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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와 구원 (요 3 : 16)
요즘 우리는 예수님의 고난을 묵상하는 사순절 기간을 지나고 있습니다. 기독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고, 그 십자가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을 얻게 되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복음을 한 마디로 정의하라면 그것은 ‘십자가와 구원’이 될 것입니다. 누구를 막론하고, 다시 말해서 그가 어떠한 죄를 지은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상관없이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자신의 죄를 회개하면 멸망치 않고 다 구원을 얻게 된다는 것이 우리 기독교의 핵심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때문에 우리를 귀히 여기십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은 아끼시는 것이 없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당신의 생명을 십자가에 못 박으셨습니다. 당신의 생명을 주시고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엄청난 값을 치루시고 우리를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사실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귀한 존재라는 사실과 구원 얻은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건강하고 아름다운 삶을 위하여 꼭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구원의 확신입니다. 내가 구원 받은 사람이라는 확신처럼 우리의 삶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다음과 같은 매우 중요한 현상들이 나타나게 됩니다.
첫째, 욕심이 없어집니다. 이것은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가장 중요한 현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천국에 대한 소망과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세상에 대하여 욕심이 없습니다. 욕심을 가질 수 없습니다. 보다 좋은 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보다 좋지 못한 것에 대하여 욕심을 내지 않습니다.
91년도에 처음으로 중국을 방문했었습니다. 그때는 중국이 이제 막 경제적으로 기지개를 켜기 시작하는 때 같아 보였습니다. 모든 것이 활발하였지만 아직 모든 것이 자리가 잡히지 아니하였을 때입니다. 백화점엘 갔었습니다. 많은 물건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고 싶은 물건은 거의 없었습니다.
안내하시는 분이 중국도 많이 발전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서 저희들을 의류와 가전제품을 판매하는 곳으로 인도해 주셨는데 그것이 그분의 실수였습니다. 많은 가전제품들과 의류들은 있었지만 하나도 욕심나는 것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부분에 관해서는 우리 한국이 당시 몇 십 년을 앞서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벌써 그 백화점에 있는 것 보다 훨씬 디자인과 성능이 좋은 것들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조금 건방지게 말하자면 거저 주어도 가지고 오고 싶지 않았습니다.
중국보다 조금 앞선 한국에서 산다는 이유만으로 중국 백화점에서 욕심 없는 마음을 가져 볼 수 있었습니다. 저는 그 때 내가 정말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산다면 이 땅에 사는 동안에도 욕심 없이 깨끗한 삶을 살 수 있겠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욕심을 버릴 수 있는 것은 정말 대단한 것입니다. 개인과 세상의 모든 문제가 바로 이 욕심에서부터 출발을 하기 때문입니다.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느니라>는 말씀처럼 중요한 말씀이 없습니다. 개인과 세상의 모든 사망은 그 원인이 죄에 있고, 모든 죄의 원인은 욕심에 있습니다. 욕심이 없다면 죄도 없고, 죄가 없다면 사망도 있을 수 없습니다.
욕심은 사람을 비굴하게 합니다. 욕심은 사람을 잔인하게 합니다. 강한 사람이 욕심을 가지면 잔인해집니다. 약한 자를 공격하고 없는 자의 것을 착취합니다. 약한 사람이 욕심을 가지면 비굴해 집니다. 강하고 있는 사람에게 빌붙어서 앞에서는 아부하고 뒤에서는 욕을 합니다. 아무것이나 주워 먹는 땅거지가 됩니다. 욕심은 사람을 추하게 합니다.
욕심 없는 마음은 사람을 당당하게 합니다. 약해도 비굴하지 않습니다. 기죽지 않습니다. 언제나 떳떳하고 당당합니다. 절대로 땅에서 아무것이나 주워 먹지 않습니다. 약해도 초조해 하지 않습니다. 불안해하지 않습니다. 남을 시기하지 않습니다. 약한 사람의 당당함과 여유 있음처럼 훌륭한 것은 없습니다. 아름다운 것은 없습니다.
