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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가 가져다주는 축복 (창4:1-9)
우리가 늘 식탁 앞에 앉듯 우리는 아마도 예배의 홍수 속에 살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항상 아름다운 예배가 성공적인 예배였으면 하는 마음에서 예배가 가져다주는 축복에 대하여 말씀 드리겠습니다.
선악과를 먹고 하나님과 단절된 채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아담에게 하나님은 예배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만나는 하나님이 친히 주신 방법입니다. 하나님은 예배를 통해서 너와 내가 만나자는 것입니다. 예배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임을 확인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가인과 아벨의 제사속에서 보여 지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배는 어떠했습니까?
하나님은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시고 아벨의 제사만 받으셨으니 하나님은 예배라고 모두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받지 않으시는 예배도 있다 했습니다. 히브리서에서는 아벨의 제사는 믿음으로 더 나은 제사를 드렸다 했습니다. 믿음으로 주님의 은혜를 입고 드리는 제사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예배 속에서 그냥 한 시간 앉아있는 것이 아니라 더 나은 제사를 드리고자 하는 거룩한 소원이 있어야 합니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아벨의 제사를 통해 아벨을 받으셨다는 것이요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실 때 가인을 받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제사는 나를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배를 원하십니다. 드려지는 것을 원하십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의 기본은 나입니다. 내가 드려지지 않는 예배는 진정한 예배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나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원하시니 이삭을 통해 아브라함의 헌신을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드리는 봉사나 헌신이라는 것에서 나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예배의 중심이 하나님이어야 한다는 것은 우리는 들었습니다. 살아있는 예배를 위해서는 그 삶이 살아 있어야 하니 하나님은 우리에게 예배 적 삶을 원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너희가 제단에 예물을 드리다가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이 나거든 그 형제와 화해하고 드리라”고 성경은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에게 살아있는 예배를 원하십니다. 이제 예배가 가져다주는 축복을 살피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겠습니다.
첫째: 예배가 가져다주는 축복은 내가 변한다는 것입니다.
죄인 된 우리를 예배가운데 있어지는 은혜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다는 것은 우리 자신의 정체성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영적인 존재인 나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잃어버렸던 나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원하시는 분입니다. 자격이나 역할을 보지 않습니다. 예배가운데 있어지는 하나님의 임재의 목적도 바로 나와의 관계회복입니다. 또한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나로 다듬어지는 것입니다. 이를 우리는 변화라 합니다. 변화가 없는 신앙은 문제가 있습니다. 예배를 통해 나를 발견하게 하고 발견된 나를 변화시키니 가정이 그리고 심령이 변화하게 되는 것입니다. 참된 예배 속에서 내가 변하고 있음을 우리는 느껴야 합니다. 참된 예배는 은혜가 있고 고백이 있고 죄 사함이라는 사죄의 은총이 있어야 합니다. 가인이 드린 예배의 실패와 결과는 이렇습니다. 가인의 예배의 특징은 심히 분노함가운데 있었습니다. 화가 나도 보통 난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화를 낸다는 것에 이미 가인에게는 은혜가 없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분을 내는 사람은 자기의 허물 그리고 자기 죄를 보지 못합니다. 자기의 허물과 죄를 보지 못하니 자신을 발견하지 못하는 예배의 본질을 놓치고 형식상 드리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또 가인은 안색이 변했다고 합니다. 자신을 극복하지 못하거나 한계를 뛰어 넘지 못한 예배는 하나님의 임재를 맛볼 수가 없습니다. 예배가운데 자신의 한계에 대한 솔직한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둘째: 예배가 가져다주는 두 번째 축복은 죄를 이기는 힘을 공급받는다는 것입니다.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린다고 말씀합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최고의 선은 도적적인 기준이나 윤리적으로 정해진 관례나 관습을 잘 이행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최고의 선은 예배입니다. 이 예배를 통해 내 자신이 드려지고 죄를 이기는 것입니다. 선을 행치 아니하면 예배를 실패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배를 실패하는 것은 선을 행치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배가운데 하나님의 은혜를 입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선을 입지 못하는 것이 됩니다. 선을 행치 못하면 죄가 문 앞에 엎드린다 하니 이는 맹수가 먹이를 노리듯 예배하는 우리를 사단을 노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화가 나고 안색이 변한 가인에게 지금 죄가 문에 엎드려 있다가 삼키려 한다는 것입니다. 죄는 마치 야수와 같아서 문에 엎드리고 있다가 나오면 나를 삼켜버리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제일 먼저 기다리는 것은 죄입니다. 은혜가 떨어져 보십시오. 죄가 제일 먼저 기다립니다. 출세를 하거나 재물이 많다 해도 예배의 성공자가 아니면 죄 짓는 데 사용되어질 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나를 덮고 하나님의 은혜를 입으면 누군가를 덮어주려 하는 특성도 이에 비롯됩니다.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려야 한다 말씀합니다.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니’ 어느 누구하나 죄에 세상에 길들여져 있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를 다스리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죄를 이기라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어도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면 이는 죄에 대해 속수무책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배에서 자신을 발견함으로 연약함과 죄의 문제를 은혜로 해결하고 예배가운데 우리는 죄를 이기는 힘을 공급 받아야 합니다.
