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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없으면 (고전 13:1-3)
저는 지난 2월 12일부터 17일까지 선교지 베트남을 방문하고 돌아왔습니다. 베트남을 향한 우리 교회의 선교 사역을 진단하고 향후 선교 방법들을 구상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 여정에는 해외선교협의회 담당 목사님, 세계선교부장 권사님, 그리고 베트남인 근로자들을 사랑하시는 집사님께서도 동행하셨습니다.
우리 교회가 협력하고 있는 김덕규 선교사님의 친절한 안내로 호치민에서 좀 떨어진 빈롱이란 시골에 세워진 숭의백스빌리지를 돌아볼 수 있었습니다. 기술학교, 양로원, 유치원 등 의미 있는 사역이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현지인들은 그 사역이 한국 교회의 후원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김덕규 선교사님이 목사라는 사실도 다 알고 있었습니다. 외국인이 공개적으로 복음을 전할 수 없는 지역에서도 주님의 사랑은 결국 현지인들에게 전달되고 있음을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이번 일정 가운데서 제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김덕규 선교사님께서 들려주신 간증이었습니다. 김덕규 선교사님은 베트남 정부로부터 표창장을 수여받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소식을 처음 전해 듣자, 선교사님은 “제가 어떻게 그런 표창장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한 게 뭐가 있다고. . . ”라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그 때 당국자의 말은 오늘 우리 모두의 삶과 사역을 되짚어 보게 합니다. “김덕규 목사님, 목사님께서 우리나라 빈민들에게 물질을 나누어주셔서 고맙지만, 그 물질 때문에 표창장을 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서양 사람들은 더 많은 물질을 제공했기 때문입니다. 목사님께서 표창장을 받게 된 것은 목사님께서 우리 베트남 사람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목사님께서 우리 베트남 사람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폴란드 출신 여류 사회학자 Iwanska가 미국 북서부지방 사람들의 경험은 세 가지 영역으로 분류될 수 있다고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첫째는 풍경과 같은 구경거리의 영역입니다. 여기에 분류될 수 있는 것으로 날씨, 스포츠, 영화배우, 주말 여행 등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리 부담 갖지 않고 흥밋거리로 나누는 경험들이 이에 해당됩니다.
둘째 영역에는 기계장치라는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예를 들어, 컴퓨터나 자동차, 주택이나 의복, 침대나 식탁, 책장이나 책상 등 주로 우리의 생활이나 일과 관련되어 있는 것들입니다.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사용하는 도구나 연장과 같은 것을 가리킵니다. 이 도구나 연장이라고 하는 것은 효율적이고 생산적인 결과를 위해 사용됩니다. 그러나 더 이상 고쳐 쓸 수 없거나 필요 없으면 버려지거나 더 좋은 것으로 바꾸어지기도 합니다.
마지막으로, Iwanska는 사람의 영역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는 서로 신뢰 관계를 맺고, 서로의 생각과 느낌을 나누며, 서로의 아픔과 고통을 돌아보는 등 자신의 인격과 삶을 깊이 공유할 수 있는 대상들을 가리킵니다. 이런 “사람”들과 비로소 나와 너의 참된 인격적 만남이 가능하게 됩니다.
놀라운 사실은 이 세 가지 경험을 정리해주는 “풍경” “기계장치” 그리고 “사람”이란 단어가 그대로 인간들에게도 적용된다는 것입니다. 미국 북서부 사람들은 낯설고 이국적인 인간을 만나면 “풍경”으로 간주합니다. 보호구역의 인디언들을 만나면 마치 동물원 우리 안에 갇힌 동물들 구경하는 것과 거의 동일하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어디까지나 구경거리이지요. 또한 자신이 운영하는 가게에 고용된 남미 사람들에 대해서는 생산성을 높여주는 어떤 “기계장치”로 여깁니다. 수지 타산에 별로 도움 되지 않으면 언제든지 버리거나 교체할 수 있는 도구로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자신과 같은 꼭 같은 “사람”으로 대해주는 인간은 가족이나 친척 혹은 그리 많지 않은 친구 등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1988년도부터 저에게 인도네시아 선교사로 사역하도록 인도하셨습니다. 참 많은 방문자들을 대할 수 있었습니다. 대개는 여러 명이 함께 오셨습니다. 방문단 이름 또한 다양했습니다. 선교현장 실습팀, 선교현장 방문단, 단기 선교팀, 의료 선교팀, 찬양 선교팀, 비젼 트립팀, 미전도종족 연구조사팀, 심지어 한 방문단이 주고 간 그 교회 주보 광고지면에 의하면 선교현장시찰단이란 이름도 있었습니다. 참 여러 사람, 여러 팀을 맞이했습니다.
