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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사의 직분 (디모데전서 3:11-13)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이 자리에 처음 나오신 여러분, 칠월 첫 주일 밤부터 우리 울산교회에서는 직원선출을 위한 투표를 하고 있습니다. 장로와 집사, 그리고 권사를 뽑는 투표를 각각 1, 2차로 나누어 하고 있습니다. 최종 결과가 나온 것은 장로직이고 오늘밤 우리는 집사 2차 투표와 권사 1차 투표를 합니다. 어찌 보면 1차 투표는 후보공천을 하는 예선투표의 성격을 띠고 있는 반면 2차 투표는 적임자를 확정을 짓는 결선 투표의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그래서 7월 첫 주에는 장로의 직분에 대해서, 지난 주는 집사의 직분에 대해서, 오늘 우리는 권사의 직분에 대해서 각각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사실 직분 자체에 대해서라기 보다 강조점은 어떤 사람이 해당 직분을 맡아야 할 것인지 그 자격을 중심해서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오늘 설교는 차례에 따라 권사의 직분에 대해서 말씀 드릴 순서입니다.
하지만 엄격히 말하자면 권사라는 칭호는 신구약 성경에 나오지 않습니다. 다만 오늘 본문을 권사의 직분에 적용시켜 생각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우선 본문을 다시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여자들도 이와같이 단정하고 참소하지 아니하고 절제하며 충성된 자라야 할지니라"
이 여자들은 누구를 가리킵니까? 어떤 사람들은 집사의 아내들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타당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집사가 되는데 아내까지 자격을 논한다면 마땅히 장로(감독)가 되는데도 그런 규정을 두어야 공정합니다. 그러나 감독의 자격을 논할 때는 그 아내가 어떠해야한다는 규정이 없는 것을 볼 때 이 여자들이 집사의 아내를 의미한다는 것은 큰 설득력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보다는 문장의 구조를 살펴볼 때 감독과 집사에 준하는 또 하나의 독립된 직분을 논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해 보입니다. "이와같이 집사들도"라고 시작하는 8절이나 "여자들도 이와같이"라고 하는 11절은 구조상 대칭을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혼동되지 않도록 "여집사"라든지 "권사"라는 칭호를 사용하지 않고 그냥 "여자들도"라는 칭호를 사용하였을까요? 거기에 대한 설명이 요구됩니다. 그것은 아마 디모데 전서를 기록할 당시까지 "여집사"라는 칭호가 쓰여지지 않았거나 사용되어도 보편화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에는 남자 집사에 상응하는 여자들의 봉사가 교회에 있었던 것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에 나오는 "여자들은" 집사의 아내들을 가리키는 것이라기 보다는 교회 내의 일반적인 여자들과는 구별되는 특별한 직무를 수행하는 "여자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다만 디모데 전서라는 편지가 쓰여질때 까지 그 여자들에 대해서 특별한 명칭이 없었기에 남자 안수집사에 준하는 여집사로 부르든지 아니면 우리 한국교회처럼 권사로 부르든지 하는 것은 교회의 전통에 따라서 결정할 수 있는 문제라고 봅니다. 그러므로 저는 오늘 11절에 준해서 권사의 직분, 그 자격을 살피려고 합니다. 어쨌거나 교회 내의 여성들 가운데 직분을 맡아서 수고할 사람들은 소정의 자격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할 것입니다.
"여자들도 이와같이 단정하고 참소하지 아니하고 절제하며 충성된 자라야 할지니라" 우선 놀라운 것은 남자 집사의 자격에 비해서 조금도 떨어지지 않다는 사실을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장로의 자격이나 집사의 자격이 그 수준이 서로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우리는 지난 주일에 살폈습니다.
교회 내의 직분은 결코 계급식 직분이 아니라는 사실을 한 번 더 강조합니다. 기독교는 우리의 생각이나 경험과는 다르게 결코 권위적 계급 구조를 가진 단체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특별한 은혜의 선물,특별한 능력)와 소명(하나님께서 불러 쓰신 자리)이 다르기에 직책이 다른 것이지 직책이 사람을 차별하지 않습니다. 직책이 사람 사이의 우열을 가리지 않습니다. 우열을 가지는 것은 이방세계에서 사람을 보는 관점이지 기독교 문화는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비단 교회 조직만이 아니라 세상에서도 동일한 정신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일반 사원이나 과장이나 부장이라도 아니면 사장, 회장이라도 마찬가지지만 직책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구조 사회에서 그런 역할을 만든 것이지 직책이 높다고 해서 더 우수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런 풍조는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기에 고유한 가치를 지닌 존재입니다. 학벌이나 능력이나 지위를 사람의 가치평가의 기준으로 삼아서는 안됩니다. 인간이라고 하면 심지어는 우리 가운데 지체가 부자유한 사람도 있고 정신적으로 온전하지 못한 사람도 있지만 사람으로 지음을 받았으면 사람으로서 인정을 받고 존경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그가 누구며 무엇이냐를 떠나서 존중되어야 합니다.
