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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에 성공하라 (신명기 26:1~11)
저의 부친께서는 신앙 생활을 하시기 시작한 지 3년이 지나서 천국에 가셨는데 믿음이 참 좋은 분이셨습니다. 그 분은 새벽 3시에 일어나 새벽기도회를 나가셨습니다. 그렇게 잠을 주무시지 않고 농사일을 어떻게 돌보실까 했는데, 저녁 9시쯤이면 어김없이 잠자리에 들었기에, 새벽 3시에 일어나도 그런대로 일하실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 분은 6.25 사변으로 모든 전답을 다 잃고 병을 얻어 고생을 많이 하셨는데, 오히려 그 병 때문에 교회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교회를 다닌 이후부터는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체험하고 하나님 외에는 관심을 두지 않으셨습니다. 술은 본래 하시지 않았지만, 담배는 입에서 떼는 것을 볼 수 없을 정도로 좋아하셨는데, 그 좋아하던 담배도 교회 다닌 다음 날부터 바로 끊어 버리셨습니다. 가을 추수를 하면 거둔 곡식 중에 십 분의 일을 소달구지에 가득 싣고 목사님 사택을 방문해서 창고에 저장하시곤 하셨습니다.
저는 어린 마음에도 아버님의 신앙생활에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제가 보기에도 아버님은 예수를 믿기 전과 믿은 후가 너무나 달랐습니다. 저는 그런 아버님의 신앙적인 모습을 보면서 자란 것을 행복하게 생각합니다. 다만 아버님의 그런 모습을 몇 년 밖에 보지 못한 것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가끔씩 아버님께서 성실하게 신앙 생활하셨던 모습이 그리워지곤 합니다.
오늘 말씀은 출애굽 이후 40년 광야 생활을 마치고, 하나님이 주시기로 약속한 땅, 가나안 입성을 앞둔 이스라엘 민족에게 준 모세의 메시지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많은 사람이 이미 광야에서 세상을 떠났고, 새로운 세대만이 그 조상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땅 가나안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이제 모세는 그들이 들어가게 될 그 땅에서 해야 할 일을 명령하고 있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그 토지 모든 소산의 맏물을 거둔 후에 그것을 취하여 광주리에 담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으로 그것을 가지고 가서 제사장에게 나아가서”(신 26:2-3)
모세는 이제 들어갈 땅에서 얻은 소산의 맏물을 가지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가나안에서 해야 할 일 중에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임을 일깨워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예배처럼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오틀런드라는 사람은 말하기를 “예배는 인간이 하는 일 중 가장 숭고한 것이요, 가장 가치 있는 행위”라고 했습니다. 인간이 이 세상에 사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건져내신 이유도 바로 하나님께 예배드리게 하게 위함이었습니다.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출 3:12)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예배를 잘 드릴 수 있겠습니까? 오늘 모세의 설교를 통해 이에 대해 묵상하고 은혜를 나누시기 바랍니다.
1. 예배는 과거의 어려움에서 건져주신 것을 감사드리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노예민족이었습니다. 한때는 이스라엘 사람 중에 요셉이라는 걸출한 인물이 애굽의 총리가 되어 애굽을 강대하게 하고, 이스라엘 백성 또한 대접받는 위치에 있었지만, 요셉이 세상을 따나자 점차 그 이름은 잊혀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왕조가 들어서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노예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애굽인들은 요셉의 일을 다 잊어버리고, 다만 그들의 강성함에 위협을 느끼고 그들을 억압하기 시작했습니다. 수많은 공사와 노역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강제동원하는 방법으로 그들의 번성을 막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좀처럼 그들의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이 수그러들지 않자, 급기야 애굽 왕, 파라오는 산파들에게 이스라엘의 신생아 중 남자아이는 모두 죽이도록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러한 비참한 노예 생활은 약 430여 년 동안이나 이어졌습니다. 그들은 하루하루 죽음과 같은 삶을 살아가면서 하나님을 부르고 또 불렀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고역으로 인하여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역으로 인하여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한지라”(출 2:23)
430년이라는 긴 고통의 세월을 부르짖고 또 부르짖었습니다. 이 얼마나 긴 세월인지 알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들 중에는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잊어버렸다고 모든 희망을 포기하고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결코 그들의 고통을 외면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정녕히 보고 그들이 그 간역자로 인하여 부르짖음을 듣고 그 우고를 알고, 내가 내려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출 3:7-8)
하나님께서는 결코 자기 백성을 고통 가운데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부모가 자녀의 어려움을 모른 척 할 수 없는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을 “내 백성”이라고 여기시는 하나님께서도 그들을 그냥 내버려둘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그들의 비참한 현실을 ‘보고’, 그들의 탄식 소리를 ‘듣고’, 그들이 당하는 고난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 내셨습니다.