셋째: 예배가 가져다주는 세 번째 축복은 하나님의 소원을 우리에게 심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어도 하나님의 소원이 없으면 내 생각만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배 속에서 하나님의 원하심을 간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소원을 담아야 합니다. 죄의 소원을 물리치고 하나님의 소원을 심어야 합니다. 빌2:13절에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소원이 우리에게 있어야 예배 속에서 하나님의 마음과 예수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어 간직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 하면서 내 소원에만 집착하고 있다면 이는 잘못되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의 원하심에 반응하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 안에 심으신 하나님의 소원과 기대가 있기에 포기하는 삶은 절대 있어서도 안 됩니다.
결론:
예배의 승리자가 세상을 이기고 죄를 이기게 합니다. 학교는 세상을 사는 법을 가르치나 교회는 세상을 이기는 법을 가르칩니다. 세상이 감당 못하는 존재들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무에게나 예배를 원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분명 예배를 통해 나를 원하시고 예배를 통하여 죄를 이기고 하나님의 소원을 간직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배에 성공할 때 문 앞에 엎드려 있는 죄를 이길 수 있습니다. 예배 후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소원에 대해 우리는 반응을 해야 합니다. 이 반응에 대해 우리는 결단이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예배 중에 무엇을 결단하고 있습니까?
출처/유재명목사 설교 중에서
우리가 늘 식탁 앞에 앉듯 우리는 아마도 예배의 홍수 속에 살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항상 아름다운 예배가 성공적인 예배였으면 하는 마음에서 예배가 가져다주는 축복에 대하여 말씀 드리겠습니다.
선악과를 먹고 하나님과 단절된 채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아담에게 하나님은 예배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만나는 하나님이 친히 주신 방법입니다. 하나님은 예배를 통해서 너와 내가 만나자는 것입니다. 예배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임을 확인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가인과 아벨의 제사속에서 보여 지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배는 어떠했습니까?
하나님은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시고 아벨의 제사만 받으셨으니 하나님은 예배라고 모두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받지 않으시는 예배도 있다 했습니다. 히브리서에서는 아벨의 제사는 믿음으로 더 나은 제사를 드렸다 했습니다. 믿음으로 주님의 은혜를 입고 드리는 제사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예배 속에서 그냥 한 시간 앉아있는 것이 아니라 더 나은 제사를 드리고자 하는 거룩한 소원이 있어야 합니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아벨의 제사를 통해 아벨을 받으셨다는 것이요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실 때 가인을 받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제사는 나를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배를 원하십니다. 드려지는 것을 원하십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의 기본은 나입니다. 내가 드려지지 않는 예배는 진정한 예배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나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원하시니 이삭을 통해 아브라함의 헌신을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드리는 봉사나 헌신이라는 것에서 나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예배의 중심이 하나님이어야 한다는 것은 우리는 들었습니다. 살아있는 예배를 위해서는 그 삶이 살아 있어야 하니 하나님은 우리에게 예배 적 삶을 원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너희가 제단에 예물을 드리다가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이 나거든 그 형제와 화해하고 드리라”고 성경은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에게 살아있는 예배를 원하십니다. 이제 예배가 가져다주는 축복을 살피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겠습니다.
첫째: 예배가 가져다주는 축복은 내가 변한다는 것입니다.
