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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가지 축복 (고후 13:13)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주신 말씀은 예배의 마지막 순서인 목사의 축도 내용입니다. 축도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소개하고 있는 예배 순서 중 하나입니다. 구약 시대 에는 일반적으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일러주신 축도를 사용했습니다. 민6:24-26이 그 내용입니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루터교는 지금도 예배시에 이 축도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약시대에 와서 태반의 교회들은 바울의 축도를 사용합니다. 그것이 본문 말씀의 내용입니다. 축도는 복을 기원하는 단순한 기도만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복을 내려 주실 것을 선언하는 목회자만의 축복 기도입니다. 예배드리고 세상으로 나아가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기 위한 축복의 선언 기도인 것입니다. 그래서 축도는 '주의 이름으로 축원하나이다' 하지 않고 바울의 축도 형식을 따라 통상적으로 '있을 지어다'라고 기도합니다. 축도의 소중함을 깨달은 성도들은 이 축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축복을 더욱 깊이 있게 깨닫고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 축도를 통해서 세상을 이길 수 있는 용기 백배 하는 힘을 얻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미국의 한 믿음 있는 청년의 이야기입니다. 본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축도를 통한 축복을 받고서 더 많은 복을 받기 위하는 마음으로 재빨리 가까운 이웃 교회로 달려가 목사님의 그 축도를 통한 축복을 다시 한 번 동참하는 생활을 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본문의 축도 내용이 무엇입니까? 세 가지 축복으로 되어있습니다.
첫째 주 예수 그리스도 은혜의 축복입니다.
은혜가 무엇입니까? 헬라어로는 '카리스'인데 값으로는 계산할 수 없고, 그래서 무상으로 받는 선물을 뜻합니다. 물론 햇빛, 공기, 물, 삼라만상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요, 은혜입니다. 그러나 본문을 보니까 은혜는 은혜로되 다른 은혜가 아니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라고 했습니다. 여기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라는 말은 바울이 지닌 신약의 근거가 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의 믿음이 예수 그리스도를 바탕해서 시작한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행9장을 보면 그 내용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포박하기 위해서 다메섹으로 가고 있는 중에 갑자기 하늘로부터 눈부신 빛이 비취이더니 부활하신 주님의 음성이 들려졌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바울은 무서워 떨며 "주여 뉘시오니이까" 그 때 다시 들려 오는 음성입니다.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사울은 이렇게 말할 수 없는 신비한 예수님의 은혜체험을 하고서 그의 이름을 바울로 개명했습니다. 그리고는 역사가들은 말합니다. '바울을 싣고 가는 배는 구라파를 싣고 가는 배다'고 한 것입니다. 여기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란 무엇인가. 구체적으로 살필 수 있습니다. 우선 우리 인생들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시는 은혜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하나님께로 나아갈 인생이 없다는 말입니다. 저도 마찬가지 성도님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의 찬송이 있습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이렇게 찬송을 합니다. 그런데 나 같은 죄인을 왜 불러주셨는가? 우리는 대답 대신에 도대체 '인생이 무엇이냐?'를 물어야 합니다. 인생은 저마다 죄인입니다. 사망의 몸입니다. 한 사람도 죄와 허물이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모두가 날 때부터 죄 가운데 출생했고, 죄 가운데 살다가 죽을 수밖에 없는 자들입니다. 다윗은 시51:5에서 고백합니다.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롬3:10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라고 했습니다.
롬3:23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롬6:23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라고 한 것입니다. 왜 주님께서 세상에 오셨습니까?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입니다. 많은 고난을 받으시고 마침내는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이사야는 일찍이 예언했습니다. 사23:5-6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 시키셨도다" 기독교의 진수가 되는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인하여 자신을 내어주시고 또 우리에게 믿음을 주사 그 믿음을 보시고 우리를 의롭다 하시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려고 무덤에서 부활하셨습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값으로 계산할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이 은혜를 어떻게 돈으로 살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선물로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본문이 소개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라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 이 은혜를 깨닫고 감사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내게 은혜를 주신 우리 주님께 나도 헌신을 다짐해야 할 것입니다. ♬늘 울어도 눈물로써 못 갚을 줄 알아 몸밖에 드릴 것 없어 이 몸 바칩니다.♬
찬송하면서 나의 몸을 드릴 수 있다면 어찌 나의 시간, 달란트, 청춘을 드릴 수 없으리요, 나의 모든 것을 주님을 위하여 드려도 아까울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어제 우편물이 하나 왔습니다. 보니까 만원 짜리 하나가 들어있었습니다. 왠 것인가 하여 보니까 주소도 이름도 없이 한 줄 남겼는데 '제가 처음으로 번 돈입니다. 하나님 앞에 드립니다.' 눈시울이 뜨거워 졌습니다. 아마 인생 경험이 많지 않고 직업 전선에 초년생인 어떤 아가씨인 것 같습니다. '이에게 복을 주시옵소서'조용히 기도한 바가 있습니다. 성경에 향유를 담은 옥합을 깨뜨린 여인이 있습니다. 값진 것입니다. 주님을 위한 것이기에 전혀 아깝다 하지 않고 깨뜨려 부었습니다. 그랬더니 방안에 그 향기가 진동할 수가 있었습니다. 믿는 성도들은 내가 처한 자리에서 나의 옥합을 깨뜨려 예수향기 날릴 수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또 성경에 벳세다 소년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오병이어를 자기만 먹었더라면 그것으로 끝날 뻔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주님 앞에 드렸을 때 오 천명이 먹고도 열두 광주리가 남는 오병이어의 이적 역사가 생겨나지 않았습니까? 이러한 이야기들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깨달은 자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이 시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을지어다.