신명기 26장 5-9절에서 모세는 가나안 입성을 앞두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설교하면서, 이와 같은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고백하고 있습니다. 예배는 이처럼 과거의 어려움에서 건져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고백하고 감사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조금만 잘 되면 내가 부족하고 어려웠을 때 도와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곧잘 잊어버립니다. 어떤 부자가 큰 병에 걸려 죽음을 눈앞에 두게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목사님을 모시고 예배를 드리던 그 부자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만약 하나님께서 저를 살려주신다면 제 집을 팔아서 하나님께 드리겠습니다.”라고 서원을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부자의 서원기도를 들으셨는지, 기적같은 일이 일어나 병이 낫게 되었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기적이 일어났다고 하면서 기뻐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부자에게는 또 다른 걱정이 생겼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약속한 것을 지키기 위해서는 집을 팔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부자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살려주셨다는 것에 대한 감사를 잊어버린 채, 어떻게 하면 자신이 손해 보지 않을까 궁리를 하였습니다. 목사님 앞에서 한 서원기도라 지키지 않을 수도 없고 해서 며칠 고민하던 그 부자는 결국 집을 내놓고 이런 광고를 냈습니다. [집 값 백만원. 단, 정원에 있는 9억 9천 9백만원짜리 나무까지 구매하는 사람에게만 팝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7절), ‘강한 손과 편 팔과 큰 위엄과 이적과 기사로’ 자신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신 분이 다름 아닌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알고 하나님께 감사드렸습니다.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해 주신 분은 누구입니까?
우리가 이렇게 건강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은 누구 때문입니까?
우리에게 사랑하는 가족을 허락하신 분은 누구입니까?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인도하신 분은 누구입니까?
이처럼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고 있음을 기억하고 감사로 예배를 드려야 할 것입니다.
2. 예배에는 땅의 소산을 주신 것을 감사하는 것입니다.
또한 모세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그 토지 모든 소산의 맏물을 거둔 후에 그것을 취하여 광주리에 담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으로 그것을 가지고 가서”(신 26:2)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가나안에서 경작하여 얻은 첫 소산물을 하나님께 드리라는 것입니다.
사실 애굽에서 400여 년 동안 노예생활을 할 때에는 자신들의 몫으로 얻는 것이라곤 하나도 없었습니다. 아무리 수고를 해도 먹고 사는 일조차 보장되지 않았습니다. 애굽에서 그들은 다만 착취당하고 억압당할 뿐이었습니다.
광야에서 보냈던 40년 동안은 어떠했습니까? 비록 자유는 얻었지만, 광야 생활은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만나와 메추라기와 물을 먹고 그날그날 연명하는 수준이었습니다.
그러던 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경작할 땅이 생겼습니다. 셋방을 전전하다가 자기 집을 장만하던 때의 감격을 여러분은 잊지 못하실 것입니다. 맨날 남의 땅을 붙여 먹다가 자기 땅을 가지게 된 기쁨은 말로 형용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랫동안 자기 땅이 없이 노예 생활을 하든지, 유랑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는데, 드디어 자기 땅이 생겨 수고의 댓가를 얻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토지 소산의 맏물을 하나님께 드리라고 하는 것은 부담스러운 의무가 아니라, 그들이 받은 복을 나타낼 수 있는 기회였던 것입니다. 오랫동안 취직 못하던 청년이 직장을 얻게 되어 첫 월급을 부모님께 드리는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다니던 직장에서 쫓겨나 거리를 방황하다가 다시 좋은 직장을 얻어 가족에게 월급 봉투를 가져갈 때의 감격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랜 종살이와 떠돌이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의 땅에서 경작한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그 감격은 그것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큰 감격이었습니다.
국가적으로도 우리나라가 과거 가난과 무지를 딛고 일어나 세계 경제 12대 대국이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물론 아직도 상대적 가난은 남아 있지만 ‘보릿고개’ ‘춘궁기’ 같은 말이 의미하는 절대적 가난은 이미 벗어났습니다. 여러 가지 어려운 여건 속에서 우리나라가 이런 엄청난 부를 누릴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것 말고는 다른 것으로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것을 고백해야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얻은 소유 가운데 ‘맏물’을 드려야 합니다. 여기에서 ‘맏물’은 ‘최고의 가치’를 말합니다. “예배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 중 제일 좋은 것을 다시 드리는 것이다”(챔버스)라는 말이 있듯이, 하나님께서는 이미 우리에게 많은 좋은 것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단지 그 가운데 일부를 드리는 것입니다. 인도의 성자라는 타고르는 “하나님은 사람들이 드리는 자신의 꽃을 받으실 때도 마치 선물인 양 기뻐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정성을 하나님께 드려야 할 것입니다.