욕심 없는 마음은 사람을 근사하게 합니다. 강해도 거만하지 않습니다. 냉냉하지 않습니다. 겸손합니다. 따뜻합니다. 자신의 강함과 부함을 가지고 약한 사람과 세상을 섬깁니다. 정말 낮은 자리에서 섬깁니다. 강하고 부한 자들의 겸손함과 따뜻함처럼 훌륭하고 아름다운 것은 세상에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강한 약함, 부함과 가난함은 훌륭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는데 별로 중요한 기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훌륭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기준은 ‘욕심 없는 마음’입니다. 그런데 그 중요한 ‘욕심 없는 마음’은 믿음에서 옵니다. 자신이 구원받는 존재라는 것을 확신하는 믿음에서부터 옵니다.
둘째, 절망과 불안이 없어집니다. 절망과 불안과 초조는 우리를 죽음으로 몰아가는 질병들입니다. 그런데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우리에게서 그와 같은 불안과 초조 그리고 절망으로부터 구원해 줄 수 없습니다. 돈이 많아지면 없어질 것 같지만 오히려 반대입니다. 돈이 많아지면 근심이 더 많아집니다. 더 불안해 집니다. 부자들이 돈을 벌었을 때 제일 먼저 하는 일이 무언지 아십니까? 그것은 담 쌓고 철망 치는 것입니다.
권력을 갖게 되면 없어질 것 같지만 오히려 반대입니다. 평민으로 살 때는 자유롭게 아무데나 다닐 수 있지만 대통령이 되게 되면 자유롭게 아무데나 다닐 수 없습니다. 경호원이 따라 붙어야만 합니다.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소망과 평안은 믿음이 줍니다. 그런데 우리가 믿을 수 있는 분은 하나님 뿐입니다. 전지전능하시고 나를 나보다 더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참으로 믿을 수 있을 때 우리는 참 소망과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구원의 확신처럼 우리에게 소망을 주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절대로 절망할 수 없습니다. 불안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제가 자주 사용하는 예화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박찬호 선수가 메이저 리그에 데뷔했을 때 그가 승리한 게임의 녹화 테잎을 보는 것이 즐거운 낙 중에 하나였습니다. 박찬호 선수가 3승인가 5승인가를 올린 게임을 아이들이 녹화해 주어 어느 한가한 시간에 그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게임을 박찬호 선수가 승리한 게임이었지만 초반에는 박찬호 선수의 컨디션이 별로 좋지 못했습니다. 1회에 볼은 19개나 던졌습니다. 어느 회인가는 만루의 핀치에 몰리기도 하였고, 또 어느 회에서는 홈런을 맞기도 하였습니다. 그 때마다 아나운서와 해설자는 걱정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아주 여유만만이었습니다. 저는 그 게임의 결과를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미 이긴 게임인데 1회에 볼을 19개 아니야 29개를 던진들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홈런을 맞고 핀치에 좀 몰린다기로서니 그게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이긴 게임인데 ....!!!
저는 그날 그 녹화게임을 보면서 나는 이미 구원을 얻은 사람인데 세상에 사는 동안 좀 어려움을 격고 환난을 만난다고해서 낙심하거나 절망할 필요한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만일 그날 그 녹화 테잎을 보면서 그 테잎 속의 아나운서와 해설자와 같이 절망하고 낙심하였다면 사람들은 저를 정상으로 보지 않았을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미 구원을 얻은 사람들 입니다. 우리 인생의 9회말은 승리라는 말씀입니다. 살다보면 일이 안 풀릴 때가 있습니다. 핀치에 몰릴 때도 있습니다. 홈런을 맞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절망하고 포기하고 낙심한다면 미친 사람 아닙니까? 구원 받았는데, 인생의 게임은 우리가 이긴 것인데, 그 과정 중에 좀 어려운 일을 당한다고 낙심하고 절망하고 포기한다면 그것을 어떻게 정상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믿는 사람과 믿지 아니하는 사람, 구원의 확신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차이는 별로 없습니다. 성공과 실패, 건강과 병듦, 높아짐과 낮아짐에 차이가 없습니다. 환경과 상황에는 거의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그런데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이 있는 사람은 어떠한 일을 만나더라도 절망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소망 중에 모든 역경을 이겨낸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역경을 기회로 만든다는 것입니다.
