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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생하도록 하는 양식 (요한복음 6:24-35)
“15분” 이라는 연극이 있었습니다. 그 연극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한 청년이 있었는데, 그는 성공과 출세를 향해 내달리던 청년이었습니다. 그는 장래의 행복을 꿈꾸며 즐거워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병원에서 진찰을 받은 그 청년은 의사로부터 충격적인 말을 들었습니다. 그 청년의 목숨이 앞으로 15분 밖에는 남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청년은 머리를 쥐어 뜯으며 괴로워했습니다. 그때 우체부가 나타나 그에게 철학박사학위 수여 통지서를 전달해 주었습니다. 조금 후에 우체부가 또 편지 하나를 가져왔는데, 그것은 그 청년에게 100만 달라를 상속한다는 통지서였습니다. 그때 옆에 있던 의사가 말하기를 “여보게, 자네는 이제 백만장자가 되었네. 그러나 애석하게도 자네의 생명은 이제 5분 밖에 남지 않았으니, 그 많은 재산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때 우체부가 다시 나타나 또 한 통의 편지를 건네 주었습니다. 그것은 그 청년이 평소에 사모하여 청혼을 했던 여자에게서 온 결혼 승낙 편지였습니다. 옆에 있던 의사가 또 말했습니다. “자, 이제는 자네가 원하는 모든 소원이 다 이루어졌네. 그러나 자네의 생명이 1분 밖에 안남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되네.” 이 말을 들은 그 청년은 극도로 고민하다가 그만 쓰러져 죽고 말았습니다.
여러분의 인생은 몇 분이나 남았습니까? 우리의 인생이 비록 ‘15분’ 보다 많이 남았다고 하더라도 그 청년보다 행복하다고 할 수 있습니까? 15분이나 15년이나, 인생은 결국 허무할 뿐입니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약 4:14)
이렇게 허무한 인생인데도 사람들은 대부분 세상의 헛된 것을 추구하면서 살다가 그만 이 세상을 떠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이유도 이러한 세상적인 관심과 자신의 유익을 얻기 위해서인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예수에게서 뭔가 현실적인 유익을 얻으려고 그를 따라 다니기도 했습니다. 특히 예수께서 오병이어 기적을 베푼 이후에 더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찾아왔습니다. 이는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신 예수야말로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해 주실 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오늘날 우리가 예수를 따르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1. 사람들은 예수에게서 세상의 양식을 구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활동하시던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로마의 수탈과 헤롯 왕의 폭정으로 말할 수 없이 피폐한 삶을 살았습니다. 이렇게 정치 지도자들이 백성들을 수탈하면 종교 지도자들이라도 정신을 차리고, 하늘의 메시지를 전해 그들을 회개시켜야 하는데, 그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타락한 정치 지도자들과 결탁하여 백성을 억압하는데 앞장섰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방으로부터 억압과 수탈을 당하기만 했습니다. 도저히 살 길이 없었습니다. 희망이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장 절실한 문제는 백성들은 먹고 사는 문제였습니다. 그 누구든 떡의 문제만 해결해 주기만 하면, 그를 따르는 것은 물론 왕으로라도 옹립할 태세였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5,000명의 무리를 먹이고도 남은 음식이 12 광주리나 되는 놀라운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그 소문은 삽시간에 유대 전역으로 퍼져나갔습니다. 이 소식을 접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수야말로 그토록 기다리던 메시야가 틀림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의 인기는 하늘을 찌를 듯했습니다. “그 사람들이 예수의 행하신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요 6:14)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런 열광적인 인기에 영합하지 않고 무리들을 피해 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따라 가버나움으로 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처럼 추종하는 무리와 거리를 두신 이유는 그들의 의도가 예수님의 뜻과 달랐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열광하는 이유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며 죄로부터 구원해줄 메시야임을 깨달았기 때문이 아니라, 떡 맛을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따라 가버나움으로 가시자, 수많은 사람들이 다음날 아침부터 예수를 따랐습니다. 그들은 배고프고 굶주린 자신들의 현실적인 문제를 예수께서 해결해 주실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던 것입니다.
