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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 버린 나를 찾아오신 예수님 (눅19:9,10)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누가복음 19 : 9, 10
세상은 무엇인가를 찾기 위해 애쓰는 사람이 많습니다. 또한 무엇인가 얻기 위해서 힘쓰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늘 반복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무엇인가 잃어버린 것을 찾기 위해서 헤매고 있습니다. 잃어버린 돈을 찾으려고 애를 씁니다. 또한 잃어버린 명예를 찾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잃어버린 권세를 찾으려고 합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이는 잃어버린 가정을 찾고 잃어버린 자식을 찾습니다. 전생애를 통해서 찾았으나 찾지 못하고 얻으려고 애썼으나 얻지 못하고 결국 허무하게 생을 마치는 사람이 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을 잃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세상의 그 어떤 것을 얻기 위해서 애쓰지만 정작 찾아야 하는 자신을 잃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온 천하를 얻고도 자신을 잃어버리면 아무 소용이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잃어버린 자신을 찾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잃어버렸습니까? 그것을 몇 가지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그리고 잃어버린 것을 어떻게 찾을 수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1. 잃어버린 우주
잃어버린 우주 속에는 세 가지의 내용이 있습니다. 그것은 잃어버린 세상, 잃어버린 가정, 잃어버린 생명입니다.
먼저 잃어버린 세상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세상에는 버려진 땅, 잃어버려진 땅이 너무 많습니다. 과거에는 옥토였는데 지금은 쓸수 없는 땅이 된 것이 많습니다. 창세기 18장에 나오는 소돔과 고모라가 바로 그런 땅입니다. 창세기 13 : 10을 보면, 소돔과 고모라 땅은 본래 기름진 땅이었습니다. 롯이 아브라함의 곁을 떠날 때 물이 넉넉하고 여호와의 동산 같아 애굽 땅과 기름진 소돔과 고모라 땅을 선택하여 살았습니다. 그러나 창세기 19 : 23 이하를 보면 그 소돔과 고모라 성이 죄악의 관영함으로 하나님께 멸망받은 이후에는 쓸모 없는, 잃어버려진 땅이 되고 말았습니다. 더 이상 쓸모 없는 버려진 땅이 되고 말았습니다.
요즈음 소련이 혼란스럽습니다. 소련에는 잃어버려진 땅이 너무 많습니다. 이 땅을 우리에게 개간해 줄 것을 요청한 바 잇습니다. 시베리아의 버려진 땅을 개간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 사람들이 우리 나라를 대단한 나라로 보는 것입니다. 이처럼 세상에는 잃어버린 땅이 많습니다. 요한계시록을 보면 말세에는 땅이 잃어버려질 것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8 : 7에는 땅의 삼분지 일이 탈 것을 말씀하고 있고, 8절에는 바다의 삼분의 일이 피로 변할 것을 말하고 있으며, 9절에는 바다 가운데 생명 있는 피조물의 삼분의 일이 죽을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이하의 말씀에서도 계속해서 이 땅의 것 중에 삼분의 일이 잃어질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현재 지구 안에는 삼분의 일이 공산국가 입니다. 물론 탈이데올로기를 선언하며 공산주의를 포기하고 있습니다만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버려진 땅입니다. 땅만 버려진 것이 아니라 영혼도 버려진 땅입니다.
둘째로 잃어버린 우주 속에 잃어버린 가정이 있습니다. 오늘날 잃어버려진 가정이 너무 많습니다. 부모가 일찍 돌아가셔서 고아가 된 가정이 있습니다. 또한 가난과 질병 때문에 부모가 자식만 남겨 두고 도망감으로 잃어버려진 가정이 있습니다. 지금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서 굶는 사람이 없지만 옛날에는 식구가 많고 먹을 것이 없어 식구들이 흩어져 살기도 했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전쟁으로 인해서 흩어진 가정이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6.25전쟁으로 인해서 가정을 잃어버린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처럼 전에는 어렵고 힘들거나 천재지변으로 인해서 가정을 잃어버렸습니다만 지금은 가정이 행복한 것 같으면서도 부부가 다퉈서 하루 아침에 헤어진다든지, 자식들이 갑자기 집에 들어오지 않는다든지 해서 가정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이제는 가난이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부유해서 가정을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현실은 가정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혼율 분포를 보면 젊은 신혼 부부층이 더 많다는 것입니다.