죄인 된 우리를 예배가운데 있어지는 은혜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다는 것은 우리 자신의 정체성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영적인 존재인 나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잃어버렸던 나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원하시는 분입니다. 자격이나 역할을 보지 않습니다. 예배가운데 있어지는 하나님의 임재의 목적도 바로 나와의 관계회복입니다. 또한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나로 다듬어지는 것입니다. 이를 우리는 변화라 합니다. 변화가 없는 신앙은 문제가 있습니다. 예배를 통해 나를 발견하게 하고 발견된 나를 변화시키니 가정이 그리고 심령이 변화하게 되는 것입니다. 참된 예배 속에서 내가 변하고 있음을 우리는 느껴야 합니다. 참된 예배는 은혜가 있고 고백이 있고 죄 사함이라는 사죄의 은총이 있어야 합니다. 가인이 드린 예배의 실패와 결과는 이렇습니다. 가인의 예배의 특징은 심히 분노함가운데 있었습니다. 화가 나도 보통 난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화를 낸다는 것에 이미 가인에게는 은혜가 없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분을 내는 사람은 자기의 허물 그리고 자기 죄를 보지 못합니다. 자기의 허물과 죄를 보지 못하니 자신을 발견하지 못하는 예배의 본질을 놓치고 형식상 드리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또 가인은 안색이 변했다고 합니다. 자신을 극복하지 못하거나 한계를 뛰어 넘지 못한 예배는 하나님의 임재를 맛볼 수가 없습니다. 예배가운데 자신의 한계에 대한 솔직한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둘째: 예배가 가져다주는 두 번째 축복은 죄를 이기는 힘을 공급받는다는 것입니다.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린다고 말씀합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최고의 선은 도적적인 기준이나 윤리적으로 정해진 관례나 관습을 잘 이행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최고의 선은 예배입니다. 이 예배를 통해 내 자신이 드려지고 죄를 이기는 것입니다. 선을 행치 아니하면 예배를 실패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배를 실패하는 것은 선을 행치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배가운데 하나님의 은혜를 입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선을 입지 못하는 것이 됩니다. 선을 행치 못하면 죄가 문 앞에 엎드린다 하니 이는 맹수가 먹이를 노리듯 예배하는 우리를 사단을 노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화가 나고 안색이 변한 가인에게 지금 죄가 문에 엎드려 있다가 삼키려 한다는 것입니다. 죄는 마치 야수와 같아서 문에 엎드리고 있다가 나오면 나를 삼켜버리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제일 먼저 기다리는 것은 죄입니다. 은혜가 떨어져 보십시오. 죄가 제일 먼저 기다립니다. 출세를 하거나 재물이 많다 해도 예배의 성공자가 아니면 죄 짓는 데 사용되어질 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나를 덮고 하나님의 은혜를 입으면 누군가를 덮어주려 하는 특성도 이에 비롯됩니다.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려야 한다 말씀합니다.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니’ 어느 누구하나 죄에 세상에 길들여져 있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를 다스리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죄를 이기라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어도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면 이는 죄에 대해 속수무책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배에서 자신을 발견함으로 연약함과 죄의 문제를 은혜로 해결하고 예배가운데 우리는 죄를 이기는 힘을 공급 받아야 합니다.
셋째: 예배가 가져다주는 세 번째 축복은 하나님의 소원을 우리에게 심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어도 하나님의 소원이 없으면 내 생각만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배 속에서 하나님의 원하심을 간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소원을 담아야 합니다. 죄의 소원을 물리치고 하나님의 소원을 심어야 합니다. 빌2:13절에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소원이 우리에게 있어야 예배 속에서 하나님의 마음과 예수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어 간직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 하면서 내 소원에만 집착하고 있다면 이는 잘못되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의 원하심에 반응하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 안에 심으신 하나님의 소원과 기대가 있기에 포기하는 삶은 절대 있어서도 안 됩니다.
결론:
예배의 승리자가 세상을 이기고 죄를 이기게 합니다. 학교는 세상을 사는 법을 가르치나 교회는 세상을 이기는 법을 가르칩니다. 세상이 감당 못하는 존재들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무에게나 예배를 원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분명 예배를 통해 나를 원하시고 예배를 통하여 죄를 이기고 하나님의 소원을 간직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배에 성공할 때 문 앞에 엎드려 있는 죄를 이길 수 있습니다. 예배 후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소원에 대해 우리는 반응을 해야 합니다. 이 반응에 대해 우리는 결단이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예배 중에 무엇을 결단하고 있습니까?
출처/유재명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