교회에도 경제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이 물질적인 복을 받고, 병고침을 받기 위해서, 사업을 위해서 나오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물론 주님께서는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분이기에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있는 분입니다. 뿐만 아니라, 복음을 처음 접한 자는 놀라운 기적과 삶의 형통을 통해 주님께 더 가까이 나갈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신앙이 언제까지나 여기에 머물러 있어서는 성숙한 신앙을 기대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에 대해 예수께서는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요 6:26)고 하시면서, 초보적인 신앙을 머물지 말라고 경계하셨습니다.
단지 떡을 얻어 먹기 위해, 병고침을 받기 위해 예수를 따르는 것이 온전한 믿음이 될 수 없는 것처럼, 오늘날 우리들 세상적인 욕구 만을 가지고 교회에 나오는 것을 넘어서야 합니다. 신앙은 그보다 더 높은 차원의 본질적인 것을 추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2. 예수는 영생을 주시는 분입니다.
정치 지도자들에게 경제 문제는 정권의 정통성을 인정받기 위해서라도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 나라도 지난 60년대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군사정권이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세”라는 구호를 내걸었을 때, 어느 정도 정당성과 정통성을 인정받을 정도였습니다. 오병이어 사건으로 백성들로부터 폭발적인 관심을 한 몸에 받게 된 예수께서 만약 그 사건을 이용하셨더라면, 세상적인 권력을 잡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실제로 오병이어 사건을 목격한 무리들은 억지로라도 예수를 왕으로 삼으려고 했습니다(요 6:15). 그만큼 백성들에게 있어서 떡의 문제는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관심은 세상 권력이나 떡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가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요 6:15)
예수께서는 가시는 곳곳마다 병든 자를 고쳐 주시고, 귀신을 내쫓으시는 등, 수많은 기사와 이적을 베푸셨습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과 같은 본체로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분이요, 만물의 주인이십니다. 그런 예수께서 그 어떤 기사와 이적을 베푸신다해도 그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그러한 기사와 이적을 보여주신 것은 무지한 사람들을 깨우쳐서 영생으로 이끌기 위한 것이지, 기사와 이적 자체가 본질은 아닙니다. 즉, 오병이어 사건은 그것을 통해 본질적인 것, 곧 하나님의 일에 눈을 돌리게 하려는 방편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본질적인 것은 깨닫지 못하고 항상 비본질적인 것에만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께서는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요 6:27)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썩을 양식”과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대조하시면서, 썩어 없어질 비본질적인 것을 구할 것이 아니라, 본질적이고 영원한 진리를 구하라고 요구하셨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까?”라고 물었습니다(요 6:28).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오해하여, 영생의 대가(代價)로 많은 인간적 업적을 쌓아야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들더러 일 하라고 하신 것은, 그런 의미가 아니었습니다. 그가 말씀하신 "일"이라는 것은 댓가를 바라는 ‘노동’이 아니라, 무조건적으로 하나님께 헌신하는 ‘신앙’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오직 믿음에 의하여 그리스도의 은혜로만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대인들의 질문에 대하여 예수님은 대답하시기를,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요 6:29)고 대답하셨습니다.