정말 믿음이 있는 사람은 환난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인내합니다. 박찬호의 승리를 알고 있었던 저는 중간에 텔레비전을 끄지 않았습니다. 끝까지 여유 있게 그 게임을 볼 수 있었습니다. 환난 중에 낙심하지 아니하고 인내하다보면 사람이 강해집니다. 연단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는 환경의 지배를 받는 사람이 아니라 환경을 지배하는 사람이 됩니다. 소망을 기다리는 사람이 아니라 소망을 이루는 사람이 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 하셨느니라.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 되었은즉 화목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롬 5 : 1 - 10)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나의 대적, 나의 원수 된 행악자가 내 살을 먹으 려고 내게로 왔다가 실족하여 넘어졌도다.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칠지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 할지라도 내가 오히려 안연하리로다. 내가 여호와께 청하였던 한 가지 일 곧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나로 내 생전에 여호와의 집에 거하여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며 그 전에서 사모하게 하실 것이라. 여호와께서 환난 날에 나를 그 초막 속에 비밀히 지키시고 그 장막 은밀한 곳에 나를 숨기시며 바위 위에 높이 두시리로다. 이제 내 머리가 나를 두른 내 원수 위에 들리리니 내가 그 장막에서 즐거운 제사를 드리겠고 노래하여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여호와여 내가 소리로 부르짖을 때에 들으시고 또한 나를 긍휼히 여기사 응답하소서.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하실 때에 내 마음이 주께 말하되 여호와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 하였나이다.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시고 주의 종을 노하여 버리지 마소서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나이다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시여 나를 버리지 말고 떠나지 마옵소서. 내 부모는 나를 버 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 여호와여 주의 길로 나를 가르치시고 내 원수를 인하여 평탄한 길로 인도하소서. 내 생명을 내 대적의 뜻에 맡기지 마소서 위증자와 악을 토하는 자가 일어나 나를 치려 함이니이다. 내가 산 자의 땅에 있음이여 여호와의 은혜 볼 것을 믿었도다> (시 27 : 1 - 13)
마지막으로 구원의 확신은 우리에게 용기를 줍니다. 죽음을 뛰어 넘을 수 있는 용기를 줍니다.
세상과 사탄이 가장 겁내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일 것입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절대로 협박당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유혹도 받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사탄에게 망신을 당하지 아니하고 품위 있는 삶을 살려고 하면 무엇보다도 죽음을 뛰어 넘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죽음을 뛰어넘을 수 있는 진정한 용기는 믿음이 줍니다. 하나님을 믿으며,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예비하신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믿는 사람은 이 땅에서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용기는 우리에게 평안과 안정을 줍니다. 평안과 안정은 우리에게 승리를 가져다 줍니다. 운동을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안정을 취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연습할 때는 잘 되던 것이 막상 경기를 하면 잘 되지 않습니다. 패배에 대한 불안감 때문에 안정이 잘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가 자신의 인생을 승리로 이끌어 갈 수 있는가?’는 ‘누가 빨리 마음의 평안과 안정을 취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에 있어서 평안과 안정처럼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그 평안과 안정은 용기에서 나오고 그 용기는 믿음에서 나옵니다. 다윗은 자신의 삶에서 성공하고 승리한 사람입니다. 그의 성공과 승리는 평안과 안정의 능력에서부터 나왔고 그의 그와 같은 능력은 믿음에서부터 나왔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시 23 : 1 - 6)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소이다. 많은 사람 이 있어 나를 가리켜 말하기를 저는 하나님께 도움을 얻지 못한다 하나이다 (셀라).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니이다. 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 (셀라). 내가 누워 자고 깨었 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천만 인이 나를 둘러치려 하여도 나는 두려워 아니하리이다.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주께서 나의 모든 원 수의 뺨을 치시며 악인의 이를 꺾으셨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 (셀라)> (시 3 : 1 - 8)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복음 중의 복음은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을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사랑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당신의 생명을 십자가에 못 박으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것입니다. 엄청난 대가를 치루시고 이루신 구원이기 때문에 누구를 막론하고 회개하고 하나님을 믿으면 멸망치 않고 구원을 얻는 다는 것입니다.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구원의 확신 때문에 세상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상에 대한 욕심이 없음으로 약하고 가난해도 비굴하지 아니하고 강하고 부해도 거만하지 아니하는 근사한 사람이 되십니다.
