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선택에 달려있습니다   (창13장 1-9절)


< 돈으로 행복을 사면 같은 돈으로 불행하게도 됩니다 >
얼마 전 70세 된 할머니 공갈단 이야기가 보도되었습니다. 70세 된 할머니들이 건널목에서 지나가는 차에 일부러 부딪혀 넘어집니다. 처음에는 "괜찮다"고 운전사를 안심시킨 후에, 헤어져서는 바로 병원에 입원합니다.
그 다음날 어떤 남자가 나타나 자기 이모가 사고로 입원했으니까 합의하자고 합니다. 그런 식으로 몇백만 원씩 받아내면서 몇 달간 전국에 걸쳐 사기행각을 벌였습니다.
돈은 매력적인 것이지만 돈 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이렇게 병들어있습니다. 그러므로 사실상 우리에게 중요한 문제는 돈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에는 지금보다 몇십 배 가난했습니다. 그래도 행복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사람들마다 돈에 너무 매달려서 오히려 행복은 멀어지지 않습니까?
1935년 계용묵 씨가 쓴 백치 아다다는 돈으로 인한 비극을 그린 작품입니다. 아다다는 부모에 의해 논 한 섬지기의 지참금과 함께 이웃집 청년에게 보내집니다. 아다다는 그 결혼 지참금 때문에 이제까지 한번도 맛보지 못한 행복을 맛봅니다. 그러나 돈 때문에 얻은 행복은 대개 돈 때문에 순식간에 날아가 버립니다. 결혼한 남편이 경제적 여유가 생기자 새 아내를 맞이하고 아다다를 쫓아버립니다.
친정에서 아다다는 구박만 받다가 자기를 이해해주는 수롱이라는 청년을 찾습니다. 수롱이는 아다다를 데리고 둘만의 행복한 삶을 위해 신미도라는 섬으로 갑니다.
신미도에서 수롱이는 아다다에게 삶의 용기를 주려고 그 동안 모은 150원을 꺼냅니다. 그리고 그 돈으로 밭을 사서 살자고 하는데 아다다는 그 돈을 보고 절망감이 듭니다.
아다다는 자기의 이전에 누리던 행복을 빼앗은 것이 돈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얼마 후, 아다다는 수롱이가 잠든 틈에 몰래 돈을 가지고 나가 바다에 던져버립니다.
뒤쫓아 온 수롱이는 이성을 잃었고, 그 화난 모습에 아다다는 벌벌 떨고만 있었습니다. 극도로 화난 수롱이는 아다다를 발로 걷어차 결국 아다다도 바다에 빠져죽게 됩니다.
돈이 행복을 가져다준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돈이 곧 불행도 가져다줄 것입니다. 실제로 돈 때문에 형제간에 싸움이 일어나고, 불행하게 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오늘 본문은 그런 상황에서 우리가 어떤 편을 선택해야 하는지를 잘 말해줍니다.

< 아브라함의 복은 잘 선택한 복이었습니다 >
오늘 본문 3절을 보면 애굽에서 나온 아브라함에게는 육축과 은과 금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본문 5절을 보면 아브라함을 따라 나온 조카 롯도 자기의 육축이 있었습니다. 그처럼 재산이 많아지니까 그들 사이에 어려운 문제가 생기는 모습을 보십시오.
돈을 문제를 해결해주는 편리한 도구이기도 하지만 문제를 일으키는 도구도 됩니다. 그래서 오늘날 사단은 사람을 넘어뜨리기 위해 무엇보다 물질을 많이 사용합니다.
어른이 돈으로 청소년의 성을 사 결국 그 영혼을 망치는 것을 원조교제라고 합니다. 그처럼 마귀는 돈으로 사람의 영혼을 망치려 하는 영적 원조교제의 명수입니다.
그러므로 돈에 팔려서 마귀의 수단에 넘어가고 마귀에게 절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이처럼 돈에 의해 골육간에 어려움에 처할 때 아브라함은 현명한 선택을 합니다.