더 나아가서 기독교의 진리는 남자와 여자 사이의 우열을 논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남자와 여자가 다르다는 것은 말하지만 그것은 결코 남녀의 우열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여기에 서서 누가 남자인지 누가 여자인지 하나도 틀리지 않고 다 구별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남자와 여자는 다르게 지어졌다는 것은 어쩔수 없습니니다. 뿐만 아니라 어떤 일을 맡기면 남자와 여자의 분야가 다를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복음이 전파된 곳에는 남녀의 평등이 이루어져 왔습니다. 성의 차이가 인간 차별을 하는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동일한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는데 남집사나 여권사가 그 자격기준이 서로 다를 수는 없습니다. 8절과 11절을 비교해 보십시오. "이와같이 집사들도 단정하고 일구이언을 하지 아니하고 술에 인박히지 아니하고 더러운 이익을 탐하지 아니하고" "여자들도 이와같이 단정하고 참소하지 아니하고 절제하며 충성된 자라야 할지니라" 하나씩 다 대응하는 자격을 말하고 있습니다.
남녀를 막론하고, 집사이든 권사이든 막론하고 우선 직분자는 "단정하고"라는 기준을 맨먼저 말합니다. 지난주에 살핀바 이는 "존경할 만 하고"라는 뜻이라고 살폈습니다. 존경할 만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은 공통분모입니다. 다만 어떻게 해야 존경을 받느냐는 구체적인 항목에서는 남자와 여자의 천부적인 기질이나 삶의 자리에 따라서 좀 다르게 표현될 수 있습니다.
자, 그러면 존경받을 만한 여성도는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합니까? 먼저 "참소하지 말며"라고 규정합니다. 남집사인 경우는 "일구이언을 하지 말며"였던 것을 기억하시지요? 두 경우 공통점은 입으로 하는 말에 관한 규정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남녀 불문하고 직함을 떠나서 사람이 존경을 받기 위해서는 언어생활에 덕을 세워야 한다는 것은 상식입니다. 말이 신뢰할 만해야 사람들의 존경을 받습니다.
그러면 왜 남자보고는 "일구이언을 하지 말며"라고 하는 반면 여자보고는 "참소하지 말며"라고 합니까? 일구이언에 대해서는 지난 주일 상세히 설명했기에 그만두고 "참소한다"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남을 헐뜻는 것을 뜻합니다. 남에게 험담을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 하필 여자에게 "참소하지 말며"라고 했을까요? 남자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사업상(?) 일구이언할 위험이 큰 반면 여자는 그 기질상 참소할 위험이 컷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남자와 여자 중에서 대체로 누가 말을 더 많이하고 잘합니까? 십년수도를 하고 방금 하산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여자가 더 말을 잘한다는 사실을 인정할 것입니다. 결혼해서 10년, 20년 살고나서도 말로 여자를 이길 수 있는 남자는 대단한 남자입니다. 그런 남자는 천연기념물로 지정을 받을만 합니다. 말에 관한한 여자가 탁월합니다. 국내에서뿐 아니라 국외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외국생활 몇 년 해보면 이웃사람 만나서 외국어로 수다하는 것도 남자보다 여자가 탁월합니다.
그러나 조심해야 합니다. 언제나 장점 그것이 바로 단점이 될 수 있습니다. 왕자 압살롬의 머리털을 생각해 보십시오. 평소에는 그의 검은 머리채는 이스라엘 처녀들의 마음을 설레이게 하던 왕자 압살롬의 등록상표였습니다. 그러나 위기의 순간 그의 머리채가 상수리나무에 걸림으로 그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말로 많은 사람의 마음을 위로하고 격려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동일한 말로 여러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줄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존경받을 권사의 자격 가운데 첫째 살펴야 할 기준은 "참소하지 아니하며"라고 말합니다.
할말 안 할말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합니다. 들었다고 돌아서서 바로 옮기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안다고 해서 다 떠벌려야 될 이유는 없기 때문입니다. 말해야 하는 것인지 아닌지 구별을 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들은 것 만큼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듣고나면 자기 느낌이나 감정까지 보태어서 점점 더 부풀려서 하는 능력이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어떤 면보다 이 면에서 신뢰할만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권사는 말을 아낄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하고 말을 함부로 하지 않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무조건 반창고 붙이고 살라는 말은 아닙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정당한 반응을 보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아직 미성숙한 사람입니다. 말로서 이웃을 섬기고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서 참여할 일들이 많습니다. 위해서 격려하고 위해서 기도하고 위해서 전도하는 일도 모두 말로서 섬기는 일입니다.
