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 천국도 안 들어가는 사람들  (마 16:13 -20)


뉴스엔죠이라는 인터넷 신문이 있습니다. 최근에 자살에 대한 주제를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교회가 자살을 막아야 한다는 큰 화두를 던졌지만 과연 오늘날의 교회가 그와 같은 일을 감당할 수 있을까에 대해서는 상당히 비판적이고 비관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일 교회가 요즘 일종의 신드롬을 일으키다시피하고 있는 자살을 막으려면 자살하게 만드는 사회적인 구조에 관심을 가져야만 한다는 입장에서 신문을 만들었다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그와 같은 생각과 주장은 진보적인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생각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저는 저들의 생각과 주장에 상당히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정말 교회가 사람들로 하여금 끊임없이 절망하게 하고 낙심하게 하고 도저히 살아갈 수 없게 만드는 사회적인 구조에 관심을 가지고 그것을 바꾸고 사람들에게 살아갈 수 있는 희망을 주는 구조로 만들어가야만 한다는데 동의합니다. 저는 그것이 교회와 교인들의 중요한 사명 중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는 그와 같은 진보주의자들의 생각과 주장에 몇 가지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싶습니다. 그것은 첫째, 자살에 원인이 과연 사회적인 구조에만 있는 것인가? 둘째, 사회적인 구조는 과연 바꿀 수 있는 것인가? 셋째, 사회적인 구조가 바뀌면 자살의 문제는 과연 해결이 될 수 있을 것인가?

그와 같은 질문에 대한 저의 생각을 먼저 이야기한다면 저는 자살에 대한 매우 중요한 원인과 책임이 자살을 할 수 밖에 없도록 만드는 사회적인 구조에 있다고 생각하고 인정하지만 그것만이 자살에 대한 책임과 원인의 전부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그것이 가장 큰 이유와 원인이라고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때문에 사회적인 구조가 바뀐다고 하여도 여전히 자살하는 사람은 생겨날 것이라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뿐만아니라 저는 사회적인 구조가 과연 모든 사람이 자살을 하지 않을 수 있으리만큼 좋고 완벽하고 건강한 구조로 바뀔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도 부정적입니다. 실제로 불가능해 보이는 것에서 문제의 해결을 찾으려고 하는 것은 썩 지혜로운처럼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와 같은 진보주의자들은 끊임없이 잘못된 사회의 구조를 만들고 있는 사람들(타인)을 비판하고 저들에게 책임을 묻기는 하겠지만 거의 틀림없이 결국 그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저는 세상이 바뀌어서 사람들이 자살하지 않게 되리라는 생각을 매우 낭만적인 생각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기독교는 모든 사람이 살기 좋은 세상, 다시 말해서 그와 같은 사회구조를 만드는 일에 대하여 말씀합니다. 강하고 부한 자들에 대한 약하고 가난한 자들에 대한 책임을 말씀하는 것이 바로 그와 같은 일 중에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는 그것이 우리 기독교는 그것으로 세상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기독교 즉 하나님의 문제 해결 방식은 사회적이라기 보다는 개인적인 것 같습니다.