인생은 선택에 달려있습니다. 잘 선택하면 행복해지지만 잘못 선택하면 불행해집니다. 예를 들어, 배우자를 잘 선택하면 평생은인이지만 잘못 선택하면 평생원수입니다.
그러므로 선택은 자유이지만 그 선택에 대해 나는 평생을 걸고 책임져야 합니다. 아브라함도 실수 많이 한 사람이었지만 그래도 복의 근원이 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무엇보다 그는 선택을 잘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그는 어떤 선택을 했습니까?

1. 아브라함은 화평을 선택했습니다.
사람들의 물질이 없을 때는 잘 동거합니다. 그러나 물질이 많아지면 잘 불화에 빠집니다. 6절 말씀 하반부 말씀을 보십시오. "곧 그들의 소유가 많아서 동거할 수 없었음이라."
땅이 적고 가축이 많으니까 아브라함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목자가 다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다투는 부끄러운 모습을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도 보고 있었습니다(7절).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이 그 다투는 모습을 보고 어떻게 생각할까요? 어느 날 자기 동네에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와서 싸움만 한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날에도 그런 일이 많습니다. 교회가 사랑을 말하면서 교인끼리 싸우면 되겠습니까? 요새 일부 인터넷 게시판에 들어가면 어떤 분은 부끄러운 말들을 서슴지 않고 합니다. 그 모습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보고 있다면 얼마나 수치스럽고 부끄러운 일입니까? 이 세상에서 제일 부끄러운 일은 세상 사람들 보는데서 믿는 사람들이 싸우는 것입니다. 결국 그런 모습을 부끄러워하던 아브라함이 조카 롯에게 말합니다. 8절 말씀을 보십시오.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골육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말자."
아브라함은 조카 롯이 말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롯에게 먼저 말했습니다. 이처럼 남이 나를 찾아주기를 기다리기보다 항상 먼저 찾을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남이 따뜻한 손길을 내밀면 기쁘게 맞이하고 나도 따뜻한 손길을 내밀어야 합니다.
"이해하세요. 몰라서 그랬어요." 이 한마디만 하면 그 관계가 얼마나 좋아지겠습니까? 우리는 항상 화평을 추구해야 합니다. 교회에서도, 가정에서도 화평을 추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잘 믿어도 남편을 잘 못 섬긴다면 어느 누가 그런 믿음을 좋아하겠습니까? 우리의 믿음은 화평을 추구하는 삶으로 나타나야 불신자들도 그 믿음을 인정할 것입니다. 그런데 신자라면서, 집사라면서 싸우고, 용서 안하고, 이해 안하면 누가 인정해주겠습니까? 재물이 있고, 권력이 있어도 소용없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화평입니다.
화평을 깨뜨려가면서 얻는 것은 아무리 많이 얻어도 그것은 하나님의 축복이 아닙니다. 그것을 알고 아브라함은 자기의 권리주장보다 화평하게 마무리하는 길을 찾았습니다.
예수님은 화평케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복 받으려면 화평해야 합니다. 어떻게 화평할 수 있습니까? 양보해야 합니다. 이기심을 극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옳고 그른 것을 아무리 따져보아야 마지막에 남는 것은 없고 서로 상처만 받습니다. 양보하고 화해해야 서로 얻는 것이 생기고 하나님께서도 양보하는 자를 축복하십니다.
히브리서 12장 14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한다는 말은 아무리 기도해도 응답이 없고 복이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원망하고, 불평하고, 책임전가하고, 변명하는 자에게 복을 내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화목을 추구하고 이기심을 버리고 양보하는 사람에게 복을 내리실 것입니다.

2. 아브라함은 좋은 말을 선택했습니다.
8절 말씀을 보십시오. 아브람이 롯에게 한 첫 번째 말이 무엇입니까?
잘했다, 잘못했다, 맞았다, 틀렸다는 따지는 말보다 "우리는 한 골육이라"고 말합니다.