다만 남을 모함하거나 헐뜯는 일을 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격려하고 위로하는 일은 마땅히 해야 합니다. 어쩌면 '권사'라는 명칭은 이런 일을 하는 사람임을 보여줍니다. 교구와 구역 내의 성도들을 돌보는 일을 감당하도록 권사의 직분을 받은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권사의 연령기준이 50세에서 45세로 낮추어진 것을 아직도 잘 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회의 직분은 그 어느 것도 명예직이 아닙니다. 모두 봉사하기 위한 직분입니다. 그러므로 일할 기력이 있고 여건이 될 때 직분을 맡아야 합니다. 직분을 받은 사람은 봉사의 일을 해야 하고 일할 수 없는 사람은 휴무를 해야 옳습니다.
두 번째로 존경받은 만한 여성도는 어떠해야 합니까? "절제하며"라고 설명합니다. 남자인 경우 "술에 인박히지 아니하며"라는 자리에 여자에게는 "절제하며"라고 합니다. 남자인 경우는 구체적으로 지적을 하는 반면 여자인 경우는 좀 두루뭉실하게 넘어가는 듯한 인상을 줍니다. 하지만 "절제하며"라는 의미는 무엇인지 밝혀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면 무엇을 절제해야 합니까? 물론 본문에는 구체적 언급이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남자의 경우 술문제와 관련한 자리에 등장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둡시다.
우선 "절제운동"하면 우리 한국 기독교 역사에 잊혀지지 않는 일들이 있습니다. 일제치하에서 우리 기독교 여성단체들이 주축이 되어서 절제운동을 벌렸습니다. 그 주요항목이 금주금연 운동이요 외채상환 운동, 물산(국산품) 장려운동입니다. 지금의 국산품 애용운동 이런 것들을 했습니다. 아마 50대 되신 분들은 어릴 때 여름성경학교때 금주금연가를 열심히 불렀던 기억이 있을 것입니다.
2000년 전에는 술하면 남자들만 조심하면 되었지만 지금은 세상이 달라졌습니다. 지금은 술만 문제가 아니라 담배도 문제임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중독성 오락이나 취미생활도 조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당시에는 "절제하며"라고 여성들에게 말하고 넘어갔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릅니다.
여성 전용까페가 등장한 지 오래 되었고 호텔 로비에 가면 담배 피우는 여성들이 오히려 많은 느낌도 듭니다. 그러므로 절제하고 조심하는 일에도 가히 남녀평등 시대가 도래한 것 같습니다. 특히 여성도들 가운데 새잡는 일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소위 화투로 Q.T.하는 분들이 있다고들 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런 분들이 우리 교회 권사 후보에도 등장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감사합니다.
하여간 자신의 생활을 자신이 통제해야지 다른 어떤 것이 우리를 통제하게 해서는 안됩니다. 그러기 위해서 생활 훈련이 되신 분들을 선택되어야 합니다. 열심히 주의 말씀을 배우고 전하는 일에 자신을 드리고, 교회를 섬기고 하나님 나라 확장에 뛰고 있는 분들을 골라도 스무명은 넘는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지난 주일밤 어떤 분처럼 투표지 받아서 요람 살피면 늦습니다. 미리 살펴서 모범답안을 가지고 오셔야 합니다.
존경받을 만한 여성도가 되기 위해서 세 번째 요건은 무엇입니까? "모든 일에 충성된 자라야 할지니라" 이 항목에서도 남자의 경우처럼 예리한 지적을 하지 않습니다. 남자의 경우는 "더러운 이익을 탐하지 아니하며"라고 분명히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모든 일에 충성되다"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문자 그대로 모든 일에 충성되어야 겠습니다만 우선 남집사와 평행을 이루는 측면을 먼저 고찰해 봅시다. 여성도에게 기대할 경제적인 측면에서 충성된다는 것은 어떤 것을 의미할까요? 남자가 부정직한 수입을 탐하는 일은 여자와 전혀 무관하지 않습니다. 적어도 한 남편의 사회활동에 상당한 영향을 아내가 끼친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할 것입니다. 만약 아내가 남편의 월급을 생각하지 않고 지출을 한다면 남편은 그 적자를 메꾸기 위해 무슨 돈이든지 호주머니에 넣을 유혹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각 가정의 살림 사는 일을 맡아 있는 여성도들은 경제운용에 있어서 성실해야 한다는 것은 누구나 수긍할 것입니다.