예레미야 12장에 보면 하나님에 대한 예레미야의 질문이 나옵니다. 그의 질문은 우리들이 살아가면서 하나님께 대하여 누구나 한번 쯤은 드려보게 되는 아주 보편적인 질문이었습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이야기해서 왜 하나님의 뜻대로 의롭게 살려고 하는자에게 고난이 주어지며, 악을 행하며 하나님을 거스리고 사는 사람들은 오히려 형통하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예레미야의 생각에는 그 반대가 되어야 할 터인데 그와 같은 일이 일어나는 것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들도 종종 그와 같은 생각을 할 때가 있고 부끄러운 일이지만 그럴 때 우리는 과연 하나님이 계시는 것일까에 대하여 의심까지 할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와 같은 이해할 수 없는 현상 때문에 세상에 하나님은 계시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단정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와 같은 예레미야의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은 질문으로 주어졌습니다. ‘네가 보행자와 함께 달려도 피곤하면 어찌 능히 말과 경주하겠느냐? 네가 평안한 땅에서는 무사하려니와 요단의 창일한 중에서는 어찌하겠느냐?’ 이와 같은 하나님의 질문에서 우리는 분명한 하나님의 답을 읽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포함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어떠한 구조와 환경 속에서도,다시 말해서 말과 경주하는 불합리한 상황과 요단강이 범람하고 창일하는 극한적인 상황과 구조 속에서도 능히 이겨 살 수 있는 사람이 되게하기 위하여 연단시키시고 훈련시키신다는 것을 그 질문을 통한 답변 속에서 찾아 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철학과 문제 해결 방식을 찾아 낼 수 있습니다. 저는 그것이 바로 우리 기독교의 철학과 신학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을 바꾸어서 삶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을 훈련하고 연단함으로 어떤 구조와 환경 속에서도 능히 자신의 생명과 삶을 지켜 살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함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생각이고 우리 기독교의 철학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종말적으로 이 땅에 임하기 전 까지 세상은 궁극적으로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변하지 않을 세상의 변화를 통하여 사람들의 자살을 막겠다는 생각은 낭만적인 생각일 뿐 실현 불가능한 생각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종말적으로 이 땅에 하나님에 의하여 이루어지기 전 까지는 우리들은 사회적인 구조 변화에서 삶의 희망을 찾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사회적 구조 속에서도, 다시 말해서 말과 경주하는 말도 안 되는 불합리한 구조와 상황 그리고 요단의 창일함과 같은 극한적인 구조와 상황 속에서도 능히 살아남는 힘과 능력을 갖게 하는 것이 오히려 실현 가능한 생각과 철학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때 예수님께 대하여 아주 다급한 질문을 드립니다.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이 어느 때 입니까?’ 저는 이와 같은 제자들의 질문 속에서 보편적인 진보주의자들의 생각과 철학을 읽습니다. 저들도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이라고 하는 사회적 구조의 변화를 통해서 삶의 중요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였던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철학과 생각은 예수님과 함께 3년을 제자로 따라다녔음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바뀌지 않는 강력한 것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냉정하고 단호했습니다. ‘그것은 너희의 알 바 아니다’가 예수님의 대답이셨습니다. 그 말씀 속에는 ‘그것이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것으로 삶의 모든 문제가 해결 되는 것이 아니다’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우리들은 어떤 면에서 볼 때 위에서 언급한 진보주의적인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모든 문제를 사회적인 구조의 문제로 보고 사회적인 구조가 바뀌면 삶이 달라질 것이라는 낭만적인 그러나 제가 보기에는 다분히 인간적이고 비신앙적인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끊임없이 예수님과 하나님에게 이스라엘 나라는 언제 회복이 되느냐고 묻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스스로에게 진지하게 물어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과연 그것이 옳은 생각인가 생각해 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은 중요하고, 또 그것을 위하여 노력하고 힘써야 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과연 거기에 우리의 궁극적인 희망이 있는가?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을 통하여 삶의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것이 과연 신앙이 될 수 있는가? 그와 같은 정도와 수준의 생각은 하나님 없는 일반인들도 얼마든지 사회학적으로 생각할 수 있고 접근할 수 있는 수준과 방법이 아닐까?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이 어느 때입니까?’라고 묻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그 때와 시기는 너희 알 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내 증인이 된다는 말씀은 제자들이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의 증인이 될 것이라는 의미하는 것이고 그 말씀 속에는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과 상관없이도 얼마든지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과 너희의 마음 속에 회복될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하나님 나라의 회복을 위하여 오셨습니다. 제자들과 사람들의 생각과 같이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을 위하여 오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은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메시아로 알았지만 예수님은 그와 같은 메시아로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이 로마의 정복을 당하여 식민지로 살아가고 있는 때에 이 땅에 오셔서 33년을 사시다가 승천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승천하실 때까지도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지였습니다. 예수님의 승천시까지 사람들과 제자들의 기대와는 달리 이스라엘은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이 회복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승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승천은 예수님의 이 땅에서의 사역 완성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이 땅의 오실 때의 목적인 하나님 나라의 회복을 십자가를 통하여 이루셨습니다. 당신의 몸을 십자가에 못박음으로 단절되었던 하나님과 우리 인간 사이의 담이 무너졌습니다. 천국의 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천국이 침노하는 자의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쉽게 말씀하자면 천국의 문이 이제 열렸으니 누구든지 들어가려고만 하면 언제나 누구나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나라가 회복되면’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사회적인 구조가 바뀌게 되면’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과 ‘사회적인 구조의 변화’를 부정하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것의 한계를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오직 성령이 임하면 ‘혹시 사회적인 구조가 불합리하고 극한적이라고 하여도, 이스라엘 나라가 회복되지 않아 로마의 식민지로서 살아가야만 한다고 하여도 너희들의 마음과 삶 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것이다. 너희들은 땅 끝까지 나와 하나님 나라를 증거할 것이다. 세상이 줄 수 없는, 하나님만이 줄 수 있는 복되고 아름다운 삶의 증인이 될 것이다’라고 예수님은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바른 신앙고백을 하는 베드로에게 천국의 열쇠를 주셨습니다. 그와 같은 신앙고백을 통하여 그날부터 베드로는 이 세상에서도 천국을 사는 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예수를 믿는 목적은 구원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얻고 들어가기 위함입니다. 구원은 믿음으로 얻습니다. 믿으면 누구나 다 구원을 얻습니다. 믿는다고 누구나 다 부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믿는다고 누구나 다 출세를 하는 것도 아닙니다. 믿는다고 누구나 다 건강해 지는 것은 아닙니다. 믿는다고 누구나 다 세상적으로 성공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믿으면 누구나 다 구원을 얻습니다.