얼마나 바람직한 말입니까? 갈등이 생길 때 잘잘못을 따지면 오히려 더 나빠집니다.
정의감이 넘쳐 잘잘못을 따지기만 하면 기분만 나쁘게 하고 문제는 더 꼬이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롯이 더 잘못했을지라도 그에게 가서 잘잘못을 따지지 않았습니다.
그저 문제해결을 위해 제일 먼저 한 말이 "우리는 한 골육이라"는 말이었습니다. 사회에서도 이런 태도가 요구되고, 가정과 교회에서는 더욱 이런 태도가 요구됩니다.
만약 교인끼리 갈등하면 서로 사랑해야 할 같은 교인임을 확인하는 말이면 족합니다. 또한 아브람은 한 골육임을 상기시키며 동시에 대안을 제시합니다.
9절 말씀을 보십시오.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아브라함은 싸우지 말자고 말하면서 대안으로 롯에게 앞의 땅의 비전을 보게 합니다. 그처럼 믿음의 사람들도 현실 인식과 대안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추구해야 합니다. 성실하게 생각하고, 성실하게 행동해야지 대책 없이 "믿습니다!" 하고 일을 벌려놓고 일이 잘못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다 가리고 자기는 기도원에 간다고 하면 되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바라보면서도 동시에 내 앞의 땅을 면밀하게 살필 줄 알아야 합니다. 믿음은 낭만이나 감상이 아니고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대안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구체적인 대안을 우리는 비전이라고 말합니다. 비전은 헛된 상상이 아닙니다. 그처럼 '네 앞의 땅'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면 시야가 넓어지고 싸움이 줄어줄게 됩니다.
왜 오늘날 정의를 말하는 사람은 많은데 왜 정의는 실천되지 않습니까? 왜 정의를 말하는 사람이 가는 곳마다 오히려 더 혼란이 생기고 더 문제가 꼬입니까?
정의를 말하는 사람의 말은 맞지만 그 말하는 사람이 별로 정의롭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처럼 정의를 인정받지 못하는 분이 대안이 없이 정의를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부드럽게 말하면서 대안을 제시하니까 문제가 해결되지 않겠습니까?
그처럼 비전을 보여주고 아브라함은 롯에게 9절 말씀대로 "나를 떠나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정말 떠나라는 말보다는 문제 해결을 위한 새로운 결단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이때 롯은 어떤 결단을 내려야 했을까요? 저는 떠나지 않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아브라함의 지난 삶을 보고 정말 복된 분이라고 생각했다면 끝까지 붙들어야 했습니다.
"큰아버님! 저는 끝까지 큰아버님을 따르겠습니다. 저도 조심하고 목자도 조심시킬게요."
纛?그렇게 했어야 합니다. 사실 복된 사람을 떠나는 것은 저주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장면을 보면서 끝까지 아브라함이 감정을 절제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한 골육이라"는 말도 그렇고, "먼저 좋은 땅을 선택하라"는 말도 그렇습니다.
그는 롯에게 감정적으로 "네 맘대로 해! 먼저 가져!"라고 툭 말을 던지지 않았습니다.
그런 감정적인 말은 진실한 자기 포기가 아니라 짜증이고, 오기이고, 미움일 뿐입니다. 그처럼 짜증이나 오기나 미움은 문제해결의 길이 아닙니다. 사랑이 바로 길입니다.
사실 큰아버지인 아브라함이 롯을 경쟁상대로 생각했겠습니까? 내쫓으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끝까지 참고 롯에게 상처를 주지 않고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모습을 보십시오.
그렇게 한다고 해서 상처를 주지 않을 수는 없어도 하나님은 그런 노력을 지켜보십니다.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이 되고 수많은 후손을 가지게 된 이유도 그런 태도에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사람과 승부하며 상처를 주는 일보다 하나님과 승부하는 편을 택했습니다. 믿음이란 하나님과 승부하고, 하나님 뜻대로 순종하는 길을 택하는 것입니다.