3. 예배는 영원한 안식을 주신 것을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의 첫 소산을 주께 드릴 때 “이곳으로 인도하사 이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셨나이다”(신 26:9)고 고백했습니다. 즉 비옥하고 아름다운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안식과 풍요의 즐거움을 주셨기에 하나님께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사실 가나안은 조상 아브라함부터 이스라엘 백성에게 약속된 땅이요, 안식의 땅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을 차지하지 못하고 유리하며 방황하는 가운데 나그네와 같이 살았습니다. 400년 동안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기도 했습니다.
가나안을 약속 받고 사모했지만 아직까지 그 누구도 가나안을 차지하고 안식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꿈에 그리던 가나안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눈 앞에 펼쳐져 있는 것입니다. 얼마 후에 그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갈 것이며 그곳의 땅을 분배 받고, ‘내 땅’에서 직접 농사도 지게 될 것입니다. 내 땅에 농사를 짓는 기쁨은 농부가 자기 땅을 처음 가져보는 자만 누릴 수 있는 기쁨일 것입니다.
그런 기쁨을 가지게 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 크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얼마 후면 우리 믿음의 조상들에게 약속한 가나안과 같은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머나먼 장래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늘의 가나안을 차지하는 것은 확실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흘린 그 보배로운 피 때문에 우리에게 그 나라가 보장되었습니다. 이처럼 확실한 안식의 땅이 우리에게 훤히 열려있는데 그 땅을 믿음으로 바라보는 우리가 어찌 감사하지 않겠습니까?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영?육간에 축복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또한 죄와 사망에서 건져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또한 언젠가 들어가게 될 그 영원한 안식을 바라보며 감사해야 합니다. 그 감사의 표현은 “그 토지 모든 소산의 맏물”을 드렸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구체적이고 실천적이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예배가 언제나 감사가 넘치고, 소망이 넘치고, 결단과 실천이 동반되는 예배가 되기를 바랍니다. 여기에 믿는 자의 행복이 있습니다.
출처/전병금목사 설교자료 중에서
저의 부친께서는 신앙 생활을 하시기 시작한 지 3년이 지나서 천국에 가셨는데 믿음이 참 좋은 분이셨습니다. 그 분은 새벽 3시에 일어나 새벽기도회를 나가셨습니다. 그렇게 잠을 주무시지 않고 농사일을 어떻게 돌보실까 했는데, 저녁 9시쯤이면 어김없이 잠자리에 들었기에, 새벽 3시에 일어나도 그런대로 일하실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 분은 6.25 사변으로 모든 전답을 다 잃고 병을 얻어 고생을 많이 하셨는데, 오히려 그 병 때문에 교회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교회를 다닌 이후부터는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체험하고 하나님 외에는 관심을 두지 않으셨습니다. 술은 본래 하시지 않았지만, 담배는 입에서 떼는 것을 볼 수 없을 정도로 좋아하셨는데, 그 좋아하던 담배도 교회 다닌 다음 날부터 바로 끊어 버리셨습니다. 가을 추수를 하면 거둔 곡식 중에 십 분의 일을 소달구지에 가득 싣고 목사님 사택을 방문해서 창고에 저장하시곤 하셨습니다.
저는 어린 마음에도 아버님의 신앙생활에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제가 보기에도 아버님은 예수를 믿기 전과 믿은 후가 너무나 달랐습니다. 저는 그런 아버님의 신앙적인 모습을 보면서 자란 것을 행복하게 생각합니다. 다만 아버님의 그런 모습을 몇 년 밖에 보지 못한 것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가끔씩 아버님께서 성실하게 신앙 생활하셨던 모습이 그리워지곤 합니다.
오늘 말씀은 출애굽 이후 40년 광야 생활을 마치고, 하나님이 주시기로 약속한 땅, 가나안 입성을 앞둔 이스라엘 민족에게 준 모세의 메시지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많은 사람이 이미 광야에서 세상을 떠났고, 새로운 세대만이 그 조상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땅 가나안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이제 모세는 그들이 들어가게 될 그 땅에서 해야 할 일을 명령하고 있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그 토지 모든 소산의 맏물을 거둔 후에 그것을 취하여 광주리에 담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으로 그것을 가지고 가서 제사장에게 나아가서”(신 26:2-3)
모세는 이제 들어갈 땅에서 얻은 소산의 맏물을 가지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가나안에서 해야 할 일 중에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임을 일깨워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예배처럼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오틀런드라는 사람은 말하기를 “예배는 인간이 하는 일 중 가장 숭고한 것이요, 가장 가치 있는 행위”라고 했습니다. 인간이 이 세상에 사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건져내신 이유도 바로 하나님께 예배드리게 하게 위함이었습니다.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출 3:12)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예배를 잘 드릴 수 있겠습니까? 오늘 모세의 설교를 통해 이에 대해 묵상하고 은혜를 나누시기 바랍니다.