둘 째 하나님 사랑의 축복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독생자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나타난 사랑입니다. 이 내용을 설명하는 대표 성경이 있다면 요3:16을 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하는 내용입니다. 여기 세상이 무엇입니까? 사랑 없음을 드러내는 하나의 용어가 되었습니다. 입 달린 사람이면 세상에 사랑이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 모두 사랑 없어 냉랭함을 아느냐♬ 너무도 답답한 사연의 찬송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찬송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이 사랑을 세상에 전파하십시다.♬이 사랑이 전파만 되면 보다 더 세상은 달라지게 될 것입니다. 사랑이 없어 싸움, 짜증입니다. 정신분석학자들의 통계에 의하면 정신병자의 대다수가 원인이 있는데 그 원인이 사랑의 결핍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정신적으로 안정을 잃고, 기쁨이 없고, 괜히 불안하고, 안절부절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안절부절 병이 있습니다. 40대에 접어든 한 부인이 믿음 있는 한 정신과 의사를 찾았습니다. '저는 이상하게도 일손이 잡히지 않아요. 집에 있으면 나가고 싶고 나가면 집에 들어가고 싶어요. 앉으면 서고 싶고 서면 앉고 싶어요. 울다가 웃고 그리고는 꿈자리가 사납고, 괜히 짜증이 나고, 불안하고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의사의 말입니다. 갱년기 증세인데 아무 병도 아닙니다. 염려하지 마십시오? 교회에 나가서 열심히 봉사해 보십시오. 전도하고 이웃을 사랑하다가 보면 절로 낫는 병입니다. 부인이 말합니다. '도대체 무슨 병입니까?'의사의 말입니다. '구태여 이름을 부친다면 안절부절 병입니다.'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안절부절 병에 걸린 성도는 있지 않습니까? 우리 주님 앞에 빈손 들고 나와야 합니다. 그리고는 안정, 평안, 사랑, 위로, 기쁨을 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얼마 전에 신문에 소개되었습니다. 정신병자 30대 남자가 어린이 놀이터에 들어가 놀고 있는 어린이 세 명을 이유 없이 칼로 찔렀습니다. 그는 경찰서에서 진술을 했는데 세상살기가 싫어 오전 8시 30분 경에 5층 아파트 앞에서 뛰어내려 자살하려고 했지만 혼자서 죽기가 억울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아이들을 죽이면 사형선고를 받을 것 같아서 죽였다는 것입니다. 정말 정신병자의 이야기가 아닙니까? 세상은 험합니다. 정신병 세상이기도 합니다. 왜 그럴까요? 사랑이 말랐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은 이런 질병을 고치는 단방약이라는 이야기가 바로 성경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요일4:9-10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고 했습니다. 그 아들이 세상에 오셔서 어찌했습니까? 가난한 사람, 불쌍한 사람을 사랑하였습니다. 나 같은 죄인을 사랑하십니다. 앉은뱅이를 일으키고 소경의 눈을 뜨게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수고하고 무거운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부르셨습니다. 문둥병자를 가슴에 안아주신 우리 주님이십니다. 그리고 그는 우리에게 기도와 응답을 주셨습니다. "구하라 그러면 주실 것이요" 그렇습니다. 우리의 기도가 공중에서 무산될 수 있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으리라" 보장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믿음의 백성들은 좌절당할 이유가 없습니다. 찬송하면서 용기 백배하면서 피곤해진 눈을 들어 하늘을 향하여 주님을 우러러보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롬8:38-39입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끊을 수가 없습니다. 사탄이나 마귀도 손댈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사랑을 배반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등지고 갈 때가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나의 등뒤에서 나를 도우십니다. ♬나의 등 뒤에서 나를 도우시는 주♬이 시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모두에게 있을 지어다.