사실 자기 주관에 빠진 사람과 승부하려고 하면 해결의 길은 더 어려워지게 됩니다. 하나님과 승부하는 길을 택했기에 아브라함에게 부드러운 믿음의 말이 나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과 승부하며 사람에게는 좋은 말, 믿음의 말을 주어야 합니다. 우리의 말이 정말 말한 대로 되는 것이라면 좋은 말을 하는 것이 상식 아니겠습니까?
얼마 전에 어떤 목사님에 관한 얘기를 듣고 재미있게 웃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분 부친께서 건강한데도 항상 "나는 일찍 갈 것 같아!"하다가 일찍 가셨습니다.
그런데 그분 모친은 가냘픈데 "나는 오래 살 거야!" 하니까 90넘어 사셨다고 합니다. 사람의 말은 잘만 사용하면 복이 넘치고, 잘못 사용하면 복의 토대가 다 허물어집니다.
그러므로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말, 따뜻함을 전하는 말, 믿음의 말을 선택하십시오.
반대로 외설, 독설, 비난, 중상모략, 거짓말, 감정적인 말은 힘써 선택하지 마십시오. 믿는 사람들의 잘못된 말이 사단의 도구가 되어 교회를 분열시키는 것을 인식한다면
이제는 아브라함처럼 항상 좋은 말을 선택해서 더욱 복된 성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3. 아브라함은 신앙의 편을 선택했습니다.
9절에는 아브라함이 조카 롯에게 먼저 선택권을 주고 양보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문제가 해결이 안되겠습니까? 손해를 각오하면 문제는 반드시 해결됩니다.
더 나아가서 내 헛된 자존심을 꺾기로 결정하면 문제를 반드시 해결될 것입니다. 이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이 쉽지 않은 일을 우리는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어떻게 롯에게 먼저 선택권을 줄 수 있었을까요? 그는 진정한 보화가 무엇인지를 알았고, 그 보화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진정 하늘의 보화의 실체를 안다면 이 땅의 것을 내어주지 못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영생의 믿음을 가진 자에게 꼭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여유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믿는 사람들은 남을 배려하는 너그러운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롯은 큰아버지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눈을 들어 좋은 요단 땅을 선택합니다. 큰아버지의 배려 앞에서 덥석 "요거 내 거!" 하니 인간적으로도 버릇이 없습니다. 버릇이 있어야 합니다. 위인들에게도 약점은 많지만 버릇없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결국 롯은 자신의 이기적이 선택으로 소돔과 고모라에서 모든 것을 다 잃습니다. 내가 변해야지 넓은 길, 화려한 길, 그럴듯한 길만 선택한다고 복이 오겠습니까? 요새 이민 가는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이민 가는 것에는 긍정적인 면이 많습니다. 큰 나라에 가서 꿈을 키우고, 자녀들을 인물로 키워내려고 하는 일은 좋은 일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민을 가는 이유를 생각해보면 좋은 마음만 드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분은 "한국이 싫고, 마음에 안 들어 간다"고 하는데 그 앞날이 심히 염려됩니다. 그러면 미국은 마음에 들까요? 이민자라는 각오가 없으면 그곳은 더 살기 힘듭니다.
싫은 부분도 많이 보일 것이고, 맘에 안 드는 부분은 얼마나 많이 보이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한국은 맘에 안 들면 소리라도 치는데 그곳은 그런 소리치는 문화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한국에 있든지, 미국에 있든지 내가 어떤 마음으로 사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요새 정치문제, 경제문제, 교육문제 등이 문제라고 하지만 사실은 영적인 문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돌아와 은혜 받고 마음이 변화되면 얼마든지 소망이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반드시 세계를 향해 큰 일을 할 수 있는 민족이 될 것으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한국이냐 미국이냐보다 신앙적인 선택을 하느냐 안 하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그런데 사람들마다 하나님을 붙들지는 않고 너무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걸고 있습니다.