남집사, 여권사 할것없이 공동체의 직분을 맡아 섬기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그 삶이 존경을 받아야 하는 것은 기본입니다. 비록 여자들의 경우에는 더 이상의 규정이 언급되지 않았다고 영적인 자격이나 가정적인 자격이 무시되어도 좋다고 결론 내리는 것은 성급하고 어리석은 일입니다. 다만 앞에서 언급되었기에 중복을 피하는 것 뿐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형상대로 지음받은 우리가, 자기 피로 사신 교회가 그 정도는 상상력이 있다고 여기십니다. 앞에서 말하면 뒤에서는 잘 알아서 적용할 수 있지 똑 같은 말을 또 한 번 일러 줄 이유는 없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이와같이 여자들도"라는 표현 속에는 여자들도 역시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라야 할찌니라"는 규정도 포함됩니다. 예수님의 보배로운 피로서 우리의 양심이 새로워지고 거기에 믿음의 비밀을 간직해야 함은 남자 집사 뿐만 아니라 여자 권사도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권사직 역시 신앙공동체의 직분이므로 믿음의 비밀을 맛본 사람이 맡아야 함은 너무 당연합니다. 믿음의 체험을 가진 사람이라야 믿음의 권속들을 돌볼 수 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야 주님의 백성을 사랑으로 돌볼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이와같이 여자들도"라는 표현 속에는 앞의 말씀에 남집사에게 물었던 가정적인 규정도 내포되어 있습니다. 다만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대신 "한 남편의 아내가 되며"로 번역을 해야 할 필요는 있습니다. 한 남편의 좋은 아내가 되는 것은 어떤 것을 구체적으로 의미합니까? 조금 상세하게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남편은 너그러워야 한다면 여성은 아름다워야 합니다. 자기 자신과 가정을 아름답게 꾸밀줄 아는 사람이 좋은 아내입니다. 모든 남편이 자기 아내에게 기대하는 것 하나는 맛있는 식탁일 것입니다. 거기서 가정의 화목이 이루어지고 하루의 피로를 풀고 새날을 위한 재충전이 되어야 합니다. 아내가 자기보다 말을 잘하는 것을 우리 남편들은 대체로 인정하지만 아내 혼자서 말하는 것을 좋아하는 남편은 의외로 적습니다. 식탁이 가족간에 대화할 수 있는 자리가 되어야지 남북대화처럼 일방적인 선전보다 대화를 사람들은 누구나 선호합니다.
단둘이 있을 때나 남들 앞에서나 남편을 인정하고 세워주십시오. 중요한 집안 일에는 남편의 결정을 따르는 아내가 아름답습니다. 목사인 제가 보아도 아름다운데 하늘의 하나님이 보시면 얼마나 아름답게 보시겠습니까? 그러나 살다보면 남편에게 할 말이 있거나 따질 일이 없잖아 있습니다. 그럴 때는 남편의 기분을 참작하십시오. 또한 남자들은 문제가 생기면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괜히 여러분과의 관계에서 문제가 생겼다고 넘겨 짚지 말고 아내와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다만 그가 살아 나가는 일에 있어서 문제가 생겼올 뿐입니다. 그럴때는 말하지 않습니다. 올여름에는 좋은 아내가 되고 싶으면 "남자들은 무슨 생각을 하며 사는가?"라는 책을 읽고 남편 연구를 좀 하십시오. 서로를 위해서는 이번 여름휴가 필독서로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를 추천합니다.
이제 직분자를 살펴보는 설교의 마지막 결론으로 13절을 살펴봅시다. "집사의 직분을 잘 한 자들은 아름다운 지위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에 큰 담력을 얻느니라" 형식은 집사의 직분을 잘 한자들에게 주는 상급 보상처럼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우리가 상상력을 발휘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생각할 때 집사직분만 잘 한 자들에게 이런 약속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모든 직분자들을 향해서 적용할 수 있다고 봅니다. 감독 즉 장로의 직분을 잘 한 자들도, 그리고 권사의 직분을 잘 한 자들도 기대할 수 있는 복된 약속입니다. 말하자면 모든 "직분을 잘 한 자들은 아름다운 지위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에 큰 담력을 얻느니라"고 읽어도 무리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이 약속의 의미를 살펴봅시다. 두 가지 약속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우선 "아름다운 지위"에 대한 약속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에 큰 담력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그 의미를 하나씩 살펴봅시다. 첫 번째의 약속은 무슨 뜻입니까? 집사의 직분을 잘 한 자들은 아름다운 지위를 얻는다는 말은 오해되기 쉽습니다. 마치 안수 집사로서 직분을 잘 감당하면 더 아름다운 지위인 감독, 장로의 직분을 얻는다는 말로 오해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래 의미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 말은 바른 의미는 직분을 잘 감당한 사람들은 그 직분에 어울리는 인정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존경할 만한 사람들을 집사의 직분에 뽑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직분에 충성하면 모든 성도들의 인정과 존경을 받게 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말하자면 장로라도 다 같은 장로가 아닙니다. 집사라고 다 같은 집사가 아닙니다. 권사라고 다같은 권사로 인정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존경받는 직분자들은 따로 있습니다. 성도들이 신앙의 지도를 받기를 원하고 문제를 함께 나누고 함께 기도를 드리고 싶은 장로, 집사, 권사는 따로 있다는 말씀입니다. 주보에 이름이 나란히 기재된다고 꼭같은 직분자라고 아무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요람에 이름이 함께 기재되어 있고 사진이 실렸다고 성도들이 동일하게 여기지는 않습니다.