방문단 이름이 다르고, 그 평균 연령이 다르고, 그 방문 목표가 달랐어도 시간 아끼는 모습은 같아 보였습니다. 짧은 일정에 매우 효율적인 결과를 얻기 위해서였을 겁니다. 잠을 줄여가면서까지 아주 열심히 선교 현장을 방문하고 봉사하는 등 수고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때로 그들의 헌신과 희생을 통해 많은 위로와 격려, 그리고 도전을 받기도 했습니다. 바야흐로 선교한국의 열심을 체감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도 잊을 수 없는 한 방문단이 있었습니다. 은퇴를 앞둔 원로목사님 및 장로님과 권사님들께서 오신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다들 연세가 있으시기 때문에 숙소와 식사에 각별히 신경 써달라고 그 교회 부목사님께서 부탁까지 하셨습니다. 드디어 일행이 다른 나라에서의 일정을 마치고 도착하셨습니다. 숙소에서 잠시의 휴식 시간을 드린 다음, 사역 현장에 대한 소개와 일정에 대한 안내를 하게 되었습니다. 워낙 밤에 도착하셨고 이틀 밤 주무신 다음 새벽에 출발하기 때문에 사실상 공식적인 일정은 다음 날 하루에 마쳐야 했습니다. 그 교회에서 월 10만원씩 후원하는 시골교회는 숙소로부터 승합차로 3시간 정도 이동해야 했습니다. 왕복 6시간에다 예배순서와 2부 식사 순서를 포함하면 족히 9시간 정도는 걸린다는 방문일정 안내를 듣고 다들 곤혹스런 표정을 지었고 수군거렸습니다. 그리고 어떤 한 분이 용기 내어 말씀하셨습니다. “아, 그 시골교회 다 그게 그거고, 걔네들한테 가지 않아도 상관없다” “아, 그 시골교회 다 그게 그거고, 걔네들한테 가지 않아도 상관없다.” 그러자 다들 동의하면서 차라리 시내구경과 쇼핑시켜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저는 순간적으로 관광 가이드가 되어드려야 하는 씁쓸함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시내를 안내하는 동안 현지인을 통해 약속 취소를 알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전화도 대중교통도 없는 시골이라 낡은 오오토바이로 달려가서 직접 알려야 했습니다.
그 분들이 다음 방문지를 향하여 새벽같이 떠나가신 다음, 저는 그 시골교회 목회자를 찾아가 정중하게 사과해야 했습니다. 일정이 갑자기 취소된 이유를 설명하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한국 후원자들의 방문 계획을 전해들은 가난한 현지 성도님들, 찬송하고 기도하면서 기다렸을 겁니다. 부자 나라의 교회, 교회성장으로 유명한 나라의 교회, 그리고 자신들을 후원하는 교회의 성도님들을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렸을 겁니다. 그런데 기다리던 한국 성도님은 오질 않고 대신 나타난 현지 사역자로부터 일정 취소 연락을 받게 된 성도님들! 어떤 마음으로 뿔뿔이 흩어졌을까? 어렵사리 정성으로 준비해온 음식, 다시 들고 귀가하는 현지 성도님들은 무엇을 생각했을까?
한국 방문단 속에는 생전 처음 해외 나들이를 하는 분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이국적인 풍물도 경험하고, 한국에 비해 값싼 물건도 사고 싶고, 여비를 보태주신 분들에게 드릴 선물도 구입하셔야 했던 것 어느 정도는 이해할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그 시골교회를 위하여 물질적으로 후원할 뿐 아니라, 눈물의 기도까지 드린다고들 힘주어 말해왔지만, 그리 만나보고 싶어 하는 것 같지도 않았습니다. 사역자의 고통과 아픔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갖고 있지 않아 보였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 방문단에게 현지교회 성도님들은 볼 수 있으면야 좋겠지만 보지 않아도 그뿐인 소위 “풍경”에 지나지 않은 것 같았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차라리 그 시골교회 성도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잘되었는지도 모릅니다. 현지 성도님들이 방문단의 오만한 태도를 직접 감지해 버린다면, 그래서 한국 교회 전체를 싸잡아 비판한다면. . . . 상상만 해도 아찔해지고 부끄러워집니다.