1. 예배는 과거의 어려움에서 건져주신 것을 감사드리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노예민족이었습니다. 한때는 이스라엘 사람 중에 요셉이라는 걸출한 인물이 애굽의 총리가 되어 애굽을 강대하게 하고, 이스라엘 백성 또한 대접받는 위치에 있었지만, 요셉이 세상을 따나자 점차 그 이름은 잊혀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왕조가 들어서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노예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애굽인들은 요셉의 일을 다 잊어버리고, 다만 그들의 강성함에 위협을 느끼고 그들을 억압하기 시작했습니다. 수많은 공사와 노역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강제동원하는 방법으로 그들의 번성을 막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좀처럼 그들의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이 수그러들지 않자, 급기야 애굽 왕, 파라오는 산파들에게 이스라엘의 신생아 중 남자아이는 모두 죽이도록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러한 비참한 노예 생활은 약 430여 년 동안이나 이어졌습니다. 그들은 하루하루 죽음과 같은 삶을 살아가면서 하나님을 부르고 또 불렀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고역으로 인하여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역으로 인하여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한지라”(출 2:23)
430년이라는 긴 고통의 세월을 부르짖고 또 부르짖었습니다. 이 얼마나 긴 세월인지 알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들 중에는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잊어버렸다고 모든 희망을 포기하고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결코 그들의 고통을 외면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정녕히 보고 그들이 그 간역자로 인하여 부르짖음을 듣고 그 우고를 알고, 내가 내려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출 3:7-8)
하나님께서는 결코 자기 백성을 고통 가운데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부모가 자녀의 어려움을 모른 척 할 수 없는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을 “내 백성”이라고 여기시는 하나님께서도 그들을 그냥 내버려둘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그들의 비참한 현실을 ‘보고’, 그들의 탄식 소리를 ‘듣고’, 그들이 당하는 고난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 내셨습니다.
신명기 26장 5-9절에서 모세는 가나안 입성을 앞두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설교하면서, 이와 같은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고백하고 있습니다. 예배는 이처럼 과거의 어려움에서 건져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고백하고 감사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조금만 잘 되면 내가 부족하고 어려웠을 때 도와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곧잘 잊어버립니다. 어떤 부자가 큰 병에 걸려 죽음을 눈앞에 두게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목사님을 모시고 예배를 드리던 그 부자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만약 하나님께서 저를 살려주신다면 제 집을 팔아서 하나님께 드리겠습니다.”라고 서원을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부자의 서원기도를 들으셨는지, 기적같은 일이 일어나 병이 낫게 되었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기적이 일어났다고 하면서 기뻐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부자에게는 또 다른 걱정이 생겼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약속한 것을 지키기 위해서는 집을 팔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부자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살려주셨다는 것에 대한 감사를 잊어버린 채, 어떻게 하면 자신이 손해 보지 않을까 궁리를 하였습니다. 목사님 앞에서 한 서원기도라 지키지 않을 수도 없고 해서 며칠 고민하던 그 부자는 결국 집을 내놓고 이런 광고를 냈습니다. [집 값 백만원. 단, 정원에 있는 9억 9천 9백만원짜리 나무까지 구매하는 사람에게만 팝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7절), ‘강한 손과 편 팔과 큰 위엄과 이적과 기사로’ 자신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신 분이 다름 아닌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알고 하나님께 감사드렸습니다.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해 주신 분은 누구입니까?
우리가 이렇게 건강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은 누구 때문입니까?
우리에게 사랑하는 가족을 허락하신 분은 누구입니까?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인도하신 분은 누구입니까?
이처럼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고 있음을 기억하고 감사로 예배를 드려야 할 것입니다.
2. 예배에는 땅의 소산을 주신 것을 감사하는 것입니다.
또한 모세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그 토지 모든 소산의 맏물을 거둔 후에 그것을 취하여 광주리에 담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으로 그것을 가지고 가서”(신 26:2)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가나안에서 경작하여 얻은 첫 소산물을 하나님께 드리라는 것입니다.