셋째로 잃어버린 우주 속에 잃어버린 인간이 있습니다. 오늘날 인간은 자신을 잃어버린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남에 대해서 의식을 많이 하고, 다른 사람이 자기를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대해서 신경을 많이 씁니다. 자기의 현실, 자기의 수준, 자기의 분수, 자기의 위치를 잃어버리고 남의 판단, 남의 견해, 남의 말을 지나치게 의식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다 보니 자신의 주관에 의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남에 의해서 살아가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는 잃어버린 땅, 잃어버린 가정, 잃어버린 자신을 다시 찾아야 하겠습니다.
2. 잃어버린 교회
소련은 그 동안 교회를 잃어버렸었는데 요즈음 다시 소생하고 있습니다. 소련은 공산화 된 이후에 교회 건물을 그냥 그대로 보존해왔습니다. 그러나 북한은 아예 교회를 없애 버렸습니다. 그러나 소련과 북한의 교회가 잃어버린 교회는 아닙니다. 잃어버린 교회라 할 때에는 교회의 건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믿는 신자를 말합니다. 교회의 성경적 의미는 건물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건물이 있고, 그 건물이 좋다고 해서 다 신앙이 좋은 것은 아닙니다. 교회 건물이 아무리 좋으면 무엇합니까? 신앙이 별로라면 교회의 가치를 상실한 것입니다. 외적인 것보다 내용이 좋아야 합니다. 소련과 북한의 교회는 무너져 잃어졌지만 신앙은 남아 있기에 아직 잃어버린 교회는 아닌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교회는 잃어버렸지만 심령 성전은 아직 살아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 교회의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는 있으나 신앙은 잃어버린 상태'에 있습니다. 또한 '교회의 직분은 있으나 사명은 다 잃어버린 상태'에 있습니다. 오늘 인간은 이성이 있지만 영적인 이성은 무디어져 있습니다. 육은 살쪘으나 영은 마를 대로 말라 있습니다. 이것은 소련의 교회의 모습도 아니요 북한의 교회의 모습도 아닙니다. 오늘 한국 교회의 모습인 것입니다.
한국에는 교회의 수가 많이 있지만 참된 신앙을 소유한 사람은 별로 많지 않습니다. 교회다운 교회, 신앙이 살아 있는 교회는 오히려 북한과 소련에 있음을 믿기 바랍니다. 우리는 편하고 좋은 상황에서 예수를 믿지만 북한은 그렇지 않습니다. 믿음을 끝까지 지키기 위해서 생명을 내걸고 예수 믿는 사람이 북한에 더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한국 교회는 껍데기만 남아 있습니다. 내용은 없고 외형과 형식만 남아 있습니다. 종교적인 의식만 존재하는 교회가 되어 버렸습니다. 에스겔 골짜기의 해골처럼 말라져 버린 것이 오늘의 한국 교회의 모습입니다. 누가복음 19 : 39 이하에 보면 잃어버려진 교회의 모습에 대해서 잘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말씀을 보면 "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거늘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르리라 하시니라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다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권고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왜 이렇게 잃어버려진 것입니까? 그것은 권고를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44절에 "권고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잃어버려진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의 음성을 듣지 않았기 때문에 잃어버려진 것입니다.
3. 잃어버린 생명
인간은 하나님께로부터 생명을 부여받았습니다. 창세기 1 : 27에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인간은 하나님에 의해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심을 받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모든 인간의 생명의 근원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생명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런데 이 생명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창세기 2 : 16, 17에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고 했는데, 창세기 3 : 6에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지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고 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과 축복과 말할 수 없는 은혜를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 하나님 자체를 잃어버렸습니다.
아담은 하나님을 잃어버림으로 에덴동산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생명을 잃어버렸고, 재산을 잃어버렸고, 건강을 잃어버렸으며, 물질을 잃어버렸고, 가정과 그 외에 모든 축복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곧 하나님을 상실했습니다. 하나님을 잃어버린 것은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모든 것을 다 얻었다고 생각하고, 갖추고 있다고 생각해도 하나님을 잃어버렸으면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과 같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을 찾았으면 모든 것을 찾았고 얻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세상의 창조주시요 주관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땅의 수많은 사람들이 이 하나님을 잃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자기들 마음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살아있는 것 같지만 실상은 죽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잃어버린 생명을 찾기 위해서는 모든 인간이 하나님을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을 때 모든 것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건강도 찾게 되고, 물질도, 명예도, 권세도 찾게 됩니다.