하나님의 본체이시지만 사람을 사랑하여 “사람”되어 사람과 함께 거하신 예수님! 사랑의 계명을 가르치시고 위하여 자신을 내어주시기까지 사랑하신 예수님께서는 회교도로 둘러싸인 지역에서 멸시와 핍박 견디며 신앙 지켜내는 그 시골교회, 아무리 행로에 곤하여도 그 성도님들 찾아가시어 하나님의 형상 따라 지음 받은 존귀한 “사람”으로 대하셨을 겁니다. 그곳에서 천국 비밀을 열어 보이시고, 그들의 신앙을 격려하셨을 겁니다. 사역자의 수고와 희생을 위로하며, 그들이 정성으로 준비한 음식을 흔쾌히 드셨을 겁니다.
그 방문단 사건 이후, 저는 지금까지도 종종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저에게 던져봅니다. “그렇다면 나에게 현지인은 누구였고 무엇이었던가?” 선교사로서 저는 누구 못지않게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믿었습니다. 또 하나님의 선교 명령을 따라 죽어 가는 영혼들을 구원하기 위해 선교지를 향해 달려갔습니다. 도시근로자들을 구제하며 전도했습니다. 선교유치원을 지어 운영했습니다. 개척된 교회를 도우며 건물을 지어주기도 했습니다. 교회지도자들을 모아 교회성장에 대해 강의하기도 했습니다. 시골 사역자들을 길러내는 신학교를 세워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현지인 직원을 채용하여 함께 의견을 모으고 계획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사람의 눈에는 제법 크게 보일 수도 있는 사역이었습니다.
하지만 조심조심 자신을 들여다보게 되었습니다. 과연 저들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였기 때문에 그토록 열심히 달려갔던 것인가? 혹시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일이라 표방하였지만, 은밀하게는 나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과 도구로 저들을 대한 것은 아니었던가? 혹시 후원교회를 위해 준비해야 하는 선교보고 거리에 불과한 것은 아니었던가? Iwanska의 표현을 빌면 사랑을 나누어야 할 “사람”이 아니라 일의 효율성과 생산성을 위해 필요하다면 사용하면서도 언제든 폐기하고 바꾸어 버릴 수도 있는 “기계장치”는 아니었던가? 도대체 나는 무슨 동기로 그 많은 사역들을 진행시켰던가?
주님께서는 고전 13: 2-3을 통해 사랑 빠져버린 사역을 경고하신 적이 있습니다.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뒤집어 읽으면 사랑 없이도 얼마든지 선교하고 사역할 수 있다는 말씀이겠지요. 내게 예언하는 능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내개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어도 좋겠습니다. 내게 모든 것을 구제할 수 있다면 참 좋겠습니다. 내 몸을 불사르게 희생하는 마음이 있어도 좋겠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진정코 사람을 사랑해서 하는 일인지, 아니면 사역자로서 내 명성, 내 명예, 내 평판, 내 위치, 내 영향력 등을 먼저 계산하는 동기가 깔려 있는지 깊이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어찌 선교사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자녀요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부름 받은 높은뜻숭의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는 서로를 어떻게 대합니까? 이웃과 일터에서 만나고 있는 영혼들을 무엇이라 여기고 있습니까? 그러니까 우리는 어떤 사이입니까? 그냥 잠시 스쳐 지나가는 “풍경거리”입니까? 아니면 내 목적을 달성하고 내 이익을 얻기 위해 이용해보고 싶은 “기계장치”입니까? 그렇지 않다면 인격적 교감이 오가는 가운데 서로의 아픔과 고통을 나누며 섬겨야 할 “사람”입니까? 우리를 사람으로 사랑하사 목숨까지 내어주신 예수님께서 이곳에 오신다면 우리를 어떻게 대하며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실 것 같습니까?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요 13:34)”
출처/이장호 목사 설교 중에서
저는 지난 2월 12일부터 17일까지 선교지 베트남을 방문하고 돌아왔습니다. 베트남을 향한 우리 교회의 선교 사역을 진단하고 향후 선교 방법들을 구상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 여정에는 해외선교협의회 담당 목사님, 세계선교부장 권사님, 그리고 베트남인 근로자들을 사랑하시는 집사님께서도 동행하셨습니다.