사실 애굽에서 400여 년 동안 노예생활을 할 때에는 자신들의 몫으로 얻는 것이라곤 하나도 없었습니다. 아무리 수고를 해도 먹고 사는 일조차 보장되지 않았습니다. 애굽에서 그들은 다만 착취당하고 억압당할 뿐이었습니다.
광야에서 보냈던 40년 동안은 어떠했습니까? 비록 자유는 얻었지만, 광야 생활은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만나와 메추라기와 물을 먹고 그날그날 연명하는 수준이었습니다.
그러던 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경작할 땅이 생겼습니다. 셋방을 전전하다가 자기 집을 장만하던 때의 감격을 여러분은 잊지 못하실 것입니다. 맨날 남의 땅을 붙여 먹다가 자기 땅을 가지게 된 기쁨은 말로 형용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랫동안 자기 땅이 없이 노예 생활을 하든지, 유랑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는데, 드디어 자기 땅이 생겨 수고의 댓가를 얻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토지 소산의 맏물을 하나님께 드리라고 하는 것은 부담스러운 의무가 아니라, 그들이 받은 복을 나타낼 수 있는 기회였던 것입니다. 오랫동안 취직 못하던 청년이 직장을 얻게 되어 첫 월급을 부모님께 드리는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다니던 직장에서 쫓겨나 거리를 방황하다가 다시 좋은 직장을 얻어 가족에게 월급 봉투를 가져갈 때의 감격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랜 종살이와 떠돌이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의 땅에서 경작한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그 감격은 그것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큰 감격이었습니다.
국가적으로도 우리나라가 과거 가난과 무지를 딛고 일어나 세계 경제 12대 대국이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물론 아직도 상대적 가난은 남아 있지만 ‘보릿고개’ ‘춘궁기’ 같은 말이 의미하는 절대적 가난은 이미 벗어났습니다. 여러 가지 어려운 여건 속에서 우리나라가 이런 엄청난 부를 누릴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것 말고는 다른 것으로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것을 고백해야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얻은 소유 가운데 ‘맏물’을 드려야 합니다. 여기에서 ‘맏물’은 ‘최고의 가치’를 말합니다. “예배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 중 제일 좋은 것을 다시 드리는 것이다”(챔버스)라는 말이 있듯이, 하나님께서는 이미 우리에게 많은 좋은 것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단지 그 가운데 일부를 드리는 것입니다. 인도의 성자라는 타고르는 “하나님은 사람들이 드리는 자신의 꽃을 받으실 때도 마치 선물인 양 기뻐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정성을 하나님께 드려야 할 것입니다.
3. 예배는 영원한 안식을 주신 것을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의 첫 소산을 주께 드릴 때 “이곳으로 인도하사 이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셨나이다”(신 26:9)고 고백했습니다. 즉 비옥하고 아름다운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안식과 풍요의 즐거움을 주셨기에 하나님께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사실 가나안은 조상 아브라함부터 이스라엘 백성에게 약속된 땅이요, 안식의 땅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을 차지하지 못하고 유리하며 방황하는 가운데 나그네와 같이 살았습니다. 400년 동안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기도 했습니다.
가나안을 약속 받고 사모했지만 아직까지 그 누구도 가나안을 차지하고 안식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꿈에 그리던 가나안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눈 앞에 펼쳐져 있는 것입니다. 얼마 후에 그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갈 것이며 그곳의 땅을 분배 받고, ‘내 땅’에서 직접 농사도 지게 될 것입니다. 내 땅에 농사를 짓는 기쁨은 농부가 자기 땅을 처음 가져보는 자만 누릴 수 있는 기쁨일 것입니다.
그런 기쁨을 가지게 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 크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얼마 후면 우리 믿음의 조상들에게 약속한 가나안과 같은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머나먼 장래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늘의 가나안을 차지하는 것은 확실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흘린 그 보배로운 피 때문에 우리에게 그 나라가 보장되었습니다. 이처럼 확실한 안식의 땅이 우리에게 훤히 열려있는데 그 땅을 믿음으로 바라보는 우리가 어찌 감사하지 않겠습니까?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영?육간에 축복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또한 죄와 사망에서 건져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또한 언젠가 들어가게 될 그 영원한 안식을 바라보며 감사해야 합니다. 그 감사의 표현은 “그 토지 모든 소산의 맏물”을 드렸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구체적이고 실천적이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예배가 언제나 감사가 넘치고, 소망이 넘치고, 결단과 실천이 동반되는 예배가 되기를 바랍니다. 여기에 믿는 자의 행복이 있습니다.
출처/전병금목사 설교자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