출처/정근두 목사 설교자료 중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이 자리에 처음 나오신 여러분, 칠월 첫 주일 밤부터 우리 울산교회에서는 직원선출을 위한 투표를 하고 있습니다. 장로와 집사, 그리고 권사를 뽑는 투표를 각각 1, 2차로 나누어 하고 있습니다. 최종 결과가 나온 것은 장로직이고 오늘밤 우리는 집사 2차 투표와 권사 1차 투표를 합니다. 어찌 보면 1차 투표는 후보공천을 하는 예선투표의 성격을 띠고 있는 반면 2차 투표는 적임자를 확정을 짓는 결선 투표의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그래서 7월 첫 주에는 장로의 직분에 대해서, 지난 주는 집사의 직분에 대해서, 오늘 우리는 권사의 직분에 대해서 각각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사실 직분 자체에 대해서라기 보다 강조점은 어떤 사람이 해당 직분을 맡아야 할 것인지 그 자격을 중심해서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오늘 설교는 차례에 따라 권사의 직분에 대해서 말씀 드릴 순서입니다.
하지만 엄격히 말하자면 권사라는 칭호는 신구약 성경에 나오지 않습니다. 다만 오늘 본문을 권사의 직분에 적용시켜 생각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우선 본문을 다시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여자들도 이와같이 단정하고 참소하지 아니하고 절제하며 충성된 자라야 할지니라"
이 여자들은 누구를 가리킵니까? 어떤 사람들은 집사의 아내들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타당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집사가 되는데 아내까지 자격을 논한다면 마땅히 장로(감독)가 되는데도 그런 규정을 두어야 공정합니다. 그러나 감독의 자격을 논할 때는 그 아내가 어떠해야한다는 규정이 없는 것을 볼 때 이 여자들이 집사의 아내를 의미한다는 것은 큰 설득력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보다는 문장의 구조를 살펴볼 때 감독과 집사에 준하는 또 하나의 독립된 직분을 논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해 보입니다. "이와같이 집사들도"라고 시작하는 8절이나 "여자들도 이와같이"라고 하는 11절은 구조상 대칭을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혼동되지 않도록 "여집사"라든지 "권사"라는 칭호를 사용하지 않고 그냥 "여자들도"라는 칭호를 사용하였을까요? 거기에 대한 설명이 요구됩니다. 그것은 아마 디모데 전서를 기록할 당시까지 "여집사"라는 칭호가 쓰여지지 않았거나 사용되어도 보편화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에는 남자 집사에 상응하는 여자들의 봉사가 교회에 있었던 것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에 나오는 "여자들은" 집사의 아내들을 가리키는 것이라기 보다는 교회 내의 일반적인 여자들과는 구별되는 특별한 직무를 수행하는 "여자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다만 디모데 전서라는 편지가 쓰여질때 까지 그 여자들에 대해서 특별한 명칭이 없었기에 남자 안수집사에 준하는 여집사로 부르든지 아니면 우리 한국교회처럼 권사로 부르든지 하는 것은 교회의 전통에 따라서 결정할 수 있는 문제라고 봅니다. 그러므로 저는 오늘 11절에 준해서 권사의 직분, 그 자격을 살피려고 합니다. 어쨌거나 교회 내의 여성들 가운데 직분을 맡아서 수고할 사람들은 소정의 자격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할 것입니다.
"여자들도 이와같이 단정하고 참소하지 아니하고 절제하며 충성된 자라야 할지니라" 우선 놀라운 것은 남자 집사의 자격에 비해서 조금도 떨어지지 않다는 사실을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장로의 자격이나 집사의 자격이 그 수준이 서로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우리는 지난 주일에 살폈습니다.
교회 내의 직분은 결코 계급식 직분이 아니라는 사실을 한 번 더 강조합니다. 기독교는 우리의 생각이나 경험과는 다르게 결코 권위적 계급 구조를 가진 단체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특별한 은혜의 선물,특별한 능력)와 소명(하나님께서 불러 쓰신 자리)이 다르기에 직책이 다른 것이지 직책이 사람을 차별하지 않습니다. 직책이 사람 사이의 우열을 가리지 않습니다. 우열을 가지는 것은 이방세계에서 사람을 보는 관점이지 기독교 문화는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비단 교회 조직만이 아니라 세상에서도 동일한 정신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일반 사원이나 과장이나 부장이라도 아니면 사장, 회장이라도 마찬가지지만 직책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구조 사회에서 그런 역할을 만든 것이지 직책이 높다고 해서 더 우수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런 풍조는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기에 고유한 가치를 지닌 존재입니다. 학벌이나 능력이나 지위를 사람의 가치평가의 기준으로 삼아서는 안됩니다. 인간이라고 하면 심지어는 우리 가운데 지체가 부자유한 사람도 있고 정신적으로 온전하지 못한 사람도 있지만 사람으로 지음을 받았으면 사람으로서 인정을 받고 존경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그가 누구며 무엇이냐를 떠나서 존중되어야 합니다.