우리 교회가 협력하고 있는 김덕규 선교사님의 친절한 안내로 호치민에서 좀 떨어진 빈롱이란 시골에 세워진 숭의백스빌리지를 돌아볼 수 있었습니다. 기술학교, 양로원, 유치원 등 의미 있는 사역이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현지인들은 그 사역이 한국 교회의 후원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김덕규 선교사님이 목사라는 사실도 다 알고 있었습니다. 외국인이 공개적으로 복음을 전할 수 없는 지역에서도 주님의 사랑은 결국 현지인들에게 전달되고 있음을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이번 일정 가운데서 제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김덕규 선교사님께서 들려주신 간증이었습니다. 김덕규 선교사님은 베트남 정부로부터 표창장을 수여받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소식을 처음 전해 듣자, 선교사님은 “제가 어떻게 그런 표창장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한 게 뭐가 있다고. . . ”라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그 때 당국자의 말은 오늘 우리 모두의 삶과 사역을 되짚어 보게 합니다. “김덕규 목사님, 목사님께서 우리나라 빈민들에게 물질을 나누어주셔서 고맙지만, 그 물질 때문에 표창장을 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서양 사람들은 더 많은 물질을 제공했기 때문입니다. 목사님께서 표창장을 받게 된 것은 목사님께서 우리 베트남 사람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목사님께서 우리 베트남 사람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폴란드 출신 여류 사회학자 Iwanska가 미국 북서부지방 사람들의 경험은 세 가지 영역으로 분류될 수 있다고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첫째는 풍경과 같은 구경거리의 영역입니다. 여기에 분류될 수 있는 것으로 날씨, 스포츠, 영화배우, 주말 여행 등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리 부담 갖지 않고 흥밋거리로 나누는 경험들이 이에 해당됩니다.
둘째 영역에는 기계장치라는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예를 들어, 컴퓨터나 자동차, 주택이나 의복, 침대나 식탁, 책장이나 책상 등 주로 우리의 생활이나 일과 관련되어 있는 것들입니다.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사용하는 도구나 연장과 같은 것을 가리킵니다. 이 도구나 연장이라고 하는 것은 효율적이고 생산적인 결과를 위해 사용됩니다. 그러나 더 이상 고쳐 쓸 수 없거나 필요 없으면 버려지거나 더 좋은 것으로 바꾸어지기도 합니다.
마지막으로, Iwanska는 사람의 영역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는 서로 신뢰 관계를 맺고, 서로의 생각과 느낌을 나누며, 서로의 아픔과 고통을 돌아보는 등 자신의 인격과 삶을 깊이 공유할 수 있는 대상들을 가리킵니다. 이런 “사람”들과 비로소 나와 너의 참된 인격적 만남이 가능하게 됩니다.
놀라운 사실은 이 세 가지 경험을 정리해주는 “풍경” “기계장치” 그리고 “사람”이란 단어가 그대로 인간들에게도 적용된다는 것입니다. 미국 북서부 사람들은 낯설고 이국적인 인간을 만나면 “풍경”으로 간주합니다. 보호구역의 인디언들을 만나면 마치 동물원 우리 안에 갇힌 동물들 구경하는 것과 거의 동일하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어디까지나 구경거리이지요. 또한 자신이 운영하는 가게에 고용된 남미 사람들에 대해서는 생산성을 높여주는 어떤 “기계장치”로 여깁니다. 수지 타산에 별로 도움 되지 않으면 언제든지 버리거나 교체할 수 있는 도구로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자신과 같은 꼭 같은 “사람”으로 대해주는 인간은 가족이나 친척 혹은 그리 많지 않은 친구 등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1988년도부터 저에게 인도네시아 선교사로 사역하도록 인도하셨습니다. 참 많은 방문자들을 대할 수 있었습니다. 대개는 여러 명이 함께 오셨습니다. 방문단 이름 또한 다양했습니다. 선교현장 실습팀, 선교현장 방문단, 단기 선교팀, 의료 선교팀, 찬양 선교팀, 비젼 트립팀, 미전도종족 연구조사팀, 심지어 한 방문단이 주고 간 그 교회 주보 광고지면에 의하면 선교현장시찰단이란 이름도 있었습니다. 참 여러 사람, 여러 팀을 맞이했습니다.