구원의 확신 때문에 소망과 용기를 가지고 어떠한 환경 속에서도 굴하지 아니하고 떳떳하고 당당한 그리고 평안과 안정을 누리며 세상과 사탄이 감당할 수 없는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출처/김동호목사 설교 중에서
요즘 우리는 예수님의 고난을 묵상하는 사순절 기간을 지나고 있습니다. 기독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고, 그 십자가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을 얻게 되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복음을 한 마디로 정의하라면 그것은 ‘십자가와 구원’이 될 것입니다. 누구를 막론하고, 다시 말해서 그가 어떠한 죄를 지은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상관없이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자신의 죄를 회개하면 멸망치 않고 다 구원을 얻게 된다는 것이 우리 기독교의 핵심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때문에 우리를 귀히 여기십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은 아끼시는 것이 없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당신의 생명을 십자가에 못 박으셨습니다. 당신의 생명을 주시고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엄청난 값을 치루시고 우리를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사실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귀한 존재라는 사실과 구원 얻은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건강하고 아름다운 삶을 위하여 꼭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구원의 확신입니다. 내가 구원 받은 사람이라는 확신처럼 우리의 삶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다음과 같은 매우 중요한 현상들이 나타나게 됩니다.
첫째, 욕심이 없어집니다. 이것은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가장 중요한 현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천국에 대한 소망과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세상에 대하여 욕심이 없습니다. 욕심을 가질 수 없습니다. 보다 좋은 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보다 좋지 못한 것에 대하여 욕심을 내지 않습니다.
91년도에 처음으로 중국을 방문했었습니다. 그때는 중국이 이제 막 경제적으로 기지개를 켜기 시작하는 때 같아 보였습니다. 모든 것이 활발하였지만 아직 모든 것이 자리가 잡히지 아니하였을 때입니다. 백화점엘 갔었습니다. 많은 물건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고 싶은 물건은 거의 없었습니다.
안내하시는 분이 중국도 많이 발전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서 저희들을 의류와 가전제품을 판매하는 곳으로 인도해 주셨는데 그것이 그분의 실수였습니다. 많은 가전제품들과 의류들은 있었지만 하나도 욕심나는 것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부분에 관해서는 우리 한국이 당시 몇 십 년을 앞서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벌써 그 백화점에 있는 것 보다 훨씬 디자인과 성능이 좋은 것들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조금 건방지게 말하자면 거저 주어도 가지고 오고 싶지 않았습니다.
중국보다 조금 앞선 한국에서 산다는 이유만으로 중국 백화점에서 욕심 없는 마음을 가져 볼 수 있었습니다. 저는 그 때 내가 정말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산다면 이 땅에 사는 동안에도 욕심 없이 깨끗한 삶을 살 수 있겠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욕심을 버릴 수 있는 것은 정말 대단한 것입니다. 개인과 세상의 모든 문제가 바로 이 욕심에서부터 출발을 하기 때문입니다.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느니라>는 말씀처럼 중요한 말씀이 없습니다. 개인과 세상의 모든 사망은 그 원인이 죄에 있고, 모든 죄의 원인은 욕심에 있습니다. 욕심이 없다면 죄도 없고, 죄가 없다면 사망도 있을 수 없습니다.
욕심은 사람을 비굴하게 합니다. 욕심은 사람을 잔인하게 합니다. 강한 사람이 욕심을 가지면 잔인해집니다. 약한 자를 공격하고 없는 자의 것을 착취합니다. 약한 사람이 욕심을 가지면 비굴해 집니다. 강하고 있는 사람에게 빌붙어서 앞에서는 아부하고 뒤에서는 욕을 합니다. 아무것이나 주워 먹는 땅거지가 됩니다. 욕심은 사람을 추하게 합니다.
욕심 없는 마음은 사람을 당당하게 합니다. 약해도 비굴하지 않습니다. 기죽지 않습니다. 언제나 떳떳하고 당당합니다. 절대로 땅에서 아무것이나 주워 먹지 않습니다. 약해도 초조해 하지 않습니다. 불안해하지 않습니다. 남을 시기하지 않습니다. 약한 사람의 당당함과 여유 있음처럼 훌륭한 것은 없습니다. 아름다운 것은 없습니다.