더 나아가서 기독교의 진리는 남자와 여자 사이의 우열을 논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남자와 여자가 다르다는 것은 말하지만 그것은 결코 남녀의 우열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여기에 서서 누가 남자인지 누가 여자인지 하나도 틀리지 않고 다 구별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남자와 여자는 다르게 지어졌다는 것은 어쩔수 없습니니다. 뿐만 아니라 어떤 일을 맡기면 남자와 여자의 분야가 다를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복음이 전파된 곳에는 남녀의 평등이 이루어져 왔습니다. 성의 차이가 인간 차별을 하는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동일한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는데 남집사나 여권사가 그 자격기준이 서로 다를 수는 없습니다. 8절과 11절을 비교해 보십시오. "이와같이 집사들도 단정하고 일구이언을 하지 아니하고 술에 인박히지 아니하고 더러운 이익을 탐하지 아니하고" "여자들도 이와같이 단정하고 참소하지 아니하고 절제하며 충성된 자라야 할지니라" 하나씩 다 대응하는 자격을 말하고 있습니다.
남녀를 막론하고, 집사이든 권사이든 막론하고 우선 직분자는 "단정하고"라는 기준을 맨먼저 말합니다. 지난주에 살핀바 이는 "존경할 만 하고"라는 뜻이라고 살폈습니다. 존경할 만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은 공통분모입니다. 다만 어떻게 해야 존경을 받느냐는 구체적인 항목에서는 남자와 여자의 천부적인 기질이나 삶의 자리에 따라서 좀 다르게 표현될 수 있습니다.
자, 그러면 존경받을 만한 여성도는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합니까? 먼저 "참소하지 말며"라고 규정합니다. 남집사인 경우는 "일구이언을 하지 말며"였던 것을 기억하시지요? 두 경우 공통점은 입으로 하는 말에 관한 규정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남녀 불문하고 직함을 떠나서 사람이 존경을 받기 위해서는 언어생활에 덕을 세워야 한다는 것은 상식입니다. 말이 신뢰할 만해야 사람들의 존경을 받습니다.
그러면 왜 남자보고는 "일구이언을 하지 말며"라고 하는 반면 여자보고는 "참소하지 말며"라고 합니까? 일구이언에 대해서는 지난 주일 상세히 설명했기에 그만두고 "참소한다"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남을 헐뜻는 것을 뜻합니다. 남에게 험담을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 하필 여자에게 "참소하지 말며"라고 했을까요? 남자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사업상(?) 일구이언할 위험이 큰 반면 여자는 그 기질상 참소할 위험이 컷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남자와 여자 중에서 대체로 누가 말을 더 많이하고 잘합니까? 십년수도를 하고 방금 하산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여자가 더 말을 잘한다는 사실을 인정할 것입니다. 결혼해서 10년, 20년 살고나서도 말로 여자를 이길 수 있는 남자는 대단한 남자입니다. 그런 남자는 천연기념물로 지정을 받을만 합니다. 말에 관한한 여자가 탁월합니다. 국내에서뿐 아니라 국외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외국생활 몇 년 해보면 이웃사람 만나서 외국어로 수다하는 것도 남자보다 여자가 탁월합니다.
그러나 조심해야 합니다. 언제나 장점 그것이 바로 단점이 될 수 있습니다. 왕자 압살롬의 머리털을 생각해 보십시오. 평소에는 그의 검은 머리채는 이스라엘 처녀들의 마음을 설레이게 하던 왕자 압살롬의 등록상표였습니다. 그러나 위기의 순간 그의 머리채가 상수리나무에 걸림으로 그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말로 많은 사람의 마음을 위로하고 격려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동일한 말로 여러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줄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존경받을 권사의 자격 가운데 첫째 살펴야 할 기준은 "참소하지 아니하며"라고 말합니다.
할말 안 할말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합니다. 들었다고 돌아서서 바로 옮기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안다고 해서 다 떠벌려야 될 이유는 없기 때문입니다. 말해야 하는 것인지 아닌지 구별을 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들은 것 만큼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듣고나면 자기 느낌이나 감정까지 보태어서 점점 더 부풀려서 하는 능력이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어떤 면보다 이 면에서 신뢰할만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권사는 말을 아낄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하고 말을 함부로 하지 않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무조건 반창고 붙이고 살라는 말은 아닙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정당한 반응을 보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아직 미성숙한 사람입니다. 말로서 이웃을 섬기고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서 참여할 일들이 많습니다. 위해서 격려하고 위해서 기도하고 위해서 전도하는 일도 모두 말로서 섬기는 일입니다.