여러분! 세상을 살아가면서 무언가 허전하고 공허하지 않습니까? 돈도, 지식도, 명예도 얻은 것 같은데 만족스럽지 못하십니까? 열심히 일하고 노력하며 살지만 행복을 느끼지 못하십니까? 여러분 안에 하나님이 계시는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는다면 이 순간이 바로 하나님을 믿어야 할 순간입니다. 하나님을 믿게 되면 모든 문제는 해결됩니다.
4. 잃어버린 것을 찾기 위해 오신 하나님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어 이 땅에 오신 것을 기념하는 것이 성탄절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땅에 오신 것입니까? 그것은 잃어버린 생명을 되찾아 주기 위함입니다. 누가복음 19 : 10에 의하면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인자라는 말은 하나님이 사람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 속에 찾아오셨다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찾아오시기 위해서 인간의 모습을 입으셨다는 것이요 잃어버린 생명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셨다는 것입니다.
이 인자는 왕이십니다. 요한계시록 1 : 13 이하에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그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 같고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 그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 입에선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취는 것 같더라 내가 볼 때에 그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 말하는 인자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는 왕이시라는 것입니다.
삭개오가 이 인자를 만났습니다. 삭개오는 세리장이요 부자로서 모든 것을 가졌고 찾은 사람으로 생각했으나 예수님은 그를 잃어버린 사람으로 알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나므로 잃어버려진 자기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다시 자기를 찾았습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는 잃어버린 생명을 되찾아 주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사람은 잃어버려진 자기를 스스로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친히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이며, 오셔서 잃어버린 자들을 찾으셨습니다.
이번 성탄절에는 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므로 자기를 찾는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을 잃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는 수많은 사람에게 성탄의 기쁜 소식을 전합시다.
출처/김충기목사 설교 중에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누가복음 19 : 9, 10
세상은 무엇인가를 찾기 위해 애쓰는 사람이 많습니다. 또한 무엇인가 얻기 위해서 힘쓰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늘 반복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무엇인가 잃어버린 것을 찾기 위해서 헤매고 있습니다. 잃어버린 돈을 찾으려고 애를 씁니다. 또한 잃어버린 명예를 찾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잃어버린 권세를 찾으려고 합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이는 잃어버린 가정을 찾고 잃어버린 자식을 찾습니다. 전생애를 통해서 찾았으나 찾지 못하고 얻으려고 애썼으나 얻지 못하고 결국 허무하게 생을 마치는 사람이 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을 잃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세상의 그 어떤 것을 얻기 위해서 애쓰지만 정작 찾아야 하는 자신을 잃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온 천하를 얻고도 자신을 잃어버리면 아무 소용이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잃어버린 자신을 찾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잃어버렸습니까? 그것을 몇 가지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그리고 잃어버린 것을 어떻게 찾을 수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1. 잃어버린 우주
잃어버린 우주 속에는 세 가지의 내용이 있습니다. 그것은 잃어버린 세상, 잃어버린 가정, 잃어버린 생명입니다.
먼저 잃어버린 세상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세상에는 버려진 땅, 잃어버려진 땅이 너무 많습니다. 과거에는 옥토였는데 지금은 쓸수 없는 땅이 된 것이 많습니다. 창세기 18장에 나오는 소돔과 고모라가 바로 그런 땅입니다. 창세기 13 : 10을 보면, 소돔과 고모라 땅은 본래 기름진 땅이었습니다. 롯이 아브라함의 곁을 떠날 때 물이 넉넉하고 여호와의 동산 같아 애굽 땅과 기름진 소돔과 고모라 땅을 선택하여 살았습니다. 그러나 창세기 19 : 23 이하를 보면 그 소돔과 고모라 성이 죄악의 관영함으로 하나님께 멸망받은 이후에는 쓸모 없는, 잃어버려진 땅이 되고 말았습니다. 더 이상 쓸모 없는 버려진 땅이 되고 말았습니다.