욕심 없는 마음은 사람을 근사하게 합니다. 강해도 거만하지 않습니다. 냉냉하지 않습니다. 겸손합니다. 따뜻합니다. 자신의 강함과 부함을 가지고 약한 사람과 세상을 섬깁니다. 정말 낮은 자리에서 섬깁니다. 강하고 부한 자들의 겸손함과 따뜻함처럼 훌륭하고 아름다운 것은 세상에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강한 약함, 부함과 가난함은 훌륭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는데 별로 중요한 기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훌륭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기준은 ‘욕심 없는 마음’입니다. 그런데 그 중요한 ‘욕심 없는 마음’은 믿음에서 옵니다. 자신이 구원받는 존재라는 것을 확신하는 믿음에서부터 옵니다.
둘째, 절망과 불안이 없어집니다. 절망과 불안과 초조는 우리를 죽음으로 몰아가는 질병들입니다. 그런데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우리에게서 그와 같은 불안과 초조 그리고 절망으로부터 구원해 줄 수 없습니다. 돈이 많아지면 없어질 것 같지만 오히려 반대입니다. 돈이 많아지면 근심이 더 많아집니다. 더 불안해 집니다. 부자들이 돈을 벌었을 때 제일 먼저 하는 일이 무언지 아십니까? 그것은 담 쌓고 철망 치는 것입니다.
권력을 갖게 되면 없어질 것 같지만 오히려 반대입니다. 평민으로 살 때는 자유롭게 아무데나 다닐 수 있지만 대통령이 되게 되면 자유롭게 아무데나 다닐 수 없습니다. 경호원이 따라 붙어야만 합니다.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소망과 평안은 믿음이 줍니다. 그런데 우리가 믿을 수 있는 분은 하나님 뿐입니다. 전지전능하시고 나를 나보다 더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참으로 믿을 수 있을 때 우리는 참 소망과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구원의 확신처럼 우리에게 소망을 주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절대로 절망할 수 없습니다. 불안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제가 자주 사용하는 예화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박찬호 선수가 메이저 리그에 데뷔했을 때 그가 승리한 게임의 녹화 테잎을 보는 것이 즐거운 낙 중에 하나였습니다. 박찬호 선수가 3승인가 5승인가를 올린 게임을 아이들이 녹화해 주어 어느 한가한 시간에 그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게임을 박찬호 선수가 승리한 게임이었지만 초반에는 박찬호 선수의 컨디션이 별로 좋지 못했습니다. 1회에 볼은 19개나 던졌습니다. 어느 회인가는 만루의 핀치에 몰리기도 하였고, 또 어느 회에서는 홈런을 맞기도 하였습니다. 그 때마다 아나운서와 해설자는 걱정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아주 여유만만이었습니다. 저는 그 게임의 결과를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미 이긴 게임인데 1회에 볼을 19개 아니야 29개를 던진들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홈런을 맞고 핀치에 좀 몰린다기로서니 그게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이긴 게임인데 ....!!!
저는 그날 그 녹화게임을 보면서 나는 이미 구원을 얻은 사람인데 세상에 사는 동안 좀 어려움을 격고 환난을 만난다고해서 낙심하거나 절망할 필요한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만일 그날 그 녹화 테잎을 보면서 그 테잎 속의 아나운서와 해설자와 같이 절망하고 낙심하였다면 사람들은 저를 정상으로 보지 않았을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미 구원을 얻은 사람들 입니다. 우리 인생의 9회말은 승리라는 말씀입니다. 살다보면 일이 안 풀릴 때가 있습니다. 핀치에 몰릴 때도 있습니다. 홈런을 맞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절망하고 포기하고 낙심한다면 미친 사람 아닙니까? 구원 받았는데, 인생의 게임은 우리가 이긴 것인데, 그 과정 중에 좀 어려운 일을 당한다고 낙심하고 절망하고 포기한다면 그것을 어떻게 정상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믿는 사람과 믿지 아니하는 사람, 구원의 확신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차이는 별로 없습니다. 성공과 실패, 건강과 병듦, 높아짐과 낮아짐에 차이가 없습니다. 환경과 상황에는 거의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그런데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이 있는 사람은 어떠한 일을 만나더라도 절망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소망 중에 모든 역경을 이겨낸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역경을 기회로 만든다는 것입니다.