다만 남을 모함하거나 헐뜯는 일을 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격려하고 위로하는 일은 마땅히 해야 합니다. 어쩌면 '권사'라는 명칭은 이런 일을 하는 사람임을 보여줍니다. 교구와 구역 내의 성도들을 돌보는 일을 감당하도록 권사의 직분을 받은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권사의 연령기준이 50세에서 45세로 낮추어진 것을 아직도 잘 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회의 직분은 그 어느 것도 명예직이 아닙니다. 모두 봉사하기 위한 직분입니다. 그러므로 일할 기력이 있고 여건이 될 때 직분을 맡아야 합니다. 직분을 받은 사람은 봉사의 일을 해야 하고 일할 수 없는 사람은 휴무를 해야 옳습니다.
두 번째로 존경받은 만한 여성도는 어떠해야 합니까? "절제하며"라고 설명합니다. 남자인 경우 "술에 인박히지 아니하며"라는 자리에 여자에게는 "절제하며"라고 합니다. 남자인 경우는 구체적으로 지적을 하는 반면 여자인 경우는 좀 두루뭉실하게 넘어가는 듯한 인상을 줍니다. 하지만 "절제하며"라는 의미는 무엇인지 밝혀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면 무엇을 절제해야 합니까? 물론 본문에는 구체적 언급이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남자의 경우 술문제와 관련한 자리에 등장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둡시다.
우선 "절제운동"하면 우리 한국 기독교 역사에 잊혀지지 않는 일들이 있습니다. 일제치하에서 우리 기독교 여성단체들이 주축이 되어서 절제운동을 벌렸습니다. 그 주요항목이 금주금연 운동이요 외채상환 운동, 물산(국산품) 장려운동입니다. 지금의 국산품 애용운동 이런 것들을 했습니다. 아마 50대 되신 분들은 어릴 때 여름성경학교때 금주금연가를 열심히 불렀던 기억이 있을 것입니다.
2000년 전에는 술하면 남자들만 조심하면 되었지만 지금은 세상이 달라졌습니다. 지금은 술만 문제가 아니라 담배도 문제임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중독성 오락이나 취미생활도 조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당시에는 "절제하며"라고 여성들에게 말하고 넘어갔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릅니다.
여성 전용까페가 등장한 지 오래 되었고 호텔 로비에 가면 담배 피우는 여성들이 오히려 많은 느낌도 듭니다. 그러므로 절제하고 조심하는 일에도 가히 남녀평등 시대가 도래한 것 같습니다. 특히 여성도들 가운데 새잡는 일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소위 화투로 Q.T.하는 분들이 있다고들 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런 분들이 우리 교회 권사 후보에도 등장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감사합니다.
하여간 자신의 생활을 자신이 통제해야지 다른 어떤 것이 우리를 통제하게 해서는 안됩니다. 그러기 위해서 생활 훈련이 되신 분들을 선택되어야 합니다. 열심히 주의 말씀을 배우고 전하는 일에 자신을 드리고, 교회를 섬기고 하나님 나라 확장에 뛰고 있는 분들을 골라도 스무명은 넘는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지난 주일밤 어떤 분처럼 투표지 받아서 요람 살피면 늦습니다. 미리 살펴서 모범답안을 가지고 오셔야 합니다.
존경받을 만한 여성도가 되기 위해서 세 번째 요건은 무엇입니까? "모든 일에 충성된 자라야 할지니라" 이 항목에서도 남자의 경우처럼 예리한 지적을 하지 않습니다. 남자의 경우는 "더러운 이익을 탐하지 아니하며"라고 분명히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모든 일에 충성되다"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문자 그대로 모든 일에 충성되어야 겠습니다만 우선 남집사와 평행을 이루는 측면을 먼저 고찰해 봅시다. 여성도에게 기대할 경제적인 측면에서 충성된다는 것은 어떤 것을 의미할까요? 남자가 부정직한 수입을 탐하는 일은 여자와 전혀 무관하지 않습니다. 적어도 한 남편의 사회활동에 상당한 영향을 아내가 끼친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할 것입니다. 만약 아내가 남편의 월급을 생각하지 않고 지출을 한다면 남편은 그 적자를 메꾸기 위해 무슨 돈이든지 호주머니에 넣을 유혹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각 가정의 살림 사는 일을 맡아 있는 여성도들은 경제운용에 있어서 성실해야 한다는 것은 누구나 수긍할 것입니다.
