 출석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이 구원받도록 믿음이 자라야 합니다.
구원에 이르는 믿음이라는 것은 영혼 구원의 믿음입니다. 교회에 와서 선한 양심도 가지고, 이해심도 키우고, 관용하는 포용력도 자랐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신앙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사랑과 십자가의 고난의 의미를 깨닫지 못한다면 아무리 인내심이 있고 열심히 섬기고 용서하는 마음이 있다 해도 그 사람의 신앙 인격은 성장할 수 없습니다.
믿음에 대한 가치관이 바뀌어야 합니다. 그 어떤 목적을 위함보다도 ‘내 영혼이 구원받는다’‘지금 죽어도 나는 천국에 간다’는 확신입니다. 영혼 구원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쓰러지게 됩니다. 구원의 확신을 가진 자라 하더라도 영적으로 자라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농사철이 되면 농산부에서는 병충해 방지를 위하여 농민들을 독려합니다. 한창 벼가 자랄 때 병들어 버리면 그해 농사는 망하기 때문입니다. 어린아이들이 자라는 것도 그렇습니다. 어릴 때 병이 들고 먹지 못하면 자라지 못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영적으로 태어난 사람이라 하더라도 세상의 유혹과 욕심에 병들게 되면 그는 결코 성장하지 못합니다. 이것이 영적인 병입니다. 베드로전서 2:1에 “그러므로 모든 악덕과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라고 했습니다. 벼가 잘 자라기 위해서는 병충약을 제때에 사용해야 병충해가 방지됩니다. 또 어린 아이가 잘 자라도록 하기 위해서는 음식을 작 먹여야 합니다.
영적 성장은 말씀을 사모함에서부터 옵니다. 누구를 만나든지 말씀을 증거하고 성경을 보면서 말씀대로 살려고 하는 사람이 식욕 왕성한 어린아이와 같이 잘 자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성장하려면 신령한 젖을 사모해야 합니다(벧전 2:2). 같은 시기에 신앙 생활을 했는데 왜 아무개는 저렇게 빨리 성장하나?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벌써부터 성경 공부를 시작했으며 시간 있으면 성경 읽고 의문 나는 것은 물어보고 합니다. 예배에 열심히 참석합니다. 그러니까 그는 자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3. 어디까지 신앙이 자라야 합니까?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 이르기까지 자라야 합니다.
①그리스도의 분량에 이른다는 말은 우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는 자체입니다(갈 4:19).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빌 2:5).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고전 2:16).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의 분량까지 신앙이 이르렀습니다. 그는 로마서 5:3에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룬다”고 했습니다.
②그리스도의 분량에 이른 신앙은 연단을 받아도 소망이 있는 신앙입니다.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는 어린아이가 아니라 장성한 자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것입니다(히 5:14). 바울 사도는 사도행전 14:22에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의 신앙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는 신앙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4:13)
③그리스도의 분량에 찬 신앙을 가지면 신령한 제사장이 됩니다. “너희도 산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시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벧전 2:5). 거룩한 제사장이란 말은 하나님과 영적이 제사장이 됩니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벧전 2:9). 예수 그리스도는 영적 제사장입니다(히 3:1). 대제사장입니다. (히 4:12-14)
④그리스도의 분량에 이르렀다는 말은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것입니다.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엡 4:12).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며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엡 4:15, 16). 주가 내 안에, 내가 주 안에 연결되고 상합되고 결합될 때 우리의 신앙도 그리스도를 닮아 장성하게 자랍니다.
초보적인 신앙을 버리고 완전한 신앙으로 돌아갑니다. 하나님을 지식적으로 생각하던 것이 체험적인 신앙이 됩니다. 날마다 교회에 끌려오던 신앙이 다른 사람을 이끄는 신앙으로 바뀝니다. 이제는, 교회에 와서 자신의 어떤 아쉬운 문제를 해결하려고 구하던 신앙이 하나님께 드리는 신앙으로 장성해야 할 줄 믿습니다. 내 뜻대로 안 되면 원망하던 신앙이 이제는 기도하면서 “내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합니다”라고 하는 신앙으로 바뀔 줄 믿습니다.
여러분의 신앙이 장성하기를 축원합니다.
출처/김충기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