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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해주시는 축복 (욥42:12-17)
여호와께서 욥의 모년에 복을 주사 처음 복보다 더 하게하시니 그가 양 일만 사천과 약대 육천과 소 일천 겨리와 암나귀 일천을 두었고 또 아들 일곱과 딸 셋을 낳았으며 그가 첫째 딸은 여미마라 이름하였고 둘째 딸은 긋시아라 이름하였고 셋째 딸은 게렌합북이라 이름하였으며 전국중에 욥의 딸들처럼 아리따운 여자가 없었더라 그 아비가 그들에게 그 오라비처럼 산업을 주었더라 그 후에 욥이 일백 사십 년을 살며 아들과 손자 사대를 보았고 나이 늙고 기한이 차서 죽었더라.-욥기 42 : 12-17
욥은 동방의 부자였습니다. 즉 세계적인 부자였습니다. 욥기 1 : 2 이하에 "그 소생은 남자가 일곱이요 여자가 셋이며 그 소유물은 양이 칠천이요 약대가 삼천이요 소가 오백 겨리요 암나귀가 오백이며 종도 많이 있었으니 이 사람은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큰 자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한때 고난을 당하여 모든 재산을 잃었으나 말년에 가서는 처음보다 더 큰 축복을 받았습니다. 오늘 본문 12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욥에게 복을 주시되 처음보다도 더해 주셨다고 했습니다. 욥은 하나님께서 더해 주시는 복을 받았습니다.
오늘 우리의 현실은 아주 심각한 위기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특히 경제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우리 나라는 지금 사상 최고의 적자를 가져왔다고 합니다. 이런 때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더해 주시는 축복을 받아야 하겠습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복을 좋아합니다. 그래서인지 '복'이라는 말을 많이 씁니다. 밥상에도 복, 문짝에도 복, 그릇에도 복, 심지어는 옷에도 복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정도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복이 들어오라고 복조리를 걸어 놓기도 합니다. 그런다고 해서 복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복 받을 일을 해야 복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면 복이 무엇입니까? 복은 기쁘고 좋은 것입니다. 유쾌하고 즐겁고 행복한 것입니다. 복 받은 사람이 불안하고 슬프다면 그것은 복 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남의 것을 빼앗아 가진 것은 복 받은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복은 진실하고 정직하고 선하고 성실한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복은 번성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1 : 28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축복을 모두 빼앗겨 버렸습니다. 인간은 범죄하므로 오히려 마귀에게 다스림을 받게 되었고 정복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인간은 이 땅에서 번성했지만 그 번성이 마귀에 의해서 되어졌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창세기 6 : 1에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5절에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죄를 짓는 것과 자기를 중심으로 한 번성을 싫어했습니다. 가라지가 번성하는 것보다 곡석이 번성하기를 원하는 것이 농부의 심정입니다. 원하는 곡식은 자라지 않고 원치 않는 가라지만 무성하다면 농부는 한심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이 땅에 선이 번성하고 착하고 의로운 것이 번성하기를 원하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악하고 불의한 것이 더 번성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곡식이 자라는 틈에 가라지가 번성하면 뽑아 버리듯 하나님께서도 악이 번성하면 뽑아 버리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을 시각적으로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외모나 외형이 번듯한 것을 가지고 복 받았다고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오래가지 않습니다. 시편 37 : 1이하에 "행악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를 투기하지 말지어다 저희는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볼것이며 푸른 채소같이 쇠잔할 것임이로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다만 성실하게 살 뿐입니다. 3절에 "여호와를 의뢰하여 선을 행하라 땅에 거하여 그의 성실로 식물을 삼을지어다"라고 했고, 4절에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고 했습니다. 성실하면 하나님께서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십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더해 주시는 복을 받아야 하겠습니다.
여러분! 무엇이 복입니까? 복이 무엇인지 알아야 받아 누릴 것이 아닙니까?