요즈음 소련이 혼란스럽습니다. 소련에는 잃어버려진 땅이 너무 많습니다. 이 땅을 우리에게 개간해 줄 것을 요청한 바 잇습니다. 시베리아의 버려진 땅을 개간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 사람들이 우리 나라를 대단한 나라로 보는 것입니다. 이처럼 세상에는 잃어버린 땅이 많습니다. 요한계시록을 보면 말세에는 땅이 잃어버려질 것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8 : 7에는 땅의 삼분지 일이 탈 것을 말씀하고 있고, 8절에는 바다의 삼분의 일이 피로 변할 것을 말하고 있으며, 9절에는 바다 가운데 생명 있는 피조물의 삼분의 일이 죽을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이하의 말씀에서도 계속해서 이 땅의 것 중에 삼분의 일이 잃어질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현재 지구 안에는 삼분의 일이 공산국가 입니다. 물론 탈이데올로기를 선언하며 공산주의를 포기하고 있습니다만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버려진 땅입니다. 땅만 버려진 것이 아니라 영혼도 버려진 땅입니다.
둘째로 잃어버린 우주 속에 잃어버린 가정이 있습니다. 오늘날 잃어버려진 가정이 너무 많습니다. 부모가 일찍 돌아가셔서 고아가 된 가정이 있습니다. 또한 가난과 질병 때문에 부모가 자식만 남겨 두고 도망감으로 잃어버려진 가정이 있습니다. 지금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서 굶는 사람이 없지만 옛날에는 식구가 많고 먹을 것이 없어 식구들이 흩어져 살기도 했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전쟁으로 인해서 흩어진 가정이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6.25전쟁으로 인해서 가정을 잃어버린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처럼 전에는 어렵고 힘들거나 천재지변으로 인해서 가정을 잃어버렸습니다만 지금은 가정이 행복한 것 같으면서도 부부가 다퉈서 하루 아침에 헤어진다든지, 자식들이 갑자기 집에 들어오지 않는다든지 해서 가정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이제는 가난이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부유해서 가정을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현실은 가정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혼율 분포를 보면 젊은 신혼 부부층이 더 많다는 것입니다.
셋째로 잃어버린 우주 속에 잃어버린 인간이 있습니다. 오늘날 인간은 자신을 잃어버린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남에 대해서 의식을 많이 하고, 다른 사람이 자기를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대해서 신경을 많이 씁니다. 자기의 현실, 자기의 수준, 자기의 분수, 자기의 위치를 잃어버리고 남의 판단, 남의 견해, 남의 말을 지나치게 의식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다 보니 자신의 주관에 의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남에 의해서 살아가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는 잃어버린 땅, 잃어버린 가정, 잃어버린 자신을 다시 찾아야 하겠습니다.
2. 잃어버린 교회
소련은 그 동안 교회를 잃어버렸었는데 요즈음 다시 소생하고 있습니다. 소련은 공산화 된 이후에 교회 건물을 그냥 그대로 보존해왔습니다. 그러나 북한은 아예 교회를 없애 버렸습니다. 그러나 소련과 북한의 교회가 잃어버린 교회는 아닙니다. 잃어버린 교회라 할 때에는 교회의 건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믿는 신자를 말합니다. 교회의 성경적 의미는 건물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건물이 있고, 그 건물이 좋다고 해서 다 신앙이 좋은 것은 아닙니다. 교회 건물이 아무리 좋으면 무엇합니까? 신앙이 별로라면 교회의 가치를 상실한 것입니다. 외적인 것보다 내용이 좋아야 합니다. 소련과 북한의 교회는 무너져 잃어졌지만 신앙은 남아 있기에 아직 잃어버린 교회는 아닌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교회는 잃어버렸지만 심령 성전은 아직 살아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 교회의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는 있으나 신앙은 잃어버린 상태'에 있습니다. 또한 '교회의 직분은 있으나 사명은 다 잃어버린 상태'에 있습니다. 오늘 인간은 이성이 있지만 영적인 이성은 무디어져 있습니다. 육은 살쪘으나 영은 마를 대로 말라 있습니다. 이것은 소련의 교회의 모습도 아니요 북한의 교회의 모습도 아닙니다. 오늘 한국 교회의 모습인 것입니다.