세 번째 성령의 교통하심을 축복입니다.
'교통'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코이노니아'입니다. 교제, 동업 , 참여, 사귐등 여러 가지의 뜻이 있습니다. 성령은 이 교통을 통해서 우리 믿는 성도들을 가르치십니다. 그러니까 우리 모두는 성령 앞에서 유치원생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성령을 통해서 배워야 할 것입니다. 요14:26에 보면 "보혜사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보십시오?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도 예수님의 지난날의 말을 까맣게 잊어먹고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를 못할 때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오순절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서 예수님의 말씀이 기억나기를 했고 예수님의 말씀을 터득할 수가 있게 된 것입니다. 또 성령은 교통을 통해서 우리 믿는 성도들을 인도하십니다. 롬8:14에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자녀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우둔합니다. 그래서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인도하심을 구할 때에 성령께서 방황하는 우리의 발걸음을 인도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보십시오. 성령의 구름기둥, 불기둥이 광야 길을 인도해 주셨습니다. 이 성령의 인도함이 없었더라면 어찌될 뻔했습니까? 그래서 순종하며 따라갈 때는 노래를 부를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도함을 받으면서도 길이 험하고 괴롭고 목이 마를 때는 모세를 원망하고 하나님을 향하여서는 불평도 하였습니다. 다시 우리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선동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광야에서 방황하다가 죽고 말았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를 못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 갈 길이 피곤합니까? 방황하는 발길입니까? 그러나 '성령이여 오시옵소서'해야 합니다. 그리고 지도를 받아야 합니다. 한 걸음 한 걸음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 천국까지 갈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또 성령은 교통을 통해서 믿음 있는 성도들을 위로하십니다. 세상이 무엇입니까? 고난이 많은 세상이 아닙니까? 눈물, 아픔, 죽음이 있습니다. 그 질병이 없으면 얼마나 좋으련만 암 병, 당뇨병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는 동안 낙심 날 때가 있고, 괴로울 때가 있고,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흐를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여! 낙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보혜사 성령이 믿는 성도들 곁에 '보혜사' 이름 글자 그대로 위로의 영으로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말씀하십니다. "낙심하지 말라, 슬퍼하지 말라"뿐만 아닙니다. 우리를 위로해 주시고, 눈물을 닦아주시고, 용기를 북돋워주시고, 넘어졌을 때 일으켜 주신 다는 것입니다. 바울과 실라가 옥중에 갇혀 있습니다. 매를 맞아 상처가 나고 상처 난 부위가 부풀어오릅니다. 견딜 수 없는 깊은 밤인데 어떻게 옥중에서 찬송하고 기도할 수가 있었습니까? 성령께서 그들에게 위로, 힘, 용기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결국 옥중에서 나올 수 있는 축복이 열렸습니다. 간수장을 구원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성령의 교통하심이 없이 축복은 없습니다. 성령은 어디에서나 역사하십니다. 바람은 어디에나 있는 것처럼 성령은 어디에나 계십니다. 그러나 성령은 교회에서 더 크게 역사하십니다. 그리고는 성령은 예배드리는 시간에 더욱 강하게 역사하십니다. 미국이 어떻게 오늘과 같은 복을 받을 수 있었을까요? 역사적인 배경이 있습니다. 청교도들에 의해서 대륙이 발견되었을 때 발을 딛자마자 성전 건축부터 시작했고 그리고는 무릎꿇고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일부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경찰서, 감옥을 짓기 전에 예배드리는 성전을 건축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세계에서 으뜸가는 부강한 민족이 될 수 있었습니다. '성전을 건축하라 그리고 예배하라'누구의 분부입니까? 학개서 1:8이 답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분부하신 것입니다. 어찌 하나님의 분부를 준행하는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축복을 차단하시리요, 우리의 성전 건축이 완공될 때가 반드시 올텐데 그리되면 분명히 믿습니다. 신28장의 축복이 우리 모두의 것이 될 줄로 믿습니다. 그 복이 어떤 복입니까?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는 넘치는 복입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복을 받게 될 것이고 토지의 소산과 짐승의 새끼와 우양의 새끼까지 누리는 축복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고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아가도 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가정적, 교회적, 민족적으로 신28장의 축복을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예배를 드릴 때마다 본문의 내용과 같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의 축복을 우리 모두가 누릴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