정말 믿음이 있는 사람은 환난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인내합니다. 박찬호의 승리를 알고 있었던 저는 중간에 텔레비전을 끄지 않았습니다. 끝까지 여유 있게 그 게임을 볼 수 있었습니다. 환난 중에 낙심하지 아니하고 인내하다보면 사람이 강해집니다. 연단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는 환경의 지배를 받는 사람이 아니라 환경을 지배하는 사람이 됩니다. 소망을 기다리는 사람이 아니라 소망을 이루는 사람이 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 하셨느니라.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 되었은즉 화목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롬 5 : 1 - 10)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나의 대적, 나의 원수 된 행악자가 내 살을 먹으 려고 내게로 왔다가 실족하여 넘어졌도다.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칠지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 할지라도 내가 오히려 안연하리로다. 내가 여호와께 청하였던 한 가지 일 곧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나로 내 생전에 여호와의 집에 거하여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며 그 전에서 사모하게 하실 것이라. 여호와께서 환난 날에 나를 그 초막 속에 비밀히 지키시고 그 장막 은밀한 곳에 나를 숨기시며 바위 위에 높이 두시리로다. 이제 내 머리가 나를 두른 내 원수 위에 들리리니 내가 그 장막에서 즐거운 제사를 드리겠고 노래하여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여호와여 내가 소리로 부르짖을 때에 들으시고 또한 나를 긍휼히 여기사 응답하소서.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하실 때에 내 마음이 주께 말하되 여호와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 하였나이다.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시고 주의 종을 노하여 버리지 마소서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나이다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시여 나를 버리지 말고 떠나지 마옵소서. 내 부모는 나를 버 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 여호와여 주의 길로 나를 가르치시고 내 원수를 인하여 평탄한 길로 인도하소서. 내 생명을 내 대적의 뜻에 맡기지 마소서 위증자와 악을 토하는 자가 일어나 나를 치려 함이니이다. 내가 산 자의 땅에 있음이여 여호와의 은혜 볼 것을 믿었도다> (시 27 : 1 - 13)
마지막으로 구원의 확신은 우리에게 용기를 줍니다. 죽음을 뛰어 넘을 수 있는 용기를 줍니다.
세상과 사탄이 가장 겁내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일 것입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절대로 협박당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유혹도 받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사탄에게 망신을 당하지 아니하고 품위 있는 삶을 살려고 하면 무엇보다도 죽음을 뛰어 넘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죽음을 뛰어넘을 수 있는 진정한 용기는 믿음이 줍니다. 하나님을 믿으며,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예비하신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믿는 사람은 이 땅에서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용기는 우리에게 평안과 안정을 줍니다. 평안과 안정은 우리에게 승리를 가져다 줍니다. 운동을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안정을 취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연습할 때는 잘 되던 것이 막상 경기를 하면 잘 되지 않습니다. 패배에 대한 불안감 때문에 안정이 잘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가 자신의 인생을 승리로 이끌어 갈 수 있는가?’는 ‘누가 빨리 마음의 평안과 안정을 취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에 있어서 평안과 안정처럼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그 평안과 안정은 용기에서 나오고 그 용기는 믿음에서 나옵니다. 다윗은 자신의 삶에서 성공하고 승리한 사람입니다. 그의 성공과 승리는 평안과 안정의 능력에서부터 나왔고 그의 그와 같은 능력은 믿음에서부터 나왔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시 23 : 1 - 6)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소이다. 많은 사람 이 있어 나를 가리켜 말하기를 저는 하나님께 도움을 얻지 못한다 하나이다 (셀라).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니이다. 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 (셀라). 내가 누워 자고 깨었 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천만 인이 나를 둘러치려 하여도 나는 두려워 아니하리이다.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주께서 나의 모든 원 수의 뺨을 치시며 악인의 이를 꺾으셨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 (셀라)> (시 3 : 1 - 8)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복음 중의 복음은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을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사랑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당신의 생명을 십자가에 못 박으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것입니다. 엄청난 대가를 치루시고 이루신 구원이기 때문에 누구를 막론하고 회개하고 하나님을 믿으면 멸망치 않고 구원을 얻는 다는 것입니다.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구원의 확신 때문에 세상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상에 대한 욕심이 없음으로 약하고 가난해도 비굴하지 아니하고 강하고 부해도 거만하지 아니하는 근사한 사람이 되십니다.
구원의 확신 때문에 소망과 용기를 가지고 어떠한 환경 속에서도 굴하지 아니하고 떳떳하고 당당한 그리고 평안과 안정을 누리며 세상과 사탄이 감당할 수 없는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출처/김동호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