1. 하나님이 복이시다
동방의 부자인 욥이 한 순간에 알거지가 되었습니다. 그 많던 재산, 자녀들, 심지어는 아내와 자신의 건강까지 잃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그가 고백하기를 1 : 21에 "주신 자도 여호와시오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라"고 했습니다. 13 : 1 이하에 "나의 눈이 이것을 다 보았고 나의 귀가 이것을 듣고 통달하였느니라 너희 아는 것을 나도 아노니 너희만 못한 내가 아니니라 참으로 나는 전능자에게 말씀하려 한다"고 했습니다. 이것을 보면 욥의 머리 속에는 오직 하나님만 있습니다. 그는 이 땅의 모든 부귀영화가 하나님의 손 안에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가 소유했던 모든 것을 잃었어도 불평하거나 원망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그가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졌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복입니까? 하나님이 복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땅의 모든 것을 빼앗긴다 해도 하나님만은 빼앗기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을 말할 때 "복 되신 하나님"이란 표현을 했습니다. 디모데전서 1 : 11에 "이 교훈은 내게 맡기신 바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을 좇음이니라"고 했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복되시다"고 했고, 계속해서 6 : 15에 "기약이 이르면 하나님이 그의 나타나심을 보이시리니 하나님은 복되시고 홀로 한 분이신 능하신 자이며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시라고 했습니다. 시편 기자도 16 : 2에서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고 했습니다. 왜 하나님이 복입니까? 1절에, 하나님께서 나를 보호하시기 때문입니다. 누가 나를 보호해 준다는 것은 복입니다. 어떤 사람이나 권력이나 힘이 보호해 줘도 든든합니다. 그런데 이런 것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일시적이고 순간적인 보호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복인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복입니까? 하나님은 복의 근원이요 원천이요 출처이기 때문입니다. 이 하나님을 믿으면 복의 근원이 됩니다. 창세기 12 : 1,2 에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고 했습니다. 복의 근원 되시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불러 복의 근원이 되도록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가까이 함이 복입니다. 시편 73 : 28에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가까이 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야고보서 4 : 8에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가까이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까이 하십니다. 요한복음 15 : 1에 의하면, 예수께서 우리를 가까이 하는 것을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로 표현했습니다. 또한 바울은 고린도전서 12 : 27에 우리를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가까이한다는 것은 포도나무의 가지나 몸의 지체와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합심하는 것이요 협력하는 것이요 합세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복인 것입니다.
2. 예배가 복이다
우리가 예배에 참석한다는 것은 축복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나 예배에 참석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배에 참석하려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지 않으면 하나님께 예배할 수 없습니다. 요한복음 15 : 16에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자만이 하나님과 관계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다는 것이 복입니다. 그것은 곧 택함을 받았다는 것이요 하나님과 관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왜 예배가 복입니까? 예배는 제사입니다. 레위기 1장 이하를 보면, 제사에 관한 말씀이 나옵니다. 이 제사는 속죄와 화목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로부터 죄 용서함을 받고 화목을 이루는 것이 예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 예배한다는 것은 큰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배에 두 가지 표현이 있습니다. 하나는 예배를 본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예배를 드린다는 것입니다. 예배는 보는 것이 아니고 드리는 것입니다. 몸을 드리고, 마음을 드리고, 시간도 드리며, 물질도 드리고 아니 내 전부를 드리는 것입니다. 로마서 12 : 1 이하에서 바울은 예배에 대해서 아주 잘 표현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이 말씀을 보면 몸을 드리라고 했습니다. 몸을 드리는 것이 영적인 예배요 진정한 예배라는 것입니다. 예배는 어느 정해진 시간에 참석했다가 가는 것이 아니라 삶 속에서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어떤 모습이든지 열심으로 삶을 통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곧 예배입니다. 로마서 12 : 6 이하에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혹 권위하는 자면 권위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고 했는데 이것이 곧 예배인 것입니다. 그리고 11절에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고 했는데, 몸을 드리고, 시간을 드리며, 물질을 드려 열심으로 주를 섬기는 것이 예배입니다.