부자가 되는 것도 중요하고, 출세를 하고 성공을 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리고 건강해 지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것은 구원을 얻어 천국을 사는 것과는 비교도 될 수 없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구원에 욕심이 없습니다. 욕심이 없는 것이 아니라 아예 관심이 없는 것 같아 보입니다.

사람들은 부자가 되고 출세를 하고 성공을 하고 건강하게 살아야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부자가 아니고 출세를 하지 못했고 성공하지 못했기 때문에 행복하지 못한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열심히 기도하고 노력하여서 부자가 되고 출세를 하고 세상적으로 성공을 하여야만 드디어 행복해 지는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다릅니다. 행복과 천국은 그렇게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천국은 그와 같은 세상적이고 사회적인 것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달려 있는 것이락 말씀하십니다. 믿음에 달려 있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천국은 돈으로 가는 나라가 아닙니다. 지식으로 가는 나라가 아닙니다. 지위로 가는 나라가 아닙니다. 천국은 믿음으로 가는 나라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성전 문 앞에서 구걸하는 앉은뱅이 걸인에게 ‘내게 은과 금은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은과 금만을 구하며 사는 성전 문 앞의 걸인과 같습니다. 그러나 그 앉은뱅이 걸인을 걷게 하였던 것은 은과 금이 아니었습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은과 금이 없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다지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물론 있으면 좋은 것이지만 그것이 있다고 우리가 일어나 걸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에게 은과 금은 없을 수 있지만 그것과 비교할 수 없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있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일어나 걸을 수 있습니다. 일어나 뛰기도 하고 걷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할 천국과 구원의 기쁨이 있지만 우리는 여전히 앉아 있습니다. 그리고 바보같이 은과 금이 없어서 일어나지 못한다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이스라엘 나라가 회복 되어야 모든 삶의 문제가 해결된다고 보았던 제자들의 생각은 옳지 않았습니다. 모든 삶의 문제를 사회적 구조의 문제로 보는 진보주의자들의 생각은 옳지 않습니다. 은과 금이 없어서 행복하지 못하다라고 생각하는 여러분들의 생각 또한 옳지 않습니다. 은과 금이 생기게 되면 그때 행복할 것이다. 은과 금이 풍족하게 되면 내 삶이 천국과 같은 것이라는 어리석은 생각을 버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천국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열려졌습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조로 인정하고 영접하고, 그의 말씀으로, 그의 정신으로, 그의 영으로 길을 삼고 법을 삼고 식을 삼아 살아간다면 우리의 삶은 그대로 천국이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천국을 사십시다. 사랑하는 여러분 천국에 들어가십시다. 사랑하는 여러분 천국을 누리십시다. 기쁘게 사십시다. 사랑하며 사십시다. 감사하며 사십시다. 모든 염려와 근심을 주께 맡기며 평안하게 사십시다. 찬송하며 사십시다.