한국에는 교회의 수가 많이 있지만 참된 신앙을 소유한 사람은 별로 많지 않습니다. 교회다운 교회, 신앙이 살아 있는 교회는 오히려 북한과 소련에 있음을 믿기 바랍니다. 우리는 편하고 좋은 상황에서 예수를 믿지만 북한은 그렇지 않습니다. 믿음을 끝까지 지키기 위해서 생명을 내걸고 예수 믿는 사람이 북한에 더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한국 교회는 껍데기만 남아 있습니다. 내용은 없고 외형과 형식만 남아 있습니다. 종교적인 의식만 존재하는 교회가 되어 버렸습니다. 에스겔 골짜기의 해골처럼 말라져 버린 것이 오늘의 한국 교회의 모습입니다. 누가복음 19 : 39 이하에 보면 잃어버려진 교회의 모습에 대해서 잘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말씀을 보면 "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거늘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르리라 하시니라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다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권고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왜 이렇게 잃어버려진 것입니까? 그것은 권고를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44절에 "권고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잃어버려진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의 음성을 듣지 않았기 때문에 잃어버려진 것입니다.
3. 잃어버린 생명
인간은 하나님께로부터 생명을 부여받았습니다. 창세기 1 : 27에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인간은 하나님에 의해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심을 받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모든 인간의 생명의 근원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생명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런데 이 생명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창세기 2 : 16, 17에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고 했는데, 창세기 3 : 6에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지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고 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과 축복과 말할 수 없는 은혜를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 하나님 자체를 잃어버렸습니다.
아담은 하나님을 잃어버림으로 에덴동산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생명을 잃어버렸고, 재산을 잃어버렸고, 건강을 잃어버렸으며, 물질을 잃어버렸고, 가정과 그 외에 모든 축복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곧 하나님을 상실했습니다. 하나님을 잃어버린 것은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모든 것을 다 얻었다고 생각하고, 갖추고 있다고 생각해도 하나님을 잃어버렸으면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과 같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을 찾았으면 모든 것을 찾았고 얻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세상의 창조주시요 주관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땅의 수많은 사람들이 이 하나님을 잃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자기들 마음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살아있는 것 같지만 실상은 죽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잃어버린 생명을 찾기 위해서는 모든 인간이 하나님을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을 때 모든 것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건강도 찾게 되고, 물질도, 명예도, 권세도 찾게 됩니다.
여러분! 세상을 살아가면서 무언가 허전하고 공허하지 않습니까? 돈도, 지식도, 명예도 얻은 것 같은데 만족스럽지 못하십니까? 열심히 일하고 노력하며 살지만 행복을 느끼지 못하십니까? 여러분 안에 하나님이 계시는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는다면 이 순간이 바로 하나님을 믿어야 할 순간입니다. 하나님을 믿게 되면 모든 문제는 해결됩니다.
4. 잃어버린 것을 찾기 위해 오신 하나님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어 이 땅에 오신 것을 기념하는 것이 성탄절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땅에 오신 것입니까? 그것은 잃어버린 생명을 되찾아 주기 위함입니다. 누가복음 19 : 10에 의하면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인자라는 말은 하나님이 사람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 속에 찾아오셨다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찾아오시기 위해서 인간의 모습을 입으셨다는 것이요 잃어버린 생명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셨다는 것입니다.
이 인자는 왕이십니다. 요한계시록 1 : 13 이하에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그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 같고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 그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 입에선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취는 것 같더라 내가 볼 때에 그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 말하는 인자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는 왕이시라는 것입니다.
삭개오가 이 인자를 만났습니다. 삭개오는 세리장이요 부자로서 모든 것을 가졌고 찾은 사람으로 생각했으나 예수님은 그를 잃어버린 사람으로 알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나므로 잃어버려진 자기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다시 자기를 찾았습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는 잃어버린 생명을 되찾아 주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사람은 잃어버려진 자기를 스스로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친히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이며, 오셔서 잃어버린 자들을 찾으셨습니다.
이번 성탄절에는 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므로 자기를 찾는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을 잃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는 수많은 사람에게 성탄의 기쁜 소식을 전합시다.
출처/김충기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