사실 사람들이 추구하는 대부분의 것은 있어도 그만이고 없어도 그만인 것들입니다. 권력, 명예, 지위, 재물, 건강 등 그 어떤 것에도 우리가 목숨을 걸 필요는 없습니다.
어떤 청년은 "그 여자 없으면 난 못살아!" 하면서 죽자살자 그 여자만 따라다닙니다. 그처럼 한 여자 때문에 죽느니 사느니 하는 남자는 아마 싹이 노란 사람일 것입니다.
이 세상에 어떻게 태어났는데 여자 때문에 죽는다고 난리를 친다면 되겠습니까? 다른 남자, 다른 여자와도 잘 살 수 있습니다. 세월이 지나면 피식 웃을 일들입니다.
우리가 한 가지만 선택을 잘 하면 됩니다. 그것은 바로 창조주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그런 선택을 확실히 하면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아브라함처럼 너그럽게 될 것입니다.
다른 것은 너그럽게 주십시오. 가장 중요한 것은 신앙적인 선택입니다. 우리가 내 것을 희생하고 하나님을 선택하면 반드시 하나님이 축복하실 것입니다.

< 항상 하나님 편을 선택하십시오 >
결국 롯이 떠난 후, 아브라함에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14-15절 말씀을 보십시오.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롯이 떠나자 즉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찾아오셔서 축복을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언제 역사하십니까? 손해를 각오하고 신앙적인 선택을 할 때 역사하십니다.
알고 보면 하나님은 축복하실 준비를 다 하고 우리의 신앙적 결단을 기대하시다가, 우리에게 믿음의 선택이 있으면 곧 바로 우리에게 다가와 축복을 약속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얻기 위해 롯을 떠나보내는 과정이 있어야 합니다. 롯과 결별하고, 하나님을 선택하면 우리는 어떤 곳에서도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오늘의 가정의 위기가 어디에서 왔습니까? 무엇보다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가정도 하나님이 중심이 되어 가족들끼리 서로 힘이 되어주며 살 때 행복해집니다. 그러나 우리 나라의 전통적 가정 개념은 가장이 중심이 되어 가장이 다 책임집니다. 가정의 모든 책임이 가장에게 있고, 모든 가정의 질서가 가장에 의해서 좌우됩니다. 음식도 아버지 식성을 중심으로 차리고, 제일 좋은 것은 아버지에게 드려야 합니다. 가장만 잘 잡숫고, 가장만 좋으면 훌륭한 가정입니다. 여자와 아이는 부속물입니다. 때로 아버지는 집안이 어떻게 되든지 가장 많이 누리며 삽니다. 양반일수록 더합니다. 더운 대낮에는 그늘에 가셔서 부채질 하다가 저녁에 돌아오면 그냥 큰소리칩니다. 그러면 온 식구가 나가서 아버지를 맞이하고 상좌에 모시며 섬겨주어야 합니다.
옛날 부인들은 더구나 방안에 들어와서 먹지도 못하고 부엌에서 그냥 먹었습니다. 고려 시대만 해도 덜했는데 조선시대 몇 백년동안은 그런 문화가 더 심해졌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에게 복음이 들어와 문화가 서서히 변하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사람은 기능적인 차이는 있어도 사람 자체의 높고 낮음은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똑같은 사람으로서 서로 모든 것은 나누며 살 수 있어야 합니다. 좋은 것도 나누고, 나쁜 것도 나누고, 마음도, 생활도 모든 짐도 나누어져야 합니다.
바로 그런 점 때문에 하나님을 모신 가정에는 행복의 잔이 넘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처럼 하나님을 선택하고 하나님 중심적으로 살면 우리는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인생은 선택입니다. 롯의 길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아브라함의 길을 선택하시겠습니까? 내가 결정하는 대로 내 생애가 펼쳐질 것입니다. 이제 어떤 길을 선택하시겠습니까?
항상 화평을 선택하고, 좋은 말을 선택하고, 하나님 편을 선택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 동서남북에 큰 신앙의 발자국을 남길 수 있길 바랍니다.

출처/이한규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