오늘날 몸으로 드리는 예배가 잘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헌신이 없습니다. 저는 얼마 전에 돈암동에 있는 모교회에서 부흥회를 인도했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의 목사님과 대화하는 중에 그 목사님이 탄식하신 내용이 있습니다. 그것은 오늘 교인들이 헌신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교회 일을 하는데 있어서도 자기 몸을 드려서 일하려 하지 않고 크든 작든 돈을 주고 사람을 사서 일을 하자고 한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몸을 드려 헌신하고 봉사하는 것을 원하십니다.
여러분! 진정한 예배는 몸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활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배 속에 찾아오십니다. 우리가 몸으로 하나님께 예배할 때 하나님의 임재를 더 뜨겁게 느낄 수 있고,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배는 축복인 것입니다.
3. 기도가 복이다
기도가 왜 복입니까? 사람은 참는 데 한계가 있습니다. 담대한 것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웃는 것도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는 한계를 극복하게 합니다. 그래서 기도는 우리에게 소망을 주고 용기를 줍니다. 기도는 담대하게 하고 인내하게 합니다. 그래서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은 축복입니다.
왜 기도가 복입니까? 우리가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가까이하십니다. 신명기 4 : 7에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가 그에게 기도할 때마다 우리에게 가까이하신다"고 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연합을 이룹니다. 하나님과 연합한 자는 날마다 승리합니다. 그래서 기도가 복입니다.
기도가 왜 복입니까? 기도하면 계산이 되지 않기 때문에 복입니다. 돈암동 어느 교회에서 부흥회를 인도할 때 처음부터 말씀을 강력하게 증거했더니 그 교회 성도들이 하는 말이 제 나이가 마흔 다섯 정도로 보인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다음 시간에 제게 며느리가 셋이고, 손자 손녀가 셋이라고 했더니 예배가 끝난 다음에 문의가 들어오는 것이었습니다. 그 내용인즉 계산이 안된다는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은혜로 건강합니다. 이 순간까지 하나님께서 건강을 지켜 주셨습니다. 지금까지 건강을 지킬 수 있었던 비결이 있다면 그것을 주야로 기도하며 주의 일에 힘쓴 것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기도하는 사람은 기도가 계산이 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은 계산되지 않는 분이시기 때문에 기도하는 사람도 계산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기도는 시간을 단축합니다. 기도는 이해할 수 없는 역사를 이루기도 합니다. 기도하는 자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기도가 축복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기도해야 합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5 : 17에서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항상 기도할 때 계산이 되지 않는 축복이 임할 줄 믿습니다.
4.감사가 복이다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과의 감사가 다릅니다. 믿지 않는 사람은 도움을 준 상대방에게만 감사합니다. 그러나 믿는 사람은 사람에게만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서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믿는 사람은 언제나 하나님을 먼저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의 감사의 깊이와 의미와 뜻이 다른 것입니다.
시편 136편에는 하나님께서 감사라는 말이 스물 여섯 번이 나옵니다. 왜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까? 하나님은 모든 것 위에 뛰어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하나님께 감사하면 더해 주시는 축복을 받게 됩니다. 욥은 말할 수 없는 고난과 역경 속에서 모든 것 위에 뛰어나신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든지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그 결과 처음보다 배가 되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오직 하나님이 복인 줄 알고 언제나 하나님을 의지하고 섬기는 성도가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더해 주시는 축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말할 수 없는 고난이 닥쳐와도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하면 하나님의 축복을 받습니다. 욥은 큰 고통 속에서 불평하거나 원망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기다렸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의 뜻을 깨달으려고 했습니다. 결국 복 되신 하나님만을 바라보았을 때에 '더해 주시는 축복' 받은 것입니다. 특별히 경제 난국의 현실 속에 하나님의 더해 주시는 축복을 받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출처/김충기 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