남집사, 여권사 할것없이 공동체의 직분을 맡아 섬기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그 삶이 존경을 받아야 하는 것은 기본입니다. 비록 여자들의 경우에는 더 이상의 규정이 언급되지 않았다고 영적인 자격이나 가정적인 자격이 무시되어도 좋다고 결론 내리는 것은 성급하고 어리석은 일입니다. 다만 앞에서 언급되었기에 중복을 피하는 것 뿐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형상대로 지음받은 우리가, 자기 피로 사신 교회가 그 정도는 상상력이 있다고 여기십니다. 앞에서 말하면 뒤에서는 잘 알아서 적용할 수 있지 똑 같은 말을 또 한 번 일러 줄 이유는 없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이와같이 여자들도"라는 표현 속에는 여자들도 역시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라야 할찌니라"는 규정도 포함됩니다. 예수님의 보배로운 피로서 우리의 양심이 새로워지고 거기에 믿음의 비밀을 간직해야 함은 남자 집사 뿐만 아니라 여자 권사도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권사직 역시 신앙공동체의 직분이므로 믿음의 비밀을 맛본 사람이 맡아야 함은 너무 당연합니다. 믿음의 체험을 가진 사람이라야 믿음의 권속들을 돌볼 수 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야 주님의 백성을 사랑으로 돌볼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이와같이 여자들도"라는 표현 속에는 앞의 말씀에 남집사에게 물었던 가정적인 규정도 내포되어 있습니다. 다만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대신 "한 남편의 아내가 되며"로 번역을 해야 할 필요는 있습니다. 한 남편의 좋은 아내가 되는 것은 어떤 것을 구체적으로 의미합니까? 조금 상세하게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남편은 너그러워야 한다면 여성은 아름다워야 합니다. 자기 자신과 가정을 아름답게 꾸밀줄 아는 사람이 좋은 아내입니다. 모든 남편이 자기 아내에게 기대하는 것 하나는 맛있는 식탁일 것입니다. 거기서 가정의 화목이 이루어지고 하루의 피로를 풀고 새날을 위한 재충전이 되어야 합니다. 아내가 자기보다 말을 잘하는 것을 우리 남편들은 대체로 인정하지만 아내 혼자서 말하는 것을 좋아하는 남편은 의외로 적습니다. 식탁이 가족간에 대화할 수 있는 자리가 되어야지 남북대화처럼 일방적인 선전보다 대화를 사람들은 누구나 선호합니다.
단둘이 있을 때나 남들 앞에서나 남편을 인정하고 세워주십시오. 중요한 집안 일에는 남편의 결정을 따르는 아내가 아름답습니다. 목사인 제가 보아도 아름다운데 하늘의 하나님이 보시면 얼마나 아름답게 보시겠습니까? 그러나 살다보면 남편에게 할 말이 있거나 따질 일이 없잖아 있습니다. 그럴 때는 남편의 기분을 참작하십시오. 또한 남자들은 문제가 생기면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괜히 여러분과의 관계에서 문제가 생겼다고 넘겨 짚지 말고 아내와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다만 그가 살아 나가는 일에 있어서 문제가 생겼올 뿐입니다. 그럴때는 말하지 않습니다. 올여름에는 좋은 아내가 되고 싶으면 "남자들은 무슨 생각을 하며 사는가?"라는 책을 읽고 남편 연구를 좀 하십시오. 서로를 위해서는 이번 여름휴가 필독서로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를 추천합니다.
이제 직분자를 살펴보는 설교의 마지막 결론으로 13절을 살펴봅시다. "집사의 직분을 잘 한 자들은 아름다운 지위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에 큰 담력을 얻느니라" 형식은 집사의 직분을 잘 한자들에게 주는 상급 보상처럼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우리가 상상력을 발휘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생각할 때 집사직분만 잘 한 자들에게 이런 약속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모든 직분자들을 향해서 적용할 수 있다고 봅니다. 감독 즉 장로의 직분을 잘 한 자들도, 그리고 권사의 직분을 잘 한 자들도 기대할 수 있는 복된 약속입니다. 말하자면 모든 "직분을 잘 한 자들은 아름다운 지위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에 큰 담력을 얻느니라"고 읽어도 무리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이 약속의 의미를 살펴봅시다. 두 가지 약속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우선 "아름다운 지위"에 대한 약속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에 큰 담력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그 의미를 하나씩 살펴봅시다. 첫 번째의 약속은 무슨 뜻입니까? 집사의 직분을 잘 한 자들은 아름다운 지위를 얻는다는 말은 오해되기 쉽습니다. 마치 안수 집사로서 직분을 잘 감당하면 더 아름다운 지위인 감독, 장로의 직분을 얻는다는 말로 오해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래 의미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 말은 바른 의미는 직분을 잘 감당한 사람들은 그 직분에 어울리는 인정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존경할 만한 사람들을 집사의 직분에 뽑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직분에 충성하면 모든 성도들의 인정과 존경을 받게 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말하자면 장로라도 다 같은 장로가 아닙니다. 집사라고 다 같은 집사가 아닙니다. 권사라고 다같은 권사로 인정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존경받는 직분자들은 따로 있습니다. 성도들이 신앙의 지도를 받기를 원하고 문제를 함께 나누고 함께 기도를 드리고 싶은 장로, 집사, 권사는 따로 있다는 말씀입니다. 주보에 이름이 나란히 기재된다고 꼭같은 직분자라고 아무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요람에 이름이 함께 기재되어 있고 사진이 실렸다고 성도들이 동일하게 여기지는 않습니다.
출처/정근두 목사 설교자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