방문단 이름이 다르고, 그 평균 연령이 다르고, 그 방문 목표가 달랐어도 시간 아끼는 모습은 같아 보였습니다. 짧은 일정에 매우 효율적인 결과를 얻기 위해서였을 겁니다. 잠을 줄여가면서까지 아주 열심히 선교 현장을 방문하고 봉사하는 등 수고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때로 그들의 헌신과 희생을 통해 많은 위로와 격려, 그리고 도전을 받기도 했습니다. 바야흐로 선교한국의 열심을 체감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도 잊을 수 없는 한 방문단이 있었습니다. 은퇴를 앞둔 원로목사님 및 장로님과 권사님들께서 오신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다들 연세가 있으시기 때문에 숙소와 식사에 각별히 신경 써달라고 그 교회 부목사님께서 부탁까지 하셨습니다. 드디어 일행이 다른 나라에서의 일정을 마치고 도착하셨습니다. 숙소에서 잠시의 휴식 시간을 드린 다음, 사역 현장에 대한 소개와 일정에 대한 안내를 하게 되었습니다. 워낙 밤에 도착하셨고 이틀 밤 주무신 다음 새벽에 출발하기 때문에 사실상 공식적인 일정은 다음 날 하루에 마쳐야 했습니다. 그 교회에서 월 10만원씩 후원하는 시골교회는 숙소로부터 승합차로 3시간 정도 이동해야 했습니다. 왕복 6시간에다 예배순서와 2부 식사 순서를 포함하면 족히 9시간 정도는 걸린다는 방문일정 안내를 듣고 다들 곤혹스런 표정을 지었고 수군거렸습니다. 그리고 어떤 한 분이 용기 내어 말씀하셨습니다. “아, 그 시골교회 다 그게 그거고, 걔네들한테 가지 않아도 상관없다” “아, 그 시골교회 다 그게 그거고, 걔네들한테 가지 않아도 상관없다.” 그러자 다들 동의하면서 차라리 시내구경과 쇼핑시켜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저는 순간적으로 관광 가이드가 되어드려야 하는 씁쓸함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시내를 안내하는 동안 현지인을 통해 약속 취소를 알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전화도 대중교통도 없는 시골이라 낡은 오오토바이로 달려가서 직접 알려야 했습니다.
그 분들이 다음 방문지를 향하여 새벽같이 떠나가신 다음, 저는 그 시골교회 목회자를 찾아가 정중하게 사과해야 했습니다. 일정이 갑자기 취소된 이유를 설명하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한국 후원자들의 방문 계획을 전해들은 가난한 현지 성도님들, 찬송하고 기도하면서 기다렸을 겁니다. 부자 나라의 교회, 교회성장으로 유명한 나라의 교회, 그리고 자신들을 후원하는 교회의 성도님들을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렸을 겁니다. 그런데 기다리던 한국 성도님은 오질 않고 대신 나타난 현지 사역자로부터 일정 취소 연락을 받게 된 성도님들! 어떤 마음으로 뿔뿔이 흩어졌을까? 어렵사리 정성으로 준비해온 음식, 다시 들고 귀가하는 현지 성도님들은 무엇을 생각했을까?
한국 방문단 속에는 생전 처음 해외 나들이를 하는 분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이국적인 풍물도 경험하고, 한국에 비해 값싼 물건도 사고 싶고, 여비를 보태주신 분들에게 드릴 선물도 구입하셔야 했던 것 어느 정도는 이해할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그 시골교회를 위하여 물질적으로 후원할 뿐 아니라, 눈물의 기도까지 드린다고들 힘주어 말해왔지만, 그리 만나보고 싶어 하는 것 같지도 않았습니다. 사역자의 고통과 아픔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갖고 있지 않아 보였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 방문단에게 현지교회 성도님들은 볼 수 있으면야 좋겠지만 보지 않아도 그뿐인 소위 “풍경”에 지나지 않은 것 같았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차라리 그 시골교회 성도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잘되었는지도 모릅니다. 현지 성도님들이 방문단의 오만한 태도를 직접 감지해 버린다면, 그래서 한국 교회 전체를 싸잡아 비판한다면. . . . 상상만 해도 아찔해지고 부끄러워집니다.