사람들은 교회에 나오기 시작하면 곧 하나님의 일에 관심을 갖고 교회일에 참여합니다. 물론 주의 일, 교회 일, 봉사 사업, 사회 봉사를 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보다 우선순위에 두어야 하는 것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요 6:29)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그 모든 것이 헛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어떤 성도가 천국에 갔습니다. 높은 시온 산 꼭대기에 잘 지은 새예루살렘 성은 금강석과 홍보석과 녹보석과 가지 각색의 보석으로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는 웅장한 성이었습니다. 가까이 가보니 큰 문이 하나 있는데, 계시록에 기록된 대로 큰 진주 하나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문을 두드렸습니다. 그러자 곧 문이 열리더니 베드로가 나왔습니다. 베드로를 본 그는 “나는 서울 모 교회에서 온 아무개 중직자입니다.”하고 인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별로 반가운 표정도 없이 말하기를, “이 성에 들어오려면 ‘믿음표’가 있어야 합니다. ‘믿음표’를 가지고 왔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는 아무리 찾아보아도 ‘믿음표’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베드로에게 사정해 보았습니다. “나는 서울 모 교회의 중직자입니다. 저는 그 교회에서 10년 동안 교회의 대소사를 다 보았습니다. 그런데도 그까짓 믿음표가 없다고 못들어갑니까?”하고 사정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냉정한 얼굴로 말하기를, “믿음도 없이 중직자를 10년이나 했다니 더 이상 기다릴 것도 없군요” 하면서 문을 닫고 들어가 버렸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꼭 해야 하는 하나님의 일은 “오직 믿음”입니다. 비록 교회 일을 10년 넘게 했다 하더라도 믿음이 없는 봉사와 헌신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봉사와 헌신”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 “봉사와 헌신”이 예수를 믿고 그 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단순한 믿음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3. 예수는 생명의 양식을 주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백성들은 이번에는 “당신을 믿게 할만한 표적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말하기를, “그 옛날 출애굽 시대에 모세는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 주어 40년 동안이나 이스라엘 백성들을 먹여 살렸는데, 당신도 그런 표적을 보여 줄 수 있겠느냐?”고 했습니다(요 6:30-31). 그들은 아직도 ‘떡’ 문제, 곧 물질의 문제를 중요하게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 말은 들은 예수께서는 “하늘에서 내린 떡”은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것임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떡은 ‘영생의 떡’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요 6:33)
그러자 백성들은 그 떡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요 6:34)하고 요청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생명 떡"을 육신의 양식으로 오해하고 욕심을 부린 것입니다.
백성들의 무지와 불신앙이 여기에까지 이르게 되자 예수께서는 드디어 ‘떡’으로 시작한 대화의 결론을 내리고 계십니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 6:35)
성경에는 신앙 생활을 먹고 마시는 것에 비유하는 장면이 종종 나옵니다. 예수께서도 여기에서 믿음을 먹는 것으로 표현하셨습니다. “나는 하늘로써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삶이로다”(51절)
“생명의 양식”은 다름 아닌 예수 자신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만나를 주어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에서 풍성하게 하신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이땅에 보내주셔서 온 인류를 영적인 굶주림에서 해결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육신을 위해 양식을 먹어야 하는 것처럼, 영혼을 위해 “생명의 양식”이신 예수를 먹어야, 곧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 대한 우리의 신앙은 먹는 행위와 같이 실제적이어야 합니다. 믿음은 하나의 이론이 아니고 실제이기 때문입니다. 음식을 먹지 않으면 죽는 것처럼,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멸망한다는 사실은 현실적인 문제입니다. 또한 우리가 음식 먹기를 계속하는 것처럼, 예수님을 믿는 일은 한 순간 기분에 의해 좌우되어서는 안됩니다. 작년 이맘 때 먹은 것이 오늘의 배고픔을 멈추어 주지 못하는 것처럼, 믿음은 계속적으로 그리스도와 밀접하게 연합해 있음을 가리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우리의 모든 죄가 사해지고 영생을 얻는다고 믿고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 우리의 영생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 위에 서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생명의 양식이 되어 우리를 위해 희생하심으로써 우리를 구원해 주신 것처럼, 우리들 또한 세상 사람들의 ‘밥’이 되어 그들에게 먹힘으로써 그들을 살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어 구원에 이른 우리 모두는 세상 모든 사람들을 위해 사랑을 베풀며 그들을 구원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것입니다.
출처/전병금 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