세상 바뀌기를 기다리지 마세요. 세상이 바뀐다면 좋은 것이지만 세상이 꼭 바뀌어야만 비로서 행복해 지는 것은 아니랍니다. 세상은 높아도 좋고 거칠어도 좋고 초막이어도 좋고 궁궐이어도 좋습니다. 예수님을 주로 모시고 그의 뜻을 좇아 성령 충만한 삶을 살면 그 어디나 하늘 나라가 되는 것이랍니다.

찌푸린 얼굴을 펴세요. 처진 어깨 올리세요. 눌린 마음과 가슴을 펴세요. 생각을 바꾸세요. 말과 말투를 바꾸세요. 세상의 근심과 걱정을 버리세요. 하나님을 믿으세요. 그리고 하나님께 맡기세요. 천국은 세상이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십니다. 주시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기다리지 말고 누리세요.

세상을 포기하지는 마세요. 세상 일을 세상 일대로 열심히 하세요. 그러나 세상과 세상의 일을 지배하는 사람이 되지 그것에 지배를 받는 사람이 되지 마세요. 세상이 여러분을 지배하지 않도록 그것을 필요 이상으로, 하나님처럼 신뢰하지 마세요. 의지하지 마세요. 세상으로부터 자유하세요.

세상에 때문에 울고 웃는 삶을 오늘로 끝내세요. 세상에 때문에 울고 웃는 삶을 살면 웃음은 점점 없어지게 되고 울음만 남게 됩니다. 삶의 소망을 하나님께 두세요. 하나님 때문에 울고 웃는 사람이 되세요. 하나님 때문에 울고 웃다보면 울음은 없어지게 되고 웃음만 남게 됩니다. 항상 기뻐하며 살 수 있게 됩니다.

오늘로서 천국의 열쇠라는 제목으로 하는 설교를 끝내려고 합니다. 베드로는 그 귀한 천국의 열쇠를 돈으로 사지 않았습니다. 공부해서 얻지 않았습니다. 출세해서 따지 않았습니다. 세상이 좋아져서 세상이 베드로에게 준것도 아니었습니다. 베드로의 천국은 믿음으로 값없이 얻었습니다.

오늘로서 천국의 열쇠 설교는 끝입니다. 오늘부터 그 열쇠로 천국을 열고 이 땅에서도 천국을 살고 죽어서도 천국엘 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오늘은 기도 대신에 찬송을 불렀으면 좋겠습니다. 찬송가 427장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다 같이 부르시겠습니다.

내가 매일 기쁘게 순례의 길 행함은 주의 팔이 나를 안보함이요
내가 주의 큰 복을 받는 참된 비결은 주의 영이 함께 함이라
성령이 계시네 할렐루야 함께 하시네
좁은 길을 걸으며 밤낮 기뻐하는 것 주의 영이 함께 함이라

전에 죄에 빠져서 평안함이 없을 때 예수 십자가의 공로 힘입어
그 발 아래 엎드려 참된 평화 얻음은 주의 영이 함께 함이라
성령이 계시네 할렐루야 함께 계시네
좁은 길을 걸으며 밤낮 기뻐하는 것 주의 영이 함께 함이라

나와 동행하시고 모든 염려아시니 나는 숲의 새와 같이 기쁘다
내가 기쁜 맘으로 주의 뜻을 행함은 주의 영이 함께 함이라
성령이 계시네 할렐루야 함께 계시네
좁은 길을 걸으며 밤낮 기뻐하는 것 주의 영이 함께 함이라

세상 모든 정욕과 나의 모든 욕망은 십자가에 이미 못을 박았네
어둔 밤이 지나고 무거운 짐 벗으니 주의 영이 함께 함이라
성령이 계시네 할렐루야 함께 계시네
좁은 길을 걸으며 밤낮 기뻐하는 것 주의 영이 함께 함이라. 아멘.


출처/김동호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