하나님의 본체이시지만 사람을 사랑하여 “사람”되어 사람과 함께 거하신 예수님! 사랑의 계명을 가르치시고 위하여 자신을 내어주시기까지 사랑하신 예수님께서는 회교도로 둘러싸인 지역에서 멸시와 핍박 견디며 신앙 지켜내는 그 시골교회, 아무리 행로에 곤하여도 그 성도님들 찾아가시어 하나님의 형상 따라 지음 받은 존귀한 “사람”으로 대하셨을 겁니다. 그곳에서 천국 비밀을 열어 보이시고, 그들의 신앙을 격려하셨을 겁니다. 사역자의 수고와 희생을 위로하며, 그들이 정성으로 준비한 음식을 흔쾌히 드셨을 겁니다.
그 방문단 사건 이후, 저는 지금까지도 종종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저에게 던져봅니다. “그렇다면 나에게 현지인은 누구였고 무엇이었던가?” 선교사로서 저는 누구 못지않게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믿었습니다. 또 하나님의 선교 명령을 따라 죽어 가는 영혼들을 구원하기 위해 선교지를 향해 달려갔습니다. 도시근로자들을 구제하며 전도했습니다. 선교유치원을 지어 운영했습니다. 개척된 교회를 도우며 건물을 지어주기도 했습니다. 교회지도자들을 모아 교회성장에 대해 강의하기도 했습니다. 시골 사역자들을 길러내는 신학교를 세워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현지인 직원을 채용하여 함께 의견을 모으고 계획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사람의 눈에는 제법 크게 보일 수도 있는 사역이었습니다.
하지만 조심조심 자신을 들여다보게 되었습니다. 과연 저들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였기 때문에 그토록 열심히 달려갔던 것인가? 혹시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일이라 표방하였지만, 은밀하게는 나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과 도구로 저들을 대한 것은 아니었던가? 혹시 후원교회를 위해 준비해야 하는 선교보고 거리에 불과한 것은 아니었던가? Iwanska의 표현을 빌면 사랑을 나누어야 할 “사람”이 아니라 일의 효율성과 생산성을 위해 필요하다면 사용하면서도 언제든 폐기하고 바꾸어 버릴 수도 있는 “기계장치”는 아니었던가? 도대체 나는 무슨 동기로 그 많은 사역들을 진행시켰던가?
주님께서는 고전 13: 2-3을 통해 사랑 빠져버린 사역을 경고하신 적이 있습니다.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뒤집어 읽으면 사랑 없이도 얼마든지 선교하고 사역할 수 있다는 말씀이겠지요. 내게 예언하는 능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내개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어도 좋겠습니다. 내게 모든 것을 구제할 수 있다면 참 좋겠습니다. 내 몸을 불사르게 희생하는 마음이 있어도 좋겠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진정코 사람을 사랑해서 하는 일인지, 아니면 사역자로서 내 명성, 내 명예, 내 평판, 내 위치, 내 영향력 등을 먼저 계산하는 동기가 깔려 있는지 깊이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어찌 선교사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자녀요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부름 받은 높은뜻숭의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는 서로를 어떻게 대합니까? 이웃과 일터에서 만나고 있는 영혼들을 무엇이라 여기고 있습니까? 그러니까 우리는 어떤 사이입니까? 그냥 잠시 스쳐 지나가는 “풍경거리”입니까? 아니면 내 목적을 달성하고 내 이익을 얻기 위해 이용해보고 싶은 “기계장치”입니까? 그렇지 않다면 인격적 교감이 오가는 가운데 서로의 아픔과 고통을 나누며 섬겨야 할 “사람”입니까? 우리를 사람으로 사랑하사 목숨까지 내어주신 예수님께서 이곳에 오신다면 우리를 어떻게 대하며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실 것 같습니까?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요 13:34)”
출처/이장호 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